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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견인 (3) 누가복음 10:17-20
양심을 비춰주는 성령의 일반적인 은혜 혹은 감동이 선행과 외면상의 종교생활을 하도록 만든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일반적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종종 엄격하게 행동하며 즐겨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에 나타난 복음의 약속과 구원 계획이 진실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상태에 알맞다고까지 생각되어 진리의 도덕적 힘에 근거한 신앙을 가지고 믿습니다. 이 신앙은 그것이 나온 그 마음의 상태가 계속될 때까지만 지속되다가 그 마음이 변하면 평상시의 무감각한 상태로 떨어져 신앙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돌짝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말씀을 받은 자란 곧 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시적인 신앙의 예는 성경에서나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 즉 일시적 신앙이 진정한 회심에 선행하거나 진정한 회심을 성취하는 수도 종종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진정한 회심이 뒤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일생에 몇 번이고 되풀이 될 수도 있으나 그들은 결국 이전의 무감각한 세속적 상태로 돌아가고 마는데, 이런 외부적인 신앙생활과 진정으로 중생한 성도의 신앙생활을 식별한다는 것이 타인은 물론 본인으로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저들의 열매로 저들을 알지니라.”는 주님께서 주니 말씀을 판단의 근거로 삼아야 하지만, 그것도 오랜 시간이 지나든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판가름이 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진실한 성도의 진위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권리입니다.
분명한 것은 알미니안 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이 참 성도가 구원의 은혜에서 아주 타락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현재의 구원에 대해서는 보증을 가질 수 있지만, 그의 궁극적 구원에 대해서는 다만 희망을 가지게 될 뿐입니다. 많은 훌륭하게 보였던 성도들이 타락하여 멸망에 빠지는 것을 볼 때에, 자기 자신도 그와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고는 장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성도의 장래는 그들의 연약한 의지에 따라 좌우될 것이므로 그 위치는 심히 불안하고 위험하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더 깊게 나아가면 알미니안 주의자들은 천국에 가서도 성결을 이루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얻은 사람은 그곳에서도 여전히 자유의지를 갖고 있어서 자신이 원하는 어느 때에든지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은 실패해도 자신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확신은 얼마나 무서운 망상인지 모릅니다. 이처럼 구원의 보증을 하나님의 수중에 두지 않고 사람의 수중에 두는 것이 바로 알미니안 주의입니다.
성도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는 보증이야말로 성도의 생활에 있어서 최대의 위안 중 하나입니다. 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지상에 있는 성도들의 가장 큰 기쁨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기만을 당하고 타락하게 될지 모른다고 믿는 자가 어떻게 진정한 기쁨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의 안전감이 단지 우리의 변하기 쉽게 동요하기 잘하는 성질에 근거하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성도의 특징이 내적 평화와 기쁨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성도가 궁극적으로 타락할 수 있다는 알미니안의 교리는 목적이 없는 곳을 항해하는 풍랑 속의 배와 같은 것입니다. 언제나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달려있지 않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불변하신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이 놀라운 궁극적 구원의 은총 교리를 바로 인식하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얻어지는 평안과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하나님의 수중에 있으므로 절대 안전하다는 것을 아는 칼빈주의자만이 성결하고 영화되게 하기 위해 자기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 안에서 택함을 받았으며 아무 것도 이 목적을 좌절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의 기쁨과 평화와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 배반에 대한 경고
알미니안주의는 성도의 배교 즉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나는 것에 대하여 성경이 경고하고 잇는 것을 증거로해서 성도가 궁극적으로 타락할 수도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성도가 타락해서 세상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서 떠나 단지 그들 스스로의 능력과 역량만을 생각할 때는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칼빈주의에서는 모두 성도들도 일시적으로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시인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에 가르치는 목적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첫째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 달성을 위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해서 하나님과 합력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즉 사람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겸손하고 각성하며 근면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자녀를 위험한 곳에 가지 못하게 하려고 할 때 자녀의 자발적인 협조를 구하기 위해 차도로 나가지 말라고 타이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사람에게 경고하는 것은 그의 타락을 허용하시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성도들이 타락하지 않게 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둘째 목적은 우리가 이 경고의 구절에 대해서 고려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어떤 행동의 의무를 우리에게 명하실 때는 반드시 우리에게 그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막12:30, 눅 10:27 )고 주님께서 명하셨는데, 또 다른 구절에서는 “내가 내 신을 너희 안에 두어 너희로 내 법을 행하게 하리라.”(겔 36:27)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자기모순을 행치 않는 한 이 둘은 양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사랑하라’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지킬 수 있도록 성령을 마음 속에 넣어 주셔서 ‘행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할 수 있는 능력을 성령께서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셋째 목적에서 경고는 성도에게 더 큰 믿음과 기도를 위한 자극제가 됩니다.
넷째 목적에는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보다는 의무를, 자신의 힘보다는 약함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섯째 목적으로는 성도로 하여금 성결의 필요성과 하나님께 대한 의존을 확실하게 알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목적은 불신자로 하여금 변명의 여지가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에게도 이와 같이 경고하고 하도록 하였으므로 믿지 않는 자로서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고 섬기지 않은 것에 대한 변병의 여지가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 견인에 대한 성경의 증거
롬 8:35-39 “~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고 하였고, 롬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요 6:47에서는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이미 영생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요 5:2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미 옮겨졌습니다.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내가 확신하노라.” 이 외에도 성경의 증거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칼빈주의의 다른 교리뿐만 아니라 ‘견인’ 또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의 전능과 동일하게 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보다 강하시므로 그의 보화를 빼앗을 자는 사람 중에도 없고 마귀 중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수중에서 성도 한 사람을 빼앗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늘에서 별을 하나 따는 것이 더 쉽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에 그들은 멸망의 위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음부의 문이 그의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한 성도라도 궁극적 타락을 할 수 있다면 원리적으로 볼 때 다른 성도도 그렇게 타락할 수 있다는 말이 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증은 공수표가 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며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읽는 사람으로서 편견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면 곧 택한 자들은 도저히 미혹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즉 ’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말은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거짓 그리스도, 거짓 선지자들이 아무리 큰 표적이나 기사를 보여주면서 성도를 미혹하려고 해도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과 성도 사이에 맺어진 신비한 연합은 성도들이 누리게 될 궁극적 은총을 보장해줍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고 말씀하셨으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의 확실한 부활에 택한 자들이 관련되어 결국 그리스도의 삶이 그들의 삶이 되고 말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며(롬 8:100,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며(갈 2:20), 그리스도와 성도는 마치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과의 관계처럼 공통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구원을 얻은 성도들 안에 계셔서 성도의 다함없는 능력의 창고가 되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으니라.”(엡 4:30)고 경고하였습니다. 배교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아 31:3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노라.” 이 말씀이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2개의 집에 대하여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마 7:24) 강조한 것은 반석(그리스도) 위에 세운 집은 인생의 폭풍우에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 보면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집을 일시적으로 방문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히 거하는 사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계십니다(롬 8:34. 히 7:25). 또한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의 항상 그의 기도를 들으십니다(요 11:42). 따라서 성도가 아주 타락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 주의는 이 두 구절 중 어느 하나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며,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 구약에서도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라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40)라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완전한 타락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돌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게 하여 그들은 그의 백성이 되고 그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에스겔 11:19-20)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장 확실한 약속이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재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리들이 견뎌낼 수 없는 시련에 봉착하지 않도록 하시는 것은 섭리의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물인 줄로 믿습니다.
살후 3:1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시 34:7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고후 4:8,9,14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리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특히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관한 구절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귀신이 그들에게 복종함을 인하여 기뻐하지 말고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생각하여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생명책은 영원불변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제정된 선민들의 명부이므로 그 이름의 수효는 증가될 수도 없고 감소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멸망할 자의 이름은 창세 때부터 이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후일에 말소해 버릴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시는 실수를 범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백성은 한 사람도 멸망 당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저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기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눅 10:20).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빌 3:20)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은혜 가운데 보호하여 주심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