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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월간 풀컨텍트가라데 2004년 12월 호
(월간 풀컨텍트가라데는 20년 역사의 일본 최고 권위의 가라데전문 잡지 입니다.)
진무관 가라데의 탄생 과정, 풀컨텍트가라데에서의 종합격투류 가라데로서의 기술적인 진화 과정, 진무관 주최대회인 전일본격투기 선수권대회의 탄생 과정과 룰의 변천사, 그리고 진무관 관원들에게 바라는 점에 대한 관장님께서 하신 인터뷰 입니다.
진무관 가라데 관장 혼카와 히로시 인터뷰
공수의 실전 성을 추구하고 시합에서의 안면 장타와 정권 지르기까지 도입한 계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Q 선생님이 격투기의 길에 들어온 동기를 알려주세요
고등학교에 들어 갔을 때 어떤 무도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연히 가까이 가라데 도장이 있어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Q 그때까지 다른 무도를 했었습니까?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보통의 평범한 청소년 이였습니다.
Q 활발한 편이였습니까?
역시 그랬던 것 같았습니다. 찬바라 (나무 막대기로 하는 칼 싸움 놀이) 하거나 친구들과 자주 많이 놀았습니다. 달리기가 빠른 편 이였습니다.
Q 가라데를 시작한 이유는 싸움에 강해지기 위해서 였습니까?
역시 그런 점도 있었습니다. 친구와 둘이 입관 했지만 그 친구는 금방 그만 두더군요. 그래서 저만 남고 지금 까지 왔습니다.
“무엇보다 가라데가 좋았습니다.”
Q 수련을 지속한 이유는 뭡니까?
좋아했기 때문 입니다. 그만두면 도장 선배의 이지메가 무서워서도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런 것도 있었습니다. 도장이 너무나 엄격하고 무서웠습니다. 대련 시 “너는 왼손 잡이냐? 오른손 잡이냐?” 물어보고 만약 오른손 잡이면 오른손에 수건을 묶고 안면이던 어디던 쾅!쾅! 때리는 도장이 였습니다.
부상도 아주 많았습니다. 갈비뼈가 부러지면 “그것은 강해지기 때문에 좋은 현상이다.”라고 스승님이 그랬습니다. 대략 그런 분위기의 도장이 였습니다.
Q 강한 사람만이 남을 수 있는 도장이 였군요?
그랬습니다. (그만두거나 다른 것을 하거나 상관 없다. 같이 가라데에 전념할 사람만 동참해라 하는 식의 도장이 였습니다.) 그런 분위기의 도장이 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도장생이 많이는 없었습니다.
Q 그때 시합 출전에 대한 마음이 있었습니까?
네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젊을 적에는 풀컨텍트 스타일의 시합이 존재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있다고 해도, 먼 도쿄에서의 극진 시합 뿐 이였습니다.
그래서 30살이 넘어서야 시합에 출전 했습니다.
Q 그런 점 때문에 도장 밖에서 싸우거나 하는 일이 있었습니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다 잊었습니다. (웃음)
Q 어떤 훈련을 하셨습니까?
훈련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 했습니다. 오늘은 1미터 정도의 풀(일본의 키가 큰 잡초 풀 휘청거리는 풀의 일종)에다가 로우킥으로 이 풀이 쓰러질 때까지 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수없이 로우킥을 연습했습니다.
나무의 잎이 다 떨어질 때까지 킥 연습을 하겠다 각오 하고 진짜로 그렇게 했었습니다. 휘청이는 키가 큰 풀이 부러질 때까지, 나무의 잎이 다 떨어질 때까지 했었습니다.
(스스로 각오를 정해서 오늘을 1000개의 하이킥을 할 때까지 절대 그만두지 않겠다.) 라고 정해서 훈련하는 혼자 하면 힘이 듭니다. 하지만 산에 혼자 올라서 나무를 정해서 잎을 다 떨어 뜰이기를 각오하면 그다지 훈련이 힘들지 않습니다. 단발로 잎이 다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때는 기분이 “좋았어!” “오늘은 돌아가서 맥주를 마시겠다.”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웃음). 실지로 그렇게 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 4시간 5시간 해도 잎을 다 떨어 뜨릴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너무 지쳐서 발이 올라 갈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인간은 원래 게으르지 않습니까? 혼자 할 때 4시간 연속 킥 연습 하겠다고 정해도 아무도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앞차기의 중요 점.
Q 선생님의 특기는 무엇입니까?
앞차기가 특기 입니다. 무릎 차기라면 무릎, 돌려 차기라면 정강이, 뒤돌려 차기라면 뒤꿈치, 앞차기라면 엄지발가락과 검지 발가락의 아랫부분인 주석부위를 먼저 단련 해야 합니다. 그 부위의 단련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은 주석의 각도를 정확하게 차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발가락을 완전히 뒤로 젖히고, 주석부위로 정확하게 가격을 해야 부상도 줄이고 100%의 힘으로 공격할 수 있습니다. 저는 발가락을 확실히 뒤로 젖히고 차기 때문에 K.O.를 할 수 있습니다.
상대의 팔꿈치나 무릎에 발가락이 부러지는 것이 무서워서 주석을 차지 않고 발목의 각도를 위로 틀어서 발바닥으로 차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힘이 상대에게 전달 될 수 없습니다. 발가락을 완전히 뒤로 젖히고 창으로 찌르듯이 차면 앞차기로도 K.O.가 가능 합니다. 실지로 여러 번 K.O. 시켰습니다.
Q 안면에 겨냥해서 앞차기를 했습니까?
안면을 겨냥 하기 보다는 쇄골 근처를 겨루고, 찹니다.
앞차기는 발목을 펴서 차지 않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오키나와의 가라데 류파 중 엄지 발가락과 검지 발가락을 겹쳐서 그 끝 부분으로 허벅지 안쪽의 급소를 겨냥해서 차는 곳이 있는데 무섭습니다. (웃음) 실지로 ‘누키테’(눈 찌르기)를 안면에다가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과거 오키나와에는 여러 번 훈련을 하러 갔었습니다.
오키나와에는 그 당시에는 도장 깨기를 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재미있었습니다.
한번은 사람들과 연습 중에 세가타 산시로(일본 유도만화 캐릭터)같은 사람이 도장에 막대기를 들고 도장에 들어와서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Q 학생시절이 끝난 후 일을 하시면서 가라데를 계속 하셨습니까?
네 그랬습니다. 그래서 연습시간이 줄었습니다. 일주일에 매일 하던 수련 중 하루 정도 수련이 줄었지만 계속 했습니다. 마침 매일 하고 있는 가라데 수련을 더 하기 위해서 회사에 가라데 모임을 제가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진무관 가라데의 기초가 됩니다. 그 모임이 커지고 지부가 되었습니다. 1976년 이름을 진무관으로 바꾸고 독립했습니다. 이후 30년이 흘렀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라데에 전념
Q 진무관 창설의 멤버였던 모임은 어땠습니까?
초기에는 멤버는 3명 이였습니다. 오른손 잡이는 오른발과 오른 손에 수건을 감고, 한 사람이 K.O. 당할 때까지 쿠미테(스파링)를 하는 훈련을 매일 했었습니다. 한 명은 지금은 독립했습니다. 또 한 명은 지금도 매달 진무관 정규 회의에 꼭 출석해서 내장 트레이닝을 하고 아침 새벽에 돌아 갑니다. 지금은 육체적인 훈련은 하지 않지만 내장 단련(술)에만 꼭 참가 합니다. (웃음).
그 3명이 초기의 멤버 입니다. 제가 회사에 들어가서 몇 년이 지나서 계장이 될 때가 되었지만 제가 계장이 되면 가라데도 못하고 다른 일도 역시 못하기 때문에 (저는 평사원으로 열심히 할 테니 승진은 괜찮습니다. 후배의 명령도 잘 듣고 일하겠습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회사의 조직에서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날 밤을 꼬박 생각을 했습니다. 아침에 결론은 일본속담에 있듯이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하면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결국은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31살 결혼을 할 때까지 아르바이트하면서 가라데를 연습했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아르바이트도 다 그만두고 가라데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아마 아르바이트를 계속 했었다면 지금까지 가라데를 않했을수도 있었겠습니다. (결심했었습니다. 더 이상 가라데 관련일 외에 다른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라고 결단 한 때부터는 가라데에 더더욱 집중 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웃음)
그때부터 한 것을 고생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제가 좋아하는 것을 했기 때문에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결정이 였습니다.
회사를 그만둔 후에는 가까이에 농장의 오두막집을 빌려서 14명의 도장생과 같이 연습도 했었습니다. 그 후 현지에서 본부도장을 개설했습니다.
Q 도장생을 지도 하면서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있습니까?
어린이 지도가 가장 어렵습니다. 성인은 이미 목적을 갖고 오니까 그 사람의 목적을 지원해주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장래가 있으니까 지도가 나쁘면 그것이 나중에 어떤 방향으로 갈지 모릅니다. 어린이 지도는 정말로 어렵습니다. 아이들을 지도하는 것은 더 어렵고 책임이 무겁습니다. 지도의 방법에 의해서 어떤 사람이 될지 모릅니다. 그 때문에 항상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린이 대회로는 규슈대회를 계속 했지만 20회를 마지막으로 어린이 대회를 멈추었습니다. 최초에는 어린이 대회에서 성인 대회로 발전하는 것을 생각했는데, 어린이 대회는 너무 빠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여기 저기서 어린이 대회를 하고 있지만 저는 (청소년 육성에 진짜로 필요한가?)라고 다시 고민 했습니다. 도장 안에서 우승한 어린이는 빛이 납니다. 실지로도 아주 강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꼭 이기지 못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불쌍하게도 많이 맞고 지기까지 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아이들이 어른들에 의해서 한 것이지만 과연 이것이 과연 청소년 육성에 필요 한지 다시 생각하게 되어서, 그만 한다. 이렇게 결정했습니다.
청소년의 대회를 하는 것은 확실이 이것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확신이 오지 않습니다. 우승하고 상위에 입상한 아이들은 진짜로 자신을 가지고 생활도 연습도 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이의 교육은 이보다 더 복잡합니다.
Q 지금은 어린이들에게 어떤 목표를 주려고 지도 합니까?
저희들은 도장은 강해지기 위해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기술적으로 높아지라고 강요 하지 않습니다. 체력을 키우고 원기 넘치고 예의 바르고 큰소리로 훈련을 하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 합니다. 항상 꼭 잘할 필요도 없습니다. ‘강한 사람이 되어라’ 이렇게 가르칩니다.
맨 얼굴 맨주먹의 유래
Q 진무관의 룰은 어떻게 변화 되었습니까?
제가 최초에 입문한 도장은 왼손이나 오른손에 수건을 묶고 안면공격을 하고 수련했지만 시합에서는 보호구를 끼고 했었습니다. 그 후 풀컨텍트룰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풀컨텍트룰로 하던 중에 진무관 가라데는 호신술적 측면이 있기 때문에 (“안면 공격 없이 호신술이라고 해도 괜찮은가?”)라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 당시 ‘오니시상’이 극진을 탈퇴 후 안면에 장저(손바닥)를 써도 괜찮은 룰의 대회를 하겠다고 하는 것이 격투기 잡지에 나왔습니다.
오니시 야스토씨는 극진 제 15회 전일본왕자로 혼카와 관장님과 같은 규슈지역의 고향 사람 입니다.
그 것을 보고 바로 이것이다! 이것을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던 중에 마침 대회장에서 오니시씨를 만나서 의기투합을 했습니다. “오니니씨는 오사카에서 전일본격투기 선수권을 저는 규슈에서 하는 큐슈대회를 하겠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 하던 중에 오니시씨가 시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혼카와상 이제 큐슈에서 전일본대회를 맡아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3번째 큐슈대회부터 전일본격투기선수권으로 바꿨습니다. 그 때부터 18년간 장저공격을 채용한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추가설명: 판크라스의 손바닥 가격 룰이 나오기 9년 전 있었던 일입니다.) 그 후 2003년부터 안면 정권공격도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룰도 선수들 사이에 적응이 되었고, 무엇보다 심판들의 역량이 높아졌습니다. 부상도 많이 줄었습니다. 풀컨텍트룰의 가라데 대회도 과거부터 쭉 해왔지만 2년 전 30회를 마지막으로 그만두었습니다. 이유는 가라데 도장이지만 더 종합적이고 실전에 가까운 룰을 인식한 시합을 하기 위함 이였습니다.
Q 맨손 맨 얼굴 정권을 허용하는 가라데 류 파는 다른 곳에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장을 졸업한 의사 분이 정권이라면 표면적인 데미지는 있지만 내부적 데미지는 글러브에 비해서 적다라고 했습니다. 현실적인 예를 들면 12온스의 글러브를 끼고 기와를 10장 겹치고 치면 대부분 맨 아래부터 격파가 됩니다. 그 정도로 뇌에 진동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맨손으로 기와를 치면 항상 맨 위부터 격파 됩니다.
그래서 의사 분은 맨주먹은 피부에 멍이 들거나 상처가 날수는 있으나 보다 안전하다라고 했습니다. 선수들도 맨손 맨얼굴 가격 룰에 익숙해져서 “정권은 무섭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공격을 받는 사람도 하는 사람도 서로 익숙해지면, 위험하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시 진무관 가라데는 호신술이기 대문에 가장 실전에 가까워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어떤 국면에서도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가라데 아니면 안됩니다.
Q 타격뿐만 아니라 ‘쿠미와자’ (그래플링)도 많이 수련 하는 것 같습니다.
역시 다 그래플링을 열심히 연구 합니다. 하지만 저는 타격으로 K.O. 시키는 것을 좋아합니다. (웃음) 선수들은 그래플링 연습도 잘하고 연구도 잘합니다.
Q 판크라스나 프로 대회에 제자들을 보내고 있는데요?
잘 훈련된 제자라면 별로 상관 없습니다. 저는 많이 시합에 나가라고 합니다. 공부한 후 시험과 같은 것 입니다. 공부만 하고 시험을 보지 않으면 진짜 능력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복습도 해야 합니다. 저는 스타일이 맞는 시합이라면 많이 나가라고 합니다. 물론 새로운 수련 생이 시합에 나간다고 하면 “하지마!” 하고 혼내지만. (웃음) 역시 선수끼리 실력을 향상 할 수 있는 시합이라면 ‘허가’ 안에서 출정하는 것을 권합니다. 승부는 있지만 승부에 대해서 많이 걱정을 하지는 않습니다. 많이 응원해줍니다.
정신력의 강함이 가장 중요하다.
Q 진무관에서 중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시합을 하는 것은 정신력이 가장 중요하니까 심신의 단련에 힘을 쏟습니다. 시합에서는 근성 60% 기술30% 그 시합 당시의 운 10%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신력의 강화를 위해서 하계훈련이나 동계훈련 시에 폭포에서 물을 맞는 훈련으로 정신력을 강화 합니다.
Q 활약하는 선수들은 “정신력”이 강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보시면 알 수 있지만 보통 청년인데 시합 때에는 그의 투쟁 심이 보통사람의 몇 배가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역시 격투기는 기술보다 정신력의 단련이 중요 합니다. 항상 말하지만 무술의 上手(고수의 일본식 표현)가 되었다고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상수와 강하다는 같은 뜻은 아니다. 상수와 강하다는 반비례도 아니지만 정비례도 아니다. 라고 지도 합니다.
Q 입문 할 때에는 보통 사람이었지만 탑 클래스 선수로 된 사람도 있습니까?
네 몇 명 있습니다. 역시 탑 클래스가 된 선수는 도장수련도 잘하지만, 연구나 연습을 많이 하는 공통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Q 가라데 생활 중 좋았다고 생각 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장을 개설한 수에 많은 도장생이 있었습니다. 그런 도장 생들이 자신감과 긍지를 갖고 생활 하는 것을 보면 보람이 있습니다. 더불어 여러 방면에서 아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자가 도장에 찾아올 때 즐겁습니다.
Q 선생님의 자제분들은 가라데 지도를 하십니까?
아들이 초등학생 때에는 강제로 가르치고 그 후에는 자유로 결정하게 했습니다. 지금은 고등학교를 졸업 했습니다. 초등학교 이후에는 다른 클럽 활동을 했기 때문에 섭섭한 점도 있었습니다. (웃음) 하지만 다행입니다. 진짜로 좋아하지 않으면 고생스럽기 때문입니다.
Q 선생님이 풀컨텍트 가라데에서 격투기로 가는 과정에서 그래플링까지 포함 하셨는데 유도를 하셨습니까?
유도는 5년 정도, 복싱은 2년 정도 했습니다. 과거에는 전통 슨도메 가라데도 역시 했었습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실전 가라데 훈련이 주체에 있었기 때문에 전통 슨도메 가라데 쪽으로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 오니시상 과 만남으로 (바로 이거다!)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 후 슈토 회장인 사쿠라다씨, 슈토 프로듀서인 사카모토씨, 파레스트라의 나가이 유키씨가 현역 선수 시절 몇 번씩 도장에 와서 관절 기 지도를 해줬습니다.
사회인의 모범이 되어라.
Q 이제 앞으로 진무관을 이렇게 하고 싶다거나 하는 것 이 있으십니까?
여러 가지 종합 룰의 시합을 봤는데 타격 계 선수가 불리해지는 것이 역시 많습니다. 기술적인 면부터 말하면 역시 진무관은 가라데 도장이기 때문에 종합격투기 시합에서도 타격으로 이길 수 있는 기술을 연구 해서 그 쪽에서 발전한 도장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 합니다. 기술 적인 면만 말한다면 그렇지만, 요즘 같이 각박한 사회에 의와 인정을 갖고 공수가로서 예의를 지키면서 사회에 모범이 될 수 있는 도장 생이 1명이나 2명이라도 늘어 나면 기쁘겠습니다.
월간 풀컨텍트가라데
혼카와 관장님 인터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