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무거운 짐. 마태 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사막엔 낙타가 있다. 낙타의 얼굴은 모래바람을 견딜 수 있도록 눈썹이 길고 눈두덩이 두껍다. 허파를 보호하기 위하여 코에 예민한 근육이 발달돼 있어 미세한 모래 바람도 막아준다. 두꺼운 가죽과 고급진 털은 낮의 태양열과 밤의 추위를 견디게 한다. 넓고 부드러운 발바닥은 모래에 빠지지 않는다. 낙타는 물도 음식처럼 되새김질을 한다. 두 번 먹고 마시는 것과 같다. 마른 가시덤불도 비스켓처럼 씹어 삼킨다. 항상 장운동을 시켜서 장에 지방이 없다. 대신 등에 40kg의 지방을 축척하는 혹이 있어, 먹지 않고도 40일을 견딘다. 낙타는 사막 생존에 적응이 되어 있다. 그런 낙타는 평생 남의 짐만 지고 사막을 걷는다,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다. 주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마구간에서 출생하셔서 집 없는 자들의 서러움을 아신다. 애급으로 망명 가셔서 쫒기는 힘없는 자의 고통도 아신다. 일찍 소년 가장이 되셔서 청년실업을 아시고, 인생의 가난을 아신다. 줄기차게 인생을 잡고 자식들을 키워내는 어머니의 질고를 아신다. 비리로 덮고 사는 권력층의 사악함도 아신다. 투쟁하지 않으시고 가르치셨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들의 짐을 지셨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종교 율법에 얽매어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아니다. 인생의 짐, 삶의 짐, 노역의 짐, 질병의 짐, 양심 가책의 짐. 두려움과 공포의 짐을 맡기고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가볍게, 신나게, 찬양하며, 감사하며 동행하는 삶이다. 할렐루야!
Ⅰ. 예수님은 인생고를 짊어지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한 마디로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해결 못하신 질병은 하나도 없었다. 대개 죄로 인해 척박해진 가시와 엉겅퀴, 잡초와의 싸움인 인생고이다. 병충해 방제와 잡초제거, 가뭄, 홍수 등 농부가 견뎌야하는 고초는 어떤 직장에나 같은 무게로 조여 온다.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사탄의 공격을 받았다. 광야로 나갔다. 무엇으로 싸우셨나? 금식기도다. ‘아들의 특권’으로 ‘돌의 기적 떡’을 유혹했지만 말씀으로 물리쳤다. 세 가지 시험은 치명적인 인생고다. 그리고 가시는 곳마다 죄에 묶인 자, 질병에 시달리는 자, 사탄에 결박된 자를 풀어 주셨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이 땅에서 오래 사는 것보다 천국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오래 사는 것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죽는 것도 뜻이다.
Ⅱ.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셨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어린 양!’ 구약의 아사셀 양이다. 성경엔 ‘아사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미드라쉬를 보면 ‘천지창조 전’ 하나님을 받들어 모시는 천군과 천사와 찬양 천사 루시퍼가 있었다. 찬양의 인기는 대단했다. 교만에 빠진 루시퍼는 세력을 모았다. 하나님의 단호한 조치는 몽땅 흑암에 가두었다. 모두 통회자복 했는데 아사셀 만은 고집을 세웠다.
해마다 속죄일이 되면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레16:10) 수 염소 두 마리를 골라 한 마리는 아론을 위하여 잡고, 다른 한 마리에게 백성들의 모든 죄를 머리에 얹어 광야로 내몬다. ‘아사셀 산’이다. 나그네의 우물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지름길에 있다. 고집스런 우리 죄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셔서 죽으신 예수님은 아사셀 양이다.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대속자이시다.
Ⅲ. 예수님은 인생들의 저주를 짊어지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막달라 마리아 속에 있던 7 귀신을 추방해 주셨다.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여 주셨다. 돌로 쳐 죽이려는 간음 현장 여인을 살려주셨다. 귀가 잘려진 말고의 귀를 붙여 주셨다. 죽어가는 가버나움 백부장의 하녀를 살려 주셨다. 손 마른 병자, 앉음 뱅이, 한센병, 귀신들린 자들을 다 고쳐주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소의 멍에는 어께 걸이이다. 목을 조르지 않고 온 힘을 어께에 모아 마차를 끌 수 있다. 맨 등에 짐을 지워봐라, 목이 졸리고 등이 까진다. 그러나 ‘십자가’라는 멍에는 지게처럼 가볍다.
어느 날 새가 생각하기를 ‘날개에 긴 깃이 거치장스럽게 느꼈다. 그래서 긴 깃털을 뽑아 버렸다. 그리고 몸을 날려서 공중에 솟아올랐다.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을 하고 말았다. 긴 깃은 무게가 아니라 도구였던 것이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
모세는 동족이 노예로 고생할 때 궁중에서 왕자로 고급지게 컸다. 통치교육, 지배교육, 정복훈련을 받으며 세상 최고의 생활을 누렸다. 철들은 40에 동족이 노예임을 알고 챙긴다고 배운 완력을 쓰다가 ‘살인자’로 추방된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를 하며 동족의 학대를 보고만 계시는 하나님께 울분만 삼켰다. 80이 되었을 때 불붙은 가시떨기나무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너는 애급으로 가서 내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라." "제가요? 추방된 애급으로 돌아가요?" "하실 거면 내가 애급 왕자로 - 전방 사령관으로 있을 때 시키시지 … 애급기질을 다 아는데, 말로 통할 놈들이 아닌데… " 말도 안 돼. 거절.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시며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먼지 하나 남김없이 다 내려놔야 쓰신다. 나를 안다는 것, 쉽지 않다. 그것도 내려놔야. 애급을 안다는 것도 내려놔야. 메마른 지팡이를 들고 갔다.
동경의대 - 교수- 병원장이 된 나구모 요시노리 박사는 <병들고 망가진 세포들을 수리하는 유전자인 시르투인(Sirtuin)>을 소개한다. 우리 몸에는 대략 50조의 세포가 있다. 뼈세포는 석 달, 간세포는 3일 재생된다. 그 중에는 불량 세포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면 곧바로 시르투인 유전자가 치료하고 수리한다. 이 유전자의 활략에 따라 건강이 좌우된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맡은 유전자가 ‘위장에 음식이 없을 때에만 활동한다.’는 것이다. 장에 음식이나 기름이 차 있을 때 시르투인 유전자는 요지부동이다.
그래서 그는 <일일 일식>이란 책을 내고, 하루에 한번은 꼭 위장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고픔을 느끼는 시간을 가지라고 권고한다. 공복이 시르투인 유전자가 맹렬히 활약하여 병든 세포들을 치유 회복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 몸도, 생각도, 세상의 염려, 육신의 정력, 이생의 자랑 등이 있으면 주님이 져 주실 수 없다.
주의 날! 무거운 짐들을 다 싸들고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오라. 주님에게 맡기고 쉼을 얻으라. 예배의 참 안식만이 병든 유전자를 치료할 수 있다. "이날은 주의 날 일세!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그 순간이 안식하는 날이다. 우리 예배는 내 영혼이 참 안식하는가? 성경말씀이 육신이 되어 무거운 짐을 내려놓게 하는 축복이다. 아사셀 양이신 주님이 오늘도 우리의 짐들을 지시려고 오셨다. 할렐루야! 이 메마른 광야 같은 세상에서 주님께 내 짐을 맡기자. 그리고 내 멍에를 메고 주님을 따르자.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