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亭序(난정서) / 王羲之(왕희지)
중국 역사상 명필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분이 동진(東晉)의 왕희지 (王羲之, 301~361)입니다. <난정서(蘭亭序)>는 그가 남긴 행서첩으로 천하제일행서 (天下第一行書)라 하지요. 난정서에는 재미있는 일화도 많고 내용도 좋아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난정서 문장의 독해 이전에 먼저 왕희지에 관한 역사적 배경과 이야기들을 간단히 정리하였습니다. 워낙 연구가 많이 된 분야라 자료가 풍부하지만 아주 오래 전이라 명확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 자료들을 참조, 가장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들과 꼭 알아야 하는 일 위주로 간단히 요약했습니다.
중국 남북조시대에 남쪽에 있던 동진(東晉)의 다섯 번째 임금 목제(穆帝)가 즉위한지 9년이 되던 해인 영화(永和) 9년, 서기 353년 음력 3월 3일, 당시 우군장군(右軍將軍)이던 왕희지는 자신의 아들 7명을 포함한 당시의 명사 40명을 절강성(浙江省) 소흥현(紹興縣) 난정(蘭亭)에 초청해 대규모 연회를 열지요.
이러한 연회는 동진(東晉)시대 귀족 문화의 하나로 사족(士族) 간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주 열리곤 했는데 이날의 모임은 삼월 삼짓날 계사(契事)의 형식을 빌린 모임으로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였습니다. 유상곡수의 연회는 작은 계류를 인공으로 만들어 놓고 둘러 앉아 물에 떠내려 오는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시는 놀이입니다. 경주 포석정이 유상곡수의 놀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라 왕실의 별궁에 있었던 포석정은 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즐기기 위해 만든 것으로 왕희지의 연회 이후 약 300년 후인 7세기경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것이 일본에도 있으니 중국 동진의 귀족 문화가 그 옛날에도 신라와 일본에 전파가 되어 유행했던 모양입니다. 통신과 교통이 불편한 시대에 문화의 교류가 이렇게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당시 참석한 사람 중 26명은 시를 지었고, 나머지 15명은 시를 짓지 못해 벌주를 마셨다고 전합니다. 이날 지은 시는 모두 37수였는데 이를 모아 철(綴)을 하고, 그 서문을 왕희지가 썼는데 이것이 바로 <난정서>입니다. 본문 보다 왕희지의 서문 하나로 그날의 모임은 역사에 길이 남게 됩니다.
당(唐)나라 때 하연지(何延之)가 쓴 난정기(蘭亭記)를 보면, 당시 왕희지는 술이 취한 상태에서 28행, 324자를 한 순간에 써 내려가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고 하는데, 글 중에 갈지(之)字가 24자나 들어갔으나 한 글자도 똑 같이 쓴 글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저도 난정서 탁본 사진을 자세히 보았는데 정말 전부 다 다르게 표현했으니 그 심사의 치밀함이 대단합니다. 왕희지 본인도 술이 깬 후 수 십 번을 다시 써 봐도 이에 미치지 못하여 "神의 도움을 받았다"고 스스로도 감탄하였고, 이 난정서를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난정서는 가보로 내려와 그의 7대 손인 지영에게 전해졌으나, 승려였던 지영은 후손이 없어 제자인 변재에게 이를 물려주었습니다. 왕희지의 글씨를 좋아했던 당 태종 이세민은 변재에게서 난정서를 얻고자 했으나 얻지 못하자 사람을 보내 훔쳐내게 하여 결국은 손에 넣게 됩니다. 또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 등에게 임모(臨摹, 똑 같이 모방)를 하도록 명령하여 여러 필사본을 만들어 황손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서기 649년 당 태종이 죽을 때 난정서를 자신의 무덤에 같이 넣을 것을 유언으로 남겨 난정서는 부장품으로 당태종의 묘인 소릉(昭陵)에 같이 순장됩니다. 그리고 약 300년 후 당나라 말기 혼란기에 절도사였던 온도가 소릉을 도굴하여 부장품들을 훔쳐가는 일이 생기는데 난정서도 이 때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고, 지금까지 난정서의 진본이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중국에서는 난정서를 돈으로는 도저히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없다 하여 무가지보 (無價之寶)라 부르며 국가적 보물로 여기지만 원작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는 전설 속 작품이 되었지요. 원본을 필사한 유명한 임모본(臨摹本)이 무수히 있지만 이들 필사본들의 글씨체가 조금씩 서로 다른 지라 원본의 글씨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학자들은 당나라 풍승소 임본이 가장 원본에 가까울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북경 고궁박물원에는 여러 종류의 난정서 필사본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당나라 임모본들, 원나라 때 조맹부가 쓴 모본, 송나라 구양수의 임사 정무본(定武本)등이 현존하는 대표작으로 북경 고궁박물원에 소장돼 있습니다. 그 외에도 수나라 개황, 송나라 때 인종, 청나라 강희 황제가 쓴 모본도 박물관 소장되어 있습니다.
난정서는 서기 353년, 지금으로부터 약 1670년 전의 글씨입니다. 이후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글씨를 본받아 연습하고 필사하여 왔습니다. 또 원본이 사라지고 나니 신비감도 더하여 난정서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지요. 어떤 사람들은 난정서의 글씨는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데 천하의 권력자인 당 태종이 좋아하니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할 수 있었겠는가 하고 의문을 품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난정서는 왕희지의 글씨가 아니고 그의 7대 손 지영이 쓴 작품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난정서의 진품을 입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지요.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난정서에는 무언가 사람을 끄는 힘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글씨와 문장을 따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글씨를 잘 몰라서 왜 천하제일인지는 알아볼 안목은 없지만 난정서 문장에 대한 제 개인적 소감은 중국의 다른 명문들에 비해 그리 잘 짜여진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끄는 묘한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고 구성한 것이 아니라 단숨에, 약간의 술기운과 함께 써 내려간 글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한유의 글처럼 깊은 철학과 생각을 기승전결을 잘 구성하고 짜임새를 중요시하는 문장들도 좋지만 이런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쓴 글도 참 좋습니다.
…
난정서 원문과 번역을 아래 정리했습니다. 번역은 여러 자료를 참조했고 최대한 원문의 순서를 따르지만 뜻의 전달이 쉽게 의역을 조금 첨가하였습니다.
永和九年(영화구년) 歲在癸丑(세재계축) 暮春之初(모춘지초) 會於會稽山陰之蘭亭(회어회계산음지란정) 修契事也(수계사야)
영화 9년 계축년 늦은 봄 초에 회계산 북쪽 난정에 모였는데 계사를 지내기 위함이다.
[출처] 蘭亭序(난정서) / 王羲之(왕희지)|작성자 bellevue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