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증선생 고택은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노성산의 남쪽 자락에 자리잡았다.
선생이 생활하던 원래의 살림집은 인근 병사마을, 유봉이라 불리던 곳에 있었다.
1681년까지도 유봉에 살았다고 하며 윤증선생의 말년인 1709년에 교촌리 현재의 집과
월명동의 종가와 함께 지어졌다. 고택의 서쪽에 인접하여 '노성향교'가 자리잡고 있고,
동쪽 능선을 넘어 공자의 영당인 '노성궐리사'가 자리잡았다.
뒤의 노성산 정상부에는 백제 때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노성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고택 앞 남쪽 작은 언덕이 안산을 이루며, 안산에는 인공으로 조성된 소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어,
외부로부터 집 전체가 노출되는 것을 살짝 가려주고 있다.
또한 안산에는 윤증 모친의 정려각(호란 때 윤증일가는 강화도로 피신했으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빠져 나오기를 시도했다. 가족 대부분이 청군의 포로로 잡히기도 했고,
모친 공주 이씨는 자결하여 정조를 지켰다.)이 있었으나 터가 좋지 않아서 집안에 우환이 많다고 하여
정려각의 위치를 옮겼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사대부 가옥들이 읍내에서 반나절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독자적인 근거지를
운영했던 것과는 달리, 윤증고택은 노성읍내와 불과 500m도 떨어져 있지 않다.
그만큼 향리의 실질적, 상징적 중심으로 자리매김 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위치뿐 아니라 주택의 구성도 향리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다.
비록 마을의 제일 끝 깊숙한 곳에 위치했지만,
사랑채 앞 넓은 마당에 연못을 조성했고, 석가산과 우물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일절 담장이나 별도의 경계물을 두지 않았고, 꽃나무들로 아늑한 분위기만 조성했다.
네모난 연못은 향교 앞까지 걸쳐 있어서, 이 집에 소속되었다기 보다는 노성면 전체를 위해 제공하려는 의도가 명확하다.
사랑 앞마당은 마을에 개방되어 향교에 오는 참배객들의 공동 광장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담장과 행랑을 둘러 안채만 보호하고 나머지 영역은 과감히 향리에 공개하고 있다.
향리의 지도자로서 자부심과 자신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구성이다.
윤증고택의 개방성은 세도가의 강요된 위세가 아니라, 윤증이 평소에 주력했던 향촌민의 교화와
보살핌에서 얻어진 자연스러운 카리스마 때문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향촌에 공개해도 부끄럽거나 감출 것이 없다는 철저한 예학자적 자신감의 결과일 것이다.
고택은 앞의 사랑채와 안쪽의 안채, 그 사이의 행랑채로 구성된다.
아울러 사랑채 뒤쪽 동편 높은 곳에 사당채 영역이 별도로 조성되었고, 안채의 서쪽에는 곳간채가 숨어있다.
그것이 전부다. 적어도 열채 이상의 건물들로 이루어지는 경북일대의 사대부가와 비교되고,
같은 지방인 대전의 쌍청당이나 동춘당 들과 비교해 보아도 매우 청빈한(?) 주택 규모다.
윤증이 일생의 신조로 삼았던 '예'란 성리학적 명분만이 아니었다.
그를 비롯한 17세기의 예학자들에게 '예'는 근복적인 철학이요,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훈련 방법이었다.
수양을 통해 도달하려고 했던 이상은 일상적인 풍요가 아니었다.
의식주와 같이 일상적인 삶은 극히 청빈해야 했고, 그 속에서의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구가했던 것이다.
윤증이 살던 유봉의 고택은 "겨우 초가삼간이었고
그나마 무너져서 긴나무로 떠받쳐 지탱하였지만, 선생은 그 가운데 거쳐하면서도
책이 선반에 가득차 있었고 제자들이 나열해 모셨다.
" 한가지 반찬과 보리밥에 나물국만을 고집했으며, 그나마 봄 여름 해가 긴 날에도 두 번만 식사했다.
아들들이 고위관직에 나아가 부양할 때도 이 습관을 고집했다. 그의 일상적인 청빈은 가난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비록 벼슬을 위해 향리를 떠난 적이 없지만, 정승에 임명될 정도였고, 역대 집안의 재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의 주택은 비교적 작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안채 대청은 5 X 2칸의 10칸으로 무척 넓다.
넓은 대청으로 인채 마당도 넓어지고, 밝고 시원한 공간을 가지게 된다.
밝음과 평온함이 윤증고택의 대표적인 인상이지만, 이를 위해 대청을 넓힌 것은 아니다.
대청의 넓이는 제사 때 참례하는 인원에 비례한다. 윤증가의 제사 참례인원은 줄잡아 오십여명은 되었을 것이다.
제사 인원에 맞추어 대청의 크기를 정하는 것을 비경제적이라 평가해서는 안 된다.
당시 종가집들의 제사는 일년에 십여차례 일어나는 극히 일상적인 행위였고,
주택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계획인자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숙해 있는 한옥의 구조, 즉 안채와 사랑채의 분리, 가묘(개인집의 사당)의 발달 등은
조선조 중기 성리학적 규범이 지방사회를 지배하면서, 특히 17세기 이후 '가례'와 같은 예학이
강력한 사회 규범으로 자리잡으면서 정착된 것들이다.
특히 남자와 여자의 공간을 분리하는 주생활 규범은 조선 초까지만 해도 잘 지켜지지 않아서
강제적으로 시행한 노력 끝에 16~7세기에 와서야 일반화된 내용들이다.
윤증고택을 이루는 두 개의 중심영역은 안채와 사랑채다.
두 건물 사이는 기다란 행랑채와 담장으로 차단되어 있다.
사랑채는 바깥세상에 공개되고 당당한 형태를 갖지만, 안채는 완벽히 폐쇄되고 무표정하다.
사당채의 발달과 함께 이러한 안채와 사랑채의 대조적인 구성이 예학자들이 추구했던 '주택의 예'인 것이다.
윤증고택의 첫인상은 넓은 마당 끝에 우뚝 자리잡은 사랑채의 단정함이다.
뒷면의 긴 행랑을 배경으로 날렵하게 대조를 이루는 사랑채의
정면 양 끝칸은 모두 마루면으로 구성된다.
서쪽은 누마루, 동쪽은 사랑대청이다.
매스의 양 끝을 비움으로써 수직적 분절과 동시에 수평적인 경쾌함을 얻고 있다.
이 지방의 살림집들은 수평적 구성을 주조로 삼는다.
충청 전라지역의 지형이 경상도에 비해 평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윤증고택의 안채와 행랑채는 물론 수평적이다.
반면 부유함을 갖는 사랑채는 당연히 수직적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지역적 정서에 맞지 않음은 물론 뒤쪽 안채와도 심한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채택된 수법은 사랑채의 기단을 두단으로 나누는 것이다.
기단을 이중으로 구성함으로써 수평성을 보장함과 동시에 바닥 높이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사랑채 바닥이 높아져야 하는가?
향촌 중심으로써의 권위를 얻기 위함도 이유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채에서 바라보는 바깥의 경관이 아닐까?
사랑마당은 넓게 개방되어 있고, 조금 떨어져 커다란 연못이 있다.
연못의 수면을 효과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사랑채에서의 시점이 높아야 하고, 당연히 바닥의 절대높이가 높아야 한다.
결과적으로 사랑채는 오브제로, 행랑채는 그의 스크린으로 역할한다.
팔작지붕의 사랑채는 완결적이며 풍부한 표정을 갖는다.
반면 스크린으로서의 행랑채는 연속적이며 중성적이다.
두 건물은 형태적으로 완벽히 분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 뒷 부분의 작은 사랑방은 구조적으로 행랑채에 속하지만 기능적으로 사랑채에 포함된다.
윤
윤증고택의 뛰어남은 여기에서도 드러난다.
간단한 구조와 풍부한 형태 그리고 그 이중성 동시에 행랑채는
안채와 사랑채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 존재한다.
이 건물은 자체적인 성격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대문이라는 중요한 기능이 여기에 포함되기 때문에
입구성을 보장할 수 있는 수법을 동원해야 했다.
행랑채의 5칸 중 서쪽 두번째 칸이 대문이다.
대문의 양 옆칸에 방화벽을 쌓아 대문을 중심으로 대칭적인 형태를 만들었다.
대칭은 또다시 중심을 만들고,
그 중심을 통해 출입을 유도하게 된다.
ㄷ자 안채는 일견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 5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 날개채의 길이가 같고, 날개채 끝에 모두 부엌을 설치했다.
양날개채 전면에는 같은 크기의 툇마루를 두어 완전한 대칭의 입면을 이루고 있다.
세 부분의 지붕 용마루선은 모두 동일한 높이에서 만나며,
대칭적 구성과 함께 수평적인 평온함을 안마당에 부여하고 있다.
모든 것이 대칭인 공간. 그러나 이 대칭성은 지극히 조작된 결과이다.
안채를 이루는 세 날개채의 구조는 모두 다르다.
대청부분은 앞뒤 5칸씩이 나란한 이른바 양통구조이며,
안방이 있는 서쪽 날개는 앞뒤에 퇴간을 둔 전후퇴구조,
동쪽 날개는 앞에만 퇴간이 있는 전퇴구조이다.
구조적으로는 전혀 비대칭적 구성인 것이다.
세 날개채는 서로 다른 건물의 두께를 가지고 있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지붕을 구성한다면
서쪽 날개의 지붕이 동쪽보다 높아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양날개채의 대칭은 깨지고 만다.
그래서 동쪽날개의 지붕은 물매를 급하게 하여
서쪽의 완만한 지붕과 높이를 맞추었다.
안마당의 중심성은 마당의 비례에 의해서도 얻어진다.
거의 정사각형의 비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집의 다른 마당들이 길쭉한 직사각형의 비례를 가진 것과는 크게 대비된다.
마당의 비례만 독보적인 것이 아니다.
외부공간도를 그려보면 정방형 안마당의 중심적 장소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안채 동쪽의 독립된 마당, 뒤쪽의 긴 길과 같은 공간, 서쪽 곳간채와 이루는 긴 통로,
그리고 행랑채 앞마당 등 안채를 둘러싼 사방의 외부공간들이
모두 긴 직사각형의 비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채 엇물리면서 안채를 에워싸고,
다시 정사각형의 안마당을 감싸고 있다. 안
마당의 중심성은 대칭적 안채로 둘러 쌓였을뿐 아니라,
그 바깥의 직사각형 외부공간들로 다시 한 번 둘러 쌓였다.
안마당은 형태와 비례뿐 아니라
공간적인 위상까지도 완벽한 중심성을 획득한 것이다.
-윤증고택 홈페이지의 글 '향촌에 공개된 장원'만을 옮겨온 것이다.-
<향촌에 공개된 장원은 김봉렬교수의 글 '앎과 삶의 공간에서'옮겨온
것이라고 그 홈페이지는 밝히고 있다>
첫댓글 영희야 수고 많구나. 혼자서 많은 일을 하는걸 보니 부럽기도 하고, 항상 건강하구 가끔 소식 전하면서 살자구.
참 정갈하게 아름답네여~
너무 예쁘네요...맘이 다 편안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