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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둔 사울 / 내면의 악에서 비롯된 거짓과의 싸움
원제: Bible Study Notes/합리적 이해
지은이: Anita S. Dole
옮긴이: 배제형
사무엘상 15장 1-35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 사무엘이 이르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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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요점
- 주님은 순수하시고 이타적인 사랑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우리 심정에서
이기심을 몰아내시는 일을 무엇보다 먼저 추진하신다.
- 말씀에 관한 우리의 첫 이해성은 그 기초를 외부에 나타난 것에 둔다.
- 주님을 믿는다 함은 설사 우리의 판단에 반대된다 해도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 우리의 유전적인 자아애로부터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나오는지 인식해둘 필요가 있다.
부모를 위한 노트
우리는 지금 이스라엘족의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중요하기도한 국가 형성의 시대를 공부하고 있다.
우리는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들이 구하고 있던 것이 '세상의 중요성'이었음을 기억한다.
이 백성들은 세 왕, 즉 사울, 다윗, 솔로몬을 통해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긴 했지만
안전과 행복은 세상적인 권력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들의 쓴 경험에 의해 배워야만 했다.
사울이 그들의 첫 왕이었고 그를 주님이 뽑아 주셨는데
그 이유는 백성들의 생각에 사울이야말로 그들에게
가장 걸 맞는 왕의 모습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11장 23절에서와 같이
“그가 사람들 가운데 서자 그들의 키는
모두 그의 어깨에도 차지 못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백성들이 그를 부러워하게 된 이유는
눈에 보이는 그의 건장함 때문이다.
젊었을 때 우리가 사울의 바깥의 겉모습에 의해
쉽게 판단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되리라 본다.
사울은 젊은이들이 가진 건장함과 약함을 가졌다.
그는 용감했고 열성적이었지만
자신감(self-confident)이 넘치고 성급하고 참을성이 없었다.
그는 자기의 첫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자만하여져(it turned his head)
사무엘이 자기들의 예언자임을 알면서도
사무엘을 통해 전달되는 주님의 교훈을 정확히 실천하지 않았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그의 불순종 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 행위는 결국 그에게 왕국을 앗아갔다.
아말렉인들은 교활한 적이었다.
그들이 르비딤의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처음 공격했을 때(출 17:8-16)
이스라엘은 그들과 싸워 이겼는데
그 이유는 모세가 산에 올라가 아론과 훌이 해가 질 때까지
주님을 향해 들고 있는 모세의 팔을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험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은
모두 주님에게서 나온다.
우리가 이것을 잊고 우리 자신의 선함과 지혜를 믿을 때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에 대한 판단이
주님의 명령과 어긋나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우리는 사울처럼 우리에게 유익하고 즐거워 보이는 것을
포기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문제의 근원인
자기사랑과 자기만족(self-satisfaction)을 공격하지 않는다.
비유로 말하자면 우리는 아각왕을 살려두는 것이다.
제 1반
.. 사울은 선한 왕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자기 능력의 과시가 되어 자신이 잘난 인물인 듯
착각하게 만들었다.
사무엘은 아직 주님의 예언자였고
사울도 이는 인정하고 있어서 사무엘이 명령한 것은
곧바로 행동에 옮겨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울은 성급했다.
다른 적들의 위협을 받자 그는 군대를 소집했는데
전투가 있기 전 사무엘이 와서 제물을 바치기로 되어 있는
예정일을 미처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도 제물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행동했다.
그러자 사무엘은 사울에게 와서
그가 주님께 엄격히 순종하지 못했던 까닭에
그의 왕국이 길지 못할 것을 경고했다.
.. 게으른 아이가 자기의 게으른 행동 뒤에
이를 감추고자 어머니에게 아양을 떠는 경우가 있다.
물론 자녀의 귀여움을 싫어할 부모는 없다.
그러나 이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게으르지 말라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고 자신이 더 행복해지는 것임을
오늘 본문은 말해주고 있다.
제 2반
.. 주께서 사울을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백성들이 사울을 그의 바깥의 겉모습에 의해 판단하리라는 것,
그리고 겉모습은 때로 속인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의 경험에 의해 배워야 한다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사울의 첫 전투는 요르단 건너에 있는 암몬족과의 대결이었는데
그는 이 전투를 대승으로 끝냈다.
이 전투로 인해 백성들은 사울이야말로 자기들의 왕으로서
적임자라고 확신하게 되었으나, 불행한 것은
사울로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과신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도 사울은 잘해보려고 애쓰는 자였으며
용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슬기롭지는 못했다.
따라서 블레셋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위협하자
사울은 너무나 당황해서 전투를 어떻게 치러야 하는지
적당한 방법조차 취할 수 없게 되었다.
비록 자기가 왕이라 하더라도 사무엘이 주님의 예언자인 이상,
전투 전 칠일동안 사무엘을 기다려 제물을 바친 뒤
전투에 임하라는 사무엘의 명령을 지켜야 한다는 것 정도는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사울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이레째 되는 날
사무엘이 거기 도착하기 전 직접 제물을 바쳤다.
이에 사무엘이 그에게
그가 주님께 순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그의 왕국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울이 처음 승리를 거둔 적 암몬과 블레셋은 모두
이스라엘의 공공연한 적이었다.
이 적들은 사울이 싸움을 걸기도 전에
싸울 채비를 하고 달려든 적이지만
오늘 본문의 경우는
자신을 직접 위협하지도 않은 듯 보이는 옛날의 적들을
한순간에 공격하여 쓸어버리라고 사무엘은 사울에게 말하고 있다.
아말렉과 싸우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드는데 사울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강한 사람이어서 싸우러 나가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군대는 완전한 승리를 가졌다.
그러나 주님께 완전히 순종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주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했다.
사울은 자신에게 가치 없고 해롭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모두 파괴했지만
쓸모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그대로 남겨 두고 싶은 시험은
물리칠 수 없었다.
과거 여호수아 시대 때에도 누군가가 이런 태도를 취함에 따라
본인은 물론 전 이스라엘군이 고통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는 여호수아서 7장을 읽으면 알게 된다.
(노략한 물건 중 일부를 아간이 자신의 장막에 감춘 사건)
이스라엘의 전쟁은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이나
잘못된 생각과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런 것과 기꺼이 싸우고자 한다.
그 이유는 이런 것들이
우리를 해치며 곤경에 빠뜨릴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사울과 같다.
주님은 우리의 이기심을 완전히 없애라고 말씀하셨음에도
우리는 자신에게 분명히 해로운 것으로 보이는 것만 파괴하고
자신에게 쾌적해 보이거나 자신이 즐기는 것,
즉 “양과 소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유지하고 싶어 한다.
사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약점을 오히려 좋아한다.
우리는 누군가 “아, 나는 정말 성미가 급해..” 라고 말하면서도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듯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는 화를 내고 부끄러울 때마다
화를 통제하는 것을 상식적으로 배우지만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오히려 화를 내는 것을 즐긴다.
우리는 외형상 나쁘게 보이는 것은 없애면서도
심정 속에 있는 문제의 근원은 그대로 둔다.
그럴 때 우리는 왕을 살려둔다.
제 3반
.. 성경에서 왕은 통치하는 원리를 표징한다.
이스라엘의 세 위대한 왕인 사울, 다윗 그리고 솔로몬은
주님에 의해 선택되어 우리 삶을 통치하는 주님의 진리를 표징한다.
주님의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성은
우리가 그 진리를 사용함에 따라 점진적으로 발달된다.
경험에 의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처음에 우리는
말씀과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
자연적인 이해성만을 가질 뿐이다.
우리는 주님께 순종해보려고 하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에 대한 우리 판단은
성급하고 피상적인데, 이런 수준의 이해성이 사울로 표징되고 있다.
주님은 사울을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선택하셨다.
그 이유는 사울이야 말로 그 당시의 백성의 수준에서
그를 인정하여 따를 수 있는 적격자였기 때문이다.
사무엘상 10장 23-24절을 보면
“그가 사람들 가운데 서자 그들의 키는 모두 그의 어깨에도
차지 못하였다”라고 하는 구절에서 이를 금방 알 수 있다.
그래서 “온 백성이 ‘우리 임금 만세’하고 외쳤던 것이다.”
이 백성들은 그를 겉모습으로 판단했는데
이는 우리 역시 비슷해서 경험에 의해 더 깊은 것을
볼 수 있기 전 자칫 빠지기 쉬운 경우들이다.
사울은 자기의 첫 전투를 멋지게 해냈다.
이 전투의 적은 요르단 건너에 있는 암몬족들이었다.
요르단 건너편 땅은 행동의 바깥 평면을 표징한다.
사울로 표징되는 진리의 자연적 이해성은
이 평면의 시험을 쉽게 알아보고 저항할 수 있다.
그러나 사울의 첫 승리는 그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그것은 그의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이미 공부한 바와 같이 그의 적이 블레셋이었을 때(제 13장),
그는 너무 조급해서 사무엘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직접 제물을 바치고야 말았다.
그의 군대가 블레셋을 물리친 것은
사울의 자신의 통솔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믿지 않고 주님을 믿은
그의 아들 요나단의 공로에 의해서였다.
우리는 그때 사무엘이 사울에게 그의 왕국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사울에 의해 왕으로 그려진 진리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 이해성은
우리를 만족시키고 또 어느 정도 외적인 악들을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에 속기 쉽고
당장의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주님의 명령에 조바심을 낸다.
오늘 본문은 이런 수준의 이해성은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스라엘이 멸해야 할 적은 에서의 후손인 아말렉 족속이다.
에서는 쌍둥이로 태어났고 야곱의 형이기도 한데,
야곱이 자연적 평면의 진리를 표징한데 비해
에서는 자연적 평면의 선함을 표징한다.
그들이 분리되어 서로 다투었을 때 많은 악들이 일어났다.
에서는, 선한 의도들이 자신들을 인도해줄 진리가 없을 때
항상 하는 것처럼 광야로 가서 살았다.
(Esau went to live in the wilderness, as good intentions
always do when they are without truth to guide them)
(인도자격인 진리가 결여되어 있으면
선한 의도심은 방향 잡기 힘든 광야에서 삶을 영위한다.)
이와 같은 분리된 삶의 나쁜 결과 중 하나는
자신의 선한 의도에 만족하는 안쪽의 느낌이 되기 쉽다.
우리는 ‘의도가 좋으면’ 이에 따라 옳고 그름에 대한
자신의 생각도 틀림없이 올바르다고 확신한다.
(One of the bad results of this separate life is liable to
be an inner feeling of satisfaction with one's own good intentions.
We feel sure that we "mean well"
and therefore that our own ideas of right and wrong must be correct.)
이것은 우리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자아사랑의 한 종류로,
그로 인해 우리가 곤경에 빠지기 전에는
그것이 전혀 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에서의 후손인 아말렉은
숨겨진 자아만족에서 비롯된 거짓 생각들을 표징하며
영적인 삶의 요구에 직면할 때 우리를 종종 좌절로 이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과 그들과의 르비딤 첫 전투 교훈에서
우리가 배운 것처럼 그들은 항상 매복했다가 공격하거나
판관 기드온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다른 적들과 합세했다.(판관기 6:3)
그리고 우리는 르비딤에서 모세가 산에 올라가 주님을 향해
그의 손을 들고 있을 때만 그들을 정복한 것을 기억한다.
우리가 자신감이 넘칠 때는 이 시험을 이길 수 없다.
아말렉이 적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이긴 하지만
사울의 시대 때 그들은 공개적으로 사울을 공격해 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에게
이들을 색출하여 참혹하게 파괴시키라고 명령하셨다.
사울은 기꺼이 공격을 감행했고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때에도 사울은 주님의 명령 위에 자신의 판단을 얹어 놓아
결국 주님께 완전한 순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제일가는 거짓을 상징하는 왕을 살려놓았고
또 이 악의 외형상의 나타남을 표징하는,
우리의 자연적인 이성이 보기에 해롭지 않고 유용하게까지 보이는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들을 가져왔다.
사무엘이 이러한 일에 대해 사울의 불순종을 지적하자
사울은 주님께 드리는 제물로 이런 것들을 구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계명을 어기는 매우 흔한 변명을 그리고 있다.
예를 들면 사업의 교활한 행위가
그로 인해 생긴 재산의 일부가 자선기관의 기부에 사용될 때
눈감아주는 것이 그렇다.
이런 악에 대한 일반적인 예는 마가복음 7장 9-13절에서
주님에 의해 심각하게 질책되었다.
예언자로서의 사무엘은 말씀을 그려주고
따라서 그의 “도포, garment”는 말씀을 담은 글자다.
사울이 사무엘의 도포를 찢는 모습은
그가 진리를 온전하게 유지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그의 혈통에서 왕국을 이어가지 못한 이유였다.
기본이 되어줄 상응 공부
사울 = 신성한 진리에 대한 자연적인 이해
아각 = 삶을 통치하는 자아만족, 이기심
제 4반
교사는 공과 끝에 있는 인용문을 연구하고
아말렉 시험의 예를 학급의 경험에 맞추어 준비해야 한다.
그러한 수고가 젊은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은
우리의 타고난 이기심을 참된 것으로 옹호하려는 생각과 주장들을
우리가 얼마나 쉽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지휘 하에 거룩한 땅을 정복한 후
번영 속에서 해이해졌고 판관 시대에는 더 심했으며
연합된 저항을 조직할 수 있는 왕을 갈망하기에 이를 때까지
적들에 의해 더 많은 고통을 받았다.
마지막 판관 사무엘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사울을 기름 부었고
사울은 그의 장대하고 훤칠한 용모로 인해
백성들에게 왕으로 환영받았다.
통일된 국가의 초대 왕이 된 사울은 우리가 젊었을 때 가지기 쉬운,
진리에 대한 자연적인 이해성을 표징한다.
그 이해성은 주님을 섬기기를 원하고 행동하기를 열망하지만
지체될 때 참지를 못하고 겉모습으로부터 추론할 때는
행해져해야 할 일에 대해 주님보다 더 나은 판단을 내리기 쉽다.
사울은 암몬족과의 첫 전투는 승리했다.
그러나 블레셋과의 싸움에서는
사무엘이 와서 드려야 할 제사를 미처 기다리지 못했고
그나마 조금 승리한 것 역시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한 아들 요나단의 용맹에 의존해서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이 싸움에서 사무엘은 사울을 심하게 나무라면서
왕국은 더 이상 사울의 계보에서 이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우리가 삶을 계속 영위해갈 때
진리에 대한 자연적인 수준의 이해는 삶을 통치해 가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 그려주는 줄거리이다.
오늘 본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울의 장단점을
여실히 보여 주는 줄거리들이다.
사울이 지금까지 극복한 두 적은
공격을 위해 집결한 공개적인 적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지금 아말렉을 찾아내어 멸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아말렉은 그들의 적을 공개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매복하여 기다리는 적이다.
이 싸움에 사울은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원수를 진멸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왕과, 양과 소 중에 가장 좋은 것을 살려둔 바,
자신의 판단을 주님의 명령위에 둠으로 자신에게 최후의 정죄를
끌어당기고 있다.
스웨덴볽은 아말렉이
“내면의 악에서 비롯된 거짓”을 표징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진심으로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믿을 때조차
우리의 이기심에 도움이 되는 것을 얼마나 쉽게
좋은 것으로 여기는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진리에 대한 자연적 이해성은 명백한 악만을 정죄할 수 있을 뿐
아각 왕으로 표징되는 깊게 뿌리내린 이기적인 사상은
건드리지 않고 남겨둔 채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공정하게 보이는 관례로 그 자신에 취한다.
(A natural understanding of truth inevitably condemns
only the obvious evils, and takes to itself the fair-seeming practices
-the best of the sheep and oxen- leaving untouched
the deep selfish root idea-represented by king Agag.)
주님께 드리는 제물로 양과 소를 살려두었다는 사울의 주장 역시
우리 귀에 익숙하게 들리는 바,
오늘날 사업, 사회, 정치 활동에서
기본적으로 많은 이기적이고 그릇된 행위들이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주장으로 변명되고 있다.
“‘그대가 야훼의 말씀을 저버렸으니, 야훼께서도 그대를
이스라엘 왕위에서 밀어내실 것이오.’
이 말을 남기고 사무엘이 돌아서 가려고 하자,”
“사울이 도포를 붙잡는 바람에 도포자락이 찢어졌다”
우리가 기억하는 사무엘은 말씀을 표징한다.
그래서 그의 도포(mantle)는 말씀의 글자를 표징한다.
사울의 약함은 신성한 명령을 담은 글자를
기꺼이 준수하지 않으려는데 있었다.
이를 상징하도록 하기 위해 사무엘의 도포(garment)가
사울의 손에 의해 찢어졌던 것이다.
우리의 영적인 힘은
신성한 명령에 대한 우리의 순종에 달려 있다.
우리 자신의 판단이 이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주님은 항상 그리고 영원히 사람보다 지혜로우시다.
오늘 공부 뒤의 참고 문헌은
아말렉에 의해 표징된 시험과 그 시험의 근원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해주고 있다.
우리는 아말렉이, 과거 이스라엘 후손들이 에집트를 떠난 후
실제로 싸워야 했던 첫 적이었음을 기억한다.
이 전투는 광야의 르비딤에서 있었고
전투동안 모세가 산에 올라가 주님을 향해 손을 들고 있었는데
“모세가 팔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팔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
모세의 팔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돌을 갖다 놓고 모세를 그 위에 앉히고
아론과 훌은 모세의 팔을 좌우에서 각각 붙들어 떠받치니
해가 질 때까지 그의 팔은 처지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 백성을 칼로 쳐 이겼다.(출 17:8-16)”
본과 뒤의 인용문은 위 이야기의 마지막 절인
“야훼께서 대대로 아말렉과 싸워 주시리라”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스웨덴볽은 아말렉이 표징하는 악령(evil spirit)을
악귀(evil genii)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악의와 교묘함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생각들은
우리의 자연적인 이기심에 호소하는 것이고
자심감에 쉽게 기울어지는, 진리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인 이해성은
이 악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의 자연적인 이기심에 호소하여
우리의 생각에 자극을 주고
진리에 대한 우리의 자연적인 이해성은
자신감에 쉽게 기울어져 이 악을 당해내지 못한다.)
따라서 사울 혼자서는 아말렉을 근절할 수 없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자기 사랑을 겸손히 인정하고
우리의 생각을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것에 대한 궁리에서
주님께 끈질기게 들어 올리는 것만이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
제 5반
.. 전 국토를 통치한 세 명의 위대한 왕, 사울, 다윗, 솔로몬은
우리 삶을 통치하는 주님의 신성한 진리를 그려준다.
그리고 이 세 왕들이 싸운 적들은
신성한 진리가 우리 삶을 통치하는 것을 반대하는
우리속의 악과 거짓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세 왕, 사울, 다윗, 솔로몬은
결코 완전한 인간이지도 않았고
그들의 전투 역시 꼭 승리한 것만도 아니었다.
신성한 진리는 삶을 통해 나아가는 우리의 각기 다른 국면에서
다양하게 그리고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 왕들의 시대는
우리가 스스로 선택을 하고 그들에 대한 책임을 지는
성인의 상태를 표징하고
또 우리가 거듭나는 삶의 한 부분도 표징한다.
거룩한 땅은 우리가 들어와 우리의 고향이 되었고
우리의 수고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상상하는
판관 시대의 시험을 우리는 통과했으며
이제 신성한 진리의 통치하에 우리 안팎의 악에 대한 정복을
다시 재개할 준비가 되어 있다.
(The Holy Land has been entered and has become our home.
And we have also passed through the temptation to imagine
that no more effort is required of us - the period of the Judges -
and are ready to resume the conquest of our inner and outer evils
under the rule of divine truth.)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안내자로,
즉 사무엘을 여전히 주님의 예언자 받아들이는데
우리는 왜 언제나 승리하지 못할까?
그 이유는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불완전하고
자기사랑과 자기주장에 대한 우리의 유전적인 경향이,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든 아니든 항상 존재하며 활동하기 때문이다.
사울은 거듭남의 단계에서
우리가 처음 대하는 신성한 진리를 표징한다.
그가 백성들에게 받아들여진 이유는
“그가 사람들 가운데 서자 그들의 키는 모두 그의 어깨에도
차지 못하였던” 때문이었다.
.. 사울은 교회의 청년들처럼
용감했고 열성적이어서 기꺼이 전투에 앞장섰다.
그리고 그는 첫 전투에서 승리했는데 이 전투의 적은
요르단 건너편인 야베스 길르앗을 공격했던 암몬족이었다.
그 전투는 명확하게 보이는 외적인 시험에 대한 저항을 표징한다.
그러나 이 첫 승리야 말로
사울의 왕권에 대한 무능을 드러내도록 요구된 전부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를 자만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에게 주님 대신 자신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우리가 젊을 때는 이런 점에서 사울과 많이 닮았다.
우리를 자신감 있게 만들어
조언이나 통제에 대해 참을성 없게 만드는 것은
단지 아주 작은 성공과 칭찬만으로도 족하다.
사울과 요나단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13장에서,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 앞서 사무엘이 와서 주님께 제물을
바치기 전 칠일 동안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사울은 쳐들어온 블레셋진영의 어마어마함과
자기 군인들은 하나둘씩 빠져 도망가는 모습에 성급해지면서
자신도 사무엘처럼 제물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울처럼 진리를 보는 우리의 첫 이해성은
외관, 즉 눈에 보이는 것에 기초를 둔다.
우리는 지체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일을 끝내기위해 서두른다.
사울이 블레셋 군대를 공격하여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한 요나단이
그의 간단한 공적으로 블레셋군대를 혼란에 빠뜨렸을 때였고
이로 인해 사울의 공격이 가능해지고 그들을 무찌르게 된 것이었다.
진리에의 순종 없이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블레셋이란 시험이다.
이 시험은 신뢰를 자신에게 두고서는 이겨낼 수 없다.
오늘 본문은 비록 사울이 이후에도 오랫동안 왕으로 군림했지만,
결국은 왕으로서 그가 실패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아말렉족은 이스라엘 후손이 에집트를 떠난 뒤 처음 대적한 적이다.
우리는 르비딤에서 벌어진 이 첫 번째 전투에서
모세가 산에 올라가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해가 질 때까지 주께 손을 들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이
승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말렉족은 “내면의 악에서 비롯된 거짓”을 표징한다.
스웨덴볽은 「천국의 신비 제 8593항」에서 아말렉에 관해 말하기를,
내면의 악은 사람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고
그의 의지에, 그리고 그로 인해 그의 생각에 숨겨져 있어
그의 행동이나, 말, 얼굴과 같은 그의 외부에 속한 것에
전혀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 악이다.
("Interior evil is that which lies inwardly concealed with man,
hidden in his will, and thence in his thought, no trace of which
appears in his externals, as in his actions, speech, and face.")
“저 세상에서 이런 종류의 악 속에 있는 이들은
악령이라 부르지 않고 악귀라고 불리며
그들이 우리에게 영향력을 끼치려 노력할 때
그들이 파괴하려 드는 것은 신앙의 진리가 아닌 신앙의 선들이다.
왜냐하면 이 악들은 부패된 애정들을 수단으로 행동하여
선한 생각들을 왜곡시키기 때문인데
이것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지옥의 악귀들은 인간을 공개적으로 공격하지도 않고,
인간이 원기 왕성하게 저항할 때는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굴복하여 넘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 인간을 완전한 멸망에 밀어 넣는다.”
이로써 우리는 겉모습에 근거한,
신성한 진리에 대한 자연적인 이해성을 그리고 있는 사울이
왜 이러한 적에게 유혹되어 자기에게 좋게 보이는 것들과
통치원리로서의 아말렉의 왕을 살려 두었는지의 이유를 알 수 있다.
스웨덴볽은 본문 32절과 연결시켜 악귀에 대해 이렇게 말해준다.
삼상 15:32 “사무엘이 이르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그가 ‘즐거이 온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영들의 겉으로 보이는 즐거움을 의미한다.
그런 영들의 그럴듯한 주장을 꿰뚫어 볼 수 있으려면
상당한 경험이 필요하다
따라서 흔히 범하기 쉬운 이른바
성급한 판단으로부터 젊은이들이 보호되도록
연장자들은 참을성 있게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라 본다.”
본문 22-23절을 천천히 읽어보자.
사울은 주님의 명백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 시험에 굴복함으로
그의 실제적 왕권(actual kingship)을 끝냈다.
왜냐하면 다음 장에서 사무엘은 다윗을 기름 부으러 갔고
그가 다윗에게 기름 붓자
“주님의 영이 사울을 떠났다”고 읽기 때문이다.
사무엘의 도포가 사울로 말미암아 찢어지는 모습이
이 변화에 대한 표시였다.
「요한계시록 설명 395-5항」에서 말하기를,
“사무엘의 말은 ‘외투자락의 찢어짐’은
사울에게서 왕국이 찢어짐을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는 그 일이 끝난 후에 그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야훼께서는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그대에게서 찢어 내시어
동족 가운데서 그대보다 훌륭한 사람에게 주셨소.”
‘왕’과 ‘그의 왕국’은 교회의 신성한 진리를 의미하고,
‘외투자락’이란 말단에 있는(in ultimates) 신성한 진리,
즉 일반적인 모든 신성한 진리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후손위에 군림한 왕은
신성한 진리에 관련된 주님을 표징하고,
그 왕국은 신성한 진리에 관련된 교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이 역사적 사실은
사울 왕은 더 이상 주님을 표징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과
만일 그 왕국이 사울에게서 분리되지 않았다면
교회의 표징이 사라졌을 것임을 의미한다.”
참고 문헌: 스웨덴볽의 저서에서
「천국의 신비 제 8593항」
“내면의 악은 사람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고
그의 의지에, 그리고 그로 인해 그의 생각에 숨겨져 있어
그의 행동이나, 말, 얼굴과 같은 그의 외부에 속한 것에
전혀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 악이다.
그런 악 안에 있는 자들은 모든 방법과 기술을 동원하여
그것을 고귀하고 정의로운 외관 하에, 또 이웃 사랑의 외관 하에
숨기고 쌓아 두려고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 안에 악을 행하는 방법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고안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악을 가하고
그것이 그들에게서 나온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또한 악 자체를 채색하여 그것이 악처럼 보이지 않도록 한다.
그들 삶의 가장 큰 기쁨은 그런 것들을 묵상하고
그것들을 숨기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내면의 악이라 불리운다.
.. 이런 악 속에 있는 이들은
신앙의 진리를 공격하지 않고 신앙의 선을 공격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부패된 애정들을 수단 삼아 선한 생각들을
왜곡하기 때문인데 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 이런 지옥의 악귀들은 인간을 공개적으로 공격하지도 않고,
인간이 원기 왕성하게 저항할 때는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굴복하여 넘어지는 것처럼 보일 때,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 인간을 완전한 멸망에 밀어 넣는다.
.. 위로부터 아말렉에 의해 표징된 이들의 기질이 어떠한지,
그리고 왜 여호와로부터 아말렉과 영원히 전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이 내려 졌는지도 알 수 있으리라 본다.”
「요한계시록 설명 제 395-3항」
“예언자는 말씀에서 비롯된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추상적 측면에서는
말씀에서 비롯된 교리 속의 진리도 의미한다.
이러한 ‘예언자’의 의미 때문에 그들은
말단에 있는 신성한 진리를 의미하는 털이 많은 외투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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