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차림의 예비 지식
알아차림의 방식은 미리 정해둘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다양하다. 개인마다 서로 다른 방법을 채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알아차림의 규정되지 않는 특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하다. 사람마다 조건이 다른데, 어떻게 같은 방법을 고집하겠는가? 그렇다고 또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는 알아차림이라면 염두에 두고 갖춰야 할 공통사항을 주의 환기 차원에서 간략히 언급한다.
1. 믿음(신심)
하루 동안 얼마나 자주 부처님을 생각하는가?
나는 시시때때로 부처님을 떠올린다. 속된 말로, '방귀만 뀌면 부처님'이다.
왜? 부처님을 떠올리면 행복하니까... 믿음은 선업이다, 그래서 행복한 느낌을 산출한다...
수행은 어려운게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진지하게 부처님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수행이다. 하지만 그것만을 두고, '부처님을 알아차림한다'는 등의 말을 할 필요는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수행에서 대단한 것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 일은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많은 장애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평이한 것의 고귀함을 아는 것은 유익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알아차림한다, 믿음을 알아차린다' 등등은 모두 같은 말이다. 그리고 부처님(부처님의 가르침, 믿음)을 알아차린다고 할 수 있으려면, 다음과 같은 과정이 있어야 한다.
먼저, '부처님이라는 생각'과 '그 생각에 의존해 발생한 마음상태'를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 '그 생각에 의존해 발생한 마음상태'에 집중한다. 다음, '그 생각에 의존해 발생한 마음상태'에서, 의지와 느낌을 구별한다. 이번에는 의지에 마음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느낌을 걸러내면, 비로소 믿음이라는 선업의 알아차림이다.
제시된 바와 같이 알아차림하는 것도 좋지만, 그래야만 더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더 훌륭한 성취라고 할 수 없다.
사람마다 잘 하는 것은 다르다. 믿음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더 깊고 풍부한 믿음을 일으키는 일도 드물지 않다.
부처님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은 정화된다. 더 깊고 풍부한 믿음을 일으킬수록, 더 장엄하게 물든다.
2. '와서 보라'는 가르침 - 알아차림, 연기를 아는 방법
부처님께서는 '연기'를 깨달으셨고, 연기를 구체적으로 알아가는 방법으로 알아차림을 제시하셨다. 그리고는 '와서 보라'고 천명하셨다.
알아차림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구체적으로 알게 하는 방법이기에, 다른 유파에서는 찾을 수 없는 불교만의 고유한 수행법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깨달음, 즉 연기'를 파악하는 일이 그토록 어렵고 희귀하기만 하다면, "스스로 봐서 알 수 있고, 별다른 시간이 걸리지도 않으니 확인하라"는 말이 가능할까? 이 의문은, 쉬운 것에서부터 연기를 파악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도록 방향성의 전환을 요구한다.
수행으로 대단한 것이 알려져야 하는가? 수행으로 특별해져야 하는가?
수행은, "아! 이래서 그렇게 말하는구나"라고 알아가는 기쁨과 "좀 더 세세하게 잘 알고 싶다"는 상승심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좀 더 성숙하고 행복한 길을 찾는다면 좋은 거고... 뭐...어차피 돈은 안되는 거 아니냔 말이지...
어떻게 보면 당연하고, 보기 좋게 포장하자면 소박함? 소박한 수행, 수행은 소박한 것... 이것이, '와서 보라'는 취지에 비춰, 수행에 대한 바른 시각으로 보인다.
소박한 수행이지만, 부처님의 깨달음을 구체적으로 알아나간다. 불교 신자에게 이보다 더 멋진 일이 있겠는가?
3. 알아차림
알아차림을 할 때, 자세는 편할수록 좋다. 앉아도 되고, 누워도 된다. 뭐..서 있고 싶으면, 서 있고... 어떤 자세라도 상관없다. 편하기만 하면 된다.
너무 편해서 잠들면? 꿀잠이지... 편안한 수면은 건강에 좋다. 알아차림하다, 잘 수도 있는 거지... 돈 생기는 것도 아닌데, 아등바등할 필요 있는가? 물론 매번 잠들면, 좀 곤란하겠지만...
알아차림에 흔히 나오는 정형구는, "A일 때, A인 줄 안다"이다.
'안다'라는 표현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는데, 알기 위해 별도의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무언가 알려진다'는 것은, 이미 '그 무언가를 안다'는 것이다. 알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순간, 알아차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통 A는 여러 현상으로 구성된다. 즉 A는 소위 관념인 경우가 많다. 곧바로 알아차림의 대상이 되는 구체적 현상이 아니다. 그래서 도축업자가 적절하게 도축하듯, A를 알아차릴 수 있는 여러 구체적 현상으로 분해해야 한다.
알아차릴 구체적 현상으로 분해하는 기준으로, 6가지 평면이 있다.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관념과 마음상태등'의 6가지이다. 이러한 6가지는 서로 섞이지 않는다.
(육체적) 들숨을 가지고 생각해 보자. 들숨은, 보통 '여러 촉감'과 '소리'라는 2가지 평면으로 분해가 가능하다. 들숨의 여러 현상을, 섞이지 않도록 2가지 평면으로 나누는 까닭은 뭔가?
A촉감과 B촉감의 두가지 촉감이 알려진다고 할 때, A촉감과 B촉감 각각을 대상으로 할 수도 있지만, A촉감과 B촉감 모두를 대상으로 할 수도 있다. A촉감과 B촉감 모두를 대상으로 하면, A촉감과 B촉감 각각이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통합된 C촉감이 알려진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는 당연하다. A촉감 역시 마음을 보다 섬세하게 기울여 보면, 또 여러 촉감으로 나눌 수 있으니까...
하지만 '소리가 알려지는 조건'과 '촉감이 알려지는 조건'은 서로 다르기에, 하나의 알려짐일 수 없다. 알아차림으로 주의력과 명료함등을 기르려 할 때에는, 하나의 알려짐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둘 이상은 그만큼 산란된 상태이다. '호흡소리도 호흡이고, 호흡감촉도 호흡이므로, 둘 중 하나만 임의로 붙잡아도 호흡의 알아차림'이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물론 둘 이상의 알려짐이라도, 상당히 높은 집중 상태에 이를 수는 있다. 하지만 단순히 집중의 강도가 높다고 하여, 산란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강도가 약하지만 단일한 집중'은 지금은 가볍지만 무거워질 수도 있는 날카로운 칼날이고, '강도가 높지만 산란된 집중'은 무겁지만 뭉툭한 칼날이라고 할 수 있다.
긴 들숨은 긴 들숨으로 알고... ... 짧은 들숨은 짧은 들숨으로 안다...
특정 부위의 촉감을 대상으로 선정했다고 하자. 숨이 길든 짧든, 그 부위에서 발생하는 촉감만이 알려지도록 집중한다. 길든 짧든, 신경 쓰지 마라. 길고 짧은 것을 구별하여 알려고 하지 마라. 길든 짧든 단지 대상으로 삼은 촉감을 놓치지 않으면, 길 때 긴 것을 알고 짧을 때 짧은 것을 아는 것이다. 촉감만 알려질수록 즉 촉감이 선명해질수록, 길면 긴 대로 긴 촉감을 알고 짧으면 짧은 대로 짧은 촉감을 명료하게 아는 것이다.
선정한 촉감이 명료해진만큼 집중된 상태이다. 다른 부위의 촉감등을 떠올리지 마라. 팔이나 다리등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 텔레비젼만 좀 집중해 봐도, 팔이나 다리가 있는 줄 모른다. 팔이나 다리가 있는 줄 모르는 것은 그냥 일상적이고 평이한 현상이다.
선정한 촉감에만 마음을 기울여라. 그러다보면 집중이 깊어지는 어느 순간 촉감이 질적으로 변한다. 개인적으로 '매끄럽게 변한다'고 표현하는 편인데, 질적으로 변한 것은 촉감과는 또 다른 평면인 '관념과 마음상태등'의 영역에 속한다. 쉽게 표현해 '기억'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육체적 촉감이 아니다. 따라서 육체적 촉감을 알아차리려고 했다면, 이제는 매끄러워지지는 않으면서 육체적 촉감이 최대한 선명해지도록 집중의 강도를 적절히 조절하는 능력을 기르면 좋다. 이러한 훈련은 마음을 원하는 만큼 쓰는 힘을 길러준다.
교학 따로, 수행 따로 하면...교학은 절름발이, 수행은 천방지축이 된다. 알아차림을 충분히 했으면, 이제는 부처님 가르침에 비춰 기억에서 혹은 이렇게 저렇게 직접해 보면서 여러가지를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그냥 몇 자 적는다.
나이가 들면, 이해력은 떨어지고 감각은 둔해진다. 집중력도 떨어진다. 이거 뭐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문제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그런 거...
알아차림이라고 하면, '있는 그대로 안다'는 말도 곧잘 등장한다. 그 말을 선호하진 않는데, 해당 표현을 접하고 그 의미 파악에 실패하는 분들이 제법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 나무를 있는 그대로 안다... 사람마다 매 순간마다 저 나무의 형상등은 다르다.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은, 알려지는 순간의 나무의 형상등을 안다는 것이다. 그러한 형상등을 떠나 있는 진실한 저 나무의 형상등이나, 형상등으로 추정한 배후의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은 아니다.
<< 참고 사항 >>
1. 근래 부처님의 깨달음이 연기라는 점에 이의를 제기하는 쪽이 등장했다. 빨리어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나는 중도를 깨달았다, 그 중도는 8정도이다."라고 말씀하신 것등을 근거로 삼는다.
그런데 단어는 문화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종교는 크게 예언자(샤만) 전승과 화신 전승의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익숙한 화신 전승의 표현이 신약성경에 곧잘 등장한다. 예로, "나는 길이요, 빛이요, 생명이다", "나의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등을 생각할 수 있다. 불경도 화신전승에 속한다. '연기를 보는 자=법을 보는 자=나를 보는 자'등등에서 알 수 있듯, 화신 전승에서는 길과 소위 진리 그리고 성취자 사이에서는 등식이 성립한다.
2. 허리를 곧게 펴는 정좌 자세, 척추를 곧게 펴는 자세는...예언자(샤만) 전승에서부터 등장하는 우주수의 구현이다. 우주수를 통해 샤만은 위의 세계와 아래 세계를 오갈 수 있었다. 그래서 수행에서의 정좌자세는, 부처님 당대에 이미 아주 오래된 고정관념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쓸데 없이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신 편인데, 의식에의 집착은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하신 정도? 정좌자세 역시 하나의 의식이다.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고, 반드시 해야 한다고 할 필요는 없다.
3. 육체적 촉감의 통합은, 엄밀히 말해 하나의 제약이 있다. 지수화풍의 사대로 나눠서 섞지 않는 것인데, 절대적 기준인 것만은 아니다. 이것저것 통합해 알아차리려고 시도해 보면, 잘 통합이 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들을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반드시 사대로 나눠야 하는 것은 아닌 듯...
첫댓글 늘~~부처님 생각_()()()_
몇가지 질문 드렸다가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 같아 삭제했습니다.
잠들기 전 급하게 적어, 아무래도 불충분한 부분이 있을 겁니다.
믿음이 있으니, 부처님께서 마음도 정화해 주시는...
설령 상대방을 번거롭게 할지라도, 적절한 지적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6가지 알아차림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관념과 마음상태등'> 에서 관념과 마음상태를 알아차림한다는 것을 모르겠습니다.
색성향미촉의 대상은 안이비설신에 대응되는 것이라 호흡연습을 한 바에 따라 무엇에 집중을 할 것인지 알겠지만, 관념과 마음상태는 집중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본글에 보면 ['부처님이라는 생각'과 '그 생각에 의존해 발생한 마음상태'를 구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 '그 생각에 의존해 발생한 마음상태'에 집중한다.]고 되어 있는데 <마음상태>라는 것은 내가 그 마음상태에 집중하려고 하는 순간 흩어져버리지 않을까요?
또 한가지 마음상태를 알려면 어디에 집중을 해야하는지도 모르겠고요
요즘 시간을 내어 호흡연습 등을 하지 못합니다. 노력은 없이 질문만 한다는 것이 무례한 것 같아 지난번 질문을 지웠는데요. 그렇긴 하더라도 그 부분이 이해가 되질 않아서 ..
위 본글은, 제 딴에는, 불교를 전혀 몰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적었습니다. 그래서 불교용어도 없죠? 그리고 어디까지나 [ "예비" 지식 ]이므로, 좀 어려운 사항은 배제했으며, 일단 [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 ]을 대상으로 알아차림하는 것을 고려해 적었습니다.
[ 관념과 마음상태등 ]에서, '마음상태'는 '상온+수온+행온'이구요, '관념등'은 여러 유형인데요. 아주 쉽게 말하면, 본글에서도 적었듯, '기억'을 생각하면 됩니다.
집중의 대상으로 삼기에 적합한 '관념과 마음상태등'은 무엇인가? 마음상태 즉 '상온-수온-행온의 덩어리'는, 그 자체로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뭉텅거려 잡을 수도 있고, 분해해 붙잡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집중 연습이 어느 이상 되어야만, 붙잡을 수 있습니다.
'관념등'은 어떤가? 어느 정도 연습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아주 강렬한 기억이 아닌 다음에야 잘 붙잡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연습이 되어 있는가?'에 따라, 붙잡기 위해 요구되는 강렬함에는 차이가 납니다. 기법에서 취급되는 것으로는, '내면의 빛', 본글이 언급한 '매끄러워진 촉감', '내면의 소리'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소위 '기'나 '쿤달리니'와 같은 것도 있습니다. '기'나 '쿤달리니'는, 어떤 경우에는 빛으로, 어떤 경우에는 촉감으로, 드물게는 소리로 나타납니다. '육체적 맛'이나 '육체적 냄새'를 기억으로 전환시키는 경우는, 기법에서 잘 취급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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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라는 생각'과 '그 생각에 의존해 발생한 마음상태'에서, '그 마음상태'에 집중하려는 순간 '그 마음상태'는 흩어져버리지 않는가?
위 꼬리말에서 적었듯, 어느 정도 집중 연습이 되어 있지 않으면, 알아차리려는 대상을 처음부터 놓쳐 버리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집중은, 과거에 적었듯, 붙잡는 힘이구요, 형성하는 힘입니다. 집중력이 강하면, 미세한 것을 잘 붙잡고(분별해 내고), 미세한 것을 더 잘 형성합니다.
마음을 개발한다는 것, 불교에서의 소위 명상은요. 형성력이 빼어나기에, 형성력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려줍니다. '형성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음부터 형성력을 버리는 일'은 애초 가능하지 않은 말장난입니다.
아...질문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좀 이해가 됐습니다. 법구경 들으며 부처님을 떠올릴때 마다 행복감에 젖곤 하는데요. 앞으로는 그러한 '행복함의 마음상태'에 집중해봐야겠습니다. 집중연습이 충분치 않은 저로서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세우지 않으면 허뭄도 없다. 더 나아가 세우는게 허무는 거다. 그런즉 무아가 선명하려면 '나'를 세워야 한다.] 이거 제가 참 좋아하는 문장인데요.. 위 댓글에 비슷한 문장이 또 나오네요.
[불교에서의 소위 명상은요. 형성력이 빼어나기에, 형성력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려줍니다. '형성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음부터 형성력을 버리는 일'은 애초 가능하지 않은 말장난
입니다.]
불교수행에서 집중력이 약하다면 사마타는 물론 사띠도 가능하지 않겠군요. 세워야 허물 수 있으니까요.
세상일이 정말 어려워서 잘 안되기 보다는, 단지 익숙하지 않아서 잘 안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뭐...익숙해지면, 아무것도 아닌... 그거 한다고 돈 생기는 것도 아니고, 더 잘나지는 것도 아니고, 단지 익숙하지 않다고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어쨌든 '부처님을 떠올려 발생한 경건하고 고요한 마음상태'를 분별해 파악하는 유형의 작업은요, 불교의 '마음 개발 연습'에서 흔하게 이루어지는 작업이긴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붙잡기 위해 노력해 봤어야,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선명히 알 수 있습니다. 붙잡는 노력도 해보지 않고 붙잡을 수 없다고 말해봐야, 별 다른 감동이 없어요. 바로 자기 자신에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