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 미사일 50년 (상) -
핵과 미사일은 한마디로 말해 ‘환상의 궁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현대전에서 폭격기에 핵탄두를 탑재해 떨어뜨리는 것은 비효율적이라 할 수 있겠다. 현대 방공망은 핵폭격기에게 심각한 위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핵포탄으로 만들어서 쏘는 것도 여의치 않다. 현존하는 야포의 최대사거리가 40킬로미터대임을 감안한다면, 이 역시도 핵을 가지고 있는 자들로서는 불만족스러운 사거리일 것이다.
반면에 재래식 탄도탄이라 불리는 것은 개별적으로 그 파괴력에 있어서는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탄두중량이 커봤자 1t인 상황에서 이걸 아무리 날려봤자 전술적 효과는 미미하다 할 수 있다. 물론, 심리적으로 상당한 위압감을 줄수는 있겠지만, 그 가치는 1톤짜리 폭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것이다. 웬만한 전폭기의 무장 능력이 4,5톤을 훌쩍 넘어가는 요즘 세상에 1톤짜리 폭탄은 빛바랜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재래식 탄도탄의 위력과 한계를 잘 보여준 것이 이란-이라크 전쟁 말기에 있었던 ‘도시전투’라 불리는 이란과 이라크의 미사일 전쟁이다. 당시 이란과 이라크는 서로의 도시에 대고 스커드 미사일 변종들을 가지고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양국의 수도 주민들은 패닉상태에 몰려 도시를 떠나려 했었고, 도시는 공황상태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 탄도탄에 의한 피해는 여타의 다른 공격체제에 비해 미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만약 이 탄도탄과 핵이 결합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핵이 가지고 있는 약점, 즉 투발수단의 불안정성과 탄도탄이 가지고 있는 약점 ‘한방이 부족한 점’이 일거에 해결되는 것이다.
이번 호 연재는 북한과 남한의 탄도탄 개발역사를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한다. 남과 북이 어떤 방식으로 미사일을 얻게 되었고, 어떤식으로 미국의 압력을 받았는가에 대해서 이 두개의 국가만을 비교해 풀어 보려 한다.
1960년대
1960년대를 말하자면, 한반도에 미사일이라 불리우는 탄도체를 유일무이하게 가진 미국과 미사일이란 것을 처음 접하게 되는 북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때까지 한반도에서의 미사일이란 '미국이 가지고 있는 병기'라는 개념이었다. 이미 1958년 제7 보병사단을 팬토믹 사단으로 개편하면서 어네스트 존을 정식으로 편제 하에 넣었고, 그 이듬해 마타도어(Martardor) 크루즈 미사일 1개 중대를 배치한 미국은 적어도 미사일에 있어선 한반도의 절대 강자였다. 문제는 어네스트 존을 제외한 마타도어(Martardor), 메이스(Mace) 미사일이란 것은 북한을 상대하기 위한 투사무기가 아니라 북한 너머에 있는 중국과 소련을 겨냥함으로써, 한반도 자체에 과도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와중에 북한은 80년대에 도래할 미사일 개발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1963년 |
이집트와 북한 수교...이후 북한 미사일 개발의 주요한 변수로 자리잡게 된다. |
1969년 ~70년 |
이시기 북한에는 프로그 3, 5, 7형이 단계적으로 소련으로부터 들어왔다. 그 동안 주한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어네스트 존에 열세였던 상황을 만회할 수 있었다(유도체에서는 만회했을 지언정 탄두에서는 상대할 수가 없었다. 이때 당시 어네스트 존은 핵탄두를 탑재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프로그나 어네스트 존 둘다 미사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둘 다 무유도 로켓이란 점이다. 즉, 유도나 조종이 불가능한 커다란 로켓탄이라 보면 될 것이다. |
소련제 프로그 5 미사일
1970년대
1970년대는 한국과 북한 미사일 개발 역사상 질풍과도 같은 시기였다. 한국은 닉슨독트린의 충격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자주국방을 부르짖는 와중이었기에 눈을 불을 켜고 미사일 개발에 나섰고, 북한 역시 69년부터 들여오기 시작한 프로그 무유도 로켓을 분해해 역조립하면서 생산 기술을 익히고, 더 나아가 중국에 기술진을 보내 미사일 개발 기술을 획득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또한 이후 북한 탄도탄 개발의 주요한 변수가 되는 제4차 중동전이 발발한다. 이 시기 남북은 미사일 개발에 골몰했던 것이다.
1970년 |
2월 18일 닉슨 독트린 발표. 한국 핵개발의 기폭제가 된 닉슨 독트린... 당시 베트남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던 미국은 결국 [탈아시아 정책]을 내놓게 된다.
"미국은 아시아 및 극동에 있어, 우방군이 핵공격이 아닌 형태의 공격을 당할 경우 군사와 경제적 지원만 제공하며, 당사국은 美 지상군 병력의 지원을 기대하지 말고 제1차적 방위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발언을 듣고 한국은 패닉상태에 빠지게 된다. 불과 6개월 전인 1969년 8월에 개최된 한미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은 계속 주둔한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였기에 그 충격은 더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은 ‘다시는 아시아 대륙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함으로써 패닉상태에 빠진 한국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주한미군에 대한 철군이 없을 것이란 낙관론이 있었는데, 바로 베트남에 대한 파병 때문이었다. |
1970년 |
6월 북한 경비정에 의한 한국 선박의 납북사건이 터졌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직속 기구로 국방과학 연구소의 창설을 검토. |
1970년 |
7월5일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는 70년 6월 30일 ‘미군 철수는 한국군의 현대화가 완전히 달성되어 우리의 전투능력이 북한을 훨씬 능가하게 되는 70년대 후반까지는 있을 수 없다’라며 당시 언론에서 흘러나온 ‘주한미군 철군’에 대한 관측기사를 전면 부인하게 된다. 그러나 이 발표가 있은지 1주일 뒤인 7월 5일 사이공에서 개최된 월남 참전국 회의에 참석한 로저스 미 국무장관은 함께 참석한 최규하 외무장관에게 "주한미군 2만 명을 철수하겠다"는 정식 통고를 했다. |
1970년 |
8월 대통령령 제 5267호로 국방과학 연구소 창설. 산하에 무기개발위원회라는 비밀기관 설립. |
1971년 |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과 3개 공군비행대대가 철수, 같은 시기 비무장지대의 최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제2사단도 서울 북방 휴전선 근처로 이동 배치. 이 때 주한미군 제7사단의 장비 중 어네스트 존 1개 대대분이 한국군에게 이관된다. 당시 어네스트 존의 장비이관은 북한의 프로그 시리즈에 대한 대비책이라는 명분에서였으나, 미군이 보기에도 이 어네스트 존이 너무 낡았기에(1953년에 첫 양산형이 나왔다. 전세계 유일하게 지금까지 어네스트 존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유지관리비가 많이 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1979년 주한미군의 마지막 어네스트 존 대대가 철수하면서 이 장비도 한국군이 인수하게 된다. 이 시기 북한은 프로그의 배치를 마치고, 이 프로그의 분해에 들어갔다. 프로그 양산을 위해 분해 역조립의 수순을 밟은 것이었다. 북한 탄도탄 개발 역사의 시작이었다. |
1971년 |
12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유도탄 개발지시’를 내리게 된다. 이후 다방면으로 미사일 개발 추진에 대한 기술 타전을 하게 된다. 결론은 우리나라에 지대공 미사일로 들여온 나이키 허큘리즈(아직도 국내 방공미사일로 자리잡고 있다. 진공관을 사용하는 것으로 그 당시에도 구형이었다)의 지대지 미사일로의 변환이었다. 당시 맥도널 더글라스사(나이키의 제조사)에 타전해 180킬로미터의 사정거리를 240킬로미터로 늘리는 계약을 추진하였지만, 3천만 달러라는 막대한 금액을 요구하는 통에 일단 예비가능성 검토라는 것을 하자고 해서 180만 달러짜리 계약을 추진하게 된다. 결국 ADD의 요원 10명이 가서 MD사의 기술을 요령껏 배워와 그 뒤의 계약을 체결하지 않게 된다. 배울건 다 배웠다는 것이다. |
1973년 |
10월 제4차 중동전(욤 키푸르 전쟁) 발발. 제 1,2,3차 중동전과 달리 이집트 군이 이스라엘군을 초전에 압도하게 된다. 지대공 미사일과 보병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의 위력을 전세계에 보여준 이 전쟁기간 동안 북한은 이집트와 ‘혈맹’수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바로 북한 공군의 파견이었다. 당시 북한은 Mig-21 1개 비행중대와 파일롯을 파병했다. 이집트와 북한의 밀월관계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게 된 시발점이었다.(이후 이집트 군은 보유한 스커드B 탄도탄의 운용유지와 후속지원을 북한에게 부탁하게 된다. 당시 소련과의 외교관계가 급랭하였기에 이집트는 혈맹인 북한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
1974년 |
1차 율곡사업(1974~1981) 시작 |
1974년 |
5월 박정희 대통령 ‘유도탄 개발에 관한 기본방침’ 재가. 당시 문제는 아무리 프랑스 기술을 들여와 추진체나 유도탄을 개발해도 기본 설비는 미국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경우 미 국방부에서 군수물자 및 군수물자 제조용 장비 수출을 제한하는 MCB(Munition Control Board)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결국 ADD는 미국과 협상을 하기에 이르른다. 장비를 들여올 수 있는 허가를 받는 대신에 미사일의 성능을 조절하는 타협이 이루어졌는데, 타협안은 사거리 180킬로미터(휴전선에서 평양까지의 직선거리) 탄두 1천파운드 미만이었다. 이후 한반도 미사일은 MTCR에 가입하기 전까지 대체로 이 정도 수준에서 미사일 개발을 하게 된다. |
1976년 |
북한이 탄도탄 기술진들을 중국에 보내게 된다. 이들은 사거리 600km 탄두중량 0.5t의 DF-61 탄도탄 개발계획에 투입된다.(이들은 약 2년간의 개발 끝에 1978년 북한으로 귀국한다.) |
1976년 |
12월 2일 대전기계창 준공, 본격적인 유도탄 개발에 돌입. 그 동안 한국이 개발한 추진체의 성능시험이 이날 있었는데, 이것을 본 미국측에서 대전 기계창에 CIA요원 2명을 상주시키겠다고 통보했으나 한국측이 거부. 기술은 프랑스에서, 추진체 설비는 미국에서 들여오게 된다. (ADD의 서울본부에는 미 고문관실이 따로 있어 한국의 무기개발 프로젝트를 일일히 감시하였다) |
1978년 |
4월 한국 유도탄 개발에 성공한다. 최초의 한국 유도탄 1호가 개발된다. 그 뒤 9월초에 제 8호기까지 완성시키게 된다. 3호부터는 시험발사에 성공한다. |
1978년 |
9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참관하에 국산 유도탄 공개 시험발사 성공. 한국 지대지 탄도탄 백곰의 등장. |
1979년 |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 |
1970년대의 상황은 한마디로 질풍노도의 미사일 개발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1970년 닉슨독트린에 의해 촉발된 자주국방에 대한 열망으로 박정희는 한국의 유도탄 개발을 지시했고, 미국의 딴지 속에서도 결국 유도탄 개발 계획은 성공했다. 그러나 이 유도탄 계획이 성공한 다음이 문제였다. 박정희 암살 이후 이 미사일은 그야말로 붕 뜨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거래(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정권을 인정받는 협상) 때문에 애써 개발해 낸 미사일 개발 인프라와 인력체계는 공중분해된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핵이나 미사일 모두 애초엔 한국이 먼저 개발하면서 북한을 자극하였으나, 전두환 정권이 정권을 인정받기 위한 거래가 하면서 80년대 대한민국의 미사일+핵 기술은 허공위로 산산히 흩어졌다는 것이다. 당시 F-16 라이센스 개발 계획은 가계약 단계였고 덤으로 A-7 공격기 라이센스권도 가져올수 있었는데, 전두환 정권은 이걸 팔아 넘기고, F-5...우리들의 기억속엔 제공호로 남아있는 시대에 뒤떨어진 경전투기 15% 녹다운 생산 방식으로 바꾸어 한국 공군력을 근 10년 넘게 후퇴시켰다 (김영삼 정부때 실행된 KFP사업의 선정기가 F-16이었다). 또한 핵무기의 반납과 미사일 개발의 후퇴도 전두환의 작품이었다. 그나마 미사일의 경우는 아웅산 테러의 여파로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다 할 수 있겠다.
1980년대
1980년대는 한마디로 말해 남북한 모두 미사일의 자국생산기술 획득의 시대라 할 수 있겠다. 애초 미사일 개발에 먼저 뛰어들었고 그 실력 역시 우위에 있었던 한국이 전두환 정권의 정권 안보 차원에서 이 미사일 기술을 '금단의 병기'로 규정해 봉쇄한 사이 북한은 차근차근 미사일 개발에 나섰고, 여기에 이란-이라크 전이 터지면서 북한은 비약적인 탄도탄 기술을 축적하게 된다(여담이지만 이란-이라크전은 한국과 북한이 동맹이 되어 이란을 밀게 되면서 전혀 색다른 남북협력을 하게 되었던 전쟁이기도 하였다).
1980년 |
1월 이집트 무바라크 부통령(당시 부통령 - 사다트가 1981년 10월에 암살된 다음 대통령으로 올라서게 됨)이 북한을 방문하게 됨. 이당시 이집트와 북한은 서로 탄도탄 미사일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정도로 친밀해진 상황이었음. 이때 무바라크 부통령은 북한에게 스커드B 탄도탄 2기를 제공하겠단 약속을 하게 됨. 이 2기의 미사일이 북한 탄도탄 미사일 개발사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음. 북한은 이 두발의 미사일을 분해, 역조립하는 방식으로 탄도탄 미사일에 대한 기술을 습득하게 된다. |
1980년 |
5월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
1980년 |
5월 31일 국보위 설치, 상임위원장에 전두환 취임 |
1980년 |
8월 ADD소장이며 미사일 개발의 총지휘자였던 심문택 박사 해임, 뒤이어 30여명의 핵심 기술자와 미사일 개발의 중추였던 이경서 박사, 강인구 박사등 미사일 개발의 핵심 브레인들이 줄줄히 ADD에서 숙청당함. 숙청의 배후는 주영복 국방부 장관이었음. 5.18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를 미국쪽에 제시하고, 더불어 전두환의 미국방문을 성사하기 위한 정치적 대응이었음. |
1981년 |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이 전쟁으로 북한은 탄도탄 개발의 비약적인 발전기를 맞게 된다. 이란과 이라크가 서로간의 도시에 대해 무차별적인 미사일 전쟁을 벌이면서 미사일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게 된다. 당시 이라크의 후세인은 소련측으로부터 지원받은 스커드 미사일을 갖가지 재주(?)를 피워 개량한다. 탄두를 줄이고 미사일 동체를 연장시켜 사거리를 늘린 알-후세인 이나 알-압바스 등을 생산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란은 이렇다할 미사일이 없었다. 1979년 축출된 팔레비 정권 때까지만 해도 미국의 혈맹으로 갖가지 호사스런 무기를 거리낌 없이 사올 수 있었으나 (대표적인 것이 F-14전투기 였다. 미국 이외의 국가에 F-14가 팔린 역사가 없다. 값도 값이지만, 미국이 어지간히 믿지 않는 경우에 이런 최신 전투기를 팔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호메이니옹의 등장으로 이야기는 180도 달라진다. 미국이 일절 지원을 막아버린 상황에서 있는 전투기들도 부속품과 후속지원 부족으로 고철이 된 상황 (결국 F-14는 그 강력한 레이더를 무기로 해서 조기경보기로 쓰이곤 하였다)에서 미사일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 였다. 그렇다고 소련에 손벌리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북한이 나서게 된 것이다. 이란은 북한으로부터 스커드B의 개량형을 구하게 된다. 결국 자금과 관련장비는 이란이 지원하고 기술은 북한이 제공하는 방식으로 해서 미사일을 개발하게 된다.
한가지 아이러니컬한 상황은 이란-이라크 전에서 한국도 이란에 무기를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팔레비 왕조시절 공군력은 미군장비 일색으로, 육군은 영국군 장비 일색으로 통일했던 이란은 그 장비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았다. 물론 이란-콘트라 게이트 같은 건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우방국들, 그러니까 미국의 무기를 사용하는 국가에서 이란에게 지원을 해주는 방식이 활용되었다. 미국 역시 이란의 몰락을 원치는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 창구로 이용된 나라중 하나가 한국이었는데, 이란-이라크전 당시 이란공군의 747 점보 여객기가 한국의 성남 공항으로 날아와 F-4 팬텀의 부속품과 각종 군수물자를 싣고 갔다.
(당시 이라크의 알-후세인 미사일 제조방법은 지극히 간단했다. 우선 온전한 형태의 스커드 B형을 3발 준비한다. 이중 한발을 해체하여 다른 두발의 동체를 연장한다. 그리고 남은 탄두와 유도부 로켓모터에 새로 만든 ‘탄체’를 조립하여 3발의 알-후세인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이 스커드 미사일 자체가 2차대전의 유물이었기에 최신형 미사일처럼 로켓 모터가 연소를 마치면 탄두부가 본체에서 분리되어 목표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미사일 자체가 통짜로 날아가는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방식은 공기저항에 의해 속도가 떨어지고, 결국 날아가는 것이 흐트러져 명중률에 심각한 악영향을 가져오게 된다. 더더군다나 이런 스커드를 누더기로 분해해 다시 용접한 알-후세인의 경우는 날아가다가 공기저항을 이기지 못해 똑 부러지는 상황이 연출되곤 하였다. 이 덕분에 걸프전 당시 스커드에 대한 요격이 어려워졌다. 날아가는 중간에 똑 부러지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알-후세인의 경우 원형공산오차가 2,000미터 정도로서, 정확한 타격을 위해서 날아오른다고 볼 수는 없었다. 말 그대로 날으는 전봇대였다) |
1982년 |
12월 ADD에 새로운 소장이 취임하게 됨. 바로 김성진 소장(육사 11기)이었음. 훗날 과학기숯처 장관의 자리에까지 올라서게 된 김성진 소장은 당시 ADD 총인원(2400여명)의 1/3이나 되는 800여명을 감원하며 대대적인 숙청에 들어가게 됨. 미국측에 한국은 미사일 개발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제스쳐였음. |
1983년 |
북한과 이란, 탄도탄 개발 관련 상호지원협정 체결. 북한은 기술을, 이란은 자금과 관련장비 지원을 약속하게 됨. |
1983년 |
10월9일 미얀마 아웅산 묘소에서 폭탄테러 발생. 전두환 구사일생으로 생명 부지, 귀국 후 북측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주문하게 됨. 그 일환으로 나온 것이 바로 박정희 정부 때 개발해 놓은 백곰미사일의 ‘실전배치’였음. 백곰 미사일의 실전형 개발 재개 명령이 내려짐. 주영복 국방장관 백곰미사일의 실전형 개발에 앞서 미국측에 ‘사거리 180킬로미터, 탄두중량 1000파운드’라는 1974년 5월의 약속을 공식화 하였음 |
1984년 |
4월 23일 북한 스커드 B의 불법복제(?) 미사일 개발 성공 및 발사 실험. 발사는 성공했으나 CEP(Circular Error Probability 원형공산오차 : 탄착 정밀도)가 형편없었다는 후문, 발사성공과 함께 개량작업에 들어감(사정거리 300Km, 탄두중량 1t) |
1984년 |
10월 미국 뉴욕에서 이란인 사업가가 탄도탄 유도장치에 사용되는 전자부품을 구매해 북한에게 전해주려다 발각됨. |
1986년 |
LG정밀에서 현무미사일 양산체제 구축. 이후 1999년까지 상당수량의 현무가 배치되었다. 450~600Kg의 이중목적 고폭탄(DO-ICM)을 탄두로 장착하고 있는 현무는 100미터라는 CEP를 자랑하지만, 탄두가 재래식 탄두란 점과 발당 가격이 10억원 정도란 점에서 비효율적인 무기체계라는 일각의 평가를 들어야 했다. 유사시 북한의 비행장과 주요거점에 대한 공격을 그 임무로 하고 있다. |
1986년 |
5월7일 북한 스커드 C의 실험발사 성공(사정거리 500Km, 탄두중량 770Kg). 이당시 북한의 스커드 C개발의 이면엔 이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이라크가 개발한 알-후세인과 알-압바스에 대응하기 위해선 사거리가 연장된 스커드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있었고, 알-후세인이나 알-압바스처럼 탄두 중량을 줄이고 동체를 연장하는 방식으로 사정거리를 늘리자는 의견이 나오게 됨. |
1987년 |
4월 평양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 스커드 B 불법복제 탄도탄의 양산체제 구축. 이후 본격적으로 이란에 스커드 B 불법복제 미사일을 수출하게 된다.(이란은 약 90~100발의 북한제 미사일을 수입하게 된다) |
1987년 |
10월 1일 국군의 날 여의도 광장에서 백곰미사일의 실전형인 ‘현무미사일’일반에 공개 됨 |
1988년 |
12월29일 일명 ‘도시전쟁’이라 불리우는 이란과 이라크간의 미사일 전쟁 발발 52일간 상대방 도시로 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함, 공포병기로서의 스커드의 영향이 확인됨. |
1989년 |
북한 노동1호 미사일 개발에 착수. 일전에 개발된 스커드C형과 달리 노동의 개발은 상당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89년과 91년에 각각 발사관 내부에서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났으며, 늘어난 사거리만큼 CEP가 커지는 부작용이 속출하였다. |
현무
1980년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남한과 북한 공히 미사일 개발에는 성공 했으나 각기 다른 길을 걸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남한의 경우는 전두환 정부가 미사일 기술을 봉쇄하였다가 아웅산테러 이후 70년대 개발된 백곰 미사일의 양산형인 현무를 개발했고, 이조차도 미국의 눈치를 보며 배치하게 되었다. 그나마도 탄두가 재래식이란 점과 가격 대비 효과의 비효율성 때문에 말이 많은 상황이었다.
반면 북한의 경우는 이란-이라크 전쟁이라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 덕분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1990년대 들어 본격적인 미사일 수출과 노동, 대포동으로 이어지는 미사일 바리에이션의 토대를 구축하게 된다.
1980년대는 한 국가의 정권이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만약 ADD에 대한 대규모 숙청이 없었다면, 지금쯤 대한민국의 미사일 개발기술이 어디까지 올라섰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