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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군 마을 유래
(16개=1개읍 15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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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여읍 마을 유래
구아리(舊衙里)
부소산의 나무숲과는 거리가 떨어진 지금은 부여 도시의 중심가이며 오늘과 같은 부여시가가 형성되기 전에는 백제 때부터 백성을 다스리는 관청이 있었던 지역이다.
백제 때에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후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에는 공주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현내면의 지역이었다.
백제 멸망 후 부여에서 가장 타격이 심했던 유민들의 이동으로 한 때 마을이 폐허화된 모습으로 가장 크게 변한 지역으로 손꼽을 만하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말기까지 500년간 부여의 중심지로 발전해 나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현내면의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홍문리 일부를 병합하여 부여군청이 있었던 지역임으로 구아리라 하고 부여군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그 뒤 부여면 구아리, 읍 승격으로 부여읍 구아리가 되었다.
1980년 5월 구아 1, 2, 3리로 분구되었다가 1995년 2월 구아 4리로 재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리의 면적은 0.42㎢이며 1,309가구에 3,891명의 인구를 갖고 있고 부여시장이 있는 상업 중심 지역이다. 구 부여 경찰서 자리가 백제때 천왕사(天王寺) 절터로 확인된 명문이 양각된 기와 편과 백제때 정(井)자형 우물이 발굴되었으며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공원을 조성하였다.
지금도 구아리를 홍문거리, 옥터(옥뒤), 절터 등으로 부르고 있다.
관북리(官北里)
관북리는 부여의 진산인 부소산 남쪽에 위치해서 백제시대에는 왕궁이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관아가 있었던 지역의 북쪽이며 지금에는 찬란했던 백제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백제 때의 유물을 전시했던 부여 박물관이 자리했던 지역이며 마을 전체가 왕궁터로 알려지는 마을이다.
조선 초기에는 부여현 현내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홍문리, 흑천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관북리라 하고, 1960년 읍 승격과 함께 현재의 부여읍 관북리가 되었다.
1916년 국보 제196호인 금동석가여래삼존입상(金銅釋迦如來三尊立像)과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리의 면적은 0.22㎢이며 267가구에 740명이 살고 있다.
관북리는 흑천(黑川) 마을 또는 학(鶴)샘 마을로도 불린다. 큰 비가 오면 이상하게 검은 물이 흐르는 냇가 옆의 마을이라 흑천(黑川)으로, 부소산 입구에 큰 샘이 있어 물이 좋고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학샘이라 부르며 마을도 학샘마을이라 부른다.
쌍북리(雙北里)
부여의 진산인 부소산을 중심으로 그 둘레 위쪽을 쌍북리라 부른다.
백제 때는 백제의 중심지였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군에 고려 때에는 공주에 한 때 속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현내면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 말기 정착한 진천송씨의 번창과 이어 다른 씨족의 정착으로 활기를 찾기 시작한 곳이 쌍북리 일원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현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쌍구리(雙九里)와 북포리(北浦里), 흑천리(黑川里)의 각 일부와 몽도면(蒙道面)의 석교리(石橋里) 일부를 병합하여 쌍구와 북포의 이름을 따서 쌍북리라 하고 부여군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쌍북리가 되고 1960년 읍 승격에 따라 부여읍 쌍북리가 되었다.
쌍북리는 1980년 1, 2, 3리로 분구되었다가 94년 주공아파트의 건설로 4리까지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쌍북리 면적은 2.47㎢이며 2,037가구에 6,789명이 거주하고 있다.
부소산성(扶蘇山城), 낙화암(落花岩), 조룡대(釣龍臺), 군창지(軍倉址) 등 백제 때의 고적(古蹟)이 많이 있는 지역이다.
뜸별로는 거무내(흑천), 뒷개(북포), 사근다리가 있다.
구교리(舊校里)
구교리는 백제시대부터 형성된 마을로 백제시대의 빙고(氷庫)와 구드래 나루터가 있던 곳으로 빙고리(氷庫里)와 학서(鶴棲)를 병합시켜 옛날에 부여향교가 있던 곳이라 하여 구교리(舊校里)라 칭하였다.
백제 때는 왕궁의 영역이였으며 조선시대에 백마강 건너 규암면 진변리와 청양군 청남면과 왕래하는 나루터로 융성되었던 지역이다. 본래 부여군 현내면의 지역으로 구드래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빙고리, 학서리 일부를 병합하여 구교리라 하였다.
특히 구드래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전하는 것처럼 돌석 「구들돌」이 있는 동네에서 어원이 유래하였다.
구교리의 면적은 1.66㎢이며 552가구에 인구는 1,590명인데 80년대 초에 조성된 구드래 공원은 생활공간으로 바뀌어 조각 작품 등이 세워져 있고 읍민들의 휴식공간이고 백제문화제 행사장으로 각광을 받는 지역이다.
뜸별로는 백제때 빙고가 있었다고 빙고재라 하고, 고개아래 있는 마을을 빙고리라 하며 장승이 있어서 장승마을들이 있다.
동남리(東南里)
백제 때에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에는 공주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현내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는 부여군 현내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동산리, 마천리, 신대리, 남산리, 학서리 일부와 대방면의 탑동 일부를 병합하여 동산과 남산의 이름을 따서 동남리라 하고 부여군에 편입되었다가 그 후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동남리에 이어 1960년 읍 승격에 따라 부여읍 동남리가 되었다. 1948년 동산(東山), 마천(馬川)으로 구분되었다가 1980년 동남 1, 2, 3, 4, 5로 분리되었고 1990년 동남 6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리 면적은 1.67㎢이며 2,420가구에 인구는 7,788명이다.
동남리는 동남 2리 전 지역이 상가지역이며 그밖은 거의 주거지역으로 되었고 고적으로는 백제 때의 정림사지(定林寺址) 오층석탑, 궁남지 등이 있으며 부여군청 등 행정의 중심 역할을 하는 마을이다.
뜸별로는 백제의 마동왕자(무왕)가 신라의 선화공주와 이곳에 살다가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마을로 마래마을, 부장대가 있었다고 부장골, 향교가 있어서 향교골이 있다.
군수리(軍守里)
군수리는 백제때 군사들이 주둔하였던 곳이라 번창하였으나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입으로 황폐화되어 잡초만 우거졌다가 조선 중엽부터 촌락을 형성하고 군수(軍守)들 또는 군수평(軍守坪)이라 불려졌다. 백제시대에는 꽃다운 여성들이 찬란한 옷차림으로 이곳을 왕래하였다 하여 꽃정 또는 꽃노들(곶노들)이라 불리워졌으며, 두루미 마을은 백제때 문무백관들의 수뇌가 모여 회의장소로 쓰던 누각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군수리 [군숫들, 군수평]는 본래 부여군 현내면의 지역으로 백제때 군사가 주둔하였던 들이므로 군숫들 또는 군수평(軍守坪)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군수리라 칭해져 오다 군수·신기(新基)로 분구되고, 군수 1, 2리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군수리 지역은 81년도에 취락구조 마을이 생겨 도시근교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마을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마을 주변의 넓은 농지는 수박 및 단무지 생산의 주된 마을로 타 농촌 마을보다 윤택하다.
리의 면적은 2.87㎢에 이르고 302가구에 인구 1,022명이 거주하고 있다.
뜸별로는 백제때 군사가 주둔하였던 지역에 마을이 생겼다 해서 군숫들, 군수평이라 부르고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해서 새뜨말, 신대리(新垈里), 백제의 성터인 나성(羅城)이 있는 마을이라 성말, 정자를 짓고 잘살수 있도록 노력하는 새마을이라 신기정(新基亭)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또한 사비성의 외곽성인 나성이 있고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座像)과 금동미륵보살입상(金銅彌勒菩薩立像)이 발굴되었으며 많은 연화문와당과 유물이 출토된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가 있다.
가탑리(佳塔里)
백제 멸망후 백제유민들이 이주해 와서 정착하면서 고려 초기에는 마을이 대단위로 늘어났으며 지금 구장터로 불리우는 장소는 고려 초기부터 장이 섰던 자리라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대방면의 지역이었는데, 이 고장에 처음 집성마을을 형성한 것은 고려 말기 예천임씨 가문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대방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가속리와 오산리 탑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가속과 탑리의 이름을 따서 가탑리라 하고 부여군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부여군 부여면에 1960년 1월 1일자로 부여읍 가탑리가 되었다. 1990년 2월에는 가탑 1, 2리로 분구되었다.
가탑리 면적은 2.23㎢이며 가구는 287에 920명이 살고 있다. 가탑리 탑골은 전에 탑이 있었기에 불리워진 이름으로 이곳에 석등 연대석이 있었는데 부여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가탑리에서 능산리로 가는 모퉁이를 탱종모롱이라 부르고 옛장터가 있던 곳을 구장터라고 한다. 용바위라는 곳은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고, 백제 때의 나성으로 능산리와 용정리와의 경계를 이루고 동쪽에 동문지와 동문교지가 있어 동문다리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금성산 동쪽 기슭에 두시럭골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는 예천임씨 문중의 제각인 경모각이 있다. 농민도장이라는 뜸은 1930년대 농민교육장으로 사용하던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그후 학교 분교로 사용하다가 철거되었는데, 철거된 지금에도 농민도장으로 불리운다.
농민도장 동북편 국도변에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1979년 15동을 신축 입주하였으며 그 주변 국도 4호선 국도변에 90년말 녹원빌라가 2000년대에 부여고등학교 옆에 빌라 3동이 생겨 도시 형태로 되어가고 있다.
나성의 동문지(東門址)가 확인되기도 했으며 연화문와당이 발굴된 가탑리사지가 있고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도 가탑리 폐사지에서 발굴되었다.
왕포리(旺浦里)
백제 때에는 사비군의 지역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군의 영역이었고 고려 때에는 한때 공주군에 속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대방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포구로 더욱 활발했던 대왕포는 금강의 강경 입포와 함께 많은 상인들이 드나들었으며, 특히 봄 가을로 서해안에서 소금과 새우젓을 싣고 오는 상선이 이곳을 기항지로 택해서 많은 사람들로 붐볐었다.
조선시대부터 여흥민씨가 집성마을을 이루었으며, 현재 집성마을을 이루고 있는 예천임씨의 60여호가 처음에는 조선시대 초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대방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구포리, 왕호리, 대왕리, 구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왕리와 구포의 이름을 따서 왕포리라 하였다. 이후 현내면에 속했다가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왕포리에 이어 읍 승격에 따라 부여읍 왕포리가 되었다.
리의 면적은 1.59㎢이고 가구수는 114호에 인구 390명이다.
백제 때에는 금강물이 바로 마을 앞으로 흐르는 큰 포구로 임금님이 궁남지에 올 때면 이 포구까지 소요하며 나들이 하던 포구라 하여 대왕포라 하였으나 지금은 강물의 유로가 변경되어 마을 앞에는 기름진 옥토의 대왕펄이 생겨 특산물로 수박이 유명하다.
중정리(中井里)
백제 때에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시대에는 한때 공주군에도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대방면의 지역이었다.
마을의 형성은 백제때 이미 큰 마을이 조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여 거주하였으나 백제 멸망 후 마을은 차츰 쇠퇴해 갔으며 고려시대 초기에는 마을의 맥이 끊길 정도로 쇠퇴하였다. 그러나 중정리 북동쪽에 정착하는 의성김씨와 문화유씨의 피땀어린 개간으로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여 오늘의 농경지 조성에까지 이르고 있다.
중정리는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대방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중리, 동리, 당리, 구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중리와 구정의 이름을 따서 중정리라 하였고,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그 뒤에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중정리가 되고 이어 읍 승격에 따라 부여읍 중정리가 되었다.
중정리는 염창리와 백제 때의 나성지로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황바우 나루를 통해서 장암면과 왕래하였고, 나성 끝에 치마같이 생긴 옷바위가 있서 옷배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백제가 망할 당시에는 옷바위 밑으로 금강물이 흘렀던 바 이곳까지 삼천궁녀가 나성을 따라 적군을 피하여 오다가 물에 떨어져 죽었다 하여 낙화암이라고 불린다. 군돌고개 밑에 모시골이라는 마을은 백제때 지금의 여관촌인 모숙골에서 연유된 지명이라 하며, 마을 북쪽에 있는 상봉을 당산이라 하여 매년 정월 망일 저녁에 천제를 지내어 마을의 안전과 풍년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마을 앞에 제방을 축조한 후로는 홍수피해 등의 재해의 우려가 없기에 폐지되었다.
현재 중정리의 면적은 3.94㎢이며, 가구수는 186호에 인구수는 597명이다
또한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된 중정리건물지(中井里建物址)가 있고 당산마을 산정에서 화장분묘(火葬墳墓)로 추정되는 4기의 용기도 발견되었다.
염창리(鹽倉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나당군이 침공해 들어올 때는 백제군이 고군분투한 전장터가 염창리였으며 사비성이 무너진 후에도 백제군이 산발적인 투쟁으로 끝까지 백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군사들의 무덤이 많았던 지역으로 손꼽힌다.
고려 때는 한때 공주군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마을의 형성은 백제 때부터 이루어져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초기에 정착한 탐진최씨가 정착하면서 대마을 단위로 발전해 나갔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대방면의 지역이었다.
백제때 의염창(義鹽倉)이 있어서 염창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상염리, 하염리, 군석리 일부와 석성군 북면의 염창리 일부를 병합하여 염창리라 하였다가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염창리로, 다시 1960년 읍 승격에 따라 부여읍 염창리가 되었다.
면적은 3.21㎢에 가구수는 166호이며 인구수는 417명이다.
80년대 초에 상염마을에 한국조폐공사 부여조폐창이 건립되었다. 군돌마을에는 백제군이 파진산에서 패하고 최후로 나성을 수비할 때 수차의 접전에서 거듭된 패전으로 군사의 수가 너무나 약세이므로 군석 뒷산인 필서봉을 중심으로 군사들을 빙빙돌도록 하니 신라군이 즉시 침공을 하지 못하여 왕을 피난토록 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군사들이 돌던 곳이라 하여 군돌이라 하고 이를 한자로 군석(軍石)이라 표기하였다.
이 군석마을은 조선 성종조 사헌부 감찰과 삼등현령을 지낸 최응하(崔應河)가 폐허된 마을에 입촌하여 주거케 되었던 바 필서봉 아래인 이곳에 살면 학자가 끊기지 않는 길지라 입촌하였다 한다. 동편마을에 최씨 제각인 영모재(永慕齋)가 있고, ‘성안이’는 나성 안에 있는 마을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북리(縣北里)
백제 때에는 진악산현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후에는 석성현에 속했었다.
고려 때에는 석성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엔 석성현 북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석성군 북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노상리, 노화리, 월경리, 염창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조선시대에 현북면이 있었으므로 현북리라 하여 부여군 석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에 부여읍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5.32㎢에 가구수는 162호이며 인구수는 517명으로 거의 농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2000년 대규모 경지정리 사업으로 인하여 특용작물 재배면적이 확대되고 현북제방 보수공사로 매년 수해지역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현북리는 원래 석성현 북면지역으로, 현북 1리는 노상, 노상리 지역으로 희여티라 불리우며, 이곳은 산의 생김새가 군사요지로 백제때 기마병의 훈련장으로 사용됐다는 구전도 있으나 실증할 수 없고 사원지는 희어대라는 추정과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지대석이 산재해 있다. 현북 2리는 월경, 나말 석성말의 3개 뜸으로 구성되었으며, 나말은 라씨들이 사는 마을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말 도선대사(道詵大師)가 전국을 순회할 때 오석산하 남7리인 이곳에 운중반월(雲中半月)이라는 명당이 있다고 하였으며, 지명에 월경, 달아래들, 자무내 등이 있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또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된 백제 때의 절터인 임강사지(臨江寺址)가 있고 백제금동보살입상(百濟金銅菩薩立像)이 발견된 현북리폐사지(縣北里廢寺址) 등의 고적이 있다.
능산리(陵山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는 공주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초기는 부여현 대방면의 지역이었다. 백제 때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현재의 자리를 견지한 마을 형성은 조선시대 초기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말기는 부여군 대방면의 지역으로서 백제의 왕릉이 있었기 때문에 능뫼, 능메, 능미 또는 능산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체마리(遞馬里), 산막리(山幕里)와 오산리(烏山里), 군석리(君石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능산리라 하였고 읍의 승격에 따라 부여읍 능산리가 되었다.
부여읍 능산리는 능산 1, 2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백제때 삼산의 하나인 오산은 이 산의 형국이 까마귀형이라 하여 오산(烏山) 또는 오석산(烏石山)이라 하였다. ‘치마수’동네는 백제때 군사들이 말타는 훈련장이었다는 야마소 전설이 있고, 백제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이 있는 심방골 뒷산은 소의 형국으로 소의 유(乳)통위치에 능이 있다. 체마소 뒷산은 써래산이라 하여 소가 써래를 끌고가는 형국이라는 전설이 있다. 1979년 새마을 취락구조개선사업으로 한식가옥 12동을 오석산 아래에 신축하였다. 또한 이곳은 왕릉관리사무소와 능산리에서 1993년도 백제금동대향로의 발견으로 더욱 유명하다.
현재 능산리의 면적은 4.24㎢이며 가구수는 168호, 인구는 470명이다.
뜸별로는 능산, 도마동, 체마소, 신직말, 오산으로 부르고 있다. 앞으로 논산 부여간 고속도로가 마을 중앙을 지나가게 되어 있어 농지의 감소와 교통의 편리함 등으로 도시 근교의 형태로 바뀌게 될 형편이다.
석목리(石木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때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때에 이미 큰 마을이 있었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때에는 불교의 요람지였었다. 그러나 백제 멸망후 마을은 차츰 쇠퇴해갔으며,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러 다시 마을이 살아나 정리해 나갔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몽도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는 진목리, 용전리, 석교리 일부를 병합하여 석교와 진목의 이름을 따서 석목리라 하였고 부여군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그후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석목리가 되었고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부여읍 석목리가 되었다.
면적은 1.18㎢에 가구수는 213호이며 인구는 675명이다.
석목리는 백제시대의 나성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나, 백제의 멸망과 함께 페허가 되었다가 조선중기 1600년경부터 함열남궁씨와 동래정씨가 입촌하였다.
본 마을은 석교리와 진목리를 병합하여 석목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마을 안에 노은사란 절이 있어 이의 준말로 논절이라는 이름도 붙여진 듯하다. 쌍북로타리에서 논산 공주방면 국도 안에 있는 곳을 ‘만괭이들’이라 하는데, 이는 백제가 망할 때 의자왕이 웅진(熊津)으로 피난함에 만광이란 복술가가 왕의 행방을 알려줌으로써 백제인들이 만광이를 죽이고 그 집터에 연못을 파니 이곳이 만광지(萬光池)로 만괭이 방죽이라 하였으며, 가탑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만괭이고개라 부른다. 노은사지(老隱寺址)에는 석불좌상이 있는데 이 불상이 안질에 효험이 있다는 속된 말이 전해 내려와 옛날에는 안질이 나면 불상 앞에 달려가 부처의 얼굴을 긁어다 안약대신 사용했다 하며, 이로 말미암아 안면 부분의 손상이 매우 심한 상태다. 1979년에 새마을 취락구조 개선사업으로 32동의 주택을 신축 입주하여 취락구조뜸이 형성되었고, 90년대 초에 농산물 공판장 설립과 함께 주변에 무지개 빌라가 들어서 도시근교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용정리(龍井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에는 한때 공주군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대방면의 지역이었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 때로 보나 마을의 형성은 백제 멸망 후라 한다. 그러나 그 마을을 이룬 씨족은 자연적 이동 또는 지연이 끊기고 오늘에 뿌리한 그 조상의 처음 정착은 고려말기의 창원황씨로 지적된다. 창원황씨의 정착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시대 말기는 부여군 대방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석정리와 소룡리, 용전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용전과 석정의 이름을 따서 용정리라 하였다.
면적은 3.22㎢이며 가구수는 200호, 인구는 666명이다.
용정리는 조선시대 이인도찰방에 딸린 역(驛)이 있었던 곳으로 용전과 용관으로 분구된 후 용정1, 2, 3리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밭 또는 용전(龍田)은 소정방이 조룡대(釣龍臺)에서 용을 낚아채니 이곳에 떨어져 썩어 밭이 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전설이 있다.
마을 동쪽에 청마산성지와 경룡사지 및 의열사지가 있고 마을 남쪽 엄방골에 깎은 듯한 바위에 네모진 금이 있는 책(冊)바위는 백제가 망하자 중요한 서적을 이곳에 감추었다는 전설이 있다.
가증리(佳增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는 부여군으로, 고려 때에는 한때 공주에 속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초기는 부여현 몽도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정착한 영양천씨와 이어 남양홍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기 시작하여 가증리의 뿌리로 오늘날까지 그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으로서 동남쪽에서 흘러와서는 가증리의 중심을 뚫고 서남쪽으로 흘러서 금강으로 들어가는 냇물 가징개가에 있으므로 가징개 또는 가증이라 부르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분대리를 병합하여 가증리라 했고, 부여군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현내면을 부여면으로 고침에 따라 부여면 가증리가 되었다. 이후 1960년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부여읍 가증리가 되어 1995년 2월 가증1, 2리로 분구되었다.
면적은 1.93㎢이며 가구수 130호에 인구 409명이 거주하고 있다.
고적으로는 청동기시대로 추산되는 석관묘(石棺墓)가 발굴되어 마제석검과 석촉 등 다수가 출토되었다.
정동리(井洞里)
백제 때는 사비군, 신라때는 부여군에 속했다.
고려시대는 공주군에 속하기도 하였고 조선시대 초기 부여현 몽도면(蒙道面) 지역이었으며 한양조씨와 광산김씨의 정착으로 집성마을을 이루면서 마을이 조성되어 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몽도면 지역에 큰 샘이 있었으므로 샘골 또는 정동(井洞)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몽도면 정동리와 소룡리 일부 및 현내면 북포리 일부를 합병하여 정동리라 칭하였으며, 정동, 와봉 2개 행정리로 구분하여 정동1, 2리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동 1리는 마을 안에 큰 샘이 있었으므로 샘골이라 하였으며 지금도 샴골로 통하고 있다.
정동 2리는 백제때 기와를 구웠던 곳이라 하여 어얏골[瓦峰]이라 하였으며 규암면 호암리로 가는 범바위 나루와 청남면 왕진리로 가던 독정이 나루가 있었으나 버스 교통의 편이로 지금은 없어졌다.
정동리의 면적은 4.64㎢이며 198가구에 인구 591명이 살고 있다.
80년대 초까지 성했던 잠업은 경지정리와 특용작물의 재배로 사향화 되었으며, 앞으로 백제 큰길이 정동 1리 꿩바위 뜸으로 길이 나면 강변과 함께 송림사 등이 있어 관광지로 각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왕리(自旺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부여군에, 고려 때는 한때 공주에 속하기도 하였다.
구전에 따르면 나당군이 사비성에 쳐들어왔을 때 의자왕(義慈王)이 주장산(珠藏山)을 넘어 도망갔다 하여 이곳 마을을 주자왕리(走自王里)라 하였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러나 주자왕리는 주장산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그 산에 연유하여 내린 지명이 바른 해석이 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몽도면의 지역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기에 자왕리에 정착하는 금녕김씨 그리고 전주이씨의 정착으로 지역이 번성해가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으로서 주장산 아래가 되므로 주장왕이 또는 주장왕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송정리, 저채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자왕리라 해서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뒤에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자왕리, 그리고 읍 승격에 따라 부여읍 자왕리가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입구에 마을이 생김으로 즉 먼저 마을이 있는데 또 생김으로 동구머리라 부르다가 변하여 도구머리, 주장산 아래 마을이 있으므로 주장, 주자왕이 등의 마을이 있다.
마을 중앙으로는 국도 40호선이 통과해 교통이 편리하며 마을 주민 대다수가 특용작물을 재배하는 전형적인 농업이 주가 되는 마을이다.
리의 면적은 2.68㎢이며 가구수는 100호에 인구는 304명이다.
앞으로 백제 큰길이 자왕리를 경유하여 강가로 통과하게 되면 주장산 강변의 경치 좋은 곳이 되리라 본다.
송곡리(松谷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때에도 그쪽의 영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몽도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예천임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하기 시작하여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룬 곳이 송곡리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송삼리, 하수락리, 대곡리를 병합하여 송삼과 대곡의 이름을 따서 송곡리라 하였다. 부여군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7년 4월 1일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송곡리가 되었고 1960년 읍 승격에 따라 현재의 부여읍 송곡리가 마을 주민의 요청에 따라 1, 2리로 분구되었다.
리의 면적은 3.63㎢이며 89가구에 인구는 251명이 살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두 냇물이 합치는 곳에 마을이 있으며 물이 떨어져서 고이듯 수량이 풍부한 마을이라 수락, 수대라 부르고, 마을이 북쪽으로 안쪽에 자리하고 있어 북안(北安), 부거니 등으로 불리는 마을도 있다.
상금리(上錦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때에도 그쪽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몽도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예천임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면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어 밀양박씨가 또 다른 지역에 마을을 형성하면서 조선시대 말기에는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수락리, 금암리, 회정리, 죽학리, 보각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수락과 금암의 이름을 따서 상금리라 하였다. 후에 현내면에 편입되었고 이어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상금리가 되고 읍 승격에 따라 부여읍 상금리가 되었다.
상금리의 면적은 3.67㎢로 가구수는 78호, 인구는 204명이다.
뜸별로는 ‘벌터’ 마을이 있는데, 이 이름은 벌집의 형국이라는 풍수설에 유래되었다고 한다. 일찍이 밀양 박씨가 조선중기에 회정리에 입촌하여 살았는데 하루는 스님이 찾아와 며칠 유숙을 하고 떠나면서 하는 말이 주인한테 신세를 진 빚을 갚겠다며 훌륭한 자손을 바라느냐, 아니면 당장 돈을 바라느냐고 물으매 우선 호구지책이 모연한 실정이라 하니 한 곳을 알려주며 백회(白灰)가 나올 곳이라 함에 그곳을 파보니 과연 백회가 나와 이를 팔아서 먹고 사는데 걱정을 안했다 하며, 이로부터 회총골이라 불려졌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장군봉 밑에 회를 팠던 큰 구덩이가 남아 있다.
장군봉 아래 보물을 넣어둔 것 같은 명당자리가 있다해서 보각곡(寶角谷), 보각리(寶角里)라 하는데, 이 바위에 불공을 드려 가정과 마을이 번창하여 갔다 할 정도로 바위의 덕으로 번창하는 마을이다. 또한 금암, 금암리 등의 마을들이 있다.
송간리(松間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고려 때에는 한때 공주에 속했으나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몽도면의 지역이었다. 마을이 형성되기는 조선시대 초기 광산김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해 나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갈동(葛洞), 중간리(中間里), 저채리(楮菜里), 송정리(松亭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송정과 중간의 이름을 따서 송간리라 하였다. 부여군 현내면에 편입되었다가 뒤에 면명 개칭에 따라 부여면 송간리가 되었다가 1960년 읍 승격으로 부여읍 송간리가 되었다.
송간리의 면적은 1.77㎢이며 74가구에 236명이 살고 있다.
뜸별로는 칡넝쿨이 많은 마을이라 해서 갈울, 갈동, 마을에 소나무 정자가 많이 있다 해서 송쟁이, 소정이, 송정등의 마을이 있다.
저석리(楮石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는 한 때 공주군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마을의 형성이 상당히 빠른 지역이다. 백제 이전의 취락 형성으로 지적하기도 하나 마을의 형성은 백제가 부여에 환도하기 이전부터 형성된 것 같다. 그러나 하천을 이용하는 산업의 발달로 백제때 이미 마을의 형성을 보았으며 고려시대까지 꾸준히 농경지 조성이 따르던 지역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이었으며 한양조씨와 광산김씨의 정착으로 집성마을을 이루면서 마을은 더욱 번성해 갔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부여군 몽도면의 저채리, 석탄리, 유촌리와 공주군 반탄면의 서원리를 병합하여 저채와 석탄의 이름을 따서 저석리라 하였다.
저석리를 3개 행정리로 분구할 때 저동 내유촌 서원이라 칭하다가 저석 1, 2, 3리로 개칭하였다. 옛날에는 금강물이 버드랭이와 돌을 앞으로 굽이쳐 흘렀다한다. 돌은 돌여울의 준말로 고려말 충신 이존오(李存吾)가 귀양을 와서 살던 곳으로 그의 호 석탄(石灘)은 돌여울의 지명을 따서 스스로 지었다 하며, 당시 그가 살던 석탄정터가 전한다.
저석 1, 2리는 조선초엽의 안동김씨의 입촌마을이다. 저석 3리는 조선때 공주군에 속했다가 1914년 부여로 편입된 곳으로 조선중엽에 평택임씨와 담양전씨가 입촌하여 거주하면서 뒷산에 산신당을 짓고 당산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매년 음력 정월 망일에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내는데 제사를 지낸 미역을 부녀자가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도 간소하나마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현재 저석리는 면적 3.50㎢, 가구수 168호, 인구는 517명이다.
앞으로 백제 큰길이 나게 되면 부여의 관문 역할을 하게 되리라 본다.
마을별로는 옛날에 망루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다 해서 버드랭이, 마을 주변에 당나무가 많이 있어 저채뜸, 저채, 저동(楮洞), 저채리(楮菜里) 등의 마을들이 있다. 또한 인조(仁祖) 7년(1629년)에 창건된 창강서원(滄江書院)이 있으며 추포(秋浦) 황신(黃愼)을 제사지내고 있다. 그리고 이마을에는 1940년대까지 성시를 이루었던 왕진(지)장터가 있다.
신정리(新正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 고려때에도 그쪽의 영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몽도면의 지역이었다. 함양박씨가 조선시대 초기에 정착을 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여 이 고장의 뿌리를 조성하였다. 이어 전주이씨가 또 다른 이 지역에 마을을 형성하면서 차츰 농토가 조성되고 길이 트이기 시작했다 한다.
신정리는 본래 부여군 몽도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대리(新垈里) 일부와 공주군(公州郡) 반탄면(半灘面)의 서원리(書院里), 정곡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대리(新垈里)와 정곡(正谷)의 이름을 따서 신정리라 하였다.
리의 면적은 2.80㎢에 가구수는 82호이며, 인구는 252명이다.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가 백제 큰길 인터체인지가 되고 부여 청남간 다리가 완공되면 교통은 더욱 편리해지리라 본다.
또한 90년대의 경지정리로 특용작물 재배가 활발해졌으며 그동안 한해 우심마을이었느데, 많은 소형관정 개발로 수리안전율이 매우 높아진 마을이다.
마을별로는 큰 동네의 대울은 대나무가 무성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큰대울, 작은대울 뜸이 있고, 공주군에 편입된 동쪽 골짜기를 정배실「正谷」이라 부르는 마을들이 있다.
2. 규암면 마을 유래
규암리(窺岩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인류의 정착은 신석기시대로 보기도 하지만 구석기시대 수렵인들이 정착하였던 지역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부여에 백제가 천도하였을 때는 한촌이었으나 여러 갈래로 드나드는 길이 있어 강을 건너던 휴식처임을 짐작할 수도 있다.
백제 말기 나당군의 침공이 있을 때는 전쟁터였으며 사비성이 나당군에 의해 점령된 후에는 백제부흥군의 요람지였다. 그러나 도무재에서 700여명의 백제군이 저항하다가 모두 전사한 후부터는 그 성과 함께 다시 한촌으로 변해 갔다.
고려 때에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있는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군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진주강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마을을 형성해 갔으며 이어서 조선시대에 청주한씨가 정착하여 두 가문의 집성촌으로 지금에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 지역으로 엿바위가 있으므로 엿바위 또는 규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자온대(自溫臺), 수북정(水北亭)이 있다. 부풍사(扶風祠)라는 사당이 있고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초삼일 자온당산제(自溫堂山祭)를 지내고 있다. 1968년 백제교가 놓여지기 전에는 부여를 왕래하던 규암나루가 현재 유람선 선착장으로 이용되었고 한때는 활기가 있던 규암시장이 교통의 발달로 부여의 영향권에 속하게 되어 쇠퇴하였다. 영농조직으로는 규암원예작목반 22호, 규암싸작목반 43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으며 규암리에는 면사무소, 규암파출소, 규암농협, 규암우체국, 규암예비군면대, 백제권개발사업소 등의 기관단체가 위치하고 있다. 또한 부여팔경(扶餘八景)인 수북정청람(水北亭晴嵐)과 규암진귀범(窺岩津歸帆)이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자온대에 오르면 역사의 흥망성쇄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리의 면적은 0.62㎢, 가구수 380호, 인구는 1,060명이다.
자연마을로는 엿바위와 새터가 있다.
외리(外里)
백제 때에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백제 때에는 어부들과 상인들이 배를 몰고 금강을 출입하는 기착지이기도 하였다 한다. 외리의 인류 정착도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부터이다. 육지로부터 인류가 강변에 흘러와서 정착한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금강을 따라 올라가고 내려 다니던 선인(船人)들에 의해서 정착이 시작되고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말이 구전으로 전하기도 한다. 그만큼 신라시대까지는 수로를 필요로 하는 지역이었으며 육로보다 백마강이 더욱 소중한 지역이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는 부여군 내륙지방으로 드나드는 상선들이 대왕포를 지나 이곳이 정박지였다 한다. 조선시대 중기부터 순천김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의 지역으로 내리에 있는 여울의 바깥이 되므로 바깥말이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내리(內里), 검복리(檢卜里), 돌리(乭里), 임천군 북박면 석우리(石隅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외리라해서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외리산성, 외리폐사지가 있다. 1997년 밭 경지정리가 실시되었고 영농조직으로는 딴펄수박작목반 44호, 돌말수박작목반 14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으며 무, 배추, 수박의 집산 단지이다. 외리에는 부여정보고등학교, 농업기반공사 부여출장소 등의 기관이 위치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금봉(金鳳)이 알을 품는 형국[金鳳抱卵形]의 명당이 있다 해서 붙여진 금봉마을이 있으며, 마을에 돌이 많고 마을 중앙에 호랑이가 앉아 있었다는 커다란 바위가 있어 돌말[石村]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딴펄마을은 원래 이 지역이 백마강변에 위치한 섬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려졌다고 한다.
리의 면적은 3.01㎢, 가구는 621호, 인구수는 2,069명이다.
내리(內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고나서 강변을 지키는 성이 쌓였던 지역이며 그 성벽은 금강의 범람으로 많이 허물어졌으나 아직껏 유적이 남아 있는 지역이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 지역이었다. 토착민들이 오랫동안 들을 개간한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이르러 김해김씨와 순천김씨의 정착으로 더욱 발전한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의 지역으로서 여울 안쪽이 되므로 속뜸 또는 속말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반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내리 성터가 있으며 1966년도에 규암면에서는 처음으로 경지정리를 실시한 마을이나 기계화영농이 불편하여 1997년 재경지정리를 실시하였다. 영농조직으로는 여울호박작목반 7호, 여울수박작목반 17호, 내2리수박작목반 29호의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정관장 홍삼으로 유명한 한국인삼공사고려홍삼창이 위치하고 있다.
리의 면적은 3.06㎢, 가구수는 250호, 인구수는 794명이다.
자연마을은 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북새기[北石], 백마강여울 안쪽이 되므로 속뜸, 내리, 마을 앞에 여울이 있으므로 여울, 대장간이 있는 마을이라 풀뭇간 등의 마을이 있다.
반산리(盤山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에 인류의 정착과 함께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백제 멸망 후 많은 정착민과 함께 농경지 개간에 따라 큰 마을을 형성하였던 지역이다.
그후 신라, 고려 때를 지나면서 비옥한 땅과 함께 부촌을 이루기도 하였으며 비교적 여유가 많은 지역이 반산리 주변이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의 지역이었다. 원거인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생활을 누렸으나 오늘날까지 뿌리내린 씨족은 없으며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전주이씨가 정착하고 집성촌을 이루면서 현재까지 이어오는 지역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의 천을면 지역으로서 소반모양의 산이 있으므로 소반뫼 또는 반산(盤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걸산리(杰山里), 신대리 일부를 병합하여 규암면 반산리로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반산성(盤山城)이 있으며 규암초등학교, 백제중학교, 육군7연대 3대대, 장애인종합복지관의 기관이 위치해 있다. 반산저수지 인접에 2001년 대동황토방아파트 402호가 준공되었고 현재 무지개임대아파트 300호가 공사 중에 있다.
리의 면적은 1.66㎢, 가구수는 407호, 인구수는 1,188명이며 자연마을에는 소반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소반, 소반뫼, 반산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고, 백제 때의 반산성(盤山城)이 있다.
합송리(合松里)
규암면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북쪽으로는 반산저수지를 두고 서쪽으로는 구룡면에서 돌출해 오는 야산지대가 위치해 있다. 동남쪽으로 넓은 들녘이 있으며 소나무가 많아 송당(松堂)이라고도 한다. 반산저수지를 이용한 수원이 풍부하여 비교적 부촌을 이루어 오는 지역이기도 하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고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송당면(松堂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교하노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해 나갔으며 이어 경주김씨가 정착하였다. 연안차씨, 남양홍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농경지를 조성하여 점차적으로 발전을 거듭한 지역이다. 우리나라 농촌으로서 특히 충청도 농촌으로서 그 전통적인 농촌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역이며 농촌의 전통을 제대로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송당면 지역으로 면소재지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 송동리(松東里), 송서리(松西里), 노화리(蘆花里) 일부를 병합하여 송동과 송서를 합하였다는 뜻으로 합송리라 하였고, 이후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합송리에는 합송초등학교, 백제어린이집, 규암농업협동조합 종합미곡처리장이 위치해 있고, 또한 합송우체국이 1972년에 개국하여 2000년에 규암우체국에 통폐합되기도 하였다. 반산저수지 인접지에 2001년 강산아파트 263호가 준공되었다.
리의 면적은 5.07㎢(면내 총면적의 10.8%)이고, 가구수는 425호 인구수는 1,331명이다.
자연마을은 옛날에 소나무 우거진 곳에 당집이 있었다 해서 송당(松堂), 마을지형이 장구목처럼 생겼다 해서 장구동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노화리(蘆花里)
규암면의 서쪽에 위치해서 북쪽으로는 야산지대를 넘어 반산저수지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넓은 들을 차지한 들녘에 노화리는 위치한다. 서쪽으로는 구룡면과 경계를 이루고 들녘에는 옛날부터 갈대가 많아 갈대꽃 명당이라는 노화부수 자리가 있다 하여 노화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면서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마을이 형성되었던 지역이다. 백제 멸망 후 사비성을 피하는 사람들이 정착하여 이 지역 여러 곳에 마을이 생겼다 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송당면의 지역이었다. 경주이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오늘의 뿌리를 내리는 중추적 씨족으로 남은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송당면의 지역이었다. 지형이 갈고지, 즉 갈고랑이처럼 생겼다 해서 갈고지 또는 갈구지 또는 노화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홍산군 해안면(海岸面)의 지경리(地境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규암면에 노화리로 편입되었다.
노화리에는 부여군 농업기술센터가 위치하고 있으며, 리의 면적은 2.45㎢, 가구수는 201호, 인구수는 563명이다.
자연마을은 마을지형이 갈고랑이처럼 생겼다 해서 갈고지, 노화, 구룡지(九龍池)를 만들 때 저수지 속으로 수몰되는 마을을 이주시키고 마을을 형성했다 해서 이민촌이라 불리는 마을도 있다.
부여두리(扶餘頭里)
규암면의 남쪽에 위치해서 그 남쪽으로는 금강에 유입하는 금천이 활대 모양으로 굽이쳐 흐르고 그 북쪽으로는 광막한 들이 광범위한 지역에 부여두리는 위치한다. 남쪽의 금천은 큰 물이 지날 때마다 지형의 변화가 있있으며 부여 지역에서 농부가가 우렁찼던 지역으로도 꼽는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다. 백제 멸망 후에는 사비성의 왕족들이 정착했다고도 전해오며 백제때 이곳에는 만호(萬戶)가 살은 마을이라 해서 만가대(萬家垈) 마을이 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이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정착했던 씨족은 고려, 조선시대를 겪으면서 분산되어 그 뿌리는 이 곳에서 찾을 수 없으며 조선시대에 정착한 기계유씨들이 한때 집성촌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 부여, 홍산(鴻山), 임천(林川)의 세 고을의 경계가 되는데, 이곳에서부터 부여로 들어가는 머리가 되므로 부여머리 또는 부여두리(扶餘頭里)라고 불렀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잉불리(芿不里)를 병합하여 규암면에 부여두리로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02㎢, 가구수는 59호, 인구수는 130명이며, 자연마을에는 부여머리, 잉불, 만가대가 있다.
수목리(秀木里)
부여에서 떨어진 농촌지대이나 반산저수지가 생김에 따라 그 문화적 혜택이 빨라졌으며 고유한 풍속을 지닌 고장으로도 알려졌다.
백제 때에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참나무가 많은 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숯을 많이 생산하였던 지역으로 전해지며 조선시대부터 한산이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간지대로는 너무나 토속적인 과일나무가 많아서 감을 비롯한 대추의 생산지로도 알려졌으며, 시목(枾木)골의 감은 한양에서도 손꼽히는 감으로 유명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송당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월학리(月鶴里), 시목리(枾木里)와 가좌면(加佐面)의 수천리(秀川里), 외경리(外敬里) 일부를 병합하여 수천과 시목의 이름을 따서 규암면에 수목리로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3.30㎢, 가구수는 103호, 인구수는 296명이며 자연마을로는 빼내라는 냇물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빼내, 감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시목골, 대추나무가 많은 마을로서 풀이 우거진 지역이라 초동(草洞)이라 불리우는 마을이 있다.
석우리(石隅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었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가 부여로 천도하기 전이며 마을의 형성도 그때 이미 이루어졌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해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에는 부여군의 송당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여러 성씨가 정착하여 큰 마을을 이룬 지역이라고 구전으로 전해오나 지금까지 뿌리를 둔 가문은 없다.
조선시대 초기에 진천송씨가 정착하였고 서당산(書堂山) 아래 서당 또는 쑥이이 마을은 옛날부터 산세가 좋은 곳으로 낮은 야산지대이나 선비들이 따로 초막 또는 산막을 짓고 소일하던 곳으로 시조에 능한 선비가 대를 이어 전해왔다는 구전도 전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의 송당면의 지역으로서 마을 모퉁이에 돌이 많이 있으므로 돌모루 또는 석우동(石隅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석우리라 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충덕사(忠德詞)라는 사당이 있는데 충덕사에는 조선 숙종 때의 명신 김우항(金宇杭)을 배향하고 또한 전주이씨 열녀비가 있다. 1966년과 1972년 경지정리가 실시되었고 영농조직으로는 라석 수박작목반이 조직되어 20여호가 참여하고 있다.
리의 면적은 0.88㎢, 가구수는 81호, 인구수는 253명이다.
자연마을은 마을 모퉁이에 돌이 많으므로 돌모루, 석우동은 옛날에 서당리라 부르다가 변하여 쑥댕이, 숙당리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나복리(羅福里)
규암면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백제 때에는 사비군에 속했다. 백제 멸망 후에는 사비성에서 두메를 찾는 사람들이 정착하여 초지와 들을 개간하여 조선시대까지 비교적 부유한 환경을 누렸던 지역이라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군 천을면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 말기부터 탐진최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고 조선시대에는 순천김씨, 담양전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원거하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의 지역으로서 지역이 마치 소라가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나복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건지리(乾芝里), 월구리(月九里), 학곡리(鶴谷里), 신대리 일부를 병합하여 나복리라 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나복리선사유적지(羅福里先史遺蹟地), 나복리지석묘(羅福里支石墓), 김진행정려비(金鎭行旌閭碑)가 있다.
리의 면적은 4.60㎢, 가구수는 196호, 인구수는 619명이다.
자연마을은 건지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건지말, 소가 엎드린 형국이라 나복(羅福), 근처가 노승예불(老僧禮佛) 형국이라 바랑굴, 반달의 지형처럼 생겼다 해서 월구리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모리(茅里)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군이 경둔리에 주둔하여 이 지역까지 출동하여 나당군과 싸운 전쟁터였다고도 전하며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마을이 형성되고 부여의 외곽지대로 백제 토착민들이 오랫동안 그 맥을 유지하며 전통을 이었던 지역이라 전하며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의 지역이었다. 토착민들이 오랫동안 전통을 이으며 생활을 누려왔던 지역이나 이 지역에 오늘의 뿌리를 내리는 집성촌은 고려시대부터 정착한 고령이씨와 조선시대 정착한 여흥민씨의 정착으로부터 시작된 듯하다. 고려 때부터 정착하여 일시 맥이 끊긴 듯 하던 고령이씨들의 정착이 이 지역의 뿌리인 듯하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천을면의 지역으로서 띠가 많이 났으므로 띠울 또는 모동(茅洞)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때에 채야리(菜野里), 함양리(咸陽里) 일부를 병합하여 규암면에 모리로 편입되었다.
향토문화유적으로는 입암집판각이 있고 고적으로는 모리사지(茅里寺址)가 있다.
리의 면적은 1.68㎢, 가구수는 46호, 인구수는 146명이다.
자연마을로는 옛날에는 마을이 음달이 져서 검게 보인다고 해서 검은머리, 띠가 많이 나는 마을이라 띠울, 모동(茅洞)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함양리(咸陽里)
은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은산천의 하구에 넓게 펼쳐지는 들과 백마강으로 이어지는 바둑판 같은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 서서히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고려 초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함양리는 그 지역의 산세가 또한 수려하여 명당자리가 많다 해서 지관들의 발길이 끈기지 않는다고 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천을면(淺乙面)의 지역이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기계유씨들이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오늘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지역으로 풍부한 생활적 여건에서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의 영역을 조성했던 지역으로도 알려진다.
햇빛이 하루종일 내리는 지역이라 해서 함양(咸陽)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함양리라하고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함양리고분군(咸陽里古墳群), 함양리태봉(咸陽里胎峰), 유대칭묘(兪大稱墓), 청농정터[聽農亭址]가 있다.
리의 면적은 1.69㎢, 가구수는 89호, 인구수는 258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 전체가 햇빛을 잘 받는다 해서 함양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신성리(新城里)
백제 때는 백제부흥군의 주둔지구로 신라군과 피비린내나는 싸움이 이루어졌으며 조선 선조 때는 이몽학이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군사를 양성하던 지역으로 반란 이후 많은 고초를 겪었다. 조선 말기에는 동학 혁명시 책임자인 복주채를 체포하기 위하여 왜병이 마을을 방화 전소했던 어려운 고비를 겪기도 한 마을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이전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비교적 일찍 마을의 형성이 따랐던 지역이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아래 속했으며 조선시대 부여현 도성면(道城面)의 지역이었다. 밀양박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다 전주이씨가 정착하면서 오늘의 뿌리로 등장한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중리(上中里)를 병합하여 신대와 성산(城山)의 이름을 따서 규암면에 신성리로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신성리고분군(新城里古墳群), 증산성(甑山城), 사자봉산성(獅子峰山城)과 전설로는 성재산의 남매바위가 있고 정규환(鄭珪煥) 정려비가 있다.
리의 면적은 3.51㎢, 가구수는 85호, 인구수는 228명이다.
자연마을로는 강여울 안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강시울이라 부르고,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터, 신대, 증산성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성재 또는 성산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금암리(金岩里)
청양에서 발원된 지천이 흐르면서 호우가 내릴 때마다 금암리 북쪽에는 지형의 변화가 따른 듯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서 전망이 확 트인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때 동쪽 지천과 금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동남쪽으로 왕과 신하가 정사를 논하였다는 천정대(天政臺)의 서북쪽에 위치한 금암리는 군마가 주둔하고 백제 군사들의 요람지가 아니었던가 한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면서 사비성을 지키는 외곽성을 구축할 때 북쪽에 위치한 두윤산성(豆尹山城)으로 통하는 큰 길이 있었다고 전해오며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놓인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道城面)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 예천임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전에 토착한 성씨들과 함께 지역을 개간하고 농경지를 조성한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도성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장주리(長州里), 금사리(金沙里)를 병합하여 금사와 돌고개에서 이름을 따 금암리라 하고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문화재로는 금암리오층석탑(金岩里五層石塔)이 있고 고적으로는 포천석교비(浦川石橋碑)와 유진춘(柳震春)의 정려비가 있다.
리의 면적은 2.57㎢, 가구수는 85호, 인구수는 249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 바깥쪽으로 금모래가 깔려있다 해서 금사(金沙), 고개에 돌이 많으므로 돌고개라 하고 그 아래 마을도 돌고개라 한다. 마을 앞으로 강폭이 넓고 긴 냇물 안쪽으로 마을이 있다 해서 장수, 장주(長州)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호암리(虎岩里)
규암면의 동북쪽에 위치해서 동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지천이, 남쪽으로는 들이 펼쳐지며 서쪽으로는 옥천산(玉泉山) 아래쪽으로 펼쳐지는 야산지대와 들을 경계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게 면적을 차지한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에는 천정대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목이었으나 마을의 형성은 백제 멸망 후로 추정된다. 고려 때에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의 지역이었다.
금강변의 잦은 범람과 지형의 변화로 정착민이 오래 뿌리를 내리지 않았으나 고려 공민왕 때에 예천임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으로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호암리의 뿌리로 30여호가 거주하는 지역이다
뒷산에 범바위가 있어 범바위 또는 호암(虎岩)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상호암리(上虎岩里), 하호암리(下虎岩里)를 병합하여 규암면에 호암리로 편입되었다.
문화재로는 천정대(天政臺), 호암사지(虎岩寺址)가 있고 전설로는 천정대의 임금바위 신하바위가 있다.
리의 면적은 2.56㎢, 가구수는 41호, 인구수는 127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 뒷산에 호랑이를 닮은 바위가 있다 하여 범바위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합정리(合井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부터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추측되는 합정리는 북쪽과 남쪽으로 드나드는 길과 백제의 군마가 자주 지나갔다는 구전으로 보아 사람들의 발자국은 오래 전부터 서린 지역 같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문화유씨가 정착하여 한때는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이 고장의 뿌리로 전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도성면의 지역으로서 마을에 큰 우물이 있어 온 마을이 한 우물을 먹으므로 한우물, 합우물 또는 합정(合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수답리(水沓里), 신대리를 병합하여 규암면에 합정리로 편입되었다.
합정리에는 200여년 된 느티나무가 있으며, 2000년에는 한국전통문화학교가 개교하였고, 1997년 100만평 규모의 백제역사재현단지의 지반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리의 면적은 2.93㎢, 가구수는 91호, 인구수는 249명이다.
자연마을에는 물이 좋은 논이 많아서 수답리(水沓里), 무논골, 큰우물이 있어서 온마을이 합하여 한 우물을 먹는 마을이라 하여 한우물, 합우물, 합정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신리(新里)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면서 무왕때 완공하였다는 왕흥사(王興寺) 터가 이곳에 있으며 왕과 왕족들이 불공을 드리러 자주 드나들었던 지역이라 한다. 또한 백제 멸망 후에는 도무재 즉 울성산성(蔚城山城)에서 백제부흥군들이 나당군에 저항하다가 660년 11월 5일에 신라왕 무열왕(武烈王)이 이끄는 신라군과 접전 끝에 7일간 성을 사수하며 싸우다가 모두 전사한 백제군의 처참했던 도무재성터도 이곳에 있다.
고려 때에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초기부터 전주이씨가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어 현재도 70여호가 그 뿌리를 잇고 있는 지역이다.
조선 말기에는 부여군 도성면의 지역으로서 새로된 마을이므로 새말, 신촌이라고 부르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신구암리(新九岩里), 진변리(津邊里) 일부를 병합하여 신리라 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문화재로는 왕흥사지(王興寺址)가 있고 고적으로는 신리고분군(新里古墳群), 청간사지(淸澗寺址), 도무재산성, 청룡사(靑龍寺)가 있다.
리의 면적은 2.56㎢, 가구수는 107호, 인구수는 347명이다.
자연마을에는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해서 새말, 백제때 왕흥사가 있었던 마을이라 왕안이, 청간사 부근에 자리한 마을을 청간절[淸澗寺], 청간사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오수리(午水里)
남쪽의 오수리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금강물이 범람할 때 북쪽에서 떠내려와서 떠 있다는 부산(浮山)이 보이고 부여의 부소산과 구드래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에 인류가 정착한 지역이며 마을의 형성도 그때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오수리의 남쪽은 금강이 범람할 때마다 지형의 변화가 있었던 지역이며 남쪽 깊숙한 곳까지 물이 들어와 백사장을 이루는 듯하여 농경지로는 부적당한 지역이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의 지역이었다. 조선 연산군 폭정이후 신리와 진변리 등 인근 마을에서 정착하던 전주이씨와 제주고씨가 이주 설촌하면서 마을의 형태를 이루었고 그 후 파평윤씨와 인동장씨가 입촌하였다고 전해진다. 마을명 유래는 당시 전주이씨는 수원터, 제주고씨는 오실, 파평윤씨는 질목정, 인동장씨는 용추골, 기타 성씨는 다람골에 살어 뜸이 다섯이라 오곡(午谷, 五谷)이라 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오곡리, 신리, 수원리(水原里), 진변리(津邊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오곡(午谷)과 수원(水原)의 이름을 따서 오수리라 하여 규암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개교한 백강초등학교가 이 마을에 위치한다. 1999년 백제역사재현단지 편입지 이주민을 위한 53호의 문화마을이 조성되었다.
리의 면적은 1.96㎢, 가구수는 97호, 인구수는 270명이 거주한다.
자연마을에는 마을에 하늘로 용이 되어 승천한 용추가 있는 마을이라 용추골이라 불리는 마을과 다섯 골짜기가 있는 마을이라하여 오곡리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진변리(津邊里)
남쪽으로는 백마강이 흐르고 북동쪽으로부터 서쪽까지 바둑판 같은 전답이 놓여 있는 지역이다. 남쪽에 자리한 부산은 전설에 따르면 큰 비가 오고 금강 물이 범람하였을 때 북쪽으로부터 떠내려와서 이곳에 떠있게 되었다는 지역이다. 그리고 부산의 신령한 사람이 살아서 날아다니며 일산(日山)과 오산(烏山)의 신령한 사람과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산으로 백제말기까지 구드래를 앞에 두고 영산으로 알려져 신성시하는 지역이었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이전부터 인류의 정착이 있었으며, 마을의 형성도 이미 그때 이루어졌었다 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도성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제주고씨에 이어 완산이씨, 영월신씨가 정착하였다고 전하나 현재는 영월신씨가 맥을 잇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조선 효종때 명신 백강 이경여가 은거하였던 마을이고 명나라에서 가져와서 심은 동매(冬梅) 한그루가 보호를 받고 있다.
조선 말기에는 부여군 도성면의 지역으로서 백마강 나루의 가가 되므로 나룻가 또는 진변(津邊)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수원리 일부를 병합하여 규암면에 진변리로 편입되었다. 문화재로는 부산각서석(浮山刻書石), 백강동매(白江冬梅), 대재각(大哉閣)이 있고 고적으로는 부산성(浮山城), 부산서원(浮山書院), 청룡사지(靑龍寺址), 환문암지(喚文庵址)가 있으며 또한 가림조씨(嘉林趙氏), 연일정씨(延日鄭氏) 정려가 있다.
리의 면적은 1.47㎢, 가구수는 91호, 인구수는 272명이다.
자연마을로 백마강가에 있는 마을이라 백강, 나루터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진변(津邊) 또는 나룻가라고 불린다.
3. 은산면 마을 유래
은산리
은산면의 행정적 중심지이며 은산시장, 은산별신장으로 널리 알려져있으며 북쪽은 야산과 평지로, 그리고 남쪽은 넓은 들로 조성된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때의 백제군과 나당 연합군의 격전지였음은 은산 별신굿의 원인으로도 짐작이 가며 규암면 합정리 도무재 울성 싸움에서 마지막 한사람까지 성을 버리지 않고 싸우다가 전사한 백제군이 은산을 중심으로 한 은산사람들이었다는 전설을 통해서도 은산은 백제때 큰 마을과 군사가 주둔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백제 멸망 후 한촌으로 변한 이 지역은 고려 때에는 공주군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방생면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방생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에 이인도찰방에 딸린 은산역이 있었으므로 은산 또는 은산역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산직리를 병합하여 은산리라 하였다.
면적은 1.92㎢이고 304가구에 인구는 983명이다.
인접지 청양군 장평면 화산리 중석광산이 성황될 때는 은산리 장터의 광범위한 시장 거래로 성시를 이루어 상권경제의 명성을 떨쳤으나 광산의 폐광, 공업화시대로 변화, 인구의 급격한 감소, 교통수단의 발달 등으로 부여의 직접 영향권 내에 있어 현재는 소규모 도시지역으로 상권의 한계성이 있다.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9호로 지정된 은산별신제가 유명하여 별신당 앞에 1990년 은산별신제 전수회관(137평)이 건립되었으며 격년제로 별신대제가 거행되고 있다.
1991년 124,000㎡의 농공단지가 조성되었으며, 자연마을명은 1960년대 난민들이 정착하면서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하여 신흥동.버들, 옛날에 산지기가 살던 마을이라하여 산징말. 산직리, 산허리에 자리한 마을이라하여 선허리.산허리, 산 아래에 몇 호 있으므로 은산(隱山)이라 불리다가 그 후 역말이 생겨 역으로 인해 덕을 얻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은산(恩山)이라 불리우게 되었다고 전한다.
신대리
옛날에는 장마가 지면 금강이 범람하여 이 지역까지 물이 올라 수해를 당하였다 하는데 지금은 규암면 진변리의 방파제로 인해 수해의 위험이 없다.
백제 때는 이미 마을이 이루어져 사비군에 속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백제 유민들의 정착지였으나 행정구역상 부여군에 속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부여현 방생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기계유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조선시대 말기까지 부여군 방생면에 속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신대리, 대은리, 은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대와 대은의 이름을 따서 신대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2.31㎢이고 259가구이며 인구는 861명이다.
면소재지의 연접리로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예비군중대본부, 마을금고, 은산초․중학교 등 각 기관단체가 집중되어 있고 재래시장터가 있어 소재지인 은산리에 버금가는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에 부엉바위라는 바위가 있어 은산들의 덕을 크게 입는다 해서 대은리.부암. 부엉바위라 부르며,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태라 불리기도 한다.
또한 토기, 석기, 마제석검이 발굴되어 선사시대로 추정되는 지석묘가 있다.
회곡리
규암면 신성리와의 경계에 백제 때 축성한 것으로 보이는 성벽이 있고, 청양군 장평면의 넓은 들이 인접해 은산면에서는 비교적 들이 많은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부여에서 북쪽으로 왕래하는 큰 길이 이었기 때문에 주막이 있었으며 많은 행인이 쉬어가던 지역이라고 전한다.
농경시대로 접어들면서 가장 활발한 촌락을 이루었으며 백제 멸망 후 신라시대와 고려시대까지도 번창한 마을이 유지되었던 것은 동쪽에 펼쳐진 넓은 들의 영향이었다고도 한다.
고려 때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공동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순흥안씨가 집성마을을 이루면서 마을은 번창해 나갔으며, 또한 평산신씨의 정착으로 집성촌의 성격으로 더욱 지역이 발전해 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공동면의 지역으로 전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전나무골이라 불리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도성면의 구룡리를 병합하여 은산면 회곡리로 편입되었다.
면적은 1.63㎢이고 69가구에 인구는 222명이다.
백제 때의 토성인 은산 이중산성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성재, 새터, 양지뜸, 형제바위가 있다.
금공리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후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때 불교의 대가람인 금강사가 들어설만큼 지형이 수려한 지역이고 금강사가 들어서서는 백제인들의 정신적 안식처로 지목되었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공동면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 말기 고령신씨들이 정착하여 불당과 연관해서 마을을 형성해 갔으며 조선시대 중기에 이르러서는 집성촌이 등장하였고 그 후 신천강씨가 정착함으로써 들은 개간되고 마을은 부유의 길로 접어들었으니 불문의 대가람인 금강사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마을의 이름을 처음에는 안저울, 안재울, 귀골, 금강이(금갱이)로 불려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봉대리, 공동, 금강리 일부를 병합하여 금강과 공동의 이름을 따서 금공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2.41㎢이고 76가구에 인구는 220명 이다.
사유지인 금강사지(사적 제435호)를 군에서 매입 발굴하여 문화유적지로 개발 계획 중에 있다.
자연마을로는 금강사가 있었던 마을이라하여 금강이, 옛날 안적이라는 사람이 이곳을 지나다가 봉이 앉아서 우는 소리가 마음에 들어 안씨가 정착한 마을이라 하여 안재울. 안대. 봉대. 봉대리라 부른다.
백제의 오릉이 있었던 마을이라하여 오릉거리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가곡리
백제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부실. 아가펄. 옥가실. 옥계 등 자연마을 명이 있다.
조선시대 군현제 실시에 따라 옥가곡, 중리로 명명되어 공동면에 속해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옥가곡과 중리를 병합하여 가곡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80년 곡부리를 가곡 1리로, 옥가리를 가곡 2리로 개칭하였다.
마을 면적은 3.86㎢이고 120가구이며 인구는 393명이다.
마을 이름은 뒷산인 매화봉이 『정감록』의 “십승지지 매화낙지”라는 설에 따라 함양박씨, 청송심씨, 연안송씨가 이주하였다 전하며, 곡부라는 명칭이 공자의 출생지와 그 이름이 같아 훌륭한 성현이 태어날 것이라 믿고 조선시대부터 곡부서당이 끊이지 않았다.
옥가리는 옥녀가 옷을 벗고 비파를 타는 모습이라 옥녀탄금형이라는 데서 옥가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과 마을앞 병풍산과 매봉재가, 좌측에는 황새봉, 우측에는 번개재가 감싸고 있어 마치 구슬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라 옥가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매화초등학교가 1966년 설립되었다가 1991년 폐교되었다.
주로 수도작 농업이나 맥문동이라는 약초재배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용두리
은산면의 최북단인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북쪽으로는 청양군 대치면과 경계를 이루고 냇물이 북쪽에서 흘러와서 남쪽으로 흘러 금강천을 이루며 용두철터골에서 발원한 용두천이 동쪽을 적시고 있다.
북쪽은 산악지대이나 남쪽으로는 들이 펼쳐진 지역에 자리한다.
용두리는 동남쪽으로는 금강천을 건너서 정혜산이 있고 정혜사가 자리하고 있는것으로 보아 예전부터 불승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한 최북단이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공동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난을 피하고 한적한 지역에서 자리를 잡기 위하여 공산이씨와 서주이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해 나갔다.
또한 연안이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룩하기 시작하여 헌재에도 성주이씨와 공산이씨, 연안이씨가 각 10여호씩 거주하며 그 뿌리를 지켜오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는 부여군 공동면의 지역으로서 지역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으므로 용머리 또는 용두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용두리라 하여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마을의 면적은 1.48㎢이고 42가구에 인구는 133명이다.
전통적인 산골 오지마을이며 앞으로 지천의 냇가가 흘러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물이 맑고 내가 넓어 행랑객이 끊이지 않았으나 현재는 지천 상류가 오염되고 있다.
주로 수도작. 밤 등을 재배하고 있는 마을이며, 자연마을로는 마을의 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용머리, 용두라는 마을이 있고 웃말, 논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거전리
거전리는 백제 때 지금의 청양군 남양만 금정리 금정에서 백제 왕실까지 물을 나르기 위하여 새벽에 출발하면 돌아올때는 꼭 저녁노을이 졌다는 전설의 지점인 사양 고개를 서북쪽에 두고 산악지대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서쪽에서 흘러오는 냇물따라 위 아래쪽으로 들이 조성된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 이후로 보이며 산등성이에 주막이 있었다는 전설로 보아 금정에서 부여로 가는 큰 길이 있었던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공동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들이 개간되기 시작하였으며 산막 초막인 농부들의 가옥은 여러 곳에 서있었으나 본격적인 마을의 형성은 조선시대 중기에 난을 피해 이 지역에 정착한 경주김씨들의 설촌으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공동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삼거리와 저전리를 병합하여 거전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4.18㎢이고 69가구에 인구는 200명이다.
전형적인 산골마을로 앞으로 지천 냇물이 흐르고 있으며 1973년 거전초등학교가 설립되어 1991년 폐교가 되었다.
현재는 폐교를 교육청에서 야영수련원으로 활용.운영하고 있다.
수도작, 맥문동 밤을 주로 재배하고 있는 마을이다.
자연마을에는 마을의 주변에 닥나무가 많으므로 닥밭실, 닥밭, 저전, 저전리라 부르며, 장벌, 거전, 고무실로 가는 세 갈래 길이 있다 해서 삼거리라 부르고, 좋은 샘이 있어서 정동, 정골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장벌리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공동면에 속했었다.
마을형성에 따른 씨족의 정착은 조선시대 중기로 볼 수 있다.
당시 격동하는 사회에 밀려 몰락한 양반들이 난을 피하여 정착한 지역이라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공동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자채리와 벌리, 장좌리, 삼거리일부를 병합하여 장좌리와 벌리의 이름을 따서 장벌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6.49㎢이고 85가구에 인구는 241명이다.
오래 전부터매년 정월 보름날 달이 뜨기 시작하면 벌말마을에서는 동화제 장좌울에서는 탑제를 지내 조상들의 한을 달래며 풍년을 기원하는 마을의 풍속이 있다.
1980년대부터는 약초재배로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는데 맥문동 재배가 주재배작물인 수도작보다 몇 배 더 높은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고개 아래에 자리하고 예로부터 마을 부근에서 많은 약초를 캔다하여 유명해졌으므로 잣재울, 자채리라 불리고 벌말, 안골, 장재울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나령리
서북쪽으로 조공산을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는 외산면과 북쪽으로는 청양군 남양면과 접하고 있는 나령리는 산이 많아 맑은 공기와 깨끗한 환경을 자랑하며, 반딧불이 지킴이 쉼터가 있기도 한 마을이다.
그러나 은산면의 중심부로 흐르는 은산천과 나령천등의 발원지로 풍부한 수원이 흐르고 있어 그 주변에 들을 조성하고 있어서 농경지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한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깊은 산골마을이더라도 백제 때부터 청양과 그 북쪽으로 통하는 길이 있어서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고 백제 때 이미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방생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기름진 땅을 개간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여 큰 마을을 이루었는데, 특히 교하노씨들의 정착으로 집성촌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방생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조령리, 여가리, 온탑리, 내라마리, 외라마리를 병합하여 나마리와 조령리의 이름을 따서 나령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으로는 13.02㎢이고 112가구에 인구는 290명이다.
산간마을로 임야면적이 은산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수도작 외에 밤, 표고, 맥문동 재배와 축산을 많이 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고개에 나팔형의 명당이 있어 전망이 밝아진다는 뜻에서 나마리, 마을이 나마리 안쪽에 있다 해서 내나리, 옛날에 절이 있고 탑이 있는 마을이라 온탑이, 온탑리 등이 있고 조선시대의 백자가마터인 나령리 백자요지가 있다.
대양리
백제가 부여로 천도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나 부여에서 서북쪽으로 향하는 길목을 조성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때문에 그 이전부터 이미 형성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때에 의자왕의 동생 도천군이 현재 도천사지에 도천사를 지은 것으로 보았을때 백제 때는 궁중의 중요한 영역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방생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중기에 함평이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시대 대표적인 선비들의 고장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방생면의 지역으로서 산세가 햇빛을 잘 받아들이는 형국이라 하여 대양리 또는 댕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증산리, 동막리, 칠목리를 병합하여 대양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3.60㎢이고 98가구에 인구는 300명이다.
밤, 표고, 맥문동 재배와 축산업으로 고소득을 많이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 산세가 태양, 즉 햇빛을 잘 받도록 위치하여 대양리, 태양리, 주변에 옻나무가 많이 있다고 하여 옻나무골, 칠목리, 산세가 동쪽을 향하여 막을 친 것 같다하여 동막, 동막리 등의 마을이 있고 현애사지가 있다.
오번리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때에 이미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오리가 알을 품고 있는 형태로 오릉의 명당자리가 있다 하여 명당자리를 찾던 많은 지관들이 산막 또는 초막을 짓고 정착해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그 성씨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방생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명문인 평산신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조성해 나갔으며 이어 함평노씨, 영일정씨의 집성촌 조성으로 본격적인 경지화를 이루었다.
마을의 명칭은 오릉과 오리에서 전음된 오리울과 정승이 이곳에 낙향하여 세 그루의 느티나무 정자를 지어 살고 있는데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였다하여 삼괴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번포리, 삼괴리, 오리리, 검산리, 대양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오리와 번포의 이름을 딴 오번이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5.30㎢이고 97가구에 인구는 253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느티나무 정자 세 그루가 서있는 마을이라 하여 삼괴정. 삼거리, 처음에 차씨가 여러사람과 살기 시작했다 하여 차중리, 번포리, 오리알을 품고 있는 형태의 명당이라하여 오릉, 오리올, 오리리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홍산리
은산면의 중심부로 흐르는 은산천을 젖줄로 하고 들이 좌우로 펼쳐져 있는 곳에 홍산리는 위치한다.
남쪽 산세가 험준한 편이고 들판은 마치 분지처럼 조성되어 있는 것이 이채롭게 보이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농경사회로 접어드는 삼한시대에 이미 인류가 정착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 때 부여로 천도하기 전부터 이미 마을이 형성이 되었었다.
백제 말기에는 큰 마을이 조성되었으며 고려이전까지 번성했던 지역이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방생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들어서서 고려의 문신들이 이씨조선 정권 참여에 불참하고 몸을 감춘 지역이라는 설도 있으며, 주로 함평이씨와 창원황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방생면의 지역으로서 산세가 거미가 집을 짓는 형이라 하여 검산리, 말무덤에서 유래된 산정말과 앞에 넓은 냇가를 끼고 있는 너봉내(넓은내), 너봉내 뒤에 있는 뒷골, 계룡당, 노루목쟁이로 불리고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에 황산리, 계룡리, 상홍리, 하홍리, 후동리, 검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하홍과 검산의 이름을 따서 홍산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4.91㎢이고 123가구에 인구는 390명이다.
일찍부터 비닐하우스로 딸기, 포도 등 특용작물을 선구적으로 시작해 현재 마을에서 딸기, 포도등으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옥녀탄금형의 명당이 있다는 마을로 지형이 거미가 집을 짓는 형국이라 검산리라 부르고 마을 앞에 넓은 냇물이 흐르므로 너벅내, 홍천, 광천, 너붕내, 마을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 해서 노루목이, 계룡산 아래 마을이 있고 신당이 있는 마을이라 계룡댕이, 계룡당, 제룡대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가중리
백제 때에 이미 큰 사찰이 들어섰던 흔적이 보이며 또한 고려시대에는 미녀봉을 중심으로 그 아랫녘에 부촌이 조성되어 한때 지방의 토호장자가 지배했던 봉건사회제도의 마을사회 고성의 판도가 엿보이기도 하는 지역이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현 가좌면의 지역이었다.
가재울을 중심으로 안뜸 갓골(산과 마을의 형상이 갓과 비슷한데서 유래), 지금도 미륵불이 남아 있는 미륵거리와 마을 동쪽 임천으로 통하는 임천고개가 있고 대나무가 많았다는 죽말에서 전음된 중말이 안중말과 밖중말로 불려오다가 조선 초에 군현제가 실시되면서 가재울이 가좌면의 소재지로 되면서 마을 이름도 대가리로 개칭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대좌리, 내중리, 외중리, 내경리 일부를 병합하여 대좌와 내중의 이름을 따서 가중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마을의 면적은 2.47㎢이며 135가구에 인구는 421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이 작은 재 아래 자리하였다 해서 가재울, 조선시대 가좌면사무소가 자리하면서 큰 마을이라 해서 대가리, 마을 어귀에 미륵이 서 있는 마을이라 미륵거리, 미륵당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또한 가재울 마을 앞에 속칭 상대바위, 요대바위라 불리었던 바위가 지석묘로 확인되었다.
경둔리
경둔리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흐르는 경둔천 근처는 산세가 수려하여 예부터 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지가 많은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금계포란형을 비롯한 상제봉조형이 이곳에 자리한 구티 등의 명당설이 바로 그것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백제를 다시 세우기 위하여 백제부흥군이 주둔하여 오랫동안 나당군에 저항하였던 곳으로 알려진 경둔리는 왕흥사잠성과 연관된 부흥군의 거점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가좌면의 지역이었다.
마을 유래는 백제부흥군이 주둔하였다는 둔터골과 지형이 병의 목과 같다는 병목안 등으로 불렸다가 후에 두터골로 전음된다.
그리고 산세가 비둘기 알을 품고 있는 형이라는 비지재, 정자나무와 맑은 샘이 있었다 하여 정수터로 불렸다는 설과, 세조때 영의정을 지낸 홍윤성이 이곳에 낙향하여 살면서부터 정수터라 불렸다는 설이 있다.
조선시대 초기에 전주이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김해김씨, 여흥민씨가 정착하면서 부촌을 조성해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가좌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둔리, 하둔리, 내경리, 외경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둔과 외경의 이름을 따서 경둔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3.73㎢이고 70가구에 인구는 226명이다.
밤.수박재배, 축산농가가 많다.
자연마을로는 비둘기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비지재, 구티, 백제부흥군이 주둔하였다 하여 하둔리라고도 부른다.
백제부흥군이 주둔하였던 마을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둔내동, 둔터골, 상둔리, 마을의 지형이 병의 목과 같이 생겼다 해서 병목안, 정자나무가 있고 맑은 샘이 있는 마을이라 정수터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내지리
은산면의 서남쪽에 위치해서 서쪽으로는 망신산 너머로 구룡면 현암리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구룡면 죽절리와 규암면과 경계를 이루는 비교적 들이 많은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가좌면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 목천상씨와 예천임씨, 동래정씨의 정착으로 내지리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가좌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양지리, 내대리의 지경리와 홍산군 해안면의 망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내대와 지경의 이름을 따서 내지리라 하여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4.14㎢이고 124가구에 인구는 369명이다.
내지리에 합수초등학교가 1955년 설립되었다가 2000년도에 폐교되었다.
또한 단잡기 놀이가 전해져오는데 1995년에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1980년대까지는 주막집이 많고 술과 도박 등으로 잠시 혼란스러웠으나, 비닐하우스 재배기술을 도입하여 70%이상의 농가가 수박, 메론 및 밤을 재배하여 현재는 부유하고 살기좋은 마을이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수수내, 함적골, 망해, 신동이 있다.
합수리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유민들과 함께 백제부흥군이 진을 쳤던 자리로 전해지며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가좌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그 후 재난으로 다시 정착하지 못하고 조선시대 중기부터 오늘의 뿌리를 이루는 씨족의 정착으로 마을이 새롭게 형성되어 갔다.
확실한 기록으로 전해오지는 않았으나 임진왜란 때 뜻있는 선비가 있어 이곳 주민을 이끌고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진산 충북지방에서 의병활동을 하고 돌아와서 다시 농경지를 개척하였으므로 애국심과 단결심이 어느 지역보다 강한 지역으로 여겨진다.
순흥안씨와 전주이씨가 정착하면서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가좌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내수양리, 외수양리, 대대리 일부를 병합하고 내수양과 외수양을 합하였다 하여 합수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4.07㎢이고 60가구에 인구는 182명이다.
자연마을로는 합수리의 목이 되는 마을이라하여 수양리,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다하여양지뜸 등이 있다.
각대리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이전으로 추정되나 마을의 형성은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이다.
백제 멸망 후 마을은 여러 곳에 조성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쇠퇴했으며 현재 마을을 이루는 씨족의 근간은 고려말기부터 정착한 여러 씨족들이다.
조선시대 초기는 부여현 가좌면의 지역이었다.
마을 명을 큰터굴과 운암으로 불렀는데 한 스님이 운암마을을 지나다가 마을이 조용하고 쇠뿔과 같은 바위가 하늘 높이 솟아있는 형세라 산세가 아름다워 절을 짓고 쇠뿔 같은 바위를 보고 절 이름을 숭각사라 지었고, 그 뒤부터 운암이라는 마을 대신 숭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이후 숭각사는 불교의 탄압이 있었을때에도 불신도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으므로 조선시대 중기까지도 부여군내에서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가좌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숭각리와 대대리 일부를 병합하여 숭각과 대대의 이름을 따서 각대리라 하고 은산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3.98㎢이고 46가구에 인구는 125명이다.
은산면 밤나무재배를 시초한 선구적인 산간마을이다.
현재에도 밤 재배 농가가 50%이상이며 표고, 맥문동 재배 등으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에 승각사가 있었으므로 절이름을 따서 숭각, 숭각리라 하며 고려시대에 창건된 숭각사터가 있는데 60여년전 절을 헐고 고란사를 건축하였다는 설도 있다.
법당 앞 오층석탑은 군산으로 반출되었다 하나 그 행방은 알 수 없다.
4. 외산면 마을 유래
만수리(萬壽里)
서쪽으로는 만수산이 우뚝 서 있으며 그 준령마다 산과 들이 조화롭게 어울린 지역이다.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초기로 추산하며 처음에는 불승과 함께 무량사(無量寺)가 건립되어 대중과 호흡이 잘 맞았다는 곳이 또한 만수리 지역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접어들어서는 고려말기부터 침투해 오는 왜구의 침입으로 차츰 번화스럽던 마을이 황폐해 갔으며 더구나,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에 대한 소외로 무량사마저 쓸쓸한 절간으로 변해갔다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초기 세종 때에 이르러 연주현씨의 정착과 이어 남평문씨, 창원황씨가 정착하면서 더욱 번창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행정리로 임수대(臨水臺), 동구(洞口) 마을이 있다.
■ 임수대 마을
임수대라 함은 수신리 성태산(星台山)과 가덕리(佳德里) 월명산(月明山), 만수리 만수산에서 수원이 발원하여 이 마을을 경유하여 웅천면(熊川面) 만장포(萬長浦)로 흐르고 있어 물이 쉬었다 가는 곳이라 하여 임수대 마을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18년경 전장리에서 면사무소청사가 이전해 와 면소재지로 성장해오고 있다. 외산시장(外山市場) 역시 그 무렵에 수신리 무수(舞袖)마을에서 만수리로 이전하여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는 304호에 948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반으로는 북두머니, 개축이, 시장입구, 윗장터, 아랫장터가 있다.
■ 동구마을
신라말기에 범일국사(梵日國師)가 무량사를 창건하였는데, 이 사찰이 만수리 임수대 마을에서 동구마을까지 건립되어 있었으나 1598년경에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무량사에 침입하여 사찰을 전소시켰다 한다. 그후 1620년경 창원황씨가 입촌하여 촌락을 이루었으며 무량사명(無量寺名)을 따라 무량마을이라 칭하였으나 1914년 군폐합으로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동구마을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가구수는 75호에 206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반으로 부둣골, 무량이 있다.
70년대 초부터 대보탄광이 성황을 이루어 150세대 460명의 인구가 거주할 정도로 지역경제의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으나 95년에 폐광되어 인구가 줄고 지역경제도 침체되었다.
복덕리(福德里)
본래 복이 많은 사람들이 정착해서 기름진 땅을 일구어 넉넉한 생활을 다졌다는 의미에서 복덕동(福德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를 가지고 있으며 파평윤씨가 입촌하여 촌락을 이루었고 현재는 청주한씨의 집성촌으로 되어 있다. 본래 홍산군(鴻山郡) 외산내면(外山內面)의 지역으로서 복덕골 또는 복덕동이라 칭하다가 1914년 군폐합에 따라 복동리(福東里)와 복서리(福西里)를 병합하여 복덕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면적은 2.35㎢이고 가구수는 46호에 139명이 거주하고, 98년에는 복덕리 앞 하천이 청정하천으로 지정(충남도)받기도 하였으며 한 마을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5명이 배출되기도 한 선생님 마을이기도 한다. 반으로 윗말 아랫말이 있다.
장항리(獐項里)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홍산현 외산면(鴻山縣 外山面)의 지역으로서 노루목고개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노루모기 또는 장항(獐項)이라 부르던 곳으로 마을의 형성은 경주김씨의 정착부터라 한다. 조선시대 말기를 전후하여 나주최씨, 남평문씨, 경주이씨가 정착하여 현재는 주 구성원으로 되어 있다.
한때는 사기소가 있었으며 서낭제를 크게 지내기도 한 장항리는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전통을 이으고 살았다는 표시로 팽나무 등을 심어 수령을 자랑하는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노루목장과 목항을 따서 장항리라 하고, 부여군 외산면에 편입되었다. 외산초등학교가 있으며 면적은 5.12㎢이고 72가구에 인구는 245명이다. 뜸으로는 지형이 노루목같이 생겼다는 노루목고개 그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노루모기, 장항(獐項), 옛날 독을 만드는 도요지가 있었다 해서 독비짓골, 동쪽으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전밭 등의 뜸이 있다.
화성리(花城里)
백제때 대산현에 속했고 조선시대는 홍산현 외산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조치리(鳥峙里), 마동(馬洞), 신성리(新城里), 화암리(花岩里), 전장리(前庄里) 일부를 병합하여 화암과 신성의 이름을 따서 화성리라 하였고, 부여군 외산면에 편입하였다.
화성리에 처음 정착한 씨족으로는 김해김씨(金海金氏)로 추정되며 절골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9호로 지정된 고려 때의 탑으로 오층석탑(五層石塔)을 개인이 절터에 복원하였고 화엄사(花嚴寺)라는 개인 불당을 세웠다.
자연마을로는 화암, 마동, 조치 마을이 있으며 면적은 9.52㎢이고 115가구로 인구는 311명이다. 뜸별로는 항상 일곱 가구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해서 거칠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것칠, 월하산 아래 마을이 있으므로 달래산, 달하산, 월하산이라 부르고, 마동 마을은 마을중심으로 구들골, 질마재, 오양골, 통매 등으로 부르는데 옛날 지관이 이르기를 구들골의 말이 먹이를 먹는 구두이고, 오양골은 말이 잠자는 장소이고, 통배는 먹이를 나르는 통과 같은 형태이며 질마재는 말이 먹이를 먹고 달려가는 형국이다. 즉 말과 인연이 있는 마을이라 마동, 꽃 같은 바위가 장엄하게 서있는 마을이라 화암이라 부른다.
전장리(前場里)
북쪽에서 내려오는 계곡의 들이 이곳에 이르러 넓은 들을 조성하고 있다 하여 전장, 전장말, 전재(前在)라 하였다는 설과 산아래 넓은 들 위쪽으로 마을이 있다 해서 전장 전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고려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하며 한양조씨, 김해김씨가 정착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옥산리(玉山里), 이정리(梨亭里)를 병합하여 부여군 외산면에 편입하였다.
경주김씨가 설촌하였다는 전장마을은 1918년 만수리로 이전하기까지 면사무소가 있었으며, 백옥산밑이라 하여 옥산(玉山)마을, 옛날 큰아그 배나무(신배나무)가 정자를 이루었다 해서 이(梨)와 정(亭)을 딴 이정(梨亭)마을이 있다.
뜸별로는 벌판에 자리한 뜸을 벌뜸, 옛날에 신배나무가 있다고 해서 신배렁이, 이정이 변하여 씀부쟁이, 백옥산(白玉山) 아래에 마을이 있다 해서 옥단, 산소가 많이 있다 해서 산소말, 산직이가 살았다 해서 산직말, 산정말, 사기점이 있었다 해서 사기점, 뒷골짜기에 우물이 있는데 수원이 좋고 물이 차서 약샘으로 통하여 뒷골샴이라 부른다.
옻오르는데 특효가 있다는 샘물이 나오는 옻샘들의 뜸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3.01㎢이고 100가구에 인구는 309명이다.
삼산리(三山里)
서쪽으로는 보령시(保寧市) 성주면(聖住面)과 경계를 이루고 외산면의 북단에 위치한 삼산리는 일찍부터 도공(陶工)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삼산리(三山里) 피쟁이 부근에는 그릇을 굽는데 필요한 진흙이 많이 출토되는 곳으로 토기를 제외한 고려청자(高麗靑瓷), 분청백자를 굽는 데에는 아주 질 좋은 흙이 출토되는 곳이라 한다. 경주김씨가 입촌하여 촌락을 이루었고 조선말기는 홍산군 외산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하수리, 회동을 병합하여 삼산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면적은 4.51㎢이고 39호에 119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반으로는 회정골, 안회정골이 있다.
1997년부터 산촌종합개발사업이 추진되어 소득증대 기반사업(종합회관신축, 기계화경작로포장)을 추진하여 살기 좋은 산골 마을로 변화하고 있다.
비암리(飛岩里)
남동쪽으로 해발 465m의 감봉산을 중심으로 높은 산의 준령이 남북쪽으로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그 서쪽으로 낮은 지대에 마을은 위치한다. 옛날부터 명당자리가 많다 하여 배미실, 용수말, 하비마을 주변에는 지관들이 수없이 드나들었으며 앞으로 명인이 탄생할 곳이라고 풍수인(風水人)들이 넘나보는 지역이라 한다. 1730년경 창원황씨, 신천강씨, 배천조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그 전 조선시대 세조 때 전주이씨가 정착하였다고 하니 마을 형성의 처음이 아닌가 추측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외산면 지역이고 말기에는 홍산군 외산내면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주암리(舟岩里), 하비리(下飛里), 용수리(龍水里), 저동(苧洞), 일부를 병합하여 하비와 주암의 이름을 따서 비암리라 부르고 외산면에 편입되었다.
뜸별로는 옛날에 마을 앞에 큰 냇물이 있었고 냇가에 바위가 있어 배를 매었다 한다. 배매석 바위가 있던 마을이라 주암, 주암리(舟岩里), 배미실, 마을에 용이 승천한 우물이 있다 해서 용수말, 용수동, 용수리 등의 마을이 있다.
리의 면적은 2.25㎢이고 100가구에 인구는 295명이 거주하고 있다.
지선리(芝仙里)
조선시대 참나무가 많은 지역이라 숯이 유명하였고 백자(白磁)가 생산되었다 한다. 교하노씨와 여산송씨 그리고 전주이씨가 입촌하여 촌락을 이루었고, 본래 홍산군 외산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군폐합에 따라 상비리, 장선리(長仙里), 지단리(芝丹里), 저동 일부를 병합하여 지단(芝丹)과 장선(長仙)의 이름을 따서 지선리(芝仙里)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70년대 초반부터 우량광산이 성황을 이루어 95년까지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면적은 3.05㎢이고 가구수는 48호에 132명이 거주하고 있고 저동, 지다네 상비가 있다.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장선(長仙)마을, 모시를 많이 재배하여 모시울, 모새골, 저동, 마을 주변에 지초가 많은 안쪽 마을이라 하여 지단내(芝丹內) 마을이 있다.
문신리(文臣里)
조공산과 감봉산 아래 첩첩산중에 아늑한 지역에 위치한다. 구전에 따르면 백제시대 때에 아홉 신하가 피난하여 살았다 해서 구신이라 부르는 마을이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 홍산현 내산면 지역으로 해주오씨가 정착을 하고 전주추씨가 촌락을 이루고 마을을 형성하여 나갔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신리(九新里), 문상리(文祥里), 상수리(上水里), 일부를 병합하여 문상, 구신의 이름을 따서 문신리라 하여 부여군 외산면(外山面)에 편입하였다.
마을의 면적은 3.03㎢이고 90가구에 인구는 258명이 거주하고 있다. 문상 마을은 선비들이 내일을 위해 은거한다는 문봉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글을 읽고 농사일을 하며 백성을 깨우치는 선비가 심신을 닦는 지역이라 해서 문상마을이라 불리는 마을이다.
수신리(水新里)
외산면의 최북단에 위치해서 북쪽으로 해발 620m의 성태산을 경계로 보령시 청라면과 청양군 남양면과 접하고 있는 수신리는 산과 들과 계곡이 잘 조화를 이룬다 해서 유인(儒人)들이 신성지로 손꼽기도 하고 풍류객이라기보다 조용한 지역에서 안주를 바라는 사람들이 한번 정착하고는 떠나지 않았던 특이한 조건이 있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홍산현 외산면이었으나 후에 외산내면에 속했다. 전주이씨들의 정착과 함께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신리와 상수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수와 상신의 이름을 따서 수신리라 하고 부여군 외산면에 편입하였다.
면적은 2.97㎢이고 69가구에 인구는 189명이다.
사람들이 정착하여 뿌리를 내린다는 뜻에서 신근(新根)마을이 있고 파평윤씨가 많이 사는 마을로 뒷산의 형국이 마치 신선이 춤추는 형상이라 무수(舞袖) 또는 무술이라는 마을이 있다. 70년대부터 95년까지 탄을 캐는 동명탄광이 성황을 이루었고 1944년 설립된 무술초등학교가 1999년 폐교되는 아쉬움도 남아 있다. 또한 옥가실에는 수령 4~5백년된 희귀한 소나무가 있다.
반교리(盤橋里)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하였으나 그 후 홍산권에 속하는 지역이고 조선시대는 홍산현 내산면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손대리(遜臺里) 일부를 병합하고는 이곳에 널판으로 놓은 다리가 있다 하여 판교(板橋)라 부르다가 반교라고도 불렀는데 그 이름을 따서 반교리라 하고 부여군 외산면에 편입하였다.
마을의 면적은 4.02㎢이고 86가구에 인구는 229명이다. 마을에 금반형(金盤形) 명당이 있다 해서 금반형마을, 마을에 돌이 많아 도팍골, 옛날에 배나무가 많아 배나무골 등이 있으며, 1934년에 개교하여 1999년에 폐교된 반교초등학교가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운다.
가덕리(佳德里)
백제 때부터 홍산의 문화권에 속했으나 고려시대 말기부터 정치적 변화로 은둔하는 씨족이 자리를 정했다 하나 정착하지 못하였고 마을형성은 1400년대 조선 태종 때로 추측한다. 1700년대 파평윤씨들이 정착하면서 마을형성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홍산현 내산면 지역으로 나무가 많아서 나무를 이용하여 나무바가지(가리박)를 가공하여 파는 집이 있었으므로 가리점골 또는 가리정골에 이어 가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손대리(遜垈里), 손사리(遜沙里) 일부를 병합하여 가덕리라 하여 현재에 이른다. 면적은 4.07㎢이고 가구수는 42호에 123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사화에 몰린 한 선비가 정착하여 땅을 일구고 살았다 하여 손대(遜臺), 아무리 어려워도 겸손을 잃지 않는 선비가 처음 낙향한 마을이라 하여 손사(遜沙)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갈산리(葛山里)
백제 때는 대산현 지역이었으나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중기로 추측된다. 조선시대는 홍산현 내산면 지역이었다. 마을에 꾀깔봉이라는 산이 있고 그 아래 마을이 형성되었으므로 그 지명을 꾀까리 또는 고갈(高葛), 갈산(葛山)이라고 불렀다. 정착한 씨족으로는 고령박씨, 경주김씨, 해주오씨가 전해져 오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내대리(內垈里)를 병합하여 갈산리라 해서 부여군 외산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갈산리의 면적은 3.15㎢이고 98가구에 인구는 313명이고 고갈 마을과 내대 마을이 있다.
5. 내산면 마을 유래
천보리(天寶里)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피난처로 광산김씨와 평산신씨 등이 이주하여 설촌하였다고 전하며, 본래 홍산현 대야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군폐합에 따라 신기리·늑동리와 무량리 일부를 병합하여 내산면에 편입되고 천보산의 이름을 따서 천보리라 하여 현재에 이른다. 그후 상륵·하륵·신기의 3개 마을로 구분되었으며, 상륵마을은 지세가 말이 굴레를 벗는 형국이라 하여 상륵이라 하고, 하륵마을과 함께 늑동리로 변했다가 천보리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 뒷산에 반개절이라는 사찰이 있었으나 약 100여년 전에 없어졌다는 절터가 있다.
하륵마을은 아랫구레울이라 하여 하륵이라 칭하였다. 마을입구에 소류지가 있어 10여 ha의 경지에 몽리하고 있다.
신기마을은 새로이 촌락을 이루었다 해서 옛 이름을 새터라 하였으며, 그후 신기라 칭하였다. 마을 면적은 2.95㎢이고 76가구에 인구는 199명이다.
묘원리(妙院里)
1100년경 광산김씨와 창녕조씨가 각각 이주하여 설촌하였다고 전하며, 본래 홍산현 지역이었는데 1914년 군폐합에 따라 묘원리와 산저리(山底里), 만자리(晩者里) 일부를 합하여 묘원리라 하였다.
묘원마을은 조선시대 행인의 편의를 돌봐주는 묘원이 있었으므로 묘원리라 불리우다가 이를 줄여 원곡(院谷) 또는 면동(面洞)이라 하였다. 산저마을은 묘원 마을 안쪽에 있다 하여 안터라 하는 마을과 옛날 선비 한 분이 이곳을 지나다 갈증을 면하려고 우물가에서 물을 청하니 아낙네가 버들잎을 띄워주는 물을 마시려 할 때 황새가 날았다 하여 황새말이라 전하는 두 마을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두 마을은 합하여 서운산(棲雲山) 밑에 있다 하여 산저(山底)라 칭했다.
묘원리의 면적은 2.63㎢이고 57가구에 인구는 176명이다.
율암리(栗岩里)
본래 홍산현 대야면의 율치리(栗峙里)·만자리(晩者里)와 해안면(海岸面)의 용암리 대사동이었다가, 1914년 군폐합에 따라 부여군 내산면에 편입되어 율치와 용암의 이름을 따서 율암리라 하였다. 율치마을은 1400년경 황토재에 조상의 산소를 모신 평택임씨가 그 산소에서 금비둘기가 날아갔다는 말을 듣자 이곳이 귀한 곳으로 알고 그 산소를 보전하고자 이주하여 개촌하였다고 전하며, 그후 창녕조씨 등이 입촌하여 마을이 융성하였다 한다. 마을을 둘러싼 밤나무가 많다 하여 밤고개라 불렀고 밤율자를 따서 율치라 칭하였다. 만자마을은 조선 연산군 때에 창녕조씨가 입촌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마을의 지형과 지리적 운세로 보아 운이 늦게 트인다 하여 만자실이라 불렀다 한다.
용암마을은 1400년경 전주이씨가 이주하여 마을이 생겼다 전하고, 마을 뒷산 서쪽에 있는 바위 밑에 용이 살았다 하여 용암이라 전하게 되었다 한다. 율암리의 면적은 2.75㎢이고 80가구에 인구는 237명이다.
운치리(雲峙里)
조선초기 밀양박씨·김해김씨·창녕조씨 등이 각각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전해진다.본래 홍산현 대야면의 지역인데 1914년 안치리·죽림리·서운리와 만자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내산면에 편입되고, 서운과 안치의 끝이름을 따서 운치리라 하였으며, 안치·죽림·서운의 3개 마을로 구분되어 있다. 안치마을은 선녀 한 분이 인간으로 환생하고자 백마를 타고 날아와 신구제산에 정착하였으나 또 하나의 황마가 먼저와 버티고 서 있어 이를 쫓으려 함에 황마가 용트림을 하고 불총으로 백마를 쫓으니 백마는 떨어져 흔적이 없고 황마는 그 자취를 변치않고 서 있어 질마재라 하였는데 이 고개 이름을 따서 안치라 이름지었다 한다. 죽림마을은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였기에 대숲말이라 부르다가 그 후 죽림이라 칭하였다.
서운마을은 서운산 밑에 위치하였다 하여 서우내라 칭하였으며, 서운사가 있었다는 절터가 있다. 내산면의 중심으로 면소재지를 이루고 있으며 1974년 3월까지 5일장이 섰던 곳이기도 한다.
운치리의 면적은 4.83㎢이고 184가구에 인구는 562명이다. 인동장씨 열녀문(烈女門)과 신갑순 효자문(申甲淳孝子門)이 있고, 특히 이름이 있는 바위가 특이하게 많다(굴구루바위, 농바위, 마당바위, 문바위, 쉰질바위, 장군바위).
주암리(珠岩里)
축융봉 산줄기 아래 자리잡은 이 마을은 1536년경 광산김씨와 무안박씨가 낙향하여 거처를 정하려고 현재의 내산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는 느티나무 밑에 앉아 지형을 살피던 중 북쪽의 지세가 좋은 녹간마을을 형님격인 무안박씨가 자리를 잡고, 이보다 못한 동촌마을을 아우격인 광산김씨가 택하여 거처를 정하여 살았다 한다. 광산김씨는 현재까지 16대에 걸치면서 마을이 융성하였다.
1914년 군폐합에 따라 숙동, 녹간리와 저동, 미암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주암리라 해서 부여군 내산면에 편입되었다.
동촌마을은 서당이 있다 하여 숙골이라 하였다가 그후 숙동으로 불리어오다 조선말기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동촌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나 지금도 숙동과 동촌 두 이름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녹간마을은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마을지세가 목마른 사슴이 물을 먹는 형국이라 하여 녹간이라 칭하였다. 마을의 면적은 3.54㎢이고 가구수는 67이고 인구는 187명이다. 또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령 1,400년된 은행나무가 있다.
저동리(苧洞里)
국도 40호선의 서쪽으로 남북으로 길게 위치한 마을로 미암과 저동은 조선 선조 때에 청주한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이루었고 지우마을은 1780년경 여산송씨가 설촌하였다 전한다. 본래 홍산현 지역으로 1914년 미암리·저동리·지우리를 통합하여 현재에 이르며 3개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미암마을은 뒷산 바위에서 부처님께 봉양할 쌀이 나왔다는 쌀바위의 이름을 따서 미암이라 칭하였으며, 저동마을은 모시밭이 많아 모시울이라 부르다가 그 후 저동이라 칭해졌다. 전통으로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 마을의 한 해 행운을 비는 동화를 세우고 있다. 지우마을은 마을의 지세가 바지게 형국이라 하여 지루지라 이름지었다 하며, 바지게에 짐이 차면 부린다 해서 재산을 오래 보존하지 못하고 입촌할 때 빈손으로 온 사람만이 재산을 모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면적은 3.59㎢, 가구수는 87이고 인구는 243명이다.
마전리(麻田里)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나 조선시대 홍산현 내산면 지역으로 조선중기 선조 때에 경주최씨가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다. 이어서 옥천전씨가 정착하여 현재는 세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내산면 지역으로 삼밭이 많이 있으므로 삼바실 또는 마전곡(麻田谷)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해치리(蟹峙里) 일부를 병합하여 마전리라 해서 내산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4.39㎢이고 가구수는 52에 인구는 133명이다.
온해리(溫蟹里)
월하산(月下山) 아래 남쪽으로 펼쳐지는 지역에 위치하며 외산면으로 넘어가는 게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명당자리가 있다 하여 지관(地官)들이 자주 찾는다. 병자호란 때의 척화신(斥和臣) 윤집(尹集)의 묘(墓)도 온해리에 있다. 온해리에 처음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한 씨족은 엄씨 가문으로 해마다 12월 30일에 동민들이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조선시대 중기 진주강씨, 파평윤씨의 가문이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밀양박씨, 김해김씨의 씨족이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해 갔다. 조선시대 말기 홍산군 내산면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온수리(溫首里), 해치리(蟹峙里), 지우리(地隅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온수와 해치의 이름을 따서 온해리라 하여 부여군 내산면(內山面)에 편입되었으며, 리의 면적은 4.93㎢이고 가구는 84에 인구는 239명이다.
뜸별로는 지형이 마치 게가 기어가는 형국이라 해서 게재라고 부르고, 마을 부근에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샘의 머리쪽에 있다 하여 온수, 온머리, 온수리라하고 온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서촌(西村)이라 부른다.
지티리(芝峙里)
지티마을은 985년경 안동장씨가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 전하며, 지티고개에 위치하였으므로 지티라 칭하였다.
괴목마을은 1486년경 남원양씨가 개촌한 것으로 전하며, 그후 차씨 등이 입촌하여 마을이 융성하였으나 양 성씨의 세력다툼으로 임진란 당시 의병으로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모두 징집되어 현재에는 이 두 성씨는 한 가구도 남지 않았다. 마을에 큰 괴목나무가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괴목이라 하였다 한다. 지금도 그 때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약 500여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리의 면적은 4.83㎢이고 가구수는 93에 인구는 281명이다.
금지리(金池里)
본래 홍산현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에 군폐합에 따라 부여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며, 금지와 산정의 두 마을로 구분되어 있다.
금지마을은 조선 세종 때 창녕조씨가 입촌하여 형성되었다 전하여지고 월명산 중턱에 금지사가 있는데 이 절터 안에 선녀가 목욕을 하였다는 샘이 있었다 하나 현재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이 샘의 이름을 따서 금지사라 하였고 마을 이름도 금지라 칭하였다 한다.
산정마을은 조선 태종 때 커다란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신령이 나타나 이곳에 마을을 만들면 크게 흥한다 하여 연안이씨가 입주하여 설촌하였다 전하고, 정자나무가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을 산정이라 하였다 한다.
마을의 면적은 5.99㎢이고 가구수는 73에 인구는 200명이다.
6. 구룡면 마을 유래
구봉리(九鳳里)
면소재지의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규암면과 은산면을 경계로 위치해 있으며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고, 통일신라시대 때는 한산현에 속했었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 때로 추정되나, 1985년에 청동기시대 때 사용하던 돌칼, 청동검, 주먹도끼 등의 유물이 다수 출토된 것으로 볼 때 이 시기부터 생활의 터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집성마을을 이룬 것은 조선시대 초기에 한산이씨가 정착하면서 이루어졌고, 1700년경 영월엄씨와 연안이씨, 경주최씨 등이 이주하면서 집성마을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말기엔 홍산군 해안면 지역으로 1914년 군폐합에 따라 행촌(杏村), 신성리, 독성리(禿城里), 지경리, 동쌍리(東雙里), 침산리(砧山里) 일부를 병합하여 구봉리의 큰산인 봉황산의 이름을 따서 구봉리라 하였으며, 행촌과 지경리를 구봉 1리라 칭하고 독성리, 신성리 등 일부가 구봉 2리 죽동마을이라 칭해져 왔으나, 1978년 신성마을이 분리되어 구봉 2리가 되고, 죽동마을은 구봉 3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해방이후 1960년에 약 164가구에 930여명이 논 농업으로 어렵게 생활하여 왔으며 이후 경제성장에 의한 인구이동과 대가족제도에서 소가족제도로 바뀌면서 인구가 많이 줄어 지금은 121가구에 304명만이 거주하고 있다.
고적으로는 동아시 마을의 진산인 해발 94m의 야산정상을 중심으로 구축한 구봉산성(九鳳山城)이 있고, 선조 29년(1596) 불만에 찬 민심을 선동하여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의 주거지가 이곳에 있다.
리의 면적은 2.27㎢이며 뜸별로는 옛날부터 대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대숲골 또는 죽동, 성(城)이 있는 마을로 성벽이 테를 두른 것 같다 해서 동아시, 성(城) 이름에 따라 독성, 마을에 그릇점이 있었으므로 점촌(店村), 또는 마을이 새로 생겨서 신성리, 조선시대 홍산현과 부여현의 경계라 지갱이라 불리는 뜸들이 있다.
죽절리(竹節里)
긴 장대같이 뻗어 내린 봉황산(鳳凰山) 줄기에 촌락을 형성하고 있으며 봉황이라는 새가 영조(靈鳥)로서 죽실대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벽오동(碧梧桐)이 아니면 깃들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죽절리라 했다 한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 때는 홍산현에 속했었다.
백제 말기에 축조한 성터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후 조선초기 연안이씨들이 대거 입촌하여 집성마을을 형성하였다. 조선말기에 홍산군 해안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서쌍리(西雙里), 산막리(山幕里), 동쌍리(東雙里), 일부를 병합하여 죽절리라 하였다.
구룡면에서 유일한 단일마을로 면적이 1.53㎢이고 임야가 55%를 차지하고 있는 등 전·답 면적이 적어 생활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지금은 주정리 앞들에 경지를 소유하여, 딸기 등 하우스 재배로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해방 후 1960년대에 99가구 613명이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77가구 261명만이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다.
고적으로는 효성이 지극하여 고종 22년(1885)에 하사 받아 세워진 이도성 효자문(李度星孝子門)이 있고,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며 의병장 민종식과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 전투에 참여하였고, 그후 계속하여 왜병과 맞서 싸워온 독립운동가 이용규(李容珪)의 생가지가 이곳에 있으며, 규암면과의 경계인 해발 142m의 봉황산 산정에 있는 토축, 석축의 산성인 봉황산성이 있다. 뜸별로는 마을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산막골, 방죽 안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방죽안, 옛날 절이 있었으므로 죽절리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주정리(舟亭里)
구룡면 중앙에 위치하여 잔잔한 야산과 들로 이루어진 마을로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 때는 홍산현에 속했었다.
마을의 형성은 백제이후라고 하나, 1600년경 조선 중엽 한산이씨가 배매라는 곳에 설촌하였다고 전해지며 이때부터 집성촌을 이룬 것으로 전해진다. 본래 홍산군 해안면의 지역이었으나, 1914년 군폐합에 따라 배매, 작교, 침산(砧山), 망정(望亭)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배매와 망정의 이름을 따서 주정리라 개칭하였고 배매와 침산을 주정 1리라 하고, 망정을 주정 2리라 하여 현재에 이른다.
리의 면적은 1.37㎢에 가구수는 93호이고 인구는 269명으로 주 소득원은 벼농사이다.
뜸별로는 마을 뒤에 있는 고개는 은산, 홍산, 규암으로 가는 세 갈래의 길이 있어서 목이 좋은 고개라 그 아래 있는 마을도 먹고개라 부른다. 마을 형국이 배를 맬 형국이라 해서 배매, 마을 앞에 외딴산이 있으며 들판에 마을이 있으므로 벌리, 나무정자가 있는 외딴섬이 있으므로 망정(望亭), 다듬잇돌처럼 생겼다 해서 침산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현암리(玄岩里)
동쪽으로 멀리 바다가 보인다는 해발 344m의 우뚝 솟은 망신산(望宸山) 아래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 때는 홍산현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백제의 충신들이 이 산골짜기에 들어와 숯을 굽기도 하면서 한을 달래며 연명하였다 하며, 이때부터 이 고장의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한다.
또한 안동장씨가 집단적으로 정착하여 설촌하였다는 설도 전해진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해안면의 지역이었으며 무안이씨, 밀양박씨, 김해김씨, 달성서씨 등이 입촌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조선말기에는 홍산군 해안면의 지역으로 1914년 군폐합에 따라 망동(望東), 망중(望中), 망서(望西), 곤유리를 통합하였으며, 마을 중심부에 검은 바위가 있다 하여 현암리(玄岩里)라 개칭하였고, 망동, 망중, 망서를 현암 1리, 곤유를 현암 2리라 하여 현재에 이른다.
임야가 72%로 구룡면에서 유일하게 산간지대라 불리우며, 1945년도에 설치한 현암 소류지가 소재하고 있어 웬만한 한해에도 농업용수 공급이 용이한 지역이다.
고적으로는 조선시대 백자를 굽던 백자요지(白磁窯址)가 있다.
리의 면적은 4.22㎢이며 1960년대만 해도 약 114가구 663명이 거주하였으나, 차츰 줄어들어 현재는 93가구에 267명만이 남아 있다. 주 소득원은 논 농업과 딸기 하우스재배이며, 자연마을로는 옛날에 곤이란 새가 많았던 마을이라 곤유동( 遊洞), 망신산에 오르면 바다가 보이므로 이로 연유해서 망해(望海), 망해를 중심으로 서쪽마을을 서편망해, 중앙에 자리한 마을을 중뜸망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태양리(太陽里)
구룡면의 중심부이자 소재지로서 일력(日歷) 또는 장승백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 한 풍수지리 학자가 이곳을 지나다 풍수를 보니 태양의 혈이 쏟아지는 명당자리라 하였다 하여 그 후로 일력이라 칭하였고, 마을 안에 장승이 있어 장승배기라고 하였다 한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시대는 홍산현에 속했었다.
인류의 정착은 신석기시대로 보나 인근마을인 현암리 일원에 신석기시대 후기의 유적지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취락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그러나 마을의 형성은 고려초기 안동김씨가 입촌하여 설촌되었다고 전해지며, 고려말기 연안이씨, 밀양박씨, 그리고 조선초기에는 김해김씨, 달성서씨 등이 태양리 마을형성에 공이 많은 씨족으로 손꼽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해안면 지역으로 일력 또는 태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작교리(鵲橋里), 망정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태양리라 하였다.
홍산군 해안면 시절 해안면사무소가 작교에 위치해 있었으며 아직도 그 건물이 남아 있고, 지금은 개인주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1954년 면사무소가 주정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주민이 점차 늘어 인구 집중화가 이루어졌고, 대가족에서 소가족제도로 바뀌면서 인구가 급격히 줄어 지금은 197호에 631명이 거주하고 있다.
1994년도에 관내 처음으로 취락구조 개선사업이 이루워져 27동이 신축되었고, 동방사료, 화강산업, 영미산업 등 사업체가 있으나 주민의 고용창출 효과는 미흡하다. 현재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용강중학교, 구룡초등학교, 구룡파출소, 예비군중대본부, 구룡농협, 구룡신협 등 각 기관단체가 집중되어 있고, 상권이 점차 늘어나고 있어 소재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고적으로는 도지정 기념물 제45호인 백제석실고분이 있고, 향토문화 유적 제35호인 고인돌군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1.81㎢이다. 마을별로는 옛날 지사가 지나다가 햇빛이 쏟아지는 들에 자리한 이 마을은 세월이 흐를수록 햇빛의 덕을 많이 볼 명당이라 일력이라 부르고 변하여 태양, 옛날에 마을에까지 다리가 있었다 하여 작교(鵲橋), 마을에 장승이 서있다 해서 붙여진 장승백이의 마을이 있다.
금사리(金寺里)
소재지로부터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내산면과 홍산면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고, 구룡천이 금사리의 북쪽에서 흘러 서쪽으로 마을을 휘돌아 동으로 흐르고 있어, 살기에 여건이 아주 좋은 지역으로 오래 전에 인류가 터전을 잡고 살았을 것으로 본다.
마을형성은 백제유민이 정착하면서부터로 추정하고 있으나, 고려시대 말기부터 김해김씨와 금녕김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새롭게 형성해 나갔으며, 이어 경주김씨가 정착하면서부터 집성촌으로서 면모를 갖춘 것으로 본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 때는 홍산현에 속했었다. 조선 말기에는 홍산군 해안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군폐합으로 금동리와 소사동, 대사동, 신기리, 용암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금동과 대사동의 이름을 따서 금사리라 하였다. 20세기초 천주교인 금사리 성당이 건립되어 새로운 종교의 요람지로 등장한 지역이며, 지금도 금양마을의 80% 이상이 천주교인이다.
고적으로는 도지정 기념물 제22호인 창렬사(彰烈祠)와 제143호인 금사리 성당(金寺里聖堂)이 있고, 부여군 향토문화유적 제15호인 독락정(獨樂亭)이 있으며, 선사시대의 지석묘로 추정되는 석광묘식 지석묘가 있으며, 효자로 소문난 정우(鄭優)의 비(碑)가 마을 안에 있다.
일제시대 모시 생산량이 전국에서 으뜸이었다 하며, 해방 후 한때는 쇠양이 모시하면 전국에서 알아주었고, 높은 소득을 올렸으나, 산업발달로 모시 재배가 점점 줄어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다. 리의 면적은 1.55㎢이고 가구수는 138가구에 인구는 387명이며, 주 소득원은 벼농사이다. 뜸별로는 옛날에 큰절이 있어 많은 중생이 기거한 곳이라 대중처라 불리었으며, 물레방아간이 있던 마을이라 방앗거리, 마을 동쪽에 소(沼)가 있고 그 옆으로 벼랑이 되어 있는 마을로 소에 금빛보다 더 다복한 햇빛이 내리는 마을이라 하여 쇠양이, 이, 금양이라 부르고, 절이 있던 마을이라 절굴로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논티리(論峙里)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1㎞ 지점에 위치한 마을으로 구룡평(九龍坪)이 마치 넓은 바다처럼 들 바다를 이루는 그 가에 위치해 있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 때는 홍산현의 지역이었다. 백제 때 홍산과 부여를 왕래하는 길이 있었으며, 그 길이 논티라고 전해온다.
마을의 형성은 백제 때부터이나 확실치 않고 조선시대 초기에 경주김씨들이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 홍산군 해안면으로 논티 고개밑을 논티라 하고, 금양의 서쪽마을이라 해서 금서리(金西里)라 했는데, 1914년 군폐합에 따라 논티리라 칭하였다.
1931년 논티시장이 개장되어 해방 후 40여년간 성시를 이루웠고 구룡면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지역경제를 주도하였으나, 1980년대 중반에 들어 도로망확충과 운송수단의 발달로 상권을 부여 등지에 빼앗겨 사양화되었고, 상점도 2∼3개뿐이 없으며, 마을주민 대부분이 딸기 등 비닐하우스 재배와 벼농사를 짓고 있다. 1960년대 인구가 1,300여명 이었으나 현재 467명인 것을 보아도 당시 성시를 이루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관으로는 구룡 우체국이 있고, 마을내 음료수 공장인 대한양행이 성업중에 있다.
고적으로는 논티시장 남쪽으로 약 800m에 위치한 해발 75m의 산 정상을 중심으로 테뫼식 토성인 논티산성(論峙山城)이 있다.
리의 면적은 구룡면에서 가장 적은 0.87㎢이며 가구수는 170호에 인구는 467명이며, 뜸별로는 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논티, 마을에 부자가 많이 나는 명당자리가 많은 마을이라 다부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동방리(東芳里)
구룡면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약 2∼3km 지점에 위치한 마을으로 옥산면 음양산(陰陽山)에서 발원하여 흘러오는 금천이 큰 냇물로 변하는 지역에 위치한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 때는 홍산현의 지역이었다.
1650년경 조선중엽에 밀양박씨가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며, 이어 광산김씨와 풍천임씨가 정착하여 농경지를 조성하면서 큰 마을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른다. 당시 마을 앞에는 큰 강이 흘러 배가 출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왜침이 잦았다 전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상동면(上東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동촌(東村), 죽리(竹里), 석교리(石橋里), 내당리(內堂里), 방계리(芳溪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동촌과 방계의 이름을 따서 동방리라 하고 있다.
해방이후 전체면적의 50%가 답으로 이루어진 넓은 들을 이용하여 1960년대 약 160가구 960여명이 주로 논농사로 생활을 하였으나, 산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인구가 줄어 지금은 119가구 367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80년대 경지정리가 이루어지면서 딸기와 수박 등 비닐하우스 재배기술을 도입하였고 지금은 60여 농가가 비닐하우스 재배를 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부여군에서 하나뿐인 도축장(동방식품)이 이곳 동방리에 있으며, 리의 면적은 2.30㎢로 비교적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여름 장마철만 되면 수해 상습지로 농경지 피해가 극심한 지역이나, 2000년도 동방 배수장이 건설되어 수해 상습지에서 벗어났다. 뜸별로는 동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동촌, 방축을 쌓은 마을이라 해서 방축리, 왜구의 침범이 잦을 때 망을 보던 마을이라 망가래라고도 부른다. 방죽의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방죽안, 방죽을 끼고 풍류가 있는 마을이라 방계, 질그릇을 굽는 요지가 있어서 점촌(店村), 대나무가 많다 해서 죽리라고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죽교리(竹橋里)
구룡면 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약 2㎞ 지점에 위치한 들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 때는 홍산현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상동면의 지역이었다.
1800년경 연안이씨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지며 이어 광산김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상동면의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송죽리와 내당리(內堂里) 석교리(石橋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송죽과 석교의 이름을 따서 죽교리라 하였다.
해방이후 1960년만 해도 650명의 인구가 넓은 들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어 왔으며, 바로 옆 마을인 논티리의 논티시장을 활용한 되메기 장사꾼이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점차 인구가 줄어 지금은 82가구에 233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1980년대 경지정리사업이 이루어지면서 딸기와 수박 등 비닐하우스 재배기술을 도입하였고, 지금은 전체 농가의 60%인 50여 농가가 비닐하우스 재배를 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리의 면적은 1.72㎢이며 고적으로는 철종 9년에 하사 받아 건립한 광산김씨 열녀문(光山金氏烈女門)이 있고, 자연마을로는 과녁촌, 돌다리, 상굴, 송죽골 등이 있다. 뜸별로는 옛날에 어렵게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여 과녁촌, 돌다리가 있던 마을이라 해서 돌다리, 석교, 석교리, 마을 위쪽에 마을이 있다 하여 상굴, 상곡, 마을 뒷산에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아서 송죽골, 송죽, 송죽리라 하는 마을들이 있다.
용당리(龍塘里)
구룡면의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때는 한산현에 속했고, 고려 때는 홍산현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 초기에 왕씨가 정착하여 부를 누렸다고 전해지나 조선 초기에 광산김씨, 경주김씨 등이 입촌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 말기에는 홍산군 상동면의 지역으로 앞에 용못이 있고, 그 옆에 할미당이 있어 용당이 또는 고당(姑堂)이라 하였는데 1914년 군 폐합에 따라 부두리(扶頭里), 외당리, 내당리, 일부를 병합하여 용당리라 하였다.
구룡면에서 가장 넓은 경지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지형적으로 구룡천과 금천의 물이 합쳐지는 곳으로 비가 조금만 와도 수해가 가장 심한 지역이다. 그러나 87년 수해 이후, 배수 개선사업에 의하여 배수장이 건립되었고, 농경지의 98%가 경지정리를 실시하여, 지금은 수해 위험지역에서 벗어나 마음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되었으며, 벼농사 이외에 딸기 등 비닐하우스 재배를 하여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1960년대 인구는 1,700여명이었으나 급격한 경제성장과 자녀교육 문제 등으로 인하여 도시로 전출하고, 소가족제도가 형성되면서 인구가 줄어 현재는 219가구에 671명의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며 생활하고 있다.
고적으로는 부여군 향토문화 유적 제7호인 만가대 팔각정(萬家垈 八角井)이 있고, 연안이씨 열녀문(延安李氏 烈女門)이 있다.
리의 면적은 4.21㎢이며 뜸별로는 마을 앞에 용못이 있고 그 앞에 할미당이 있다 하여 용당, 고당, 용당이이라 하고, 부여로 들어오는 서쪽의 처음 장소가 부여머리, 부두리, 부여두리, 부두라 부르고 긴 등성이에 마을이 있으므로 진등, 장등이라 부르는 마을들이 있다.
7. 홍산면 마을 유래
북촌리(北村里)
홍산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고려말기에 침입해 온 왜구를 무찌르기 위해 최영 장군의 말굽소리가 요란하였을, 조선 선조때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의 말굽소리가 성급하게 뛰어다녔던 그 역사적인 태봉산 아래에 북촌리는 위치하고 있다.
백제 때는 대산현의 고을이었으며 통일신라, 고려 때에는 백제 멸망의 상처에서 다시 일으키는 씨족이 번영을 꿈꾸었던 지역으로서 한 고을의 숙명적 은둔 지대였었다. 고려 초기에 홍산순씨가 처음 새로운 성씨로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해 나갔으며 이어 창원황씨가 정착하며 풀밭을 개간하여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 북촌리의 마을이 들어선 처음이라 한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홍산현 현내면의 지역으로서 홍산 행정 중심지가 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말기(朝鮮時代末期)는 홍산군 군내면(鴻山郡 郡內面)의 지역으로서 홍산 군청(鴻山郡廳) 북쪽이 되므로 북촌(北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좌촌(坐村), 여단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북촌리(北村里)라 칭하였다.
북촌리에는 현재 면사무소를 비롯한 홍산파출소, 홍산초등학교, 홍산중학교, 홍산농·공업고등학교, 보건지소 등의 기관이 위치하고 있으며, 문화재 유적으로는 만덕교비, 만덕교, 삽다리비, 객사, 태봉산 최영 장군 대첩비 등이 다수 잔재하여 옛 고을의 현청이 소재하고 있던 곳으로 문화와 역사가 함께 숨쉬고 있는 지역이다.
리의 면적은 1.60㎢ 가구수는 282호에 인구는 813명이다. 뜸별로는 홍산 관청이 있었던 뒤에 마을이 있으므로 아후(衙後), 관리들을 맞아들이는 연봉정(蓮峰亭)이 있고, 풍수설에 관주혈(貫珠穴)이라는 산과 연화부수혈(蓮花浮水穴)이라는 연못이 있어 이 부근이 명당자리라 하여 연봉이라 부르게 된 마을이 있다.
남촌리(南村里)
동북쪽으로는 태봉산이, 그리고 서북쪽으로는 옥녀봉(玉女峯)이 낮은 산악지대를 이루고 앞으로는 넓은 바다 같은 들녘이 펼쳐지는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백제 때는 대산현의 중심지였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때에는 백제 때에 비해서 비교적 한가한 지역이었으나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러 명문들이 정착하면서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었다. 고려 초기에는 이 고장의 유일한 토착성씨인 홍산순씨가 탄생한 지역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현내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 선조 때에는 이몽학의 난이 일어남에 따라 그 이후엔 다시 향촌(鄕村)으로 변모해 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군내면의 지역으로서 홍산군청의 남쪽에 있으므로 남촌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약현리(藥峴里), 안량리(安良里) 일부를 병합하여 남촌이라 해서 부여군 홍산면에 편입되었다. 남촌리에 있는 고적으로는 동헌, 형방청, 금천교 창립비 등이 있으며 또한 조선시대 중기에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장터로 알려져 우리나라 중부지방에서 군산, 강경을 제외한 가장 큰 시장이였다는 홍산 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리의 면적은 1.26㎢ 가구수는 473호, 인구는 1,398명으로 홍산면에서 가장 많은 가구와 인구수를 점유하고 있다. 뜸별로는 지금부터 백년전까지만 해도 어선이 이곳까지 들어와 닻을 내린 모랭이라 하여 닻전모랭이, 성 아래의 마을이라 하여 성하, 조선시대 약초밭이 있었다 해서 약현, 약막재 등의 마을이 있다.
홍량리(鴻良里)
홍산의 영산인 비홍산(飛鴻山)이 서북쪽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남쪽과 동쪽으로 낮은 야산지대와 들이 있는 곳에 홍량리는 위치한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때에도 그쪽에 속했었다. 이미 백제시대 이전에 취락을 형성하였으나 백제 멸망 후 쇠퇴하는 지역으로 변하였다가 고려 초기에 마을을 형성해 나갔다. 씨족으로는 일찍이 사찰 안양사가 있는 이 지역에 연안이씨가 그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집성촌을 이루며 번성해 나갔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현내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군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안량리(安良里)와 상서면의 한동(閑洞) 신서리(新西里)를 병합하여 비홍산의 홍자와 안량리의 양자의 이름을 따서 홍량리라 칭하였다. 홍량리에 소재하고 있는 문화재로는 홍량리 5층 석탑이 있으며 농가소득 증대 및 농촌경제 활성화를 위한 홍산농공단지가 1997년 7월에 준공되어 126,815㎡의 규모로 조성되었다. 또한 홍량 2리의 주 소득원인 시설 딸기재배(42호 17ha)로 연간 20여억원의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리의 면적은 2.35㎢ 가구수는 145호에 인구는 443명이다. 뜸별로는 고개를 등지고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등자말, 마을 앞으로 두내가 흐른다 하여 수구동, 무루내, 안량사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안량골, 안량곡, 옛날에 풍류를 줄기던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한희동(閑希洞)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좌홍리(坐鴻里)
옛날에는 큰비가 올 때마다 금천의 물이 범람을 해서 농경지 및 도로 등이 침수하는 피해를 입은 지역이였다. 또한 좌홍리 앞뜰은 구룡평야의 허리에 대치하는 지역으로 농업적 요건이 풍부한 지역이며, 작은 좌촌은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확인되었고, 백제시대의 적갈색 연질 심발형토기 및 회청색 경질의 타날문토기편이 수습되고 있어 인류의 정착은 구석기시대부터였고 그때부터 농업이 발달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홍산면내 전체 답면적 중 좌홍들이 차지하고 있는 답면적은 85.6ha로 전체의 13.2%를 차지하고 있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고려 때에는 홍산현의 영역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현내면의 지역이었다. 통일신라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산되며 마을의 형성은 고려 중기부터라고 전해진다. 처음 정착한 씨족으로는 제주고씨로서 상당한 기간을 두고 집성촌으로 알려진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현의 아전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던 곳이었으며 이몽학의 난 이후에는 마을이 옛날보다 쇠퇴해 갔으나 조선시대 말기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군내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홍양리(鴻陽里), 좌촌일부와 상동면의 삼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좌홍이라 하고 홍산면에 편입되었다. 또한 기러기가 많이 내려앉는 절경을 예찬한 것을 볼 때 기러기 홍에서 유래되어 좌홍이라는 설도 있다.
리의 면적은 1.18㎢, 가구수는 92호에 인구는 260명이다. 뜸별로는 비홍산과 금천의 정기(精氣)에서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의 명당이 있다해서 좌촌(坐村)이라 부르고 큰 마을을 큰좌촌(大坐村), 작은 마을을 작은 좌촌(小坐村)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교원리(校院里)
서쪽으로는 태봉산이 우뚝서고 북쪽으로는 홍산향교(鴻山鄕校)가, 동쪽에는 역촌이 위치하여 좋은 대조를 이룬다.
백제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인류의 정착은 백제 때로 추산되나 태봉산 서쪽에서 출토되는 유물(돌검)로 보아 백제 이전에 인류가 정착하였을 것으로 추산할 수도 있다. 교원리의 마을형성은 고려 초기로 추측을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현내면의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군내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군 폐합에 따라 역촌, 서원골, 교촌, 북촌 일부를 병합하여 교촌과 서원의 이름을 따서 교원리라 칭했다. 교원리에 소재하고 있는 문화재로는 조선조 초기 창건된 홍산향교가 있으며 매월당 김시습과 광산인 김효종을 배향하는 사우로 청일사(淸逸祠)가 있다. 그리고 고적으로는 홍산면 교원 89번지 일대에 조선시대 역(驛)인 숙홍역(宿鴻驛 : 옛날의 이름은 비웅(非熊)이었는데 태종 원년에 나는 기러기의 형세가 있다 하여 개칭하였음)이 있었다.
리의 면적은 1.52㎢ 가구수는 149호에 인구는 395명이다.
자연마을은 마을에 향교가 있으므로 향교골이 향교곡, 생적굴이 되었고 김시습 등을 모신 청일사가 있으므로 서원골, 서원곡, 청동(淸洞)이라 부른다.
토정리(土亭里)
풍수설에 따르면 지형은 토끼 형상을 한 산에 용이 누워 있는 형국이라 “토산지상 유와룡형(兎山之上有臥龍形)”이라 하였는데 그 형국의 모듬 장소를 발견하면 유복해 진다고 전하나 아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한다.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초로 추산한다. 그리고 마을이 형성되고 개간이 서둘러진 것은 고려 말기가 확실한 것 같다. 고려 말기 양천허씨가 개척의 꿈을 안고 처음 정착하였으며 이어 동래정씨, 경주김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은 점점 대형화해 갔다.
조선시대에는 홍산현 군내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토동(土洞)과 정동(亭洞), 구산리(龜山里), 여단리 일부를 병합하여 토동의 토자와 정동의 정자 이름을 따서 토정리라 하여 부여군 홍산면에 편입되었다. 토정리에 소재하고 있는 고적으로는 질·병신을 제사하던 홍산여단지가 있다.
리의 면적은 3.79㎢ 가구수는 98호에 인구는 246명이다. 자연마을은 마을앞 산모양이 자라처럼 생겼다 해서 구산, 거그매, 조선시대 홍산현 여단이 있는 장소의 마을이라 여단, 마을에 큰 정자나무가 있으므로 정주안, 마을 부근에 토끼와 닮은 산이 있으므로 톳골, 토동(兎洞), 냇물이 갈라지는 그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가르내라고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상천리(上川里)
홍산면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부여군 내산면과 경계를 이루는 상천리는 산이 많은 지역이다. 리의 남쪽으로는 상천 저수지가 여러 곳에서 흘러오는 산악지대의 물을 저장하는 구실을 하고 산아래 계곡사이로 들이 펼쳐져 있어서 비교적 안전한 농경지대를 이루고 있다.
백제 때에는 대산현의 영역이었으며 산악지대인데 비해서 일찍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고려 중기에 달성서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광산김씨가 터전을 잡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초기에는 두 씨족이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대야곡면(大也谷面)의 지역이었다. 숲이 우거져서 토양이 풍부하며 자연적인 경관이 또한 아름다운 곳이므로 조선시대 500년 동안 이 지방의 선비들이 자주 찾으며 안식지로 우러러본 지역으로도 통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대야면의 지역이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상노리(上老里), 하노리(下老里), 와천리(瓦川里), 늑동(勒洞) 일부를 병합하여 상노의 상자와 와천의 천자의 이름을 따서 상천리라 하고 홍산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5.98㎢로 홍산면 전체 면적의 25%를 점유하고 있어 가장 크며 가구수는 89호에 인구는 220명이다. 고적으로는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140호인 상천리마애불상(上川里磨崖佛像)이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마을의 허리가 가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가느실, 삽티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을 삽티라 하고 위는 윗삽티 아래는 아래삽티, 지형이 반달처럼 생겼다 해서 월구리라 하는 마을들이 있다.
정동리(井洞里)
남쪽으로는 남면의 삼룡리(三龍里) 들을 지나 금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면서 농경지대를 이루고 있어 그 위쪽에 위치한 정동리는 산악에서 흐르는 물이 좋아서 선비가 많이 탄생한다고도 전한다.
백제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백제 때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취락의 구성도 있었던 곳으로 마을의 형성은 고려 말기부터라고 전한다.
조선시대 초기는 홍산현 대야곡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함평모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어 나갔으며 그 이전 씨족의 정착과정을 보면 마을형성은 있었으나 어느 씨족이 주축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어 정착 씨족으로는 파평윤씨가 지금의 사기점골에서 정착시대를 이루었다. 조선시대 말기는 홍산군 대야면에 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상정리(上井里), 백동(白洞), 가동(加洞)과 군내면(郡內面)의 소곡리(蔬谷里)를 병합하여 상정과 가동의 이름을 따서 정동리라 하여 부여군 홍산면에 편입되었다.
1979년 사창(社倉)들이 경지정리(耕地整理)되면서 일명 샛터라고 부르는 하소곡(下蔬谷) 마을이 없어지고 앵시동으로 이전 취락구조(聚落構造) 주택마을을 형성하였다.
리의 면적은 2.54㎢ 가구수는 131호에 인구는 347명이다.
자연마을은 마을이 모롱이에 자리해 있다 해서 모랑이, 모랭이, 잣나무가 많았던 마을이라 백시동(栢市洞), 조선시대 사기점이 있었으므로 사기점골, 가동, 마을에 우물이 많으므로 상정, 상정리, 백시동 남쪽에 있는 마을인 안추실, 소곡(蔬谷), 꾀꼬리 집이 많아 앵소동(鶯巢洞), 마을 가운데 큰 바위가 있어 포석골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무정리(務亭里)
북쪽으로는 부여군 내산면과 동쪽으로는 구룡면과 경계를 이루며 비교적 산악이 많은 지역에 무정리가 위치한다. 인류의 정착은 고려중기로 추산하나 그 이전에 마을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고려 중기에 씨족의 번성을 위하여 처음 자리잡은 무안이씨의 중시조가 무정리에 처음 자리잡은 인물로 손꼽히며 그 후 마을이 형성 되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공론이 되었다. 백제 때는 대산현의 영역이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대야곡면의 지역이었다. 조선 성종(1490년경) 때의 온양방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해 나갔으며, 이어 광산김씨, 여흥민씨가 정착하면서 무정리 일원에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대야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선정리(仙亭里), 무중리(務中里), 무량리(務良里) 일부를 병합하여 무량의 무자와 선정의 정자의 이름을 따서 무정리라 하고 부여군 홍산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79㎢ 가구수는 64호에 인구는 178명이다.
자연마을은 물이 많고 수원이 풍부하다 하여 물양이라 부르다 무량이가 되었고, 옛부터 선인들이 정자를 짓고 놀며 풍류를 즐기는 마을이라 하여 선정(仙亭)이라 부르고 쇠가 많이 나왔다 하여 쇠정이, 쇠정, 철정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조현리(鳥峴里)
홍산면에서 가장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북쪽으로는 천보산과 월명산의 준령을 뒤로 하고 낮은 야산지대와 들이 자리하며 구룡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본래 마을이 형성된 때는 백제시대로 대산현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 홍산현 대야곡면 상조리(上鳥里)는 조현 1리 지역이었으며, 홍산현 대야곡면 신동리(薪東里), 신서리(薪西里)는 조현 2리의 지역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81년)에 보면 상조리(조현 1리)는 현청으로부터 거리가 7리이며 호수는 25호이고 인구는 105명(남자 54명, 여자 51명)이며, 신동리·신서리(조현 2리)는 거리가 10리이며 호수는 176호이고 인구는 687명(남자 348명, 여자 339명)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선조 때 일어난 이몽학의 난 이후에 많은 씨족이 이촌하였으며, 끝까지 이 지역에 정착한 씨족으로는 경주김씨, 광산김씨 가문이 있고 숙종 이후의 수원백씨가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상동면·대야면의 지역으로 새재고개 아래를 새재 또는 조현(鳥峴)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상조리, 신동리, 신서리를 병합하여 조현리라 하고 부여군 홍산면에 편입되었다. 조현리에는 장수초등학교(長壽初等學校)가 위치해 있으며 문화유적으로는 경주김씨 계성군(慶州金氏 鷄城郡) 위패를 모신 영모당(永慕堂)과 경주김씨 가문의 효자비문이 마을 한가운데 청룡이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1930년경 마을청년의 공동체 의식과 협동심, 새로운 문화 풍습을 전수하기 위하여 조직된 근로 청년단(勤勞 靑年團)의 단체가 있었으며 해방직후 홍산면 자체로 청년단 운동경기를 홍산초등학교(鴻山初等學校)에서 가질 때 마을의 사기와 선수들의 필승정신을 북돋우기 위하여 김영진, 김기인씨 등이 작사 작곡한 마을응원가도 있어 현재까지 불리워지고 있다.
리의 면적은 1.90㎢, 가구수는 122호에 인구는 351명이다.
자연마을은 큰뜻을 품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하여 대야골, 새재고개 아래에 마을이 있다 하여 새재, 수해를 막기 위해 고을 원이 마을 사람을 동원하여 나무를 많이 심은 마을이라 하여 식송(植松), 천석군이 많이 나올 만큼 기름진 땅이 주위에 있다 해서 천석골, 천석곡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8. 옥산면 마을 유래
상기리(上基里)
조선시대 말기에 홍산군 상서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립리(上笠里), 하립리(下笠里), 신기리를 병합하여 상립과 신기의 이름을 따서 상기리라 하여 부여군 옥산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2.71㎢이고, 가구수는 72호에 인구는 229명이며, 자연마을으로 갓점, 아래갓점, 위갓점, 신기 등이 있다.
■ 상립마을
상립마을은 원래 홍산군 상서면에 속하였으며, 회관옆에 있는 정자나무(수령 1,000년 이상으로 추정)를 보아 마을의 설촌년대는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1730년경에 광주정씨가 입촌하여 마을을 개척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후 김해김씨, 청주한씨가 들어와 마을이 번창하였으며, 마을 원래 이름은 마을 앞 뒷산의 지형이 삿갓의 형태를 띠고 있다 하여 입점리(笠店里, 上·下笠)로 불려오다 현재 상립은 상기 1리, 하립은 신기로 병합되었다. 홍산 감포문(鴻山 鑑浦問)이 가활만인지지(家活萬人之地)라 하여 만가대(萬家垈, 상립의 북쪽에 있던 집터)에 만석군이 살았다 한다.
■ 신기마을
1850년경에 전주이씨가 입점리의 아래에 개촌한 후 그뒤 양주조씨의 유학자가 정착한 후 수많은 문하생을 두어 새로운 마을이 생겨나 새로운 터라는 뜻으로 신기라고 불리어 오다 행정구역 조정때에 입점리의 하립을 흡수하여 신기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은 조선시대에 갓을 만드는 갓점이 있었으므로 갓점, 갓점골, 입점, 입점리라고 부르고 갓점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윗가점, 갓점 아래에 있는 마을을 아래갓점, 마을이 새로 생겨 신기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학산리(鶴山里)
옥산면의 서북쪽에 위치해서 동쪽으로는 비홍산의 뒤편에 학산리가 위치한다. 차령산맥의 산폭이 서서히 낮아지는 북단 상기리, 음양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서 옥산저수지로 들어가는 쇠내의 냇물이 리의 중앙을 뚫고 흘러가면서 조성한 들과 산은 수려하기가 이를데 없다. 달기봉과 지네봉의 높은 산이 민간신앙의 온상지처럼 보이는 것도 수려한 산천에 의미가 깃들어 있음에서 그 수려함이 보인다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홍산현 상서면의 지역으로 조선시대 중기 홍산에서 일어났던 이몽학의 난 때 그 난을 피하여 이곳에 정착한 홍산순씨가 마을형성에 따른 개척인으로 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가천리(加川里), 가장리(加莊里)를 병합하여 이곳에 학이 많이 날아드는 고개가 있으므로 학산리라 개칭하였으며 리의 면적은 2.22㎢이고, 가구수는 45호에 인구(人口)는 122명이다.
자연마을은 조선시대 선조 때부터 마을이 생겼다 하며 먼저 살던 터보다 더욱 좋은 위치로서 마을을 형성한 지역이라 해서 가장, 마을 앞에 내가 흐르며 냇가 부근에 마을이 있다 해서 가천이라고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홍연리(鴻淵里)
홍산들에 북쪽을 가리고 우뚝 솟은 해발 267m의 비홍산, 서쪽 넓은 들이 지역에 위치하여 옥산저수지 위쪽을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 홍연리이다.
조선시대에 처음 정착한 풍천임씨, 경주김씨 들이 조선시대 500년 동안 번창하는 집성촌을 이룩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상서면의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 말기에도 홍산군 상서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비홍리, 목동, 보곡리, 용연리(龍淵里)를 병합하여 비홍과 용연의 이름을 따서 홍연리라 하여 부여군 옥산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2.56㎢에 가구수는 101호에 인구는 236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목동, 비홍, 용연 등이 있다.
■ 목동마을
1480년경에 풍천임씨가 이주하여 개촌한 것으로 추정되며, 나무가 많은 곳이라 하여 목동이라 칭하였다. 그후 앞산에 기러기가 날아든다 하여 비홍리로 부르는 마을이 있었고, 사기를 많이 구웠었다는 산적골과 독그릇을 많이 만들었다는 독전골이 있다.
■ 용연마을
조선초 마씨가 개촌한 것으로 전하여지나 그후 경주김씨가 개척하면서 마을의 뒷산 용상(龍上)골에서 용이 승천하여 마을 이름을 용연이라고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개촌 후부터 매년 정월 14일에 마을 어귀 미륵바위에 동제를 지내고 있다.
봉산리(鳳山里)
옥산저수지를 끼고 넓은 들과 산이 있는 서쪽에 봉산리(鳳山里)는 위치한다. 마을 뒤로는 수려하고 드높은 옥녀봉(玉女峯)이 있어서 풍류객들이 자주 찾던 곳이 또한 봉산리다.
조선 중엽으로 추정되는 때에 남원윤씨와 풍천임씨, 청주곽씨 등이 개촌한 뒤, 마을 뒷산 옥녀봉의 형국이 봉의 형태라 하여 봉곡(鳳谷), 신당(神堂)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당산(堂山), 원두밭이 있다 하여 원곡(院谷)으로 부르던 3개 마을이 있었으나 1914년 군 폐합시에 윗마을을 봉곡마을, 아랫마을의 당산과 원곡을 병합하여 원당마을로 하여 봉곡의 봉과 당산의 산을 따서 봉산리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리의 면적은 2.31㎢이며 가구수는 68호에 인구는 159명이고 당산 마을에는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7세기의 백제 고분군(百濟古墳群)이 있다. 내부에서 관형토기, 광구토기, 철제장검 등이 출토되기도 했다.
자연마을은 산에 신당이 있어서 당산이라 부르고 마을이름도 당산이라 부르며, 마을 뒷산 옥녀봉의 형국이 봉의 형태라 그 아래 마을을 봉곡이라 부르고, 조선시대에 길을 안내하는 원이 있는 골짜기에 마을이 있다 해서 원곡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중양리(中陽里)
조선초기 난리가 있어 은진송씨, 강릉유씨 등이 이곳으로 피난온 뒤 개촌한 것으로 추정되며, 호랑이가 저무는 해에 개를 만나 개를 쫓는 형국이라 하여 모흘(毛屹), 마을 앞에 방죽이 있다 하여 방중(防中), 마을에 햇볕이 따스하고 바위가 많다 하여 양암리(陽岩里)로 부른 3개 마을이 있었으나 1914년 군 폐합시에 방중리와 양암리의 지명을 따서 중양리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리의 면적은 1.74㎢에 가구수는 40호에 인구는 90명이다.
자연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을 지형이 호랑이가 개를 쫓는 형국이라 모흘이라 부르고, 전에 방죽이 있었던 마을이라 방중말, 방중리, 바위가 많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서 따뜻한 마을이라 양암, 양암리, 양수바위라고 부른다.
대덕리(大德里)
옥산면의 남서쪽에 위치해서 서천군 판교면(舒川郡 板橋面)과 보령시 미산면(嵋山面)과 접하고 있는 대덕리는 조선시대 중기 전주이씨가 정착하면서 남원윤씨, 밀양박씨, 진주강씨가 입촌하면서 마을을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하서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일유리(日遊里), 대마동(大馬洞), 부덕리(富德里)를 병합하여 대마와 부덕의 이름을 따서 대덕리라 하여 부여군 옥산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3.15㎢이며 가구수는 54호에 인구는 121명이다. 일유마을과 마을 지형이 큰말과 같이 생겼다 하여 대마동, 처음에는 우만리(右萬里)라고 부르던 마을인데 마을이 빈곤하여 부를 쌓고 덕을 베푸는 동네가 되라고 부덕이라고 고쳐부른 자연마을이 있다.
신안리(新安里)
조선시대 홍산현 하서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안곡리(雁谷里), 옹점리(甕店里), 신기리, 율동(栗洞, 밤골), 안서리의 일부를 합쳐 신기리와 안곡의 지명을 따서 신안리라 하였다. 마을의 유래로는 해주최씨가 효종 원년(1650)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양주조씨, 평산신씨 등과 같이 입촌하여 개척한 것으로 전해지며, 기러기가 많이 나오는 동네라 하여 안동(雁洞)이라 칭한 곳과 밤나무가 많다 하여 율동이라 한 곳과 안서리 옆에 새로 생긴 마을을 신기라 하여 신안 2리를 이루고 있으며, 시강 마을은 마을내 김해김씨의 12대조의 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중엽에 설촌된 뒤, 금녕김씨, 경주최씨 등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옹기를 굽던 곳이 있다 하여 옹점리와 시를 잘하시는 분들이 많은 마을이라 하여 시강을 신안 1리라 하였다.
리의 면적은 1.71㎢에 가구수가 84호에 인구는 224명이다.
자연 마을명으로는 방골, 시강, 안동, 옹점리, 안곡리 등이 있다.
안서리(安西里)
남쪽으로는 서천군 문산면(文山面)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옥산 저수지 아래쪽 반경에 이르기까지 관할하며 옥산면의 행정적 각 기관이 자리한 마을이다.
조선시대 초기 홍산현 하서면, 조선 태종때 조선말기 홍산군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해주최씨가 1600년경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설촌한 뒤 하서면 지역으로 안곡리 서쪽이 되므로 안서리라 하였는데, 1914년 군폐합시에 안서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58년에 수암리(秀岩里)에 있던 면사무소가 안서리로 옮겨와 면소재지 마을이 형성되었다.
안서리들을 안섯들이라고 부르고 이들에 짐한톳이라고 부르는 논이 있다. 옛날 흉년이 들었던 해에 김 한톳과 바꾼 논이라 김 한톳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짐 한톳으로 변했다는 말이 전해온다
리의 면적은 1.21㎢이며 가구수는 69호에 인구는 197명이다.
자연 마을로는 새로된 마을로서 학교가 섰으므로 교촌(校村), 또는 새탕이라하며, 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안동리(安東里)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내대리(內垈里)
백제 때는 대산현, 신라 고려 때도 그쪽에 속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하서면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홍산군 하서면 지역으로 차대리(車垈里), 내동(內洞) 소안동(巢安洞)을 병합하여 내동과 차대의 이름을 따서 내대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50년 이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인동장씨, 한양조씨, 김해김씨 등이 개척한 뒤 소안동과 차동을 분리하고, 차씨가 살았다 하여 차대리, 안에 있는 동네라 하여 내동, 기러기가 날아와 새 집을 많이 지었다 하여 소안동으로 명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소안동은 소안동(小安洞)으로 전음(轉音)되어 현재에 통용되고 있다.
리의 면적은 2.61㎢이며 가구수는 90호에 인구는 268명이다.
자연 마을로는 안굴, 소안동, 차대리 등이 있다.
가덕리(加德里)
조선시대 홍산현 하서면 지역으로 한산이씨, 경주김씨, 진주장씨, 전주이씨 등이 설촌한 것으로 추정되며, 처음에는 이곳이 갈대만 무성하고 황폐하여 갈때기 또는 가덕이라 칭하였고, 그 뒤 노덕(蘆德)이라 부르다 1914년 군폐합시 남면의 선서리(船西里) 일부를 병합하여 가덕리라 하고 부여군 옥산면에 편입하였다.
특히 부개촌(富開村) 마을은 일제 때 형성된 마을로 그 전에는 사람이 별로 거주하지 않고 솔밭만 많이 우거져 청재[靑峙]라 일컬었으며 1930년대 일본인 도미나가 고우츄[富永光中]가 거주하면서 어려운 사람을 고용하여 개간에 참여할 때에 앞으로 부를 알리기 위해서 개간하는 마을이라 지칭하여 부개촌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마을이다.
또한 마을의 형태가 가늘다 하여 세동(細洞)이라 칭하였고, 앞산이 소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오양골, 전쟁시 이곳에 군사들이 진을 쳤다 하여 진등(陣燈)이라 하는 마을들이 있다.
가덕리 면적은 3.37㎢이며 가구수는 140호에 인구는 348명이다.
수암리(秀岩里)
본래 홍산군 상서면의 지역으로서 증암리(甑岩里)와 석우리(石隅里)에 원곡리(院谷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수암리로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연안이씨, 청주한씨, 여산송씨 등이 유입되어 개척하면서부터 시루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있다 하여 증암(甑岩)이라 했다. 1958년까지 면사무소가 있다가 안서리로 옮겨갔으며 또한 돌모루는 남평문씨, 연안이씨 등이 1720년경에 개촌한 뒤 마을어귀에 큰 바위가 있어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은 반드시 이 바위를 돌아서 온다 하여 돌모루로 칭하였으며 홍산면과 면계를 이룬다.
리의 면적은 1.79㎢에 가구수는 81호에 인구는 194명이며 자연 마을명은 돌모루, 시루바위, 좌곡 등이 있다.
9. 남 면 마을 유래
삼룡리(三龍里)
서쪽에서 흘러오는 금천을 끼고 넓은 들이 조성된 남면평야 북서쪽에 위치해서 북쪽으로는 홍산면 교원리 정동리와 그리고 서쪽으로는 북촌리 좌홍리와 동쪽으로는 남면 송학리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남면의 넓은 들을 바라다보는 지역에 삼룡리는 위치한다.
백제 때에 이미 인류가 정착하여 농경지의 개척을 서둘렀던 지역으로 삼천(三川)과 용성(龍城)이 있는데, 이것을 보면 그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냇물이 합치는 삼천과 흙을 틀어 올린 것 같은 용성은 고대 집단마을을 형성하는 좋은 조건이 놓인 입지조건으로 지적된 듯하다. 백제 멸망 후 사비성을 피해서 정착한 부여서씨, 고려초 상주황씨가 정착하여 농경지를 일구어 나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상동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으로삼천리와 용성리를 병합하여 삼룡리라 하고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37㎢에 가구수는 141호이고 인구는 343명이다.
삼룡리는 수도작 위주의 전형적인 마을로 대부분 영농규모가 타 지역에 비하여 대규모이며, 마을입구에 부여서씨 서영의 효자문과 서진우의 효자문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세 갈래로 흘러 들어오는 냇물이 마을 앞에서 한데 합쳐 흐른다 하여 삼천, 삼천리, 처음에는 뱀리라고 부르던 마을이나 용이 꿈틀대며 틀어올린 형태의 마을 지형라 하여 용성, 용성리라불리는 마을이 있다.
송학리(松鶴里)
북쪽으로는 야산지대로 이어지는 홍산면 조현리 무정리와 서쪽으로는 구룡면 동방리와 경계를 이루며 야산지대와 들과 그리고 주거지로 알맞은 들녘이 잘 조화된 곳에 송학리는 자리한다.
고려 때 진주강씨와 한산이씨가정착하여 농경지 개간으로 마을형성이 되어갔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상동면의 지역이었다. 영일정씨와 나주정씨들의정착으로 집성촌이 형성되면서 이 지역은 부촌을 누리는 영역으로 발전해 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상동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괘경리(掛鏡里), 방계리(芳溪里), 하조리(下鳥里), 송수리(松樹里), 죽리, 용성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학이 날아들고 송림이 유명하므로 송학리라 하여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76㎢에 가구수는 131호이며 인구는 336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지형이 거울을 건 것처럼 생겼다 해서 괘경, 옛날 긴 밭(장전)사이에 밭이 있으므로 밭새라고 불리어 오며, 마을 주변에 소나무가 무성하다하여 송수리, 송수라라고부른다. 홍산면 새재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아래새재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마정리(馬井里)
남면의 동쪽에 위치해서 남쪽으로는 마을이 형성되는 야산과 들녘이 그리고 북쪽으로는 금천을 낀 광막한 들이 자리한 지대에 마정리는 위치한다. 고려 중기 전원으로 은거하는남양홍씨의 정착과 나주나씨, 담양전씨, 남평문씨의 정착으로 안정된 생활권을 이룩한 지역이며 고려 때는 홍산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남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마동리, 마서리와 임천군 북박면(北朴面) 역리, 지경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큰 우물이 있었으므로 말우물 또는 마정의 이름을 따서 마정리라 하고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4.23㎢에 가구수는 270호이고 인구는 768명이다. 한때 이름난마정장터가 현재에는 그 흔적만이 남아 있으며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라골뜸, 큰샘이 있는 마을이라샘골 또는정곡이라부르고, 마을이 서쪽에 있으므로서편 또는 마서리, 마을 지형이 소라처럼 생겼다해서 소라말이라 부르며송촌이라부르기도 한다. 마을 지형이 소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소머리, 시장이 있는 마을이라장터, 또는 장대(場垈), 뒷산의 형국이 제비 형국이라 집을 높은 곳에 지어야 좋다 하여 점상(漸上), 점생이라부르고, 무학대사가 말에 물을 먹였는데 말발자국이 생겼다 하여 말우물, 마정, 또는 샘속 바닥에 말머리처럼 생긴 바위가 있고 입과 같은 구멍에서 물이 나온다 하여 신성시하는 우물로 전해지고 있는 마을들이 있다.
송암리(松岩里)
남쪽으로는 덕림고개 그 북쪽으로 산악지대가 준령을 만들고 그 북쪽으로 서서히 금천쪽으로 낮은 야산지대와 들을 조성하는 지역에 송암리는 자리한다. 고려초연안이씨가 정착을 하였고 그 후 서림이씨의 정착으로 집성촌을 이루며 마을을 형성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호암리(虎岩里),송곡리, 마서리 일부와 상동면의 동촌, 죽리, 송수리(松樹里)의 각 일부와 임천군 북박면의 구리곡리(九里谷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송곡과 호암의 이름을 따서 송암리라하여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송암리의 큰 마을 송곡과 호암에서림이씨 60여세대가 집성촌을 이루어 현재에 이른다.
리의 면적은 3.32㎢에 가구수는 148호이며 인구는 416명이다.
마을의 뒷산은 대부분 밤나무가 조림되어 있으며, 남쪽 평야지대에는 딸기, 수박 등 특용작물을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범바위와 송곡등 2개 자연마을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범바위는 마을 뒤에 범을 닮은 바위가 있어서 범바위 또는 호암리라부르고 마을이 아늑한 골짜기 안에 자리하고 있어 송곡, 송골, 송곡리라 불린다. 특히 선사유적지로 고인돌 3기가 있으며 마제석검 등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회동리(檜洞里)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백제가 망한 후에는 유민들에 의해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고려시대 중기에 이르러 광산김씨가 정착하면서 광산김씨 집성마을이 형성되었다.
고려 때는 홍산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남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절이 있었으므로 줏절 또는 회사(檜寺), 회사동(檜寺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송서리 일부와 상동면의 하조리, 송수리, 용성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회동리라 해서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3.74㎢에 가구수는 160호에 인구는 415명이다.
면 소재지이면서도 특별한 상권이 형성되지 못한 것이 특징이며, 버드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유곡 또는 버드골, 회동을 회사동, 와굴 즉 기와를 굽는 마을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내곡리(內谷里)
남쪽으로는 비교적 높은 산이 자리를 정하고 북쪽으로 이을수록 야산지대를 이루는, 그리고 그 야산지대 앞에는 멀리 흐르는 금천 가까이까지 푸른 들판이 펼쳐진 들녘을 낀 지역에 내곡리는 자리한다.
조선시대 단양이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형성하였으며, 이어 창녕성씨가 정착하여 남쪽의 들을 개간하고 마을을 형성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진곡리(眞谷里)와 내동리, 회서리의 각 일부와 상동면의 삼천리 일부를 병합하여 내동과 진곡의 이름을 따서 내곡리라하여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2.06㎢에 가구수는 91호이고 인구는 231명이다.
주요 특산물은 취나물이며 수박·참외 등의 특용작물도 생산된다. 내동, 안골, 참실의 3개의 자연마을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 내에는 단양이씨인 이지시(李之詩), 이지례(李之禮) 형제를 제향한 동절사(同節祠)가 있으며, 마을입구에는 참실 콩나물공장이있어 이곳에서 생산된 콩나물이 부여, 서천, 보령, 논산지역에 공급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이 내안쪽에 자리해 있으므로 내동, 마을이 골짜기 안쪽으로 자리해 있으므로 안골, 마을이 실처럼 길게 걸쳐 있으며 마을 앞에 골무처럼 생긴 바위가 있을 때 깨끗하고 청소한 뜻을 따라 참실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마을들이 있다.
신홍리(新鴻里)
백제 때는 대산현, 고려 때는 홍산현,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남면에 속한 지역으로 마을의 형성은 늦은 지역으로 조선 중기부터 많은 성의 마을로 조성되어 갔으나 파평윤씨들이 호동(虎洞)에 정착하면서 집성마을도 생겼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남면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내서리, 신기리, 내동리 일부와 상동면의 삼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홍리라 해서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40㎢에 가구수는 69호에 인구는 180명이다. 조선 효종7년(1656)에 건립된 삽다리 건립비가 남아 있으며 마을의 주요 소득 작목은 취나물로 작목반이 형성되어 있고 범말과 신기 2개의 자연마을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대선리(大船里)
옛날에 늙은 선녀가 말을 타고 이곳에 와서 말을 멈추어 두고 노고산으로 올라가서 그 산에 사는 늙은 선녀와 놀았다 하며 그 말을 멈추게 하였다는 마가산(馬駕山)을 남쪽에 두고 북쪽으로는 조선시대만 하여도 큰배가 드나들었다는 금천을 북쪽에 두고 넓은 들에 대선리는 자리한다.
고려 때는 홍산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도 홍산현 남면의 지역이었다. 금천이 자주 범람하여 개간을 생각지도 못했으나 고려 말기에 연안이씨와 한산이씨들이넓은 들을 남쪽부터 개간하여 들녘에 마을을 형성해 갔으며 이어 경주최씨와 인동장씨의정착으로 큰 마을로 변해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홍산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배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배아구, 바이아위 또는 바야위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대선리라 하고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80㎢에 가구수는 99호에 인구는 253명이다.
북촌마을 일대는 선사 취락지로 추정되며 마제석검, 석촉, 무문토기 등이 발견되는 등 발굴 및 관리가 요하는 지역이다. 자연마을로 마을 서쪽 논 가운데에 배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하여 바야위, 배아구, 바이아위라부르고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양지뜸, 또한 북촌이라 부르고 음지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음지뜸, 또한 남촌이라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또한 대선리 석탑(大船里 石塔)은 수로가 지나가는 외딴집 앞에 있는데 구전에 따르면 백여년 전에 임천 옥곡에 사는 이참봉이 선영의 석물에 사용하기 위하여 높이 3자 정도의 돌 위에 비가 서있던 것을 허물어 버렸더니 바야워 마을에 괴질이 돌고 낮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 피해가 커서 다시 남아있는 석재를 모아 탑을 쌓은 후 마을이 편해졌다 하는, 지금도 마을에서는 위하는 탑(塔)이다.
금천리(金川里)
서쪽에 위치한 옥산면 음양산(陰陽山)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쇠내[金川]가 점점 넓은 들을 조성하는 그 첫머리 뒤편에 자리해서 남쪽으로는 노고산으로부터 낮은 산의 준령을 조성해 주는 남면의 서남단에 금천리는 위치한다.
고려 시대에는 갈대밭이었으며 뜸부기의 서식지였다고 전해지며 고려 말 능성구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해 갔으며, 조선시대는 홍산현 남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는 홍산군 남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사곡리(社谷里)와 선서리, 선동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앞 내의 이름을 따서 금천리(金川里)라 하고 부여군 남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27㎢에 가구수는 90호이고 인구는 216명이다. 1960년대 금천초등학교 개교시 남면 인구가 1만명에 달하였으나계속된 인구 감소로 1993년에 폐교하고 건물은 공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에 사당이 있으므로 사당골, 사곡, 사곡리, 마을을 동쪽에 배의 형국을 한 바위가 있었으므로 그 서쪽에 마을이 있다 해서 선서, 선서리라 부르고 기러기가 앉는 형국이라 해서 안터, 안곡이라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10.충화면 마을 유래
지석리(支石里)
서쪽으로는 노고산이 북쪽으로는 마가산이 우뚝서서 수렵문화로부터 농경문화로 접어드는 고대의 현상을 눈 익혀 볼 수 있는 지역이다. 지석리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오목내가 이곳에 뿌리내리는 인류의 귀착지 이기도 하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에 벌써 마을의 형성이 따랐을 것이며 백제 때에는 대산현의 영향을 받았으나 차츰 임천권(林川圈)에 속해서 고려시대로부터는 완전히 임천문화권에 들어갔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팔충면(八忠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팔충면의 지역으로서 고인돌이 있으므로 고인돌, 괸돌, 지석(支石)이라 불렀는데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팔충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지석리(上支石里)와 하지석리(下支石里)를 병합하여 지석리라 해서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4.57㎢에 농경지가 1.19㎢ 중 70% 경지정리되어 영농에 편리하게 되어 있으나 용수원이 부족하여 매년 한해가 극심한 지역이고, 가구수는 99호, 인구는 234명이다. 팔충면 당시 면소재지가 이곳에 있었으며, 여산송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오래동안 정착한 김해김씨, 밀양박씨의 가문의 뿌리가 깊은 곳으로 범황(梵皇)골, 갈마(渴馬)골, 외뜸말, 남촌, 하지 등의 뜸이 있는 지역이다.
자연마을으로 옛날에 늙은 선녀가 말을 타고 와서 말에 물을 먹이던 장소가 있는 마을이라하여 갈망골, 갈마동이라 부르고 갈마음수형(葛馬飮水形) 명당자리가 있다 한다. 마을 앞 길옆에 고인돌이 있는 마을이라 고인돌, 괸돌, 지석이라고 부르고, 옛날에 범황사라는 절이 있던 마을이라 범황골이라 부르고 고인돌 마을 위쪽에 자리해 있다 해서 상지석, 상지, 상지석리라고도 부른다. 외따로 떨어져서 가운데 마을이 있으므로 외촌(外村), 중지, 중지리, 지석리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지 하지석, 하지석리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지석리 도로변에 고인돌 3기가 있으며 청동기시대의 지석묘로 추정하고 있다.
천당리(天堂里)
천당리는 청남리(靑南里)와 경계를 이루는 천등산(天燈山) 아래 펼쳐지는 야산지대와 들녘에 마을이 생기면서 풍부한 자연적 자원으로 발전하여 현재는 충화면의 행정적 중심지가 되었다. 인류의 정착은 청동기시대, 즉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에 이미 마을의 형성이 이루어졌던 지역으로 백제 멸망 후에는 많은 백제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들녘이 화려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겪으면서 정착민들에 많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여 오늘의 천당리 문화권 형성은 고려말기에 정착한 창녕조씨의 꾸준한 혈통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또한 조선시대 초기에 입촌한 해주오씨들의 꾸준한 변화도 특이할 만하다. 그리고 백제 때부터 정착하여 천당리 문화를 계승한 신창표씨의 충성은 전설에도 여러 갈래 구전되어 오듯이 천당리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겠다.
백제 때부터 가림군(加林郡) 등 임천문화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팔충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도 그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천리, 중천리, 하천리, 당동리(堂洞里)와 하지석리 일부를 병합하여 하천과 당동의 이름을 따서 천당리라 하여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4.05㎢에 농경지는 1.11㎢로 80%가 경지정리되어 영농에 편리하게 되어 있으나 수리시설이 안되어 농사에 어려움이 있으며, 가구수는 132호에 인구는 349명이다.
자연마을을 뜸별로 살펴보면 학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교촌, 조선시대에 사창이 있었다 하여 돌창리(乭倉里), 옛날에 신당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당골, 당동, 당곡, 천등골 중앙에 있다 하여 중뜸, 중촌, 월촌(越村), 중천(中天), 천등산 아래 추원(秋元)골 위 마을로 천등골, 추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추원(秋元)골, 천등골 위쪽에 있는 마을로 계백장군이 태어나 성장하여 표석(表石)을 남기고 출전하였다 하여 표뜸, 표촌, 상천 등의 뜸이 있다.
팔충리(八忠里)
팔충리는 마가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을 적시며 흐르는 오목내가 점점 강폭이 넓어지는 유역에 있다. 신석기시대에 이어 청동기시대 후반에는 많은 인류가 정착하였고, 백제 때에 많은 인물이 배출되는 특이한 지역이다. 구전에 따르면 백제 말의 충신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 복신(福信), 도침(道琛) 등 팔 충신이 이곳 출신이라는 것도 이 지역의 많은 인물들이 백제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고려 때에도 그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팔충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계 개정에 따라 팔가면(八可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마리, 하마리, 수철리(水鐵里), 그리고 상금리(上金里) 일부를 병합하여 팔충리라 하여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고려시대부터 밀양박씨들의 정착과 번성으로 문화권 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현재는 영월신씨가 정착한 후 그 대를 잇는 지역이나 조선시대에 큰 길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닌 곳도 이 지역이다.
면적은 3.25㎢에 농경지는 1.0㎢ 중 70%가 경지정리되었으며, 가구수는 64호이고 인구는 179명이 살고 있는 곳이다.
자연마을로는 옛날 덕림사라는 절이 있는 곳으로 덕림(德林), 옛날에 한양에 오르내리는 큰길로 말굽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여 마치(馬峙), 두현(斗峴), 들판에 수렁이 많다 하여 수랑들, 옛날에 절이 있어 중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중생골 무쇠가 많이 나오고 마을 부근에 냇물의 물줄기가 많아서 수원이 풍부한 지역으로 무쇠점 또는 수철리의 뜸이 있다.
복금리(福金里)
복금리는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지역으로 가림군의 은자(隱者)들의 낙향지로도 알려진 지역이다. 백제에 따른 임천문화권 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으로 지목을 받기도 한다. 특히 구곡천(九谷川), 어은골, 주막골에 전승적 구비문화의 유산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백제 때부터 임천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 임천군 가화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강릉유씨들이 정착하여 새롭게 지역을 개발한 곳으로 조선시대 말기에도 임천군에 속했었다.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팔가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금리, 하금리, 복심리(福深里)와 북박면의 소년동(少年洞) 일부를 병합하여 복심과 상금의 이름을 따서 복금리라 하여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3.53㎢이며 가구수는 91호, 인구는 246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대나무가 많이 우거진 마을이라 하여 대숲골, 죽림동이라 부르고, 마을 지형이 마치 거미가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주복(蛛伏)골, 주막이 이곳에 있다 하여 주막골로 부르며, 이 뜸을 합하여 금학(金鶴)이라고도 불린다. 마을에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자리가 있다 하여 매까실이라 부르고, 그후 매옥, 매곡이라 불린 곳이며 마을의 토지가 박해서 마을사람의 생활이 어려운 마을이라 밥전말, 박전(薄田)말이라 부르고, 마을이 매우 아늑하며 좋은 냇물이 흐르고 또한 숲이 잘 우거져서 신선객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하여 어은(魚隱)골, 어은동(魚隱洞)이라 하며, 이 뜸들을 병합하여 상금마을이라 부른다. 유만갑 효자비(劉萬甲孝子碑), 유병하 효자비(劉秉夏孝子碑), 나주정씨 열녀각(羅州鄭氏烈女閣)이 있어 청소년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만지리(晩智里)
만지리는 충화면의 동북단에 위치해서 동쪽으로는 수려한 금성산(錦城山)을 경계로 임천면 군사리와 접한 만지리는 서남쪽으로는 산과 복심 저수지(福深貯水池)와 면한 아늑한 지대이다. 백제 때부터 임천 고을의 영향아래 있었으며 행정구역이 뚜렷해지는 조선시대 초기에도 임천군에 속해서 박곡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의 말기에도 박곡면의 지역으로서 옛날부터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이 정착하는 곳이라 하여 만지울 또는 만지동(晩智洞)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북박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소년동 일부를 병합하여 만지리라 해서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6.07㎢에 농경지 1.35㎢ 중 65%가 경지정리가 되어 선진영농을 하고 있으며, 가구수는 118호, 인구는 329명이다.
자연마을은 신라 때에 향덕사(香德寺)가 이 뜸에 있어 향덕골, 향덕동(香德洞)이라 부르며 산수가 좋은 곳으로 산수동, 산수골이라 부르던 곳이며 마을이 벌판에 있어 법말이라 부르며 소년들이 많은 마을이라 하여 이 뜸을 소년동이라고도 불리는 지역이다.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이 정착하여 사는 마을이라 만지울이라 부르고, 오목한 내가 흐르는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오목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이 뜸을 병합하여 만지동으로 부르고 옛날에 아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마을에 강당을 지어 놓고 아들의 내일을 위해 정성껏 사랑했다 하여 사랑을 베푸는 고을로 사랑골 또는 애동(愛洞)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또한 소나무가 우거진 고개라 하여 솔티 고개가 있는 마을로 솔티라 불리던 마을이 있고, 백제가 한참 번창할 때 여러 개의 절이 있었으나 이곳에 신라시대에 처음에 새로 절이 생김에 따라 새절매, 신사동이라 부르는 마을이고, 이 뜸을 병합하여 하만지(下晩智)라 부른다.
조선시대 창건한 향림사지(香林寺址)가 있으며 1977년 향림사사적비(香林寺事蹟碑)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현미리(玄眉里)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문객들이 그 지조를 지키기 위해서 낙향지로는 임천땅 옥실을 그리고 풍류를 지키기 위해서는 현미를 지적했던 현미가 바로 충화면 현미리다. 고려말기 조선조의 등장과 함께 임천의 선비로서 개경의 왕조에 참여했던 선비들은 일찍이 짐을 싸들고 낙향하여 옥실과 현미에 자리를 정했다. 그 후손들이 지금도 자리를 정하고 있는데, 김해김씨, 나주정씨, 그리고 밀양박씨들이 그 후예들이다.
백제 때에는 가림군 즉 임천의 영향권이었다.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에도 그 영향권에 있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가화면의 지역으로서 마을앞에 아름다운 산이 있으므로 선미 또는 현미라 불렀다.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팔가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현미리라 해서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3.72㎢에 농경지는 0.8㎢ 중에 90%가 경지정리되어 농사짓기에 편리한 곳으로 가구수는 45호 인구수는 118명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도로변과 논둑에 11기의 지석표가 있어 이를 현미지석묘군(玄眉支石墓群)이라 부른다.
가화리(可化里)
가화리는 백제 때부터 임천군에 속했던 곳이며, 조선시대 초기 태종 13년(1413)에도 임천군 가화면에 속했었다. 가화리는 당시부터 면사무소의 소재지였으며 조선시대 말기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제 개정에 의한 행정구역 변경이 있을 때까지 가화면의 중심지였다. 1895년에 이웃인 팔충면과 병합하여 처음에는 팔가면이라 하여 그에 속했으나 1914년 당시 행정구역 개혁 때에 팔충과 가화의 이름을 따서 충화면이 될 때에 이웃인 용동리, 마차리(馬里), 금남리(金南里) 일부를 병합하여 가화면사무소가 있었던 곳으로 가화리라 하고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4.99㎢이고, 농경지 0.66㎢ 중 90%가 경지정리되어 농사짓기에 편리한 지역이며, 가구수는 51호에 인구수는 135명이다.
자연마을 뜸은 마을 지형이 용의 머리 부근에 마을이 위치했다 하여 용골, 용동이라 부른다. 마을이 옥비녀를 꽂은 머리와 같이 맑은 지대에 놓여있다 하여 마차실이라 부른다. 상제봉조형(上帝奉朝形)의 명당이 있다고 하며 마을 지형이 병목처럼 생겼다 하여 병목안, 금남리라 부르고, 금남에 금자와 마차에 마를 붙여 금마라고도 부른다. 백제의 토성으로 무제산(武帝山) 줄기인 누루개재 산정에 누루개재 산성이 있다.
청남리(靑南里)
청남리는 천등산 아래 남쪽에 위치하여 백제 때부터 백제 혼을 되살리는 신앙이 뿌리깊이 내려진 지역이다. 천등산에 있는 우물 즉, 계백장군이 자랄 때 식수로 사용하였다는 그 우물을 병에 담아서는 솔잎으로 막은 다음 마을로 가져와서는 마을 우물에 거꾸로 걸어놓고 1년간 풍작과 마을의 태평을 비는 축제를 거행하는 곳도 청남리이다. 이와 같은 풍습은 백제 멸망 후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습이라고 전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에 속했으며 역사적으로 임천권에 속하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가화면의 지역으로서 조선시대 인조 때에 평산신씨들이 정착하면서 더욱 번영을 이룬 지역으로 통한다. 지리적으로도 산세가 상제봉조(上帝奉朝), 즉 신하가 왕에게 아침 예를 올리는 형국이라 하는데 단결심이 강하며 국난 때에는 두드러지게 공을 세운 지역으로 소문이 나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도 임천군 가화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팔가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청등리와 시남리를 병합하여 청등과 시남의 이름을 따서 청남리라 하여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면적은 3.49㎢에 농경지는 0.69㎢ 중 85%의 경지정리를 하여 농사짓기에 편리한 지역이다. 가구수는 46호이고 인구수는 128명이다.
자연마을로 농사를 지어 불을 밝히는 마을이라 하여 청등, 청등리라 부르고, 순박하고 뛰어난 신하들이 상제를 모시고 영화를 누리는 마을이라 하여 제산골, 제신동이 있고, 마을이 두리봉 아래 있는데 신하가 상제를 우러러 보는 형국이라 하여 신앙리(信仰里), 시남, 시남리라 부른다. 천등산에 천등사지(天燈寺址)가 있고 김령제 효자비(金領濟孝子碑)가 있다.
오덕리(五德里)
오덕리는 구전에 따르면 한산(韓山)의 건지산성(乾至山城)에서 봉기한 백제 부흥군(百濟復興軍)이 자란(自亂)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패하였을 때 군사들이 석천산(石泉山)을 넘어 한 산골에서 분산하여 덕을 쌓는 농부 또는 초부로 일생을 마쳤다는 이야기가 있거니와 그 덕을 쌓는 곳에 오덕사(五德寺)라는 절이 생겼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다면 오덕리 지역은 확실히 백제인들이 개척한 지역임에 틀림없다. 백제 때는 가림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말기까지 임천고을에 속한 지역이다. 조선시대 임천군 가화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의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팔가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수리, 장자리, 갈태리(葛台里), 하수리 일부와 한산군 하북면 구시리 일부를 병합하여 이곳에 있는 오덕사의 이름을 따서 오덕리라 하여 부여군 충화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3.43㎢에 농경지는 0.85㎢ 중 경지정리는 85%를 실시하였으며, 가구수는 57호, 인구는 144명이다.
자연마을 뜸은 옛날에 숲이 많이 우거져 마치 갈대밭 같았다 하여 갈태라 부르고, 마을이 냇물 안쪽에 자리해 있으며 마을의 지형이 마치 물방망이처럼 생긴 마을이라 하여 물안골, 수침리(水砧里)라 불렀으며, 선조의 태를 묻었다는 태봉산아래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 장자(壯者)가 살았다하여 장재울, 장자리(壯者里)라 불렀다. 물길이 좋은 지형에 마을이 있으므로 수담골이라 부른다. 신라 경덕왕 때 원효선사(元曉禪師)가 창건하였다는 오덕사가 있고 조선 선조와 관련이 있는 어필각(御筆閣)도 있다.
11. 양화면 마을 유래
입포리(笠浦里)
입포리는 갓개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며 강경 아랫쪽으로는 유일한 금강의 포구였으며 강경, 장항을 제외하고는 강경 어업조합 갓개지소가 있을 정도로 큰 해상시장과 항구로서 1940년 전에는 수로를 통해서 드나드는 상인들로 인해서 선상시장(船上市)은 전국에서 널리 알려진 배 장터뿐만 아니라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나 갓개 시장은 육로가 발달되면서 점점 갓개 포구도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강경 어업조합 입포지소도 1966년에 폐쇄되어 장항 수협으로 흡수되면서 지금은 5일 시장(3, 8일)의 소규모로 형성되어 시장의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대동면 지역이었다. 입포는 처음 갓개나루인 작은 나루터로 전라북도 익산시 웅포면과 더불어 강경 등과 통하는 중요 나루터였고,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김해김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해 나갔고 시장이 들어서면서 빠른 속도로 큰 마을이 되어 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대동면의 지역으로서 금강가가 되므로 갓개 또는 관포(冠浦), 입포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에 대적면(大積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상입포리, 하입포리와 지서면(紙西面)의 초일리(樵逸里) 일부를 병합하여 입포리라 부르게 되었다.
입포리는 양화면의 소재지 마을로서 면사무소, 초등학교, 파출소, 우체국, 농협 등 공공기관이 있고 금강변도로(폭 4m)가 있으며, 백제 의자왕과 관련된 유왕산(留王山)이 있다. 또 99년 10월에 완공된 웅포대교는 익산시와 연결된다.
입포리의 인구는 1963년 271가구에 1,491명이였으나 현재는 176가구에 454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금강가에 있으며 지형이 삿갓과 같다 하여 입포, 관포 갯개라 부르고 위쪽을 위갓개, 상입포, 아래쪽 마을을 아래갓개, 하입포라고도 부른다. 동쪽 갯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동녘개, 마을과 떨어져 있는 지역에 자리한 마을이라 북간도, 서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섯녘재, 마을 안쪽에 있으므로 안동네라 부르는 마을들이 있다. 경주이씨열부비(慶州李氏烈婦碑)가 있고 백제 때의 절터로 알려진 용연사지(龍淵寺址)가 있다.
초왕리(草旺里)
초왕리는 서북쪽으로 무제산(武帝山)이 있다. 이 산에는 보광사란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서쪽에 시루산이 있는데 이 산모양이 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전체적으로 산이 맥이 흐르듯 깔려 있으며 냇물로는 초왕천에 들어서는 탁굴천과 손머리천, 왕동천 등이 흐르고 동남쪽으로 작은 들을 조성한 지역이다.
또한 왕골마을에 향토유적(제42호) 왕의영당(旺義影堂)이 있는데 이 영당은 조선시대 세조 2년(1456)에 박팽년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아들과 함께 처형된 백촌 김문기(白村金文起) 선생을 배향(配享)한 곳으로 숭고한 절의 정신을 받들기 위한 영당이다. 또한 일제시대 금계청년회를 조직하여 야학당을 개설하여 애국정신을 함양하였고, 1931년에는 애국단체 ‘조선인 친우회’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을 모금하다 1934년 검거되어 옥사한 허환 선생이 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백제 유민들이 나당군을 피해서 둔군(屯軍)이 되어 그후 정착했다는 구전과 고려 때에 무란을 피해서 선비들이 초막(산막)을 짓고 피난하다가 정착하였다는 설도 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었고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적량면(積良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동래정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이어 진주강씨, 김해김씨가 정착하였으며 다시 밀양박씨, 한산이씨, 금녕김씨, 전주최씨가 정착하였으며 많은 인물이 배출된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적량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1895)년에 대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초동리, 왕동리 일부와 지서면의 탑리 일부를 병합하여 초동과 왕동의 이름을 따서 초왕리라 하였다.
초왕리는 3.38㎢ 면적 중 2.24㎢가 임야이며 72가구에 180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옛날에 풀이 많았던 지역에 마을이 생겼으므로 새울, 초동, 초동리라 하고, 마을 뒤의 산세가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 큰 마을로 부를 누릴 것이라 해서 왕골, 변하여 왕굴, 왕동, 왕동리라 불린다. 김해김씨 효열문(金海金氏 孝烈門)과 금녕김씨 효열문(金寧金氏 孝烈門)이 있다.
오량리(五良里)
오량리는 양화면의 국도 29호선변 북쪽들에 둘러 쌓인 곳에 위치한 지역으로 경지정리 완료된 평야 농경지대이다.
이곳에는 오송대화 대수골로 불리우는 산 41-7번지에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이 향토유적 제3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주요 지형지물로는 수령이 500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으며 백제 때 죽리와 오송대 일원은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온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적량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원주이씨가 정착하여 초지를 개간하여 갔으며 이어 고령박씨와 해주오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형성하며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조정의 여러 차례의 사화로 수난도 겪었던 씨족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그만큼 두메였으나 선비가 많았으며 학문에 대한 열의가 많았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적량면의 지역으로서 적량면사무소가 이 지역에 있었다. 고종 32년(1895)에 대적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오송리, 적량리, 왕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오송과 적량의 이름을 따서 오량리라 부르게 되었다.
오량리는 1.94㎢의 면적에 오량 1,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95가구에 247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대나무 밭이 많은 지역이라 하여 대수골 죽리, 옛날에는 마을에 다섯 소나무 정자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쉬어갔던 마을이라 하여 오송대(五松臺), 오송리, 마을지형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용머리, 용두라는 마을이 있다.
족교리(足橋里)
원당천과 요산천이 흐르는 지역에 위치하며 옛날부터 부여 임천에서 서천 한산으로 통하는 길목에 널찍하게 들을 차지하고 있는 지역으로서 한때는 한산모시의 원료인 모시 밭이 즐비하던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적량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중기 전주최씨가 촌락을 형성하였고, 밀양박씨가 촌락을 이루어 집성촌을 이루었다 하며 옛날부터 족다리가 있었으므로 족다리 또는 족교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족교리라 부르게 되었다.
족교리는 1.88㎢의 면적에 74가구에 169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자연마을로는 밭이 많은 모롱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밭전모랭이, 글을 잘하는 선비가 대를 이으는 마을이며 선비들이 정착하여 소요할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요산, 인력보다 자연이 힘을 지배하는 것같은 지형에 마을이 있으므로 역구산이라고 불린다. 박씨들이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던 마을이라 박가말, 마박, 마발(馬發), 마을에 쪽다리가 있으므로 족다리, 족교라 불리는 마을 등이 있다.
송정리(松亭里)
서쪽으로는 석천산(石泉山)의 산줄기와 동쪽으로는 무제산의 산줄기가 두 맥을 잡고 남쪽으로 흐르는 그 북쪽에 충화면의 가화리 저수지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들이 조성되고 두 산줄기 아래 흐르는 원산천과 오발천 방죽골천 주변에 조성되는 들과 함께 농경지대를 이룩한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다. 백제 이전에 취락이 형성되었다는 송정리 북부지역은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때때로 발견되며, 백제 멸망 후에는 큰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통일신라시대와 고려 초기를 거치면서 분산되었다가 고려 중기이후 다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는 임천고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홍화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밀양박씨의 정착으로 집성촌이 형성되었으며, 이어 경주최씨의 정착으로 들이 개간되면서 큰 마을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조선시대 말기는 임천군 홍화면 지역으로서 소나무가 많은 지역에 정자가 많으므로 소정이 또는 송정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에는 홍화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오전리(五田里), 월은리(月隱里) 일부를 병합하여 송정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송정리는 2.25㎢의 면적이며 51가구에 134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산등성이 아래에 마을이 있다 하여 등사래, 네 갈래 길이 있는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사거리, 오산(五山)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오밭, 오전(五田)이라 불리는 마을 등이 있다.
벽룡리(碧龍里)
양화면의 서쪽에 위치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산의 능선아래 들이 깔리고 낮은 야산지대와 함께 서쪽의 광활한 들녘 농경지로 보유하고 국도 29호선이 북에서 남쪽으로 군도 3호선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통과하는 지역에 벽룡리는 위치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에 이미 군사가 주둔하였다는 사수막(沙水幕)이란 터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의 형성은 그 뒤가 아닌가 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었다. 서남쪽에 위치한 서천과 한산쪽에서 부여로 통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고려 때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이 있었다. 또한 들을 앞에 둔 야산 기슭에 초막 산막과 함께 집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고려 초기로 추산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홍화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풍양조씨들이 대거 정착하여 처음 집성촌이 등장하였으며 이어 단양우씨, 남양홍씨, 강릉함씨들이 마을을 형성해 나간 중요한 씨족들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홍화면의 지역이었으나 고종 32년(1895)에는 지방관제 개정 때에 홍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벽절과 덕룡골과 월은리, 윤동리(允洞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벽절과 덕룡의 이름을 따서 벽룡리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500년 된 느티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는 마을이다.
벽룡리는 3.36㎢의 면적에 117가구이며 338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에 흐르는 냇물에 돌이 많아서 내가 늘 말라있다 해서 건촌(乾村), 건드래, 마을에 둥근산이 있으므로 둥굿재, 벽절이란 절이 있었으므로 벽절, 벽사(碧寺), 모래가 많고 마을 뒤에 토성이 있어서 백제 때 성을 지키는 막이 있었다 해서 사수막(沙水幕), 설중반월형(雪中半月形)의 명당이 있다 해서 설중, 설젱이,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다 해서 맹골이라 부른다.
수원리(水原里)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가는 의자왕과 백성들을 보내면서 백제에 남은 백성들이 산에 올라가 통곡하였다는 망배산(望拜山)을 동쪽에 두고 마을 앞 서쪽은 넓은 들로 원산천을 경계로 한산면 나교리와 마주하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군도 3호선이 마을 앞을 통과하는 지역에 위치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백제 유민들이 많이 정착하여 때로는 백제 부흥군에 가담하여 피를 많이 흘린 유민들의 생생한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오기도 하는 지역이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하였으며 고려시대를 겪으면서 정착한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쇠퇴하는 지역같이 보였으나 고려 말기에 달성서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룩하고 새로운 활기를 찾았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홍북면의 지역이었다. 전주이씨, 풍양조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하였으며 농경지로서 입지적 조건이 좋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홍화면의 지역으로서 물이 풍부하게 좋은 마을이라 수원골 또는 수원곡(水原谷)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에 홍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윤동리(允洞里) 일부를 병합하여 수원리라 부르게 되었다.
수원리는 2.76㎢ 면적에 113가구이며 291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마을은 물이 풍부하게 수원이 좋은 마을이라 하여 수원골, 수원곡, 망배산 아래로 옛날에는 신선객이 많이 머물렀던 마을이라 하여 가자울, 가자곡이라 부른다. 산마루에 자리한 마을로 들과 마을이 평평하다 하여 마루골, 말골, 윤동이라고도 부르며, 말의 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말머리 등으로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상촌리(上村里)
북쪽에 우뚝 솟은 망배산 서남쪽으로 흐르는 낮은 산악지대가 금강에 접어들면서 넓은 들을 조성하고 서쪽으로는 내동천과 상천천이 흐르는 들녘도 지금으로부터 오십년 전만 하여도 금강물이 드나드는 강이었고 낮은 산악지대 끝머리에는 포구가 있어서 많은 배들이 기항했었다. 그래서 이름하여 상지포(上之浦)라고 부르며 소금배와 새우젓배가 무수히 드나들던 지역이 상촌리(上村里)의 포구였으며, 군도 3호선이 마을 앞을 지나고 들 건너 한산면 동지매, 토산리와 마주하며 경계를 이루고 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의 영역이었다. 고려 때는 임천 고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상지포면에 속했으며 백제 때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전해오나 확실치 않으며 처음 상지포가에 밀양박씨가 정착한 것은 고려 말기로 추정되며 이어 금녕김씨, 한산이씨, 진주유씨의 정착과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한다.
상지포가에 있으므로 상촌이라 하였는데, 고종32년(1895)의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홍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교항리(橋項里), 홍화면이 수원리의 각 일부와 한산군 동상면의 녹양리(綠楊里) 일부를 병합하여 상촌리라 불렀다 한다.
상촌리는 3.01㎢ 면적이며 77가구에 191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상지포라는 갯가 가에 있으므로 상온리, 상촌, 한겨울이면 기러기가 많이 날아오던 지역에 마을이 있다 하여 안곡, 안골이라 불리는 마을 등이 있다.
시음리(時音里)
시음리는 북쪽에서 흐르는 금강과 서쪽에서 흐르는 원산천(院山川)이 맞닿는 곳인 양화면 동남쪽 끝머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금강 제방공사로 들이 조성되고 음푹 들어간 갯가도 발견할 수 없으나 이 지역은 100년 전만해도 철석거리는 강변이었다. 금강의 풍부한 수량을 넓은 들에 농업용수의 안정적 공급으로 농업에 적합한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 이미 곱절 마을에 고을이 있었다는 구전에 따라 마을 형성이 있었을 것이며 백제 멸망 후에는 백제 유민들이 이 지역에 모여 살던 곳이라 한다.
고려 때에는 임천군에 속해서 금강 수로변에 자리한 한가한 농촌지대였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상지포면 지역이었고, 이때 금녕김씨가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이어 여산송씨들의 정착으로 해륙을 통한 산업지역으로 발전해 갔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상지포면의 지역으로서 뒷산이 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시루미라 하다가 음이 변하여 시음 또는 금강가가 되므로 시름개라 하였다. 고종 32년 (1895)에는 홍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에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읍리(古邑里), 포촌리(浦村里), 교항리(橋項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시음리라 하고 부여군 양화면에 편입되었다.
시음리는 5.73㎢ 면적에 148가구와 369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별로는 백제 때 고들이 있었던 마을이라 곱절, 또는 고읍(古邑)이라 부르고, 마을에 좋은 샘이 있으므로 샘골, 천동(泉洞), 곱절 북쪽으로 등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등너머, 드메기, 두목리(豆木里), 마을 뒷산이 꼭 시루처럼 생겼다고 시음, 시루미라는 자연마을이 있다. 또한 백제 때의 전설이 담겨있는 고읍(古邑) 마을의 군장산(軍場山)과 선돌이 이 마을을 지키는 듯하다.
내성리(內城里)
백제 마지막 의자왕이 백성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갈 때 그 아낙과 아들, 그리고 백성들이 산 위에 올라서 통곡하였다는 망배산은 그래서 천년이 흐른 뒤에도 사람의 발자국을 싫어한다고 전하며, 인간을 싫어하는 망배산은 그래서 아낙들이 일년에 한 번 만나는 놀이터로 승화된 것이라고 전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때는 임천고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는 임천군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인류의 정착이 시작되었다 하며, 고려 중기부터는 여산송씨가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이어 수원백씨의 정착으로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원주이씨의 정착으로 금강변과 그 주변에 마을을 형성해 나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대동면의 지역이었고, 고종 32년(1895)에는 대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내항리(內項里), 검성리(檢城里), 원당리(元堂里) 일부를 병합하여 내항과 검성의 이름을 따서 내성리라 하였다.
내성리는 2.69㎢ 면적에 52가구이며 203명이 거주한다. 마을 주민 대부분 논 농업과 느타리 및 양송이 버섯재배를 실시하고 있다. 내성리와 익산시 웅포면과 연결되는 길이 1,226m의 웅포 대교가 99년 완공되었고 이곳 금강에 모터보트 수상레저시설을 설치 운영중이다.
자연 마을로는 금강 연안에 산성처럼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라 하여 금성(錦城), 금성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내동, 마을 뒷산의 형국이 마치 황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라 해서 황골이라는 자연마을이 있다.
원당리(元堂里)
북쭉의 시루산에서 남쪽의 망배산과 그 아래 산악산(山岳山)으로 산의 줄기 동쪽에 위치해서 냇물로는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와서 금강에 유입하는 원당천이 흐르며 서쪽으로 펼쳐진 넓은 들에 원당리가 위치하고 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구수내골 주변에 인류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나 확실치 않으며 마을이 형성되기는 고려 초기로 지적을 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대동면의 지역이었고 조선시대에 밀양박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해 갔으며 이어 상주이씨와 김해김씨가 정착하여 집성마을을 형성하면서 조선시대 중기에는 농경지 개간이 실시되었고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대동면 지역으로서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 원당(願堂)이 있어서 원당(元堂)이라 불렀는데 고종 32년(1895)에 대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홍상면의 월은리 일부를 병합하여 원당리라 하였다. 원당리는 1.95㎢ 면적에 원당 1, 2, 3리로 나뉘어져 있으며 85가구에 인구는 211명이다.
자연마을은 옛날에 내가 마을로 흘렀고 우물이 아홉 개가 있다 하여 구수이골 또는 구수천(九水川), 마을이 밧가운데 있다 해서 밭가운데라고 부르다가 밧간디, 전중촌(田中村)이라 부르고, 마을이 새로 생겼다 해서 새터, 양지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양지편, 마을에 원당이 있었으므로 원당, 원댕이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암수리(岩樹里)
양화면 동쪽으로 낮은 야산지대와 금강가에 암수리는 자리한다. 농경지가 조성되기 전에는 들이 넓고 산이 가파르지 않아서 백제 때는 말탄 군사들의 수련장이었고 기마를 사육하던 지역이라고 전한다. 부여의 군수리와 함께 많은 군사가 촌막을 짓고 주둔하였다고 전한다. 또 왕과 관련되었다는 유왕산(留王山)이 있어 지금도 매년 음력 8월 17일 추모제(追慕祭)가 실시되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부여에 백제가 천도하기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는 지역이다. 그러나 백제 멸망 후 마을은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시대 초기까지 벌판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대동면의 지역으로서 연안이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하였고 이어 밀양박씨, 경주이씨의 정착으로 여러 곳에 다시 마을이 형성되고 그들의 씨족이 뿌리를 내리는 집성촌이 형성되어 갔다. 고종 32년(1895)에 대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원산리, 견암리(犬岩里), 목수리(木樹里)를 병합하여 견암과 목수의 이름을 따서 암수리라 부르게 되었다.
암수리는 2.71㎢ 면적에 77가구이며 189명이 거주하고 있다.
자연마을은 마을에 개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며 마을 지형이 개의 아구처럼 생겼다 해서 가야구, 견암(犬岩), 가이아구라 부르고, 동쪽에 검은 바위가 있어 검배, 목수가 살던 마을이라 목수곡, 목수굴, 비단같은 금강의 맑은 물이 유난히 빛나는 마을이라 빗날, 인호(鱗湖)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12. 임천면 마을 유래
군사리(郡司里)
서쪽으로는 금성산(錦城山)을 동쪽으로는 성흥산(聖興山)을 조성하고 그 중앙에 흐르는 임천천과 서쪽에서 유입하는 서주골천과 논실천가에 조성되는 들녘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넓은 들을 조성하는 중앙 위쪽으로 군사리가 자리한다.
백제 때의 아성인 성흥산성이 있으며 백제 이전부터 이 고을을 다스리는 관아가 있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웅진에 천도할 때는 이미 토호(土豪)가 백성을 다스리는 고을이었는데 그 기점이 성흥산성이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는 임천군 읍내면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나주임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조성한 지역이 읍내리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청이 있었으므로 임천읍내, 이어읍내 또는 군사(郡司)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임천시장이 매우 번창하였다. 시장터에는 건어물, 의류점 등이 즐비하게 있었고 내 건너에는 가축시장(특히 우시장)이 아주 번창하였으며, 도축장도 있어 임천, 양화, 세도 상인들이 도축해 갔다. 그러나 지금은 교통의 발달로 인하여 시골시장이 쇠퇴되어 장터의 흔적이 사라져 가는 실정이다.
리의 면적은 3.70㎢에 가구수는 320호이고 인구는 898명이며, 누룩구석, 내건너, 돌팍모랭이, 밤동산, 시죽골, 염통고개, 장인말, 절골, 호리동, 읍내, 좌동 등의 마을이 있다. 또한 임천향교(林川鄕校)가 있고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사당(庾黔弼祠堂), 부소산의 송월대지에 이전하여 사비루라 헌액한 강산루지(江山樓址)가 있다. 그리고 임천객사터[林川客舍址], 동헌터[東軒址] 자리가 있으며 그 앞에 묵묵히 서있는 노송(老松)은 400년동안 임천의 풍상을 지켜보고 서 있다.
구교리(舊校里)
북쪽에 위치한 성흥산 주변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산의 줄기가 동쪽에 대흥산 같은 명산을 남기고 남쪽에 다시 산악지대를 조성하는 그 서쪽으로 들을 조성한 지역에 구교리는 자리한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문화유씨, 평산신씨 등이 정착하여 오늘의 뿌리를 내리는 집성촌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이어 금녕김씨, 경주최씨, 단양우씨가 정착하여 임천 고을의 외곽지대에 큰 마을을 조성하였다.
구교리의 마을형성은 고을보다 한가한 지역을 찾아서 은둔하는 선비들의 낙향지로 선택한 데에도 큰 원인이 있다. 임천 향교가 있었으며, 오류정이란 정자로, 성리학의 고장으로 그리고 선비들의 풍류로 알려진 지역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읍내면의 지역으로서 향교골 또는 구교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가림리(嘉林里), 세동리(細洞里), 학봉리(鶴洞里)를 병합하여 구교리라 해서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향교골에는 임천향교가 옛날에 있었으며 성흥산 남쪽자락에 유서 깊은 대조사가 자리 잡고 있고, 그 아래로는 가뭄을 대비해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조그만 소류지가 있다. 삼가레 마을에는 임천중학교와 임천장로교회가 있으며, 지금은 폐교되었지만 임주초등학교가 있었다. 황새울[관동]에는 조은 영농 조합법인이 있는데, 주로 팽이버섯을 생산하고 있다.
리의 면적은 3.85㎢이고 가구수는 215호이고 인구는 529명이며 가는골, 가사리, 향교골, 삼가레, 오류정, 황새울 등의 마을이 있다.
두곡리(豆谷里)
두곡리는 금강을 사이에 두고 전라북도와 경계를 이루며 사동권을 사이에 두고 세도면과 경계를 나누고 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하나 부여 환도 후부터는 가림성(加林城) 남쪽 전초기지로서 많은 군사가 주둔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백제 멸망 후에는 유민들이 정착한 곳이며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토속신앙의 증거로 선돌을 지적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두모곡면(豆毛谷面)의 지역이었고 고려 말기부터 풍양조씨가 정착하였으며 이어 안동권씨의 정착과 함께 새로운 인맥이 조성되어 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두모곡면의 지역으로 두 냇물이 합친다 하여 두모곡 또는 두모골, 두므곡, 두곡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에 읍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나산리(羅山里), 사동리(寺洞里), 북동리, 남성리(南星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두곡리라 하여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두곡리의 면적은 4.53㎢이고 가구수는 125이며 인구는 331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두 냇물이 합치는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두곡, 두모곡, 두모골, 전에 못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못재 또는 지산(池山), 옛날 효자가 사는 마을이라 하여 시모골, 변하여 시엉골, 옛날에 절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절골, 사동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칠산리(七山里)
칠산리는 금강의 남단에 자리해서 칠산제방이 쌓아지기 전까지는 들이 모두 금강 물이 들어오고 침수해버리는 펄땅이었다. 그래서 심한 비바람이 몰아칠 때는 침수되는 것이 보통이었고 농경지로서 피해가 많이 있었던 지역이다. 그 지역에 길이 1,300m의 칠산제방이 놓여지면서부터 곡창지대로 변한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초기는 임천군 동변면(東邊面)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처음 제주고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인동장씨, 풍양조씨가 북쪽에 자리잡기 시작하여 집성마을을 조성하였으며, 그 후에 금강변에 작은 둔적을 이루는 지역에 풍양조씨가 개간하여 정착함으로써 칠산리 일원은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들 가운데 낮은 일곱 봉우리의 산이 있으므로 칠산이라 하였으며, 고종 32년(1895)에는 읍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입석리, 와종리(瓦宗里), 남성리 일부를 병합하여 칠산리라 해서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5.80㎢이고 가구수는 246호이며 인구는 678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별로는 선돌, 입석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선돌마을, 남쪽을 향하고 복을 누리는 마을이라 하여 남성굴, 남성리, 마을이 평평한 땅위에 편안하게 놓여있다 해서 민머루, 옛날에 기와를 구웠던 마을이라 하여 왜마루, 와종, 와종리, 들 가운데 낮은 일곱 봉우리의 산이 있다 하여 칠산이라는 자연마을이 있으며 조선 숙종(1687)때 창건하여 사액이 내려진 칠산서원(七山書院)이 있으며 병자호란 때의 척화신 시남(市南) 유계(兪棨)를 모시고 춘추제향을 드리고 있다.
비정리(飛亭里)
남쪽에 흐르는 금강변에 위치해서 임천면 남쪽에 자리한 비정리는 서북쪽의 일부지역을 제하고는 모두가 들에 둘러싸인 들녘이다. 옛날에는 임천천과 금강이 범람해서 때때로 수해도 많이 겪었으나 근대에 이르러 수리시설 및 제방시설로 완충지대를 이루어 놓았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고, 백제 멸망 후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나 확실치 않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조선시대 초기는 임천군 지곡면 지역으로 현재 거주하는 성씨들의 정착 과정으로 보아 조선시대 중기에 온양방씨와 밀양손씨, 그리고 한산이씨의 정착으로 집성촌이 조성되어 나갔으며 이어 전주이씨의 정착으로 들이 개간되고 마을이 융성해 갔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지곡면의 지역인데, 고종 32년(1895)에는 지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비동리, 초동리, 내동리, 송정리를 병합하여 비동과 송정의 이름을 따서 비정리라 하고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강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개뜸, 마을에 부엉이가 살았다 하여 부웡매, 봉황, 샛골, 초동이라 부르고, 마을의 큰들에 물이 귀해서 곡식이 잘 안된다고 하여 비랭이들이라 하고, 들새가 많이 날아드는 마을이라 하여 비동, 비랭이, 옛날부터 마을에 소나무 정자가 있으므로 송정(松亭), 품질 좋은 삼[麻]밭이 많은 지역이라 옥삼밭골, 팔방에서 바람이 들어오는 풍류의 마을이라 팔풍쟁이, 팔풍리(八豊里)라는 자연마을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2.66㎢이고 가구수는 154이고 인구는 426명이다.
탑산리(塔山里)
입포천과 남당천, 달산천과 새태천으로 조성된 넓은 들에 탑산리는 위치한다. 그러나 암쪽 금강변은 북쪽의 냇물과 교차하여 홍수 때마다 침수되었으나 하천개수 및 제방축조 공사를 하여 비옥한 옥토로 만들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해서 서천과 한산으로 통하는 큰길이 있었다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지곡면 지역으로 전주이씨와 장수황씨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그들의 집성촌을 조성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 임천군 지곡면 지역으로 고종 때에는 지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남당리, 달산리(達山里), 초일리(樵日里), 탑리와 대적면의 왕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탑리와 달산의 이름을 따서 탑산리라 하여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용인산에 임천 기우단(林川祈雨壇)이 있고,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된 임천상무사(林川商務社)가 있다. 옛날에 큰 연못이 있고 남쪽에 마을이 있다 하여 남당, 마을이 벼랑에 있다고 하여 독벼루, 매사냥을 할 때 이곳에서 매를 놓아 꿩을 잡았다고 하여 매봉재라 하고, 그 아래 마을이라 하여 매산골이라 부르고, 탑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탑리, 초막이 많았던 마을이라 하여 초일이라 불리는 자연마을이 있으며, 면적은3.64㎢이고 140가구에 인구는 381명이다.
가신리(加神里)
가신리는 고려 원종 때 원명국사(圓明國師)가 보광사(普光寺)를 중수(重修)하고 머물렀다는 보광사지(普光寺址)와 사적을 기록한 보광사 중창비, 부도(浮圖)가 확인된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는 임천군 서변면 지역이었다. 오늘의 뿌리를 내리는 씨족의 정착은 고려 말기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던 담양전씨와 동래정씨로 추측되며, 뒤 이어 전주최씨도 뿌리를 내려 집성촌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서변면 지역으로, 1914년에는 행정구역 개혁 때 가라리, 검신리(檢神里), 가장리를 병합하여 가라와 검신의 이름을 따서 가신리라 하여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옛날에 가라라고 불리우는 사람이 이 마을에 살 때부터 그의 이름을 따라 가라라고 불리운 마을과 들가에 마을이 생겼으므로 가장골, 가장, 가장동, 검신, 보광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백제 때의 고분으로 석실고분 10여기가 있다.
리의 면적은 4.46㎢이며 가구수는 109에 인구는 263명이 거주하고 있다.
옥곡리(玉谷里)
옥곡천을 중심으로 넓은 들이 조성되고 옥이 나왔으므로 옥실, 옥곡이라 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는 임천군 지곡면의 지역이었다. 백제 때부터 설촌이 되었다고 하나 확실치 않고 충화면 천당리로 드나드는 길목이어서 많은 사람이 지나다닌 길이 백제 때부터 있었다 한다. 조선중기 경주최씨, 금녕김씨, 양천허씨가 정착하면서 집성마을을 이룩하였으며, 조선 숙종때 이이명이 사화에 화를 입게 되자 그의 친족들이 낙향하여 거주하면서 전주이씨 집성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말기 임천군 지곡면 옥실 또는 옥곡이라 하였는데 고종 때 지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옥곡리라 하고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부근에서 옥이 나왔다 하여 옥실, 옥곡, 시장이 섰었던 마을이라 하여 장뜸, 고개 아래 마을이라 하여 재뜸이라 불리는 자연마을이 있다.
리의 면적은 1.43㎢, 가구수는 53가구에 인구는 141명이 거주하고 있다.
발산리(鉢山里)
복금리 저수지에서 발원하여 임천천으로 들어가는 발산천(鉢山川)과 만우천 등 여러 천이 발산들을 기름지고 수원을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때는 임천군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서변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창녕성씨와 영월신씨의 정착으로 마을이 형성되었고 집성촌이 되어 두 가문이 미친 영향이 컸던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는 임천군 서변면 지역으로, 지형이 중의 바라와 같다 하여 발전(鉢田), 발산이라 하였는데 고종 때에 지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발산리라 하고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마을별로는 중의 바라처럼 생겼다 해서 발산, 발전, 바랏이라 부르는 마을과 옛날부터 괴티 정자가 있어서 괴티, 괴정, 발산 남쪽에서 가신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영고개라 하고 그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을 영고개라고 부르는 자연마을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2.18㎢이고 59가구에 인구는 155 명이다.
만사리(萬社里)
토지[社] 신과 곡식[稷]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임천 사직단(林川社稷壇)이 있고 조선 인조 때의 예빈시정·풍기군수를 지낸 조박(趙璞), 경종 때의 집의(執義)였던 조성복(趙聖復), 현종 때의 금구현령 조현소(趙見素)를 모신 퇴수서원(退修書院)이 만사리에 위치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때는 임천군(林川郡)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서변면 지역이었다. 백제시대 것으로 보는 한다리, 큰 다리가 마을 입구에 근래까지 있었다고 전한다. 고려 때부터 임천조씨가 정착하였고 조선초기에는 전주이씨에 이어 강릉유씨, 성주현씨가 정착하여 마을단위로 집성촌을 이루었다.
조선말기 임천군 서변면 지역으로 고종 때 지서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원우리, 만우리, 사산리를 병합하여 만우와 사산의 이름을 따서 만사리라 하여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금강물이 들어와 갯가였던 마을이라 하여 개묵실, 마을 지형이 말머리처럼 생겼다 해서 말머루, 만우, 만우리, 많은 새가 모여 들었다고 하여 비야쟁이, 사산이란 산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사산,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텃말, 원머루 등으로 불리우는 자연마을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4.59㎢이고 가구수는 163에 인구수는 449명이다.
점리(店里)
점리는 백제시대 축조된 성터나 군량미를 감추어 두었다는 둔적골의 명칭으로 보아 이때에 설촌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고려 때는 임천군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박곡면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덕수장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하였으며, 이어 수원백씨, 풍양조씨가 정착하면서 점차로 발전하여 간 곳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박곡면 지역으로서 옹기점이 있었으므로 점골 또는 점촌(店村)이라 하였는데, 고종 때 성백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점리라 해서 부여군 임천면에 편입되었다.
검지 냇가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검지내, 현계(玄溪), 산아래 가파른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되니, 고개지형이 말안장처럼 생겼다 해서 안장고개, 그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명을 따라 안장고개, 옹기점이 있었다 해서 점골, 점굴, 점동, 옛날에 군사가 주둔하였던 마을이라 하여 둔적골, 든적골이라 불리우는 마을들이 있으며, 면적은 6.31㎢이고 가구수는 148에 인구수는 431 명이다.
13. 장암면 마을 유래
석동리(石東里)
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서남쪽에서 흘러오는 금천이 금강에 유입하는 그 남쪽에 위치한 낮은 야산지대와 들에 석동리는 자리한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임천면과 경계를 나누는 추성산을 중심으로 테뫼식으로 쌓은 이목티산성(梨木峙山城)이 있어 백제 때는 사비성을 지키는 중요한 지역이였음이 입증되는 지역이기도하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하는 북단이었다. 백제 이전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백제 멸망후 마을은 쇠퇴하여 갔으며 작은 한촌으로 남았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북박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경주손씨가 정착하였으나 집성촌은 이루지 못하였으며 그후 한산이씨, 경주이씨, 온양방씨 등이 정착하였고, 이어 전주이씨, 문화유씨, 풍천임씨 등이 정착하였다. 현재에 이르는 집성촌은 한산이씨, 풍천임씨, 문화유씨 등이고 그리고 희성으로서 청주근씨도 자리해 있는 지역이다. 고종 32년(1895)에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하여 북박면에 편입되었다가1914년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석우리, 산동리의 각 일부와 남내면의 장암리 일부와 부여군 천을면 내리의 일세촌을 병합하여 석우와 산동의 이름을 따서 석동리라하여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장암면의 행정적 중심지가 되는 리며, 리의 면적은 3.86㎢이며 가구수는 302호에 인구는 884명이다.
자연마을로는 햇빛의 밝은 곳에 있으므로 양촌, 양지말, 골짜기에 마을이 있어 골말, 마을에 돌모랭이가 있으므로 돌머리, 석우라 부르고, 강막을산 앞에 있는 마을인 산동리 등의 자연마을이있고, 백제 때의 토성인 이목티산성(梨木峙山城)이 있고 한재가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던 강막을산 산제당이있다.
원문리(元門里)
북쪽으로는 넓은 들을 바라보게 되고 그 들 아래 동북쪽으로 흘러가는 금천, 냇물 남쪽으로 마치 조용한 바다의 파도를 연상하는 야산지대의 들에 원문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한때 백제인들의 큰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끊임없이 사비성에 주둔한 나당군의 핍박에 그래도 이곳을 지키며 다시 내일의 백제를 세우자고 때로는 군사를 모으기도 하였다는 순박한 백제 백성들의 큰 마을이 있었다고 구전에 전해온다. 지금은 이 지역에서 그 뿌리를 찾기 힘든 지역이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북변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새로운 개간을 위해서 여러 씨족이 정착하였으나 현재까지 뿌리를 내린 씨족은 극히 드물며 수원백씨만이 집성촌을 이루며 원문리의 뿌리로 승화되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북변면의 지역으로서 원문이라고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에 북박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산동리, 석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원문리라 해서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3.90㎢이며가구수는 134호에 인구는 375명이다.
자연마을로는 옛날 마을을 들어서는 산양쪽을 깎아서 사람을 드나들게 하는 문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원문이, 소나무가 많았던 마을이라 하여 솔모루, 산새들이 많았으며 부엉이가 사는 집도 있는 마을이라 하여 말이라불리는 수원백씨의 집성마을을이루는 마을이다.
합곡리(閤谷里)
남쪽으로 낮은 산악지대가 줄을 긋고 서쪽으로 튀어나온 산줄기를 바탕으로 움푹 들어간 바다로 치면 선착장을 양쪽에 두고 바닷물이 들어선 것 같은 형국에 들이 깔리고 앞으로는 넓은 바다같은 들이 깔린 지역에 합곡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부터 인류는 정착해 있었으며 백제가 공주에 왕도를 정하였을 때 이미 우두성(牛頭城)이란 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마을의 형성도 그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당시 가림성(加林城)에서 백가의 반란이 있을 때 무령왕이 토벌에 나서 이곳에 진을 쳤으며 백가를 무찌른 유서 깊은 곳이 합곡리의 우두성이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엔 임천군 북변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풍양조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안동권씨, 남양홍씨, 나주정씨등이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삼대정승으로 추앙받은 상진(尙震) 영의정의 출생지도이곳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북변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에 북박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합하리(閤下里) 상곡리, 역리 일부와 홍산군 남면 마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합하와 상곡의 이름을 따서 합곡리라 하여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1997년 장암 농공단지가 조성되었으며, 리의 면적은 4.79㎢이며 가구수는 239호에 인구는 667명이다.
뜸별로는 개구리 소리를 오붓하게 들을 수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내합(內閤)이라고 하나, 상진 정승이 태어난 곳이라 합자가 쓰인 듯하다. 골짜기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상곡, 조선시대 이인도찰방에(利仁道察訪) 딸린 영유역(靈楡驛)이 있었으므로 역말, 역리, 유촌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고, 백제 때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증명하는 합곡리 고분군(閤谷里 古墳群)도 있다.
■역마 [驛馬] 와 역티(驛峙)
●역마 [驛馬]
역말 이말은 역이 있는마을 이라는 뜻의
지명[마을이름]으로 예전에 역이 설치되어 있는 역을
의미한 말로 역과 마을의 준말인 말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합성어다.
역말 또는 포마(鋪馬)라고도 한다.
중요한 교통통신수단으로 문서와 군사정보의 전달,
물자 수송, 관리들의 여행 편의, 사신의 영송(迎送) 등에
쓰였다. 쓰임새에 따라 사람이 타는 기마(騎馬)와
짐을 운반하는 태마(또는 卜馬)로 나뉘고
크기에 따라 대마, 중마,소마나 상등마(上等馬), 중등마,
하등마로 구분되었다.
국내의 역마제도는 고려 원종 때 제정된 포마법과
1276년(충렬왕 2)에 설치된 포마차자색(鋪馬箚子色)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야 기틀이 잡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1410년(태종 10) 포마기발법(鋪馬起發法)을
제정하여, 왕명으로 역마를 이용하는 자에게는 관등 품위에
따라 마패를 발급하였다.
마패는 품위에 따라 말을 그려넣었고 다른 면에는
자호(字號), 월일 등이 적혀 있었다.
또한 역마로 충당할 말을 확보하기 위하여 마호(馬戶)와
역리(驛吏)에게 마전(馬田)을 지급하는 마호입역제
(馬戶立役制)를 실시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역마의 수요가 급증하자 일반인에게
말을 사서 사용하는 쇄마고립제(刷馬雇立制)를 병행하여
부족분을 채우기도 하였다. 역마의 관리는 찰방의 책임 아래
병방역리(兵房驛吏)가 맡아하였는데, 마적(馬籍)을 작성하여
보관하였으며 역마 이용자의 관직명과 날짜를 적어
계절마다 말경에 병조에 제출하였다.
●역티(驛峙)
합곡 삼거리(三巨里)에서 임천면 점리 안현동네와
경계를 이루는 곳 까지의 고개를 역티(驛峙)고개라 한다.
조선(朝鮮)때에 관원(官員)들이 말을 타고 넘어다닌
고개라하여 역티(驛峙)라고 부른다.
지금은 아스팔트 길이라 고개라고 하기가 무색 할
정도이지만 옛날엔 가게방에 물건을 실어 나르는
짐 자전거가 있었다.이 짐 자전거를 역티고개까지
밀어주면 10원의 수고비를 받았다.
일종의 아르바이트다.
그런데 올 때 준다고 하고는 점리에서 원문리로 가는
산길 도로로 가는 악덕 상인이 있었으니...
삼거리에서 짐 자전거 오기만을 고대하던
어린 맘을 그들은 알았을까나...
驛峙(역티←驛峙역치)
鉢峙(발티←鉢峙발치)
驛(역 역)峙(언덕 치)峠(고개 상)
鉢(바리때 발)
✪1950~1960년대에 서당(書堂)선생님이
계셨습니다.
①'역티'마을(임천면 점리)의 조×연님의 조부님.
(이 글을 쓴 사람도 초등학교 입학전 이 글방에
가본적이 있었습니다.)
②'안장고개'마을(임천면 점리)의 노×두님의 조부님.
③'(윗)발티'마을(장암면 점상1리)의 최×진님의 조부님.
점상리(店上里)
장암면의 서쪽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산악지대를 이루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냇물 따라 펼쳐진 들에 점상리는 자리한다. 옛날에는 지금의 남면 및 구룡평야를 바라보는 산마루여서 선비 및 시인 묵객이 한번쯤 찾아서 인생을 회고하는 자리로 소문났으며, 장안에서 대감들이 말하기를 구룡의 탁류와 청류를 보았는가 하는 그 지점이 바로 지금의 점상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북쪽을 가리킬 만큼 소문난 명소였었다고 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백제 유민들이 일시 정착하였으나 후대에 이을 집성촌은 형성하지 않았으며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박곡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말기부터 처음 명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지역으로 풍양조씨에 이어 경주이씨, 청송심씨, 밀양박씨의 정착이 조선시대 중기까지 이루어지면서 들이 개간되고 산간벽지에 마을이 형성되면서 그 씨족의 집성촌 형성으로 지역이 발전해 나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박곡면 지역으로서 점말 위쪽이 되므로 윗점말 또는 상점리라 하였는데, 고종 32년에 북박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지경리, 구리곡리의 각 일부와 홍산군 남면의 마서리 일부를 병합하여 점상리라 해서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7.17㎢이고 가구수는 133호이며 인구는 400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덕림(德林) 마을[점상3리]에는 고려말 이방원(李芳遠, 조선 태종)의 스승이었던 풍양조씨 회양도호부사(淮陽都護府使) 조신(趙愼)의 묘(墓)와 신도비(神道碑)가 있으며 마을별로는 지형이 마치 고양이가 웅크리고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형국이라 하여 묘티(描峙), 고이티라 부르고 박씨들이 처음 정착한 마을이라 하여 박골, 고개의 지형이 중의 바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발티(鉢峙,위발티), 그 아래 마을도 발티(아래발티)[점상1리], 옛날에 왜가리가 많이 날아왔던 마을이라 하여 왁새말 또는 학촌[점상 2리]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지토리(紙土里)
장암면의 남쪽에 위치해서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사동천과 상하천 및 지토천 유역에 넓은 들이 조성되고 서남쪽으로는 성흥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산악지대가 남쪽을 싸고 있는 지역에 지토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에 마을의 형성이 따랐던 지역으로 부여와 임천을 잇는 길이 있어서 많은 사람이 오갔던 길목 주변이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신리면의 지역이었다. 옛 마을이 산재되어 있었으나 작은 마을이었던 이 지역에 조선시대 초기에 경주최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차츰 개간해 나갔다. 이어 풍양조씨가 새로운 땅을 찾아 정착하기 시작하여 정착촌을 이루어 나갔고, 함열남궁씨가 성흥산 북쪽에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넓은 들을 개간하는 등 부유한 지역으로 조성해 나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신리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에 성북면에 편입되어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지장리와 토산리를 병합하여 지토리라하고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8.39㎢에 가구수는 219호이고 인구수는 547명이다. 지토리 산 80번지에 위치한 천광산은 금광으로 1930~1950년대까지 월 10~20㎏의 금을 채굴하여 호황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폐광된 상태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이 마치 등성이에 불을 켠 것처럼 자리해 있다 해서 등애(燈涯), 조선시대 양곡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해서 사창, 용들이 꼭 이마을 부근을 빙빙 돌고 승천하였다 하여 용왕골, 용왕곡, 산 모양이 삼태성처럼 생긴 삼태산 아래 마을이 있으므로 태동, 옛날에 종이를 만드는 공장이 있었다 해서 지장골, 지장, 지장리라고부르고, 학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서 잣나무가 많으며 재에 마을이 있다 해서 잣티, 백티(栢峙)라 불리는 자연 마을들이 있다.
하황리(下黃里)
장암면의 동남쪽에 위치해서 마치 서쪽에서 동쪽으로 밀어 붙이는 산에서 떨어진 흙더미가 금강변의 모래와 함께 돌을 조성하듯 산과 들이 조화를 이루는 지역에 하황천가에 펼쳐진 들까지 겹쳐서 누런 들을 이루는 지역에 하황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금강과 함께 살아온 백제 유민들이 고려 때에 이르러서는 산악지대 들로 이동하여 고려 초기부터는 넓은 모래 사장과 들만 남아 있었다 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남산면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부터는 다시 마을이 형성하기 시작한 이 지역에 1450년경 풍양조씨 회양부사 조신의 3대손 익상(益祥)이 덕림에서 이주하여 정착하고 집성촌을 이룩하기 시작하여 새로운 면모로 변해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남산면의 지역으로서 누른다리 아래쪽이 되므로 아래 황다리 또는 하황교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에 남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하황리와 하곡리(蝦谷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하황리라 해서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뜸별로는 마을 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바위가 있다 해서 금배, 산과 들의 흙빛이 모두 누루다 하여 누른드리, 누른다리, 황교, 황교리라부르고 부근에서 가장 빛을 발휘하는 마을이 될 것이라 해서 도창리라 부르다 변하여 대챙이, 도창(道窓)이라부르는 마을, 동쪽 강가에 있으므로 동내기, 마을 지형이 삼태미 형국이라 하여 홀탱이, 홀신(忽新)이라 부르는 마을들이 있다. 현재 비닐하우스 시설 재배를 하여 고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리의 면적은 3.67㎢이고 가구수는 81호에 인구는 250명이다.
상황리(上黃里)
장암면의 남쪽에 위치해서 서쪽으로는 낮은 산악지대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산악지대에서 동쪽으로 흘러가서는 금강에 유입하는 하황천가에 펼쳐진 들과 남산골천, 법주천, 사왕천, 애개울천 등 작은 냇물의 유역에 펼쳐진 들에 자리한 지역이 상황리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 인류는 이미 정착해 있었으며 마을의 형성도 따랐던 지역으로서 낮은 야산지대와 강변이 당시 사람들이 생활을 누리는데 좋은 입지적 조건이었다. 또한 그래서 이곳에 백제 왕릉이 있다는 설도 부인 못할 사실로 남아있기도 하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남산면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 말기에 풍양조씨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집성촌을 이룩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시대 중기부터는 넓은 하천을 긴 들이 대규모로 개간되어 조씨들의 집성촌을 곳곳에 조성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남산면의 지역으로서 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 자리가 많은 곳으로 소문나 있으며 임천조씨의 시조묘가 이곳에 있으며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의 명당자리가 있다는 설도 흥미 있는 일로 남아있는 지역이다. 본래 임천군 남산면의 지역으로서 누른다리 또는 상황교, 상황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남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하황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황리라 하고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남산골 서쪽 오암산 아래 백제 왕릉(百濟王陵)으로 전해지는 묘 3기가 있으며, 옛날부터 왕릉이 있다는 마을로 왕림(王林)이라 불려지고 있다. 또한 위누른다리, 남산의 마을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3.68㎢이고 가구수는 63호에 인구는 202명이다.
장하리(長蝦里)
북동쪽으로 금강이 흐르고 서남쪽에서 밀어 올리는 것 같은 산세가 금강변까지 잇닿은 야산지대 동남쪽으로 금강과 골암천을 비롯한 여러 작은 냇물을 끼고 조성된 들을 낀 지역에 장하리는 자리한다.
인류의 정착은 상당히 빨라서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에 이미 인류의 정착과 함께 마을의 형성도 따랐던 지역으로 이 곳에 자리한 사랑산성(沙浪山城)도 백제가 공주에 왕도를 정하였을 때 쌓은 산성이라고 구전에 전해오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멸망 후 금강 건너에 있는 석성 파진산에서 나당군과 싸운 백제군의 부상병들이 금강을 건너 사랑산성에 은거하였다가 둔병이 되어 백제 부흥을 외치며 살던 지역으로, 장정(長亭)지역이란 구전의 말을 인용하더라도 백제의 부흥 운동과 연관이 되는 지역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지역이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남산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 진주강씨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 초기에 이미 집성촌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풍양조씨의 정착으로넓은 들의 개간과 함께 풍요로운 고장이 형성된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남내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에 장정리, 후포리, 탑리, 하곡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장정과 하곡의 이름을 따서 장하리라하고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백제 때 금강 내안에 있으면서 외성 역할을 한 사랑산성이 있고, 조선 영조 때 창건된 남산서원(南山書院)에는 조태징(趙泰徵), 조명규(趙明圭), 조주진(趙疇鎭) 3인이 배향되어 있고, 조선 선조 때 세워 많은 인재를 길러 낸 흥학당(興學堂)이 있으며 보물 제184호로 지정된 장하리 3층석탑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나무가 길게 장사진을 이루어 운치좋은 마을이라 하는 장정마을, 한산사지가 있으며 3층석탑이 있다고 하여 탑리, 옛날에 화약창고가 있으므로 화약골이라 불리우는 마을들이 있다.
리의 면적은 3.31㎢에 가구수는 117호이고 인구는 361명이다.
북고리(北皐里)
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남쪽에는 우뚝 솟은 학산에서 차츰 야산지대로 북쪽에 흐르는 산과 금강으로 유입하는 북구천 유역과 금강변에 펼쳐진 들에 북고리는 자리하고 있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북고리 강가는 일명 뒷구래라고 불린다. 즉 지금의 강령(江嶺), 도강(道江), 월촌(越村)을 뒷구래라고 부르는데 그 지역은 백제 때 구드래 나루에 드나들던 외국상선 및 선박이 드나들 때 입항했던 포구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내동면의 지역이었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시대로 추정을 하나 구전에 따르면 신라 말기 최씨가 처음 마을을 형성해 나간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오늘의 이 고장 정착민의 뿌리를 내리는 씨족의 정착은 고려 말기 남평문씨의 정착에 따른 집성촌 형성과 이어 정착하는 진주강씨, 풍양조씨에 이은 집성촌 형성으로 북고리는 차츰 농촌화해 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내동면의 지역으로서 북구천가가 되므로 부꾸내 또는 북구천, 북구천리라 하였는데 고종32년(1895)에는 남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북고리라 하여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마을별로는 동쪽에는 금강이 있고 뒤에는 고개가 있는 그 아래 마을이 있다고 하여 강령(江嶺), 뜸말, 뜨말이라고 부르며 백제 때는 뒷구래에 속하는 포구였다 한다. 사당이 있었으므로 요당(堯堂), 노씨가 살았기에 노동(魯洞)이라 부르고 길모퉁이를 돌아 마을이 있으므로 도라(道羅)마을, 건너말, 부끄내 등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마을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4.16㎢이고 가구수는 89호이며 인구는 264명이다.
정암리(亭岩里)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오는 금강의 물줄기가 장암면 북쪽에서 금천과 합류하고는 동쪽으로 물줄기를 바꾸는 그 아래쪽에 위치해서 마당바위와 산과 들로 아름다운 운치를 자랑하는 지역에 정암리는 자리한다. 장암면의 호칭이 정암리에 떠 있는 마당바위[맞바위]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이 바위는 면명으로 지적이 될 만큼 또한 유서 깊은 바위다.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인류의 정착은 부여에서 백제로 환도하기 전부터이며 백제 말기에는 부여에서 바라다 보이는 하얀 목련밭으로 또한 알려진 지역이다. 하얀 목련밭의 정암리에 마을의 형성도 환도전의 백제 때부터로 지적을 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내동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말기 경주최씨가 정착하였으나 집성마을을 형성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서서히 이동하였으며 오늘의 뿌리를 내리는 성씨는 풍양조씨의 분산에서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이어 청송심씨, 해주오씨, 의령남씨, 전주이씨, 청도김씨의 정착에 따른 집성촌 형성으로 정암리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내동면의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에 남내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정자리, 수작리(樹作里), 장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정자와 장암의 이름을 따서 정암리라 하고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
고적으로는 시루매 산성의 군사들의 무덤으로 보이는 100여개의 고분군이 매봉산 경사진 곳에 있으며 연산군을 간하다 아버지와 5형제가 함께 죽임을 당한 전주인(全州人) 이총(李摠)의 무풍군묘(茂豊君廟)가 있다. 마을 앞 금강가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맞바위라하여 마을명도 맞바위, 매년 농사가 마을사람 식량에 충분하다 해서 수작(壽作)골, 안골등의 마을이 있고 비닐하우스 시설 재배를 하여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리의 면적은 4.82㎢이고 가구수는 91호이고 인구는 270명이다.
14. 세도면 마을 유래
청송리(靑松里)
세도면의 서쪽에 위치한 대흥산 주변에서 산맥의 줄기가 끊기고 낙맥으로 판점을 이루는 그 중심지에 자리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주교천과 부왕골천, 방아골천, 생골천 등 비교적 수원이 많은 냇물을 둘러싸고 평탄한 들과 들보다 조금 높은 야산의 줄기에 그림 폭처럼 전원지대를 이룬 지역에 청송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환도하기 전에 이미 인류가 정착한 지역으로 추정되며 농경사회로 접어드는 그 처음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추정하는 일설도 있다.
고려 때는 임천군(林川郡)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부터 풍양조씨들이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농경지대를 개간해 갔으며 그 당시 원거인들과의 공동작업으로 주교천 주변의 간척지 공사 등 많은 난점을 극복해가며 오늘의 전원지대를 이룩한데 대해서 많은 희생이 따랐다고 전한다. 그만큼 들 개간에 어려움이 많았던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송리, 하송리, 청룡리, 하대리 일부를 병합하여 청룡과 하대의 이름을 따서 청송리라고 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큰바위가 마을에 있으며 옛날에 김씨와 박씨가 많이 살았다 해서 금박골, 노씨가 살았다 해서 노개골(노가가 변해서), 물이 한번 차면 잘 빠지지 않는다 해서 무데미 또는 양지뜸, 마을 주변에 호랑이가 살아서 호동, 범골, 범굴, 옛날에 원당이 있었으므로 원당이라 부르다가 원뎅이, 마을 주변에 솔이 많이 있으므로 솔메, 또한 윗새말, 청룡골, 기왓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으며, 면적은 3.97㎢이고 가구수는 265이며 인구수는 765명이 거주하고 있다.
반조원리(頒詔院里)
동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화수리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화수천이 동북쪽의 들을 적시면서 금강으로 유입하고 남쪽은 야산지대와 들이 깔려있으나 북쪽은 금강변의 넓은 들과 그 안쪽에 펼쳐진 들로 풍요로운 농경지대를 이룩한 지역에 반조원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 이미 인류의 정착과 함께 마을이 형성되어 임천과 석성을 잇는 큰 나루가 또한 이곳에 있었다.
백제 사비성에 쳐들어가는 당나라 수군이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진을 치고 당나라 왕의 조서(詔書)를 소정방이 이곳에서 반포하였다 하여 지명을 이에 연유하여 지었다고도 하는 지역으로, 옛날부터 큰 길과 나루가 있어서 번창했던 지역만은 틀림없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성백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진주강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지형이 곶으로 되어 있어서 고지 또는 고다지(古多只)라고 하였었다. 고려 때는 이곳에 고다지소가 있었으므로 고다지소라 불렀으며 또한 나루터가 있으므로 고다진(古多津)이라고 하였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다진원(古多津院) 또는 변하여 반조원(頒詔院)이라고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석성군 현내면의 포사리 일부를 병합하여 반조원리라 해서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고다진원은 나루를 중심으로 있었고 반조원이라고도 부르며 검문, 검색 또는 길 안내를 한 관집이고, 액운이 끼었을 때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기원하던 반조원 성황당(頒詔院城徨堂)이 있었고, 옛날에 소리를 잘하는 사람이 많이 사는 마을이라 가음말 또는 가음촌(歌吟村), 나루터가 있어서 지형이 곶으로 되어 있으므로 곶지, 고다지, 뒤에 고다지소, 고다진, 고다지원이 변하여 반조원, 고다지소의 옥(獄)이 있었을 때 옥 바깥쪽에 마을이 생겼으므로 옥삼박골, 옥삼외곡(玉三外谷)이라고 불리는 자연마을이 있고, 면적은 3.19㎢이고 가구수는 99이며 인구는 302명이 거주하고 있다.
사산리(沙山里)
세도면의 최북단에 위치해서 동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낮은 야산지대가 금강 쪽으로 깔려있는 지역에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절골천 유역에 광범위한 들을 조성하는 곳에 사산리는 자리한다. 또한 동쪽에는 남산골천이 흐르면서 들을 적시고 있어 운치를 돋구는 지역이기도 하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나당군이 사비성을 공격할 때에 금강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다 가림성 군사의 복병의 공격을 받아 대파되었다는 사랭[沙浪]이 마을이 있는 곳으로 당군이 사비성을 점령하고서도 오랫동안 주둔하였던 지역이라 전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백암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능성구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형성해 갔으며 모래사장 위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미루나무 숲을 만들어 금강의 범람을 막아서 전원지대를 이룩한 유서 깊은 곳이 또한 사산리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백암면 지역으로서 고종 32년(1895)에 성백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사랑리, 산사리와 석성군 현내면의 포사리(浦沙里) 일부를 병합하여 사랑과 산사의 이름을 따서 사산리라 하여 부여군 장암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7월 1일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마을별로 목골은 옛날에 큰못이 있어서 목골, 목곡(牧谷), 목동(牧洞), 모래 위에 잔잔한 물결도 절경이지만 사람들이 욕심없이 평화롭게 세월을 보내는 마을이라 해서 사랑, 사랑리라 부르다가 사랭이로 변했고, 옛날 성림사(聖林寺)라는 절이 있던 마을이라 성림촌(聖林村), 호수 같은 금강가에서 가죽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저호(樗湖)라 부르며 사산리 산사마을에 절터가 있는데 이 절터를 사산리사지(沙山里寺址) 또는 백석사지(白石寺址)라고도 부르는 사지가 있고 사산리 1구 성림사지에 우적탑(牛積塔)이라고 부르는 탑이 묻혀있다 한다.
리의 면적은 5.21㎢이고 81가구에 인구는 192명이 거주한다.
화수리(花樹里)
세도면의 북쪽에 위치해서 동남쪽으로는 토성산이 그리고 중앙에 군환산이 서서 비교적 낮은 산악지대를 이루며 서쪽에서 동남쪽으로 흘러가는 화수천 유역과 남쪽에 펼쳐지는 들이 넓은 지역에 화수리는 자리한다. 야산지대에 자연스럽게 피는 꽃이 아름다워 인심도 후하다는 화수리는 봄과 가을을 통해서 시인 묵객이 많이 찾아드는 지역이기도 하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인류의 정착은 백제 때부터이며 가림성(加林城) 지역의 외곽성인 토성산성이 이 지역에 있는 것으로 보아 백제 때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지역이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성백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임천조씨와 문화유씨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집성촌을 형성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성백면의 지역으로서 화중개, 화징개 또는 화중(花中), 화수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화수리라 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옛날에 마을에 부처가 있었다 해서 불무골, 봉무동, 불뭇골, 마을이 서쪽에 있으므로 서편이, 쇠판이, 서편리, 마을 뒷산의 형국이 꿩이 숨은 형국이라 윤치, 은치(隱稚), 장승이 있던 마을이라 장성배기, 마을 지형이 항상 꽃이 만개한 것 같다 하여 화징개, 화중개(花中開), 화중, 화수라고도 부르는 마을들이 있으며, 백제 때의 토성으로 화수산성(花樹山城)이 있고 고려시대의 폐사지(廢寺址)가 있으며 소형 동종(銅鐘)이 출토되기도 했다.
리의 면적은 2.93㎢이고 66가구에 인구는 185명이 거주한다.
수고리(水古里)
세도면의 북쪽에 위치해서 서북쪽에서 흘러오는 사동천과 해촌천, 은골천, 기층골천, 오야골천, 수량골천 등 많은 냇물이 야산지대와 들을 적시는 지역에 위치해서 옛부터 기름진 땅이 많은 지역에 수고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 이미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마을의 형성도 그때 이미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하천 지역에 마을이 잔재해 있던 지역이다. 백제 멸망 후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고려시대 전까지는 임천군 고을에서 부자촌으로 손꼽히던 지역이였다 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풍양조씨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집성촌을 이룩하며 부유한 농촌을 조성하였으며 또한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고추리(古楸里), 기층리(幾層里), 수다해리(水多海里)를 병합하여 수다해와 고추의 이름을 따서 수고리라 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마을별로는 옛날 장자가 살던 집터에 개오동나무가 서있는 마을이라 고추골 또는 고추동, 부자집이 많아서 집을 지을 때 몇 층의 층대를 쌓고 잘지은 집이 많았다 해서 기층골, 기층동, 마을과 마을 근처 논에 수렁이 많다 하여 수렁골, 수랑골, 수랑동, 전에 기와를 굽던 마을이라 하여 오약골, 오양골, 선비들의 마음과 몸을 쉬게 하는 마을이라 하여 은골, 어은동, 은동, 약초가 많고 약초를 캐는 사람들이 밤이면 정자에서 잠을 자며 쑥으로 불을 놓아 정자에 쑥 냄새가 배어 약 냄새나는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약정재, 약정현(藥亭峴)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6.31㎢이고 159가구에 인구는 428명이 거주한다.
동사리(東寺里)
세도면의 서남쪽에 위치해서 큰 냇물인 사동천이 흐르고 작은 냇물로는 바위배기천, 홍역천, 박술골천, 소매천 등이 모두 서쪽의 낮은 야산지대에서 발원하여 사동천으로 들어가는 구육역과 사동천의 유역에 넓게 펼쳐진 들과 서쪽의 낮은 야산지대가 잔잔한 물살을 잇듯 깔려있는 지역에 동사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 때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신라 때 마을이 형성된 지역으로 추정되는 동사리는 고려 때부터 대흥산을 주축으로 하는 그 아래 야산지대를 중심으로 들이 개간되며 큰 마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풍양조씨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집성마을을 형성하면서 큰 마을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동신리, 사동리, 소니산리(所尼山里), 우산리(牛山里)와 읍내면의 북동리, 사동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동신과 사동의 이름을 따서 동사리라고 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고려 때의 회양부사(淮陽府使) 조신을 배향한 동곡서원(東谷書院)이 있고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이전한 오층석탑이 있던 동사리 폐사지(東寺里 廢寺址)가 있으며, 옛날에 강물이 들어와서 배가 드나들었으며 배를 매던 선착장 구실을 했던 배매마을, 성림사(聖林寺)가 있었다 해서 사동, 사동리, 절골, 마을산의 모형이 소가 누운 것 같은 형국이라 하여 소매, 우산리라고 부르는 마을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3.62㎢이고 112가구에 인구는 302명이 거주한다.
간대리(艮大里)
세도면의 젖줄인 사동천이 북쪽에서 흘러와서는 남쪽으로 흐르는 그 서쪽의 넓은 들과 동쪽으로 흐르는 주교천 주변에 조성되는 들과 그 사이 낮은 야산지대에 간대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에 이미 인류의 정착과 함께 마을의 형성이 따랐던 이 지역에는 농경지 조성도 상당히 빨랐던 지역이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진주강씨들이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며 마을을 형성해 나갔으며 이어 평택임씨들이 정착 집성촌을 이루면서 들을 개간하며 농경지를 조성하면서 다른 성씨들도 정착 농촌의 완충지대를 이루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간리, 상대리, 하대리 일부와 읍내면의 사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간리와 상대리의 이름을 따서 간대리라 하여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마을별로는 옛날에 금강가 마을로 물가에 바위가 많이 있으므로 다근이라 부르다가 다그니로 불렀고, 마을과 근처에 모래가 많다 하여 모사골, 모싯골, 강경, 임천, 반조원으로 가는 세 갈래 길이 있는 곳에 마을이 있어 세거리, 세거름, 삼거리라 불렀고 뒷산에 여우형의 명당이 있다 해서 여매 등의 마을이 있고, 다그니 나루는 익산시 용안면으로 건너가는 나루로 옛날에는 전라도와 충청도가 교류하는 뜻 있는 나루로 다근도선장, 다근진이라고도 불렀다.
리의 면적은 3.19㎢이고 212가구에 인구는 607명이 거주한다.
청포리(菁浦里)
금강의 강변에 위치해서 범람의 역사를 많이 겪었던 지역이며 그리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주교천과 청포천이 또한 동쪽부터 땅속에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를 흘러내듯 흐르는 공중에 떠 있는 즉, 물 가운데 떠 있는 형태를 유지해오는 지역이 청포리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금강의 범람으로 지형의 변화도 많이 따랐던 지역이나 옛날에는 작은 포구 구실을 하는 갯가가 많았으며 인류의 정착은 백제 때로 추정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이었다. 마을의 형성은 백제 때로 추정을 하나 그 동안 금강물의 범람에 따라 정착촌이 오래 지속되지 않았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강변시설을 점차적으로 실행하면서 정착촌이 오래 명맥을 지속하게 됨에 따라 수원백씨, 추계추씨들이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룩하면서 새로운 지역으로 발전해 나갔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초신면의 지역으로 포구가 되므로 무개 또는 변하여 무새 청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계양리(桂陽里)와 귀덕리(歸德里), 홍가동(洪佳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청포리라고 해서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이토정(土亭) 선생이 하룻밤을 묵었다 해서 지암골, 아산 현감인 토정이 천지조화가 있어도 이 마을만은 물에 잠기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비 오는 날 하룻밤 묶고 갔다 해서 그의 호에 따라 토정이라 부른다. 포구가 됨으로 무개, 무새, 청포라 하고 대와 모래가 많아 모곡(茅谷), 모사동(茅沙洞), 모새울, 마을이 들안쪽에 자리해 있으므로 들안뜸, 변하여 돌암뜸 등의 자연마을들이 있다. 마을 전체가 특용작물(방울토마토)을 재배하고 있어 생활에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으며 리의 면적은 5.18㎢이고 가구는 311에 인구는 965명이 거주하고 있다.
귀덕리(歸德里)
세도면의 남쪽에 위치해서 들 위에 판점을 찍듯이 야산지대가 접경을 이루고 북쪽 망굴 저수지에서 남쪽으로 흘러서 금강으로 들어가는 군문리천 주변에 넓게 펼쳐진 들과 금강변 위쪽에 펼쳐진 들에 귀덕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부터 인류의 정착이 따랐으며 가림성(加林城) 군사들의 군마 소리가 우렁찼던 지역이라 한다. 구전에 따르면 전라도 지방에 잔존했던 마한의 마을 사회국가 군졸과 가림성의 군사들이 일전을 벌였던 전쟁터라고도 전해진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인세면(仁世面)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 평택임씨가 정착하면서 그 씨족이 집성촌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농경지를 개간하였다. 조선말기는 임천군 인세면 지역으로서 지형이 구덕 즉 대바구니처럼 생겼으므로 구덕 또는 구데비, 변하여 귀덕(歸德)이 되었다 하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귀덕리라 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마을별로는 옛날에 장군이 군졸과 지나다가 진을 쳤던 자리라 하여 군문리(軍門里)라 부르고, 유씨들이 많이 살았던 마을이라 유가골 또는 유가동, 마을에 풀이 많은 마을이라 하여 초장골, 마을에 정문이 있어 정문거리 등의 마을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2.60㎢이고 가구수는 142에 인구는 429명이다.
장산리(長山里)
북쪽에서 낮은 산맥의 줄기를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들과 야산의 완충지대를 이루며 동쪽의 금강변에 이르러서는 모래사장으로 변모하는 세도면의 동남부 위쪽에 장산리는 자리한다. 냇물로는 장산리 한복판으로 신앙천이 흐르면서 들을 적시고 북쪽을 점유한 함박산의 운치가 한 폭의 그림 같은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하였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면서 마을의 형성이 따랐던 지역으로 농경지 조성이 상당히 빨랐던 지역이다. 장산리는 금강의 강변에 먼저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일설도 있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엔 임천군 인세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초기 평택임씨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어 들을 개간하였으며 이어 분파되어 풍양조씨가 사방으로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금릉김씨가 정착하여 어려운 환경에서 들을 개간하며 정착한 지역이 또한 장산리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임천군 인세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장토리(長土里)와 중산리(中山里)를 병합하여 장산리라 하고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마을별로는 사방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전망 좋은 자리에 마을이 있다 해서 산바래기 또는 산망(山望)이라 부르고, 마을에 신암이란 귀한 바위가 있어서 그 바위를 위했다 하는데 그 바위 있는 마을이라 하여 신암, 신암골, 신앙골, 대나무가 많이 있었다 해서 죽말, 중말, 죽촌 등이 있으며, 마을의 면적은 2.64㎢이고 가구수는 126이며 인구는 337명이다.
가회리(佳檜里)
북쪽에서 흘러오는 금강의 물줄기가 서쪽으로 굽이쳐 흘러가는 세도면의 동남단에 위치해서 북쪽에서 흘러오는 모래가 쌓여서 들을 조성한 지역에 가회리는 자리한다. 서북쪽으로는 턱을 고인 듯한 야산의 줄기가 일선으로 보이나 파도를 막는 방파제처럼 보일 뿐 온통 들로 조성된 지역이다.
백제 때는 가림군(加林郡)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가림군(嘉林郡)에 속했었다.
대안(對岸)에 강경이 있어서 일찍부터 인류가 정착하고 마을이 형성된 듯하나 마을의 형성은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늦게 형성된 듯하며 조선시대 말기부터 현대를 장식했던 이 지역 유일한 세도나루도 강경의 장터가 번성하면서 뒤따라 나루가 생긴 100여년의 역사밖에 없는 나루라 한다. 금강 물이 범람할 때마다 꼭 수해를 입던 지역에 1950년대에 제방이 쌓아지면서 생활을 누리는 농촌으로 변모해 최근에 조성된 농경단지로 보는 견해가 바른 견해가 아닌가 한다.
고려 때는 임천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임천군 인세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도 임천군 인세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회화정리(檜花亭里), 언고개리(言古介里), 홍가동(洪佳洞) 일부를 병합하여 홍가동과 회화정의 이름을 따서 가회리라 하여 부여군 세도면에 편입되었다.
세도나루의 위치는 강경에 속한다. 세도에서 강경으로 사람과 차량까지도 운반하여 연결하는 나루로 세도지역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으나 1988년 황산대교가 가설됨에 따라 나루터는 사라졌다. 마을별로는 옛날에 시장이 서서 장터가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장터말, 변하여 장짓말, 마을에 회화나무 정자가 있어서 회정(檜亭)이라 부르다가 해쟁이, 회정리(檜亭里), 홍씨들의 집성촌이라 홍가골, 홍가동(洪佳洞)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리의 면적은 3.14㎢이며 가구수는 277에 인구는 881명이다.
15. 석성면 마을 유래
석성리(石城里)
북쪽의 태조봉(太祖峯)에서 서쪽의 국사봉(國師峯)을 거쳐 금강변으로 산악지대가 동남쪽으로 낮은 야산지대를 이으면서 석성리는 조성되었다. 백제 때는 진악산현(珍惡山縣)의 고을이었으며 신라 때는 석산현(石山縣)에 속했었다.
백제가 웅진(熊津)에 환도한 그 전후가 선인들이 정착하지 않았나 한다. 고려 때는 석성현(石城縣)에,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산현(尼山縣)에 속했다가 뒤에 석성현에 속했다. 고려 때부터 새롭게 정착하는 제주고씨와 진주강씨, 밀양박씨가 집성촌을 형성하고 마을을 조성함으로써 오늘의 대를 이어왔다.
조선시대 말기는 석성군 석성읍내 또는 석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향교리, 남산리 일부, 비당면(碑堂面) 일부와 우곤면(牛昆面)의 일부를 병합하여 석성리라 하고 부여군 석성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에는 지형이 구수처럼 생겼다 해서 구수메, 백제 때부터 이 지역을 다스리던 관아가 있었던 마을로 돌로 쌓은 성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석성, 마을 뒷산에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형국이라 해서 연화, 석성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향교골, 교동 등으로 불리는 뜸이 있다. 지금은 두꺼비바위, 파리바위, 안장바위 등으로 불리우는 지석묘의 고인돌이 있고 동헌지(東軒址), 객사지(客舍址), 사직단지(社稷壇址), 옥터, 사창터가 있으며 면적은 3.39㎢이고 가구수는 220호이며 인구는 631명이 살고 있다.
봉정리(鳳亭里)
석성면의 최남단에 위치해서 서쪽에는 금강을 경계로 장암면, 세도면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부여읍, 남쪽으로는 논산시 성동면과 경계를 이루며 낮은 산악지대와 동남쪽으로 넓은 들을 점유한 지역에 봉정리는 자리한다.
봉정리는 백제 때는 진악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석산현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에는 남쪽들과 연관된 야산지대에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취락을 형성하였으며 백제 말기에는 백제군의 주둔지였었다. 백제의 멸망 후 많은 사람들이 전원지대에 자리를 잡음에 따라 큰 길목으로 등장한 봉정리 남부지방에는 큰 나루터가 생기며 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기점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석성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한때 이산현(尼山縣)에 속하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 남양전씨, 진주강씨, 고령신씨, 밀양손씨, 수원백씨 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마을을 형성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석성현에 속하였고 1895년 석성군 현내면으로 개편된 후 1914년 군면폐합에 따라 석성면 봉정리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연마을으로 두냇물이 몰려있는 모래사장 근처의 포구라 해서 사포, 사포리, 개사리라 불리고, 백제 때 군사가 주둔하였던 마을이라 봉두정(鳳頭亭), 조선시대 사창이 있었던 마을이라 창리(倉里)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고, 리의 면적은 4.89㎢이고 가구수는 206이며 인구는 583명이 거주하고 있다.
비당리(碑堂里)
봉황산과 등골산이 야산줄기를 중심으로 마을이 위치하고 있으며 백제 때는 진악산현, 신라 때는 석산현에 속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 이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백제 멸망 후 부흥군이 실패한 후 잠시 둔병하였다가 그대로 정착하여 개발이 된 지역이었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석성현, 조선초기에 이산현에 속하기도 하였다. 그후 석성현에 속하였으며 함열남궁씨가 정착하고 이어 김해김씨, 진주강씨의 집성촌 형성에 따른 마을로 조성해 나갔다.
조선시대 말기 석성군 비당면 이었으므로 비당이라 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중리, 상리, 옥산리 일부와 증산면(甑山面) 연화리 일부를 병합하고 비당리라 하여 부여군 석성면에 편입되었다.
중리 소룡골의 정각사(正覺寺)의 말사였던 소룡사터에 위치하고 있는 선돌은 성기형태로서 마을 주민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고 있으며, 비당은 사람들이 정성들이는 서낭당이 있고 비가 있는 마을이라 비당이라 부른다고 하며, 마을에 금반형(金盤形) 명당이 있고 작은 마을이라 소반촌, 소반챙이라 불리며, 선사시대의 선사토광묘(先史土壙墓)가 있으며 마제석검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마을의 면적은 4.69㎢이고 가구수는 196이며 인구는 563명이 거주하고 있다.
증산리(甑山里)
태조산(太祖山) 아래 동쪽으로 흐르는 증산천(甑山川)을 끼고 낮은 야산지대와 들에 위치한다. 태조봉(太祖峯)에 오르면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들과 야산지대가 꼭 군사가 주둔한 군영지 같다 해서 지형에 명당자리가 많다고 소문난 지역이다.
백제 때는 진악산현, 신라 때는 석산현에 속했으며 백제 말기 사비성을 지키는 백제군과 신라군과의 격전지로 전하는 군장동(軍藏洞) 지역에서는 당시 무기가 출토되기도 하였다. 고려 때는 석성현,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산현에 속하기도 하였으나 주로 석성현에 속했다. 고려시대 평양조씨가 정착하였으며 파평윤씨와 전주이씨의 정착으로 집성촌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말기는 석성군 증산면의 지역으로 뒷산이 시루처럼 생겼으므로 시루미, 미르메 또는 증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종북리(宗北里), 건평리(乾坪里), 연화리와 비당면의 상리 일부와 북면의 하화리(下禾里), 상정리(上正里) 일부와 초촌면(草村面)의 응동리(鷹洞里) 일부를 병합하여 증산리라 해서 부여군 석성면에 편입되었다. 백제군이 마지막까지 신라군에 저항한 군장동(軍藏洞)이 있으며, 네 갈래의 길이 있다 해서 네거리, 십자가(十字街), 땅이 메마른 마릿들에 마을이 있으므로 마리티 마을, 옛날에 한 중이 살면서 여러 사람에게 영락을 누리도록 불도를 닦으며 살았던 마을이라 해서 중락골, 또는 중락동이라 부르는 마을들이 있으며 면적은 7.32㎢이고 가구수는 559에 인구는 1,853명이 거주한다.
정각리(正覺里)
석성면 최북단에 위치하였고 산악지대가 많아 백제 때는 진악산현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때는 석산현에 속했었다.
부여에 백제가 천도하기 전부터 인류의 정착이 따랐으나 마을의 형성은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부터라고 전한다. 사비성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사찰이 들어설 때에 극락사(極樂寺)라는 절이 창건되고 많은 신도의 출입과 함께 절 부근에 마을이 형성된 것이 이 지역의 처음이라고 한다.
그후 백제 멸망과 함께 극락사는 소멸되고 현재 절터만 남아 있는데, 일본에는 이와 같은 형태의 절이 있다고 한다.
고려 때는 석성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산현에 속하기도 하였으며 뒤에는 석성현에 속했었다. 신라 때부터 오랫동안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던 각 씨족은 조선시대를 전후하여 이 지역에서 떠났으며 그후 들어선 남양홍씨, 밀양박씨가 정착하고 이어 제주고씨가 정착하여 모두 집성촌을 이루면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인 1895년에는 석성군 북면에 속했으며 정각사(正覺寺)가 있으므로 정각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화리, 중정리, 상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정각리라 하고 석성면에 편입되어 4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감나무가 많이 있다 해서 감나무골, 옛날에 산 짐승의 가죽을 다루는 점이 있었다 하여 갖점, 옛날에 숯을 구웠던 마을이라 하여 숯골, 숯골 위쪽에 있다해서 위숯골, 정각사 절이 있다 하여 절골 또는 사곡(寺谷)이라고 부르는 절골이 있으며, 면적은 4.33㎢이며 가구수는 83호에 인구는 195명이 거주한다.
현내리(縣內里)
석성면의 중앙에 위치해서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냇물이 합류하며 서북쪽에 자리한 국사봉(國師峯)과 용머리산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산악지대와 야산, 그리고 지방도 799호선이 관통하며 현내천이 흐르고 있다.
백제 때는 진악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석산현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에 한 고을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형성해 나갔던 지역이다. 백제 말기 나당군의 침입 때는 파진산의 병력이 이곳까지 나와서는 격전을 하였다는 지역이며 구전에 따르면 백제 멸망 후 군졸들이 정착하여 오래도록 백제 재건을 꿈꾸며 살다가 그 숱한 한과 함께 영생하는 곳이라고도 전한다.
고려 때는 석성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산현에 속했다가 석성현에 속했었다. 고려시대 말기와 조선시대 초기를 전후하여 원주변씨, 함평이씨가 뿌리를 내리면서 집성촌으로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현재까지도 이 지역의 뿌리로 정착되는 곳이다.
조선시대 말기인 1895년에 석성군 현내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정각리, 탑동리, 봉북리(奉北里)와 북면의 하정리와 비당면의 하리 일부를 병합하여 석성면 현내리에 편입되었다.
석성산성은 백제 때의 외곽성이며 백제 멸망 후에도 부흥군의 거점이였고 변씨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변뜸,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말, 마을 주변에 섶이 많이 있다 해서 섬바텡이, 청룡이 왼쪽을 싸고 있는 것 같다하여 청룡, 마을에 석탑이 있어서 탑골 등의 마을이 있고 면적은 5.95㎢이고 가구수는 235이고 인구는 699명이 거주한다.
16. 초촌면 마을 유래
연화리(蓮花里)
연화리는 초촌면의 서남쪽에 위치해서 중앙에 흐르는 냇물과 북쪽에 접경을 이루는 야산지대와 남쪽의 야산과 들이 그 절경을 이룬다 해서 옛날에 연못이 있을 때부터 가경지로 알려진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이전부터 인류는 정착하였으며 취락의 형성도 이루어졌던 지역이다. 청동기시대에 이미 들이 개간되어 농경지가 조성되어갔다는 구전과 함께 연화지는 백제 때부터 궁중의 놀이터였었다 한다. 백제 말기 사비성시대에는 호화가 깃들었던 지역으로 꼽힌다. 이곳 농부가중에 “연화지에서 연꽃 꽂고 오화지지에 꽂노리가고” 라는 가사가 있음으로 보아 백제 왕궁에서 꽃놀이의 경승지를 조성한 듯도 하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초촌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새로운 씨족이 정착하여 들을 개간해 나갔으나 집성촌 구성 등으로 오늘날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가문은 드물며 기계유씨가 드물게 집성촌을 이루며 이 지역의 뿌리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초촌면의 지역으로서 연화지라는 큰 연못이 있었으므로 연못골 또는 연화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련리(上蓮里), 하련리(下蓮里), 내련리(內蓮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연화리라 하여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0.72㎢에 가구수는 74호이며 인구는 247명이다.
자연마을로는 옛날에 연화지라는 못이 있었으므로 연화동, 연못골이라 부르며 연못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을 아래말 또는 하련, 마을의 형국이 방안처럼 생겼다 해서 안골, 안동이 변해서 안굴이, 양지바른 곳에 마을이 있으므로 양지편이라 부르는 마을들이 있으며, 메밀산 중턱에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는 연화리 석곽묘(蓮花里 石槨墓)가 있으며 세형동검 4점이 출토되었다.
추양리(楸陽里)
초촌면의 서쪽에 위치해 석성면과 경계를 이룬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통일신라 이후에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의 사비성 시대에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백제멸망 후에는 잔여 세력들이 끈질기게 저항한 지역으로 전해진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초촌면 지역이었다.
고려 말기부터 평산신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조선시대에는 달성서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으로 형성해 나갔다. 그후 임진왜란시 전주이씨 이적(李績)이 금구현감(金溝縣監)으로 행차하던 중에 그의 자손을 서진사(徐進士) 집으로 피난케 하여 정착시키므로 집성촌을 이루기 시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 이름은 마을 앞에 오래된 떡나무[楸木]가 있어 고추동, 고추골로 불려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고추동, 응양리, 건평리, 내연리 일부를 병합하여 고추와 응양의 이름을 따서 추양리라 하였으며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20㎢이고 가구수는 175이며 인구는 541명이 거주한다.
자연마을로는 추양리 동쪽에 있는 큰 뜰을 황못들이라 부르고 황못들 안쪽에 있는 마을을 고추동 또는 안말이라 부른다. 즉 황못들 안쪽이 되므로 안말, 북쪽으로 등너머에 있는 마을을 넘말, 양지바른 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양상(陽上)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초평리(草坪里)
초촌면의 최남단에 위치해서 중앙에 흐르는 응평천과 남쪽을 적시며 흐르는 석성천, 그 동북쪽과 서쪽의 넓은 들과 낮은 야산지대에 초평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일찍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였을 때는 이미 큰 마을이 조성되었던 지역이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한 후 사비성시대에는 사비성의 관들이 이곳에 있었으며 백제 멸망 직전에는 황산벌의 마지막 전쟁터라는 전언과 함께 백제 멸망 후에는 산에서 전열을 가다듬던 백제군들이 신라군들과의 접전이 잦았던 지역으로도 알려져 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초촌면의 지역이었다. 고려 때부터 충주지씨들이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형성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 말기는 한때 서해안에 거점을 둔 왜구들의 침범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가옥이 모두 불타버리고 인명의 피해를 입히려는 왜구들에게 농부들이 단합하여 그들을 쫓아낸 유일한 지역으로도 알려진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초촌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초리, 하평리와 노성군 소사면의 봉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초리와 하평의 이름을 따서 초평이라 하고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08㎢에 가구수는 121호이며 인구는 344명이다.
자연마을로는 옛날에 서생을 가르치고 학문을 토론하는 강당이 있었으며 주위에 대나무숲이 우거졌으며, 강당이 있으면 대인이 나올 것이라고 여겨 강당이 있는 이 마을을 강당재 또는 대인마루, 죽현(竹縣)이라 부르고 마을 뒷산 모습이 말처럼 생겼다 하여 말미, 마산, 하평리, 벌판에 풀이 무성함으로 새울이라 부르고 산의 형국이 마치 봉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해서 봉곡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또한 인조 때의 공신인 지계최(池繼崔)의 정려문이 있다.
송국리(松菊里)
송국리는 초촌면의 한복판에 위치해서 서쪽으로는 응평천이 흐르고 동서쪽으로 낮은 야산지대가 놓이는가 하면 그 사이로 남북쪽으로 트인 듯 들이 자리한 지역에 위치한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공주에 천도하기 이전부터 인류가 정착하여 취락의 형성이 따랐으며 백제 말기 부여의 전성시대에는 큰 고을로 등장하여 이 지역을 관할하는 관아가 있었던 지역이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던 인류의 이동이 이 부근을 적지로 선택하였고 석성천 주변과 북쪽의 야산지대를 근거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장소로 선택하였다는 것이 매장문화재가 많이 발굴되면서 알려지게 되었고, 서서히 그 중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한편 수렵시대에 이미 취락이 구성 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잘못된 견해는 아닌 것 같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초촌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하국리, 하평리, 신송리의 각 일부와 노성군 소사면의 덕상동 일부를 병합하여 신송과 하국의 이름을 따서 송국리라 하여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72㎢에 가구수는 89호이며 인구는 266명이다.
자연마을로는 옛날 백제 이전부터 이 지역을 다스리는 관아가 있었던 지역이라 하여 국령(國令)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궁영이, 국령이라 부르고, 학이 날아와서 장관을 이루었던 마을로 산과 학이 신성지를 이루는 마을이라 하여 산 학골이라 부른다. 소나무가 우거져서 좋은 경치를 이룬다 해서 송현이라 불리는 마을도 있다.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를 밝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송국리 석관묘(松菊里 石棺墓)가 있으며,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고, 청동기시대의 취락지로 가장 중요한 송국리 선사취락지(松菊里 先史聚落址)가 위치하고 있다.
응평리(鷹坪里)
초촌면의 서쪽에 위치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응평천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는 낮은 산악지대 아래 야산이 판점을 찍은 듯 놓여 있는 그 아래로 넓은 들이 펼쳐진 지역에 응평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때 이미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인류가 정착한 초원지대로 백제 때는 사비성을 지키는 외곽성의 전초기지가 있었던 지역이라 한다.
백제 멸망 후에는 한때 백제 부흥군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으나 그후 모두 안착하여 농경화됨으로써 오랫동안 백제혼을 유지하였던 곳으로도 소문나 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 아래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초촌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파평윤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면서 새롭게 마을을 형성해 나갔으며 이어 광산김씨, 달성서씨가 정착하면서 조선시대 이후 집성촌을 이루면서 뿌리를 다져간 지역이며 오늘의 빛이 서린 지역이라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초촌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평리, 중평리, 탑동, 응동 일부를 병합하여 응동과 중평의 이름을 따서 응평리라 하고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2.93㎢에 가구수는 183호이며 인구는 541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앞의 땅이 자주 말라서 풀도 자주 마르는 그 들가에 마을이 있으므로 건들, 건평이라고 부르고, 산 모양이 매처럼 생겼다는 매봉재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매골, 응동, 응동리라 부르고, 전에 오동나무가 많았던 마을이라 오평(梧坪)이라고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세탑리(細塔里)
세탑리는 초촌면의 동북쪽에 위치해서 면내에서는 비교적 산악지대가 많은 지역이며 초촌면의 중앙에 흐르는 응평천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망월산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낮은 산악지대와 야산, 그리고 들이 가경을 이룬다 해서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는 시인묵객들의 요람지였다고도 한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부터 인류는 정착하여 취락을 형성하였으며 수렵시대부터 농경사회로 접어드는 시기에 적절하게 인류가 안착한 지역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초촌면의 지역이었다. 백제 때부터 정착한 인류가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뿌리를 내린 씨족은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 정착한 청주한씨와 금녕김씨라고 할 수 있다. 두 씨족이 집성촌을 이루면서 다시 마을을 형성하고 들을 개간하여 농경지를 더욱 확대해 나갔다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초촌면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탑동리와 신송리, 세동과 몽도면의 보각리 일부를 병합하여 세동과 탑동의 이름을 따서 세탑리라 하고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4.72㎢에 가구수는 59호이고 인구는 161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이 가느른 골짜기에 자리해 있으므로 가는골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가농골 또는 세동, 마을에 오층석탑이 있는 마을이라 탑골 또는 탑동이라 부르며 탑골 부근에 새로된 마을이라 하여 신탑골이라 불리는 마을들이 있으며, 백제 때 것으로 보이는 50여기의 세탑리 고분군(細塔里 古墳群)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세탑리 오층석탑(細塔里 五層石塔)이 있다.
신암리(莘岩里)
신암리는 초촌면의 서북쪽에 위치해서 부여와 경계를 나누고 남쪽으로는 석성면과 접하는 비교적 산악지대가 많은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산악지대는 이곳에 자리한 감투봉을 중심으로 동쪽에 많은 면적을 차지하며 신암리 신뜸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증산천이 들을 조성하여 그 중앙지대에는 들이 펼쳐지고 남쪽에는 다시 낮은 산악지대가 자리해서 쉽게 산간벽지임을 한눈에 느끼게 하는 지역이다.
백제 때는 사비군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부여군에 속했었다. 백제가 부여에 천도하기 전부터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한 지역이다. 청마산성의 줄기가 이곳까지 뻗어있으며 백제 멸망 후 사비성을 비우는 사람들이 이곳을 선택하여 정착하고는 오랫동안 그 명맥을 이어왔다는 이야기는 구전으로 전해오나 그 당시부터 뿌리를 내린 씨족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한 부여의 영향권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부여현 초촌면의 지역으로서 바위가 많이 있으므로 신암이라고 불렀었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반남박씨, 신천강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부여군 초촌면의 지역으로서 신암, 신뜸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중리와 몽도면의 보각리 일부와 그리고 석성군 증산면의 건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신암리라 해서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5.86㎢이고 가구수는 107호에 인구는 270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바위가 많은 지역에 마을이 있으므로 신암, 신뜸이라 하고, 마을이 평정에 있으므로 평정말, 신뜸과 평정말 중간에 있으므로 중뜸, 중말, 가운데뜸, 또는 중리라 부르며 새로된 마을을 새터, 보가 있는데 그 가에 마을이 있다 하여 보각골 또는 마을에 보검장갑형(寶檢藏匣形)의 명당이 있다는 마을이라 보각골이라 부르고 마을지형이 구멍처럼 되어 있다 해서 구멍골이라고 부르는 마을들이 있다. 또한 백제 때로 추정되는 100여기의 고분이 있어 신암리 고분군(莘岩里 古墳群)이라 부른다.
송정리(松丁里)
초촌면의 동쪽에 위치해서 논산시 노성면, 광석면과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는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하관천이 조성하는 들녘의 동쪽과 반도형으로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조성하는 낮은 산악지대와 야산지대, 그리고 전반적으로 바둑판 같은 농경지를 조성하는 지역에 송정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열야산현(熱也山縣)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이산현에 속했었다. 다른 초촌면 지역에 비해서 늦게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인류의 정착은 고려시대 초기로 보며 마을의 형성도 고려시대 말기로 추정되는 지역이다. 그러나 고려 때부터 노성에서 석성, 임천으로 통하는 길목이었으므로 사람의 왕래는 잦았던 지역이며 옛날부터 생활권은 논산시 노성에 속한 지역이었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성현 소사면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칠원윤씨, 함평이씨, 함안조씨들이 정착하여 집성촌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전주이씨 등의 정착으로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넓게 토지가 개간되고 넓은 들이 농경지로 변하는 등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노성군 소사면의 지역으로서 뒷산 마루에 소나무 정자가 있었으므로 소정이, 장마루, 정마로 또는 송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운교리, 장월리와 대정리, 왕촌, 진호리의 각 일부와 장구면의 오강리 일부를 병합하여 송정리라 해서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97㎢에 가구수는 79호이며 인구는 233명이다.
자연마을로는 옛날에 좋은 절이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가절이라 부르고, 초생달이 떠오르는 것 같은 마을의 형국 또는 잔다리가 있었으므로 잔다리라 부르다가 장달, 장월, 장월리, 뒷산마루에 소나무 정자가 있었으므로 송정으로 부르다가 변하여 소정이, 정마루, 정마로라고 불리는 마을들이 있다.
진호리(眞湖里)
초촌면의 동북쪽에 위치해서 북쪽에서부터 흘러오는 하관천이 흐르고 옛날에는 긴 호수가 있는 지역으로 동쪽의 등성이를 제하고는 비교적 들로 일관된 지역에 진호리는 자리한다. 백제 때는 열야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이산현에 속했었다.
초촌면에서 인류의 정착이 상당히 늦은 지역으로 고려 때에 이르러 인류가 정착하고 마을의 형성은 그때부터 서서히 이루어져 나갔다. 고려 때는 공주군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성현에 속했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서 김해김씨와 신천강씨가 정착하여 집성촌을 이루어 나갔다. 현재도 거주하는 지역으로 집성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노성군 소사면의 지역으로서 긴 호수가 있었으므로 진물 또는 진호(眞湖)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비안동, 신룡리와 회화리, 왕촌의 각 일부와 공주군 곡화천면(曲火川面)의 신흥리 일부를 병합하여 진호리라 해서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1.38㎢이고 가구수는 136호이며 인구350명이다.
자연마을로는 긴 호수가 있으므로 긴물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진호, 진물이라 부르며, 들이 메마른 마을이라 해서 건평이라고 부르고 겨울에는 기러기가 많이 날아온다 해서 비안동이라고 불린다. 왕재말랭이 산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왕촌이라고 부르고, 마을이 구석진 곳에 있으므로 귀뜸, 구억뜸이라 불린다. 또한 전에 전나무가 많았다 해서 장찬(長贊)이라고 불리는 마을들도 있다.
소사리(素沙里)
소사리는 하관천과 석성천이 풍부한 수원을 공급하는 지역에 위치해서 서북쪽으로 낮은 야산지대가 자리하고 남동쪽으로 넓은 들을 조성하는 지역에 위치한다. 백제 때는 열야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이산현에 속했었다. 수렵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하였다고 하나 확실치 않으며 농경시대로 접어들면서 인류가 정착하고 취락이 형성된 곳으로 본다. 또한 이 지역은 남쪽지방의 석성천의 범람으로 지형이 자주 변동 되었다고 한다.
고려 때는 공주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성현에 속했었다. 고려 말기 마을을 형성하였던 거창신씨가 오늘까지 대를 이어온 유일한 성씨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노성군의 지역으로서 새, 즉 풀이 무성하였으므로 소새 또는 소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의 장찬리, 하관리, 상관리, 수랑동과 진호리, 수화리, 송정리의 각 일부와 장구면의 오강리 일부를 병합하여 소사리라 해서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3.41㎢에 가구수는 106호이며 인구는 313명이다.
자연마을로는 마을과 마을 부근에 풀이 무성하였으므로 소사, 소래라 부르고 마을이 위쪽에 자리했다 해서 상관, 아래쪽에 마을이 생김으로 해서 하관, 마을 앞들에 수렁이 많으므로 수랑골, 수당골, 말구렁이라 부르고, 마을 뒤에 뚝, 즉 언(堰)이 있으므로 원뜸, 옛날에 노송이 우거져서 학이 많이 날아왔다 하여 비학동, 비학골, 피아골이라 불리며, 백제시대 고분으로 추정되는 토광묘(土壙墓) 10여기가 있다.
산직리(山直里)
산직리는 초촌면의 남쪽에 위치해서 북쪽 감투봉을 주축으로 동남쪽으로 흐르는 낮은 산악지대가 야산지대로 변모하면서 석성천 가까이에서 들로 내려앉는 그 주변에 위치한다.
백제 때는 열야산현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이산현에 속했었다. 백제가 공주에 천도하기 이전부터 인류는 정착하기 시작하여 부여에 천도하였을 때는 큰 마을의 조성도 이루어졌던 지역이다. 고려 때는 공주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성현에 속했었다. 고려시대 말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서 밀양박씨, 평산신씨, 함안윤씨 등이 정착하여 들을 개간하면서 집성촌을 이루며 발전해 나간 지역이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노성군 소사면의 지역으로서 산지기가 살았으므로 산직말 또는 산직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신대리와 덕상리, 봉곡리의 각 일부와 석성군 증산면의 연화리 일부와 부여군 초촌면의 초리, 하국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산직리라 해서 부여군 초촌면에 편입되었다.
리의 면적은 3.02㎢에 가구수는 106호이며 인구는 323명이다.
자연마을은 백제때 재상이 살았던 마을로서 이곳에 낙향하여 덕을 쌓고 살았다는 마을이라 하여 덕상골, 덕상동, 등성이 너머 있으므로 등너머, 옛날에 산지기가 살던 마을이라 산직말, 산직촌, 세 갈래의 길이 있는 마을이라 삼가리(三街里), 중뜸 위쪽을 상뜸, 상촌, 마을이 안쪽에 있다 해서 안뜸, 마을이 새로 생겨 새뜸, 신대라 불리는 마을이 있으며, 충청남도 지정기념물인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支石墓)가 있다.
참고문헌
최문휘. 1992. 『여기가 부여다』
출처:부여군지 제1권-부여의 지리<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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