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103주년기념일
#대종교 #기록
기미년 3월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이 국내외 각지에서 크게 일어나던 시기에 멀리 중국 상해에서는 한민족 임시정부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상해는 서남 해상을 사이에 두고, 우리 나라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곳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러 외국과의 교통 연락이 편리하고 또 공동조계 등 특수구역이 있어 적 일제의 세력이 침범하지 못하는 이점도 있으니, 영토 없는 망명 정부가 붙여 있을 만도 한 곳이었다. 그런 점이 조국 광복을 다짐하는 독립 운동 세력의 대표 기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 주재지로 선택되게 되었을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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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또 한가지, 그곳에는 이미 우리 독립운동 지사들의 활동이 있어 왔다는 점을 간과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상해에는 일찍부터 예관 신규식·백암 박은식등 지도자들이 있어,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아왔는데, 예관이나 백암은 모두 대종교의 중진 인물이기도 하였다. 그 중에도 예관은 일찌기 대한제국 군대의 장교로 복무하는 중 ‘을사조약’, 군대 해산 등 국가의 큰 변을 당하게 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려 하다가 여의하게 되지 않으니, 깨끗이 한 몸을 나라에 순(殉)할 것을 결심하고 독약을 마신 것이 오른쪽 눈을 상하여, 예관(晲觀)으로 자호하게도 되었다. 또 ‘경술국치’ 때에도 자결하려다가 대종교 대종사 홍암 나철의 구원으로 생명을 구하고, 후에 대종교에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던 사실로도 유명하였다.( 민석린(閔石麟) 지은 ≪신규식선생약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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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래와 같은 종문 유감(倧門有感)의 시 역시 이러한 사실과 신앙심의 일단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 황조(皇祖)께서
이 세상 열으시고
신형(神兄)님 다시 보내신 일
정말 뜻이 있었습니다.
사람들 서로 모여
거듭났다고 하례하는데,
죽지 않고 살아난 일을
잊을 수가 없읍니다.
(예관(晲觀) 신규식(申圭植) 지은 ≪아목루(兒目淚)≫. 원시 緬惟皇祖首開天 繼降神兄豈偶然, 人皆相賀重生日 我亦難志死不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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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후 국외로 나간 신규식은 국제 도시 상해에 자리를 잡고 중국의 혁명가 송교인 · 호한민 등과도 친근한 교제를 하며, 한·중 두 나라의 깊은 유대를 맺어 왔으며, 또 뒤를 이어 찾아간 박은식, 신채호, 박찬익, 신건식등 동지들과 함께 대동보국단, 동제사등 단체를 조직하여 서로 생활을 부조하고 국사에 협력할 것을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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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는 망명 중에도 언제나 단군 성조의 초상과 한국 지도를 방 안 정결한 곳에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앞에 나가 조국의 광복을 목도하였으며, 나철이 동만주를 순방하고 백두산하 화룡현 청파호에 대종교 총본사를 설치한 다음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4대 교구를 설정할 때에는 상해에 서도본사를 설치하고 학계의 원로 박은식과 함께 교무를 주간하니, 거류 동포들의 대다수가 단군 성조를 높여 받드는 대종교의 민족정신으로 결속되었다.( 민석린 지음 ≪신규식선생약사≫ 및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엮은 ≪독립운동사≫ 제4권 ‘임시 정부사’ 제1편 1장 2절 ‘해외의 독립운동과 조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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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는 이렇게 민족 운동의 기반이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던 곳이며, 또 세계 정세에도 밝은 터라 동제사를 중심으로 한 지도자들은 이미 서기 1917년 8월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만국 사회당 대회가 열릴 때에도 대표를 보내서 한국 독립에 대한 지원을 요청한 바 있으며, 이듬해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원동(遠東) 약소민족 대회에도 대표를 참가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을 포함한 14개조 평화 원칙이 발표됨과 함께는 그 민족 자결 원칙에 의거하는 새로운 독립운동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종전(終戰)과 함께 파리 강화회의의 소식을 듣고는 곧 대표 파견 계획을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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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신규식은 곧 김규식(金奎植) 등 대표단을 파리에 파견하기로 서두르고 한편 국내외에 서신 연락으로 내외 호응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게 되었다. 한편 3·1운동을 전후해서는 국내외의 독립운동 지도자 및 청년지사들이 상해에 모여 들어 혹은 동제사 사업에 협력하고, 혹은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새로운 활동을 펴게 되니, 상해는 한국 독립운동의 기지가 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국내에서 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남과 함께는 3월에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움직임도 보이게 되었으며, 이동녕·조완구·조성환·여운형·서병호·조동호 등 많은 인사들이 프랑스 조계 보창로에 자리를 정하고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구체적 토의를 하게 되었다. 따라서 4월 10일에는 각 지방 출신의 대표자들로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이동녕 의장의 사회로 의정원 회의를 소집하여 ‘대한민국’의 국호를 정하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국무원의 각 부 총장 및 차장을 선거하게까지 되니, 여기서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기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성립을 보게 된 것이다.,( 민석린 지은 ≪신규식선생약사≫ 및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엮은 ≪독립운동사≫ 제4권 ‘임시 정부사’ 제1편 2장 2절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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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때 임시정부 구성에 있어서 대종교인으로는 법무총장 이시영과 군무차장 조성환이 선출되었으며, 상해에서 독립운동의 기반을 구축하여 온 지도자 신규식·박은식은 국무원에 들지 않았는데, 이것은 각지에 있는 국민의 신임받는 지도자들을 널리 정부에 포섭한다는 대국적 견지에서 아량을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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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해 9월, 상해와 국내 및 노령 방면에서 조직되었던 3개의 정부를 단일 정부로 개조하기로 하고, 국내에서 다수 민의에 의하여 구성된 것으로 보여지는 정부 조직을 그대로 따르기로 한 결과는 7부 총장 중에서 내무총장에 이동녕·재무총장 이시영·법무총장 신규식의 대종교인 총장 3인이 시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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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한민국 3년(서기 1921)에 신규식은 다시 국무총리 대리겸 외무총장으로 광동(廣東)의 혁명정부를 방문하여 한·중 외교 관계를 확립하였으며, 백암 박은식은 독립운동사 편찬과 대종교 서도 본사 운영의 책임을 지고 민족의 역사 보존, 정신 사상 앙양에 주력하다가 탄핵된 이승만에 이어
2대 대통령에 선임되어, 말썽많은 대통령 중심제의 헌법을 국무령제 헌법으로 개정하도록 추진하여, 중지를 모아 정부를 운영하는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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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시 정부의 27년사, 이것은 고난과 역경의 역사였다. 민족자결주의, 3·1 독립선언 등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성립되기는 하였지만, 이역 만리에서 외로이 선 임시정부라 국내 국외에서의 연락의 길이 어려우니, 국민들의 뒷바침이 여의할 수 없었다. 여기에 강대국들의 지원은 예상과 다르게 냉담하고, 일제의 침략세력은 무력과 외교로 날마다 기세를 더해가니, 당초의 기대와는 크게 어긋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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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가난한 집안에 싸움이 잦다”는 속담도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여의하게 되지 않으니, 내부의 분열파쟁이 생기고, 소위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파괴세력까지 곁들여 임시정부를 헐뜯고 들쑤시어 무너뜨리는 공작을 하니 4년이 지나는 동안에 임시정부는 벌써 만신창이가 되고, 정청(政廳)은 점점 쓸쓸하여 갔다. 국무위원의 한 사람인 백범 김구의 아래와 같은 회고담은 당시의 실정을 여실히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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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람이라고는 프랑스 순포(巡捕)가 왜(倭) 경관을 대동하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밀린 집세 채근을 오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한창 적에는 천여 명이나 되던 독립운동자가 이제는 수십 명도 못되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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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독립운동자가 죽었을까? 첫째로는 임시정부의 군무 차장 김희선, 독립신문 사장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 같은 무리는 친일로 변절했고 둘째로는 국내 각 도, 각 군, 각 면에 조직하였던 연통제가 발각되어 많은 동지가 왜에게 잡혔고, 세째로는 생활난으로 하여 각각 흩어져 밥벌이를 하게 된 때문이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지은 ≪백범일지(白凡逸志)≫ 하권 3·1운동의 상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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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근심스러운 일이요, 한심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공적인 큰일보다도 우선 사생활을 생각하는 것, 의로운 고난의 생활에 지치고 그만 일선의 안일과 영리로 마음이 기울기 쉬운 것은 범인의 상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엄동 설한에도 독야청청하는 송죽의 점개를 기리고, 거센 풍파 중에서는 백철불기, 칠전팔기하는 정신 기개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분개·정신·기개가 한 세상을 옳은 길로 인도하고, 인류의 역사를 길이 빛낼 수도 있는 것이다. 역경과 불운의 임시정부를 27년간이나 이끌어 나가며 꾸준히 조국의 독립을 위하며 분투 노력하던 지도자들의 그 정신, 그 기개, 그 업적은 두고두고 높이 평가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특히 이러한 임시정부의 장기 투쟁에는 대종교인들의 백절불구의 정신이 크게 이바지하였다는 점을 간과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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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홍암 나철 대종사가남긴 노래 중광가(重光歌) 중의,
대종인(大徐人) 머리 머리
한배검 함께 이고,
한결같이 환한 빛
어디간들 변할가.
검은데 검지말고
붉은데 붉지 마라,
강한데 굴복말고
악한데 물 젖을라.
(무원 김교헌 엮은 ≪홍암신형조천기≫ 중 ‘중광가’ 54장.) 의 내용과도 같이, 한결같이 한배검 즉 단군 천조를 받들고 앞 길의 광명을 향해 나가면서 변함없이 굴함없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나라와 겨레의 독립과 자유 쟁취를 위하여 꾸준한 노력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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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창설기인 1대, 2대 각료 외에도 대한민국 4년의 3대 각료부터 해방을 맞이하는 서기 1945년 8월까지의 15차의 조각에서 대통령·국무총리 이하 대종교인이 입각한 연 인원수는 37인이나 되며, 그 중 백암 박은식은 비록 단기간이지만 국무총리와 대통령으로 있었고, 석오 이동녕은 몇차례 걸쳐 수석 국무위원으로 있었으며, 대한민국 임시 의정원의 제1대 의장으로 임시헌법을 의회에서 통과, 임시정부의 산파역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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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이시영은 일찌기 남만주에서 신흥 무관학교 창설, 군정부 조직을 위한 공로도 컸지만 임시정부 창설 후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재무총장(부장)을 역임하면서 군색한 임시정부 재정 운영에 심력을 기울였으며, 우천 조완구는 임시정부 내정운영에 기여한 공도 컸지만 이시영·이동녕 등 지도자들과 함께 민족정당 한국독립당 창건 운영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김용국의 대종교와 독립운동, [노산 이은상 박사 고희기념논문집민족문화 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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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 박찬익은 만주 지역에서도 대종교의 포교 및 독립군 활동, 거류민 생활 보장을 위하여 중국 당국과의 외교 관계를 도맡아 하였지만 임시정부에 있어서도, 중요한 시기의 대중 외교관계를 언제나 앞장서서 해결하여 한·중 간 친선 협력에 유감이 없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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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 조성환은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창설될 때부터 실무직인 군무차장의 직을 맡아 군사관계에 기여하고, 후에도 여러번 군무총장 등의 직책으로 독립군 전투를 위한 계획을 세웠으며, 제14,15대 내각 때에는 광복군 사령부의 창설 운영을 위한 계획을 주관하여 독립전쟁 준비를 서두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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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7대의 국무위원 몽호 황학수는 일찌기 남만 방면에서 서로군정서의 참모장으로 활약한 바도 있었지만 일제의 만주 침략과 함께 이청천·조경한 등과 함께 한중 연합군을 판성하여 최후의 항전을 하였으며, 이범석등과 함께 관내로 이동하며 임시정부 군사기관에 참가하고 중경에 광복군 총사령부가 설치될 무렵에는 서안 특파원 또는 부관처장등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범석은 광복군 총사령부의 참모장으로 또는 제2지대장으로 본토 수복 작전을 위하여 최후까지 분투 노력하였다.
(애국동지원호회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제2편 만주운동 중 4장 2절. 제3편 해외 운동 중 3장 한국 광복군조 및 김승학(金承學) 지은 ≪학국독립사 부록 의열사 및 독립운동자약전≫ 황학수(黃學秀)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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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희산 김승학은 독립신문 사장으로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을 다년간 운영하여 국내외에 대한 선전활동에 크게 기여하였음은 물론 후에 다시 임시정부의 특파로 남만주 지역에 나가, 육군주만 참의부의 참의장으로 독립운동을 영도하였다.
윤세복·김호익·이현익 등은 처음 백두산 서남쪽 무송현에서 흥업단을 조직하여 산업 진흥, 무력 충실에 힘쓰며 화룡현의 대종교 총본사, 왕청현의 북로군정서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왔는데 다시 흥업단을 군비단·태극단·광복단 등 단체와 통합하여 광정단을 조직하였다. 이 광정단은 무송, 장백, 안도,임강현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우세한 항일 전투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압록강 상류를 건너 자주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하였는데, 1924년 겨울에는 다시 통의부등 여러 단체와 통합하여 정의부로 출발함에 따라 대종교 정신으로 단결된 광정단의 독립군 부대는 다시 정의부의 의용대로 항일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애국동지원호회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제2편 ‘남만주의 운동’ 제3장 5절. 제3편 ‘해외 운동 중 상해의 운동 제4편 및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엮은 ≪독립군전투사≫ 상권, 제2편 4장 2절 및 9장 3절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