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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의 몰락 / 시험, 곧 전쟁에는
정복하는 이들 편에 항상 패배의 외관이 있다.
블레셋에 의한 사울과 이스라엘의 패배는
영의 패배와 죽음이 아닌 육의 패배와 죽음을 뜻한다.
이스라엘의 세 왕 중에서 윌리암 브루스 지음
/배제형 옮김/스베덴보리 관련서적
삼상 31장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골짜기 저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 쪽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에서 사니라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 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짧지만 얼마나 의미심장한 내용이 설명되고 있는지!
전쟁과 패전이 하나의 짧고도 평범한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전쟁 자체로나 그 결과로 보나
절대 평범한 전투는 아니었다.
실제로 이 전투가 이스라엘 왕국의 운명에 관계된 것은 아니지만
그 왕국의 첫 왕의 운명을 결정지었고
동시에 그 왕과 백성이 주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들의 여건과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준 전투였다.
전쟁 자체는 이스라엘을 비난할 원인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 패배는 백성들이 타락했다는 표시가 되었다.
.. 우리가 첫 원리를 그르칠 때 이어지는 모든 단계는
올바른 길과 진정한 목적으로부터 우리를 더 멀어지게 만든다.
목적이 악하면 그것에 동원되는 수단은 속임수이고
우리의 행동은 죄다.
그러면 우리를 ‘통치하는 사랑’(The ruling love, 주도애 主導愛)은
더 낮은 수준의 모든 애정 안으로 들어가 거기
그 사랑 자신의 본성에 맞는 품성과 결정력을 주게 되고
심지어 성품이 본질적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까지 지배한다.
이 원리를 따라 사울의 운명을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것이 역사의 주된 목적이다.
(In accordance with this principle the main object of the history
is to tell us of the fate of Saul.
이런 원리와 꼭 맞아 떨어지는 게 사울의 역사이고
그의 운명은 우리에게 위의 원리를 나열해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 군대에 쫓겨 도망치자
블레셋군은 겁에 질린 졸병보다는 거물급에 목표를 집중시켰다.
“블레셋군은 계속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세 아들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를 죽였다.
전세가 이미 다 기울어진 판에
사울마저 적의 화살에 맞아 부상당하고 말았다.
사울은 자기의 무기당번에게 일렀다.
‘저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에게 붙잡혀 욕을 당할 수는 없다.
차라리 네가 칼을 뽑아 나를 찔러라’
그러나 무기당번은 심히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사울이 칼을 가지고 그 위에 엎드러졌다.
그의 무기당번은 사울의 죽은 것을 보고
그와 같이 그도 칼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었다.
이에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그의 병기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들이 당일에 함께 죽었다.”
어떤 큰 사건도 이 전투의 결과만큼 큰 것은 없을는지 모른다.
제아무리 황폐해진다 해도 이 패배만큼 처절할 수 없다.
아마 이 사건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여겨지는 성경의 사건이라면
그것은 하느님의 궤가 옮겨지면서 엘리의 두 아들이 살해되고
엘리 마저 의자에서 넘어져 죽는 사건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군대는 비록 패배했어도 전멸 당하지는 않았다.
이 두 경우는 다른 유사점을 제공한다.
엘리의 죄가 한 재앙의 원인이 되었다면
사울의 죄도 또 다른 재앙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 그 계승자는
합법적이지만 불미스러운(unworthy) 전임자가 살아있는 동안에
신성하게 임명되었고 통치자 자신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양육되었는데
사무엘은 엘리에게서, 그리고 다윗은 사울에게서 양육되었다.
두 상황 모두 동일한 일반적인 교훈을 가르치며
다만 판관과 왕이라는 표징적 성품으로서만 다를 뿐이다.
영적 의미와 실제적 교훈을 배울 의도에서
이 역사를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사울 자신에 관한 이 큰 재앙에 대해
너무 지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 다윗을 향한 사울의 행동에서
그는 자연적 인간의 성품을 드러냈다.
그의 호의와 반감은 원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변덕에 근거하며
그리고 다른 이들에 대한 그의 부드러움과 안도함은
그들이 본질상 어떤 자인지에 따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와 어떤 관계에 있는 자인지에 따라 평가된다.
(.. and whose tenderness and security are measured to others,
not according to what they are in themselves,
but according to what they are in relation to him.)
“너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네게 무슨 보상이 있을까?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마 5:46)
종교적 윤리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통치 후기에 행한 사울의 행동은
거의 악마적인 성품을 암시하고 있다.
잔인하고 저속한 모든 열정의 부모격인 ‘자아 사랑’의 본성이
다윗을 향한 그의 행동에서 무섭게 드러내지고
그의 성품은 그에 대한 다윗의 행위와 대조됨으로써 더욱 추악해진다.
그것에 대해 우리는 다윗보다 더 참을성 있는 인내와
너그러운 관용과 용서의 예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앞서 암시한 바와 같이
우리는 사울을 정상적인 기준으로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그를 완전히 건전한 마음의 소유자로 여길 수 없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나
오랜 직무 경력 동안 그는 악마에 홀려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행동은 더 인상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남기는데
그것은 자연적 인간의 본질적 특성과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자연적 마음의 본질적 특성이 어떠한지를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완벽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사울의 경험을 통해서도 우리는
죄가 가져오는 비참함과 가엾음을 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하느님을 저버린 결과가 어떠한지,
우리의 병든 상상력이 죽은 영혼들과의 개인적인 접촉 통해
알고 싶은 것을 구한 결과가 어떠한지를 본다.
그러나 사울 개인의 행동을 들여다보는 것도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만
이 경우에는 그의 마지막 전투와 그의 생을 마감하는 장면에 관한
그의 표징적 품성을 주목하는 것이 훨씬 더 유용하다.
아니, 그것은 주님이
놀라운 겸손하심 안에서 타락한(fallen) 어머니로부터 취하신
자연적인 마음의 성질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울의 품성은
만일 우리가 동일한 영적 영향을 받는다고 가정할 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울을 우리에게 쥐어준다.
이러한 사건과 상황이 가르치는 영적 교훈을 고려할 때
우리가 중요하게, 또 어떤 면으로는 유일하게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람과 그의 행동의 표징적 품성이다.
사울에게 부여된 역할 그 자체는 거룩했고
표징적으로는 신적이고 영적이었다.
이 역할이 사람에게 부여되었지만 그와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주님의 기름 부은 자로서 거듭나는 인간을 표징하고
나아가 육체 안에 계신 주님까지 표징할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사울 개인의 품성에 있어서는
위 두 가지 어느 것에도 부합되지 않았다.
다윗은 사울에 관해 이 차이를 분명히 했다.
그는 자신을 핍박한 자로서의 사울은 죄 있게 여겼을지라도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사울은 거룩하게 여겼다.
(David clearly made this distinction in regard to him.
As his persecutor, David held him guilty of sin
as the Lord's anointed he held his person sacred.)
블레셋 사람과 그 외 다른 민족들이 사울과 싸웠고,
사울도 그들과 싸웠지만
사울은 개인으로 싸운 것이 아니라 공적인 성격으로 그들과 싸웠다.
즉 그는 적들이 정복하기를 원하는 그의 왕국을 지키려고 싸웠다.
그러므로 그들의 전쟁은
주님과 주님의 왕국을 위하거나 적대하는 전쟁,
곧 영적 전쟁을 표징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을 상대로 싸운 자들이 표징한 영적 전쟁이
주님 개인을 상대하여 싸운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한 때는 개인적인 전쟁이 그분을 대항해 수행될 수 있었다.
주님이 육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분은 개인으로 공격당하실 수 있었다.
(Personal warfare could only be carried on against Him once.
Only when manifested in the flesh
could the Lord be assaulted in person;)
그리고 그 때도 주로 그분 자신과 그분의 왕국의 원수들에 의해,
곧 마귀와 사탄이라고 불리는 어둠의 영들에 의해
공격당하실 수 있으셨으나 이 모든 전쟁에서 주님은 정복자셨다.
그렇다면 사울과 블레셋 사람들의 이 마지막 전투에서 보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패하고
사울 자신이 죽임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는
그분의 투쟁 중 무엇이, 어떻게 표징될 수 있을까?
시험, 곧 전쟁에는 정복하는 이들 편에 항상 패배의 외관이 있다.
주님의 마지막이자 가장 격렬한 시험인 십자가의 고난은
이러한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분의 죽음은 어둠의 영들에게는 그들 능력의 승리로 여겨졌다.
즉 그들은 마침내 그분을 이긴 것이다.
그러나 부활 아침에
그분이 죽음의 사슬을 끊으시고
모든 권세를 가진 영화된 인성으로 일어나셨을 때
그들의 외관상 승리는 압도적인 패배로 바뀌었고
그들 자신은 영원한 복종 속에 놓이게 되었다.
비록 이 한 예에서 볼 수 있었지만
모든 시험은 이것과 동일한 외관과 실재를 가진다.
모든 시험이 극에 달하면 절망이 뒤따른다.
시험당하는 자에게는 절망이 승리이지만
시험하는 자에게는 외관상의 승리일 뿐이다.
또한 모든 시험에는 죽음과 부활이 뒤따른다.
옛 사람에 속한 것이 죽고 새 사람에 속한 것이 살아난다.
옛 사람의 죽음은 악령에 의해 결과 되고
이것은 그들의 외견상의 승리다.
그리고 새 사람의 부활은
천사에 의해, 또는 천사를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결과 되고
이것은 악령들의 실제적인 패배다.
따라서 악령들은
‘통치하는 사랑’(ruling love)이라는 전체적 측면에서나
애정과 욕망이라는 세부적 측면 모두에서
옛 사람의 죽음을 가져오게 하는 매개체로 허용된다.
즉 악령들 역시 그들의 죽은 자를 매장하는 죽은 자이고
반면 새 사람은 “너는 나를 따르라”는 신성한 명령에 순종한다.
(마태 8: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죽음, 이스라엘 군대의 패전 등을
주님의 영화하심, 인간의 거듭남에 관련시켜 이해해 볼 때
그것은 영의 패배와 죽음이 아니라 육의 패배와 죽음을 뜻한다.
우리와 관련해서 사도들은 이를 두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
곧 육의 죄를 벗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사울의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가 유추하는 이러한 것을
깨뜨리는 듯 보이는 특별한 것 하나가 있다.
사울은 적이 자기를 죽이는 것을 허용치 않고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끊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부분에서의 사울은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관해 선포하신 진리와 관련하여
주님을 표징한 것으로 큰 경외심을 가지고 생각해볼 수 있다.
(Yet in this he may, with all reverence,
be considered to have represented the Lord,
in regard to a truth which He declared respecting His own death.)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이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한 10:15,18).
‘가장 깊은 의미에서 말씀은 주님만을 취급한다.
그리고 이 의미 안에는 그분의 인성의 영화하심,
또는 인성이 신성과 합일됨에 관한 모든 상태가 설명되어 있고
그리고 지옥정복과 관련된 모든 상태와 지옥에 있는
모든 것 뿐 아니라 천국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질서에로
환원하신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군대의 전멸, 그리고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죽음이
가장 깊은 의미에 있어서
어둠의 권세와 투쟁하는 주님, 그들에 대한 그분의 승리,
그리고 그분의 인성의 영화와 관계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마지막 큰 시험이 있기 직전 주님 삶의 역사 속에는
사울 군대의 도주, 그리고 사울 자신의 죽음과 유사한 것이 있다.
예수께서 대제사장들이 보낸 무리들에게 잡혔을 때
모든 제자들이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다.
주님의 작은 무리가 도망친 것은 사울의 큰 군대가 도망친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분께 복종당하지 않으려고 전력을 다했던 악령들은
틀림없이 자신들의 성공을 기뻐했을 것이다.
그 중요한 순간 주님의 제자들이 도망쳤을 때
주님 자신은 피할 방도를 구하지 않고 저항도 않고
자신을 적들의 손에 내맡기셨다.
자신의 생명을 구해낼 수 있는 사람이
분명 죽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 그것에 자신을 내어줌으로
자발적으로 생명을 버렸다면 이는 자기희생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표징적인 민족의 역사 안에서
비록 사람으로서는 불완전하지만 주께서 성별한 자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아를 상징한 사람의
마지막 행동으로 특징지어진 모습이 아닐까?
또 하나 기억해둘 게 있다.
시험받고 죽는 것은
주님의 인성 안에 있는 ‘신성에 속한 진리’(truth Divine)라는 것이다.
‘신성에 속한 진리’는 사람의 아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천사나 인간의 이해력에 납득되도록 유한하게 된
‘신성한 진리’(Divine truth)이고,
이 ‘신성한 진리’를, 영적이고 신적인 것에 관한
그들의 사고나 감정의 상태로까지
내려오게 하는 외관들로 옷 입혀진 진리다.
(This is Divine truth finited and accommodated to the apprehension
of angels and men, truth clothed with the appearances
that bring it down to their states of thinking and even of feeling
respecting things spiritual and Divine.)
그러므로 주님은 신약성서에서
그분 개인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곳 어디서든
그분은 항상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로서 언급하신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수단으로
주님은 말씀으로서의 그분 자신에 관해 언급하신다.
그리고 주님 개인이 시험당하시거나 죽음에 놓일 수 없게 된 지금은
육체로 계실 당시 그분에게 가해지고 그분을 고통스럽게 한 모든 것이
오직 그분의 말씀과 진리의 성경, 그분의 교회와 백성에게
행해질 수 있을 뿐이다.
또 인간 본성으로 옷 입혀진 영원한 말씀으로서의 주님과
인간의 언어로 옷 입혀진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주님
사이에는 상응이 있다.
주님이 입으신 인간 본성은
인간의 모든 유전적인 결함을 가졌다.
그리고 계시된 말씀이 인간에게 내려오면서 취한 언어는
타락한 인간의 이해력에 맞추어진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기독인들도
과거 유대인들이 주님 자신을 대했던 것처럼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취급하는 것이 가능하다.
기독인들은 진리를 부정하고 반대할 수 있다.
그들은 마치 유대인들이 주님을 부정하고 반대했던 것처럼
그렇게 할 수 있고 심지어 유대인들이 주님을 죽인 것처럼
진리를 파괴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 손으로 다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욕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히브리서 6:6)
이를 근거로 우리는 성경에서 주님이 받으신 대접이
구약의 기록대로 그분을 표징한 이들이 받은 것이든지,
또는 신약의 기록대로 그분 자신이 직접 받은 것이든지 간에
이는 말씀이 가르치는 선함과 진리의 원리에 반대되는 이들과
말씀이 정죄하는 악하고 거짓된 원리 안에 있는 이들로부터
말씀이 받는 대접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상응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에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그분의 교회에도 관계되는 것으로 더욱 확장된다.
그 이유로 교회는
주님의 신비로운 몸, 그분 자신의 영광스러운 몸의 형상이고
그분의 말씀 속의 진리로 형성되어 떠받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신실한 자들의 전반적인 몸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만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신실한 자들이
일괄적으로 시인할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믿는
선함과 진리의 원리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But the Church is not to be regarded only as consisting
of the general body of the faithful.
It consists essentially of the principles of goodness and truth,
which the faithful individually believe as well as collectively acknowledge.)
그러므로 (상응을 가지는 대상에 대한)유추와 관계의 연결고리는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해
천국과 지상에 있는 그분의 교회로 내려오고,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가장 낮은 그분의 제자들에게까지 내려온다.
(Thus the chain of analogy and connection descends from the Lord,
through His Word, to His Church, both in heaven and on earth,
thus from the Lord to the least of His disciples.)
그러므로 하나에 관련된 것은 모든 것에 관련되고,
그것의 첫 원인에서 마지막 결과에 이르기까지 내려오는 단계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곳에 따라 각기 다르다.
(What relates to one, therefore, relates to all,
differing in regard to each according to the place it occupies
in the descending scale, from its first cause to its last effect.)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대부분 자연계에 속한 것과 같은
진리의 외관(가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런 외관들은
그들 자신의 교정 수단을 자체 안에 가지고 있다.
외관적 진리들은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일 안에서
실제 진리들이 발견되거나 밝히 알려졌을 때
어느 경우든지 실제 진리에 대한 그들 자신의 타고난 모순에 의해
그들이 외관이라는 것이 입증될 수 있다.
(Apparent truths can be proved to be appearances
by their own inherent contrariety to real truth,
both in the works and in the Word of God, when the real truth has,
in any instance, been discovered or revealed.)
말씀의 외관적 진리들이
어떤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적 의미는
외관적 진리들이 담고 있는 영(soul) 또는 생명이고
글자의 의미가 죽을 때 영적 의미는 살아남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성경의 모든 글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외관적 진리들에 한해서만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글자적 의미는 외관적 진리들 뿐 아니라
실제 진리들로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실제 진리는 글자에서도, 영에서도 진실한바
언제나 불변하고 영원하다.
외관적 진리는 영에서는 진실하지만 글자에서는 진실이 아니고
따라서 변할 수 있으며 일시적이다.
주님은 누구에게나 선하시고 그분의 온유한 자비는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넘쳐나고 있다는 것은
글자에서도, 영에서도 진실하다.
반면 주님은 날마다 사악한 자들에게 노하신다는 것은
영에서는 진실하지만 글자에서는 진실하지 않다.
이 경우 영은 글자에 반대된다.
왜냐하면 비록 주님의 사랑이
그분의 본성에 반대되는 자들의 상태로 인해
심지어 그들에게 분노와 증오처럼 보일지라도
주님의 자비는
사악한 자들에게까지, 그들 삶의 모든 상태로
확장되는 것이 영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for the spiritual sense is, that the mercy of the Lord is extended
even to the wicked, in every state of their life, although,
from their state of contrariety to the Lord's nature,
His love appears to them as anger and even as hatred.)
그러므로 글자적 의미가 죽어야 영적 의미가 살아날 수 있다.
실제로 단어들이 담고 있는 유일한 실제 진리인
영적 의미가 발견되고 밝히 알려질 때
글자적 의미는 마치 저 스스로 자결하듯 죽는다.
순수하고 영적인 의미 안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은
외관적 진리가 그 위에 엎드러져 죽는 칼이다.
(The literal sense must therefore die that the spiritual may live.
Indeed, when the spiritual sense, which is the only real truth
which the words contain, is discovered or revealed,
the literal dies as it were by its own hand.
The sword of the Spirit, which is the Word of God in its genuine
and spiritual sense, is that on which apparent truth falls.)
이것은 일반적으로 특히 말씀 전체와 각 부분에서 그러하다.
성경의 어느 부분에 대한 순수하고 영적인 의미가 알려지면
그것의(영적 의미가 알려진 진리의) 외관적 진리는
자연적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타격에(violence)의해 사라진다.
외관적 진리들은 그들이 자연계에 존속하듯
실제로 성경에도 여전히 존속하지만
(Apparent truths, indeed, still remain in Scripture,
as they remain in nature,)
더 이상 실제 진리들로 간주되지 않고
또 교리의 기초나 삶의 지침이 되지도 않는다.
(참고 : 말씀의 글자적 의미는
대부분 자연계에 속한 것과 같은 진리의 외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런 외관들은
그들 자신의 교정 수단을 자체 안에 가지고 있다.
외관적 진리들은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일 안에서
실제 진리들이 발견되거나 밝히 알려졌을 때 어느 경우든지
실제 진리에 대한 그들 자신의 타고난 모순에 의해
그들이 외관이라는 것이 입증될 수 있다.)
게다가 블레셋 사람들은 적어도 반대편 사람들의 신앙을
파괴할 정도로 그것들을(외관적 진리들을) 학대할 수는 없다.
그들은 생명 없는 몸을 움켜쥐고 모욕할 수 있겠지만
영만큼은 모욕도, 학대도 할 수 없다.
(Moreover, the philistines cannot abuse them,
at least to the destruction of the faith of others.
They may seize the lifeless body and subject it to indignity,
but the spirit they cannot insult and abuse.)
(참고 : 블레셋이 사울의 몸에 가한
모욕과 목 베기와 일종의 십자가형은 유대인이든 기독인이든
영적 블레셋에 의해 진리에 가해진 모독을 표현한다.
그리고 한분 인물 안에 진리로서 계신 주님과 계시된 진리로서의
그분의 말씀에 가해진 모독까지 표현한다.
주님의 말씀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의 연결을 파괴하는 것,
결국 종교 자체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연결을 파괴한다면
이것은 기름부은 자, 사울의 목을 잘라 그의 머리와 몸을
분리시키는 것과 같다.
악의 공격에 선을 방어해주는 진리를 말씀에서 제거한다면
그것은 영적 블레셋이 사울의 갑옷을 벗기는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관점은
우리가 지금 고려하려는 역사의 세부적인 것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을 피해 달아나다가
길보아 산에서 쓰러져 죽었다.
길보아는 샘(fountain)을 의미하고 과거에 샘이었다.
길보아는 이즈르엘 골짜기 근처에 있었는데
이스라엘 군대가 집결한 성읍과
이스라엘 군대가 부상당해 쓰러진 산에 그 이름이 붙여졌고
거기서 사울의 아들들도 살해되고 사울 자신도 자결해 버렸다.
길보아산은 영적인 생명이고 영원한 생명인
영적 사랑을 상징한다.
그러나 길보아산은 적어도 한동안 자연적 사랑을 상징하게 된다.
이 자연적 사랑이 통치하면
그것은 영적인 죽음이고 영원한 죽음이다.
가장 좋은 것도 더럽혀지면 가장 나쁜 것이 되어 버린다.
이와 같이 최상의 의미도 반대되는 법칙에 의하면
최악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시온은 구세주의 오심을 선포하도록
높은 산으로 오르라는 명령을 받았다(이사야 40:9).
그러나 그분이 오셨을 때 악마는 그분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그분을 시험했다.(누가복음 4:5).
그리고 시내 산에서는 율법이 선포되었으나
갈보리 산에서는 모독되어졌다.
이런 구절의 예를 보면
산은 하느님을 사랑함이 라는 거룩한 원리를 상징하지만
자아를 사랑함이라는 부정한 원리도 상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을 우리는 말씀의 많은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를 쫒는 자, 하늘의 독수리보다 빨라 산등성이에서
끈질기게 따라오고..” (예레미야 애가 4:19)
“나는 너의 살코기를 산에 내다 버리고 네 시체로 골짜기를 채우리라”
(에제키엘 32:5)
“네 군대는 다시 모을 길 없이 이 산, 저 산에서 흩어졌도다.”
(나훔서 3:18)
우리 앞에 있는 역사의 표징처럼
교회의 진리가 세상의 오류 앞에서 도망칠 때,
또는 종교의 원리나 진실한 개념들이 거짓된 것 앞에서 물러날 때,
생명에 관계된 것들은 끝을 보게 되는데
진실한 것의 종착지는 선이고 거짓의 종착지는 악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군대를 도망치도록 놓아둔 채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해 따라 잡아 세 아들을 죽였다.
그리고 사울은 설사 그가 자결하지 않았더라도
필시 블레셋의 칼에 죽었을 것이다.
우리는 사울과 그의 아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체에 대한 세 구성요소를 표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사울은 통치하는 원리 자체,
아들들은 원리 자체가 지배하는 수단이 되는 주요 원리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에 지배받는 일반적(common) 원리들이다.
일반적 원리들은
더 높은 원리가 안주하는 기초를 형성하고 받쳐준다.
따라서 일반적 원리들이 무너지면 다른 모든 원리들도 파멸된다.
말씀과 관련하여, 글자 속의 일반적 진리들은
모든 가장 높은 진리들의 기초를 이루고
더불어 그들 안에는 신성한 진리가 충만과 권능으로 안주한다.
교회와 관련하여, 생활과 예배에 관한 일반적 원리들은
믿음과 사랑에 속한 더 높은 원리들의 기초를 이룬다.
사람과 관련하여,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은
그의 생각과 애정의 기초를 이룬다.
이 모든 것에서 기초를 이루는 것은 더 높은 원리들을 떠받친다.
따라서 기초가 무너지면 다른 것들도 필히 멸해지고 만다.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망치고 사울의 아들들은 살해되고
사울 자신도 죽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글자 그대로의 사실과 영적인 진리를
동시에 표현하는 영감된 기록의 힘과 중요성을 알게 된다.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삼상 31:3,6)
이것은 과거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한 예언적인 축복과
비슷한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요셉은 열매가 주렁주렁한 가지, 샘가에 늘어진,
열매가 주렁주렁한 가지, 담장 너머 뻗어가는 가지라.
그 원수들이 무섭게 그를 공격하며 활을 쏘고 추적하지만
오히려 그의 활이 견고하고 그의 팔에 힘이 있으니
이스라엘의 반석이시며 목자가 되시는
야곱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다.” (창세기 49:22-24)
사울에 관한 것이 주님에 대한 표징이듯
이것은 주님에 대한 예언이다.
그러나 요셉은, 사울이 주님 인성의 자연적 부분을 표징 했듯이
주님 인성의 영적 부분을 표징 했다.
거듭나는 인간에게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요셉을 쏜 사수(archer)란
영적인 교회의 구성원들을 적대하는 이들을 뜻한다.
그 이유는 사수는 영적 인간을 뜻하고 활은 교리를,
화살은 교리에 속하는 것들을 뜻하고
따라서 교리 속의 진리는 진리 안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고,
교리 속의 거짓은 거짓 안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요셉과 사울 모두
화살을 받음으로 활 쏘는 자 때문에 심하게 힘들어했지만
둘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다.
즉, 요셉의 활은 강했는데 그 이유는
야곱의 전능하신 하느님의 손에 의해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울의 활은 강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손은 야곱의 전능하신 분의 손에 의해
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는
사울로부터가 아니라 다윗으로부터 왔고
육을 입으시기 전 천국에 있는 주님의 인성으로부터가 아니라
이 땅에 육을 입으신 인성으로부터 왔으며
또 ‘신성에 속한 진리’(truth Divine)로부터가 아니라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로부터
양의 목자, 그리고 성전의 기초와 모퉁이돌이 되셨다.
어머니 쪽의 유한한 것을 벗으시고
아버지 쪽의 무한한 것을 입으신 것이다.
<참고 : ‘이스라엘의 첫 세 왕/이스라엘이 왕을 바라다’에서..
.. 스베덴보리의 저작 속에서
‘신성에 속한 진리’(truth Divine, God' truth)는 때때로
본질에 있어서 신성인 진리(which is in itself Divine)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신성으로부터 비롯된 진리’(the truth from Divine)로 불려졌다.
내가 말하는 것은
신성 안에 있는 것(which is in the Divine)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본질에 있어서 신성 안에 있는 진리가 아니라
‘신성으로부터 비롯된 진리’, 즉 신성 안으로부터 나와
높이 천국 안에 들어온 진리를 말함인데
이 진리는 무한의 신성한 진리가
유한의 천사와 인간의 마음 안에 수용될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진리다.)
왜냐하면 최대한의 납득력(comprehensive sense)에 있어서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는 본질에 있어서 신성인 진리 전체를
포함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신성한 진리는
주님 자신 안에 있는 진리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한의 마음과 가장 높은 유한의 마음들 사이에 있게 되는
모든 등차나 영역 안에 존재하는 모든 진리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이 진리를 수단으로 해서 무한의 신성한 진리가
천사나 인간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데 적합해지도록 만드는
그런 진리까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신성으로부터 비롯된 진리, 즉 천국에 있는 신성한 진리는
육을 입으시기 전의 주님의 인성을 구성했다.
주님의 신성한 진리가
천사들의 마음 안으로 흘러들 때
그 진리는(신성으로부터 비롯된 진리, 즉 천국에 있는 신성한 진리는)
그들의 의지와 이해성 안에서 인간 형체를 취했고
이러한 인성을 통해
주님께서는 강림하시기 전까지 인류에 작용하셨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지상의 인간에게 나타나실 때면 언제든지
그 나타남은 천사라는 인물 안에서였다.
(in the person of an angel)
그러나 주님과 인간 사이의 (이러한)매개체를 통해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인간의 마음 안으로 흘러들었지만
많은 세월이 경과하면서 인류가 천국에서 멀어지자
(주님이 늘 나타나시던) 그분의 천사적 인성(His angelic humanity)에
의한 방법도 그만큼 효력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은
처녀의 자궁 안에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셨고
그렇게 해서 그분의 인성을
하나의 독립된 존재(a separate essence)로 만드시고
그 존재를 영화시키시어
그분 고유의 무한하고 영원한 신성과 하나 되도록
들어 세우셨던 것이다.
그 결과 주님께서는
천국에 존재했던 것 외에 그 이상으로
(above and besides that which existed in heaven)
구원의 매개체를 마련해주셨고
영화하신 인성 측면에서 그분 자신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 만드셨던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빛은
아직도 천국을 통해 인간 안으로 오고 있다.
그러나 이 매개체적인 유입(influx)외에
지금은 주님 자신의 인성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유입까지 있다.
이를 수단으로 인간 마음은
내면적으로 영향을 받아 계발될 수 있고
따라서 내면적으로 거듭나질 수 있게 되어 있다.
특별한 의미에서
신성으로부터 비롯된 진리를 표징하는 사울은
육을 입으시기 전 천국 안에 있는 주님의 인성을 표징했고
신성한 진리를 표징하는 다윗은
육으로 나타나신 후의 주님의 인성을 표징했다..>
사울이 죽는 이 비극적인 전투에서
언급 하지 않고 지나칠 수 없는 특색 있는 전사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사울의 무기당번으로
칼로 찔러달라는 상전의 명령을 거절하고
사울의 뒤를 따라 그와 함께 죽었다.
전사에게 있어서 무기당번이란
주인과 종, 또 군주와 대신의 관계와 같다.
그의 경우 유일한 특이점은
그가 전쟁장비에 관하여 일하고 섬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기당번과 그의 상전의 관계는
진리와 선함과의 관계,
또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와도 같다.
진리는 선을 섬기고,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을 위해 일하고 섬긴다.
사울이 자연적인 마음을 표징하기 때문에
사울과 그의 무기당번은
자연적 마음의 내면과 외면에 해당된다.
자연적 마음의 내면은 우리의 수단들의 근원지로
외면이 도구에 해당된다면 내면은 그 주인 격이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완전한 일치에 있을 때
그들은 하나로 행동한다.
일치 않을 경우 외적 인 것은 내적인 것의 요구에 항상,
그리고 즉각적으로 순응하지 않는다.
사울의 무기당번은 칼로 찌르라는 상전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심히 두려워서였고
그것도 제 상전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사울이 자기 칼 위에 엎드려지자
그의 무기당번도 자기 칼 위에 엎어져 죽었다.
내적인 것이 쓰러지면 외적인 것도 쓰러진다.
내적인 것이 죽으면 외적인 것도 그것과 더불어 죽는다.
그리고 이 전투의 또 하나의 비극적인 결과가 이어진다.
“그 곳 골짜기 건너편과 요르단 강 건너편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군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모두 저희의 성읍을 버리고 도망치자
블레셋 사람들이 거기에 와서 살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거주한 성읍은
생명 있는 진리들로 가득 찬 교회의 교리를 표징했다.
이 성읍이 이스라엘 사람에 의해 버려지고
블레셋이 거주한다는 것은
생명 있는 진리가 텅 비고 거짓들로 점령당한
교회의 교리를 표징했다.
위 사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다면
몇 가지 예를 들어 대답할 수 있다.
삼위일체의 교리가 가르쳐질 때,
하느님 안에 세 가지 신성한 본질이 있다고 가르쳐지고 있다면
그 교리는 진리로 가득 차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
신성한 세 분의 인물들(persons)이 있다고 가르쳐진다면
그 교리는 필시 거짓으로 꽉 찬 것이다.
대속의 교리를 가르치되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그분 자신과 화해시켰다는(reconciling) 것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진리를 포함하게 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을 세상과 화해시켰다는 것을 가르치면
그것은 거짓을 포함하게 된다.
부활의 교리를 가르치되
삶이 끝나면 영체(spiritual body)로 일어난다고 가르치면
이 교리는 진리로 차있는 것이지만,
세상 끝에 자연적 몸으로 일어난다고 가르치면
그 교리는 거짓들에 속하게 된다.
믿음의 교리가 진리로 차 있으려면
사랑의 믿음(faith of love)이 구원해준다고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믿음만으로(faith alone) 구원된다고 가르치면
그 교리는 거짓들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본질적인 교회의 성품이 완전히 바뀌었는데도
교회라는 이름은 남아서 존속하는 것,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읍을 버리고 도망치고
블레셋 사람들이 거기에 들어와 사는 것”과 같다.
사울은 자신이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면
그들이 자신에게 해를 가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는데
사울이 죽은 후 블레셋은 그 일을 그에게 행했다.
삼상 31:8-10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고 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블레셋이 사울의 몸에 가한 모욕, 목 베기와 일종의 십자가형은
유대인이나 기독인 어디 속했든지 간에
영적 블레셋에 의해 진리에 가해진 모독을 표현한다.
그것은 한 인물 안에 진리로 계신 주님에게 가해진 모독,
그리고 계시된 진리로서의
그분의 말씀에게 가해진 모독까지 표현한다.
그들은 주님의 기름 부은 자의 머리를 자름으로
그분의 말씀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연결을 파괴했는데
이것은 종교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연결을
그들 스스로 파괴한 결과다.
악의 공격에 대항하여 선을 방어해주는 진리의 말씀을 제거한다면
그것은 영적 블레셋이 사울의 갑옷을 벗기는 것이다.
그리고 거짓 원리의 승리가 참된 원리를 지배하여
그들의 모든 예배와 삶에서 시작할 때
그것은 영적 블레셋이 저희의 우상과 백성에게
그 승리를 선포하는 격이다.
블레셋 군이 사울의 갑옷을
아스다롯 신당에 보관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여신 아스다롯이 달을 표징했다고 믿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성경에서 달은 믿음을 상징하고,
블레셋 사람들에 있어서의 달은 믿음만을 상징하며
달에 대한 우상숭배는 아스다롯에 대한 숭배로 표징되었다.
선함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믿음만의 교리에,
또 아스다롯에 대한 숭배의 불순한 의식이
너무도 명백히 나타나있는 그 믿음만의 교리에
선함을 방어해야 할 진리가 바쳐진다면
그것은 사울의 갑옷이 아스다롯 신당에 있는 셈이다.
블레셋이 사울의 시체를 못 박아 놓은 성벽이 있는 벧산은
과거 므낫세 지파의 상속분이었다.
그러나 그 지파 사람들은 그곳의 가나안족들을 다 몰아내지 못했고
이스라엘 자손이 강해지면서 그들에게 공물을 바치게 했다.
(여호수아 17:11-13, 판관기 1:27)
벧산이란 이름은 쉼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신실한 사람들은 진리에의 순종으로 획득한 선 가운데서
자신이 쉴 집을 발견한다.
그러나 불성실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이라 부르는 악 안에서,
또 진리를 자신들에게 복종하게 만들어 정착한 악 안에서
그들의 쉴 집을 발견한다.
선이 그의 진리가 벗겨지고 능력이 박탈되어
조롱받는 놀림감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사울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 매단 것과 같다.
벧산은 므낫세의 성읍으로서 선을 방어하는 진리를 표징 해왔지만
적어도 삶이 교리 안에 있지 않을 경우
그것은 블레셋의 성읍으로서 악을 방어해주는 거짓을 표징한다.
두 종류의 유신론자가 있다.
선이 의롭게 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양쪽 모두에서지만
악이 정죄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오직 한 쪽 뿐이다.
(Both teach that good does not justify,
but only one teaches that evil does not condemn.)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고
사람이 행하는 선악이 아니다.
따라서 선한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못하듯 악한 행위도
그를 정죄 못한다고 해야 올바르다.
그런데 두 종류의 유신론자는 모두
선이 사람을 의롭게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면서도
악이 정죄하지 못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오직 한 쪽 뿐이다.
그렇다면 교리적으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하면서
삶으로는 악 안에 있다면 그 사람들의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
악 안에 있는 사람들의 믿음이 공개되지 않는 이상
이것은 비밀 속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세상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저 세상에서는 드러날 것이다.
또한 그곳에서는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진리가 보일 것이다.
“당신이 죽은 후 자연적 빛을 벗어나 영적 빛으로 들어갈 때
믿음이 무엇인지, 이타애가 무엇인지 물어보라.
그러면 믿음은 형체로 있는 이타애(charity, 인애)라는 것,
그러므로 이타애는 믿음의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이타애는
마치 애정이 생각의 본질이고 소리가 말의 본질인 것처럼
믿음의 영이고 생명이며 본질인 것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원한다면 소리에서 말이 형성되는 것처럼
사랑에서 믿음이 형성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인데
이는 그들이 상응하기 때문이다.”
비록 사울의 시체가 벧산 성벽에 매달렸지만
거기 그렇게 방치되도록 허용되지는 않았다.
“야베스 길르앗에 살던 사람들은
블레셋군이 사울을 이렇게 해치웠다는 소식을 듣고
용사들이 모두 길을 떠나 밤을 도와 벧산에 이르러
사울 부자의 시체를 그곳 성벽에서 내려다가
야베스로 옮겨 화장한 다음
그 뼈를 야베스에 있는 나무 아래 매장하고 칠 일간 단식하였다.”
야베스 길르앗은 과거 이 성읍이 암몬족에게 공략 당했을 때
사울이 군인다운 용기와 왕권적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첫 장소이다.
그리고 사울에게 아주 출중한 구원을 받은 야베스 사람들은
사울의 망가진 시체와 그의 아들들을 적의 성벽에서 구출하여
그 당시 존경받을만한 장례식에 걸 맞는 명예로운 매장을
그들에게 해주었는데 이것은 지극히 적절한 것이었다.
야베스 사람들의 이러한 행동을
적절하고 중요하게 만드는 또 다른 사실이 있다.
야베스는 요단 강 건너 므낫세 반쪽 지파에 속했고,
벧산은 요단 강 이편 므낫세 반쪽 지파에 속했기 때문에
따라서 이 두 반 쪽 지파들은
요셉의 맏아들로부터 나온 지파가 표징했던
영적 선함이라는 동일한 원리의 외적, 내적 측면을 의미했다.
블레셋에 의해 이 쪽 성읍에서 모욕당한 진리가
저 쪽 성읍 야베스 사람에 의해 회복되었다.
야베스 사람들은 과거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대우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사울을 대우했는데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다윗의 시련은 아직 진행 중이었고
사울의 고난은 이제 끝이 났다는 영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삼상 23:1-13 에서 다윗은 블레셋 때문에 위기에 처한
그일라 주민을 구출했으나 그들은 다윗을 사울 손에 넘겼다.)
이스라엘의 첫 왕의 표징적 역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매장이라는 과정이다.
그 이유는 매장이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야베스 길르앗 사람들보다
더 효과적인 의미에서 사울을 매장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야베스 길르앗 지역 외 어디서
사울의 유골이 그것에 꼭 맞는 안식처를 발견할 수 있을까?
야베스 용사들의 과감한 행동은
성실하게 수행된 어떤 선한 행위도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맨 처음 이식된 선은 마지막 선으로 실현되고야 만다는
생명의 신성한 법칙을 실증해주고 있다.
사울이 야베스 사람들에게 보인 첫 왕다운 영웅적 행위와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 시체에 행한 마지막 영웅적 행위 사이에는
수많은 어두운 낯과 밤이 그 세월 사이에 끼여 있었다.
그러나 사울의 전형적인 성품과
다윗의 박해자로서 영적인 것에 적개심을 보이는
자연적 마음을 표징하는 사울을 생각해 보면
(사울의 죽음과 매장으로부터)우리는 이런 것을 알 수 있다.
즉, 자연적인 것이 죽어 벗어 제거될 때
그것은 마치 땅에 뿌려진 씨와 같이
거기서 새로운 나무가 싹이 터 나온다는 것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그러나 사도들이 말하는 이런 구절도 있다.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는 것같이...” (고린도전 3:15)
주님께서 즈가리야에게 말씀하신 성육신에 관한 예언에서
“거기 안에 있는 삼분의 이는 잘리우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불을 통해 삼분의 일을 데려오리라.
그리고 이들을 은이 정련되듯 정련하고, 금이 연단되듯 연단하리라”
(즈가라야 13:8,9).
말라기서에서 말하기를
“그분은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다.
그는 은에서 쇠똥을 걸러내는 자로 자리잡을 것이다” (말라기 3:2,30)
사울 부자의 시신을 태운다는 것은 이런 종류의 정화를 암시한다.
시신을 화장하는 것이 평범한 유대인의 장례 관습은 아니었다.
설사 이 사건의 경우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해 본다고 해도
야베스 사람들의 이런 조치에 담긴 특별한 의미는
더 명확하고 매우 교훈적이다.
이 의미는 거듭나는 자에게만 국한해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인간 체험의 모든 불같은 시련을 통과하신 그분에 대한
표현으로도 이해되어야 하리라.
야베스 사람들은 시체를 화장한 뒤
그 뼈들을 나무 아래 묻고 칠 일간 단식하였다.
이 두 가지 행동은 구약 성서에서 언급되는 행동들이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었을 때 그녀를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고
그곳을 울음의 상수리라 불렀다. (창세기 35:8)
그리고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묻으러 올라갔을 때
그들은 그를 위해 칠 일간 곡을 했다 (창세기 50;10).
드보라의 죽음과 매장에 대한 이 명확하고 단순한 사건들에는
주님과 거듭나는 인간에 관련된 중대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유모인 드보라는 주님께서 그분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과
그것에 의해 그분이 유아기 때부터 양육을 받으신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어머니 쪽에서 공급되어진 주님의 것들은
그 자체로 연약하고 악한 유전적 본성이고
주님은 이 본성과 싸워 그것들을 추방하심으로
마리아의 아들이 되는 것을 그치게 하셨다.
자연적인 마음으로부터 유전적인 악을 완전하고 영원히 거절함이
드보라가 상수리나무 아래 매장되는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야베스에 있는 나무 아래 사울 부자의 뼈가 묻히는 것도
위 드보라의 경우에 담긴 의미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다.
왜 매장이 거절과 부활 모두를 의미할까?
그 이유는 옛 것의 거절은
새 것의 일어남, 부활을 함축하기 때문인데
이는 주님 자신의 경우였다.
그분은 신성 쪽 아버지의 생명을 차지하기 위해
인간 쪽 어머니의 생명을 내려 놓으셨다.
그 이유는 “마리아의 아들이 죽었을 때
하느님의 아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야베스 사람들의 칠 일간의 단식은
사울의 뼈를 묻고 왕을 잃은데 대한 슬픔을 나타내는 반면
한편으로는 패배에 대한 슬픔,
즉 진리와 선함을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을 뜻하기도 한다.
이 의미는 단식이 지닌 의미 중 한 가지이기도 하다.
때로 상응이 없는 곳에 유사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주님이 기름부은 자로서의 사울과 주님 자신 사이에는
유사성과 상응성 양쪽 모두 있지 않을까?
양쪽 모두 적에 의해 못 박힘을 받았고 친구들에 의해 묻혔다.
주님의 경우 제자들이, 사울의 경우 신하들이
스승과 상전을 잃은데 따라 곡하고 슬퍼했다.
양쪽 모두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고 기대했던 자에 대한
희망이 꺾인데 대해 슬퍼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바램’이 되어 왔고 블레셋의 압제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전투를 치뤄야 할 자가
도리어 적에게 정복당하고 만 것이다.
사울과 그의 아들, 그의 군대는 더 이상 없었다.
공포에 질린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 양쪽에서 그들의 성읍을 버리고 달아나고
그들을 추격하던 적들이 진입해 점령했다.
블레셋은 기뻐 소리치고 있었다.
가장 값진 트로피, 승리의 트로피를
제 아들에 의해 받게 된 블레셋의 신들은
여호와를 눌렀다고 의기양양해 하고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 여기고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더 밝은 날이 이 백성에게 밝아 올 것이다.
그러나 당분간은
단식만이 그들 상태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영적 이스라엘도 여기서 예외는 없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5)
앞에서..
(시험, 곧 전쟁에는 정복하는 이들 편에 항상 패배의 외관이 있다.
주님의 마지막이자 가장 격렬한 시험인 십자가의 고난은
이러한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그분의 죽음은 어둠의 영들에게는 그들 능력의 승리로 여겨졌다.
즉 그들은 마침내 그분을 이긴 것이다.
그러나 부활 아침에
그분이 죽음의 사슬을 끊으시고
모든 권세를 가진 영화된 인성으로 일어나셨을 때
그들의 외관상 승리는 압도적인 패배로 바뀌었고
그들 자신은 영원한 복종 속에 놓이게 되었다.
비록 이 한 예에서 볼 수 있었지만
모든 시험은 이것과 동일한 외관과 실재를 가진다.
모든 시험이 극에 달하면 절망이 뒤따른다.
시험당하는 자에게는 절망이 승리이지만
시험하는 자에게는 외관상의 승리일 뿐이다.
또한 모든 시험에는 죽음과 부활이 뒤따른다.
옛 사람에 속한 것이 죽고 새 사람에 속한 것이 살아난다.
옛 사람의 죽음은 악령에 의해 결과 되고
이것은 그들의 외견상의 승리다.
그리고 새 사람의 부활은
천사에 의해, 또는 천사를 수단으로 주님에 의해 결과 되고
이것은 악령들의 실제적인 패배다.
.. 그러므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의 죽음, 이스라엘 군대의 패전 등을
주님의 영화하심, 인간의 거듭남에 관련시켜 이해해 볼 때
그것은 영의 패배와 죽음이 아니라 육의 패배와 죽음을 뜻한다.
우리와 관련해서 사도들은 이를 두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
곧 육의 죄를 벗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 드보라의 죽음과 매장에 대한 이 명확하고 단순한 사건들에는
주님과 거듭나는 인간에 관련된 중대한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유모인 드보라는 주님께서 그분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것과
그것에 의해 그분이 유아기 때부터 양육을 받으신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어머니 쪽에서 공급되어진 주님의 것들은
그 자체로 연약하고 악한 유전적 본성이고
주님은 이 본성과 싸워 그것들을 추방하심으로
마리아의 아들이 되는 것을 그치게 하셨다.
자연적인 마음으로부터 유전적인 악을 완전하고 영원히 거절함이
드보라가 상수리나무 아래 매장되는 것으로 의미되고 있다.
야베스에 있는 나무 아래 사울 부자의 뼈가 묻히는 것도
위 드보라의 경우에 담긴 의미와 맥락을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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