內榮寺 沿革
所 屬 : 韓 國 佛 敎 太 古 宗
所 在 地 : 全羅南道 羅州市 三榮洞 581番地(一員)
옛先人들의 口傳에 의하면 내영산 마을이 형성되기 이전에 미륵골에 미륵바위와 미륵사라는 사찰이 있었으나 佛紀2390年 高麗 恭愍王 12年(西紀 1363年, 癸卯) 太古․普愚國師께서 內榮山 자락이곳에 사찰을 옮겨 지으면서 內榮寺라고 바꾸고 이 지역 民心을 다스리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조선 중종25년, 즉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이하 승람)'나주목 부분이다. 고려말기에 접어들면 왜구가 우리나라 영역 곳곳에 침범, 약탈과 유린을 반복했다. 국가적 문제였다. 고려는 당초 적이 침입해 오는 길목에 위치한 섬에 군사와 주민들을 들여보내서 이들로 하여금 섬을 방비하도록 했다.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왜구침입이 더욱 극성을 부리자 서남해의 주요한 섬들에 있던 관청(읍치소)을 육지로 옮기고 사람들도 강제로 옮겨 살도록 했다. 섬에서 살던 사람들을 더 이상 살지 못하도록 강제이주정책을 편 것이다.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정책'이었다.흑산도를 비롯한 서남해 도서지역 대부분의 섬들은 나주목의 관할이었다. 나주 목사의 관할 아래 있었던 섬들 주민들은 강제로 뭍으로 나와야 했다. 흑산도, 압해도, 진도, 장산도 등지 사람들이었다. 그 강제 이주지가 '승람'에 전하고 있다.흑산도인들의 강제이주지는 나주에서 남쪽 10리에 있는 '영산폐현'이라고 했다. 지금의 영산포중 '냉산', 즉 내영산(內榮山)이었다. 원래 장산현 사람들은 나주 남쪽 20리 떨어진 곳으로, 압해현 사람들은 나주 남쪽 40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왔다. 그러면서 강제이주지의 이름도 옛 이름을 따와서 영산현, 장산현, 압해현으로 그대로 불렀다. '승람'을 만들 당시에는 이런 현들이 없어져 '폐현'으로 기록된 것이었다.흑산도 사람들은 바닷길을 따라, 다시 강물을 따라 나주에 까지 왔을 것이다.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었다.흑산도 사람들의 강제이주지이자, 새로 일군 터전은 고향의 이름을 따와 영산이라고 했다. 고향인 흑산도 인근 영산도(永山島)에서 따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영산도는 대흑산도와 소흑산도 사이에 있는 섬으로, 흑산도에 딸려 있다. 대흑산도에서 직선거리로 2.3㎞ 떨어져 있다. 흑산도에서 바로 보인다. 면적은 2.2㎢, 해안선 길이는 7.9㎞. 영산홍이 피어나던 고향의 섬을 잊지 못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리하여 새로운 터전, 즉 영산의 앞을 지나는 강을 영산강으로, 그 강의 포구를 영산포라 했다.
내영사는 흑룡사의 안쪽에 있다하여 내영사라고 불리었고 흑산도 사람들은 왜구침입으로 바닷길을 따라, 다시 강물을 따라 나주에 까지 와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터전을 만들면서 내영사는 그들의 의지처가 되었고 삶에 있어서는 선박의 이동에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항해사찰)로서 영산강유역의 큰 중심의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이러한 유명한 명소에 나주지역에 납골당(봉안당)을 설치하였습니다.
많은 관심과 이용바랍니다.
항상 가정에 조상의 얼이 함께하여 하시는 일이 소원성취되시기를 바랍니다.
주지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