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까마귀 그곳은 가팔진 꼭대기 바위 덩어리 제멋대로 뒹구는 폭풍치는 하늘만이 살아있는 곳 나는 그곳에 관제사로 청춘의 깃발을 꽂은 갈까마귀였다 레이다 망에 뚫어지게 시선을 꽂고 고성능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박제되었다 이어폰 속 K2에서 뜨는 우레 같은 독수리 굉음을 넘어 천 리 밖 작은 비행기의 소리만으로 북한기인지 일본, 중국, 팬텀긴지 구분해 내는 갈까마귀 하늘! 텅 빈 하늘! 태풍 전야 같은 하늘! 숨막히는 하늘을 지키며 내 전 생애는 비로봉 바위 위 안테나에 꽂혀 풍장되었다. 훈장으로 받은 보청기는 늙어가고 나는 귀 먹고 눈 먼 팔공산 갈까마귀로 헛헛하게 낡아가고 있다 장독 애초에 나는 감자밭의 붉은 흙 황토 층층이 쌓여 불구덩이 속에서 터지지 않고 숨 쉬는 장독으로 살아남았다 불룩한 아랫도리의 곡선을 자랑하며 전통 장을 잉태하여 햇살과 구름을 움켜쥐고 깊은 호흡을 한다 내 품속에서 살아 숨 쉬는 것들이 숨결을 교환하고 맥을 맞추기도 하고 맛을 품기도 한다 내 들숨이 쌓이며 그들은 순도 높은 날숨을 뱉기 시작한다 바람도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돋음발로 지나간다. 나는 햇살 가득 먹고 누런 장을 분만할 때까지 참선하며 단전 호흡한다 고.요.하.다. 유월, 개구리 짙은 숲속에서 졸다가 놀란 꿩이 푸드덕 날고 뻐꾸기 산향에 취해 노래하는 유월 시골집 늦은 저녁 마당 멍석 위에 차린 두레 밥상에 뛰어들던 울음소리 개구리참외의 검푸른 등껍질에 떠돌던 울음소리 마실 길에 지천으로 밟히던 울음소리 논둑 미루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열리던 울음소리 이슥한 밤 번쩍이다 잠 속까지 뛰어들던 그 울음소리 발길에 차여 비명처럼 나뒹굴던 울음소리 뜨락에 벗어놓은 신발 속에 눈물처럼 고이던 개구리 울음소리 나는 혼자서 들리지 않는 개구리 울음소리로 생각 가득하게 채우며 유월의 한가운데 오래도록 서 있다 개굴개굴개굴개굴 반야월 오일장 사람이 그리울 때 시집을 덮고 반야월 장에 간다 잘 익은 포도에서 포도주 향이 날린다 주렁주렁 쌓인 능금과 감 붉은 고추를 파는 아낙네가 정겹다 가을 해 품은 늙은 호박 덩이를 리어카에 싣고 콩과 팥과 고구마를 팔고 잔돈 내어주는 농부 고등어 갈치 조기를 늘어두고 바다 내음을 풀어내는 낯선 어전 상인도 반갑다 당근 총각무 돌미나리 좌판 앞에 시름없이 쪼그리고 앉은 노파의 손등에는 인고의 세월에 젖어 얼룩진 검버섯이 애련타 사람 향기 가득한 반야월 오일장에서 검은 비닐봉지에 목소리 시끌벅적하게 담아 두 팔 아프게 들고 온다 가을에는 가을볕이 내리비치는 자작나무 숲 바람에 흔들리는 풀벌레 울음소리와 손잡고 타박타박 낙엽을 밟으며 걸어보리라 볼 붉은 맨드라미의 작은 풀씨가 더 멀리 퍼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른기침 삼키며 쇠잔한 일기를 쓰리라 남녘 철새들이 쓸쓸하게 남긴 자리에서 달빛에 흔들리는 강물처럼 머뭇거리다가 빛바랜 이별을 준비하며 그들의 무거운 날개에 공감하리라 가장 황홀한 순간 익어가는 붉은 능금의 껍질 속에서 나는 봄에 피는 꽃씨로 익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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