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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1장 1-4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데살로니가는 바울선생이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인데 사도행전 17장에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기원이 나온다. 사도행전 17: 1-5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그들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 안식일”이라는 표현이다. 빌립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극심한 핍박을 받아 쉬러 온 도시가 데살로니가인데 겨우 세 안식일만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사역을 했다. 그러다가 3주 동안 있다가 핍박을 받아 다시 쫒겨났다. 아울러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이 들은 설교는 고작 세 번이다. 그 설교를 듣고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 후에 야손에 집에 침입한 것을 봐서는 후에 야손의 집에서 바울과 실라가 믿는 자들이 함께 모여서 강론을 계속한 것을 알 수 가 있다.
제가 들은 설교는 몇 번인가 세어봤더니 말 알아듣는 일곱 살을 기준으로 최소로 세어보니 54*52= 2808 최소로 잡아서 2800번이다.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듣고도 믿음의 결단을 안 하지 않는가? 우리는 설교의 소비자가 아닌가 반성해 보자. 유튜브에서 많은 설교자가 있다 재림연수원에는 재림교회의 유명한 설교자가 매주 좋은 설교를 하고 얼마 전 장막부흥회에서도 잘 준비된 설교를 얼마나 들었는가?
이방 여인이자 기생인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그도 딱 세 번 들었다.
여호수아 2:10-12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라합에게도 세편의 설교가 필요했다. 우리중 얼마나 더 많은 설교가 필요한 것인가? 소비만 하고 판단만 내릴 뿐 결단은 하지 않는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야손(제이슨)의 집에서 시작되었고 예루살렘 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빌립보 교회는 자주장사 루디아의 집에서 저희 고향 교회도 집에서 시작되었다.
3년을사역한 갈라디아 교회는 복음을 떠나서 행위구원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고 3개월을 머문 고린도교회는 서로 잘난척을 하느라 교회가 두동강 나서 사도바울의 골머리를 싸매게 했고 에베소교회는 영지주의로 빌립보 교회는 냉담함으로 인한 다툼과 분쟁으로 바울을 힘들게 했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생각만해도 흐믓한 것이다. 3절 이하를 보면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멋진 교회다. 바울이 칭찬했던 핵심 부분 세 가지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6,7절에 보면 명백하게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라고 치켜 세운다.
특히 그들에게서 말하는 믿음은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다.
3절에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 ”‘your work produced by faith“라고 기록했다. 데살로니가는 그리스에 이어 두번째 큰 도시에 있는 있는 교회다. Σαλονίκη(살로니카) 혹은 Θεσσαλονίκη(데살로니키)라고도 불리는데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그리스 북부의 중심지이다. 당시는 20만 이었고 지금은 80만 정도이다. 그리스는 영지주의(靈智主義 : knosis)와 이성(理性.reason)이 지배하던 문화에서 살던 자들이다. 영지주의를 간단히 정리했을 때 믿음으로 인한 구원이 아닌, 특정한 지식을 가지고 자신을 수련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인데 그영향력이 오늘에 까지 강력하게 미치고 있다. 영지주의가 얼마나 지독한지 마치 지금 진화주의론 자에 의해 창조주의자들이 무지한 자들로 낙인 받듯이, 믿음의 사조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 그들의 참담한 문화적 지배 하에서 대단한 무시를 받았다. 그런 풍조 가운데 용감하고 담대하게 믿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your work produced by faith“ 원어를 직역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행위의 산물 즉 이성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었던 믿음이 결과적으로 어떤 행위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파격적인 발상이었다. 그들은 모여서 인간의 본성과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추상적인 결과를 도출하고 그저 언어유희적인 개념으로만 알았던 믿음이 생각개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어떤 행동의 결과를 만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이 믿음으로 해 낸 ‘업적’이 있었다.
영어 성경에서는 ‘your work produced by faith’이다. ‘예수 믿고 너희가 이룬 일(업적)’이라고 이해된다.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이 복음을 영접한 이후 믿음으로 어떤 행위을 했다는 의미다
‘그 일들이 참으로 믿음 안에서 합당하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들만 데살로니가 교회가 하고 있다’ 이런 뜻이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믿음의 활동”으로 번역했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믿음의 행위”로 번역한다. 살전 2;11에는 이 말을 “하나님께 합당한 삶” 살후 1:11에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 살후 1:5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삶‘이라고 의미를 덧대어 풀어내고 있다. 믿는다면 이렇게 행위가 구체화 되어 나타난다,
야고보서 2:14.26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갈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구체적으로 살전 1:9.10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우상 숭배란 “내가 임의로 깎아서 만들어 내가 편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믿음의 잣대가 말씀이 아니라 내가 임의로 말씀을 깎아서 조율하고 나에게 유리하게 적용하여 곡해하여 나만 잘 보이면 된다. 남은 별로인데 본인에게만 잘 보이면 된다. 온몸에 문신을 새겨놓은 시람은 남이 뭐라고 하든 말든 남이 흉하게 여기든 말든 내가 보기에 좋고 편하다고 얘기한다.이들과 같은 원리로 우상숭배하는 그리스도인은 말씀에 문신은 새겨 자신만을 위해 적용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은.이들를 카리켜 문신 새긴 예수쟁이라 한다.
다시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1:3‘4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칭찬의 두 번째는 “사랑의 수고”(Laber promped by Love)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 말을 번역하자면 사랑은 수고를 유발시킨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 사랑은 입술이 아니라 수고 즉 애씀 힘씀 등의 노동을 가져온다.
인간이 죄를 짓는 동기는 어디에서 파생되는가? 성경에 보면 죄에 빠진 이유는 사단의 유혹에 반응한데서 왔다. 죄송(罪悚)이란 단어가 있다. 죄에 반응해서 죄에 빠지게 된다는 의미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죄 빠지다는 행위의 반대는 무엇인가생각해 보았다. 무죄(無罪)인가. 죄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 죄의 반대가 아닌가? 죄는 결정이 아니라 반응에서 온다. 그렇다면 희한하게도 인간에게 있어서 반응함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 중 하나가 사랑이다. 사랑을 반응에 의해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결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죄가 반응으로 이루어지는 반면에 사랑은 결정으로 이루어짐으로 죄지음의 반대는 사랑함이라고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때로는어떤 사랑은 반응으로이루어 지기는 한다. 풋풋하고 여물지 않은 사랑를 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에로스(Ἔρως)라고 표현하며 반응된 사랑을 표현한다. 아름다운 여성의 외모와 남성미를 발휘하는 멋짐에 반응하여 빠져들어간다 (悚) 이성의 외모에 반응하여 정신이 없다. 그런데 그 끝이 무엇인가? 예쁜 외모에 반응해서 사랑에 빠져 들었지만 그 외모 유지를 위한 사치 때문에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그리고 외모와 다른 성품으로 인해 괴로워 하다가 미워하고 때론이혼에 이르기도 한다. 성경에 진정한 더 높은 경지의 사랑은반응하여 빠져드는 에로스가 아니라 결정하는 요소가 강한 그 다음 단계의 사랑 즉 스토르게(στοργη) 필로스(φιλος) 아가페(αγαπη)의 사랑이다. 이런 사랑의 특징은 반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에 의해서 지배된다. 부모가 자식 낳았다 그런데 팔이 없다 즉시 속상한 반응이 오지만 마음 추스르고 잘 키우기로 결정한다. 반응에 의해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로 결정한다. 친구와 우정을 나누는데 있어서는 친구가 잘생겨서 친구하기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하기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한 사랑은 더하다 인간이 잘나고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 사랑해야겠다고 반응하시는 게 아니라 사랑해야 하겠다는 올곧은 결심으로 사랑기로 결정한다. 그 결정의 끝판이 십자가이다. 이 모든 과정은 수고와 애씀과 힘씀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사랑은 수고이다. 사랑은 애씀이며 힘씀이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할 때 미운사람이나 싫은 사람이나 힘들게 하거나 말을 여기저기 옮기는 얄미운 사람이 있다 해도 그들을 사랑하기로 결정을 하고 실천을 하는 애씀이 있다면 사랑은 구현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랬다. 그럼에도 우리의 애씀은 십자가의사랑의 수고와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 왜냐하면 십자가에서는 그분이 죄가 되고 우리는 의가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Endurance inspired by hope)를 가졌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랑은 천국에서 지속되는 가치라는 의미가 있어서 그렇지 지구상에서 우리 군상들의 삶의 가치는 소망이다
하나님과 하늘의 본질은 사랑이다 . 그래서 하나님을 대면하기 뮈해서는 사랑을 가져야한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자가 하늘에 가면 하늘생활의 삶은 인내를 요구하는 고역이 된다 .
대부분의 지구에 사는 인간들의 삶의 가치는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는 소망이다. 소망이라는 단어에 포함된 시제는 미래다. 사람들에게 과거에 가진 최고의 것은 "추억"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현재의 최고의 것은 "즐거움"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미래의 최고의 삶은 "소망"이리는 단어에 담아낸다.
그런데 소망이 고약한 것은 기다려서 이루어지는 데 있다. 세상사람들에게는 물질과 명예에 가치를 둔 소망을 위해 기꺼히 시간이라는 인내를 들이고 인고의 것을 참아내지만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기다리고 안고의 세월을 참아내라고 마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은 어떠한가? 둘 다이다 그래서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다. 매일 느끼는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에서 오는 소소함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고 소망 가진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떠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 이 세상을 위해 가징 많은 일을 한 그리스도인 선각자들은 바로 다음 세상의 일 즉 다음 세상을 소망한 것에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로마시대가 기독교로 전환하는데 기초를 놓은 사도바울를 비롯한 사도들이나 중세를 확립한 어거스틴 같은 위대한 인물들. 노예제도를 종식시킨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지구상에 위대한 신앙의 흔적을 남길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마음의 소망이 천국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의 최고봉인 다음세상. 즉 천국에 대해 더이상 생각하지 않으면서 기독교는 세상에서 힘을 잃고 말았다. 많은 기독교 학자들이 기독교의 쇠락에 대하여 여러가지 분석을 하지만,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천국을 바라지도 생각하지도 않기에" 기독교가 힘을 잃어가게 된 것이다. "천국에 대한 소망" 즉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소망하면 천국도 세상도 결국에는 모두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상한 법칙으로 들릴지몰라도 이와 유사한 법칙들이 적용되는 예시는 주위에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건강은 축복이지만 건강을 직접적이고 주된 목표로 삼는 순간부터 병에대한 노이로제가 걸려 어디가 병들지 않았나 노심초사하여 까다롭게 살피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건강은 오히려 다른 것 즉 좋은 음식, 쉼, 신선한 공기, 운동 등 추구할 때, 더 쉽게 얻어지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소망(원하는 바) 자체를 주된 목표로 삼는 한 소망(원하는 바)은 얻기가 더 어렵다. 그러므로 소망은 구원의 목표가 아니라 도구이어야 한다.
천국을 바란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다. 고작 천국에 가면 세상 떠난 가족이나 친구를 다시 만날수 있다 하는 정도다. 이와 같이 천국을 바라보고 소망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은 교육은 전부 이세상에 마음을 붙들어 놓는 것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에 대한 소망이 대부분 이루어 질 수 없거나 , 힘들다라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한다 한다. 세상에 있는 온갖 것들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결코 그 약속을 지킬지 못한다.
심리학자들 연구한 결과 사람들에게 소망은 크기보다 빈도가 중요함을 발견했다. 큰 자극을 주는 큰 소망들 즉 집을 사는 일 .결혼하는 것. 취직에 성공하는 등 큰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 보다는 일상에서 이루어자는 작은소망이 인생을 휠씬 풍요롭게 만든다 .
그럼에도 그럼에도 그 소망으로인해 처음에는 무언가 잡을 수 있을 것 같는데 결국 현실속에서 신기루 처럼 사라지는 그 무언가에 놀라 실망한다. 사람들이 잊고 지내는 진리가 있는데, 사람은 그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영원을 갈급하는 소망의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을 사모하도록 훈련하고 다른 세상의 욕망에 의해 사라지지 않거나 밀려나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들의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 세상은 신기루 같다, 어느 순간 아침 안개와 같이 사라진다. 주위의 가족이나 친구 혹은 지인 유명인사를 통해 신기루같이 사라짐을 매일 확인한다. 마찬가지로 같은 일이 어느날 운명처럼 내게 닥칠 것이다. 소망은 이것이다 . 우리의 진짜 인생은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시작된다". 그때 내 영원한 삶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인내로 천국을 갈망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