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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의 통치(서문) / 다윗의 통치 역사가 그려주는 것
이스라엘의 세 왕 중에서 윌리암 브루스 지음
/배제형 옮김/스베덴보리 관련서적
사무엘하
서문 (PRELIMINARY)
사울의 통치는 끝났다.
그렇다고 다윗의 통치가 실제로 시작된 것은 아직 아니었다.
비록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어진지 오래 되긴 했어도
일반적으로 그의 통치는
그가 헤브론에 와서 유다 가문의 왕으로 기름 부어질 때까지
시작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스라엘의 왕정은 아직 세습되지 않았고
‘왕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말’은 국가의 격언이 되지 못했다.
사울의 죽음과 다윗이 통치권을 장악하는 사이의 중간 기간을
정치공백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사는
입법적 정확함이나 형식적 꼼꼼함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사울의 통치가 막을 내리고 다윗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역사적 타당성을 크게 훼손하지는 않으리라 본다.
이렇게 보는 것이 역사의 영적 요구에는 더 적절할 것이다.
신성한 정부는 중단을 모른다.
그것이 형태들과 등차들의 시리즈를 통과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연속성이나 인접성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져 있다.
(The Divine government knows no interruption.
It may pass through a succession of forms and degrees;
but all these are connected with each other either
by continuity or contiguity.)
신성에 속한 진리(truth Divine)가 다스리는 정부는
비록 그것이 신성한 진리(Divine truth)가 다스리는 정부와
구분된다고 해도 서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신성에 속한 진리는
신성한 진리가 천사나 인간의 이해력에 납득되도록
유한하게 된 진리,
또는 ‘신성한 진리’를 영적이고 신적인 것에 관한
그들의 사고나 감정의 상태로까지 내려오게 하는 외관들로
옷 입혀진 진리다.)
거듭나는 삶이 진행되는 동안
보다 높은 상태는 보다 낮은 상태로부터 점차 발전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신성한 정부의 연속적인 상태들에 따라
질서 있는 발달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존재의 가장 낮은 상태에서 가장 높은 상태에 이르는
한 생명의 점진적인 진보이다.
(As successive states of the Divine government in the human mind,
during the progress of the regenerate life,
the higher is evolved from the lower
by the orderly process of development,
which is the progressive advancement of a being
from his lowest to his highest condition of existence.)
그리고 발전된 것은
그것을 생산한 것의 씨눈(embryo) 안에 존재해야 한다.
신성한 진리는
신성에 속한 진리의 씨눈 안에 존재하고
신성한 선도 신성한 진리의 씨눈 안에 존재한다.
그것은 마치 땅에 뿌려진 씨처럼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알찬 낱알이 맺힌다.” (마가 4:28)
그러나 이 씨가 본래 인간 안에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인간의 마음은
자연적, 영적, 천적인 세 천국에 응하는
세 등차들(degrees, 단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등차들은 모든 인간의 배아(embryo, 씨눈) 안에 존재하고
거듭나는 자들 안에서 연속적으로 열려
그들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상태로까지 완전해진다.
첫 번째 즉 자연적 등차의 열림과 완전해짐이
사울의 통치로 묘사되고,
두 번째 즉 영적 등차는 다윗의 통치로,
세 번째 즉 천적 등차는 솔로몬의 통치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등차들의 열림과 완전해짐은
마음 안에 뿌려진 진리의 씨를 수단으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이 씨들은
주님으로부터 모든 천국들을 통해 내려오는바,
그들 자체 안에는 신성한 진리 외에도 천국에 존재하는
진리의 모든 등차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 그 자체의 열림과 완전해짐이란
마음 안에서 이 등차들이 열리고 완전해지는 것인바,
그 결과 싹, 이삭, 낱알이 연속적으로 생산되어진다.
거듭나는 인간에 대한 위와 같은 사실은
세상에 태어난 사람으로서, 비록 어머니는 인간이지만
신성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상상이 안될 만큼
모든 사람들을 초월하는 사람으로서의 주님 자신에 대한
지고한 인식과 평가에서도 사실이다.
(What is true of the regenerate man is true
in a supereminent sense and measure of the Lord Himself,
as a man born into the world,
but a man immeasurably transcending all other men,
in being the Son of a Divine Father though of a human mother.)
‘마리아의 아들’로서의 그분은
인간 마음의 세 등차들에 속한 외적 덮개들을 소유하셨고
그분 안에 있는 이 등차들은 우리 안에서와 같이 유한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그분은
세 천국에 응하는 마음의 세 등차들을 실제로 소유하셨고
그분 안에 있는 이 등차들은
단순히 천사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신성한 마음 자체에 있는 것과 같고 따라서 무한하다.
주님의 자연적 인성의 안과 그 너머에 있었던
그분의 아버지 쪽 인성에는 그분의 출생 때부터 무한한 수용력,
즉 무한한 것을 수용하는 능력이 있었다.
(In the Lord's paternal humanity,
which was within and above His natural' humanity, there was,
from His birth, an infinite capacity, or a capacity for the infinite;)
인간의 발전 순서에 의해 이 등차들이 열리고 완전해짐에 따라
주님의 인성은 출생 때는 잠재적이었다가
실제로 신성이 되어 가셨다.
주님의 영화하심은
인간의 거듭남처럼 그분의 탄생부터 시작되셨다.
영화하심의 처음은
거듭남의 처음과 같이 마음의 내면에 있는 부드러운 용기 안에
선함과 진리의 남은 것들을 획득하고 쌓아 놓음으로써
실제적인 영광에 의해 개발되고 완성될 상태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 영화하심은 하향하는 시리즈,
즉 처음은 천적, 그 다음은 영적, 마지막은 자연적 등차이고
주님과 인간 모두와 관련하여 이 신성한 운용의 하향 시리즈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의 역사에서 내적인 시리즈로 묘사되어 있다.
상향하는 시리즈, 즉 이 초보적 상태로부터의 발달은
사울, 다윗, 솔로몬의 역사에서 묘사되어 있다.
주님의 영화하심과 인간의 거듭남 양쪽 모두와 관련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온 이 상향하는 상태의 처음이
사울의 역사에서 묘사되어 있다.
특히 주님의 영화하심과 관련된 주제는 부득이
불완전하게 설명되어 왔다.
인간의 거듭남에 대해 우리가
기껏해야 일반적이고 모호한 지식만 가질 수 있다면
주님의 영화하심에 대한 이 사실은 얼마나 더 그렇겠는가..
그럼에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설비해두신
신성한 사역을 어느 정도나마 안다는 것은
기독교인에게는 대단히 필요하다.
육신으로 행하신 그분의 사역에 관한 지식은
유일하신 하느님으로서의 주님에 관한 지식과 더불어
성경이 계시하는 가장 귀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당연히
속죄(the Atonement)가 기독교회의 초석이라고 주장한다.
주님의 인성의 영화하심이 속죄다.
그것은 구세주로서의 주님의 인간(person) 안에서
인간이 하느님과, 또는 인간 본성이 신성과
화해(reconciliation)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The glorification of the Lord's humanity is the Atonement.
It was this which effected the reconciliation of man to God,
or of the human nature to the Divine,
in the person of the Lord as the Saviour.)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되고
화해됨으로써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신성한 인성’의 변화시키는 힘에 의한 것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로마서 5:10)
주님의 화해되고 영화된 인성 안에
모든 충만으로 거하는 영원한 영적 생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한 영적 생명을 갖게 하며
그들을 주님 자신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이 ‘위대하고 복된 진리’는 지금과 같은 기독교 전 체계를
변화시키도록 결정지어져 있다.
이 진리는 현 기독교의 정수를 이루는
징벌의 대속과 의의 전가에 대한 계획 전체를 쓸어 내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와 부정의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빼앗는 것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준다.
그것은 “놋쇠 대신 금을, 쇠 대신 은을 준다.” (이사야 60:17)
즉 그것은 단지 자연적일 뿐인 것에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에 관한 ‘영적 관점’을 제공한다.
또 그 진리는 주께서 신성한 정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 대신 고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신성한 사랑의 열망에 부응해서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셨다는 것을 알려주고,
또 경이로운 밝음과 초월적인 아름다움의 빛 안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Incarnation) 하나님을 나타내주며,
또 하느님께서는 인간 본성을
고난을 통해 완전하게 만드실 목적으로 그것을 입으셨고
그분이 그 인간 본성을 완전하게 만드셨을 때
이제 그분은 삶을 통해 사람들을
자신이 지상에서 살던 삶의 모습으로 인도하심으로
그들이 온전해지도록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It shows that God assumed human nature
for the purpose of making it perfect through suffering;
and having made it perfect, that He can now make men perfect,
by conducting them through a life,
the image of that which He himself lived upon earth.)
이것은 주님의 지상 사역이
그저 인간에게 완전한 본보기를 보이는데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교리와는 다르다.
인간에게 완전한 본보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 본보기를 따르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의지와 힘’이 필요했는데
주님의 인성의 영화는 바로 이것들을 그들에게 제공하였다.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인간에게 주님의 선하신 뜻을 행하도록 의욕을 갖게 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항상 존재하는 힘이다.
그것은 주님이 지상에서 그분의 신성한 인간의 삶으로 획득한
모든 공적과 의를 담고 있다.
실제로 주님의 인성은 공적과 의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공적과 의 자체시다.
인간은 계명에 따라 살아감으로
하느님의 법을 그의 심정에 새겼지만
주님은 계명에 따라 사심으로,
아니 계명 자체를 살아내심으로 율법 자체가 되셨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것 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사실이다.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율법은 말씀 전체를 뜻하는데
주님은 이것을 문자와 영 모두에서
그것의 가장 외곽까지, 모든 등차에서 완성하셨고
그리하여 주님은 영원 전부터 첫 원리들 안에 계셨던 것처럼
최 말단에서의 말씀이 되셨다.
(In its largest sense the law means the whole Word;
and this the Lord fulfilled, both in the letter and the spirit,
in its utmost extent and in all its degrees.
Thus did He become the Word in ultimates, as, from eternity,
He had been in first principles.)
(이 부분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 글 참고)
이를 두고 모세는 예언적, 영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명기 30:14).
이에 관해 주님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 28:20)
내적 의미에서 우리는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의 영화하심에 관해
사울보다 다윗의 통치에서 더 진전된 단계의 역사를 갖는다.
이미 말했듯이 다윗의 통치는
주님께서 그분의 인성을 신성한 진리로 만드신 과정을 묘사하며
다윗은 신성한 진리로서의 주님,
또는 주님의 인성 안에 있는 신성한 영적 원리로서의 주님을 표징하고
부차적 의미로는 영적 인간을 표징한다.
그리고 그의 통치 역사는
인간이 영적으로 만들어지는 동안,
또는 마음의 영적 등차가 완전해지는 동안
거듭나는 삶의 단계를 묘사한다.
우리는 (영적 마음이)열렸다고는 말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영적 마음의 열림은 사울이 죽기 훨씬 전
그의 통치 중에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다윗의 상황에 의해
표징된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영적 마음과 관련하여 자연적 마음에는
세 가지 다른 상태들이 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자들에게 이 세 상태들은
서로 이어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There are three different states of the natural mind
in relation to the spiritual, which may be supposed to succeed
each other with those who pass from death unto life.)
영적 마음이 닫힌 자연적 마음의 상태가 있고,
영적 마음이 열리지는 않았으나 닫히지도 않은 자연적 마음의 상태,
그리고 영적 마음이 열린 자연적 마음의 상태가 있다.
우리는 다윗의 통치가 표징하는 거듭나는 삶의 과정을
시리즈로 기술함으로 다윗의 역사를 살피는
그런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신성한 통치자의 왕국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으로,
거듭나는 삶을 통해 전진하는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해주고 인도해 줄 영적 가르침과 실용적 교훈을
어느 정도 끌어낼 수 있으리라 본다.
- - -
참고>
<.. 주님은 말씀을, 문자와 영 모두에서
그것의 가장 외곽까지, 모든 등차에서 완성하셨고
그리하여 주님은 영원 전부터 첫 원리들 안에 계셨던 것처럼
최 말단에서의 말씀이 되셨다.. >
여러 관련 글들을 옮깁니다.
브루스 목사 마태강해 5장 17-18 에서>
"..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 더 명백한 것은 진리 자체가 주님이신바
자신인 신성한 진리를 파괴해버리거나 폐지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삶의 의무들을 규정하는 법,
교리의 요점을 규정하는 진리를 폐지한다는 것은
생각해볼 수도 없는 터무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한번 진리였으면 그것이 어떤 주제로 되어 있었든지
영원히 진리이고 폐지된다는 것은 말이 될 수 없다.
진리의 주인에 의해 파괴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진리의 폐지가 아니라 오히려 더 개방되어
그분이 새로운 것을 나누어주시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즉 그분이 인성을 입으심으로 창조물에 숙박하실 수 있게 된 결과
인간의 심정과 지성, 그리고 인간의 안쪽, 바깥쪽 삶이라는
양 측면에서 진리의 적용이 있게 되어
하늘로부터 받은 진리가 더 깊숙이 소개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진리는 인간 측면에서 더 완성되어진다.
주님께서 율법의 일점일획까지 다 완성하셨다는 것은
진리 중의 진리에 해당된다.
그것으로 주님께서는 자신의 인성을 영화하신 뒤
인간 역시 그와 같은 과정으로 완성할 수 있는 길을 터놓으셨다..
순정기독교 제 4장 성서 또는 주님의 말씀에서>
261
11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
말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성취(fulfill)하셨고
그리하여 말씀의 가장 바깥의 형태에 있어서까지
말씀 즉 신성한 진리가 되셨다.
(바깥 : outermost, last, ultimate, 마지막, 궁극의, 말단의
형태 : form, principle 원리, level 등차)
이 내용이 요한복음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로 표의되고 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가장 바깥의 형태에서조차 말씀이 되셨다는 것이다.
가장 바깥의 형태에 있는 말씀으로서의 주님이 어떠했는지가
그분이 변모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나타내어졌다.(마 17:2-9)
마 17:1-3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거기서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났다고 기록되었는바
‘모세’로는 그분에 의해 씌어진(written) 말씀과
일반적으로 말씀의 역사적인 부분을 뜻하고
‘엘리야’로는 예언적인 부분을 뜻한다.
계시록에서도 요한은 주님을
가장 바깥의 형태에 있는 말씀으로 표징하고 있다.(계 1:13-16)
여기 주님에 관한 모든 세부적 묘사는
말씀, 곧 신성한 진리의 가장 바깥의 형태를 의미한다.
물론 주님은 성육신하기 이전에도 말씀 곧 신성한 진리셨으나
그것은 다만 첫 원리들(principles), 즉 가장 안쪽의 등차에서였다.
이것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요 1:1,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신 후
주님은 말씀의 마지막(궁극, 말단) 원리 즉 그것의 가장 바깥의 형태
에서까지 말씀이 되셨으니
이것 때문에 주께서 처음이고 나중이 되신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계 1:8, 11, 17, 2:8, 21:6, 22:13, 사 44:6)
브루스 목사 강해 마태복음 17장에서>
1,2 “엿새 후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으로 올라 가셨다.
그때 예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했다.” ..
2. 산에서 보여주신 주님의 모습에서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
주님께서 산에서 나타내신 영광은
그분이 수치스러운 시기동안 보여 오신
통상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이는 연약한 인성이 그 영광을 덮고 있었다는 것,
이 영광을 볼 준비가 되어진 이들이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덮개가 벗겨져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준다.
그분이 나타내신 이 영광은 신성한 본성의 영광은 아니었다.
그 이유가 어떤 인간도
본래 모습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모의 산에서 보여주신 영광의 광채는
(신성이 아닌) 인성 속의 영광이었다.
어떻게 그분의 인성은 통상 나타내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그 자체를 드러낼 수 있었을까?
주님의 인성이 여느 인간 존재의 것과 똑같았다면
이렇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의 인성은 인간 어머니쪽 뿐만 아니라
신성한 아버지로부터 파생되어졌다.
그러므로 내적 측면에서의 그분의 인성은
출생 때부터 신성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일생동안
이 ‘인성의 외적 측면’도 신성이 되어갔다.
이와 동일한 방법과 원리가 우리의 거듭남에도 적용된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내적 인간의 형상으로 점차 형성되어간다.
변모하신 때의 경우 주님의 인성은
그분께서 선발한 사도들의 눈으로 보여질 수 있을 만큼
영화되어 있었고
사도 자신들도 볼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이 준비란 그들의 영적 시야가 열리는데 있다.
3. 제자들이 영광에 싸인 예수를 보는데,
“난데없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말씀을 표현하는 성경의 대표적 인물이다.
모세는 역사적인 말씀을, 엘리야는 예언적 말씀을 표현한다.
누가(9:31)에 의해 말해지는 바,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는 일,
곧 그분의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
즉 십자가의 고통으로 완성되어지는
그분의 구속과 영화하심에 관한 이야기이다.
두 사람이 그분과 대화하는 것은 역사적 부분과 예언적 부분,
즉 모든 말씀이 주님과 그분의
인성의 영화하심을 취급한다는 것을 표현했다.
글자적 의미 수준에서는
말씀의 많은 곳에서 그분의 모습과
육 가운데 계시면서 하시는 그분의 일들이
공개적으로 취급되고 있으나,
가장 깊은 의미 즉 천적 의미에서는
'주님의 영화하심만'이 그 주제이다.
이에 대해서 매우 의아해 할 수 있지만
그에 대해서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씌어있는 말씀은
계시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말씀으로부터 발산된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신성한 생명과 빛, 신성한 선과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씌어있는 말씀은
그 본질적 측면에 있어서는 신성이고
그 말씀의 영적, 자연적 의미 곧 천사나 인간에게 알려진 부분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신성한 영광을 덮은 의복 외 더 다른 게 아니고,
그로 인해 씌어있는 말씀은 유한한 마음들로 직감할 수 있게 한다.
육을 입으시기 전 영원한 말씀되시는 주님은
천사가 볼 수 있는 덮개로 가리워 있었다.
그러나 그분이 세상에서 인성을 입으셨을 때는
인간이 그분을 볼 수 있는 의복으로 자신을 덮으셨다.
자연적 인성, 이 안에서 영원한 말씀이 세상에 나타나셨는데
이는 씌어진 말씀의 자연적 의미에 유추된다.
그래서 씌어진 말씀과 육이 된 말씀은 서로에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상응된다. (the written and the incarnate
Word corresponded to each other from first to last)
씌어진 말씀과 영원한 말씀 모두 그 자신을 옷 입힌 의복은
그 자체 천국과 지상에서 보일 수 있기 위해
천사와 인간의 유한한 본성으로부터 취해졌는바
그것들은 필수적으로 천사와 인간의 본성을 구성하는 모든 것,
즉 천사와 인간의 생각과 애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님의 생애는 말씀의 완성인바 말씀은
그분의 삶에 대한 계시 또는 그분의 삶의 역사이어야만 한다.
역사적, 예언적 말씀 모두는 그분의 영화하심을 취급해왔다.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루살렘에서 완성되어야할
그분의 죽음에 관해 그분과 이야기한 것이다.
천계비의에서>
10239
..
4) .. 성경에서 사람의 중생을 뜻하는 것은
또한 주님에게는 인성의 영광화를 뜻한다.
그 이유는 사람의 중생은
주님에게서는 주님 영광화의 형상(image)이기 때문이다.
(3138, 3212, 3296, 3490, 4401, 5688)
이것이 주께서 요한에게 세례받기를 원하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다.
마 3:15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룬다는 것은
주님 자신의 능력에 의해
지옥을 정복하고
그들과 천계를 질서에로 회복시키는 것을 뜻하고
동시에 주님의 인성을 영화하시는 것을 뜻한다. (이전 글 참조)
이 모든 것은 주께서 지속적으로 자신에 허락하신 시험을 통해,
심지어 십자가에서 겪으신
마지막 시험과 같은 지옥과의 투쟁을 통해 성취되었다.
이것이 주께서 성취하신 의(righteousness)를 구성한다.
(9486, 9715, 9809, 10019, 10152)
‘율법과 선지자의 기록에 주님에 관한 언급이 있다’는 것과
(눅 18:31, 22:37, 24:44)
‘나는 모든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왔다’는 주님의 선언은
(마 5:17,18) 바로 이와 같은 내용들인 것이다.
(즉 율법과 선지자의 기록에는 주님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자신에 대해 언급된 그 말씀들을 이루심으로
의를 성취하신바
그 의의 내용, 곧 주님이 세상에서 이루신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인류 구원을 위한 주님의 '지옥 정복'과 '인성의 영화'이고
동시에 이 내용이 말씀(율법) 전체에 기록되어 있기에
주님이 오셔서 그것을 다 이루심으로
성경이 응하게 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지옥 정복'과 '인성의 영화'에 대한 의미가 그만큼 중요한데
이에 대해서는 대해서는 다른 글들 참조..)
눅 18: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눅 22:37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마 5:17,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fulfill, 성취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5) 성언의 비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주께서는 율법을 이루시는 것에(계명을 완전히 지키심) 의해
의가 되셨다고 생각하며
이 성취로 인해 율법의 멍에와 저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이 말씀의 참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은
주께서 지옥을 정복하시고 천계의 질서를 회복하시고
그분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심으로 의가 되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광으로 인해
주님은 자신을 능력으로 채우셨기 때문인데
이는 그분의 '신성한 인간(Divine Human, 영화되신 주님)'을 통해
지옥을 영원히 정복하시고 천계의 질서를 회복하시고
사람을 중생시킬 수 있도록,
즉 지옥에서 구해내어 구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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