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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불교 문화유산 베스트 27
내가 불교에 관심이 많은 것인지 아니면 우리나라의 불교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은지는 잘 모르겠으나 지난주 《아미타경 마음공부》라는 책을 읽은데 이어서 이번엔 《우리나라의 불교 문화유산》이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둘 다 관심 가는 부분이기는 하나 이 책은 불교에 대해 공부하는 책이 아니라, 사찰 등 불교 관련 문화유산을 살펴보고 관련된 풍경들을 사진으로 보여주는 〈그림책〉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 같이 아름답고 귀중한 사진들이 많이 포함된 책이다. 저자인 박재호 선생은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아이들과 함께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 서예와 전각에도 관심이 많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책은 학생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미 한 번쯤 배운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공부는 예습도, 복습도 필요하고, 복습하는 마음으로 저자를 따라 여행하는 심정으로 저자를 따라서 소개한 부석사, 화엄사, 쌍계사, 송광사, 선암사, 금산사, 수덕사, 조계사, 월정사, 상원사, 해인사, 통도사, 봉은사, 용주사, 동화사, 법주사, 대흥사, 운문사, 전등사, 흥국사, 직지사에도 가보고 관련 역사와 유래도 더듬어 보려고 한다.
저자도 머리말에서 말했듯이 ‘여기에 소개한 사찰들은 특별한 순서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소개하였다.’는 것인데, 소개되지 않은 산사 중에는 더 아름답고 소중한 사찰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표적 사찰을 소개하고 있으나, 당장 201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봉정사와 마곡사가 빠져있고, 또 4월 초파일 하루만 개산함으로써 언제나 그립고 다시 가고 싶은 봉암사도 빠졌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700여년 전, 고구려는 372년 소수림왕 때 전진의 순도에 의해서였고, 백제는 고구려보다 12년 늦은 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에서 들어와 전했으며, 신라는 고구려에서 묵호자가 전했다고 하나 널리 전파되지 못하다가 527년(법흥왕14) 이차돈의 순교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삼국시대 불교는 국가성립과 왕권을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가야의 역사를 더듬으면 남방불교가 기원전 후에 이미 전래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도 있으나 기록과 흔적이 미약해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지.
하동 쌍계사는 아마도 봄에 가는 것이 제격일 것이다. 잘못하면 벚꽃 10리 길에 몰려든 상춘객과 차량으로 절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발길 돌려야 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쌍계사는 한국 전통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곳’이다. 근대시대에는 승려가 종교적 구도자 이전에 철학자이자 지식인이었다. 한국 선불교의 맥脈이랄 수 있는 최치원과 추사 김정희의 글씨에다 당나라에서 배워온 범패를 전한 진감선사와 그의 비, 팔영루(八詠樓), 그리고 지리산 작설차까지. 차례 지낼 때 쓰는 작석차는 828년(흥덕왕, 702∼737년)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씨를 가져와 심기 시작한 것으로 역사만큼이나 전통과 맥을 잇고 있다. 쌍계사는 의상대사 제자인 삼법과 대비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여러 번 여러 곳에서 살펴보지만, 송광사는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이다. 신라말 혜련선사가 길상사로 창건하고, 고려시대 지눌이 대구 거조사에서 정혜쌍수를 주장하다 정혜결사를 옮겨옴으로써 한국불교 수행의 요체로 크게 영향을 미쳤다. 정혜쌍수란 참선을 통한 선정의 상태 즉, 정(定)과 사물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지혜를 닦는다는 혜(慧)를 치우침이 없이 수행해야 한다는 것으로 지눌은 ‘단박에 깨달은 후에도 깨달음의 경지를 잃지 않기 위해 계속 수행해야 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장했다.
송광사 일주문을 지나면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한 칸짜리 척주각과 세월각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은 죽은 이의 위패를 모시기 전에 세속의 때를 마지막으로 씻는 곳이다. 구슬을 씻는다는 척주각에는 남자를, 달을 씻는다는 세월각은 여자를 모신다. 피안교를 건너면 금강문, 천왕문까지 몇 번이나 마음을 닦고, 마음의 때를 내보이며 검문받으며 가는 이승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씻을 것이 많은 것이 죽음으로 가는 것인가?
수많은 고승을 배출해 냈고 지금도 중생을 구제할 많은 스님들을 길러내고 있는 송광사는 오로지 수행에 정진하도록 계율이 엄격하기로 소문나 있다. 그래서인지 사찰 곳곳이 가지런하고 단정하다. 스님들의 수행처라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푯말이 많다. 그러나 출가인지 가출인지 알 수 없는 소년들을 달래어 집으로 돌려보내기도 하지만, 먼 길을 찾아온 나그네에게는 차 한잔 권하는 절집이 송광사다.
고향 고치 친구들과 찾았던 적이 있는 금산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인다는 김제평야를 굽어보는 모악산 기슭에 있다. 먹고살 만했을 고장에서 왜 그토록 다른 부처도 아닌 미륵을 기다렸을까.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입적한 56억 7천만 년 뒤에 구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온다고 하는 미래부처로 기독교의 메시아와 같다. 금산사에는 진표율사와 관련된 설화와 후백제 견훤의 애환이 오롯이 담긴 곳이다. 599년 백제 법왕의 복을 빌기 위해 지어졌다 하고, 766년 신라 혜공왕 때 진표율사가 중창하면서 크게 융성했다. 진표율사는 금산사의 상징이기도 한 미륵전을 세운 뒤, 미륵장육전을 조상하고 미륵사상의 기반인 법상종을 열었다.
수계의식을 행하는 계단(戒壇)은 통도사 ‘금강계단’과 금산사 ‘방등계단’두 곳뿐인데 계단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은 엄격하다기보다 인사를 건네는 경비병처럼 정겹기만 하다. 돌기둥에 새겨진 여러 인물상과 같이 마치 손을 잡아줄 듯하다. 금산사 답사에는 많은 의문점을 낳게 하는데 미륵전 앞마당에 놓인 거대한 석조물인 식련대도 그중의 하나다. 두 팔을 벌려도 넘치는 바위 받침은 두 겹으로 중대와 하대를 따로 조각하였지만, 그 위에 무엇을 모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미륵전에는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마주할 미륵불이 모셔져 있듯이 식련대 위에도 미륵을 모셨을까 하는 의문 말이다. 또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노주석도 그렇다. 탑도 아닌 것이 중간에 화사석이 있으니 석등일까 하는 궁금증 말이다.
‘옴마니 반메훔’이라는 이 주문은 재앙이나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주문이다. 관세음보살이 지켜 준다고 하는 주문으로 ‘연꽃 속의 보석’이라는 뜻으로 옴과훔을 합친 것이다. 옴,훔은 ‘알파에서 오메가(ΑΩ)까지’라는 뜻과도 상통한다. 널리 알려진 유명한 진언은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로 손오공 진언이라 하기도 하는 이것을 세 번 외우는 것이 〈천수경〉‘정구업진언’이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아주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참으로 기쁘다’라는 의미다.
예산 수덕사는 여러 가지 패러다임을 가진 절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대웅전(부석사 무량수전이 더 오래된 것으로 추정), 유행가 속의 ‘수덕사 여승’, 경허와 만공, 일엽스님 이야기까지. 현대 한국불교를 이끌어 가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곳이다. 자식에게 모든 것을 희생하는 어머니도 여자고 인간이듯이 수행하는 스님도 항시 번뇌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은 경허스님 일화를 통해 알 수 있게 한다.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554∼597) 때 지명법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서울 조계사, 월정사는 그냥 넘어가고 상원사로 가보자. 상원사는 옛날부터 문수보살 성지로 알려져 있다. 특히 세조와 관련된 설화가 많은데, 예종 원년 안동성에 걸렸던 신라 최고의 동종을 여기로 옮기며 있었다는 이야기도 그렇지만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된 세조가 꿈에 단종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등창으로 고생하던 중에 상원사로 오다가 하도 더워 개울에서 멱을 감다가 지나가던 동자에게 등을 좀 밀어달라고 부탁하였고, 임금의 옥체를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자, 동자가 어디 가서 문수동자를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 전설 같은 이야기까지...
아무튼 세조가 문수동자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또 동자상을 만들게 했다는 이야기까지. 문수동자상 복장에는 의숙공주발원문, 금동제 사리함 등 23점이 나왔는데 특히, 세조의 어의가 나왔고 피고름이 묻어 있었다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공주의 마음이 시간을 넘어 전해지는 것만 같다. 복장유물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하니 다시 가면 꼭 봐야할 것 같다.
상원사에 있는 적멸보궁을 보려면 오대산 중대 사자암을 지나 1시간쯤 올라야 한다. 선덕여왕 때 자장이 당나라에서 부처의 진신사리를 가져와 이곳 상원사와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 영축산 통도사에 모셨다. 그런데 다른 곳과 달리 상원사 적멸보궁에는 사리탑이 없다. 보궁 뒤 어디에 모셨다고 전할 뿐이다. 대신에 작은 비석 모양의 돌에 탑을 새긴 마애불탑이 있는데, 불탑 앞에서 진신사리가 어디에 있을까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 부처님을 친견한 것으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해인사에 대해서는 공부할 것이 많다. 무엇보다 팔만대장경이 아닐까 싶은데, 팔만은 아주 많다는 뜻으로 고대 인도에서는 많은 숫자를 ‘팔만 사천’이라고 했다. 81,258장 경판에 팔만 사천 법문을 새겼다. 대장경은 경장·율장·논장으로 경장은 석가모니가 생전에 설법했던 말씀, 율장은 불자들이 지켜야 할 규범과 석가모니 사후에 성립한 불교 교단의 여러 가지 계율, 논장은 석가모니 제자들과 인도, 중국 고승들이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 주석을 달거나 문헌과 불교에 대한 체계적으로 연구한 저서를 말한다.
팔만대장경은 1011년 처음 만들어(초조대장경)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였으나 몽골의 침략으로 불타버리자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그곳에서 1,800명 이상 장인들로 하여금 방대하고 엄청난 양의 경판에 글자를 새기게 했다. 글자를 새긴 후 해충과 좀이 쓸지 않도록 옻칠을 했으며, 그전에 주로 산벚나무로 만든 경판 원목은 1∼2년간 바닷물에 담가 나무 진액을 제거하고 바람에 말려 오랜 세월에도 갈라지거나 뒤틀리지 않게 했다.
작년인가 부산박물관에서 전시회를 가졌던 목조 ‘회랑대사상’은 가히 나이 든 어른을 대하는 것처럼 엄숙하기도 친근하기도 했으나, 앙상하고 가냘으며 노쇠한 체구에도 반짝이는 지혜의 눈빛이 살아 있음을 보았던 것 같았다. 그는 말 없는 설법으로 우리를 굽어보는 듯했다. 회랑대사는 후삼국 통일과정에 태조 왕건을 도왔으며 해인사를 크게 중창한 인물로 나무로 조각한 인물상으로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고 한다.
(회랑대사 목상)
서울 한복판(강남)에 있는 봉은사는 명종을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로 인해 크게 중창된 절이다. 당초 신라 원성왕 때인 794년 견성사였으나, 1550년 선종 중심의 보우를 주지로 삼으면서, 숭유억불로 폐지되었던 도첩제로 스님이 되는 길을 열어 지금의 코엑스 자리에서 2번의 승과를 실시하였으며, 이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선발됐다. 그러나 20년간 부흥했던 불교는 문정왕후 사망으로 침체되고,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되면서 승과는 폐지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등이 크게 활약하면서 어느 정도 불교가 인정받으며 한때 서산대사가 봉은사 주지가 되기도 했다.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다시 북청으로 유배당했던 추사 김정희는 말년에 관직을 버리고 봉은사에 머물렀다. ‘판전’의 현판은 추사가 죽기 3일 전에 쓴 마지막 작품이다. 기교 하나 없이 마치 어린아이가 쓴 것 같은 이 현판은 고졸미의 극치를 보인다. 낙관 위에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病中作)’이라고 썼으므로 ‘71세 병중에 과천의 늙은이가 썼다’고 했다. 추사는 죽기 5개월 전에도 인생의 참의미와 즐거움을 생각하게 하는 주련을 남겼는데, ‘大烹豆腐瓜羹菜 高會夫妻兒女孫(대팽두부과갱채 고회부처아녀손)이 그것이다. 가장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가장 좋은 모임은 부부 아들딸, 손자와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영원한 것이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 인생에서 세월이 흐를수록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판전-추사 김정희)
용주사와 동화사는 건너뛰고 법주사로 가보자. 부처가 아닌 부처님의 말씀인 법이 머문다는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때인 553년 의신조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의신이 나귀에 불경을 싣고 들어와 이곳에 머문 것에서 유래한다. 근년에 청동미륵대불이 조성되어 장엄함을 더하는 법주사는 역대 왕조의 비호를 받았다. 고려 공민왕은 이곳에 들렀다가 통도사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옮겨와 봉안토록 하고, 조선 태조 이성계는 상환암에서 기도를 드렸으며, 피부병을 앓던 세조는 복천암에서 법회를 열기도 했다. 속리산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있는 정이품 소나무는 세조의 가마가 이곳을 행차할 때 ‘연이 걸린다’고 외치자, 가지가 번쩍 들어 올려졌다고 하는 데서 이 소나무에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임란 때 법주사도 예외 없이 병화를 입었는데, 후에 사명대사 유정이 팔상전을 중건하고 벽암스님이 크게 중창했다. 팔상전은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목조탑이다. 금산사 미륵전도 목조전각이나 탑이 아니다. 탑은 산스크리스트어 ‘스투파’에서 유래하는데, 무덤이라는 의미다. 팔상전 에는 일반석탑처럼 사리를 모신 장치가 있고 벽에는 팔상도가 걸려있다. 화순 쌍봉사 대웅전도 탑형식인데 몇 해 전 불타 새로 지은 것이다. 지름 5m에 이르는 쇠솥은 3천 명분의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도구로 번창했을 때 법주사 규모를 짐작케 하고, 쇠솥보다 큰 석련지는 수조와 달리 연꽃을 장식한 연못처럼 보인다고 해서 석련지다. 와인잔 같기도 해 나중에 미륵불이 내려오면 이슬을 담아 축배를 들려는 것일까? 또 팔상전 앞에는 석등이 두 개가 있는데, 국보로 지정된 쌍사자 석등과 사천왕상이 새겨진 석등이 그것이다.
▢ 여기서 의상과 자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전국에 원효사, 원효암이란 절이 많이 있지만, 원효는 절을 짓지 않고 경주 근처 혈사(穴寺)에서 입적했다고 하는 것이고 보면 후대에 원효를 기리기 위해 절을 세웠다고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의상과 자장은 신라 왕족으로 왕실과 백성을 위해 절을 많이 지었다.
의상이 세웠다고 전하는 절은 대략 100여 개 정도다. 그런데 그 많은 절을 모두 의상이 직접 건립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낙산사, 부석사와 같이 직접 건립한 절도 있겠지만 부적을 날려 봉황이 내려앉은 자리에 세웠다는 봉정사의 경우처럼 의상의 권위를 빌어 건립한 절도 있을 것이다.
의상이 당나라에서 신라로 돌아온 해가 670년인데 영월 보덕사의 경우 668년에 건립했다고 하므로 의상에 의해 건립될 수 없다. 귀국하기 2년 전이기 때문이다. 결국 보덕사는 건립 이후에 귀국한 의상의 이름을 차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상의 이름을 차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신라가 추구한 통합 이념을 널리 전파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또 자장은 흥륜사 금당십성 중 한 사람으로 신라 고승 대덕의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부모님이 죽은 이후 처와 자식을 버리고 승려의 길을 걸은 늦깎이 승려다. 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으며 맹렬하게 고행을 이어가며 공부에 매진해 경지에 이르렀고, 선덕여왕 때 당나로 유학갔고, 선덕여왕의 부름에 의해 신라로 돌아와 분황사에 주석했다.
분황사에 머물면서 왕궁과 황룡사의 법회를 주관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법문을 하자 많은 신도가 몰려들었다. 특히 자장은 선덕여왕에게 건의해 황룡사 구층목탑을 세워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구심점을 마련했다. 목탑 층마다 신라를 둘러싸고 있는 적국의 이름을 새겨 신라를 감히 범하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양산 통도사, 울산 태화사, 공주 마곡사, 태백 정암사, 영덕 유금사를 지었으며, 화엄사에 대해서는 더 보면,
“《삼국유사》에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법사가 가지고 온 부처님의 두골(頭骨)과 어금니와 부처님 진신사리 1백과(顆)와 부처님이 입던 비단에 금점이 있는 가사 한 벌이 있었는데, 사리는 3등분하여 한 부분은 황룡사 구층탑에, 한 부분은 태화사(太和寺)탑에 있고, 한 부분은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戒壇)에 안치하였다고 했다. 몽고병란 때 황룡사 구층탑은 불타 없어지고 사리를 수습하여 태화사 탑에 함께 모셔져 있었다.
서산대사 비문에는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남쪽 지방에 있는 태화사 탑을 왜구들이 사리를 탈취할 것을 우려하여 사리탑을 해체하였는데, 탑에 두 개의 사리함이 모셔져 있었다. 전란이 끝난 후 태화사 사리는 사명대사가 원래 있던 탑에 다시 봉안하고, 황룡사 구층탑에 모셔졌던 사리는 1603년에 서산대사가 황룡사 구층탑이 있던 옛터에 석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였는데, 지난 1998년 구례 화엄사 서오층 탑에서 출토된 유골과 사리 22과가 바로 이것이다. 이 사리와 유골은 현재 어떤 경로로 여기에 모셔져 있는지 내력도 모른 채, 20년이 되도록 원래 자리에 봉안하지 않고 화엄사 수장고에 방치되고 있다고 한다.
비문은 이때 서산대사가 친히 짓고 써서 비석에 새겨 화엄사에 세운 것이다. 판본 사적기에 현재의 화엄사는 신라시대 황룡사라는 설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또한 비문에서 황룡사 터는 본래 단군이 처음 고조선을 건국하였던 도읍지 아사달이며 신시(神市)라고 하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조선의 역사 왜곡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최초 도읍지는 신선 세계로 삼신산의 하나인 지리산 서남단에 있었고, 이곳이 바로 고조선의 도읍지 아사달이라는 사실은 이미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최치원의 지증대사 비문과 성덕대왕신종에서도 밝히고 있다.
조선 건국 직후부터 일본에 나라의 주권을 바치기까지 500년 동안 숭유억불과 사대주의로 고조선의 도읍지는 평양으로, 신라 도읍지는 경주로 치밀하게 날조하고 원래 신라 도읍지인 구례군은 백제영토로 날조하여, 한국사를 초토화시켜 버린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서산대사는 비문을 통하여 바로잡고 있고,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 벽암대사*와 중관대사가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화엄사를 중건하면서 화엄사 사적기를 통하여 화엄사는 처음 흥륜사로 창건되었고, 현재의 화엄사는 황룡사라는 사실을 밝히며 날조된 한국사의 진실을 바로 잡고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유학자가 지은 역사서는 조정의 방침에 따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바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었다. 현재도 석가세존의 사리와 유골이 봉안된 4사자 3층 석탑이 해체되어 있으나, 해체된 지 1년이 다 되도록 문화재청에서는 아직 출토유물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현재 해체된 화엄사 4사자 3층 석탑은 자장법사가 가져온 사리와 유골을 봉안한 세 곳 중 태화사 탑이다. 비문에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때에 해체하였던 사리탑이 바로 이것이며 사명대사가 승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왜구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은 섬진강변의 석주관을 가리킨다. 사리탑 근처 암자 규모의 전각은 원래 서해 용왕이 중국 태화지(太和池)에서 자장에게 사리탑 곁에 전각을 지어 자신을 모셔달라는 요청에 따라 지어진 것이다라고 《삼국유사》에서 말하고 있다. [화엄사 창건주 연기조사와 불국사 사적이 범한 오류] - 작성자 조용호 – 이 부분은 좀 더 공부가 필요해 보인다.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 보은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설묵(雪默)에게 출가해 보정(寶晶)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부휴 선수의 제자로 속리산·덕유산·가야산·금강산 등을 유력, 정진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과 함께 수군으로 참전하여 명의 장수로부터 칭송을 받기도 했다. 지리산에서 충휘, 태능(太能), 응상(應祥) 등과 수행하며 선시를 많이 남겼다.
37세 무렵 스승 부휴가 투옥되면서 함께 연루되어 옥에 갇혔다. 이후 누명을 벗고 풀려났으며 광해군 때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으로 임명되고 봉은사 주지를 겸직케 했다. [불교신문]
지난주에 집사람과 같이 갔다가 오면서 대봉감 한 상자 사 오기도 한 운문사, 영취산에 오르면서 들렀던 것 같은 흥국사, 두륜산 대흥사, 강화 전등사 등은 넘어가고 직지사를 만나본다. 직지사는 418년(눌지왕 2)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아도는 묵호자와 다른 길로 신라에 불교를 전한 고구려 승려로 직지사뿐 아니라, 강화도 전등사(381년, 소수림왕11)와 신라 최초의 가람으로 알려진 구미 해평 태조산 도리사도 창건했다. 직지사의 창건 설화는 아도가 도리사에서 참선(참선대라는 바위돌이 있다)할 때 손가락으로 가르켜 저기에 절이 설 자리라고 했다고 하기도 하고,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참선에 의해 마음을 직관하여 부처의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또는 능여스님이 절을 중창할 때 자를 쓰지 않고 손으로 재서 직지라고 한다는 설도 있다.
직지사는 태조 왕건과 인연이 깊다. 견훤군과 팔공산에서 싸워 크게 패해 신숭겸이 왕건을 대신 변장해 죽자 왕건은 겨우 직지사로 피신했다. 이때 능여스님의 도움을 받았고 이후 직지사는 고려왕실의 비호를 받았다. 직지사에는 문경 도천사에서 옮겨왔다는 석탑 2개가 대웅전 마당에 우람하고 육중하게 서 있는데 석가탑을 닮았다. 고려말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석등의 간주석에는 호랑이 모양인 세호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다른 석등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세호는 왕릉의 망주석 등에 새겨져 있기도 한데, 망주석의 세호는 영혼이 드나드는 것을 상징하므로 이것도 그런 의미에서 만든 것일까? 직지사는 사명대사 유정이 출가한 절이다. 임란 때 유정이 공을 많이 세운 것을 계기로 왜군이 직지사도 가만두지 않았다. 이후 1735년 영조 때 크게 중창해 오늘에 이른다. 일찍이 중국의 곽암선사가 출가와 근기를 소에 비유한 심우도(십우도)를 직지사 대웅전에서 보면 까만 머리 하얗게 변해버린 내 모습을 비춰보게도 된다.
4일동안 불교와 절에 관련된 사진들을 보면서 되새겨 본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글로 옮겨보았다. 11월도 넘어가면서, 해마다 치르는 홍역 같은 수능도 엊그제 끝났다. 세월의 무상함만 탓하고 살수도 또 다가갈 수도 없는 것 같이 오늘이 마냥 맹랑하기만 하지만 늘 모두를 사랑해야지 하는 마음만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