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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安(평안)의 축복을 받으라 (34P)
평안> 평화> 화평> 평강이다.
1>.분명히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면, 평안이 강물 같이 흐른다.
2>.주님이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매일 매일 필요한 돈을 주심을, 첫돌이 된 어린 아이처럼 믿어 의심치 아니하면, 평안이 강물 같이 흐른다.
3>.버리고, 비우고, 낮아지고, 욕심이 없어지고, 하루 하루 살면, 평안이 강물 같이 흐른다.
어차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은혜로 사는 것이다.
4>.기도 응답이 있으니, 평안하다.
2020.7.5.세계 평화를 요청한 소년
마크 빅터 한센
헌팅톤 해변가의 우리 교회 주변에 사는 한 작은 소년이 '어린이 은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를 찾아 왔다. 그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저는 토미 타이예요. 이제 일곱 살인데, 어린이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싶어요."
나는 물었다.
"토미, 그 돈으로 뭘하고 싶니?"
"나는 네 살 때부터 세계의 평화를 이루겠다는 꿈을 가졌어요. 그래서 '평화,
평화를! 우리 어린이들을 위해서 평화를 지키자. 토미 타미 올림' 이라는 자동차 범
퍼 스티커를 제작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일천 장의 범퍼 스티커 인쇄비
454달러가 필요해요."
"내가 그 돈을 빌려 주마."
일단 범퍼 스티커가 인쇄되자, 토미의 아버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녀석이 대부금을 갚지 못하면, 자전거를 압류할 겁니까?"
토미는 아버지를 설득해서 로널드 레이건의 집에 데려 다 달라고 했다. 토미가
초인종을 누르자, 문지기가 나왔다. 토미는 2분 간에 걸쳐 거절할 수 없는 판매술
을 펼쳤다. 문지기는 지갑을 꺼내 토미에게 1달러 50센트를 주고 말했다.
"자, 내가 그것을 하나 갖고 싶구나. 여기서 기다리려무나. 내가 전 대통령을
모셔 올게."
그 다음에 그는 범퍼 스티커 한 장을 1달러 50센트짜리 계산서와 동봉하여 미
하일 고르바쵸프에게 보냈다. 고르바쵸프는 그에게 돈과 함께 '평화를 위해 나아
가세요, 토미군. 미하일 고르바쵸프 대통령' 이라고 사인한 사진을 보내 줬다.
토미의 평화 계획이 시작된 후, <오렌지 카운티 메지스터> 신문의 일요일 판
에 토미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마티 쇼는 토미를 여섯 시간 동안 인터뷰하고 멋
진 기사를 썼다. 마티는 토미에게 세계 평화를 위해서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
느냐고 물었다. 토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큰 일을 하기에는 아직 어려요. 아무래도 여덟 살이나 아홉 살이 되어야
이 지구상의 전쟁을 모두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누군가 죠안 리버스에게 토미의 인터뷰 기사를 보냈다. 그녀는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당장 토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토미, 네가 내 TV쇼에 나와 줬으면 좋겠구나."
"좋아요!"
"너에게 3백 달러를 주마."
"좋아요! 그런데, 나는 겨우 여덟 살이기 때문에, 혼자 여행할 수 없어요. 아줌
마가 우리 엄마의 경비도 대주실 수 있어요?"
"좋아!"
"내가 방금 본 '부자와 명사의 생활 방식'이라는 프로에 의하면 뉴욕에 가면
트럼프 플라자에서 자야 한대요. 아줌마가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어요?"
"그래."
"또 뉴욕에 가면 엠피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자유의 여신상을 필히 봐야 한다
던데요. 우리 입장권을 구해 주실 수 있어요?'
"그럴께..."
"좋아요. 참, 우리 엄마가 운전을 못한다는 말을 했던가요? 그러니 우리가 아
줌마의 리무진을 이용할 수 있을까요?"
"그럼."
죠안이 말했다.
토미는 '죠안 리버스 쇼'에 출연했고, 죠안과 스텝을 비롯한 스튜디오 방청객
과 TV 시청자를 사로 잡았다. 그는 매우 매력적이고 설득적이었기 때문에 방청객
은 즉석에서 지갑을 꺼내, 범퍼 스티커를 샀다.
쇼가 끝날 무렵에, 죠안이 물었다.
"토미야, 너는 네 범퍼 스티커가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 올 수 있다고 정말 믿
니?"
토미는 자신 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일을 시작한지 2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잖아요?
그만하면 잘 하고 있는 거죠?”
하나님의 恩惠(은혜)는 다시 밀려 옵니다 (9P)
은혜1>.BBC 특선 동물의 정신 세계!
개는 지름 1 키로, 수심 15미터의 드넓은 호수에
설탕 한 스푼을 섞어 풀어 놓으면,
예민한 후각으로 잡아 낸다.
돌고래의 청각은
움직이는 모든 것을
다 잡아 내는 네비게이션이다.
저 폴폴 나는 작은 미물인 나비는
더듬이로 냄새를 찾는데,
개 보다 후각이 더 뛰어 나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떻게 이렇게 오묘하게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것일까?
개와 늑대는 차이가 있다.
늑대는 자기 스스로의 본능을 따라 후각만 이용하나,
개는 사람의 지시와 시각을 먼저 따른다.
훈련된 것이다.
옛날 전도사 시절,
교회 중진들이 개를 잡아 먹으러 갔다.
산 속의 개를 키우는 곳에 가서
검둥이를 한 마리 잡는데,
개가 정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주인의 눈을 우러러 보면서
발발 떨면서
살려 달라고 애절하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죽으러 끌려 가지 않으려고
발을 버팅기며,
질질 끌면서 끄응- 끄응- 하며 울었다.
마지막애 주인이
'잘 가거라' 하며,
망치로 머리통에 내려 치니,
바로 죽었다.
자기가 키워서,
자기가 죽인 개를 잡아 뜯어 먹는 주인의 모습이
마치 악귀 나찰 같았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인들은
전부 경쟁이라도 하듯이
서로 개고기를 뜯어 먹었다...
세상에는흉악한 일,
가슴 아픈 일이
정말 많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일들에 휩쓸려 떠내려 가는 삶을 산다.
저 작은 동물 하나도
이토록 놀랍게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를 보라.
그 의미를 찾으라.
작은 것 하나도,
저 동물들과 미물들도,
꽃잎 하나도,
산들거리며 스쳐 가는 바람 한 자락도...
진정으로 사랑하라.
찬양하라.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을 찬양하라.
아울러 죄 많은 내 인생을 회개하라.
너의 삶을 돌아보라.
절대 남에게 신세 지는 삶을 살지 말라.
나를 기억하고,
나에게 선대하는 천사들을 소중히 하라.
반드시 은혜 갚는 삶을 살아라.
나의 성도들을 가슴으로 사랑하리라.
내게 선을 베푸는 저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랑으로 기도하고,
은혜 갚으리라.
못난 나를 정확히 보고
비난 비판하는 이들 앞에서,
진실로 겸허하게 무릅 꿇고 회개하는 삶을 살리라.
사랑하리라.
행복하리라.
그러나 내 인생의 주인이신 그 분의 끌어 가시는
내 삶의 무게를
묵묵히 감당하리라.
주님.
우리가 알지 못하고 행한
모든 죄와 악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殉命의 사람’
‘성령님의 侍從’
배종부 목사
은혜2>.맥스 루케이도 목사 - 하나님의 은혜는 다시 밀려 옵니다
요한복음 1:14-17절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텍사스 샌안토니오에서 오크힐스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이 댈러스를 방문하여 설교했습니다.
그 설교를 듣다가 큰 은혜를 받고 많은 눈물을 흘렸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텍사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동네 연못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열 살이 되던 해, 삼촌이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삼촌은 어린 맥스를 데리고 태평양이 보이는 산타 모니카 해변으로 갔습니다.
넓은 백사장과 끝 없이 펼쳐진 태평양 바다를 보고 어린 맥스는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맥스를 가장 감동시켰던 것은 끊임없이 밀려 오는 파도였습니다.
그 많은 물이 대체 어디로부터 오는지, 계속해서 맥스에게로 밀려 왔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물끄러미 쳐다보던 맥스는
삼촌을 보면서 조용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삼촌, 파도가 계속 밀려 와요.”
맥스는 충격을 받은 듯했습니다.
그 때 삼촌이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맥스, 너 그거 아니?”
“뭐요?”
“오늘 밤에 와도 파도가 계속 계속 밀려온단다.”
맥스는 말도 안된다는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농담하지 말아요. 어떻게 그렇게 많은 물이 있을 수 있어요? 말도 안 돼요.”
삼촌은 또 물었습니다.
“맥스, 너 그거 아니?”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흥분한 맥스가 뭐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1,000년 전에도 이 파도는 똑 같이 밀려 왔단다.”
눈이 휘둥그레진 맥스는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맥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삼촌은 또 한 가지 신기한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맥스, 너 그거 아니?”
또 놀랄 일이 남았느냐는 표정으로 맥스는 삼촌을 쳐다봤습니다.
“우리가 다 죽고 난 1,000년 후에도 이 파도는 계속 밀려 올 거야.”
맥스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표정으로
넓은 태평양에서 밀려 오는 파도를 넋을 잃고 쳐다 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삼촌에게 물었습니다.
“들어 가 봐도 돼요?”
“그럼!”
신이 난 맥스는 온 몸에 모래를 묻히고는 파도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밀려 오는 파도가 맥스를 덮치고 지나 갔습니다.
그러자 온 몸의 모래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맥스는 다시 모래사장으로 나와 모래를 더 묻혀서 파도에게로 뛰어 갔습니다.
그러면 여지없이 파도는 더 큰 팔을 벌려 맥스를 덮치고 지나 갔습니다.
1,000번을 뛰어 들어도 파도는 1,000번을 받아 주었습니다.
맥스는 그 날 진 종일 멈추지 않고 밀려 오는 파도와 그렇게 놀았습니다.
자기의 어릴 적 경험을 한참 신나게 이야기 하던 루케이도 목사님이 잠시 침묵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쳐다 봤습니다.
침 넘기는 소리 조차 크게 들릴 정도로 예배당이 조용해졌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와 같아서 1,000번을 넘어져도 우리를 향해 다시 밀려 옵니다.”
그 순간 마치 그 큰 예배당에 하나님의 은혜의 파도가 정말 밀려 오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 은혜에 압도 되었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받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파도가 계속 밀려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의 파도 앞에 서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제가 지난 주에 또 넘어졌….”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용서의 파도가 우리를 덮치고 지나갑니다.
“하나님, 제가 지난 주에 죄를 지었단 말….”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파도가 우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를 씻기고 지나갑니다.
그렇습니다.
이해할 수 있다면, 은혜가 아닙니다.
가늠할 수 있는 크기라면, 은혜가 아닙니다.
예상했던 반응이라면, 은혜가 아닙니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만큼은 절대 용서 받을 수 없을 거야’ 하고 생각할 때도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파도는 우리를 향해 밀려 옵니다.
십자가를 바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머리로도, 지식으로도, 경험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은혜3>.그런 줄 알았습니다
♡매일 웃고 살길래
슬픔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항상 씩씩하길래
아픔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언제나 강해
보이길래
눈물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늘 밝아 보이길래
고통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당신도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 가고 있었군요!
🍒토닥 토닥🍒
🍒힘내세요🍒
🍒당신을🍒
🍒응원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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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4>.돌아 보면 혼자인데...
⛪ 돌아 보면 혼자인데,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 돌아 보면 가진 것 없는데,
기도하니,
천국이 나의 것입니다!
⛪ 돌아 보면 나약한데,
기도하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 돌아 보면 사방이 막혀 있는데,
기도하니,
하늘 문이 열려 있습니다!
⛪ 돌아 보면 세상이 막막한데,
기도하니,
영원한 영생과 생명입니다!
⛪ 돌아 보면 내가 한 것 같은데,
알고 보니,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은혜5>.♡♡ 내일(Tomorrow)은 있나요? ♡♡
내일...
물을 주려던 그 꽃은
이미 시들어 죽어 가고
있습니다.
내일...
보러 가려던 그 사람은
이미 떠나 버리고 없습니다.
내일...
고백하려던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사랑하고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내일...
전해 주려던 그 말은 이미
내 머리 속에서 지워져 사라져 버렸습니다.
‘내일’이라는 숫자가 과연
있는,
있을런지도 모르는데
내일만
고집하고 계획하며 삽니다.
"내일" 해야 하는 백 가지 일의 이유 보다
지금 하고 싶은
그 한 가지 일의 이유가
더 소중한 것인 줄도 모르고,
불투명한 삶 속에서
내일을 기대하기 보다는
지금을 더 소중히 간직하고
지금 하고 싶은 일들을 하는 것이
나에게도 후회되지 않는
삶이 아닐까요?
그 올지,
안올지 모르는
"내일" 때문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당신이나 나의 삶 속에서
‘내일’ 이 영원히 없을 수도 있는데,
지금 이 한 순간, 순간을
소중히 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내일 보다 오늘을 더 생각하며
살아 가야 합니다.
나에게
언젠가는 오지 않을
그 ‘내일’이 있다는 사실을
정말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사람은 죽음을
늦어지게 만들 수는 있어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생명을 복제할 수는 있어도,
재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그 날이 온다 해도,
후회 없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떠날 수 있는 삶을 살아 보세요.
시간을 소중히 여겨
‘내일’ 보다는 ‘현재’ 를
더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보시는 것이 어떨런지요?
‘오늘’ 이라는 중요한 이 시간,
계획했던 일 잘 챙기시고
즐겁고 행복이 가득한 좋은 날 되세요.
♡건강하시고요~♡
대지를 식혀 주는 비가 내리길
기대하면서 힘내세요♡♡♡
사랑과 행복을 심는
♡♡ 당신의 사람 드림 ♡♡
은혜6>.바보 같이 살아 보는 것도?
다람쥐는 가을이 오면 겨울 양식인 도토리를 부지런히 땅에 묻어 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묻은 장소를 다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다람쥐의 겨울 식량이 되지 못한 도토리는 나중에
도토리나무가 되어 다시 다람쥐에게 도토리를 선물하게 되지요.
다람쥐의 기억력이 탁월해서
묻어 둔 도토리를 전부 찾아 먹어 버렸다면
산 속에 도토리나무는 씨가 말랐을 것을...
다람쥐는 어리숙함 때문에
또 다른 식량을 제공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어리석은 사람 찾기가 힘듭니다.
모두 영리하고, 똑똑하고, 계산이 빠르며,
이문(利文)에도 밝지요.
나와 당신 만은 그렇게 살지 말았으면...
나와 당신과의 관계는 그렇게 되지 말았으면...
평안을 찾아서...
욥 34:1-37절
(1)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2)지혜(智慧) 있는 자(者)들아. 내 말을 들으며, 지식(知識) 있는 자(者)들아. 내게 귀를 기울이라. (3)입이 식물(食物)의 맛을 변별(辨別)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分別)하나니, (4)우리가 스스로 옳은 것은 택(擇)하고 무엇이 선(善)한가 우리 끼리 알아 보자. (5)욥이 말하기를 내가 의(義)로우나 하나님이 내 의(義)를 제(除)하셨고, (6)내가 정직(正直)하나 거짓말장이가 되었고, 나는 허물이 없으나 내 상처(傷處)가 낫지 못하게 되었노라 하니, (7)어느 사람이 욥과 같으랴? 욥이 훼방(毁謗)하기를 물 마시듯 하며, (8)악(惡)한 일을 하는 자(者)들과 사귀며, 악인(惡人)과 함께 다니면서 (9)이르기를,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나 무익(無益)하다 하는구나. (10)그러므로 너희 총명(聰明)한 자(者)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단정(斷定)코 악(惡)을 행(行)치 아니하시며, 전능자(全能者)는 단정(斷定)코 불의(不義)를 행(行)치 아니하시고, (11)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報應)하사 각각(各各) 그 행위(行爲)대로 얻게 하시나니, (12)진실(眞實)로 하나님은 악(惡)을 행(行)치 아니하시며 전능자(全能者)는 공의(公義)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13)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계(世界)를 정(定)하였느냐? (14)그가 만일(萬一) 자기(自己)만 생각하시고 그 신(神)과 기운(氣運)을 거두실진대, (15)모든 혈기(血氣) 있는 자(者)가 일체(一體)로 망(亡)하고 사람도 진토(塵土)로 돌아 가리라. (16)만일(萬一) 총명(聰明)이 있거든 이것을 들으며 내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17)공의(公義)를 미워하는 자(者)시면 어찌 치리(治理)하시겠느냐? 의(義)롭고 전능(全能)하신 자(者)를 네가 정죄(定罪)하겠느냐? (18)그는 왕(王)에게라도 비루(卑陋)하다 하시며 귀인(貴人)들에게라도 악(惡)하다 하시며, (19)왕족(王族)을 외모(外貌)로 취(取)치 아니하시며, 부자(富者)를 가난한 자(者) 보다 더 생각하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들이 다 그의 손으로 지으신 바가 됨이니라. (20)그들은 밤중(中) 순식간(瞬息間)에 죽나니, 백성(百姓)은 떨며 없어지고 세력(勢力) 있는 자(者)도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제함을 당(當)하느니라. (21)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注目)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鑑察)하시나니, (22)악(惡)을 행(行)한 자(者)는 숨을 만한 흑암(黑暗)이나 어두운 그늘이 없느니라. (23)하나님은 사람을 심판(審判)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으시니, (24)세력(勢力) 있는 자(者)를 조사(調査)할 것 없이 꺾으시고, 다른 사람을 세워 그를 대신(代身)하게 하시느니라. (25)이와 같이 그들의 행위(行爲)를 아시고 그들을 밤 사이에 엎으신즉 멸망(滅亡)하나니, (26)그들을 악(惡)한 자(者)로 여겨 사람의 목전(目前)에서 치심은 (27)그들이 그를 떠나고 그의 모든 길을 무관(無關)히 여김이라. (28)그들이 이와 같이 하여 가난한 자(者)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상달(上達)케 하며, 환난(患難) 받는 자(者)의 부르짖음이 그에게 들리게 하느니라. (29)주(主)께서 사람에게 평강(平康)을 주실 때에 누가 감(敢)히 잘못하신다 하겠느냐? 주(主)께서 자기(自己) 얼굴을 가리우실 때에 누가 감(敢)히 뵈올 수 있으랴? 나라에게나 사람에게나 일반(一般)이시니, (30)이는 사특(邪慝)한 자(者)로 권세(權勢)를 잡아 백성(百姓)을 함해(陷害)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31)누가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징계(懲戒)를 받았사오니 다시는 범죄(犯罪)치 아니하겠나이다. (32)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惡)을 행(行)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 한 자(者)가 있느냐? (33)하나님이 네 뜻대로 갚으셔야 하겠다고 네가 그것을 싫어하느냐? 그러면 네가 스스로 택(擇)할 것이요 내가 할 것이 아니니, 너는 아는대로 말하라. (34)총명(聰明)한 자(者)와 내 말을 듣는 모든 지혜(智慧) 있는 자(者)가 필연(必然) 내게 이르기를 (35)욥이 무식(無識)하게 말하니, 그 말이 지혜(智慧) 없다 하리라. (36)욥이 끝까지 시험(試驗)받기를 내가 원(願)하노니, 이는 그 대답(對答)이 악인(惡人)과 같음이라. (37)그가 그 죄(罪) 위에 패역(悖逆)을 더하며, 우리 중(中)에서 손뼉을 치며 하나님을 거역(拒逆)하는 말을 많이 하는구나.
엘리후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욥에게 충고하고 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나님을 불의하다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내가 옳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보면, 욥이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를 懷疑(회의)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해하는 문제와 원리 원칙은 다른 문제이다.
엘리후는 욥의 상황을 충분히 알지만, 하나님의 의는 의라고 말하고 있다. 이 원리에 입각하여 욥에게 끝까지 하나님을 배반치 말라고 충고한다. 그리하면 평안을 얻을 것이라고 한다.
29절 말씀에서, 엘리후는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주께서 사람에게 평강을 주실 때에, 누가 감히 잘못하신다 하겠느냐?”
반대로 ,“주께서 자기 얼굴을 가리실 때에, 누가 감히 뵈올 수 있으랴?”
우리는 힘들고 어려울 때에라도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이 연단과 시험 후에 축복을 주실 하나님을 불신해서는 아니된다. 이 확실한 믿음으로 나아 갈 때에 마음의 평강이 있다.
이 어지럽고 혼돈한 세상에서 마음의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본문의 평강은 “마음의 평화”를 말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도 환경이나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한 고통을 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의 평화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다. 자신의 고통이나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민감한 사람이다. 이러한 연약한 마음으로 어떻게 평화를 지속할 수 있는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영혼과 육체 사이에서 끊임 없는 갈등을 겪는다. 이 갈등 속에서 어떻게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가?
참 그리스도인의 평화는 주님에 대한 신뢰 때문에 온다. 고통과 고난의 현장 속에서 그는 무력할지라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평화를 누린다. 억울하게 죽어 가는 사람을 바라 보면서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을 때에라도 그는 주님이 살아 계심으로 이 일 위에 간섭하심을 믿고 평화를 누린다.
이 평화는 무책임과 방관에서 오는 평화가 아니다. 가장 깊은 참여 속에서 오는 평화이다. 아파 하고 괴로워 하는 것 만큼 누릴 수 있는 평화이다. 주님의 평화는 그래서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고 깨끗한 심령 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외적인 번영은 평화와 무관하다. 하나님은 오히려 세상의 고통에 시달리는 가운데 평화를 주신다. 신자의 평안은 끊임없이 주를 의지할 때에 지속되는 것이다. 참 신자는 죽음 앞에서도 주를 의지함으로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1.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지속하려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2.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게 살아야 한다.
3.모든 걱정 근심을 주께 맡겨야 한다.
4.기도로 날마다 주께 고하는 삶의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14:25-28절
(25)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보혜사(保惠師)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聖靈)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27)평안(平安)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平安)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世上)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교회생활 중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나는 분들이 많다. 특히 강한 설교에 상처를 받아 마음이 찢어지고 상하시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한 가지 알 것은 상처를 많이 받아야, 강한 믿음이 된다. 상처를 많이 받아야 사람이 성숙해진다. 가만히 보면 상처를 잘 입는 분들일수록 그 신앙에 문제가 많고 성격에 모가 많고 독단적이고 편견에 사로 잡힌 사람이 많고, 신앙이 잘못된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는 그 잘못된 신앙을 깨뜨려 주어야 한다. 신앙이 강하고 바른 신앙이 되어야,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함께 하는 것이다.
오늘 예배에 나오신 분들은 믿음이 있는 분들인 줄 알고, 강한 말씀을 좀 전하고자 한다. 다소 마음이 상하시고 찢어지는 가운데에서라도, 은혜 받으시기 바란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3년 동안이나 친히 함께 먹고 자면서 제자를 가르치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자,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가르쳤던 제자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뿔뿔이 다 흩어져 버렸다.
본문 말씀을 보시면,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제자들을 모으시고, 말씀하신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가야 한다. 내가 가고 나면 보혜사, 은혜를 보증하시는 분,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이 오실 것이다. 그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생각하게 하실 것이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전혀 다르다. 이제 이후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너희와 늘 함께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가 떠나 가는 것을 섭섭히 여길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따른다면 오히려 내가 가는 것을 너희는 진심으로 기뻐해야 한다. 내가 떠나 가야 성령님이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성령 하나님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예수님은 성령님의 모습으로 우리 속에 와 계신다.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으려는 자는 성령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고, 성령 하나님을 모르고는 참 신앙, 참 하나님을 모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성령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아니하고, 전혀 엉뚱한 허공을 치는 신앙생활과 기도를 하고 있다.
오늘 5교구 구역예배를 갔는데, 어느 여집사님이 두통이 있다고 했다.
순간 내 마음 속에 “내가 저 집사님의 양쪽 관자놀이를 누르고 전체가 함께 간절히 기도하면, 틀림 없이 낫는다.” 는 확신이 왔다.
그래서 “집사님 두통이 낫도록 기도합시다.” 했더니, 집사님 하는 말이 “괜찮아요. 집에 가서, 약 먹지요.” 했다.
순간 믿음이 탁 깨어져 버렸다. 그래서 그냥 기도하고 말았는데, 나오면서 내 마음 속에 “안 나았을 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 우리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하고 임재하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안 믿는다. 그래서 삶에 기적이 없다. 신앙의 역사가 없고, 생동력이 없다.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의 신앙생활 밖에는 못한다.
그러나 얼마나 메마르고 공허하고 갈급한가?
저는 지난 10여 년 간 만성적인 두통에 시달려 왔다. 일주일에 2일 정도는 강한 두통이 온다. 그럴 때마다 사리돈을 먹었다. 아마 제가 지금까지 먹은 사리돈의 숫자는 여러 수 천개가 넘을 것이다.
얼마 전에도 심방을 가서 기도하는데, 아침부터 강한 두통 속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침 심방 받는 집 성도가 두통을 호소했다. 권사님이 대표기도 하는 사이에 혼자 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제 두통을 없애 주십시오. 자기 병도 못 고치는 자가 성도의 두통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한들 낫겠습니까?”
양쪽 관자놀이를 꽉 누른 채, 1분 정도 강하게 기도했다. 머리가 나아 버렸다. 그 날 후 벌써 보름이 넘었다고 생각되는데, 한 번도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아마 모르긴 해도 저는 이제 다시 두통이 오면 사리돈 먹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기도하고 고쳐 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사리돈과는 영원히 이별했다.
여러분! 성령 하나님은 오늘 이 순간, 아니 일평생 동안 우리 가슴 속에 와 계신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성령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그 분에게 기대하지도 않고, 역사를 바라지도 않고, 그 분에게 호소하지도 않는다. 그 분을 아예 외면해 버리고 산다. 아니 잘 모르고 산다. 성령 하나님이 계신지, 어디 계신지도 모르고 산다. 완전히 허공 치는 신앙생활 한다.
늘 귀를 기울여 성령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내 마음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내 삶이 어떻게 달라져 가기를 원하시는지, 내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시는지, 성령 하나님이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언제나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 한다.
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특별한 사람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와 똑 같은 사람들이었다.
엘리야가 얼마나 위대한가?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말하기를, “그는 우리와 성정이 똑 같은 평범한 사람” 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평범한 그들이 그렇게 놀라운 사람들이 되었는가?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령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권능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자기 가슴 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며, 성령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성령 하나님을 만나지 아니하고서는 우리 신앙생활은 의미가 없다. 역사가 없다. 변화가 없다. 기쁨도, 감사도, 진정한 내적 평안도 없다. 사실을 말하면 우리가 “기쁘다, 평안하다, 감사하다” 하는 것은 전부 세상 것에서 오는, 우리 영혼을 속이는 헛된 환상들일 뿐이다.
주신 말씀 중에서 예수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말씀했다.
주님의 평안은 무엇이며, 세상이 주는 평안은 무엇인가?
예전에, 제가 섬기던 교회 여집사님 한 분이 제가 그 교회를 떠난지 1년 쯤 후에 전화를 해 왔다.
“목사님! 면허증 있으세요?”
“없어요.”
“면허증 따세요. 제가 차 한 대 사 드릴께요.”
웃고 말았다.
한 달쯤 후에, 또 전화가 왔다.
“목사님. 기도 중에 꼭 목사님께 차를 사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갑자기 제게 돈이 생겼는데, 기도 중에 교회 건축헌금으로 1,000만원 드려야겠다는 믿음이 와서 당장 헌금해 버렸어요. 그 다음 생각하니 목사님 차 생각이 나서, 돈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났어요. 며칠 내로 저희 집에 오세요. 돈을 드릴께요.”
여러분!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런데 별로 기쁘지 않았다. 기대가 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가지 않았다.
그 집사님이 빈 말 할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지만, 그런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기나 긴 세월들이 지나 갔다.
나는 그 동안 총 8분의 목사님들에게 차를 사 드렸었다.
내 평생 100여 대는 사 드리지 않을까 싶다.
저는 지금도 생각해 본다. 만일에 제가 그 때 돈을 받아 와 차를 샀더라면,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소유로 인해 생기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다. 믿음 때문에 오는 기쁨 같지만 아니다.
사업이 잘 되어 오는 기쁨과 감사, 자녀가 일류 대학에 들어 가 오는 기쁨, 집을 헐 값에 사서 기쁜 마음, 주님이 축복으로 주시는 평안이요 기쁨인 것 같지요? 천만에. 모두 세상 기쁨이다. 증명해 볼까?
사업이 잘 되어 오는 기쁨과 감사?
사업이 안되면, 불평과 원망으로 바뀐다.
자녀가 일류대학에 들어 가 오는 기쁨?
대학 떨어지면, 낙심과 좌절로 바뀐다.
집을 헐값에 사서 기쁜 마음?
집을 억울하게 빼앗기면, 마음 속에 씻을 수 없는 ‘분집’이 생긴다.
실제로 나는 부도가 나서, 억울하게 집 전세금 2,000만을 빼앗긴 경험이 있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아니다. 아니다. 우리는 착각하면 아니된다.
돈 한 보따리가 생기면 평안이 온다.
그러나 얼마 못간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가짜이다.
젊은 남녀가 서로 좋아 죽고 못 살아, 결혼해서 신혼 가정을 꾸미면 행복이 온다. 그러나 불과 1-2년이다.
썩고 변질되고 사라지는 것은 전부 세상이 주는 평안이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 감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철저히 내면적인 것이요, 영적인 것이다.
소유적인 것, 환경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의 이 모든 것이 다 없어지고 사라져도 그대로 조금도 변질 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평안이요 기쁨이요 감사이다. 내 앞 길이 멀고 험하여도 주님만 따라 가는, “오직 예수” 그 믿음 안에 있는 평안이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을 바라 본다.
진실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과연 몇 몇이나 될까?
진실된 평안을 소유한 성도들이 과연 몇 몇이나 될까?
10%일까, 20%일까?
성도들은 그렇다 치고, 내 믿음은 그러면 도대체 어느 경지까지 와 있는 것일까?
나는 과연 이러한 설교를 할 자격이나 있는 것일까?
진실된 믿음이란 세상의 변화와 자신의 환경의 변화에 따라 흔들리는 믿음이 아니다. 자신이 죄짐, 질병의 짐, 무거운 삶의 짐을 십자가 밑에 풀어 놓은 믿음이다. 주님께 다 맡기고 주님만을 바라 보는 믿음이다.
어느 신실한 주의 종은 “일생 동안 주를 믿었으나, 내 마음 바쳐 믿지 못했네.” 라고 고백했다.
우리 가운데 평안과 행복을 찾아 헤매지 않는 사람이 여기 어디 있는가?
그러나 진실로 평안과 행복을 찾았는가?
예수를 믿지만, 우리 자신을 바라 보면 한심한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믿음이 없다. 내적 평안과 기쁨이 없다. 기도 응답의 확신이 없다. 그저 답답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게 영적으로 캄캄할 뿐이다.
환경도 캄캄하고, 가정도 캄캄하고, 내일도 캄캄하고, 더 더욱 내 심령은 시커먼 암흑 천지 속에 갈 바를 몰라 헤매고 있다.
‘평안의 영성’ 을 길러야 한다. 정말 걱정 근심 염려, 불평 불만 원망, 미움 다툼 시기 질투를 버리는 ‘3대 영성 훈련’ 을 필히 해야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와 성령’을 받아야 한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만든 믿음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 하나님을 내 가슴이 만나야 한다. 성령 하나님이 내 영혼을 붙드셔야 비로소 삶이 변하고, 평안이 오고, 새로운 영의 세계가 전개되는 것이다.
은혜를 사모하고, 은혜를 받아야 한다. 한번 감정적으로 충만해지는 그러한 지나 가는 은혜가 아니라, 좋은 설교 한 편 듣고 감동하는 그런 은혜가 아니라, 내 삶을 결단하고, 내 삶을 바쳐 주님을 만남으로 오는 그러한 은혜를 받아야 한다.
오늘이 바로 그러한 날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오늘이 지금까지의 나의 신앙의 관점이 변하고, 나의 삶이 변하고, 나의 영혼이 변하고, 나의 기도가 변하는 그러한 성령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예수님을 믿고 수 십년이 지나도 얼굴이 행주 걸레 짜 놓은 것 같은 사람들,
남의 흠과 수치를 할퀴어 점점 더 큰 상처를 만드는 사람들,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말라 비틀어져 있는 사람들, 가슴이 뜨겁지 못하고 냉냉한 사람들...
다 평안이 없는 사람들이다.
다 성령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다.
다 변하지 않은 사람이다.
다 거듭 나지 못한 사람이다.
다 일평생 교회 다니고서 마지막에는 지옥 갈 사람들이다. 지금의 당신의 영성이 내일의 당신의 영성이요,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 된다.
‘말로만 믿는 구원’, 그런 소리일랑은 아예 하지도 말라.
그러니 헛수고 그만 하고, 일찌감치 나이 더 들기 전에 세상에 나가서 마음껏 향락 누리고 죄 맛이나 보다가, 지옥 가는 게 화끈하고, 차리리 낫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 부요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또는 고상한 인격이나, 많은 지식을 가졌기도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허접 쓰레기들로 평안과 행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돈을 바라 보는 사람, 지위를 바라 보는 사람, 세상에 관심을 두는 사람, 영적인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가 없다.
젊은 날, 목회자인 저는 꿈이 있었다. 돈이 마련 되면 외국 가서 공부를 몇 년 간 더 하여 박사 학위를 받는 것이었다. 석사 학위는 있으니까, 몇 년만 더 공부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후 선교학박사 학위 과정을 공부하다, 과정을 다 끝내고 돈이 없어 수료로 끝나고 말았다. 여러 번 박사 학위를 준다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만 두었다. 더 이상 세상의 박사 학위는 내 관심 밖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변했다. 이 시대에 진정한 목사는 박사 학위 가진 목사가 아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을 소유한 목사이다.
지금 저는 오로지 성령, 성령님 뿐이다. 저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모하는 나에게 성령의 사람, 성령의 목사가 되게 해 주실 것이라는 인간이 줄 수 없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다.
지금 저는 마치 바람이 가득 든 풍선처럼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그런데 악령이 얼마나 역사하는지...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러나 저는 쓰러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반드시 이기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를 붙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은 세상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역사하시지 않는다. 믿는다 하나 세상에 관심이 가 있는 사람에게는 역사하시지 않는다. 관점이 변해야 한다. 마음이 오로지 하나님을 주목해야 한다.
어느 권사님이 시집을 갔는데, 첫 날 밤에 신랑이 돈 보따리를 한 아름 안고 들어 왔다.
“여보! 이걸로 우리 무얼할까? 당신이 쓰자는 대로 쓸 거야.”
권사님이 너무 너무 행복했다.
“쓸 데 없는데 쓰지 말고 잘 보관했다가, 장래에 찬찬히 계획을 세워, 삶의 밑천으로 삼읍시다.”
아내는 희망과 남편에 대한 든든한 신뢰감으로 온 세상이 황금빛으로 보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남편이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 버렸다. 그 후 한 번 보여 준 돈 보따리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했다.
권사님은 생사를 알 수 없는 남편을 기다리며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몸부림치며 기도했다. 철야하고, 금식하고, 울고 불고...
그러는 가운데 큰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 주님의 큰 역사를 감당하는 종이 되었다. 권사님이 되신 후, 그 분은 이렇게 고백했다.
“그 때 남편이 돈 보따리를 내 놓았을 때에, 예수 믿는 사람을 돈으로 미혹하지 마세요. 돈보다 주님 뜻에 맞게 사는 게 더 중요하지요 라고 말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태백기도원(소원의 항구)의 이옥희 원장의 고백이다.
여러분!
우리 삶을 돌아 보자.
돈에 더 관심이 많은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데, 더 관심이 많은가?
물질이냐, 하나님이냐?
양심에 물어 보자.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가, 아니면 자신과 가족과 돈과 세상을 더 사랑하는가?
나의 진정한 양심을 한번 뜯어 보자.
우리 믿음은 가짜이다. 우리 믿음은 헛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교회당에 와 앉아있지만, 실상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내가 만든 가짜 신을 좇아 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살면서 돈 때문에, 남편이나 아내 때문에, 자식 때문에, 병 때문에, 직장이나 사업 때문에 속이 썩는 분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모두 그런 분들일 것이다.
속이 푹푹 썩는데, 무슨 평안이 있는가?
내 딴에는 아무리 기도해도 현실이 바뀌지 않는데, 무슨 수가 있는가?
그러나 여러분!
이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절규하며 끝까지 매달려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을 붙들어야 한다. 내가 정말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는가를 묻고 또 물어 보아야 한다.
인생의 바닥에 내려 가는 절망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필사적인 기도를 드릴 수 없다. 자신의 죄성과 한계성을 처절히 느껴 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다.
“도대체 이런 형편과 처지에서 내 몸과 마음이 이토록 고달프고 괴롭기만 한데, 나는 어떻게 합니까?”
고난과 고통, 번민 가운데 깨달아야 한다.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하나님은 나의 생애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려 주시지 않는다. 내 앞 길을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가르쳐 주시지 않는다.
“너는 이런 그릇이다. 너의 장래는 이렇게 저렇게 될 것이다.”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은 삶의 불 같은 역경 속에서 들려 온다.
삶이 콩 볶듯이 볶이는 분, 앞 길이 막막하신 분, 도무지 기도 줄을 잡을 수 없고, 삶을 어찌했으면 좋을지 알 수 없는 분들은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 계실까? 나는 어떻게 주님의 뜻을 발견할까?” 몸부림치며 기도해야 한다.
성령 하나님을 만나려고, 찾고 또 찾아 가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 빨리 깨닫는 만큼, 하나님의 축복과 응답이 빨리 온다. 가야 할 길이 얼마나 창창한데... 시간이 얼마나 촉박한데...
이렇게 죽은 신앙생활로 허송 세월을 해야 하는가?
몸부림 치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성령을 찾아서 만나면, 자신의 사명을 바로 깨닫게 되고, 깨닫게 되면 기도 제목이 달라지고, 기도가 달라지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삶을 비로소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삶이다. 이것이 진정한 평안의 삶이다. 이 하나님의 뜻 위에서 인생을 설계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인생 길이 전개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업가에게는 사업의 재능을 주신다. 봉사자에게는 봉사의 사명을 주신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사명을 주신다. 하나님의 뜻에 반한 다른 길을 걸어 가며 아무리 기도해 봐야 헛 일이다. 그러므로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빨리 찾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신앙생활을 해도 순종적인 자세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인생 설계를 해야지 기도가 응답이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철저하시고 명백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헤아리고 중심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자신의 길을 발견하였을 때 하나님은 형통함으로, 평안함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의 세상적 안목이나 욕심을 그대로 다 가려 내신다.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형통의 축복이 저절로 찾아 온다.
인생을 살아 가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사명을 자각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사명을 자각한 자에게 하나님은 바른 인생 길을 걸어 갈 힘을 주시고, 선한 것,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열성을 주시고,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귀한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그럴 때 자신의 교만, 고집, 욕심, 내 뜻이 다 사라지고, 겸손히 하나님 예비하신 길을 순종으로 걸어 가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 버려야 한다.
주님 안에서 인생 설계를 다시 해야 한다.
시모하는 마음으로 주님 만을 바라 보고, 달려 가야 한다.
세상에 맞추지 말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맞추어야 한다.
주님이 주시마 약속하신 평안을 달라고, 나를 변화 시켜 달라고, 간절히 간절히 사모하며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부족함은 보혜사 성령님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해 주실 것이다. 모든 불안, 공포, 근심, 걱정, 병마, 고통, 문제, 악마의 그림자는 흔적도 없이 쫓겨 갈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을 때, 비로소 우리 인생은 변한다. 악마가 활동할 수 없는 주님의 평안을 소유한 심령에게는 저절로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고, 축복의 역사, 형통의 길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 놀라운 평안이 저와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시기를 축원한다.
2021.3.8.월. 00시 55분. 땀과 눈물과 피 흘림(4P)
목사는 영적 價値(가치)를 먹고 사는 자이다.
같은 돈 100만이라도, 그 영적 가치는 다 다르다.
악한 돈 100만도 있고,
더러운 돈 100만도 있고,
썩은 돈 100만도 있고,
그냥 돈 100만도 있다.
목사가 자기 땀과 눈물과 피 흘림이 없이,
교회의 공적인 돈으로 선행을 베풀고,
구제하고,
지출하는 돈...
그런 돈들이다.
개척교회 목사는 피치 못할 경조비도, 교회 사무비도, 식사비도 다 자기 피 같은 생활비에서 돈이 나간다.
나는 돈이 없어 마땅히 경조비를 지급해야 할 곳에도 하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 많다.
땀이 묻은 100만도 있고,
눈물이 묻은 100만도 있고,
피가 묻은 100만도 있다.
내게 너무나 소중한 分身(분신) 같은 목사님이
토요 <성령사관학교>에서 작은 헌금을 드리며,
“물질의 문제를 풀어 주소서” 기도한다.
그 입이 무거운 분이라,
가슴이 미어진다.
큰 돈도 아닐 텐데...
단지 몇 백만원만 있어도
헌금 잘 드리고, 행복한 목사님일 텐데...
단돈 50만이라도 드릴 수 있다면...
이렇게 절절이,
눈물로,
아픈 가슴으로 살아 가는 삶이
아름답다.
부자로 살고,
풍요로 살고,
배를 두드리며 남의 가난과 아픔의 현장을 모르고 사는 삶은
곧 지옥 행의 삶이다.
그냥 목사는 필요 없다.
땀을 뿌리고,
눈물을 뿌리고,
피를 뿌리는 목사라야
예수님을 닮은 목사이다.
가난해야 한다.
대책이 없이, 가난해야 한다.
절절이 가난해야 한다.
그리해야 진실로 탄식의 기도가 나온다.
애통의 기도가 나온다.
그러고도 평안과 자유와 행복과 풍요가 가득한 삶이라야
진정한 신자요, 목사이다.
나는 牧師(목사)이다.
주님! 돈 주세요...
저기, 저 분 좀 드리게요.
저 목사님 좀 살리게요...
나는 죽는 날까지
그러다가 죽을 것이다.
그리고 행복할 것이다.
땀이 있고,
눈물이 있고,
피 흘림이 있는 사람의 삶은
언제나 아름답다.
그리고, 오늘 바로 나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3월 8일 월요일,
000 목사님께 60만 생활비 보내고 나니, 5원 잔고가 남았다.
너무 부자가 된 마음이었다.
3월 9일 화요일,
<기적 기도대성회> 헌금이 36만 들어 왔다.
강사이신 권재천 목사님께 경동시장에 가서 쇠고기 등심을 사 와서, 7명의 사람 들을 정성껏 대접하고,
강사비 36만 드리니,
또 잔고가 5원이다.
얼마나 행복한지...
아멘.
저는 진실로 부자입니다.
주님은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하루 하루 저의 경제를 책임 지십니다.
그래서 저의 경제는
<5병2어 선교경제> 입니다.
<성령 컨퍼런스>에 온 지방의 사람들을
코로나 탓으로 재울 데가 없어,
호텔에 방을 몇 개씩 얻어서, 재운다.
보라. 나는 얼마나 후한 부자인가?
주님의 일이라면 돈을 아끼면 안된다.
낭비는 더 더욱 안되지...
제2차 ‘5병2어 선교경제’ 기도:2021.3.10.수
주님! 오늘 우리카드 446만 막아야 합니다.
12일에 비씨카드 125만 막아야 합니다.
15일 이0송 목사 100만, 이0영 사모 100만, 아들 빚 100만, 현대카드 480만, 이0순 권사 100만, 서울부흥단 단비 100만, 안00 권사 생활비 100만, 차량비 67만, 30만, 적금 50만, 주택부금 20만, 강사비 200만, 4월 5일 권00 형님 목사 빚 330만+10만, 강00 목사님 빚 400만+15만, 총액 2,773만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기적으로 채워 주옵소서.
주님! 일일이 채워 주옵소서.
주님! 제게 2,000만 선물을 주사, 카드 빚들과 약관대출 빚들을 좀 정리하게 해 주세요. 너무 복잡합니다.
오직 종을 인도해 주세요.
저는 언제나 돈으로 기쁜 사람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하루 하루 딱딱 채워 주시니까...
3월 10일 수요일,
오늘도 하나님의 돈의 기적의 날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들에 쓸 돈들은 액수에 상관없이 그대로 딱딱 집행합니다.
내가 목숨 걸고 주님 일 하면,
주님은 딱딱 하루 하루 돈을 주십니다. 아멘.
사람들은 자기 안전벽을 구축하지만,
저는 이런 돈으로 주님의 일들을 밀고 나갑니다.
언제나, 매일 매일...
피를 철철 흘리면서...
사람들은 나를 욕하지.
미친 놈이라 하지.
그래...
나는 주님께 미쳤고,
주님의 일에 미쳤고,
그래도 돈도 일반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이, 쓴다.
그리고 그들은 다들 나를 떠났다.
그러나 당신들이 버린
여기 나는,
여전히 주님이 붙들고 계시고,
기적의 <5병2어 선교경제>는 여전히 힘차게 돌고 있다.
매일 <총회서울부흥전도단> 의 부흥사 한 분 씩을 위하여 기도하라.
2021.3.10.수. 오직 하늘나라에 모든 삶을 던지는 <성령의군대> 대장군 강한나 목사
일전에 강한나 부목사님이 부산의 남편 박요한 장로님께 가면서, “앞으로 10여 일 가량, 부천의 저렇게 좋은 우리 집이 비어 있는데, 누가 썼으면 좋겠다.” 했는데, 몽골 선교사 김장환 목사님이 그 다음 날 오셔서, 집을 쓰게 되었다.
돈으로 따지면 하루에 모텔비로만 따져도 5만은 능히 되고, 집안 독채를 쓰니 일류 호텔이라, 10만은 능히 된다. 강목사님은 단 열흘 만에 천국에 100만을 투자한 것이다. 천국의 부자인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영적인 돈 계산을 할 줄 알아야 한다.
평소에 강목사님은 5일 간 새성교회당에서 자고, 2일 간 집에서 잔다. 그러면 몽골 선교사 김장환 선교사님은 반대로 2일 간을 새성교회당에서 자고, 5일 간을 강목사님의 집에서 잔다. 앞으로 몇 달 간 이렇게 계속될 일정이다.
요즘 세상에 어느 누가 자기 집안을 알알이 다 보여 주며, 민낯을 다 드러 내어 까발리나? 권재천 목사님이 하는 말이 강목사님은 천진난만한 아기 같단다.
그럼! 정말 티 없는 분이지!
하늘의 천사지...
한국교회의 부흥사인 나 배종부 목사의 새성교회는 연중 무휴로 계속 부흥집회가 돌아 간다. 월 화 수 <연합기적기도대성회> 6회, 토요일 종일 <성령사관학교> 4강의, 매월 2박 3일의 <성령 컨퍼런스> 연속 12-15 강의, 주일 예배 2회, 매주 연이어지는 외부 출타 부흥성회, 이제 2021년 4월에 나 배종부 목사가 <총회서울부흥전도단> 단장이 되면, 연간 200여 회, 매일 2회 정도 연속될 부흥성회 인도와 동참...
이제 이후 강목사님은 나를 대신하여 강단을 맡을 일이 더욱 더 많아질 것이다. 주님의 일이 바빠서 집에도 가지 못하는 것이다.
강목사님은 매 예배 시간 마다 헌금을 만원씩 드린다. 십일조랑 주일 각종 헌금을 합치면 100만은 능히 넘는다. 다른 데 쓸 돈도 없지만, 전부 헌금이다.
나는 강목사님이 나의 박요한 시무장로님의 부인이기에 성도로 인정하여, 사례도 100만 밖에 드리지 않는다. 2-3년 전에는 월 200만의 사례를 드리며, 함께 3분의 부목사를 썼는데, 코로나 사태 이후에는 돈이 없어, 못한다.
정말이지 강목사님은 단 돈 한 푼도 허비치 않고, 있는 힘을 다하여 모두 헌금한다. 강목사님은 영혼육의 모든 삶이 전부 주님께 드려진 삶이요, 점도 흠도 티도 없이 산순교로 헌신하는 위대한 종이다.
내가 늘 말하지!
봉사> 충성> 헌신> 산순교> 순교라고...
강한나 목사는 산순교의 단계에 그 삶이 다다른 사람이다. 오직 하늘의 사람이다.
모든 돈은 헌금 다 하고, 금 토 일 월 화 5일 간은 불편한 새성교회당에서 잠을 자며, 밤을 지새워 꼬박 기도하며, 그 많은 집회들을 다 인도해 내며, 모든 시간을 주님께 다 드린다.
강한나 목사님에게 제일 소중한 사람은 남편 박요한 장로이며, 영적 리더인 나 배종부 목사이다. 이들 부부는 나에게 목숨을 건 사람 들이다.
나 배종부 목사는 예배와 설교를 최고의 가치로 치는 사람이다. 나는 다른 것은 일체 하지 아니하고, 예배와 설교에 오직 목숨을 거는 사람이다.
강한나 목사님도 마찬가지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이다.
이러한 제자 <성령의군대> 장군들이 지금 나에게서 10여 명 자라고 있다. 나의 관건은 이들을 어찌 키울까 이다.
설교를 훈련시키고,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강화시키고, 부흥성회에 강사로 내보내고, 각 교회들의 부흥과 사역을 불러 일으키고...
나는 靈眼(영안)이 열려, 사람들의 영적인 온갖 모습들을 다 본다.
늘 예수님을 뵈며, 귀신 들을 보며, 천사 들을 보며, 영적 현상들을 일일이 다 본다. 한 사람과 그 주변을 그냥 생중계 할 수 있다.
저들의 영적인 계급 들을 일일이 본다.
“주님! 강한나 목사의 별이 몇 개예요?”
영분별 해 보니, 강한나 목사는 이미 황금 왕좌에 앉은 여왕이다.
큰 별이 있고, 그 별 아래에 별이 4개가 자리했다. 5성 장군, 대원수이네...
왼쪽의 작은 별 날개 하나 부분이 조금 완성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아직 군사들이 없어, 영광의 빛이 없는 여왕이다.
조금만 문지르면 황금색 빛이 찬란하겠다.
이0선 목사님께 어느 이단 사냥꾼이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바로 이단으로 몰더란다.
1>.목사님은 초대교회 이후의 계속적인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인정하십니까?
인정한다. 지금도 나의 사역에서 성령의 은사들과 권능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2>.목사님은 천사들을 동원하십니까?
나는 천사를 동원하지 않고, 주님께 천사를 보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다.
3>.목사님은 신사도입니까?
아니다. 나는 철저한 말씀 중심의 사람이다. 나는 장로교 통합 측의 가장 건전한 성령 사역을 전개하는 목사이다.
그러면 나 배종부 목사는?
내게 부흥이 일어나 사람들이 몰려 들면, 영락 없이 이단이 되겠네...
인터넷 상에 나의 글들이 천여 편 이상이 깔려 있는데...
오호라! 주여...
영안이 열려 영계를 본다고 해서, 다 이단으로 몰려야 하는가?
예배 시간!
대학 1년 평강이를 기도하는데, 아이가 도끼로 정수리를 내리쳐 두개골이 갈라지고, 발 앞의 바닥에는 선지 피가 흥건하다.
강목사와 엄마와 동생 순명이와 허미례 집사를 둘러 서서 기도하게 하는데, 다들 눈물로 기도해도 평강이는 눈을 뻔히 뜨고, 조롱하며 실실 웃고 있다. 그 눈이 마치 귀신이 씌인 것 같았다. 눈을 휘번덕거리며, 흰자위가 가득하고...
내가 눈을 감으라 하고, 아이를 안고 기도하니, 여전히 앞 정수리가 벌어져서 이마에 피가 철철 가득하고, 낫지를 않는다.
간절히 계속 기도하니, 마침내 아이의 머리가 봉합되고, 낫는다.
그러나 이마의 끔찍한 흉터는 그대로 있다.
다시 간절히 기도하니, 흉터가 서서히 없어진다.
아이의 마음에 드디어 용서할 마음이 생기고, 내적 상처가 아문 것이다.
나는 아이가 이렇게 충격을 받은 줄을 정말 몰랐다.
사람은 이렇게 사랑하는 부모 자식 사이라도 서로 그 마음과 감정을 모른다.
주님! 회개합니다.
우리를 바로 잡아 주옵소서.
우리에게서 오직 내적 상처와 아픔들을 다 걷어 가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강한나 부목사님 같은 이런 소중한 제자를 제게 주셔서,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이번에 <부안흰돌교회>에 10회 부흥강사로 내보낸다.
중간에 내가 한번 가 보려 한다.
주님! 넘치도록 축복해 주소서.
강한나 목사를 통하여, 탁월한 말씀과 성령의 기이한 능력과 은사와 권능이 폭발하게 하소서.
<부안흰돌교회> 를 온전히 치료하고, 굳건한 반석 위에 세우고, 돌아 오게 하소서. 할렐루야!
2021.3.9.화. 십자가와 보혈의 은혜(6P)
대전 영음교회 권재천 목사 <기적 기도대성회> 설교
*나는 이렇게 은혜를 주는 탁월한 ‘십자가의 피’ 의 설교를 처음 들어 보았다.
창세기 22장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 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 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나의 소중한 형님 권재천 목사님의 설교 서론이다.
작년에 내 평생 처음 새성교회의 허름한 교회당을 계단으로 올라 오는데,
피 냄새가 났다.
알고 보니 강단의 십자가에서 나는 피냄새였었다.
새성교회에서 나는 피 냄새는 배목사님의 ‘섬김과 나눔’ 의 피 냄새였다.
그는 실제로 피를 철철 흘린다는 말을 예사로이 한다.
사람이 거짓말은 못 하는 법이다.
배목사님의 피 흘림을 배우려 하나, 너무 힘들다.
사순절의 대주제는 예수님의 피이다.
현대 교인들은 피 없는 십자가, 피 없는 예수를 믿으려 한다.
피가 없으면 힘이 없고, 생명이 없다.
아담은 옷 벗은 것이 무서웠다.
목욕탕에서 불이 났다.
다들 아래나 가슴이나 얼굴을 가린다.
그러나 다르게,
여관에서 남녀가 불이 나서 뛰쳐 나오면,
부끄러운 게 아니고
사람들을 무서워 한다.
사진에 찍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린다.
죄를 지으면
두렵고, 무섭다.
사탄은 두려움을 준다.
파하게 하고, 도망 가게 한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죄를 덮어 주고, 가려 준다.
그러나 사탄의 자식들은 씹고, 까발린다.
하나님은 가죽옷으로 아담을 덮으신다.
양을 죽여 피를 대신 흘리게 하고,
죄를 가려 주시어,
아담의 두려움, 무서움, 부끄러움, 수치를 가려 주셨다.
이 피의 절정이
십자가의 예수님이 흘리신 피였다.
사람은 캄캄해지면 무서워 한다.
무섭고 두려운 것은 전부 사탄의 역사이다.
십자가는 가까이 다가 가야
예수님의 얼굴도, 고통도, 아픔도 보이는 것이다.
십자가를 멀리서 보면 강도인지, 예수님인지 잘 보이지 않는다.
너는 십자가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느냐?
439.십자가로 가까이
(1)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거기 흘린 보혈로
정케 하옵소서
후렴: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영원 안식 얻네 아멘
(2)십자가에 가까이
내가 떨고 섰네
거기 있는 새벽별
내게 비추시네
(3)십자가로 가까이
가게 하시옵고
몸소 받은 고생도 알게 하옵소서
(4)십자가에 가까이
의지하고 서서
천국 이를 때까지
항상 머물겠네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데, 빨리 갈 수가 없었다.
빨리 십자가를 벗어 던져 버리고 싶은데,
내던져 버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앞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예수님을 언제까지나, 끝까지, 뒤에서 따라 가야 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고서야
비로소 그는 십자가로부터 도망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이제
그의 가슴에 새겨져 버렸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저절로 가슴에 새겼다.
십자가를 제대로 배운 것이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 가신 그 길을 똑 같이 걸어 가야 보인다.
가까이서 십자가를 보아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을 똑바로 뒤따라 가야, 예수님이 보인다.
아브라함은 나귀에게 지운 장작을 이상하게 아들에게 지운다.
그냥 나귀를 끌고 가기만 하면 되는데...
왜 하인과 나귀를 다 두고서
모리아 산으로 올라 갔을까?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죽일 때,
이미 함께 죽었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다시 되돌려 받은 것이다.
이삭은 실제로 죽었었다.
그리고 부활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오늘날 아브라함은
형법상 미성년자 유괴죄, 살인 미수죄가 될 것이다.
이삭을 죽이려는 계획을 아무에게도 말 못한다.
심지어 아내에게도...
목사가 사모에게도 지켜야 할 영적 비밀 들이 있는 법이다.
아브라함은 장작을 쪼갤 때에도,
모리아 산으로 올라 갈 때에도,
제단의 돌을 하나 하나 쌓을 때에도,
아들 이삭을 칼로 내리 치려 할 때에도,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의지가 변치 않았었다.
피 흘림을 배워야, 아버지이다.
피 흘림을 배워야, 목사이다
피 흘림을 배워야, 진정한 지도자이다.
피를 흘리면, 죄 사함과 자유가 있다.
목사는 피 흘림의 제사가 있어야 한다.
피 흘림이 없는 삶은 가짜이다.
피 흘림이 없는 목회는 가짜 목회이다.
피 흘리지 않는 목사는 가짜 목사이다.
피 흘리지 않는 신앙은 천국 갈 수 없다.
타일에 묵은 오래된 때는
잘 지워지지 않는다.
퐁퐁으로 싹싹 닦으면,
그 옆이 또 더럽다.
죄를 씻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죄는 피로만 씻겨진다.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죄가 씻겨진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이유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경외함을 아셨기 때문이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여호와 이레’ 란 하나님의 준비해 주심으로 사는 것이라는 말이다.
내가 살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는 아무 대책이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다 예비하신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
주일에 공부하느라 예배를 빠진 학생의 성적이
성수 주일한 학생 보다
더 잘 나온다는 법은 없다.
권재천 목사님의 딸이 이화여대에 가는데,
자기가 공부 잘 해서 간 게 아니다.
주일을 잘 지키고서도, 일류대학에 걸리더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신다, 약속하셨다.
자녀가 많으면, 복이 크다.
오늘날 결혼과 자녀 양육을 걱정케 하고, 그래서 젊은이들이 결혼을 못하게 아는 이유가 바로 사탄의 무서운 계획이다.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다.
“성들을 차지할 것이다.”
“너의 자손으로 인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이
진정한 복을 받은 사람의 증거이다.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복을 받을 비율이 얼마인가가
곧 그의 영적 그릇의 크기이다.
나 배종부 목사는
개인은 100배, 사역은 1,000배, <성령의군대>는 50만의 축복이 비전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복 받음은 공식과 같아서
그대로만 따라 가면,
그대로 복을 받는다.
1.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라야 한다.
눈과 귀가 열려야 산다.
2.들려진 말씀대로 믿어야 한다.
3.한 가지만 확실하면, 사람은 설 수 있다.
4.순종은 피 흘림이다.
자기 부인이다.
우리 생각을 내려 놓고, 순종하라.
내 것을 포기하면, 자유가 온다.
내려 놓으면, 자유하다.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이 나를 얽어 맨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포기함이 진정한 자기 부인이다.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신다.
피 흘려 포기하신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 피가 힘을 주고,
자유를 주고,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주님!
이번 사순절에는
예수님의 피 냄새를 맡게 해 주세요.
진실로 보혈을 만나게 해 주세요.
아브라함이 피 흘렸듯이,
이삭이 피 흘렸듯이,
예수님이 피 흘렸듯이
나도 피 흘리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