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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 요나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 요나서를 읽어보면 오늘의 교회의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서 주님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피하여 가는 21세기의 교회상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오늘의 교회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선교하지 않고 있는 오늘의 교회는 어쩌면 요나서에 나타난 요나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여 도망가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구절은 3절입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낮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피해가고 있는 요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았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중요한 세 단어가 보입니다. "일어나" "가서" "외치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주신 사명, 전도의 명령을 가장 실감 있게 묘사해 주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일어나라." 안일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일어나라'는 말씀이 여러 번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는 주님의 중대한 선교 명령을 위해서 쓰여진 단어입니다.
그리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찾아오기를 기다립니다. 물론 모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흩어져 가는 일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에게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찾아갑니까?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심령들을 찾아 신실하게 복음을 나누며 전도하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리고 "외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내 철학, 내 사상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말씀을 외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에스겔서에 보아도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내 백성을 깨우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앗시리아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앗시리아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적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3절에 보세요. "그러나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요나의 비극이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 주관이 너무 강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다른 데는 몰라도 니느웨만은 못 간다는 자기 철학이 서 있었습니다. 아무도 내 철학, 내 주관, 내 경험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순종의 길 대신에 불순종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대로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아서 아예 하나님의 낯을 피해 보려고 니느웨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욥바로 내려가 이 배에 가서 물어보고, 저 배에 가서 물어 보다가 결국 다시스로 가는 배에 선가를 지불하고 배에 올랐습니다. 다시스가 지금은 어디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니느웨와는 아주 먼데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아예 배 밑창으로 내려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다 귀찮아서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그대로 순종하기는 싫어서 멀리 도망은 하지만, 그 마음이 평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잠을 청해서 잠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 다 잊어버리고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요나가 탄 배는 순풍에 돛을 단 배처럼 잘 미끄러져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가는 사람의 길도 얼마 동안은 평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갑니까? 요나가 탄 배는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 풍랑이 얼마나 심했던지 배가 더 이상 항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니 파선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사공을 비롯해서 그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여객들이 겁이 나서 제각기 자기가 섬기는 신을 부르며 배의 하중을 좀 줄여 보려고 배에 싣고 가던 모든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아마 거기에는 값진 물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생명이 위태한데 그런 것 생각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선장은 자기 책임이 더 중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 풍랑을 잘 극복해 항해를 계속해 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긴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황한 선장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선원들을 지휘하며, 여객들에게는 그들이 섬기는 신께 더 간절히 부르짖으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배 밑창에 내려와 보니 어떤 사람 하나가 누워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선장이 너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분한 생각마저 들어서 "여보시오. 잠자는 분, 이거 무슨 일이요? 우리가 지금 큰 풍랑을 만나 살기 위해서 각자가 자기의 책임을 다하느라고 이렇게 애쓰고 있는데 이런 때에 자면 어떡합니까? 당신도 어서 일어나서 당신의 하나님께 부르짖으세요.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해서 망하지 않게 하실는지 알겠소?"
여러분, 요나는 하나님의 사람인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선장에게 재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생각하면, 이거 얼마나 큰 망신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사람을 깨워야겠는데, 오히려 세상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을 재촉하게 되었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여러분, 요나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거짓 신에게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만 경배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누가 그를 동조하는 사람이 없어도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9절에 보니, 제비가 뽑혀 이제 잠시 후에 바다에 던짐 받아 죽게 된 요나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을 피해 도망할 수 있고, 자기의 사명을 잊어버리고 배 밑창에서 깊이 잠들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조심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불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피해 도망할 수도 없지만, 도망하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이 사회 배 밑창에 내려가서 깊이 잠들 수도 있습니다. 잠들면 시간이 가는지 오는지 모릅니다. 잠들면 아무런 활동이 없습니다. 잠들면 모든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닌 신을 열심히 부르며 부지런히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보려고 배에 있는 짐을 바다에 던지는 것처럼 요사이 소위 구조조정을 하느라고 애쓰고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그리고 이 우주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오히려 잠자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 받은 사람이 요나 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선지자 한 사람이 이방 신들의 선지자 수백 수천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오히려 그것들이 두려워서 배 밑창에 내려가 아주 깊이 잠이 들었습니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잠자는 사람이 자기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습니까?
요나는 영적인 파수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자느라고 파수꾼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 그 사회는 혼란과 부패로 수라장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제정 러시아에 하나님의 교회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중세 구라파에 교회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권력과 결탁되어서 교회가 교회 구실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사야 56장에 보면 그 당시 영혼의 파수꾼인 하나님의 사람이 그들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 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이사야 56: 10-12).
예수님 말씀 그대로 "우리는 이 세상의 빛이요 이 세상의 소금입니다." 우리가 빛의 사명을 다하지 못할 때 사회는 어두워져 좌충우돌의 혼란이 생기고, 우리가 소금의 맛을 내지 못할 때 세상은 썩을 대로 썩어 냄새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의 말을 들어보세요. 오늘 주신 말씀 12절에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시오. 바다가 당신들을 위해서 잔잔해질 것입니다. 당신들이 이 큰 풍랑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것을 내가 압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명자인데, 그만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내게 맡겨진 사명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런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책임이 다 나에게 있습니다"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요나가 한 자백을 들으면서, 모든 사회적 혼란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자기 스스로 성자인 체하는 몰염치한 종교 지도자들보다는 차라리 양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사회의 이 심각한 문제가 누구 때문입니까? 정치가 때문입니까? 기업가들 때문입니까? 공무원들 때문입니까? 군인들, 경찰들 때문입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돌릴 것 없습니다. 모두가 우리 그리스도인들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이 사회에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까? 우리 목사가 사명을 다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모든 책임은 교회 지도자에게 있습니다. 사회가 바로 나갈 때 격려해 주고, 잘못될 때는 경고해야 할 교회 지도자가 사회와 짝해 버리고 말았으니, 양심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사야의 말대로 짖지 못하는 개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때야말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지난날의 잘못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이 사회가 이런 풍랑을 만난 것이 나 때문입니다. 내가 사명을 따라 살지 못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나설 때라고 생각합니다.
요나에게는 특별한 사명이 부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배 밑창에 내려가서 잠만 잤습니다. 요나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니느웨에 가서 전하라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의 사명을 망각하고 아예 다른 반대 방향으로 가며 배 밑창에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요나의 신앙의 타락을 의미합니다. 요나는 다른 사람을 깨우고 다른 사람에게 외쳐야 할 사람인데 오히려 자기가 깊이 잠자고 있다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깨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명을 잊어버리면 그렇게 됩니다.
현대 교인들의 가장 무서운 죄악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의 귀에 듣기에 좋은 메시지만을 요구하고 있고, 목사는 그렇게 하려고 그래서, 아멘 소리가 터져 나오기를 기대하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혼을 잠자게 하는 자장가를 듣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고, 성공하게 하시고, 잘 나가게 하시는 것만 바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오늘의 교회에 내 잠을 깨우게 하는 메시지가 없다면, 그래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그 말씀이 화살이 되어 그들의 가슴에 박힐 때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회개와 돌이킴이 없다면, 교회는 자장가를 불러주며, 거짓된 평안 속에서 사람들을 달래며, 그들을 무서운 지옥의 파멸로 이끄는 하나의 거짓된 종교 공동체로 전락해 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요나처럼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합니까? 이 요나의 모습이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할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요나를 끈질기게 추적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귀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것 때문에 우리를 아주 버리지 아니하셨다는 것은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하나님은 아직도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당하는 많은 역경과 환난을 통해서 마침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나타내 보일 때까지 참된 영혼의 부흥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이 부흥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기분이 좋아졌다고 그것이 부흥이 아닙니다. 참된 부흥은 사람들의 영혼이 소생되고, 이것이 많은 사람에게 강력하게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합니다. 영국의 웨일스의 부흥, 미국의 D.L. 무디를 통한 부흥, 한국의 초대교회에 있었던 부흥이 바로 그런 하나님의 특별하신 손길을 의미합니다.
여기 부흥의 역사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정직하게 나타낼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부흥을 바라십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나는 누구며,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내 신앙의 자세는 어떠하며, 내 마음속에는 어떤 의식이 자리잡고 있으며, 나는 현재 내 신앙의 모습을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는가?' 이 모든 것에 대해 가장 정직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요나서의 이야기는 요나가 정직하게 자기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는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10절 말씀을 보세요.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요나는 나타내기를 꺼려하는 부분까지 정직하게 내놓기를 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면서 하나님의 뜻을 피하여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불순종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전을 피해서 도망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요나의 고백이 요나서의 이야기를 다르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베드로는 게네사렛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부로서 게네사렛호수에서 평생을 그물을 던지며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게네사렛호수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디에 고기가 많이 잡히는지, 어떻게 하면 고기를 몰아갈 수 있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데는 몰라도 게네사렛호수에서 고기 잡는 일만은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은 이상하게시리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 보았지만 한 마리의 고기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때 낯선 분이 등장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할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 저는 어부입니다. 여기서 잔뼈가 굵었습니다. 고기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잡는지 그 방법은 제가 더 알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말씀에 이해가 안되지만, 마음에 들지도 않지만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밤새 잡힐 만한 곳이라고는 다 그물을 던졌는데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는데, 주님 말씀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왜 이런 고백을 했을까요? 베드로는 앞에 서 계신 분이 단순히 나사렛의 목수로 보인 것이 아닙니다. 그때 그는 앞에 서 계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앞에 엎드러집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젊은 선지자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갔을 때 생긴 일을 기억하시지요?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날 하나님은 특별하신 방법으로 자신의 모습을 성전 안에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는 연기가 충만했습니다. 그때에 선지자 이사야는 스랍들이 보좌에 앉으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보좌를 둘러싼 스랍들은 그 날개로 얼굴과 발을 가리우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놀라우심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접하자마자 선지자 이사야는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이런 경험과 고백이 없이는 아무도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인 지각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는 그 순간 하나님 앞에 토할 수밖에 없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놓고 죄인임을 고백하는 순간부터 나를 지으신 그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요나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백할 때 역사는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매우 위험한 항해를 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배를 타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요나처럼 배 밑칸에 내려가 잠자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을 절감하고 이와 같은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 "나 때문입니다"라고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광풍 만난 배에서 밤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대로 전한 것뿐입니다. 풍랑 만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겨레에게 희망을 주며 위로할 사람이 누굽니까?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부르심을 받고 사명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때에 사명을 잊어버리고 주위 환경이 어떻게 되는지 상관하지 않고 잠을 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은 잠잘 때가 아닙니다. 정신을 차리고 죄악의 잠에서 깨어 내 책임을 바로 감당해야 할 때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도 잠에서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살고 이 민족이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