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첫 핵발전소의 기억은 초등학교 6학년 때 2박3일의 수학여행을 가면서 울진원자력 발전소에 들렀던 일이다. 줄줄이 서서 지하로 깊게 들어가는 계단에서 설명을 들으며 우리나라가 굉장한 기술을 가진 나라라고 자랑스러워했다. 나의 핵 생각은 13살 그때로부터 30여년이 지나는 동안 별 변화가 없었다. 그런 내게 제대로 핵을 공부할 기회가 왔다. 밀양송전탑 반대 운동으로 밀양을 다니면서 인간이 발견한 오만하고 통제 불가능한 물건이 핵임을 알았다. 청년초록네트워크 청년들이 19일 울산에서 연 ‘포스트 후쿠시마 세대의 일본-한국-대만 탈핵운동 국제포럼’은 밀양송전탑 반대 운동에 참여했던 청년들로부터 시작됐다.
이번 포럼은 두 명의 후쿠시마 주민활동가와 일본기후네트워크 소속 청년, 대만 녹색시민행동연합(GCAA) 청년, 대만 탈핵운동 청년까지 모두 다섯 명이 현지 얘기를 들려줬다.
후쿠시마 주민인 나가시마 양은 갓 스물쯤 보였다. 어릴 때부터 시 낭독을 해왔고 18살 때 후쿠시마를 겪었다. “씨앗을 뿌리는 토끼”라는 시 낭독 모임에서 후쿠시마 사태를 알리고 있고 영화로도 만들어서 알리겠단다. 선배들 졸업식 날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터졌다. 그녀는 친구들과 뛰놀던 학교체육관과 내년에 좋은 선배로서의 자기 모습을 기대하며 설랬던 작은 일상이 사라지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피난 생활의 고달픔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담은 시를 낭독했다. 잠시 가슴이 뭉클했다.
야지마 치이로 양은 16살에 후쿠시마 핵폭발을 당했다. 사고 뒤 방치된 아버지의 감 농사 과수원과 지방정부의 방사능 오염 제거작업이 얼마나 형식적인지 알리는 사진을 보여줬다. 방사능 오염 흙을 쌓아놓은 학교 운동장에 뛰노는 아이들 사진도 있었다.
야지마 양은 한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할아버지는 사고 당일 저녁 남은 사람들을 구하러 올테니 일단 지역을 벗어나라는 흰옷 입은 사람들 말을 믿고 가족을 남겨 둔채 빠져나왔다. 그러나 구조대는 몇 개월 뒤에야 나타났고 그 사이 가족과 친구들은 숨졌다.
야지마 양의 얘기를 만약 우리도 핵사고가 나면 정부가 해줄 일은 별로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난 가도 나중엔 다시 돌아와 오염된 곳에서 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안전하게 살기 위한 제일 좋은 방법은 오래된 고리1호기나 월성1호기를 페쇄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대만 활동가 수은은 양은 98%나 완공돼 가던 대만 4번째 핵발전소를 탈핵시민운동으로 중지시킨 얘기를 했다. 대만은 후쿠시마 이후 핵 경각심이 높아져 많은 사람이 핵발전 중단을 요구했다. 2011년 이전에는 보수당인 국민당을 퇴진시키는 게 목표였다면 지금은 반핵, 반독재 운동으로 확대됐다. 이들의 운동은 우리의 탈핵운동과 닮아 있었다.
수은은 양은 대만에서 쌍용차 해고 기사를 보고 쌍차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대만도 노동법이 잘못돼 나쁜 기업이 많은데 어렵더라도 억압받는 노동자들이 연대해 잘 싸워주었으면 하고 위로와 응원을 보냈다.
통역에서부터 진행자들까지 모두 20대 청년들이었다. 그들의 꿈은 지역을 넘어 세계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탈핵운동(푸른하늘)을 펼치는 것이라 했다.
“힘과 권력이 영향력을 미치는 것 말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대만에서도 계속 싸우겠다”고 말한 청년의 얘기가 자꾸 맴돈다. 기성세대보다 훨씬 생각의 틀에서 자유로워 보였다. 겉으로 날리는 말이 아니라 자기 고민과 생각이 자연스럽게 몸에서 베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나하나 보석을 보는 느낌이랄까. 야지마 양은 19일 일본에 돌아갔다. KTX역까지 데려다 줬는데 엄마와 아빠는 지금 후쿠시마에서 농사지으면서 살고 자기는 좀 떨어진 곳에 산다고 했다. 농산물은 올해부터 기준치가 풀려 출하가 된다고 했다.
‘후쿠시마’ 이후 우리의 삶은 정말 달라져야 한다. 새로운 안전한 삶의 방식으로 우리의 미래를 같이 만들어 가야 한다. 내가 행복하고 우리 아이들도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기를 희망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