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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대로 살고 하나님 열심히 믿고 헌신한 것 같은데 지금 내 상황이 왜 이런가?
1. 상관없는 일, 알 바가 아님 일
요한복음 21장 20-22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기전 베드로를 만나 지구상에서 복음서에서는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다. 베드로는 자기를 부인한 것을 치욕스럽게 여기고는 예수님에게 세번이나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그의 심성을 보여준다.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님을 파는자가 누구오니까" 라고 표현한 것은 요한복음 13;25절에서 나왔듯이 요한임을 알수 있다. "요한 어찌 되겠습니까" 라고 묻지 않고 "... 묻던자로다.. 이사람은 어찌되겠사옵니까?" 라고 애둘러 물었다 이에 예수님의 대답은 "내가 올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상관이냐" 라고 되묻고 있다. 복음서의 맨 마지막 말 이 복음서를 쓴 당사자 요한이 기록한 마지막 복음서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네게 무슨상관이냐"(요 21:23)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남이야 어찌 되던 "너는 나를 따르"(요21:22)기만 하면 된다고 다시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복음서 시대 즉 예수님이 교회의 우두머리시요 주인이 되시고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시대는 지나고 사도들의 시대 즉 예수님없이 생존해야 할 교회의 시대를 맞이한다.
사도행전은 네게 무슨 상관이냐는 말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의사 누가다. 누가의 언어로 표현한 것을 보자
사도행전 1:6-9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들의 교회 시대에 와서도 아직도 그들은 메시야가 인류의 구원자가 아닌 로마에서 구원해줄 통치자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물음이 가관이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 "
인간의 믿음의 실행을 보여야 하는 사도행전에서는 믿음의 행위에서 인간의 영역과 하나님이 영역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서 시작한다. 여기서 믿음의 본질중 하나의 특성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일은 "너희의 알 바가 아"니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성령을 받고" 증인이 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당부하는 믿음의 영역 중에 내가 알수 있는 것과 내가 알수 없는 것, 내가 할수 있는 것과 내가 할수 없는 것을 구별하여 보라고 한다. 믿음의 영역중 하나는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기도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영역 안에 맡길 것은 맡기는 것에서 시작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 믿음이 시작된다. 시대의소망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위탁된 일에 대하여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소망 하 360 보급판) 라고 이구절을 해석하고 있다 . 아울러 이직도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싶은 베드로의 욕망을 지적히신다.
농부가 할 구 있는 일은 제때에 씨를 뿌리고 다듬고 보듬는 일이다. 그가 흙을 만들거나 햇빛을 가져오거나 물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농부는 농부가 할 일이 있다. 하나님의 영역은 단지 겸손하게 구하는 일이 전부다. 자
우리는 우리가 믿음 성숙해지는 과정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데 이것이 안 되면 우리 삶속에서 더 이상 사도행전은 전개할 수가 없다.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 열심히 믿고 헌신한 것 같은데 지금 내 상황이 왜 이런가? 그것은 때때로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원칙을 훼손하고 하나님을 영역을 내 영역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은혜로 여기지 않고 불만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사야 55장 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 열심히 믿고 헌신한 것 같은데 지금 내 상황이 왜 이런가?
2.하나님과 더불어 풀어가는 인생
그러면 하나님의 영역에 있는 것은 구하면 안 되는 것인가?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그리고 다시 "네가 알 바 아니요"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들어가면 안 되는가? 성경에 무엇이든지 그것이 생명이든지 믈질이든지 마음의 평온이든지 간에 필요하면 구하라는 것은 어떻게 설명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형제 중 하나인 야고보는 예수님과 부대끼고 살면서 그가 느끼고 경험했던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그리고 다시 "네가 알 바 아니요" 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영역이 아닌 사람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풀어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야고보서 1장 2절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야고보서 1장 5절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시험을 당할 때 그리고 지혜 부족할 때 하나님께 구하라고 한다.
여기서 구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헬라어 가정법을 알아야 한다.
헬라어의 가정법에는 7가지가 있다.
①현재 중간태(수동태) 가정법
②제1부정과거 능동태 가정법
③제1부정과거 중간태 가정법
④제2부정과거 능동태와 중간태 가정법: 제1부정과거 가정법과 똑같이 변화한다. 어간은 제2부정과거 어간에 형성
⑤부정과거 수동태 가정법
⑥ειμι의 현재 가정법
⑦현재 가정법 : 동작의 계속이나 반복 개념이 있을 때 사용, 부정과거 가정법:계속이나 반복관념 없이 1회적 동작을 표현하고자 할 때 쓰인다.
여기서 참고로 υ μη 은 가정법에서 미래에 대한 강한 부정으로 사용된다. 가정법의 1인칭 복수는 권고로 쓰인다.
그리고 목적에 쓰이는 가정법 ἵνα + 가정법으로 표현한다. 아울러 미래 조건은 εαν + 가정법을 쓰고, 기타 조건은 ει + 직설법을 쓴다. 마지막으로 사실과 반대되는 조건문은, ει + 제2시상 직설법을 쓴다.
위에서 예시 헬라어 용법 중 여기서 쓰인 것은 헬라어 제1 수동태 가정법으로. 이는 확실히 일어나는 것을 가정할 때 쓰이는 용법이다 . 예를 들면 “내일 아침에 해가 뜨거든”이라는 표현처럼 여러 가지 쓸데없는 시험은 삶에서 당연히 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나 더 예를 들어 보자
마태복음 7장 7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읽고 “그리하면 주시리라”에 주안점을 두어, 난 믿음이 좋아. 하나님의 말씀에 문자 그대로 실천 하는 사람이야 하면서 밑줄 긋고 형광펜으로 칠하면서 거기에만 초점을 둔다.
그러나 대부분은 행위를 강조한 동사 “주시리라“에 초점을 두고 읽으면 행간에서 야고보 선지자가 말하고자하는 진짜 의미를 잊어버린다. 여기서 주어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 법적인 방법, 인간관계를 통해서, 돈으로, 즉 동서남북 등의 방법을 찾다가 최후로 하늘의 방법을 구할 때가 많다. 베도로도 . 야고보도 그랬고 우리도 그렇게 한다. 이를 경험한 야고보는 :그래 네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해결이 안되면 나에게 오너라“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인내를 알았고 경험했고 그도 하나님께 마지막 방법으로 구했다. 이 구절의 핵심은 최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대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아침 해가 반드시 뜨듯이 인간사에서 시험이 반드시 온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라 하신다. 본문을 다시 읽어보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이 말씀에서 가장 복된 것은 문제를 풀어줄 아무 사람 아무 방법이 없을 때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뭘 주세요? 해결책요? 우리는 여기서 해결책이라 읽는다 하지만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너의 내면 문제가 해소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그런데 우리는‘하나님께’라는 부분은 작은 글씨로 쓰고
‘구하면 주시리라’에만 자꾸 초점을 둔다.
어린아이에게 구하는 것을 다 주는가? 실상은 어린아이처럼 미숙할수록 구함을 100% 충족시켜주지 않아야 맞다. 어린이를 더 사랑하는 부모일수록 그들이 원하는 단 것, 차가운 것 위험한 것을 주지 않는다. 구하는 대로 다 주시는 부모라면 진짜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가 아니다. 어린아이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필요을 달래주고 납득시키고 해소 시켜 주어야 한다.
자녀가 구하는 대로 다 주지 않는다. 구하는 대로 막 주는 것은 아이를 망치는 길 아닌가?
“구하면 주시리라”라는 이 광의적인 말씀은 우리가 미숙하면 미성숙할수록 응답하지 않으시는 응답으로 받아야 한다.
알라딘의 요술 램프처럼 쓱쓱 문지르면 펑 하고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시는 게 아니다.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초점은 그리고 이 구절들의 주어는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다. 고난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의 문제를 나눌 곳이 아무 데도 없는 그 때에도 내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여전히 거기 계신다는 것과 내 아버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기쁜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복음이다. 복음은 인간이 볼 때 좋고 아름다고 훌륭하게만 다가서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본질은 예수님과 어떻게 하면 함께할 수 있는가이다. 그게 고난의 길이든 즐거운 길이든지 상관없다. 매사에 하나님의 생활 영역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이자 연습의 과정이다. 우리가 할 수 잇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일에는 복이 따른다.
3, 하나님의 삶의 영역 안에 놓여진 삶의 중요성
하나님의 영역아래의 삶을 사는 신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일상의 모든 삶이 명료하게 정돈이 되기 때문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영역 안에 살았을 때는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묻는 삶이 었다. 하나님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에 달라고 조르고 그 결과를 맘대로 해석하고 있다.
사무엘상 23:2 "사람들이 다윗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하니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들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
사무엘하 2:1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사무엘하 5:19 "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바다의 파도를 보았는가? 밀물 때 저 멀리 있다가 밀려오는 파도를 보면 무섭기도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파도는 평상시에는 절대로 어느 정도 이상 자가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만약 파도가 자기 영역을 벗어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일본의 관동대 지진때 파도의 반란을 보지 않았는가 그것을 쓰나미(津波)라고 한다.
적은 기독교인으로 유명한 일본에서는 기독교인들은 거의 모두다 존경받고 살고 있다 . 그 중 유명한 마우라 아야꼬(1922-1999)라는 일본의 기독교 소설가는 말년에 암투병을 할 때 그도 우리와 같은 인생을 살면서 병에대해 강구하면서 하나님께 구했다 그의 책에서 때론 들어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때때 로는 화를 내기도 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그가 결국 에 안 깨달음은 이렇다. 전도서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마지막 글 "하나님 당신이 하는 일은 언제나 옳습니다."
이사야 55장 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