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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은 우리의 몸이 아닌 영혼에 대한 위험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고 그분의 진리를 수단으로 이를 행하신다.
시편 91편 / 주님께 의지하는 자
원제: Bible Study Notes/합리적 이해
지은이: Anita S. Dole
옮긴이: 배제형
.. 시편은 역사적 순서에 따른 책은 아니며
우리의 생각과 느낌이 주님께 되돌아가도록 꾸준히 우리를
상기 시켜주는 책이다.
시편 91편
“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덫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리가 너의 갑옷이 되고 방패가 되시나니
5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6 밤중에 퍼지는 염병과 한낮에 쏘다니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7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8 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
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10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13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사자새끼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15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6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
부모를 위한 노트
많은 사람들이 시편을 사랑한다.
그 이유는 이 책은 노래이고
노래는 우리의 심정을 감동시켜주기 때문이며
나아가 주님은 특별히 시편에서
우리의 희망과 두려움, 기쁜 상태와 슬픈 상태,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악함과 그분에 대한 필요를 표현하는
아름다운 말씀들을 주시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강직한 유물론자라 해도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도 극복하지 못할 큰 위험이
눈앞에 놓일 때면 자기도 모르게 거의 본능적으로 스스로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들었을 것이다.
우리 심정의 밑바닥에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는 있으나
우리가 이것을 안다고 반드시 인정하는 것은 아니며
남녀 모두 주님을 가까이 하며 살 수 있는 특전을
반드시 활용하려 드는 것도 아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동물이 가지지 못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알고, 그분에 대해 배우며,
그리하여 그분의 진리의 빛 가운데서 걷는 능력을 말한다.
사실상 이 능력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능력이다.
어떤 남녀든 단순히 동물처럼 사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면
이는 얼마나 비극적인 일일까?
오늘 본문으로 선택한 시편 91편 이곳도 여느 말씀에서와 같이
주님은 진정한 사람(the real person), 곧 우리의 육신이 아닌
영혼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지존하신 분의 은밀한 거처에” 거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고
주님이 우리를 보호하실 수 있는 위험들 또한
우리 영혼에 대한 위험들이다.
시편 64편 3절에서 우리는 사악한 자들에 관해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라고 읽게 된다.
진실로 우리를 다치게 하는 것들이란
우리 마음에 침투한 거짓된 생각과
우리의 선한 의도를 갉아먹는 이기적 욕망들이다.
이것들이 우리의 시험이며
그 시험 중의 어떤 것은 “밤중에 퍼지는 염병”과도 같이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직면하게 되고
또 어떤 시험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도 같이
뻔히 보이는 데로 들이닥치지만
우리는 아직 그것에 기꺼이 대항하려 들지 않는다.
주님은 이러한 모든 시험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수호천사는 우리를 언제나 도울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선택은 우리 스스로 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께 돌이켜 그분의 도움이 필요함을 인정하고
그분의 진리를 배우고 순종하려고 노력한다면
이 시편의 모든 약속은 성취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악과 거짓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진리를 배우려 노력해야 된다.
“그분의 진리가 너의 갑옷이 되고 방패가 되신다.”
..
제 2반
..
“이것은 다윗이 남긴 마지막 말이다.
야곱의 하느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자요, 이스라엘의 수호자가
귀여워하시는 자, 이새의 아들 다윗의 말이다.
가장 높으신 분이 세우신 영웅의 말이다.
야훼께서 나에게 영감을 주시어 말씀하셨다.
당신의 말씀을 내 혀에 담아주셨다.”(삼하 23:1,2절)
다윗은 이 시편의 말씀들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단지 주님께서 자신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 우리는 시편서가 말씀의 일부라는
또 다른 증거를 가지고 있다.
주님께서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눅 24:44)
시편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분 자신에 관한 것들과 우리가 그분에 관해 가져야 하는
느낌과 생각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씌어졌고,
또 이러한 느낌과 생각들을 우리가 표현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 씌어진 노래들이다.
오늘 본문은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삶을 통해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상기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이
우리의 영혼(soul)에 관해서 라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는 얼마 안 되는
이 세상의 세월을 위해 주어졌을 따름이다.
즉 이 육체란 여러분이 늘 입고 다니는 옷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언젠가는 벗어 던져야 하는, 얼마 안 되는 세월이 흐르면
벗어야만 되는 육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육체에 닥치는 이런저런 일들은
진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건강한 육체를 간직해야만
자신에게 유용하면서도 이웃에도 쓸모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다.
강조해 두고자 하는 점은 우리의 영혼이 진짜 나(self)이며
영원히 있게 될 나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미움을 느끼고,
신뢰와 두려움이라든지 행복과 불행을 정말 느끼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다.
생각하는 것도 우리의 영혼이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 영혼의 수단이 되어 행동해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 안에 일어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의 영혼이 주님을 배우고 그분께 가까이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지존하신 분의 은밀한 거처에” 거하고 있는 자다.
그 사람은 정말로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다.
이 사람은 세상에서 자기에게 닥치는 것, 아픈 것,
가난, 실망, 사별 등등 어느 것이 발생해도
자기 영혼은 주님의 돌보심 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다.
우리 몸에 일어나는 것은
영혼에 일어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종종 고통을 참아내되 웃음을 잃지 않으며
그 고통을 불평하는 대신 여유 있게 살아내는
용감한 이들을 대단히 칭찬한다.
우리도 노력하면 모두 다 이와 같이 될 수 있다.
이 시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나쁜 것들 모두는
우리가 우리의 지성과 심정 안으로 끌어들이는
잘못된 생각과 느낌 전체에 대한 그림으로서
이것들이 우리를 해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의지한다면,
즉 그분은 언제나 슬기로우시고 올바르시다는 것을 알고
그리하여 그분께서 이러이러하게 하라고 하시는 것을
따라서 해보려고 노력한다면
잘못된 생각과 느낌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마다
그분의 천사들은 언제나 함께 하며
그들을 거뜬히 밀어내는 싸움을 거들기 위해
도와줄 채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음을 실감해야 한다.
이런 모든 나쁜 것들은 지옥으로부터 오는 바,
우리가 이들을 만났을 때 물리치기 위해서는
주님과 천사들의 도움이 절대 필요하다.
지옥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이는
우리가 아닌 주님이시요 천사들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우리 영혼 속의 이런저런
적들의 실태를 점점 더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대로
지금 이 적들을 상대하기 시작한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첫째이자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시편에서 가능한 한
많은 구절을 배워 시험을 받을 때 사용하는 것인데
이것이 시편 4절의 말씀이 뜻하는 것이다.
“그분의 진리는 너의 갑옷이 되고 방패가 되신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싸우는 군인과 같고
우리의 무기는 말씀 즉 주님의 진리이다.
제 3반
여기서는 우리가 당하는 몇 가지 위험들에 대한 상응 공부를 한다.
각자에게 특별히 있었던 위험을 미리 머리에 그리면서 읽어 가면
도움이 되리라 본다.
시편들은 노래들이며 이 노래들은 성전의 예배에서 불러졌고
그 외 다른 때도 많이 불러진 노래들이다.
유대인들은 이 시편을 거룩한 성경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나
주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에게 나타나셨을 때
율법과 예언서와 더불어 시편을 거론하시어
시편이 주님에 관해 가르치고 있음을 언급하셨다.(누가복음 24:44)
그리고 그분의 두 번째 오심에서
우리를 위해 성경의 내적 의미를 볼 수 있게 해주셨다.
오늘 본문은 시편 91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편을 외우고
이 시편의 몇몇 구절들을 아는 이는 더 많다.
이 시편은 배워두면 아주 유익한데 그 이유는
주님과 천사들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우리를 해치게 될 것은 정녕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재삼 상기시켜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험을 받아 많은 일에 두려움을 가지거나
곤경이 우리에게 오게 될 때
걱정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가 자신만을 의존해 생각하면 이 근심, 저 두려움 등이
산더미 같은 파도가 되어 우리를 덮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주님과 천사가 우리 가까이 계셔
우리를 도울 준비를 하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닥쳐오는 곤경에 용감히 맞서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따라서 이 시편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를 언제나 얻게 될 것이다.
이제 몇 가지 위험들의 속성과
이 위험에서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해주시는지 살펴보자.
이를 살펴보기 전 미리 알아야 할 것은
성경에서 주님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에 관해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계신다는 것이다.
본문 제 5절과 6절에서 위험은
낮에 쳐들어오는 것과 밤에 오는 것 두 가지로 분류된다.
“5 밤에 덮치는 무서운 손(공포), 낮에 날아드는 화살을 두려워 마라.
6 밤중에 퍼지는 염병도 한낮에 쏘다니는 재앙도 두려워 마라.”
빛이 있는 낮이란
우리가 사물을 명백하게 볼 수 있는 상태를,
잘 보이지 않는 밤이란
무지한 상태를 그리고 있다.
우리 영혼에 위험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악과 거짓임은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심정 안으로 슬금슬금 기어 들어오는 어떤 악들과,
우리가 더 나은 것을 몰랐기 때문에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인
어떤 거짓된 개념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밤중에 퍼지는 염병”이며 “밤에 덮치는 무서운 손”이다.
또 우리 스스로도 잘못된 줄 뻔히 알면서도
부둥켜안고 있는 잘못된 바램이나
그것 취하기를 즐거워하는 심정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뻔히 아는 어떤 거짓도 지성 속에 지니고 있지만
이를 사용하면서도 핑계나 구실을 대어 이 거짓을
옹호하기를 무척 좋아한다.
한마디로 거짓을 우겨대는 모습들인데
이런 것들이 “한낮에 쏘다니는 재앙”이며 “낮에 날아드는 화살”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순종함으로
그분께 가까이 하려고 노력한다면
주님은 악과 거짓의 이러저러한 모든 양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실 수 있다.
“그의 진리가 너의 갑옷이 되고 방패가 되시나니”
말씀에서 얻은 진리는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무기이다.
제 13절을 보자.
“네가 사자와 독사 위를 짓밟고 다니며
사자 새끼와 큰 뱀을 짓이기리라.”
악의 권세를 사자와 사자 새끼로,
거짓의 권세를 독사와 큰 뱀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러분 속에 미워하는 감정이 있을 때
그 감정이 여러분 속을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 놓는지,
또 여러분 속에 거짓 사상이 있을 때
그 사상이 여러분의 지성 안에 독을 얼마나 퍼트리게 되는지
각자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쉽게 이 구절을 이해할 수 있다.
제 3절의 “염병(죽을병)” 역시 우리의 체계를 갈아먹는 악이며
“사냥하는 자의 덫”이란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는 거짓들을 말한다.
이제 11절과 12절을 생각해 보자.
“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과거 여러분의 어린 시절에 수호천사가 여러분을
따라다닌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을 줄 안다.
그래서 때로 별 큰 실수도 없는데 해를 입는 경우
“왜 나의 수호천사는 미리 알아서 잘 처리해 주지 않았을까?”
라고 투덜거릴 때가 있다.
오늘 다시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라는 것,
따라서 천사가 보호하려는 중점사항은
우리의 영혼에 관한 이모저모라는 것이다.
이 두 구절을 문자적으로 취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왜곡의 한 형태가 될 것이고
(그 구절들이 문자적으로 어떤 것인지 기억해보기 바란다.)
또 그 구절들을 우리가 걸려 넘어질 수 있는 돌로
바꾸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 수 있기 바란다.
(I wonder if you can see that to take these two verses literally
would be a form of "falsification of truth"
- see if you can remember what that is -
and would turn them into a stone over which we might stumble.)
여러분들은 악마가 광야에서 주님을 어떻게 시험했는지에 대한
복음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복음서에서 악마는 시편의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인용했지만
주님은 현혹되지 않으셨다.
마태복음 4장 5-7절을 읽어보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이에 주님은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 라고
악마에게 대답하셨다.
때로 우리가 부모의 인내심이 바닥날 때까지 그분들을 시험하듯,
우리의 이기적인 방식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려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한다.
오늘 시편의 모든 약속은
“지존하신 분의 은밀한 거처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우리는 이 약속이 우리의 육체에 관해서는
언급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으로만 주님께 나아갈 수 있다.
우리의 육체는 이 물질계에서 손으로 지은 집에서 살지만
우리의 진정한 집은 우리의 영혼이 사는 곳이며
우리 각자는 자기 영혼이 살 곳을 선택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이기적이 되도록 내버려두고
우리 자신의 방식만을 취하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한 핑계를 찾는다면
우리의 영혼은 지옥에 있게 되는데
이는 이기심과 그릇된 동기들은 지옥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주님의 방식을 배우며
남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면
우리 영혼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천국에 살고 있으며
주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도와주실 수 있다.
이 시편은 오래 살 수 있게 하는 약속으로 마무리 짖고 있다.
히브리 원전에서는 “오래 살 수 있게 함”을
“낮들의 길이 length of days”로 말하고 있다.
낮(day)이 표현하는 의미를 알게 되면
이 시편의 마무리 부분을 이해하게 된다.
“나는 대낮같이 훤하게 그 사건을 알고 있어..”
라고 우리는 흔히 말한다.
낮은 밝히 앎, 또는 이해하는 상태를 뜻하고 있다.
따라서 밝히 아는 상태가 마음껏 길어지게 해주신다는 약속이므로
이는 우리 영혼을 언제나 진리의 빛 가운데
거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다.
기본이 되어줄 상응 공부
낮 (day) = 이해하는 상태
밤 (night) = 무지의 상태
갑옷 방패 = 거짓에서의 보호
돌 = 진리 혹은 거짓
제 4반
이것은 시니어들이 말씀과 저서들을 읽는 정규 프로그램을
시작하도록 격려하는 좋은 교훈이다.
그들이 세상에서 독립적인 삶으로 나갈 때
이 습관 외 어떤 것도 그들을 더 잘 지탱해 줄 수 없다.
이 습관은 기도와 교회 출석과 더불어 그들을
주님 가까이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다.
열왕기하서를 끝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영적인 교회를 표징한
이야기 형체의 유대인의 역사를 마무리 지었다.
고대 히브리인들만이 교회를 표징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예배가 전적으로 외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오래 전 시나이에서 주어진
법과 규례를 잘 준수해 갔더라면
주님은 그들 예식의 상응을 통해 인간과의 연결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어찌됐든 그 민족이 그것들 지키는 것을 중단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교회를 표징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들 대부분이 포로로 끌려가고
그 이후부터 주님이 강림하시는 때까지의 역사는
말씀에 수록되어 있지 않는다.
우리는 바빌론에서의 귀환과, 예루살렘과 성전의 재건에 대한
지식의 대부분을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책에서 얻는데,
이 책들은 내적인 의미를 가진 말씀의 일부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열왕기하 25장 12절에서
유다가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 땅의 가난한 자" 중 일부가
포도원지기와 농부로 남겨졌다는 것을 배운다.
즉, 주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말씀 전체에서 "가난한 자"가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포로가 된 상태에서도 여전히
규정된 유대 의식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다니엘서를 공부할 때 이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시편서는 다른 성경책과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이 책은 주님 자신이 누가복음 24장 44절에서 언급하신 것처럼
말씀(the Word)의 한 부분이다.
스웨덴볽은 그의 「예언서와 시편들」이란 저서에서
그 책들의 내적 의미들을
아주 간략한 형체로 일반 의미들을 담아놓았다.
오늘 본문에 대해서는 제 5반에 첨가되어 있어 참조하기 바란다.
그는 그의 방대한 저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시편의 많은 구절들의 의미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의 이런 저런 구절들이
22군데에서 인용되고 있고 그 구절 대부분에 대해
영적 의미들을 설명하고 있다.
시편서는 글자 자체로 본다면 유대인의 역사나
일반적인 사람들에 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는다.
이 책은 노래 책이고 노래란 감정의 표현이다.
이런 이유로 시편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왜 쉽게 우리 기억에 담아지는가에 대한 이유도 된다.
모든 종교인들은 자신이 느끼는 것을 말해주고
불안한 상태에서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특정의 시편을 찾을 수 있다.
사실 가장 깊은 의미상에서 본다면
시편은 주님이 세상에 계셨을 때 거처가신 상태들의 표현이다.
우리는 글자 상에서까지도
지상에서의 주님의 삶의 사건들에 대한 예언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시편 22편 1, 7, 8, 18절과 마태복음 27장 46, 39, 43절
그리고 요한 19장 23-24절과를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알게 된다.
오늘 본문이기도 한 이 시편 91편은
우리가 꼭 배워야할 시편임을 먼저 말해둔다.
우리 모두는 바깥쪽 삶(outward life)에서 수많은 곤란을 맞고 있다.
즉 실망, 질병의 고통, 사별 등등..
우리는 그것들 앞에서 외로움을 느끼고 낙담하기 쉽다.
그런 때가 오면 이 시편을 반복하고
그것이 영원히 참되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주님과 천사들은 우리를 돕고자
언제나 우리 곁 매우 가까이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 당하는 바깥쪽 삶의 위험이나 곤경에서
언제나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그 위험이나 곤경으로부터
자신의 약함을 보고, 우리의 헤아림의 폭을 넓히며
영적인 힘을 기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말씀 안에서 주님은 항상
우리의 몸보다 우리의 영혼에 대해 말씀하신다.
따라서 시편 91편에 언급된 위험들이란
영적인 위험들, 즉 지옥에서 오는 악과 거짓의 위험들이다.
그들 중 일부는 우리에게 부지불식간에 다가온다.
이것이 밤에 온다고 하는 위험들이다.
또 다른 것들은 우리가 분명히 인식할 수 있지만
여전히 우리가 생각하며 행하기를 원하는 거짓들과 악들인데
이것이 낮에 공격한다고 하는 위험들이다.
우리가 "지존하신 분의 은밀한 거처에" 거한다면,
즉 우리의 가장 깊은 심정에서
그분과 가까이 있고 그분의 인도를 신뢰하려고 노력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이 모든 위험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시편이 또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주님에 대한 신뢰와 우리 영혼의 안전이라는 이 문제에는
단순히 감정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
즉 정신적인 노력 또한 거기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더 많고 더 깊은 진리를 구해서
일상의 삶에 사용하기를 원해야 한다.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고 성경공부에 참석해서
진리를 얼마 정도라도 얻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우리가 얻어야 할 진리의 양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말씀을 정기적으로 읽는 것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의 내적 의미를 우리의 이해에 열어주시기 위해
그분의 재림으로 우리에게 주신 글들을 평생에 걸쳐
스스로 공부해야 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리가 너의 갑옷이 되고 방패가 되시나니”
말씀 속에서 날개란 영적 진리들을 그리고 있다.
스웨덴볽의 「천국의 신비 제 4096-2,5항」을 보면
말씀 속에 있는 영적 진리의 이해는
오직 “가르침을 받고 그러한 것들에 대한 기억의 지식 안에서
기쁨을 지각하는” 마음에게만 주어질 수 있다고 하며
또한 “사랑과 인애에 속한 선은
주님에게서, 사람과 함께 하는 천사들을 통하여 흘러들지만
그의 지식 외에 그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에도
흘러들지 않는다.” 고 한다.
(In AC 4096 Swedenborg tells us that the understanding of
spiritual truth in the Word can be given only to a mind
"which has been instructed, and which perceives delight
in the memory-knowledge of such things,"
and also that "The good which is of love and charity flows in
from the Lord, and does so through angels who are with man;
but not into anything else in him than his knowledges.")
우리는 선한 의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저서에서는 선은 진리로부터 그 품질을 받고
진리를 통해 그 힘을 발휘한다고 말해준다.
저서는 또 우리에게 ‘선은 진리를 사랑한다.’ 고도 말해준다.
그러므로 우리 의도의 품질은 우리가 얼마만큼 열심을 내어
진리를 배우려 하느냐에 따라 결정됨을 명심해야 한다.
이 세상에 사는 오늘의 우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지각을 가지지 못하고
마치 구름 속 물방울에서 반사된 햇빛이 무지개를 만드는 것처럼
외부 경로를 수단으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온 지식 속에서만
진리가 우리에게 보여지게 됨을 유의해야 한다.
(You remember that we who live in the world today
do not have a direct perception of the truth
such as the people of the Most Ancient Church had,
but that truth must be shown us in the knowledges
which have entered our minds by an external way,
as light from the sun reflected from the drops of water
in the cloud makes the rainbow.)
이 세상에서나 다음 세상에서나 우리는 결코
"충분히 안다"는 지점에 도달하지 못한다.
주님은 우리가 날마다 말씀과 그 의미를
더 많이 배우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시험 속에서 우리를 보호하실 수 있다.
주님은 우리를 어떤 시험 속에서든지 다 구해주실 수 있다.
그러나 그 조건은 우리가 말씀을 더욱더 배우려 할 때
말씀 속의 의미를 날마다 더 새겨볼 때뿐이다.
“그분의 진리가 너의 갑옷이 되고 방패가 되신다.”
제 5반
이 수업에서는 시편에 언급된 위험들의 영적 의미뿐 아니라
약속 역시 영적인 것에 대한 약속이라는 것,
그리고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진리를 받아 사용하는 확실한 조건하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는 정신적으로 나태할 경우 그것은
선한 의도가 거짓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시편이 왜 우리의 공적, 사적인 예배(devotions)에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첫째 시편은 노래들이고 음악은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아주 깊은 호소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둘째 시편은 우리의 내적 상태,
즉 우리 자신이 표현하기 어려운 생각과 느낌의 상태들을
주님의 영감을 받은 말들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편은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가장 큰 특권인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전체에 걸쳐 그려주기 때문이다.
가장 깊은 의미상에서 시편은
주님 자신이 세상에 계실 때 통과해 가신 내적인 상태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형상과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으므로
시편의 영적인 의미는 모든 거듭나는 사람들의 상태들도 보여준다.
이 책 시편은 1편에서 의로운 사람과 불경한 사람 사이의
명확한 대조로 시작하며 책 전체에 걸쳐
악과 거짓의 공격에 맞서 주님의 도움을 받으려는
의인들의 필요가 끊임없는 주제이다.
이 책을 마무리 짓는 주님에 대한 승리의 찬양은
주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체험한 결과이다.
국제 성경 주해서에서는 시편 서론을 이렇게 말한다.
“성경의 어떤 책도 세계의 분열된 기독교를
이렇게 완전히 통합하지는 못한다.
세상에 나뉘어 있는 로마 카톨릭, 개신교, 성공회와
비성공회교도들은 공적이거나 사적인 예배에서 시편을 사용한다.
어떤 책도 인간 마음의 다양한 요구를 이렇게 완벽하게
표현하지는 못한다.”
시편 91편은 많은 시편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 속에 암송되고
이 시편으로 인해 긍지와 위로를 발견한다.
영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의 경우도 이 시편을 읽으면
주님과 천사가 자기에게 가까이하고 있음을 느끼는 바 있어
자기 혼자 투쟁하고 있지 않음을 감지한다.
그래서 바울은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라고 귀결 짓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 시편은 우리의 외적인 위험에서 건져 주는데
초점이 있다고 생각하려드는 경향이 심하다.
그 결과 우리가 심하게 병들거나 사별 같은 것이 있게 될 때
이런 사건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충분하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항상 있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신앙치료사들이
치료에 실패할 때 항상 하는 변명이다.
우리가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조차 이보다 더 잘 알아야 하는 것은
악마가 광야에서 주님을 시험할 때 인용한 이 시편 91편은
이런 명백한 외적인(문자적인) 의미 안에서였고(마 4:5-7)
이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약속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시편 91:11-12)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마 4:5-6)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주님은 모든 말씀 속에서
우리 영혼에게 말씀하고 계시고
또 그분이 구원하시기를 원하는 위험들이
영적인 위험이라는 것이 새 교회의 교리임을 우리는 안다.
주님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하여
우리의 몸에 많은 고난이 찾아오는 것을 허락하신다.
스웨덴볽은 예언서와 시편의 내적 의미를 요약하는 가운데
주님이 영화하시는 동안의 그분의 상태와 관련지어
시편 91편을 해석해 놓았는데 그 요약은 다음과 같다.
1절: 아버지와 하나가 되실 주께서 아버지를 찬양하는 노래.
2-6절: 그리하여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가 있게 될 것이고
7-9절: 지옥의 폭동이 그치며
10절: 교회에 대항조차 못하게 될 것이며
11-12절: 천국이 그분을 섬기고
13-16절: 신성이 인성과 하나가 되셨을 때 지옥의
어떤 두려움도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스웨덴볽은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이 시편이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얼마간 도움을 준다.
이 시편에서 그가 인용하며 종종 거기서 하나 이상의 구절을
설명하는 곳이 약 22군데나 그의 저서 전체에 흩어져 있다.
그의 저서에서 예를 들어보면
‘그분의 날개 아래에서 신뢰한다는 것(피하는 것)’은
알려진 진리 아래에서 신뢰한다는 의미라는 것,(AE 283-6 )
(‘to trust under His wings’ signifies under truth known,)
‘밤에 덮치는 무서운 손(공포 dread)’이란
지옥으로부터 오는 악과 거짓들을 뜻한다는 것이다.
‘낮에 날아드는 화살’이란 공공연하게 가르쳐진 거짓이고
이로 인해 선이 파괴되어진다.
‘밤중에 퍼지는 염병’이란 은밀히 황폐케 하는 악이고,
‘한낮에 쏘다니는 재앙’이란 공공연하게 살아있는 악들로 이로 인해
진리가 파괴되어 황폐케 된다.(AC 6000-9, 7505)
교회의 진리들을 황폐케 하는
내면과 외면의 거짓들을 파괴하는 것이
‘네가 사자와 독사 위를 짓밟고 다니며..’로 표현되고,
교회 속의 선들을 황폐케 하는
내면과 외면의 거짓들을 파괴하는 것은
‘사자새끼와 뱀을 짓이기리라’로 표현되고 있다.(AE 714-24)”
우리를 맹렬히 공격하는 시험은 날마다 연속되고
이 시험들이 지옥에서 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몇몇의 악과 거짓들은
우리가 그들의 진짜 성격을 즉시 알아볼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이 “낮에”, “한낮에” 오는 위험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불명료하기 때문에
즉각 인식하지 못하는 다른 시험들도 있는데
이런 것들이 “밤에”, “한밤중에” 오는 위험들이다.
비록 우리가 일반적으로 선하게 되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종종 "낮에" 오는 시험에도 굴복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약한 의지를 강화하기 위해
하늘로부터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신을 숨기는 악과 거짓을 인식하고 거부하기 위해
주님의 도움을 확실히 필요로 한다.
오늘의 시편은 이 도움이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 도움을 받기 위해
우리가 충족시켜야 할 몇 가지 조건들이 있다는 것도
분명히 가르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길을 가다가 그 뒤 문제가 닥쳤을 때
주님을 부르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단지 희망사항일 뿐이다.
시편은 지존하신 분의 은밀한 거처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분의 거처는 우리가
자기 속의 자연적인 생각이나 경향성에 따라 살게 될 때는
거기 거할 수 없는 곳이다.
우리가 신뢰해야할 날개란 영적인 진리들이며
우리의 갑옷이 되고 방패가 되리라는 것은
진리에 대한 신실함이다.
말씀을 매일 읽는 것과
주님이 당신의 재림으로 우리에게 열어주신
말씀의 영적 의미에 대한 공부를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안전과 보호를 기대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 설명 제 471-2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읽게 된다.
“말씀 가운데 자주 등장되는 말 중의 하나는
‘대답(응답)하다’ 라는 말이다.
주님에 대한 언급에서 이 말의 의미는
(주님으로부터 오는)유입, 영감, 지각, 교시
마찬가지로 자비와 도움을 뜻한다.”
곤경에서 구해달라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반드시 우리가 처한 외적 불행에서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불행이 우리에게 오도록 허용된 이유를 이해하고
그것을 대처하여 우리의 영적 발전을 위해
사용하는 힘을 얻는 것이다.
참고문헌 - 스웨덴볽의 저서에서
「천국의 신비 제 7102-10항」
“여기서 ‘밤의 공포’는 은밀한 거짓이고
‘낮에 날아드는 화살’이란 공공연한 거짓이다.
‘어두울 때 퍼지는 염병’이란 아주 은밀한 악을,
‘대낮에 닥쳐오는 재앙’이란 공공연한 악을 말한다.”
「천국의 신비 제 7505항」
“‘극한 염병’이란 일반적으로 볼 때
완전히 소진됨(consumption)을 의미하는데
이는 진리의 황폐를 가리키는 염병(pestilence)의 의미로 분명하다.
[시편 91:5-6]
‘어두울 때 퍼지는 염병’이란
은밀한 가운데 황폐케 하는 악을,
‘대낮에 닥쳐오는 재앙’이란 공공연하게 황폐케 하는 악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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