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눈, 열린 인생. 눅24:13-14, 29-32.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어부층, 하류층 시민들을 들뜨게 했던 예수 메시아사건은 십자가에 처형함으로 진압된 것 같았다. 봉인하고 군대가 지킨 지 사흘인데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살아난 것을 목격했다"라는 괴소문이 퍼졌다.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카더라’에 대해 갑론을박… 한 동행자가 "뭔 얘기들이오?""지난 며칠 동안 있었던 일을 당신만 모르오?"" … ?"
이적과 기적으로 온 유다를 들끓게 했던 나사렛 예수의 일을 소상하게 설명하면서 "우리는 그가 이스라엘을 속량할 사람이라고 믿었다."고… "그런데 맥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죽은 지 사흘째인데 어떤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가 살아난 것을 목격했다"고 ‘카더라’는 얘기였다.
이에 예수께서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는 선지자의 말을 믿지 못하느냐?"고 하며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메시아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마을에 도착하자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아멘’하고 눈을 떠 보니 동행자는 사라졌고, 그들의 눈이 밝아져 말씀하시던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음을 깨달았다. "그분이 길에서 말씀하실 때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 그들은 곧장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가 보니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사실이다! 주님께서 살아나셨다. 시몬이 주님을 보았다.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시더라."고 했다.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평안할지어다." "왜 그렇게 놀라며 의심하느냐? 내 손과 발을 보아라. 나다! 자,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으나 나는 있느니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으나 그들은 너무 놀라서 오히려 믿지 못하고 당황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출애급 사건이나 홍해 도하 사건이나, 다니엘이 총리가 된 사건이나, 다 역사적인 사건인데 ….
Ⅰ. 믿음은 ‘이해, 설득, 납득’으로 믿어지는 게 아니다,
두 제자는 예수와 동행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면서도 부활의 주님을 몰라봤다. 치매인가? "관원에게 잡혀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다. 그러나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고하지 않았던가? 왜 까먹었나? 그러고도 제자들인가? ‘설마 그렇게 능력이 많으신 분이 맥없이 죽다니! 그리고 또 살아? 그런 능력이면 죽지 말아야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유월절> <대속죄일> 어린양 제사를 지내왔는데 ‘메시아가 대속 제물로 십자가를 지셨다’가 이해 불가라니! 납득 불가라니…! … … … 그렇다. 믿음은 ‘이해, 설득, 납득’으로 믿어지는 게 아니다.
또 주님이 예고하실 때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시옵소서! 절대로 그런 일이 주님께 닥치지 않게 하겠나이다." "후파커 사탄아!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주님의 단호하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능력이 많으신 메시아가 죽어야 할 리가 없다. 너무 단호한 확신이다. 이 확신이 믿음인가?
생각의 카테고리 밖의 말씀은 기억되지 않는 게 사람이다. 새까맣게 잊힌 말씀은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마저 알아채지 못하게 되었다. 자기 카테고리에 빠져 옛사람의 경지에서 헤매며 광야를 다닌다. 만나를 먹으면서, 구름 기둥을 보면서,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면서 애급의 노예근성은 가지고 다니는 성도가, 장로가, 목사가 얼마나 많은가?!
Ⅱ. 특별은혜 체험자 마리아.
팔자 기구한 마리아는 예수님 아니었으면 벌써 죽었을 여자요, 오빠 나사로의 부활을 본 여자다. 생명의 은인이고, 구세주다. 다 도망친 제자들과 달리 십자가 밑에까지 갔었다, 어디에 어떻게 묻혔는지, 얼마나 큰 돌로 막아 놨는지, 로마 병정이 보초 서는 것까지 봤다. 그런데 ‘주님 시신에 향유를 바르려고’ 갔지 부활을 확인하러 간 건 아니다.
베드로가 달려와 ‘빈 무덤’이 확인되자 그냥 되돌아갔고, 주님이 마리아에게 보이셨다. 마리아는 동산지기인 줄 알고 주님 시신을 달라고 울며 보챘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알다니! 기름 바른다고 시신을 달라니! 이게 종교다. 이런 종교는 천주교에서도 볼 수 있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 충실한 **교단에서도 볼 수 있다.
답답하신 주님은 "마리아야!" 부르신다. 그때야 눈이 열려 부활의 주님을 보며 "오! 랍오니여!(요20:16)" 외친다. 제자인가? 사도인가? 마리아처럼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여 새벽 미명에 무덤을 찾아간 열정인가? 내 뜨거움, 내 열정, 내 사랑이 영적 눈을 뜨게 하던가? 주님을, 그 뜻을, 말씀을 보고 듣게 하던가? 역시 내 확신, 내 소신은 믿음이 아니다.
Ⅲ. 식탁에 초대해서 축사를 받고야 열렸다.
초대되신 주님은 그 식탁에서 축사하셨다. 아멘! 눈을 떴을 땐 이미 주님은 사라지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눈이 떠졌다. <디아노이고>(헬)는 닫힌 것을 ‘완전히 연다’라는 의미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알고, 믿고, 확신하도록 영적인 세계가 열렸다는 것이다. 길에서 대화할 땐 이해되고, 납득되어 가슴이 뜨거웠지만 믿어(영접)지지는 않았다.
BC 845년경, 북 강국 아람은 툭하면 이스라엘을 기습했다. 1급 비밀 작전이었음에도 매복군에게 걸려 죽는다. 열 받은 왕은 첩자 색출에 나섰다. "아뢰옵기 황송하나 거긴 신들린 엘리사가 있어서 왕의 침실에서 하는 얘기도 다 압니다." "고뤠? 엘리사를 잡아오라." 특공대를 비밀리에 급파.
엘리사의 사환이 특공대들의 기습을 본다. "쎄엠이여, 큰일 이라예." "우리 군대가 더 많다." "엥~ ?" "이 종의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저들의 눈은 멀게 하소서!" 정말 천군 천사의 호위가 어마어마했다. 특공대에게 "누굴 찾소?" "엘리사요." "나를 따라 오시오!" 사마리아까지 끌고 갔지만 그들의 눈이 멀어 누굴 따라가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사마리아 한복판에 포위한 다음 "아버지여 저들의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꼼짝없이 포위된 특공대는 항복했고, 잘 먹여 돌려보냈다. 두 번 다시 침공은 꿈도 못 꾸게 했다(왕하6:1-23)
산 자와 죽은 자의 영이 이렇다.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도 삶이 다르다. 의식의 카테고리가 다르다.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뚜껑 열리면 열린 대로 사는 자는 죽은 자다. 예수 영접 때 옛사람이 안 죽었다. 아니면 사탄의 힘으로 부활했거나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시편 기자의 기도다. 어려울 때 사탄은 절망만 보여준다. 막다른 골목으로만 몰아댄다. 그러나 나는 그 절망에 빠지지 않으면 <절박함>이 없기에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는다. 찾고 구하고 두드리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나는 비상구는 그렇게 해서 열리는 것이다. 나를 연단하시는 그 손에 영광이 있기를!
<육신의 눈 안 보이면 신령한 눈 열려서 저 천국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이해, 납득, 설득으로 믿음이 열리는 게 아니라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열린다. 이것을 **교단에서는 ‘택함받는 자’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