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으로부터의 평화
설교 : 빛고을 새교회 이종위 목사 (2020년 3. 8)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 사람을 판결하시리니...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미가 4:3-5).
선지자의 평화에 대한 예언입니다.
모두가 전쟁을 멈추고 두려움 없이
자신의 땅에서 평화롭게 살 것이라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태껏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내용입니다.
과거의 여러 어려움은 차치하고서라도,
연일 확진자는 쏟아져 나오고, 마스크는 구하기 어려운데,
이웃나라는 빗장까지 걸어 잠그겠답니다.
미가 선지자가 노래한 주님의 평화를 언제쯤 누릴 수 있을까요?
가능은 한 걸 까요?
일상의 소소함이 무척 그립습니다.
지금 이곳엔 다툼이 있고, 불안이 만연하고, 도처에 공포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평화의 예언에서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주시는 걸까요?
평화란 대체 무엇인가요?
사전적 의미는 전쟁이나, 염려, 괴로운 생각이나
혹은 안전의 우려가 없는 상태나 기간을 의미합니다.
마치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와 같은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하지만 분쟁과 걱정이 없는 상태, 공공의 안녕은
자연적 평화이기에, 이 평화는 제한적입니다.
실제로 공포와 전염병의 위험이 없이 일상을 살았던 한 달 전에도
우리는 지쳐있었고, 여러 사회 현상에 우울감을 느끼며,
수많은 불편한 감정들로 괴로웠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이런 평화와는 다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요14:27).
주께서 주시는 이 평화를 경험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마 부분적으로는 느껴보셨을 겁니다.
가장 정확한 그 평화에 대한 표현은
기술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완벽한 평화입니다.
평화는 선함 가운데서만 느껴지는데
평화가 주님으로부터
선한 사람들의 마음 가장 내적인 곳에 흘러들어오고,
거기서 더 낮은 곳으로 흘러내려
마음의 평화, 태도의 안정감,
그리고 그에 따른 기쁨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상태의 사람에게 평화는 가능하지 않습니다(천지 590).
평화는 이른 아침의 동이 트는 여명,
추운 겨울 뒤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비유됩니다.
존 밀튼은 자신의 “실낙원”에서
“달콤함은 아침의 숨결...일찍 일어난 새들의 매력, 기분 좋은 태양...”
이라는 표현에서 아침의 평화로운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새교회의 가르침도 비슷하게 천국에서의 평화는
지상의 봄이나 새벽 여명과 같고,
감각적인 변화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즐거움이 모든 것들에 홀러 들어 지각되고
그저 지각뿐 아니라 다른 대상들까지도 즐거움으로 채운다고 합니다
(천비 5662).
언제, 어떻게 이런 평화를 맛볼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실 때입니다.
평화는 극내적으로 주님을,
내적으로는 주님의 왕국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화는 주님의 모든 속성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을 함유합니다.
이때 세속의 염려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되며, 마치 어둔 밤을 지나
신선하고 생동하는 아침의 새 기운을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잠시 후 출근 지옥, 하루의 고단한 일과에 파묻히겠지만
아침의 이 생생함은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해줍니다.
두 번째는 주님의 섭리를 믿는 것입니다.
늘 주님을 우리 내면에 모셔드리므로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 자라나게 되어
긍정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당신의 임재를 지각하는 정도가 우리의 평화로움의 정도를 정하고,
우리가 겪는 일들이 비록 불행과 염려스러운 것일지라도
우리의 영원한 삶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주님의 지혜로운 섭리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갖게 됩니다.
이러한 신뢰 없이 당신의 평화를 누릴 수 없고
이 평화에 내재된 축복이나 기쁨은 더욱 요원하게 됩니다.
주께서 함께하실 때
당신의 신적인 속성들이 내 안에 가득해져,
자연스레 천국의 평화와 기쁨을 누리며,
더불어 선한 의지와 밝은 진리도 풍성해져
그만큼 우리의 악한 욕망들과 거짓된 생각들은 줄어듭니다.
이런 까닭에 천사들은
평화는 선함 안에서만 가능하고...악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평화가 있을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외적으로는 평안과 안정이 있는 것 같지만
내면에는 적대감, 증오, 복수심, 잔인함 등이 자리하고 있어
언제든 밖으로 터져 나올 수 있음입니다(천지 290).
결국, 선함이 없이 주님의 평화는 가능하지 않고,
오히려 갖은 지옥적 감정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불행한 상황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안에 진정한 선함이 없어
주님이 계셔 우리를 다스리실 수 없고,
주께서 계시지 않는 곳이 결코 천국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아닌 곳이 지옥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고대인들은 “평화를 빕니다.” 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지혜로웠던 그분들은 평화가 주님, 천국, 구원, 안전, 건강 등을
의미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천비 4681).
자신들의 가족이나 친구가
천국의 상태에 머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미가 선지의 예언도 같은 의미를 담았고,
이 예언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이 평화는 당신이 내 안에 계신 만큼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천국의 은택입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을 지나는 저희들,
지금은 강적을 만나 더욱 분투하고 있는 이때에
사랑하는 빛고을 새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에게 세상은 결코 줄 수 없는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내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이사야 48:18). 아멘.
말씀: 미가 4:1-5; 요한복음 14:25-31; 천국의 비밀 56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