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원당(聚遠堂) 유적(遺跡)지 앞에서
조종(祖宗)되신 聚遠堂이
길지(吉地)잡은 천세(千世) 터전행인(行人)에게 귀감(龜鑑)표본(標本)
江東邱와 五峯書院 종람소(綜覽所) 열리었으니 참예(參詣)하여 따 가게나 면면히 이어내린 선대들의 충효정신(忠孝情神) 세세손손 본을 받아 쉼없는 수신제가(修身齊家) 보은(報恩)과 사랑으로써 이웃 위해 살라시네 13代孫 曺 幸鍾 撰
江東邱와 五峯書院
종람소(綜覽所) 열리었으니
참예(參詣)하여 따 가게나
면면히 이어내린 선대들의
충효정신(忠孝情神)
세세손손 본을 받아
쉼없는 수신제가(修身齊家)
보은(報恩)과 사랑으로써
이웃 위해 살라시네
註:1) 조종(祖宗): 취원당(聚遠堂)* 曺光益(1537-1578) 호는 취원당(聚遠堂) 公이 당시 1564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兵曹左郞에서 正郞으로 승진되어 있을(지금 국방부 군인사 담당 참모 부장 소장급에 해당) 당시 公의 아우인 芝山 曺好益(1545-1609)은 선조 때 경상도사 崔滉에 반항했다 하여 그의 모함을 받고 평안도 江東 땅으로 유배되었다. 취원당은 그의 아우를 못 잊어 내직을 사양하고 외직인 아우가 유배되어 있는 평안도사를 자원하여 갔다가 병을 얻어 객관에서 별세. 著書:취원당 선생 문집(시 39편 외 題書, 記, 科題, 遺事, 祭文, 行狀, 碣銘, 등이 수록)
2)강동구(江東邱):초동면 오방리 동구밖 고개 한길 가에 있는 취원당(聚遠堂) 曺光益(1537-1578)의 효행과 우애, 선정(善政)의 표상으로 비곽과 둔덕이 있다. 公의 아우인 芝山 曺好益이 평안도 강동에 귀양가 있기 때문에 공이 평안도 도사를 자원하여 재직중 도민을 위한 열정에 그만 병을 얻어 객관에서 별세하자 강동 사람들이 공이 형제간의 우애와 도민에 끼친치적에 감복하여강동 고을 사람들이 강동 흙을 싸들고 평안도에서 경상도 밀양까지 천리길을 걸어 장지에 弔問하러 왔으나 이미 장례식이 끝났으므로 그들이 싸들고 온 흙을 공의묘 근처에다 둔덕을 쌓아 놓고 대나무를 심고 갔다. 이것을 江東邱 즉 평안도 江東에서 가져온 흙 두덩이라고 하여 강동구라 부른다. 강동 흙은 곧 공이 강동민에 베푼 선정의 표상이다.
3))오봉서원(五峯書院):1780(정조4)년 聚遠堂의 始居地인 이 곳에 五峯祠를 창건하고 聚遠堂만을 獨享하다 1790년에 淨友堂 曺致虞와 竝享을 禮曹에 請疏하여 淸孝祠 로 개칭하였다. 이는 淨友堂의 淸白奉公과 聚遠堂의 孝友出天 정신을 숭상하는 뜻에서 淸孝 두 글자를 딴 것이다. 1795년 밀양 고을 士林들의 주창으로 春秋 2회의 享祀를 청원한 바 太學에서 화답하여 1796년에 五峯書院으로 升號되었다. 그로부터 享祀와 士林들의 文會와 敎育場으로서 이용되던 중 1868(고종 5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五峯書堂으로 개칭하였다. 1981년 李佑成이 쓴 오봉서당 記文이 있고, 1997년 오봉서원으로 중건하여 李家源이 쓴 記文이 있다. 4)종람소(綜覽所): 도서관의 일종으로 신문, 잡지, 서적 등을 갖추어 놓고 누구든지 이용토록한 일종의 공부하는 장소
취원당의 가계
증조부: 휘 致虞 호 淨友堂(1459-1529) 1483(성종14년) 사마시 등과 및 병과에 합격 1494년 예문관의 검열관 1498년 무오사화 때 휴직하고 있었음으로 화를 면함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사옹원정(사헌부장령)에 임명
되었으나 간신들의 시기로 대구부사로 좌천 1513년 모부인 병구완으로 사직 著書: 淨友堂 先生 實記
조부: 휘 孝淵 호 韋齋 함안 군수 퇴계 선생의 4촌 누님과 결혼으로 처가가 안동
부: 휘 允愼 호 魯齋 이조판서 張末孫의 손녀에게 장가들어 5남을 두어 아들들을 그의 고종 매부인 홍문관 교리인 周 博(주세붕의 아들 호 二樂堂)과 외손인 朴漢柱에 아들들을 보내 수학하게 하다. 특히 취원당(조광익)과 지산(조호익) 두 아 들을 안동 퇴계선생에게 보내어 事師
聚遠堂 1558년 진사시에 합격 1564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3년 만에 兵曹佐郞, 正郞에 승진, 친구들(이율곡. 기대승, 金東岡, 金鶴峯, 金紐(점필제 손자), 鄭栢谷(정한강의 동생) 들이요, 사위는 李宜潤(晦齋 李彦迪의 장손)이다.
저서에 취원당 선생 문집 국역본이 있다.
曺好益(1545-1609) 호는 芝山 선조 때 1575년 경상도사 崔滉이 公을 軍籍을 감독하는 자리에 임명하고는 역정 50명을 독납토록 명했다. 공의 父가 71년에 母가 72년에 卒하여 부모님의 3년 喪을 끝내지 못했다고, 당시 국상시는 개인 상은 부득불 연기해야 했다. 즉 명종 비 인순왕후 승하로 거기다 자신의 신병까지 있어 군적 자리를 謝絶하자 '명령에 항거했다' 하여 江東 지금의 평안도 바닷가 변방 지역으로 전 가족이 귀양가서 17년 만에 풀려나 의금부 도사 성천 부사를 역임하다 임란이후 관직에서 물러나 영천 西陶村으로 이사한 후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주력함. 저서: 家禮考證이 전함
오방동의 유래
聚遠堂은 지금의 창원시 북면 지개동에서 출생하여 密陽 고을의 명사인 朴弘美의 딸에게 장가감으로 그 집에 아들이 없어 公이 妻家 가까운 密陽의 吉地를 가려 450년 전에 거처를 이곳 오방으로 옮김으로 인해 五榜洞이 密陽의 昌寧 曺氏 集姓 부락이 되었으며, 이 五榜洞이란 이름의 유래는 公의 妻家 취객들 가운데 과거에 登科한 이가 公을 위시하여 다섯 명이나 과거에 합격 榜이 붙었다고 하여 五榜洞이라고 이름지어졌다는 설도 있다.
지금은 五方里, 五方洞이라고 쓰는 데 五方은 동서남북의 네 방향과 中央의 뜻으로 사방 팔방을 뜻하지만 '~을 이끌다, ~을 지도하다, ~을 감독하다, ~을 관리하다,' 의 뜻이 들어 있어 吉地임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