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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대한민국 정부 미국에 의하여 공인
1. 대한민국정부 선포
서울 신문의 사설에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에 대한 사설을 발표함에 미군정을 종식하고 미국이 권리하고 인정하는 정부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서울 신문 사설에 발표를 하였지만 국가적 명으로 선포하지 못하고 미군정에서 인정하는 발표를 하였다는 것은 미군정에 의하여 선포되었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해방 만3년인 8월 15일에 그 수립을 세계에 선포하고 정권 이양의 정식 교섭은 그 익일인 16일부터 개시케 되었다. 회고컨대 1945년 8월 15일 이 땅에 해방이 오고 곧 독립이 된 줄 狂喜足蹈하던 것도 허사이고 뜻 아닌 38선으로 국토는 양단 분점되고 해방의 은인인 미소 양대국이 각기 자국의 의도 하에 행동하여 될 듯 갖은 파란곡절과 혼란만 거듭하면서 독립을 찾지 못하고 사상대립 격화, 정치노선 혼효, 경제질서 붕괴, 국민도의 실추 등으로 민생은 극도로 도탄에 빠져 生不如死의 현상에서 허덕이고, 정치는 완전히 대중과 유리된 채, 이 나라에 광명이란 찾을 길이 없고 제3차대전 필지의 예측하에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세계는 미소 양대 세력의 각축이 날로 심하여 조선문제란 미소의 협조가 없이는 도저히 해결의 가망이 없게끔 되었다. 유엔에 제소되어 가능지역인 남조선의 총선거로 국회가 성립되고 헌법제정, 대통령선거, 중앙정부 조직 등의 순서를 거쳐 정부 수립을 선포케 되고 이양 교섭이 개시된 것이다. 신생정부가 중앙정부이기는 하나 남북통일은 미완성인 채 그대로 민족의 원한이 맺혀 있고 민생 문제는 시급한 해결을 기약하기 어려운 실정에 있다. 조각이 민의와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에 부담이 없지 않지만, 정부 이양이란 큰 문제가 있고 국제 승인이 앞에 걸쳐 있기 때문에 우선 정부를 지지하는 국민의 苦哀를 알아야 할 일이다. 일제시대보다 군정시대보다는 어쨌든 우리들의 정부이니 이 정부에 정권이 이양될 때까지 일체 함구하여 참자는 생각은 자주자립 민주국가를 만들자는 국민의 안타까운 심정의 발로가 아니고 무엇이냐. 장차 나타날 우리 정부의 성격이 毛絲만큼이라도 독재 전제에 흐르지 않을까 하는 의구를 가지게 해서는 큰 일이다. 대통령 이하 집정자에게 苦言을 감히 呈하는 所以가 여기 있다. 남한에서의 중앙정부 수립은 확실히 독립 전취의 일보전진의 정치적 성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외의 모든 것은 조금도 해결된 것이 없고 숙원 그대로이다. 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이 날, 3천만에게 8·15의 감격이 없음은 이것을 증명하고 남음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국민된 의무에 忠하려 하노니 정부 諸公은 공복된 의무 완수에 게으름이 없기를 기하라. 한미 양당국 간에 정권이양 교섭이 개시된다. 군정이 철폐되는 이 날의 소감을 단적으로 말하라면 勞는 多하고 功은 적었다 할 수 있다. 사정에 어두운 그들이 이역에 와서 군인으로서 서투른 정치하느라고 애쓴 것은 인정하는 바이다. 군정 실패는 사실이 자명한 것으로서 그들도 결코 만족치 않을 줄 안다. 뜻밖에 3년이란 긴 세월 군정이 계속될 줄은 그들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往事는 莫論하고 정권을 이양하는 미군정청이나, 이수하는 우리 정부에게 부탁과 기대가 없을 수 없다. 정권을 이양하려면 깨끗이 이양하라. 주기는 주되 설미직하게 아끼지 말라는 말이다. 듣건대 고문과 기술자가 남으리라 한다. 그러나 主從의 別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명목상 이양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만의 하나라도 이런 일이 있다면 대한민국을 우롱하는 것으로 怨府가 되는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더구나 돈과 물건에 대해서 그들이 그대로 집권치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큰 만큼 이 점을 특히 부탁하는 바이다. 깨끗이 정권이 이양되거든 이것을 받아들이는 신정부는 내 것도 찾았다는 만족감에 墮하지 말고, 받아들인 이것을 어떻게 올바르게 利用, 善用할까 충분한 용의와 결심이 있어야 할 일이다. 40년간 일본이 망쳐 놓은 것, 3년간 군정이 그르쳐 놓은 것을 시정하고 成育시키고 발전시킬 의무를 자각해야 한다. 중앙정부다운 중앙정부로서의 負荷된 사명을 다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미군정 2년 10개월 만에 연합군에 의하여 해방이라고 선언한 이후에 일본이 강점하고 있는 조선을 연합군에 의하여 점령 한 이후에 38선 분단 이남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선언한 이후에 미군정을 엄무를 종식하였다. 연합군에 의하여 해방이라는 조선이 분단한 이유를 보면 미국에 의한 조선강점에 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는 대한민국 선포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선포한 이후에 일본이 자행한 인권문제에 대하여 선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에서 일본의 역할을 지우는데 있다는 것을 말한다.
2) 미군정 업무 종식
미국은 조선을 분단하고 38선 이남을 관리하는 미군정이라는 분단의 기구를 종식한다고 발표를 하였다. 미군정이 실행하려고 했던 것은 38서 이남을 미국의 통치령으로 전한하는 행정을 이행하도록 했다는 점 말고 아무 것은 수행한 것이 없도록 한 미군정이다.
해방 후 삼년간 계속 되어오던 지리한 군정은 드디어 어제(15일) 자정으로서 종지부를 찍고 오늘 0시부터 신생 대한의 정부는 힘차게 자주 민주국가로서 등장하게 되어 태극기 밑에서 자유와 평화를 향유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을 선포한 이후에 미국은 맥아더원수의 축사가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실지로 미군정의 연장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미국은 그러한 문제를 회피하고 있는 축사를 하고 있다.
“이 역사적 순간에 본관이 대한국토에 입각하여 이 땅에 자유가 소생하여 자유가 풍미함을 볼 때에 감개무량하다.,본관은 40년간 여러분의 애국자들이 외국의 압박의 羈絆을 벗느라고 분투하는 것을 감탄해 가며 지켜보았다. 그들의 백절불굴하는 굳은 결의는 운명과 절충하기를 거부했고 대한민국의 자유를 전세계에 한 번 마음속에 박힌 자유의 정신은 영원불멸한다는 만고불멸의 진리의 변증이 되었다. 그러나 정의의 위력이 용진하는 찰나에 그 정의의 凱旋은 근대 역사의 일대 비극인 귀국 강토의 인위적 장벽과 분할로 무색해졌다. 이 장벽은 반드시 파열해야 될 것이요 도한 파열될 것이다. 여러분들이 자유국가의 자유로운 국민으로 결국 통일하는 데 있어 이것을 금할 것이 천하에 아무 것도 없다. 한국국민은 너무나 위대한 선조의 후손이라 외래분열의 철학에 굴하여 그들의 성업을 희생할 리가 없다. 아세아대륙이 이 땅에서 멀리 西便을 바라보면 거기에는 공포와 위협과 비참이 사람의 마음속에 가득하고 대중은 死間에 갇혀 있고 사상적 압박에 기진맥진하여 자유의 향기를 구하고 있다. 이 땅과 저 서쪽에서 되고 있는 그 사태가 평화의 세계냐 전쟁의 세계냐를 결정할 요소가 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아두어야 한다. 과거 3년간 나의 나라(미국)의 총포는 침묵을 지켜왔고 그 동안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 협력하여 근대세계의 도덕의 힘을 가지고 세계평화를 역력히 유지할 수 있는 인간적 관계를 구하여 왔다. 우리의 노력은 권력에 대한 탐욕과 강욕과 갈망의 악한 정신으로 인하여 저해를 당했다.,그러나 금일 귀국의 재생은 인류 자유의 이념에 의한 인간사회에 깊이 깊이 뿌리를 박아 영원히 멸할 수 없다는 것의 산 증거가 된다. 여러분은 자유롭고 독립한 민주국으로 여러분의 운명의 길을 출발하도록 된 이때에 여러분이 선출한 지도자들의 지혜로 여러분의 국가의 힘을 측정하게 된다. 만일 그들이 개인의 복리와 적당한 지위를 보장하여 그 개인의 근실의 정도와 자연의 제한이 없는 한 향상 발전의 기회를 부여한다면 이곳에는 행복되고 근실한 국민의 강국이 자랄 것이요 그 국가는 모든 불량분자 공격에 不落의 요새가 될 것이다.,민주적 생활의 방어는 무엇보다도 개인 자유의 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이것을 지킬 결심과 용의를 가진 사람뿐이다. 미국국민은 귀국민과 단연 格別한 우호적 관계를 가졌다.,일찍이 1882년에 양국 국민간에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양국간에 영원한 평화와 우의를 선포하였다. 미국국민은 이 서약에서 이탈한 것이 결코 없다. 이만큼 여러분은 그 不可分 不可離의 우호관계를 신뢰할 수 있다.,李대통령각하와 신생 민주국가 영도에 있어 각하를 보좌할 閣員 諸位는 정치적 경험에 있어서 이미 찾아보지 못한 가장 복잡한 문제에 당면할 것이다. 이 문제를 여하한 방법으로 해결하느냐가 귀국 국민의 통일과 복리를 대부분 측정할 뿐만 아니라 역시 아세아대륙의 장래 안정을 결정할 것이다.,본관은 각하의 대한국민에게 신임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의 聖業에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보호가 각하와 애국민에게 있을 것을 축원한다
대한민국이 선포 되었음에도 불구하고도 민주여성 동맹에서는 조선 최고 인민위원회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민주여성동맹에서는 조선최고인민회의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는 점이다.
민주여성동맹에서는 지난 29일의 국치일을 당하여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해방된 지금에도 李完用과 같은 무리가 적지 않다. 우리는 조국이 또다시 식민지로 됨을 결사 반대하여야 하며 조선최고인민회의를 적극 지지하므로써 급속한 조국의 통일에 이바지하자.”
대한민국 선포를 한 이후에는 여성들의 활동인데 김환란 여사가 유엔 한국 특사가 유옥에서 미군의 남한에 계속 주둔을 주장했다. 金活蘭 유엔한국특사, 뉴욕에서 미군의 남한 계속 주둔을 주장
한국 UN사절단 일행은 작10일 夜, 당지에 도착하였는데 동 사절단 중 김활란여사는 다음과 같이 소신을 기자단에게 말하였다.“본사절단 일행의 의견으로서는 미군은 남한주둔을 계속하여야 할 것이라고 본다. 철퇴한다는 것은 미군으로서는 불현명한 정책일 것이다. 소군이 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한 우리는 미군의 철퇴를 불원한다.”동 한국사절단은 당지로부터 퀸메리호로 海路, 파리에 향할 것이다.
미군정을 찬양했던 종교가운데 가장 먼저 로마교황이 분단의 남쪽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축하를 하였다. 로마 교황 비오12세는 정부수립 축하메시지 전달하였다.1948년 3월 현재 사찰 920개, 승려는 6천여 명이었다고 발표를 하고 있는데 불교계가 나서 일본 식민 지 시대에 자행되었던 강제 징용문제를 해결하는 준비를 해야 함에도 불교계에서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조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금번 대전 중 악독한 일제에게 강제동원을 당한 자로서 미귀환자 및 사망자의 유가족으로 구성된 태평양동지회에서는 시 후생당국의 원조 하에 그 해당자를 각 동회를 통하여 조사중이므로 일반의 적극적인 원조를 바라고 있다 한다. 해당자는 남녀 육해군 군속·징용 보국대·여자정신대·전병사자 및 미귀환자의 유가족 등으로 미수임금이 있는 자라고 한다.
1948년 08월 31일, 민주여성동맹에서는 조선최고인민회의지지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지난 29일의 국치일을 당하여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해방된 지금에도 李完用과 같은 무리가 적지 않다. 우리는 조국이 또다시 식민지로 됨을 결사 반대하여야 하며 조선최고인민회의를 적극지지 하므로써 급속한 조국의 통일에 이바지하자.
태평양동지회에서는 태평양 전쟁 희생자들을 귀국하게 하여 유골을 이안식을 준비하였는데 본각사에 봉안하려고 했다는 본각사다 본각사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이유로 유골을 봉안하려고 했떤 이유에 대한 기록이 없다, 태평양동지회에서 일본정부로부터 인도받아 희생자 8133유골을 봉안하려는 삼각지 본각사의 중요성이다. 1948년 9월 14일에 삼긱지 본각사에 봉안 한다고 보도를 하였다. 특별히 위안부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다.
3) 태평양동지회,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골이안식 준비
국제신문 1948년 09월 14일, 태평양동지회에서는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골이안식 준비 특별히 태평양 동지회에서 위안부에 대한 발언을 하였다는 사실을 바르게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안부에 대한 발언을 한 단체나 기관이 없었는데 태평양 동지회에서 위안부에 대한 발언을 하였다.
태평양동지회에서는 일본정부로부터 인도받은 태평양전쟁 희생자 8,133柱의 유골이안식을 오는 9월 말경 거족적으로 엄숙하게 지내기 위하여 그 준비에 바삐 돌아가고 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전쟁기간 중 거의 절망적으로 부족 되는 인적 자원을 우리 민족에게 구하고자 자기 한 몸의 부귀영화를 위하여는 민족이고 뭐고 헐값에 팔아먹고, 그들의 앞잡이 조선 말하는 왜놈들은 同祖同根, 內鮮一體 심지어는 황민화를 부르짖고 우리 민족의 기둥이 되고 주추가 될 수많은 청년 남녀들을 전장으로 전장으로 끌어내었다. 육해군 군속·징용·징발·보국대·간호부·애국작업단·정신대·위안부 등등으로 왜적의 채찍 밑에 끌려나간 사람 무려 250만, 이 중에 약 80만 명은 조국을 떠나 주로 태평양 방면으로 끌려가서 ‘죽음의 노역’을 강제당하였다. 민주연합군의 위대한 승리는 그들에게도 8·15의 감격을 가져다 주었다. 다행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속속 조국을 향해 돌아왔다. 그러나 굶주림과 학대 속에 병들어 죽고, 극도의 절망 끝에 자살하고, 총탄에 쓰러진 5만에 가까운 동지들을 멀고 먼 외로운 섬에 두고 오는 그들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한 해가 지나고 이태가 지나고 또 3년이 지났다. 한 몸의 영화를 위하여 자기 민족을 ‘죽음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던 조선 말하는 왜놈들은 민족의 이름 아래 처단되기는 커녕 도리어 애국자의 이름으로 전보다 더한 권력을 잡고 활개를 치고 있다. 그들의 눈 앞에 징용갔던 사람쯤 문제가 아니다. 지난 2월과 6월에 도합 8,133주의 희생자의 위패가 궤짝에 담겨 짐짝처럼 부산 부두에 부려졌다. 오끼나와와 대만에서도 벌써 작년 6월에 유골을 다 찾아갔다 하거늘 남조선과도정부에서는 일본정부가 제멋대로 보내준 유골마저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무처와 보건후생부가 옥신각신 서로 책임만을 떠맡기려 들어서 민족의 수치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 원한에 잠긴 혼령들을 다시 또 떨게 하였다. 태평양동지회는 일제에게 강제징용 당하여 태평양 방면, 이름도 모르던 섬에 끌려갔다가 살아돌아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현재의 회원은 희생자의 유가족까지 합하여 약 6만에 달한다. 이들은 지나간 3년 동안 혼란한 사회정세 속에서도 오로지 큰 뜻을 위하여 묵묵히 동지규합과 자료수집에만 전력을 기울여 왔다. 이들의 성실한 노력은 마침내 공식으로 인정되어 지난 1월 7일에는 사단법인으로 인가되었고, 8월 11일에는 보건후생부장으로부터 매장비·위자료 등 일본정부에 대한 교섭이 끝날 때에 부산에 돌아온 유골을 보관하라는 정식 위촉을 받았다. 동지회의 가장 큰 사업 목적은 17억 원에 달하는 아직 받지 못한 품삯·장례비·위자료 등을 일본정부로부터 찾아오자는 데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채권이지 배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이 돈을 찾아다가 조국의 산업부흥과 문화계몽사업에 이바지하자는 것이 그들의 큰 뜻인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이들은 먼저 70만 원이란 큰 비용을 들어 諸用紙를 장만하였고 정확한 자료의 수집과 방대한 서류를 작성하였다. 이 서류작성은 불원간 완성될 것이다. 17억 원이란 해방 전 당시의 규정대로 산출한 액수이다. 일본 정부는 이미 우리에게 줄 돈을 공탁해 놓았다고 한다. 동지회에서는 서류가 완비되는 대로 곧 대표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이 돈을 찾아올 계획이다. 이들의 계획에 의하면 공장시설을 가져다가 산업재건의 기둥이 되게 하고 문화사업과 아울러 희생자의 靈을 위로하는 무명전사의 탑도 건립할 것이라 한다. 이 얼마나 장하고 큰 뜻이랴. 우리는 이에 거족적인 성원을 보내자! 동지회에서는 희생된 동지들 가운데 이미 돌아온 8,133주의 유골을 따뜻히 모시기 위하여 오는 9월 하순에 성대한 이안식을 거행하기로 되었다. 부산 한 모퉁이에서 푸대접 받던 혼령들은 동지들의 따뜻한 품에 안겨 서울 삼각지에 있는 本覺寺에 모셔질 것이다. 동지회에서는 이 날의 행사가 그야말로 거족적인 행사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국민들의 마음에서 우러난 원조가 있기를 바라고 있다.
태평양동지회에서 서울 삼각지에 있는 본각사에 8133주의 유골을 모시기 위한 이안식을 한다고 보도를 했다. 태평양동지회에서는 삼각지 본각사에 대한 역사성을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태평양동지회에서는 일제로부터의 미수된 임금을 조사 하였는데 미수금을 조사하였다. 그런데 위안부에 대하여서는 미수금을 수령해야 한다는 글발이 없다.
해방 이후의 종교계는 어떠한가. 먼저 불교계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羅麗시대를 통하여 한인의 신앙과 이성을 지배하고 정신적 추진력이 되어오던 불교는 일제의 침략으로 인한 종교 억압정책 밑에서 간신히 고난의 길을 겪어오던 40년간에 완전히 쇠퇴하고 말았다. 소련군의 북한점령으로 반종교정책하에 423개에 달하던 사찰이 여지없이 수탈당하고 남한의 불교계 역시 온전하지 못하여 해방전 6백만이나 되던 남녀 신도는 금년 3월에는 반수인 3백만에 불과하게 되었다. 年 6만 석의 수입을 호언하던 토지수입도 이미 3·7제 실시의 영향을 받아 2만 2천 석에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20개를 산하던 佛敎講苑도 현재는 12개 그것도 대부분이 유명무실한 서당화하고 있는 형편으로 조선불교의 앞날을 위하여 우려되는 바 많다고 한다. 그런데 불교 중앙총무원 통계에 의하면 금년 3월 현재 남한 불교는 다음과 같다.△승려 총수 : 6,199명(내역 : 비구 5,677명, 비구니 522명) △신도 총수 : 3,296,581명(내역 : 남자 1,288,972명, 여자 2,007,609명) △사찰 수 : 920개
1948년 11월 20일에 발표한 불교의 승려들과 사찰에 대한 발표를 하였다는 것은 미군정에서 불교의 관리를 철저하게 감시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일본이 세운 사찰에 대하여서는 청저하게 관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