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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만경(勝鬘經)을 논하다.
승만경을 통해 본 재가불자의 사회참여
승만경(勝鬘經)은 대승 후반부 경전으로 반야부(般若部) 경전에 속한다. 재가 여성 불자인 승만(勝鬘) 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아주 희귀한 재가불교 경전이다. 재가불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전은 여성 재가불자인 승만 부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승만경(勝鬘經)과 남성재가 불자인 유마힐 거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유마경만이 현존하고 있어서 재가불교를 연구하는데 아주 귀한 경전이다. 특히 승만경은 동사섭 불교의 원류(源流)이다. 재가불자가 재가불자를 위한 전법활동을 전개하는 내용의 경전으로 재가불교를 이해 하는 데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로 가치성이 인정된다. 같은 재가 경전이라도 승만경은 유마경과는 또 다른 설법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 승만경의 시작은 붓다와 출가 제자들과의 대화체로 구성된 다른 경전과는 달리 처음부터 재가불자인 말리(末利) 왕비가 붓다의 설법에 감화되어 불교에 귀의한 후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찬탄하는 환희심을 담은 편지(서신)를 시집간 그의 딸 승만부인에게 보내는 것으로 출발한다. 재가불자의 전법자(傳法者)의 역할을 부여하고 인정한 것이다. 서신을 받은 승만부인 또한 환희심을 발하고 부처님을 친견하고 재가불자로서의 서원(誓願)을 세운다. 이는 곧 일체중생이 가지고 있는 불성(佛性) 즉 여래장(如來藏)의 발현(發顯)임을 강조하고 있다. 더욱 승만경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는 재가불자인 그것도 여성불자인 승만부인이 세운 서원을 부처님이 인정하고 증명(證明)함으로서 완벽한 경전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1. 승만경에 나타난 시대적 사회관
거론하려면 우선 초기 불교에서 여성 불자의 위치를 살펴보아야 한다. 초기 불교에서는 여성 불자의 위치와 역할은 빈약했다. 대승불교로 전환됨으로서 여성 불자의 출가가 허용되고 재가 여성 불자의 신앙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참작하여 볼 때 초기 여성 불자의 위상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대승불교를 이해하여야 한다. 붓다는 초기 불교부터 일체중생의 평등을 주창(主唱)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 경전들을 살펴보면 붓다의 주창과는 달리 여러 측면에서 불평등의 내용들이 나타나고 있다. ‘초기 불교의 증일아함경’ 본의 ‘옥야녀경’과 중국의 유교(儒敎) 사상이 다소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중국 번역본 ‘옥야경(玉耶經)’에서 공통적으로 기술(記述)하는 ‘어머니 같은 아내’와 ‘노비(奴婢) 같은 아내’라고 하는 대목이다. 어머니 같은 아내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아내를 통해서 찾으려고 한다는 점을 수용할 수 있다. 해도 노비 같은 아내가 당시의 불교계의 여성상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초기인도 불교에서는 남녀 차별의 가부장적(家父長的) 가치가 투영된 흔적을 볼 수 있음을 확인케 된다. 물론 아내에 대한 남편의 도리를 설(說)하는 초기 경전들도 있다. 대표적인 경전이 ‘선생경(善生經)’인데 아내에 대한 남편의 도리를 설하는 데서 외견적으로는 좀 개선된 것으로 보이지만 내용 면에서는 여전히 남성이 주(主)이고 여성이 종(從)임을 설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아내의 덕목에서는 앞서 ‘옥야경’에서 볼 수 있었던 덕목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이다. 초기 불교에서의 차별적 인식이 확인됨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초기 불교에서도 불교가 전파됨으로서 인도 사회의 여성관에 진보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불교에서 대승불교의 여성 불자의 위상 정립에도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대승 경전들이 등장하면서 불평등의 흔적이 개선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체중생 평등 특히 여성 평등을 위한 노력이 전개된 것이다. 그들 중에 한가지 예로 등장한 것이 여인오장설(女人五障說)을 극복하고 여성성불론(女性成佛論)을 주창(主唱)하는 대승경전(大乘經典)들이 하나둘씩 등장한 것이다. 초기 경전 불설초일명삼매경(佛說超日明三昧經)에 설해진 바에 따르면 여성은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 마천(魔天), 전륜성왕(轉輪聖王), 붓다(佛)가 될 수 없는 다섯 가지 장애를 갖고 있다고 한다. 즉 여인오장설이다. 특히 그들 중에서 붓다가 될 수 없는 것은 “여인은 色에 집착하고 정이 넘쳐흐르고 교태를 숨겨서 몸(身), 언(言), 뜻(意)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승경전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 등장하면서 이와 같은 여성 차별적 인식을 변성성불론(變姓成佛論)이란 방편으로 아주 쉽게 극복한다.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 제바달다품에서 용녀(龍女)는 사리불(舍利弗)존자(尊者)의 예의 여인오장설을 전거(典據)로 제시하면서 “여자의 몸은 더러워서 법기(法器)가 아니거늘 어찌 능히 위 없는 보리를 얻겠는가?”라는 추구(推究)에도 불구하고 용녀는 홀연히 잠깐 사이에 남자로 변해서 보살행을 갖추고 곧 남방(南方) 무구세계(無垢世界)로 가서 연꽃에 앉아 등정각(等正覺)을 이루었다”라고 설하고 있다. 이러한 변성 성불 사상은 여자는 성불할 수 없다고 하는 여인오장설로부터는 진일보한 것이 사실이지만 완벽한 것은 아니다. 여성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등식(等式)이 아니라 여성도 남자로 변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완전 등식이 성립됨으로 변성 성불은 실제로는 여성은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불평등 사상이다. 그러나 승만경을 살펴보면 붓다의 가르침에는 변성 성불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으로 사료(思料)된다. 또 한 “미래의 세상에서도 다시 이러한 부처님을 만나 여자의 몸을 변하지 않고 여자의 몸으로 법안(法眼)의 깨끗함을 얻게 하여 주소서!”라고 하는 구절이 비교적 초기 경전으로 분류되는 ‘수마제녀경(須摩提女經)’에 기록하고 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승만경의 등장은 붓다의 일체중생 평등사상을 실천하고 후대 대승불교에서 등장하는 여성 성불의 이론적 근거(根據)를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 하나 승만경이 붓다의 평등사상 정립과 재가불교 실천에 이바지한 점은 남성만으로 구성된 출가사문(出家沙門)들의 완곡(緩曲)한 저항(抵抗) 등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는 과정에서 주저함 속에서도 마침내는 내외의 여러 가지 우려를 불식하고 어려움을 감수하면서도 여성 출가를 허락했다는 그 사실이다. 이보다 더 분명하게 붓다의 여성 평등관을 보여주는 사례도 없다. 초기인도 불교에서 여성의 출가수행이 용납되지 않았던 당시에 불교가 대승불교를 거치는 과장에서 재가 여성 불자의 수행을 통한 진리의 깨달음을 인정하고(證得者) 법(法)을 설하게(說法者) 하고 이를 증명하고 허락한다고 하는 일은 일대 혁명적인 처사라고 평가해야 마땅하다. 이러한 점으로 살펴볼 때 유마경이 초기 대승경전으로 재가주의(在家主義)를 거론함으로써 출가와 재가가 둘이 아닌 재가불교의 불이(不二) 평등(平等)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한다면 승만경은 유마경 결집 후 300년 후에 결집된 대승 중기 경전으로 승속(僧俗) 평등(平等)뿐만 아니라 남녀평등을 극복한 경전으로 사료된다.
2. 승만부인과 승만경
승만부인(勝鬘夫人)은 인도의 사위국(舍衛國) 파사닉왕(波斯匿王)과 말리(末利) 왕비(王妃)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公主)이며 아유타국(阿踰陀國) 우칭왕(友稱王)에서 출가한 여인이다. 승만경의 서두(書頭)인 제1장에 의하면 승만부인의 부모는 불법에 귀의한 자신들의 경험한 공덕과 기쁨을 딸에게도 알려주기 위하여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을 찬탄하는 내용을 담은 서신으로 딸 승만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승만경은 승만부인이 모후(母后)의 서신을 받고 환희하며 그 글을 독송하는 가운데 부처의 찬란한 모습을 접하고 부처님을 찾아 친견하고 예배드리자 부처님이 승만부인에게 장차 성불(成佛)하리라고 하는 수기(授記)를 내린다. 부처님의 수기를 받은 승만부인은 성불할 때까지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열 가지의 서원을 세운다. 부처님은 지금까지 수행을 통하여 성불한다는 수기는 많이 내리셨지만, 수행의 실천 여부를 언급하지도 않고 성불하리라고 하는 수기는 없었다. 그것도 출가 승려가 아니고 재가 여성 불자인 우바이 승만 부인에게 성불의 수기를 내린 것이다. 우바이 승만에게 성불의 수기를 내린 것이 승만경의 대의(大義)가 된다고 보아야 한다. 붓다의 위대한 가르침인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을 가감(加減) 없이 천명하고 있다. 즉 여래장(如來藏) 사상의 실천이다. 일체중생에게는 모두가 다 부처(如來)가 될 수 있는 불성 여래장(如來藏)을 가지고 있다는 가르침이다. 대승불교사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시대라 해도 초기 불교의 출가 우선 주위가 잠재(潛在)하고 남성 위주의 불교가 팽배(彭排)해오든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 개혁이다. 승만부인은 부처님의 혁명적 지원에 재가불자로서 최선을 다한 개혁적인 서원으로 화답(和答)한다. 3대 서원(誓願) 10대 서원을 맹세한다. 즉 다음과 같은 10대(大) 서원(誓願)의 수행의 과제를 세워서 실천한다.
승만부인의 10가지 대원(大願)
① 계율을 깨뜨리지 않겠다.
② 교만한 마음을 내지 않겠다.
③ 성내지 않겠다.
④ 남의 외모나 재산에 대해 질투하지 않겠다.
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아끼지 않겠다.
⑥ 나 자신을 위해 재산을 모으는 일을 하지 않겠다.
⑦ 남에게 가르침이나 재물을 베풀고, 부드럽고 온화한 말을 하며, 서로 고락을 같이하겠다.
⑧ 의지할 데 없는 사람,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언제든지 구하겠다.
⑨ 짐승을 사냥하거나 계율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겠다.
⑩ 바른 가르침을 잘 지키고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겠다.
승만부인은 열 가지 서원을 세운 다음 이를 실천하고 다시 이를 요약해서 다음과 같이 3가지 큰 서원을 세운다.
승만부인의 3가지 대원(大願)
① 바른 가르침을 아는 지혜를 추구하겠다.
② 그 지혜를 중생들에게 설하겠다.
③ 바른 가르침을 지니게 되면 목숨을 걸고 그것을 지키겠다.
승만부인은 이와 같은 모든 서원은 하나의 큰 서원으로 집약된다고 설한다. 그리고 이것은 바른 가르침을 거두어들이는 섭수정법(攝受正法)이라 하고 결론(結論)하고 바른(正法) 가르침은 대승이자 곧 6 바라밀(波羅蜜)이라 설하고 있다. 또 세존이 이 세상에 출현해서 성문(聲聞)과 연각(緣覺)과 보살(菩薩)의 3승(乘)을 내세워 여러 방편으로 가르침을 설하고 있지만, 그것은 궁극적 목적은 1승(乘)으로 이끌려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법화경 사상을 인용하고 결론은 “모든 중생의 마음속에는 본래부터 여래의 청정한 성품이 갈무리되어 있다”라는 여래장에 대해 설하고 있다.
3. 승만경의 유통
승만경의 원명(原名)은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勝鬘獅子喉一乘大方便方廣經)’으로 1권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승만부인이 일승(一乘)의 대방편(大方便)을 널리 전하기 위하여 사자후(獅子吼)한 것을 수록한 경전이라는 뜻이다. 승만경은 여래장 사상을 설하는 대표적인 경전 중의 하나로써 기원전 3.4세기경에 인도 대승사상가들에 의하여 성립되었다, 승만경이 처음으로 한역(漢譯)된 것은 중인도 출신으로서 435년에 중국에 온 구나발타라(求那釵陀羅)가 그 이듬해에 번역한 것이 시발(始發)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남인도 출신으로서 693년에 당나라에 입당한 보리류지(菩提流志: 일명達磨流支)가 713년에 완성한 대보적경(大寶積經)의 번역에서 제48회에 걸쳐 뜻을 달리하는 개역(改譯)을 거치는 과정을 통하여 '승만부인회(勝翟夫人會)라는 명칭으로 각색(脚色)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 대보적경은 총 49회에 걸쳐서 120권의 경전들을 각각의 특색에 따라서 단행본(單行本) 형식으로 집적(集積)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통일성 같은 것은 없다.
승만경의 원본(原本)은 산실(散失)되어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다행히 인도의 대승불교 논서로 반야부 계통의 공(空)에 관한 이야기를 수용하여 여래장 사상을 체계적으로 설한 대표적인 논서 구경일승보성론(究覓一乘寶性論)이나 대승집보살학론(大乘集菩薩學論)등에 그 상당한 부분이 인용되고 있어 산스크리트의 단편이 일부 전해지고 있어 원문 복원이 가능하다. 이의 서장역(西藏譯)은 한역(漢譯)의 보리류지(菩提流志) 역(譯)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그 내용이 거의가 동일하다. 한역본(漢譯本)은 436년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Gu abhadra:394~468)가 번역한 ‘승만사자후일승대방광방편경(勝鬘獅子吼一乘大方廣方便經)’과 713년 보리유지가 편역한 ‘대보적경(大寶積經)’ 중 제48 ‘승만부인회(勝鬘夫人會)’ 등이 있다. 승만경이 널리 유포되어 ‘승만경’이라고 할 때는 보통 이 구나발타라의 한역본을 가리키고 주석서도 모두 이것에 근거하고 있다. 승만경에 관한 중국의 주석서(註釋書)로는 정영사(淨影寺) 혜원(慧遠)의 승만경 의기(義己)와 길장(吉藏)의 승만경 보굴(寶窟), 규기(窺基)의 승만경 술기(述記)및 둔황에서 출토된 승만경 '주소(註疏) 등이 있다. 우리나라는 576년(진흥왕 37)에 수(隋)나라로부터 귀국한 안홍법사(安弘法師)가 가지고 들어옴으로써 전래(傳來)되었는데 이에 관하여 원효(元曉)와 도륜(道倫)등이 동 승만경 소(珷)를 지었다고 전해온다. 하지만 현재는 소실(消失)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승만경은 재가의 남자 신도인 유마거사(維摩居士)가 설하는 ‘유마경(維摩經)’과 더불어 재가 중심의 불교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경전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또한 신라시대 진덕여왕의 이름이 승만이었던 점을 볼 때 이 경이 초기 신라불교에 끼친 영향이 매우 컸음을 짐작하게 해줌과 동시에 당시의 재가불교의 활성화를 증명해 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널리 유통되고 있는 한역본(漢譯本)은 436년에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에 의한 번역본이다.
4. 승만경과 재가불자의 올바른 사회참여
승만경은 유마경과 더불어 일상생활 속에서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대승불교의 특색인 재가불교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경전이다. 승만경의 설법주(說法主)인 승만부인은 인도 아유타국의 왕비(王妃)였다. 당시 인도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매우 낮았음을 생각해 보면 왕비 임을 감안(勘案)하더라도 여성이 법(法)을 설(說)하고 부처님이 이를 증명(認可)하는 형식으로 쓰인 승만 경은 불교 경전 가운데에서도 매우 희유한 것이다. 승만경에서 승만 부인은 섭수정법(攝受正法)이라는 큰 서원을 세움으로부터 승만경은 출발한다. 부처님의 정법의 깨달음과 그 가르침을 굳게 지키며 이를 실천하고 수행을 다짐하는 서원으로 출발한다. 이를 승만경에서는 섭수정법이라고 칭(稱)하며 보살의 수행실천덕목인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육바라밀 수행을 뜻한다. 재가불자의 수행실천덕목인 육바라밀 실천이야말로 재가불자의 깨달음에 이르는 올바른 길이다. 걸림 없이 베푸는 보시로부터 시작하는 육바라밀은 자기 몸(身)이나 생명(靈魂), 재물까지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무한(無限)의 자비를 실천하는 수행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 하면 여성을 생각하고 자비(慈悲)하면 곧 여성의 대명사로 떠오르게 하는 것은 승만경 사상의 영향이라고 보아야 한다. 승만경은 재가불자의 전법(傳法) 활동의 의무를 여실히 강조하고 있다. 동사섭(同事攝)의 전법을 전개하고 있다. 초기 불교에서 붓다는 출가사문들은 출가 본연의 목표인 깨달음을 향한 수도(修道)에 전념하길 당부하고 전법 활동은 재가불자의 몫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었다. 출가사문들은 수도에 전념한 결과물인 깨달음을 재가불자들에게 전수(傳授)하고 이를 다시 재가불자들은 같은 수준의 근기(根機)를 가진 재가불자들에게 불법(佛法)을 전법 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중생과 눈높이를 같이하는 포교 활동을 전개를 권장하는 것이다. 승만경이 초기 한국불교에 미친 영향은 광대(廣大)하다. 삼국시대(三國時代) 삼국시대(三國時代) 제일 늦게 불교를 도입한 신라(新羅)가 가장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승만경을 믿고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신라는 576년 24대 진흥왕(540~576) 37년에 안홍법사(安弘法師)가 도입한 이래로 승만경 신앙에 매몰되었다. 25대 진지왕(576~579) 26대 진평왕(579~632)의 3대를 거치는 과정에서 승만경의 교리(敎理)에 따라서 여권(女權)의 신장(伸張)을 가져왔다. 당시로서는 혁기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는 27대 선덕여왕의 왕위계승이 이를 증명한다.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여성에 이름에 부처님 어머니의 이름을 쓰고 승만부인과 유사한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28대 진덕여왕의 이름은 아예 승만부인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승만(勝曼)이다. 이러한 승만경 사상은 훗날 원효(元曉)의 저잣거리불교로 이어져 한국 재가불교의 원류(源流)를 이루게 된다. 승만경이 한국 재가불교에 미친 영향은 광대(廣大)하다. 승만경의 교리를 바탕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한국 여성들의 위상은 크게 향상되었다. 일체중생이 평등하다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삼국시대부터 한국 여성들은 공평(公平)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다만 숭유배불(崇儒排佛)의 조선 사회에서는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유교 사상에 밀려 천시(賤視)의 대상으로 전락(轉落)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사회의 여성들의 불교를 향한 신심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었다. 남성들은 유교를 믿고 여성들은 불교를 믿는 외유내불(外儒內佛)의 조선불교가 이를 증명한다. 한국불교에서 승만경을 원류로 하는 재가불교 여성불교가 없었다면 조선불교는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배불의 정책과 유생(儒生)들에 밀려 이 땅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조선불교를 거치는 과정에서 여성 전유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남성 중심의 불교는 쇠퇴하고 소위 여성 중심의 보살(菩薩)불교로 전락한 것이다. 남존여비의 유교문화는 학문도 남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가는가 하면 여성을 중심으로 한 불교문화는 교리보다는 조건없이 신(神)을 받들고 모시는 신앙(信仰)중심 종교로 변질(變質)되고 말았다. 숭유배불의 조선사회에서 산중으로 밀려난 출가승려들의 호구지책(糊口之策) 깨달음의 인본종교(人本宗敎) 불교가 신을 모시는 신본종교(神本宗敎)로 변질된 것이다. 승만경의 여래장(如來藏)사상을 바탕으로 섭수정법(攝受正法)을 근간(根幹)으로 꽃피운 10대서원(大誓願) 3대서원(大誓願)의 결실들이 망실(忘失)되고 보시(布施)불교 시봉(侍奉)불교 공양(供養)불교 미신불교를 앞세운 불사(佛事)불교로 전락한 것이다. 한국불교의 사찰 운영은 재가불교에 의지하고 있다. 대부분 사찰은 보살불교에 의지하고 있다.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은 한국불교의 밑바탕에 자리한 승만경의 교리를 상실하고 본질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국불교는 승만경의 가르침의 본질 회복을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