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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명령과 교회의 실천과제
글쓴이: 박 양수 목사(Th.D)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은 문화(노동)명령을 통해서 창조 세계를 보존하고 통치하고 다스리고 발전시킬 것을 명령했다(창1:28).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자신의 피조물을 통치하고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보고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피조 세계를 통치하면서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도록 위임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남의 창조 목적이라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건설과 확장은 인류가 수행해야할 지상 최대의 과제이다. 그러므로 이 목적과 과제를 벗어난 인류와 사회는 삶의 목적과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명령하신 이 문화명령을 수행함에 있어서 두 가지로 분류해서 수행 할 수 있으니 이 두 가지 중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면 균형이 깨어져 국가와 사회가 불균형을 이루어 타락하게 된다. 신구약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 두 개의 문화명령이 균형을 잃었을 때 사회가 혼란을 격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글을 통해서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수행함에 있어서 이 두 개의 균형을 이루는데 초점을 맞추어 기독교회가 하나님의 명령수행자로서 하나님의 존재의 실현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며 이글을 쓰려고 한다.
1. 하나님의 두 명령
하나님의 두 명령은 하나는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을 통치하고 보존하고 생육하고 번성 케해야 할 사명과 명령을 받았고(창1:28), 다른 하나는 전도의 명령을 수행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확장 시켜야할 명령을 받았다(마28:18-20). 이 두 명령은 문화(노동)명령에 속하는 것이다. 이 두 명령은 내용과 형태에 있어서 완전히 다르지만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함에 있어서 목적이 같다.
1) 세상을 향한 교회의 책임.
창1:28을 분석해 보면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했다. 이 명령 동사들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은 첫째는 결혼에 대한 명령이고, 둘째는 노동에 대한 명령이다. 문화명령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창조주에 대한 인간의 대리사역과 책임 내지는 노동의 책임을 말하고 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해서 문화(노동)명령(the cultural commandment)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창조사역의 과정에서 피조물들의 역할과 기능과 생존원리를 정해 놓으셨다. 이 창조원리 가운데 인간에게 부여하신 책임과 권한은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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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1: 문화라는 용어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문화는 그것이 속한 담론의 맥락에 따라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 다담론적 개념이다. 서양에서 문화(culture)라는 말은 경작이나 재배 등을 뜻하는 라틴어(colore)에서 유래했다. 즉, 문화란 자연 상태의 사물에 인간의 작용을 가하여 그것을 변화시키거나 새롭게 창조해 낸 것을 의미한다. 자연 사물에는 문화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지만, 인위적인 사물이나 현상이라면 어떤 것이든 문화라는 말을 붙여도 말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야생화 문화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지만 원예 문화라는 말은 성립한다. 즉 가장 넓은 의미에서 문화는 자연에 대립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정치나 경제, 사회, 법과 제도, 문학과 예술, 도덕, 종교, 풍속 등 모든 인간의 산물이 포함되며, 이는 인간이 속한 집단에 의해 공유된다. 문화를 인간 집단의 생활양식이라고 정의하는 인류학의 관점이 이런 문화의 본래 의미를 가장 폭넓게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세계대백과사전 제8권, 학원출판사, 1984, pp59-61)
적이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기의 창조물을 맡기는 중요한 책임과 특권을 부여해 주시면서 위에서 언급한 3가지 명령을 준수하여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함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책임을 맡겨 주셨다.
여기서 결혼과 가정을 이루는 일은 인간 생활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대변하는 개념으로서 인간의 총체적인 생활양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문화명령에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존재하게 되었고, 결혼을 통해서 생육하며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며 노동을 통해서 먹고 마시면서 행복을 누리며 살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일만을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지 않고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는 문화를 창출하는 삶을 살도록 의무를 주셨다. 즉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은 특권이고 축복이지만 이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의무요, 책임이다. 하나님의 문화명령 속에는 이 특권과 의무가 동시에 들어있다.
(1) 문화명령을 거역하는 사람들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수행할 때 특권만 누리려고 하고 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되면 아름다운 피조의 세계가 오염이 되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멸망의 대상이 된다. 이 세상의 인간들이 문화명령을 수행할 때 특권만 누리고 의무를 수행하지 않을 때 개인적으로나 혹은 역사적으로 종말이 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특권만 누리고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을 때 개인적으로 혹은 시대적으로 환란을 당하여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노아 홍수를 통한 인류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함락이라는 국가적 종말을 맞이했던 것이다.
오늘날 인간들은 하나님의 문화명령의 특권을 누리는데 어느 시대보다 극치를 이루고 있다.믿지 않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문화명령의 의무를 수행해야 할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특권을 누리는 데는 빠르고 의무를 수행하는 데는 매우 회의적이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이 피조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하고 충만하게 하는 일은 어느 시대보다 잘하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세에 일어날 현상이며 종말론적 현상이다. 성경 66권은 문화명령의 특권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영광을 돌리라는 의무의 명령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교회가 인본주의 물량주의로 전략되어 이 문화명령을 외곡하는 설교를 통해서 성도의 의무를 저버린다면 하나님은 교회을 향하여 진노하실 것이다.
세상은 믿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이 문화명령의 특권만 누리고 의무를 수행하지 않을 때 세상 종말이 오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세상이나 교회가 모두 부패해져서 의인 열사람이 없을 때, 즉 문화명령의 의무를 지키는 교회가 사라져가도 교회가 세속의 위험 가운데서 문화명령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쓸 때 세상을 심판 하실 것이다. 그러나 문화명령을 수행하려고 힘쓰고 애쓴 교회는 우리 주님이 구원 하시고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벧후2:6-7에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라고 하신 말씀이 경건한 교회와 성도들에게 보증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거역하는 교회와 교회의 단체들은 WCC를 지원하며 동참하는 교회들과 신복음주의에 속한 교회들과 신비주의를 지향하는 교회들과 이단에 속한 자들이다. 오늘날 교회를 무너뜨리는 세력들은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오해하여 세속을 향하여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고,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며, 혹은 물량의 성장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줄 알고 있다. 이는 모두 인본주의에 속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대상이며,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문화명령을 누리는 특권만 있고, 진정한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바르게 수행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이 땅에서 왕성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교회는 퇴락의 길을 걷고 있으며 맛 잃은 소금처럼 길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는 실정이며, 진리의 빛이 어두어져 빛을 말 아래 감추어둔 것 같은 시대가 도래했음을 감지하고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분명히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바르게 수행하지 못하고 좌우로 치우쳐 있음을 볼 수 있다.
(2) 문화명령을 실현하는 영역주권
개혁주의에서는 전 우주적인 이해가 문화명령과 관련되어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를 중심으로 전개된 신칼빈주의(Neo-Calvinism) 운동은 개혁주의 사상의 핵심인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적용하여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실현하고자 하는 칼빈주의 문화명령의 실천운동으로서 이러한 문화명령 실천운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계에 임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문화명령의 관점에서 본 전 우주적인 이해, 즉 개혁주의적인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이해해야할 것이다. 오늘날 현대문화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반문화명령 현상을 보이는 상황에서 이러한 문화명령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문화명령은 의인(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전 우주적, 즉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모든 영역과 전 우주를 지배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골2:10)시므로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가 왕이 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교회 뿐 만 아니라 모든 일반 문화를 포함하고 있다고 했다 카이퍼는 인간의 삶이란 일관된 하나의 체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1)
아브라함 카이퍼는 문화명령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첫째, 국가에 있어서의 주권과 둘째, 사회에 있어서의 주권과 셋째, 교회에 있어서의 주권을 말하고 이러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영역에서 문화명령을 실현할 때 하나님의 영역 주권 통치가 이 땅에서 실현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본주의적 프랑스혁명은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역행한 것이다. 인본주위와 합리주의는 교회를 세속화시켜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실현하는데 큰 장해물이 되었다. 교회가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실실한 말씀전파와 성례와 권징이 시행되어야 한다. 교회와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은 혁명이나 제도를 통해서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할 수 있다(계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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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칼빈주의 사상과 삶] 아브라함 카이퍼. 정성구 역(한국성서협회. 1978. p.77)
Note.1: 슈바이처는 그의 저서 [문명의 몰락과 복구]에서 문명의 쇠퇴를 한탄하면서 그 해결책으로 18세기의 합리주의 사상을 다시 찾으려고 한느 반면에 카이퍼는 합리주의가 도덕과 교회의 붕괴를 가져왔다고 주장하고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악인데 이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가장 필요로 한다고 하면서 합리주의 신학을 칼빈주의 신학으로 대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은 하나님 없는 불신앙 운동의 산물이라고 통박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은 것은 어떤 운동도 결국 인본주의와 불신앙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다고 했다.
2. 카이퍼는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 주권은 국가로 정의한다. 그리고 국가 형태의 충동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살아있는 국가]라고 말했을 때 이미 갈파된 것이다. (칼빈주의. 아브라함 카이퍼 지음, 박영남 역, 세종문화사 1971, p.107)
여기서 우리는 태초부터 자신의 아버지는 항상 일하고 계신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요5:17)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17:28)고한 바울의 가르침과 또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히1:3)고 한 희브리서 기자의 말을 인용할 수 있다.(2) 이 땅에 교회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할 때 문화명령이 실현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부단히 활동적이고 감시적이며, 효력이 있는 말씀이다. 말씀의 전능하심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활동을 지향하는 전능하심이다. 그의 섭리에 의해서 말씀으로 천지를 다스리시고 만사를 통제하시며, 그의 계획이 없이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전능한 자이시다.(3)
이 하나님의 모든 영역에서 영광과 감사와 찬송을 돌리는 것이 문화명령을 실현하는 것이다. 문화명령을 실현하면 이 중으로 이득을 얻게 되는데 우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만물을 선하게 하시고, 명령을 실현하는 사람들은 그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해로운 근원은 하나님의 지배아래 있고, 하나님의 권세는 사단과 그이 포악한 영들과 군대를 제압하고 우리의 안전을 가로막는 모든 것들은 그의 명령아래 있다.(4) 하나님이 인간에게 문화명령을 주신 것은 먼저 인간이 행복하고, 그 행복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과 영광을 돌리며 살도록 하기 위함이 였다. 그러므로 설교 강단에서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하여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상을 정복하고 새롭게 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신실한 말씀을 선포하지 않으면 일하나님의 문화명령이 이 땅에서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 없고, 그 때문에 진노하신다. 신, 구약 역사를 통해서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전도로 문화명령을 수행함
하나님의 문화명령 중에 전도명령(마28:18-20)이 들어있다. 예수님이 성취하신 구속의 은혜를 전 인류에게 전하여 하나님이 명령하신 문화명령을 실현해야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자기의 주권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전도의 명령을 하시고 말씀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시를 원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자기를 위해 소유하고 다스리며 하나님께 감사치 않는다. 롬1:21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 이런 사람들에게 전도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케 하는 것이 곧 문화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창1:28절과 마28:18-20절의 명령은 내용과 형태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하나님 나라 건설과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목적은 동일하다. 이 두 명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류의 생육과 번성, 그리고 땅의 충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로 타락으로 잃었든 영혼과 만물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다. 이 두 명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태어나게 하고, 이들의 수가 늘어면 하나님의 통치영역도 늘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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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y John Calvin. (The westminster press. Vol.1p.229)
주3) Ibid. p.226
주4) Ibid. p.227
Note 3: 하나님의 문화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때 실현되는 것인데 이 일을 하지못할 때 홍수가 일어 나서 세상을 심판했고, 바벨론 포로와 이스라엘 멸망이 나타났다. 말씀의 타락은 교회타락이고 교회타락은 세상의 멸망을 불러온다.
하나님은 문화명령을 통해서 자기의 나라를 이 땅위에 세워 가신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과 선한 싸움을 싸우며 하나님의 영역주권을 회복하며 넓혀가는 일을 순종으로 행하여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문화명령에 있어서 전도명령은 “가라”는 것이다. 이는 세상을 향해서 말씀을 들고 가서 죽었든 영혼을 살리고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 찾아주워 그들도 하나님의 통치를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이다. “세례를 주라”는 말씀은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라는 말씀이다. 세례는 아무라도 주어서는 안 되며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만 주어야 한다.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로 채워진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사탄의 회이며,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실현할 아무런 힘이 없고 도리어 세상을 타락시키는 오염이 될 뿐이다. “가르치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교회를 성숙한 교회로 만들라는 말씀이다. 성숙하지 못한 교회는 세속적이고, 마귀적이여서 시기와 싸움과 다툼이 있다. 이 땅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숙해야 한다. 엡4:13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했다. 교회가 성숙해지면 자연히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실현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권면한다.
2. 문화명령을 거스리는 자유의지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화명령을 통한 교회의 사명과 의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실천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감사하며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그를 경배하고 순종하며,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하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어디까지나 강제적이 아니고 거듭난 영혼들의 자율적인 관계이다. 이 자율적인 관계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라는 의지를 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계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디까지인가? 자유에 대한 그릇된 개념 때문에 오늘날 교회와 사회가 혼란과 무질서로 채워져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힘 있게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본 장에서는 이 같은 하나님을 떠난 자유의 특성과 결말을 예측해보고자 한다.
1) 반제도적이다.
오늘날의 자유의 특징은 반제도적이다. 사람들은 종전의 모든 관습과 규범과 제도를 베제하려고 한다. 이는 현대 자유주의 산물로 법과 규칙을 거부하고 구속받기를 싫어하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문명의 이기를 총동원하여 인생을 즐기려는 것인데 이는 인간의 이성을 상실케 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자유라는 미명아래 무법한 현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죄의식이 상실되어 가고 있음으로 이는 현대문명이 낳은 가장 치명적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특권만 있고 의무가 없는 문화는 죄의식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실로 중차대한데 이 사명을 상실한 교회역시 자유주의와 인본주의에 빠져서 죄의식을 상실하고 율법에 대하여 구토를 일으키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가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수행하지 못하면 시대의 종말은 당겨지는 것이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이서 이미 이 사실을 보와왔고, 보고 있다.
2) 자기중심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그릇된 자유는 인간중심적이다. 인간 중심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실제적인 무신론자라는 말이다. 현대인은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파괴하고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을 파괴하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 사상은 인간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의 의지를 가지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긴의 자기중심의 의지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살 뿐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과 인본주의 교회는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선택한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수행함에 있어서 자유라는 개념으로 세속적인 특권만 향유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혼란하고 죄악으로 부패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3) 성경이 말하는 자유
성경은 자유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말하고 있을까?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죄로부터 해방(롬6:18-23, 요8:31-36), 죽음으로부터 해방(롬6:22, 8:21)이다.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자유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회개와 중생 그리고 신앙을 소유해야 참된 자유를 소유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이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실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최대의 특권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특권만 누리고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실행하지 않음으로 이 자유의지는 성경말씀에 역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자유의지는 의에 종(롬6:19)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종(롬6:22)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종의 자격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은 것이다(롬8:4,고후3:7, 갈5:16). 또한 진리의 말씀을 알므로 얻어지는 자유이다. 요8:32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율법을 떠난 자유가 아니고 율법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자유를 말하고 있다. 만약 율법이 지켜보지 않으면 자유 속에 죄가 들어가서 자유를 속박하고, 하나님을 부정하게 된다. 율법은 항상 죄를 죄 되게 하고, 자유의지에 죄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하여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자유는 항상 율법이 개입되어 있는 자유이며, 이 자유가 진정한 자유이다.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은 이 유를 누리는 사람이다. 율법이 가세하지 않는 자유는 자유가 아닌 죄의 속박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죄의 속박 속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실현할 수 없는 것이다.
3. 문화명령의 실천 과제
교회가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실천하려면 여러 가지 실천과제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 실천과제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교회가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신실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져야 하고, 다음은 정당한 권징이 시행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현대 자유주의 신학과 신복음주의와 세속적인 예배형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법도를 경외함으로 지킬 때 이 땅에 문화명령은 실현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을 선포하심으로 재창조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행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재창조 사역을 지속적으로 행하시는 것은 자기의 존재를 알리서 피조물들이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감사를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말씀을 설교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겸손히 순복시키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올바르고 유익하게 수행할 수 있다. 오늘날 설교 강단이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하심을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설교함으로서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설교 속에 율법과 복음으로 균형을 맞추어 죄를 억제하는 일과 복음 안에서 새 생명을 소유함으로 감사하고 감격하는 생활을 하면서 세상을 향하여 빛과 소금으로 전진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칼빈은 율법과 복음에는 우리의 생각이 미칠 수 없는 놀라운 신비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의하여 계시된 신비들을 그의 택한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정신을 분별의 영으로 조명하시기 때문에 이제 여기에는 더 이상 심연이 없다고 했다(5).
2) 예배를 통해서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고 했다. 예배하는 사람은 깊은 죄의식과 죄에서 구속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와 감격 가운데서 예배에 임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근본적으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위이다. 깊은 죄의식과 구속에 대한 감격이 결여된 예배는 참된 예배라 할 수 없다. 참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의와 구속 사역에 긍거해서만 주님께 드릴 수 있다. 그러므로 온전히 그리스도께 의존하지 않는 예배는 주님께서 받으시지 않으신다. 오늘날 “구도자 예배” 혹은 “열린 예배”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실현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 효과적인 면에서 정 반대이다. 이들의 잘 못된 예배를 통해서 진리가 무너지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내지 못함으로 문화명령을 역행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가 예배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보여주며, 하나님에 대한 얄팍한 이해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예배에 대해서는 자신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원리를 중심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신중하게 생각하야 한다. 예배의 규정적 원리를 무시하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니며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수행하는데 역행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모든 행위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참 된 예배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실현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잘못된 예배와 설교 때문에 교회가 어두운 세상에 속화되어 빛을 잃고 문화명령을 실현하지 못함으로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배의 규정적 원리를 무시하고 인간 본질에 충실한 인본주의적인 예배는 교회를 무너드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건설을 방해하고 있는 말세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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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Ibid. p.239
Note: 칼빈은 복음과 율법을 균형있게 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공교롭게도 많은 개들이 독 묻은 이빨로 물어뜯거나 최소한 짖어댐으로서 이 교리를 공격하는데 이는 그 자신의 이상이 그들을 위해 규정한 것 외에는 하나님께 합당한 것으로 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했다.
나가는 말
하나님의 문화명령은 단순하게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다시 말하면 문화명령은 우주와 세상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광범위한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것이 문화명령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와 세계만물을 인간들에게 위임하고 위임한 만물을 누리며 살면서 조물주 하나님을 증거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이 바로 문화명령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명령을 실현하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위임해주신 권리만 누리고 의무를 시행하지 않음으로 이 땅에 주님이 나타나지 못하고 영광도 받으시지 못한다. 문화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말씀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설교는 말씀 중심이어야 하고, 받은 말씀을 생활에 실천 실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규정된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도록 사는 것이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일이 계속될 때 이 땅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왕성해 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