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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 줄 마음을 품고, 그들을 찾아갔다.
11. 그들은 유다의 말을 듣고서 기뻐하여, 그에게 은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를 넘겨 줄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막14:10,11)
10 Then Judas Iscariot, one of the twelve disciples, went off to the chief priests in order to betray Jesus to them. 11 They were pleased to hear what he had to say, and promised to give him money. So Judas started looking for a good chance to hand Jesus over to them.
우리가 가장 잘 알아야하는 분은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천국에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제대로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알아야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유다입니다.
그 길을 걸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누구인가
요한복음은 유다가 향유를 바친 여인을 비판했을 때에 그 원인을 이렇게 말합니다.
6. (그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그가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요12:6)
유다는 도둑입니다.
유다에 관한한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다는 당연이 유다일 뿐입니다.
그는 등장에서부터 초지일관 악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돈만 챙기는 악당이며 사탄에 잡힌 자입니다.
또 우리가 성경에서 유다를 만날 때에 ‘자신이 유다일리 없다. 나는 나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유다를 통해서 나를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2,000년 전 과거의 유다를 통해서 나의 현재를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의도하시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31. 그런데 여기에 이것이나마 기록한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20:31)
성경은 지금 남의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난 집 구경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기록 목적은 나의 구원에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은 현재 우리의 행위와 생각들이 미래의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유다를 통해서 현재의 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앞뒤로 곰곰이 유다를 살펴봅시다.
유다가 주님을 죽이려는 악한 생각을 품고 대제사장을 찾아간 것은 이 여인의 사건 다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는데 거기에 한 여인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여인은 300 데나리온 나가는 향수를 예수님의 머리 위에 단번에 부어버린 것입니다.
수천만 원이 순식간에 냄새로 변한 것입니다.
공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누추한 집에 진한 향기가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밥 먹다가 당한 일입니다.
당시에 거기 있었던 사람들 중에는 그 일을 이해하지 못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4. 그런데 몇몇 사람이 화를 내면서 자기들끼리 말하기를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하였다. 그러고는 그 여자를 나무랐다.(막14:4,5)
그것은 제법 말이 되었기 때문에 여기저기 사람들이 웅얼거렸던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며 말을 막으신 것입니다.
8.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다. 곧 내 몸에 향유를 부어서, 내 장례를 위하여 할 일을 미리 한 셈이다.
9.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온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사람들이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막14:8,9)
확실하게 다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 상황을 눈으로 목격하고 그 말씀을 들은 유다가 대제사장을 찾아간 것입니다.
10.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넘겨 줄 마음을 품고, 그들을 찾아갔다.
10 Then Judas Iscariot, one of the twelve disciples, went off to the chief priests in order to betray Jesus to them.
마가복음은 이 유다를 두고 그 도둑놈이 대제사장에게 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다를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유다가 처음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였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유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가 성장해갔을 때에 친구들도 틀림없이 그를 유다라고 불러주었습니다.
그렇게 성장한 유다를 만나셨을 때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만한 사람으로 여기신 모양입니다.
그를 알아보신 주님은 그를 12 제자 중에 한 명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군대를 끌고 가서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제가 죽을 때까지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골프나 치고 다니고.......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배신한 죄를 두고 엄청난 고민을 한 것입니다.
그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자살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3. 그 때에 예수를 넘겨 준 유다는, 그가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쳐, 그 은돈 서른 닢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며
4. 말하기를 "내가 죄 없는 피를 팔아 넘김으로 죄를 지었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오? 그대의 문제요" 하고 말하였다.
5.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마27:3-5)
알고 보니 유다는 죄의식이라고는 없는 악당 두목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 고민했고 갈등한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선과 악의 갈등 속에서 그만 헛발을 내디디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를 보면서 우리 역시 헛발을 내디디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악당두목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 대한 이해
여러분을 유다가 있었던 그 자리에 앉혀둔다면 여러분 역시 도둑이 했던 이 말을 했을 수 있습니다.
4. 그런데 몇몇 사람이 화를 내면서 자기들끼리 말하기를 "어찌하여 향유를 이렇게 허비하는가?
5.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하였다. 그러고는 그 여자를 나무랐다.(막14:4,5)
주님께서 죽음을 바로 앞두신 순간에 주님의 죽으실 현장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주님을 죽음으로 넘길 자가 바로 열두 제자 중에 한 명이라는 것입니다.
18. 그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고 있는 사람이 나를 넘겨 줄 것이다."(막14:18)
이런 지적이 있자 제자들은 놀라운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거기 있던 열두 명이 자신들을 의심한 것입니다.
19. 그들은 근심에 싸여 "나는 아니지요?" 하고 예수께 말하기 시작하였다.(막14:19)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잘 압니까?
제자들은 “나는 나 자신을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질문을 한 것입니다.
“나는 아니지요?”
저는 소풍간 돼지들 이야기를 아주 좋아하는데 돼지들은 사람에 비해서 당연히 지능이 낮다는 것입니다.
그 돼지들에게 유다가 몇 명인지 세라하면 모조리 자신을 빼고 숫자를 센다는 것입니다.
실은 주님조차 이런 식의 갈등으로 깊은 고민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가 좀 사족을 달자면 이런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면 ‘주님은 우리와 확연하게 차이가 나시는 신적 존재이시다. 주님께 갈등이 어디에 있겠나?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도 육적 문제를 가지시고 자신의 한계로 인해 고통스러워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가 그것입니다.
35. 그러고서 조금 나아가서 땅에 엎드려서, 될 수만 있으면 이 시간이 자기에게서 비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
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막14:35,36)
주님은 겟세마네의 기도 바로 전에 베드로에게 이런 지적을 하셨습니다.
31. "시몬아, 시몬아, 들어라! 사탄이 밀처럼 체질하려고 너희를 요구하였다.
32.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33.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나는 감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34.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눅22:31-34)
“제대로 영적인 현실을 봐라. 위기 상황이다. 오직 주님을 의지하는 길 외에 없다. 기도해라. 너를 보니 그 결과가 빤히 보인다. 너는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이 죽을 자리라도 거기에 갈 각오가 되어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무엇보다 본인을 제대로 모르는 소리였습니다.
성서는 유다를 통해서 나를 이르는 것입니다.
성서는 그 과거의 사건을 통해서 현재를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하기 힘든 과제를 주신 것입니다.
나라는 대상입니다.
가장 먼저 전도할 대상은 바로 나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새벽기도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새벽 기도회에서 무슨 기도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바꾸어 놓을 비젼을 가지고 기도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안 떠지는 눈을 비비면서 교회부터 찾는 이유가 있습니다.
도무니 감당하기 힘든 나라는 과제를 잘 감당하러 가는 것입니다.
제 눈에 들보를 두고 남의 티를 제거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갈등적 존재를 하나님의 성령께 위탁하면서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3. 나는 내가 받은 은혜를 힘입어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분수에 맞게 생각하십시오.(롬12:3)
어찌 보면 유다도 제 감당을 못한 것입니다.
거창하게 300데나리온으로 구제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이 이 여인을 두고 유다를 지적했을 때에 유다는 예수님 때문에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상처를 받았으면 그것을 문지르면서 좀 생각을 했으면 됐을 텐데 벌덕 일어나더니 아예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대제사장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성경을 읽을 때에 유다에 대한 전이해를 가지고 성경의 유다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는 나쁜 사람!
나는 아니고.......
유다가 누구인지 대제사장이 누구인지 바리새인이 누구인지 사두개인들이 누구인지 다 잘 알면서 성경을 읽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단 그들에 대해서 한 가지도 모르고 읽어야합니다.
그렇게 성경의 본문에서 새로운 지적들을 발견해 내야하는 것입니다.
옳지도 않은 내 생각을 성경을 통해 공고화하려고 하지 말아야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신을 읽어내야 합니다.
내가 아닌 남에게만 유다를 적용할 때에 종교는 잔인한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안식일을 철저히 지킨다.
몇 십 년 앉은뱅이 거지였더라도 내일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인식일의 근본정신인 선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2,000년이 지나 성경을 책상 앞에 펴둔 우리는 유다가 지나간 지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유다가 시행착오를 하며 간 길을 잘도 알고 요리조리 잘 피하고 잘 판단하지만 그 현실이 내 눈 앞에 닥칠 때에 과연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지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29.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미며,
30. '우리가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피 흘리게 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이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32.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조상의 분량을 마저 채워라.
33.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예언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율법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너희는 그 가운데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십자가에 못박고, 더러는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 저 동네로 뒤쫓으며 박해할 것이다.
35. 그리하여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 죄 없이 흘린 모든 피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36.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일의 책임은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갈 것이다."(마23:29-36)
성경은 눈으로 훑어보는 지도가 아닙니다.
그 위를 걸어야하는 땅바닥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손에 열두 명 중 한 사람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더 많은 경우 주님을 이해조차 하지 못해서 병원 침대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유다를 부인하며 주님의 가신 길을 따라 가야하는 땅바닥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의심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손을 잡고 그 손을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 신뢰에서 현실 보장이 아닌 진정한 안정감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아니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17.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롬1:17)
*위험 요소들
1.좌절
유다는 주님과 같이 있던 시간이 흐를수록 더 주님을 이해해 간 것이 아닙니다.
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능력을 가지셨다면 로마쯤은 말씀 한마디에 때려잡으실 수 있으셨을 텐데.......’
그것을 확신하는 것은 그가 똑똑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으로 주님 앞에서 똑똑하면 많은 경우 심각한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는 이 여인 앞에서도 그의 똑똑함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주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요구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도대체 주님을 이해할 수 없으니 신뢰를 하는 것입니다.
그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찬양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단 한가지입니다.
17.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으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롬1:17)
여기에서 믿음이란 매사에 그를 인정하고 의뢰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외치다가도 예수님이 아니라 주차장이 넓어야 우리 교회 부흥한다는 엉뚱한 고백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마니를 깔고 앉아있어도 하나님께서 계시면 그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한다는 신뢰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좌절이란 중요한 뜻을 가집니다.
여인의 행위에 대한 유다의 똑똑한 지적이 예수님에 의해 좌절되었을 때에 그는 “그렇지 내가 예수님을 이해하려고 했구나. 예수님을 믿는 수밖에 길이 없구나.” 했어야합니다.
아멘했어야 합니다.
그 분을 신뢰했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생을 살면서 큰 좌절을 경험했을 때가 중요합니다.
실은 내 뜻의 좌절은 우상이 깨지는 순간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신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2.현실 보장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게 현실이 우상이 되어있습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하나님 나라 보장이 아니라 현실보장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 수단으로 예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대제사장들을 봅시다.
그들은 당시 최고의 권력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생활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을 대언했습니다.
사람들도 이를 잘 알고 이것을 인정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이에 대한 종교적인 소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심각한 위기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18. 이렇게 무리가 예수를 맞으러 나온 것은, 예수께서 이런 표적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19.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요12:
세상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생긴 것입니다.
제 현실이 여지없이 무너지게 되었다고 여긴 것입니다.
3. 실천 방식, 죽임
바로 이 상황에서 그들의 대안이 주님과 확실하게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정한 것입니다.
1.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흉계를 꾸며서 예수를 죽일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다.(막14:1)
하나님과 마귀의 길의 가장 뚜렷한 차이는 그 수행의 방식에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남을 죽이는 방식을 택할 것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자신이 죽으시는 방식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 두 방식은 서로 180도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바로 세상의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죽기로 한 것이 아니라 죽이기로 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행위를 한 것입니다.
그 죽이는 방식이 일치했으므로 그 이유 때문에 유다는 대제사장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참 이상하십니다.
이 자의 정체를 아시고도 주님은 그를 그의 성찬에 참여하게 하신 것입니다.
26.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이 빵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시고 빵조각을 적셔서 시몬의 아들 가룟 사람 유다에게 주셨다.
27. 그가 빵조각을 받은 뒤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그 때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할 일을 어서 하여라."
28. 그러나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아무도, 예수께서 그에게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지 못하였다.(요13:26-28)
주님은 그에게도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유다는 기회를 거부한 것입니다.
4집단
우리에게 함께 모이는 일은 참으로 유익한 일입니다.
25. 어떤 사람들과 같이,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히10:25)
이런 모임을 통해 우리의 신앙의 상승효과를 경험할 것입니다.
또한 이런 연합자체가 주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는, 내가 그들과 함께 있다."(마18:20)
하지만 이런 집단들이 우리의 신앙을 안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단에 포함되다보면 집단이 주는 거짓 구원에 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이 요구하시는 열매를 맺는 일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노상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집단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막상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8.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9.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눅3:8,9)
코로나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회적 거리를 두는 일입니다.
우리는 집단을 통해서 엉뚱한 안정감에 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집단 문화와 거리를 두어야합니다.
2.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12:2)
5.근본적 원인
유다는 주님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불행한 길을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이런 괴리는 죽음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올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자신의 죽으심을 수용한 상태였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의견조차 굽힐 생각이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현실 보장되어야했고 주님을 죽이려한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분의 죽으심까지도 수용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길의 대전제는 자신을 산제물로 드리는 죽음입니다.
1.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12:1)
죽음에 대한 수용의 여부가 하나님의 말씀의 이해를 가르는 원인인 것입니다.
죽음의 그 경계선을 넘어선 사람에게만 진리가 보이는 법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을 텐데 죽을 수 없다는 사람과 죽음 너머에 있는 진리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누구
물론 유다를 두고 사람들에게는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를 부르실 때에 그에게 결정적 악역을 맡기시기 위해 그를 뽑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을 지으실 때에 그 가운데에 금단의 열매를 심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먹지 말도록 명령하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르셨을까?
사람은 과거는 책임질 수 없고 안 보이는 미래는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즉 시간에 구속되어있는 존재입니다.
물론 현재에 대해서도 불완전하게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 눈에 과거와 미래를 통째로 보시는 다른 차원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는 과거나 미래라는 시간의 개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시간에 구속되어 있는 우리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시각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결과를 다 아시고 에덴에 나무를 심으신 일이 부조리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 눈에 예수님께서 유다의 결과를 알고 그를 택하신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 차원에서의 설명일 뿐입니다.
실은 하나님은 인간을 강제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유다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제 멋대로 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는 죄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것입니다.
21. 인자는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떠나가지만, 인자를 넘겨 주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기에게 좋았을 것이다.(막14:21)
예수님은 악역을 위해서 유다를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악한 길을 택한 것은 유다였습니다.
유다는 그 책임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11. 그들은 유다의 말을 듣고서 기뻐하여, 그에게 은돈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를 넘겨 줄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1 They were pleased to hear what he had to say, and promised to give him money. So Judas started looking for a good chance to hand Jesus over to them.
*악의 분업
유다는 그가 결정한 일의 파트너를 찾아간 것입니다.
대제사장입니다.
열두 제자 중에 한 명이 제 발로 자신들을 찾아와서 자신들의 계획을 도와줄 줄 당시의 제대사장들이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 이 거사를 두고 고민하면서 주님을 죽일 날짜를 잡고 있었습니다.
1. 유월절과 무교절 이틀 전이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흉계를 꾸며서 예수를 죽일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다.
2. 그런데 그들은 "백성이 소동을 일으키면 안 되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막14:1,2)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유다가 할 일은 예수님께 입맞추는 일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폭력으로 십자가로 끌고 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망치를 들고 예수님을 직접 못을 박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보이는 장소에서 예수님께 입만 맞추는 것입니다.
이 행위를 통해서 유다는 주님을 죽이는 일에 한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그 일은 전혀 주님을 적대하는 듯이 보이는 일이 아닙니다.
소를 도둑질한 것이 아닙니다.
소를 매고 있는 끈을 끌고 온 것일 뿐입니다.
삼양화학이라는 최류탄을 만드는 회사가 있습니다.
1985년 군부독재의 시절 국세청의 발표에 의하면 그 회사가 귀속종합소득세 납세 4위(신고소득 17억3천2백만원·세액 9억4천2백만원)이었습니다.
아마 사랑하는 제 자식이 대학생이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자랑스럽게 여성소득세 랭킹1위였습니다.
그 녀는 절실한 불교 신자였다고 합니다.
그 여사장은 경제행위를 잘 했을 뿐입니다.
또 그 회사 연구실에는 유명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한 연구원들이 억대의 연봉을 타면서 연구 실적을 냈을 것입니다.
그 중에 기독교인이 없었겠습니까?
그 사람도 주일이 되면 거룩한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부활절이나 성탄절이 되면 거룩한 떡과 포도주를 마실 때에는 혹시 내가 담배 피거나 술 마신 적이 없었는지 자신을 살폈을 것입니다.
나는 학생을 죽인적도 없고 독재정권을 옹호한 적도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악한 일은 이렇게 분업화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마다 한 몫들을 감당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유다는 입만 맞춘 것입니다.
제사장은 당시에 최고의 권력을 사용한 것입니다.
거기에 로마인들이 합세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또 윗사람들이 시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이 시대에서 분업화되어 있는 악의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야하는 것입니다.
그 일로 내가 지금 예수님께 입을 맞추고 있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누구나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
그런데 이 유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은 돈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그런 반감을 가지게 된 것도 돈이 문제였습니다.
그 돈이면 짜장면이 몇 그릇이야!
그 많은 사람들의 굶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니 유다가 받은 돈의 가치는 송아지 여섯 마리 값이라고 했습니다.
돈이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가 대제사장에게 가니 그들은 유다의 행위를 잽싸게 돈으로 환산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모는 일에 돈이 끼어든 것입니다.
그가 대제사장에게 돈을 받은 이상 그 일을 번복하기 힘들게 된 것입니다.
돈이라는 것이 바로 이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은 사탄의 가장 중요한 도구인 것입니다.
유다는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돈이 유다로 하여금 죄에 머물러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도록 닻이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주의
주님이 탄생하실 때에도 그 일이 있었습니다.
악당 헤롯이 동방박사들과 거짓 약속을 한 것입니다.
그도 예수님을 경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기 예수님이 계신 장소를 알게 되거든 자신에게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뭐 모르는 박사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 같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죽으실 뻔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12. 그리고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다.(마2:12)
하나님의 말씀에 그런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해하려는 약속입니다.
박사들은 헤롯과의 약속을 어기고 그냥 제 고향으로 간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사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