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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花郞者剡臣公子也 母曰碧我夫人 以母寵 爲毗處王摩腹子 世所謂摩腹七星也 阿時公 父曰善牟 母曰寶兮 守知公 父曰伊欣 母曰俊明 伊登公 父曰叔欣 母曰洪壽 苔宗公 父曰阿珍宗 母曰寶玉公主 比梁公 父曰比知 母曰妙陽 ?吹公 父曰德智 母曰加耶國??公主 或曰 法興大王居七星之首 魏花郞則 以母微不參云 而七星錄及寶兮記 皆無伊登公 載魏花公 則未詳孰是也
公 面如白玉 唇若赤脂 明眸皓齒 談下生風 碧我夫人在捺已 生一女 乃毗處后碧花夫人也 碧花夫人入宮 而公以私弟 出入有寵 法興大王 時以副君之子 位在國公 而寵不及焉 阿時公乃勸大王 下拜于公 公告于剡臣公曰 國公下拜于汝者 欲以汝爲臣也 今王老 國公有大望 汝其事之 公乃詣爲臣 事多稱旨 法興曰 吾鄧通也
未幾 毗處果崩 智證大王卽位 以法興爲太子 公勸碧花后 事太子生女 是曰三葉宮主也 時太子妃保道夫人 乃毗處女 而無寵 保道之弟 吾道者 妙心私通善兮后而生者 故甚美 有寵於太子 媚于三葉 而深結于公 潛相通焉 乃生玉珍宮主 太子知之 以吾道賜阿時公 以碧花賜比梁公 乃寵正妃保道夫人 黜公疎之
雖然 保道德之 請于智證大王 封于天柱 而主祀 延帝太后亦幸之 及玉珍入幸 乃復如初寵之 遂居伊飡之位 玉珍專寵 法興使保道爲尼 以公爲臣 以故 只召太后當國 而置花郞 以公爲其首 號曰風月主
只召者保道女也 爲立宗公夫人 生眞興大王 而法興大王愛玉珍宮主 無立意 只召憂之 公乃曉大義于玉珍 而立之 時人莫不義之 以此 思道太后亦無事 公之德大矣
公之子孫甚繁 長女玉珍宮主 次女金珍夫人 乃吾道夫人生也 玉珍初嫁英失公 未幾 受幸于法興大王 生比臺公 大王欲立爲太子 公諫之曰 臣女無骨品 而且與英失混處 恐未可也 法興崩 只召太后降比臺公王子位 以奉公祀 比臺公女開元宮主 事銅輪太子 有子
公子二花郞 乃俊室夫人生也 俊室者守知公妹也 慈悲王外孫也 有美色 善文章 初爲法興大王後宮 無子 歸于公而生 亦貌美而善文章 只召太后寵愛之 常侍左右 太后女叔明宮主悅之 逃出生子 是爲圓光祖師 我東方大聖人也 圓光之弟曰菩利沙門 卽予曾祖也
贊曰 花郞之祖 沙門之? 靑我之孫 碧我之子 在地則仙 在天則佛 圓滿常住 功德無缺
1. 위화랑
화랑은 선도이다. 우리 나라는 신궁을 모시고 하늘에 제사지내기를 마치 연나라가 동산에, 노나라가 태산에 제사 지내듯 하였다. 옛날에 연부인이 선도를 좋아하여 많은 미인을 기르면서 국화라 이름하였는데, 그 풍속이 우리 나라에 흘러들어 여자로써 원화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는데 화랑이란 홍대왕이 위화랑을 사라하여 활랑이라 부른데서 기인하였으니 화랑의 명칭이 이 때부터 비롯하였다.
전에는 선도들이 다만 신을 받드는 것만으로 주를 삼았는데 국공 열행 이후에는 선도들이 도의로써 서로 면려하였으므로 현좌충신과 양장용졸이 여기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화랑의 역사를 몰라서는 안될 것이다. 위화랑은 섬신공의 아들로서 어머니는 벽아부인이다. 어머니가 조지왕의 총애를 받음으로 인하여 비처삼마복자가 되었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마복칠성이다. 아시공의 아버지는 선모이고 아버지는 보혜이며 수지공의 아버지는 이혼이고 어머니는 준명이며 이등공의 아버지는 숙혼이고 어머니는 홍수며 태종공의 아버지는 아진종이고 어머니는 보옥공주며, 비량공의 아버지는 비지이고 어머니는 묘양이며 용취공의 아버지는 덕지이고 어머니는 가야국의 융융공주이다.
어떤 이는 법흥대왕이 칠성의 첫째 위치에 있고 위화랑은 어머니가 미천하기 때문에 칠성에 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칠성록과 보혜기에 모두 이등공은 없고 위황공이 실려있으니 누구의 설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공은 얼굴이 백옥같고 선명하고 말을 잘하였다. 벽아부인이 나을에 있을 적에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비처후 벽화부인이다. 벽화부인이 궁으로 들어가자 공은 벽화부인의 사제로서 궁을 출입하면서 총애를 받았다. 법흥대왕은 이때 부근의 아들로서 위는 국공에 있었으나 총애는 공만 못하였다. 아시공이 대왕을 권하여 몸을 낮추어 공에 절을 하게 하자 공이 그 사실을 섬신공에게 고하니 섬신공이 말하기를 "국공이 몸을 낮추어 너에게 절을 하는 것은 너를 신하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왕은 늙었고 국공에게 큰 인망이 있으니 너는 그를 섬기도록 하라."하였다. 그러므로 공은 곧 국공의 신하가 되어 그를 섬기게 되었는데, 옛일을 잘 알았으므로 법흥은 그를 나의 등통이라고 칭찬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비처가 과연 죽고 지증대왕이 즉위하여 법흥을 태자로 삼았다. 그러자 공은 벽화후를 권하여 태자를 섬기도록 하여 딸을 낳았으니 이가 삼엽궁주이다. 이때 태자비 보도부인은 바로 비처의 따로서 태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보도의 동생 오도는 묘심이 선혜후와 사룡하여 낳았기 때문에 매우 아름다워 태자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오도는 삼엽궁주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공과 깊이 결탁하여 은밀히 서로 정을 통하여 옥진궁주를 낳았다. 그런 사실을 안 태자는 오도를 아시공에게 벽화부인을 비량공에게 주고 이에 정비보도부인만을 사랑하고 공을 축출하여 멀리하였다. 그러나 보도부인은 덕을 입었다고 여겨 지증대왕에게 청하여 공을 전추에 봉하여 제사를 맡게 하였는데 연제부인도 공을 사랑하였다.
옥진이 궁중으로 들어가서 사랑을 받게 됨에 따라 공은 다시 과거처럼 왕의 총애를 받아 마침내 이찬의 지위에 올랐다. 옥진이 법흥의 사랑을 독점하게 되자 법흥은 보도부인을 중으로 만들고 공을 보도의 신하가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지소태후가 정권을 담당하여 화랑을 설치할 때 공을 그 으뜸으로 삼아 풍월주라 호칭하였다. 지소태후는 바로 보도의 딸로서 입종공의 부인이 되어 진흥대왕을 낳았다. 그러나 법흥대왕은 옥진공주를 사랑하여 진흥을 태자로 세울 뜻이 없으므로 지소가 이를 근심하자 공은 곧 대의로써 옥진을 깨우쳐 진흥을 세우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의롭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때문에 사도태후도 무사였으니 공의 덕이 크다 하겠다.
공의 자손이 매우 많은데 장녀 옥진궁주와 차녀 금진부인은 바로 오도부인이 낳았다. 옥진이 처음 영실공에게 시집간지 얼마되지 않아 법흥대왕의 사랑을 받아 비대공을 낳으니 대왕이 비대를 세워 태자를 삼고자 하자 공이 간하기를 "저의 딸은 골품이 없고 또 영실과 함께 살았으니 그자식을 태자로 세우는 것은 옳지 못한 듯합니다." 라고 하였다. 법흥왕이 죽자 지소태후는 비대공을 왕자로 격하시켜 공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비대공의 딸 개원궁주가 동륜태자를 섬겨 아들을 두었다. 공의 아들 이화랑은 바로 준실부인이 낳은 아들이다. 준실부인은 수지공의 누이고 자비왕의 외손으로 얼굴이 예쁘고 문장을 잘하였다. 처음에 법흥대왕의 후궁이 되었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다시 공에게 시집와서 이화랑을 낳았다. 이화랑 역시 얼굴이 잘 생기고 문장을 잘 하였으므로 지소태후가 총애하여 항상 좌우에서 모시고 있게 하였다. 그런데 태후의 딸 숙명궁주가 이화랑을 좋아하여 둘이 함께 도망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가 원광조사로서 우리나라의 큰 성인이다. 원광조사의 동생 보리사문이 바로 나의 증조이다.
찬하여 말한다 : 화랑의 시조이고 사문의 아비이며, 청아의 손자이고 벽아의 아들이다. 생시에는 선이고 죽은 후에는 부처로서 원만하게 늘 존재하니 공덕이 모자람이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