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 3. 1.그날에도 --4.19. 와 6.10.그 날에도 선생의 깊은 가르침이 지켜주고 있었다는 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후학 이관희
* 흔히 두 사람의 정치인을 혼동할 경우가 있다.
정몽주와 정도전. 만일 이방원의 돌발행동이 없엇다면, 정몽주는 이성계마저 제거하고 권력 장악을 공고히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성계의 또 다른 협력자인 정도전은 이성계나 이방원을 따르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성계가 나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성계를 이용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내뱉앗다한다. 즉 정도전은 이성계의 동지였지만, 이성계를 이용하여 또 다른 계획이 있었던 존재이다.
정몽주 도 이성계를 따라 왜적토멸에 종군한 하였으니 정몽주가 이성계에게 칼을 들이대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지만 정몽주는 고려왕조에 대한 일편단심 이상의 유학의 도를 생각하고 학자적 정도를 택하여 목적을 이루고자 노심초사하였다. 이는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지독한 통제에 의하여 대개는 은밀히 살피지 못하면 알수 없는 문자로 보인다.
정몽주도 정도전처럼 이성계를 이용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아니라 이성계를 타도하기 위하여 이성계를 이용하므로서 고려말 묵은 세력들을 처리하였던 사실은 일단 기록이 있음으로 인정된다.
정몽주의 본심은 더욱 깊은 곳에서 추측이 가능하고 젊은 이방원의 젊은 혈기앞에 한 영웅의 포부는 하나의 연기처럼 살아 졌다.
지난 600년의 세월속에 묻혀진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과제 중 하나로 묻어둔다.
시신으로 꾸민 행상의 깃발이 풍덕천을 지나 영천으로 가게 될 상황에서 회오리 바람이 불어 날려간 자리가 곧 용인의 지금 그 묘소라고 한다.
이 묘소는 훗날에도 정몽주를 따르는 고려부흥의 조직들이 용인에 많이 유입되어 지금도 그 후손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아마 여기가 그 비밀의 장소 두문동(杜門洞)이 아니였던가? 後學 이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