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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해발 500m가 넘는 구릉에 구축한 철옹성이다.
지금까지 적에게 한번도 함락되지 않은 천연의 요새 남한산성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남한산성이 철옹성임을 밝히고 있다.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에 있고 중심지는 만 길이나 되는 산꼭대기 위에 있다.
옛날 백제 시조 온조왕의 옛 도읍이었던 곳이다. 안쪽은 평평하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다.
청나라 군사가 처음 왔을 때 칼날 하나 대보지 못했고, 병자호란 때도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단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됐기 때문이다.“
<여지도서>는 남한산성을 ‘천작지성(天作之城)’이라고 했다.
하늘이 내려준 천혜의 자연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성(城)이라는 것이다.
가운데는 평평하고 바깥은 험고하며 형세가 웅장하여 마치 산꼭대기에 관을 쓴 것 같은 형상이라고 했다
온조가 위례성을 동남쪽에서 지켜내는 방어기지 온조성으로 출발한다.
이 지역 발굴 때 그릇 등 백제시대 생활을 뒷받침하는 유물들이 나오고 있다.
이 산성이 백제인들 삶의 터전이었음을 나타내주는 유물들이다.
그러나 군사시설이나 무기 등은 발굴하지 못한다. 군사시설 온조성을 입증하는 자료로는 마땅하지 않다.
온조성에 관한 기록 사료도 없고 다만 말로만 전해 오고 있을 뿐이다.
신라 때 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유물은 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이다.
"문무왕 12년(672)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
성의 둘레는 4,360보였습니다. 이를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8km에 달한다.
이는 남한산성의 원성과 거의 같은 규모로서, 주장성은 당시 신라가 쌓은 최대 규모의 석축산성이었다.
주장성의 입지는 일반적인 삼국시대의 산성입지와 다르다.
삼국시대의 성은 대부분 조망이 좋은 해발 100-200m 정도의 야트막한 산에 구축되었다.
남한산성은 해발 500m가 넘는 산꼭대기에 구축되었다.
삼국시대의 성중 큰 성에 속하는 한산주성의 규모도 1.5km 정도다.
이 성은 둘레가 8km에 달한다.
주장성의 입지와 규모는 삼국시대의 성보다는 오히려 높고 험준한 산꼭대기에
큰 규모로 성을 쌓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피난성의 축성의 입지와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
아마도 당시 신라가 방어해야 할 대상이 백제나 고구려였다면 주장성은 쌓지 않았을 것이다.
주장성은 당나라와 맞서 싸우기 위해 쌓은 성이다.
당나라는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 땅을 장악한다.
당나라는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고구려 땅을 당나라의 영토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당나라는 평양에 5만명의 군병력을 주둔시키고 신라를 위협했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투에 대비하여 한강 남쪽에 주장성을 쌓게 된다.
이 성은 한강유역을 지키는 신라의 가장 중요한 요새였다.
결국 당나라는 남한산성을 점령하지 못한다. 이때 산성은 함락되지 않는다.
주장성에는 7세기 후반 신라 축성기술이 집약되었을 것임은 예측이 가능하다.
뛰어난 신라 축성기술의 가장 큰 증거는 이렇게 큰 규모의 산성을 1년 만에 구축하였다는 점이다.
더구나 주장성을 쌓는 데는 다른 곳에서 운반하여 온 화강암 성돌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된다.
고려시대에는 주장성을 보수해 군사시설 남한산성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광주부사를 지낸 이세화의 묘지명에서 이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몽고군의 1차 침입 시 몽고의 대군이 와서 광주성(廣州城)을 포위하고 몇 달 동안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갔으며, 몽고의 2차 침입 시에도 몽고의 주력부대가 광주성을 공격해 왔으나
이세화가 물리쳤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는 공민왕 10년 1361년 홍건적 10만 명이 침입하여 개경을 함락시켜
공민왕이 안동으로 파천하는 상황 속에서 광주에 수레가 머물렀을 때 이곳 아전들과 백성들이 모두 산성으로
올라갔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산성의 입지여건을 갖춘 곳은 남한산성 밖에 없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광주지역 군민들이 입보하여 몽고군과 싸우거나 홍건적의 난 때 대피한 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성된 주장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 남한산성의 곳곳에서 고려시대의 기와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비록 고려시대에 대대적인 산성 수축은
없었지만, 무너진 성벽을 보수하거나 군포와 창고건물을 수축하는 정도의 관리는 지속적으로 추진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인조는 인조반정으로 집권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이괄의 난을 맞게 된다.
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남한산성을 본격적으로 축성한다.
인조는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를 시켜 남한산성 축성의 역사를 완성한다.
둘레는 6,297보(步)이고 내부에 우물과 샘터 125개를 만들어 놓았다.
축성공사는 주로 각성(覺性)이란 승려를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전국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사역한다.
이 때 승군을 운영하기 위해 장경사(長慶寺)등 7개의 사찰을 건립합니다. 현재 장경사만 잔존하고 있다.
조선시대 한양을 지키는 외곽에 4대 요새가 있었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동쪽의 광주에 자리한 요새가 바로 남한산성이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4km,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떨어져 있는 남한산에
위치하고 있다. 성의 길이는 총 11.76km(본성 9.05km, 외성 2.71km), 높이는 7.3m이다.
성의 서남쪽 곡저부의 해발 370m 지점에 있는 남문 지화문(至和門)이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2년(1624)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3년 1779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
남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이 문을 통해서 들어 왔다.
『중정남한지』은 그 당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왕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5~6인에 지나지 않았고 백관 중에 따라온 이도 수십 인에 지나지 않았으며
대신이하로 제종신은 이경이 지나서야 와 닿았다. 왕이 성 남문에 도달하려고 할 때 사슴 한 마리가 앞을 가로지르니
모셨던 내시 한사람이「이것은 길조입니다. 전하께서는 오래지 않아 환도하시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왕이 까닭을 물으니「먼저 번 공주에 행행하셨을 때도 이런 징조가 있었기에 여쭙는 것입니다」하더라는 것이다.” 하였고,
또 청에 항복하기 전인 1637년 1월 18일에는 청나라 군사들이 남문 밖에 와서 “화의를 맺겠으면 빨리 나오고,
원치 않으면 19일이나 20일에 마땅히 결전을 할 것이니 알아서 하라”
성문은 홍예문과 문루로 구분된다.
홍예문은 높이 475cm, 너비 335cm, 길이 860cm 로 기초석 위에 17개의 홍예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문의 하부 육축은 일부 성벽의 배부른 현상을 제외하곤 홍예부분 등 원상이 그대로 잘 남아 있으며
육축의 높이와 홍예문의 높이가 동문보다는 높게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문의 문비도 두꺼운 판재에 30cm 크기의 철린을 촘촘히 붙여 만든 육중한 모습으로
상하의 지도리석으로 위아래에서 지탱하도록 되어 있는 원형 그대로이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으로 현재에도 관광객을 비롯한 일반인들의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남한산성에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한 수어장대다. 현재 남한산성에 남아 있는 유일한 장대다.
조선 인조 2년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한다.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어서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하여 싸운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습니다. 영조 27년에 이기진이 왕의 명령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영조가 이곳을 찾아 ‘무망루’ 현판을 겁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무망루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은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2층 4면의 바깥기둥은 1층의 높은 기둥이 연장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수어장대 뒷켠에는 우물이 나란히 2개가 있어 장대에 근무하는 장졸에게 음료수를 공급하였다.
조선시대 수어장대에는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등 조선의 임금들이 방문하여 과거의 치욕적인 역사를 기억하고
다시는 그러한 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반면교사' '법고창신'으로서의 남한산성의 역사를 떠올리곤 했다.
무망루 비각과 이승만 대통령 탐방기념비 그리고 그가 심은 전나무이다.
이승만대통령이 1953년 9월 6일 남한산성을 찾아 그 기념으로 심은 전나무가 있다.
그 전나무 옆에는 전면에 ‘리대통령 각하 행차 기념식수’라고 쓰인 표석이 있다.
그 뒷면에는 '단기 四二八六년 九월 六일'이라고 적혀 있다. 지금의 서기로는 1953년이다.
바로 한 달 열흘 전 휴전 협정을 체결하고 난 다음이다.
이때는 이승만 대통령이 80세 되던 해이다. 남한산성을 헬리콥터로 방문하여 이때 기념식수한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 비석 옆에는 그때의 기념식수한 나무로 보이는 40-50년 생의 전나무가 있다.
수어장대 담장 동남쪽에 있는 큰 바위다. 매바위 응암 또는 장군바위라고 부른다.
그 바위에는 守禦西臺라고 새겨져 있다. 이 매바위에는 기가 막힌 사연이 있다.
남한산성 축성의 총책임을 맡은 수어사 이서(李曙)는 이회(李晦)와 벽암대사에게
각각 동남성과 서북성을 쌓도록 구역과 기한을 정해 주었다.
이회는 그 날부터 낮과 밤, 일심으로 오로지 축성에만 노력한다.
돌 하나, 흙 한줌에도 정성을 들여 침식을 잊고 성 쌓은 일에 몰두하였다.
축성 자금이 부족하였습니다. 자기의 사재까지 털어 공사에 전부 던졌다.
자금은 부족해서 공사는 하루 이틀 늦어만 가고 있었다.
그 벽암스님의 공사는 착착 진행이 되어서 기일 안에 준공하였다.
관가에서 받은 공사비 중에서 남은 금액까지도 관가에 반납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회는 점점 의심을 받게 된다.
"이회는 사리사욕을 탐하고 주색에 빠져서 공사를 게을리 한다."
이회를 모함하는 소리가 관가에 알려진다.
관가에서는 그를 수어장대에서 참수형에 처한다.
“내가 죽는 순간에 매가 날아 올 것이니,
만약 매가 날아오지 않으면 나의 죄가 죽어 마땅한 것이요,
매가 날아온다면 내가 죄 없음을 알라”
형을 집행하기 전에 이회는 당당히 말한다.
윗자리에 앉은 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곧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뻔적이는 칼날에 비참하게도 이회의 목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
그 때 피가 흐르는 목에서 한 마리의 매가 날아 나와서 이회의 시체를 돌고
장대 근처의 바위 위에 앉아 무서운 눈초리로 군중을 흘겨보고 있다가
갑자기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고 한다. 이것을 본 군중은 이상하여
그 매가 앉아 있던 바위로 쫓아가 보니 매는 없고 다만 발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그 후에 사람들은 그 바위를 '매바위' '응암' '장군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회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회의 부인 송씨는 남편의 남한산성 축성에 따르는 경비가 모자라자
팔도를 다니면서 기부금으로 쌀을 모은다. 그 쌀을 배에 싣고 송파나루로 들어오다가
남편의 처형소식을 듣자 통곡하면서 한강에 뛰어 들어 자결한다.
그 후 삼전도의 한강변에는 송씨를 모신 당집 잠실부군당을 세워 송씨의 원혼을 달랬다고 한다.
청량당(淸凉堂)은 남한산성의 역사 속에서 한 많게 죽어간 원혼들의 안식처로 삼고 있다.
이 사당에는 산성을 쌓는 역사에 참여하였다가 억울하게 죽은 이회를 모신다.
또 이회의 부인 송씨와 첩도 사당에 모시고 남한산성을 쌓은 역사에 참여한 벽암대사도 모셨다.
사당 청량당은 청계당으로도 불리운다. 백암대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 청계당이다
‘대감당’ ‘매당‘ 등으로 부릅니다. 이곳에서는 도당굿을 벌인다. 이회 장군과 부인 송씨,
그리고 첩 유씨를 모시고 난 후 여러 고을의 무당과 박수들을 모아 굿을 벌인 것이 도당굿의 시초라고 한다.
그들의 영혼을 달래고자 이회 장군의 처첩이 강물에 몸을 던진 이회장군 이하 여러 신명들과 청량당에 서린 원혼들을
기리고 대접하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흰옷차림’들의 바람을 기원하는 대동잔치가 매년 청량당에서 거행됐다.
남한산성 성내동 사람들과 청량당 신앙권에 속하는 사람들 그리고 무당들이 함께 마련한 대동치성으로서의 도당굿이었다고 한다.
이 도당굿의 놀이터는 청량당 앞마당과 남한산성 성곽이었다.
도당굿이 열린 시기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 온 것으로 보인다.
매년 정월2일 거행됐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하며, 매년 5월2일 거행됐었다는 증언도 있다.
이처럼 마을 사람들에게 깊은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 잡은 이회 장군은 정월에 홍수맥이라고 하여
일 년 동안 집안에 드는 각종 흉한 운수나 재앙을 막아내고, 집안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치성의 대상이었다.
칠월칠석날에는 아이들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칠석맞이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남한산성 도당굿과 관련해서 최근에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있었다.
바로 ‘남한산성 대동굿 보존회’의 결성이다.
남한산성 주변에 있는 성남, 광주, 송파 지역의 무속인들 이 모여서
‘남한산성 대동굿 보존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남한산성 도당굿의 복원을 위해 애쓰고 있다. 1991년 8월 28일 처음으로
이루어진 이 단체의 굿판은, 그 명맥마저 위태로웠던 남한산성 도당굿의 복원에 좋은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남한산성 대동굿 보존회는 해마다 굿을 벌여오면서, 남한산성 도당굿의 맥을 되살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1996년부터는 굿판이 남한산성 문화제로 확대되어, 마을 사람들이 다함께 참여하고 즐기는 참다운 대동굿판의 정신을
구현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남한산성 서문 우익문이다.
서문은 성곽의 서북측에 위치하고 있다. 성문은 성곽의 상징 시설물이다.
내외의 출입에 편리한 지점에 동서남북 방향별로 한곳씩 성문을 마련하는 것이 기본이다.
성문이 마련된 곳은 주로 계곡이거나 능선인 곳으로 대게 계곡 지역에 많이 마련되었다.
계곡 지역에는 성내외의 출입에 평탄한 지형이어서 출입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계곡 지역에 마련된 성문은 성문이 마련된 위치가 성 안쪽으로 휘어져 들어온 지점이다.
정조3년 1779년에 성곽을 개보수 하고 성문의 이름을 우익문이라 명명하였다.
특히 우익문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지어진 이유로 북쪽의 오랑캐가 접근 시
가장 빠른 길이 될 수 있으므로 문의 크기를 의도적으로 작게 만들었다.
“죄가 있는 자이니 서문으로 나오도록 하라!”
청나라 용골대는 조선에 치욕의 항복을 요구한다.
조선의 왕 인조는 남문으로 나오지 못하고 죄인이나 잡배나 드나드는 서문 좌익문으로 나오도록 한다.
또 조선 인조에게 곤룡포를 입지 못하고 청나라 죄수 옷 푸른 색 옷을 입고 조선의 왕이 아니라
죄인의 신분으로 성에서 나오라고 치욕적인 요구를 한다.
인조는 청나라의 죄수복을 입고 서문 좌익문으로 남한산성을 빠져 나온다.
그것도 새벽 3시에서 새벽 5시 사이다.
“백관 중에 뒤에 남은 자들은 나열해 서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승정원일기는 그날 남한산성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햇빛에 광채가 없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그날 조선의 비참함을 기록하고 있다.
남한산성의 본성은 신라 주장성의 성돌을 활용해 구축됐다.
외성은 본성과 시차를 두고 구축됨으로써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각 시기의 성을 쌓는 기법을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산성을 쌓는 기법의 교과서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남한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성돌은 마치 옥수수 알 모양으로 다듬고 표면을 하나하나 정교하게 정다듬하여 가공한 것이다.
이렇게 잘 다듬어진 주장성의 성돌은 조선시대 남한산성을 수축할 때 상당수가 재활용 되었다.
주장성 성벽은 능선을 따라 구축하였다. 능선 정상부에서 바깥쪽으로 약간 낮은 사면을 ㄴ자 형태로 굴토하거나 암반지역의 경우
층단식으로 굴토하여 터를 닦고 암반을 굴착하여 턱을 만들고 그 안쪽에 일반적인 성돌보다 3-4배 크기의 지대석을 놓아 지대석이
바깥으로 밀리지 않도록 하였다. 지대석 위에는 너비 30cm 내외 두께 15-20cm 정도 크기의 다듬어진 성돌을 바른층 쌓기 방식으로 쌓아올리면서 길쭉길쭉한 돌로 뒷채움을 하여 쌓고 사면과 석축사이의 빈공간은 흙으로 다져서 싸는 편축방식으로 성을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성벽이 곡간부를 지나게 되면 성벽은 협축의 방법으로 쌓은 후 성벽 안쪽에는 일정한 높이까지 복토하고 성 밖으로 물이 빠질 수 있도록 바닥을 계단식으로 처리한 성벽통과식 수구를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주장성을 쌓을 때 사용한 성돌은 화강암이다. 화강암은 일장산 주변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화강암은 가장 가까운, 직선거리로 11km 정도인 한강 건너 아차산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화강암은 재질이 단단하여 다듬기가
힘들지만 더 견고하고 치밀한 성을 쌓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처럼 신라의 장인들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 편마암 대신 아직 정확한 채석지를 알 수 없는 원거리에서 화강암 성돌을 운반하여 성을 쌓았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도 믿기 어려울 정도다.
성돌을 직선으로 쌓지 않았다. 비스듬히 안쪽으로 들여쌓는 기법을 활용하였다. 안으로 들여쌓는 기법은 퇴물림법으로 고구려의
전형적인 성 축성방법이다. 저렇게 비스듬히 들여쌓을 경우 성벽 안팎의 어떤 압력도 이겨 낼 수 있어 성벽이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조선 인조 때 남한산성 성벽의 면석 중 상당수는 주장성의 성돌을 재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한산성 성돌의 재질은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으로 대별된다. 그 중 화강암 성돌은 크기가 30cm 내외이고 네 모서리와 표면까지
둥글고 정교하게 다듬은 것으로, 크기가 비교적 크고 표면을 납작하게 다듬은 편마암 성돌과 치석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남한산성 일대의 기반암은 화강편마암이며 남한산성의 곳곳에 채석의 흔적들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산성수축에 필요한 석재의 상당수는 가까운 곳에서 구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이 주장성을 수축하였다고 하더라도 축성방법에는 조선시대의 토목건축기술이 반영되어 있다.
축성대상지의 지반을 층단식으로 정지한 후 세종대에 축성된 도성처럼 길이 1m 내외의 지대석을 놓고 장방형의 성돌을 정연하게
쌓아올렸다. 지대석 위의 성돌은 네모서리의 각을 없애고 표면은 판판하게 정다듬을 하였으며, 뒷길이를 길게 하여 사각추 형태가
되도록 하였다. 남한산성 원성의 성돌은 삼국시대에 비하여 두께는 약간 두꺼워지고, 너비는 약간 좁아져서 정방형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체성벽의 기울기는 삼국시대의 성벽이 70°∼80°정도를 유지하는데 비하여 남한산성의 원성은
60°∼70°정도로 원성의 성벽이 훨씬 더 완만하도록 하여 안정성을 높이고 있다.
성벽 위에는 돌로 만든 여장을 설치하였습니다. 여장에는 근총안 하나에 원총안 2개가 대칭이 되도록 설치하였다.
돌로 여장을 만들 경우 타구와 총안의 경사면을 매끈하게 처리하기 어려우므로 총안의 내부는 석회 삼합토로 마감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수축을 단행한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화포공격으로 무너진 동문부근의 성벽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한다. 전쟁과정에서 노출된 각종 방어 상의 취약점을 보강하게 된다.
인조대의 남한산성 수축의 핵심은 옹성 신축과 포루 설치 그리고 제2남옹성 치의 수축이라고 할 수 있다.
남쪽성벽에는 3개의 옹성을 구축하였으며 옹성 끝부분에는 각 방면으로 포를 쏠수 있도록 포루를 구축하였다.
정조 때는 여장에 전석 벽돌을 올려놓았습니다. 우리나라 산성들 가운데 전석을 사용한 여장은 남한산성이 유일합니다.
제2남옹성에서 동문구간을 포함하여 남한산성 곳곳에는 지금도 일정한 간격으로 체성의 상단부까지 내려왔던 근총안의
흔적이 남아있다. 한 타에는 가운데에 근총안 하나와 양쪽에 원총안 두 개가 배치되었으므로 근총안과 근총안의 간격을 통하여
인조 대에 수축당시 여장 1타의 크기는 대략 4.4m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에서 가장 좋은 전망대로 알려진 연주봉 옹성이다.
일반적으로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다. 한양도성에서는 동쪽의 흥인지문에 옹성을 두었다.
흥인문 동쪽에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서 항아리 모양으로 둥근 성 옹성을 설치했다
연주봉 옹성은 해발 464m인 원성에서 해발 466.4m인 연주봉 정상부까지 좁고 긴 성벽을 쌓아 연결한 성이다.
전체 길이는 315m입니다. 이 옹성은 성벽이 거의 없이 용도형태로 여장만을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연주봉에는 포대로 추정되는 시설물이 있어 복원하였다. 석축의 ‘거친 돌 막 쌓기 식‘으로 남옹성과 유사한 쌓기 법을 보이고 있다.
남한산성의 옹성은 모두 성벽에서 길게 내밀어서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로 설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남한산성에는 5개의 옹성이 있다. 연주봉 옹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원성 축성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남쪽에 3개, 동쪽에 1개,북서쪽에 1개가 있다.
연주봉 옹성은 서문에서 북문쪽으로 약 200미터 정도 가서 있으며 연주봉을 연결하고 있다.
이 옹성은 원성(元城)과 연주봉을 연결하고 있는데 둘레는 274m에 73개의 여담이 있었다.
이 옹성은 암문(暗門)을 통하여 성내를 출입할 수 있다.포를 쏘는 포대의 유구가 확인돼 망루(望樓)를 겸한 포대를 설치하였다.
하남위례성의 산성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하는 잠실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시계가 나빠서 희미하지만 잠실지역의 윤곽이 잡힌다. 저멀리 123층의 롯데빌딩이 희미하게 보인다.
연주봉에서 바라보면 북쪽으로는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의 한강수계가 한눈에 조망된다.
북쪽으로 연결되는 능선의 말단봉에 있는 이성산성과 하남시 춘궁동 일대가 특히 잘 관측된다.
북문 전승문(戰勝門)이다.
전쟁이 승리한 기쁨을 상징하는 전승(戰勝)의 문이 아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에 참패한 그 치욕의 북문 현장이다.
앞으로 어떤 전쟁에서 꼭 이겨달라는 뜻의 전승(全勝),
그때 그 치욕의 참패를 잊지 말라는 뜻을 담아 후대에 전하는 전승문이다.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이라고 명명한다.
조선군이 병자호란 당시 북문을 열고 나가서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던 유일한 문이다. 그 전투가 바로 ‘법화골 전투’이다.
당시 원로대신이었던 김유의 고집에 의하여 총을 든 군사 300여명이 북문을 나가서 적을 공격하였다.
적의 유인계략에 말려들어 아군은 총 한방도 제대로 쏘지 못한 채 전멸하고 말았다.
이 전투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는 최대의 전투였으며, 최대의 참패였다.
아군은 3백명이 전사한다. 청나라 군대는 단 두 명만 죽었다고 한다.
당시의 전투를 지휘했던 김유에 대해서도 그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북문은 홍예식으로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예돌로 구축하였다.
문의 폭은 325cm 이며, 높이는 365cm이다.
육축은 특별히 가공하거나 큰 무사석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일반성벽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다.
다만 성벽의 두께는 두터워져 약 710cm 달한다. 홍예 안쪽에는 판문을 설치하였으며 철린을 박아 보강하였다.
여장은 총안이나 타가 없는 평여장을 설치하였고, 문루로 오르는 계단을 별도로 설치하지도 않았다.
문루는 단층이고 규모는 정면 4칸 측면2칸이며,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용머리는 치미를 장식하였고 내림마루에도 용두로 장식하였다.
천장양식은 연등천정이며 기둥양식은 주심포 양식의 민흘림기둥이다.
남한산성 북문 안에 있는 '효자 우물'이다.
이 효자 우물의 전설이다.
그 옛날 산성 북문 안 마을에 한 효자가 살고 있었다.
효자의 이름은 정남이라고 합니다. 정남의 나이 열두 살 때다.
아버지가 갑자기 이름 모를 병에 걸려서 자리에 눕게 된다.
아버지가 하루 하루 품을 팔아 사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그 집에는 밥을 지을 쌀이 떨어졌다.
정남은 자신은 밥을 굶으면서도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고 애를 썼다.
이제 겨우 열 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년으로서는 품을 팔수도 없고 장사를 할 수도 없었다.
"아주머니, 아버지가 병들어 그러니 밥 한 술만 주십쇼.
아버지의 병만 나으면 제가 일을 해서라도 은혜를 갚겠습니다."
정남은 쪽박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동냥을 했다.
정남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며 동정했다.
정남이 이렇게 동냥을 해다가는 병든 아버지를 정성껏 봉양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아버지의 진맥을 보게 되었다.
"얘야, 네 아버지의 병에는 다른 약이 필요 없다.
그저 큼직한 잉어를 구해 다 푹 과 드리면 깨끗하게 나을 것이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는 훌쩍 가버렸다.
잉어가 좋다는 말을 들은 정남은 무척 기뻐하며
아버지께 이야기 한 후 잉어를 구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혹시 생선장수라도 만나면 사정을 해서 구하리라 생각하고
생선장수가 있을 만한 곳마다 정처 없이 헤매었다.
때가 마침 겨울철이었다.
천지만물이 꽁꽁 얼어붙었고 매서운 바람만 윙윙거리며 불고 있었다.
너무 혹독한 추위, 아무리 헤매고 돌아다녔으나 생선장수라곤 한 사람도 없었다.
어느 날, 어느 산기슭을 지날 때였습니다. 인가도 없는 그 곳에 우물하나가 있었다.
정남은 우물 옆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하느님, 제발 잉어 한 마리만 구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정남은 우물 옆 산기슭에 주저앉아서 하느님께 간절히 기원했다.
기도를 올린 후 다시 걷기 시작하여 우물가를 지나려니까
우물 속에 누런 금 비늘이 찬란한 잉어 한 마리가 있는 것이다.
정남은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잉어를 잡아 올리려고 했다.
잉어가 어찌나 크고 무거운지 간신히 건져냈다.
뜻하지 않게 잉어를 얻은 정남은 너무나 기뻐서 꽁꽁 얼어붙은 땅바닥에
꿇어 엎드려 하늘을 향해 감사를 올렸다.
잉어를 구해 가지고 집으로 돌아 온 정남은 솥에 넣고 정성스럽게 고았다.
다음 날 잉어 국을 맛있게 먹은 그의 아버지는 과연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러한 사실은 차츰 근처 마을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정남의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그의 효성을 칭찬했다.
그런 일이 있은 이후부터 그 산기슭의 우물을 '효자 우물'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남한산성 내 동편 산록에 위치한 연무관이다.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함께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처음에는 ‘연무당’ 또는 ‘학무당’이라 불렀지만 숙종(재위 1674∼1720) 때 ‘연병관’이라 쓴 현판을 하사받고 통칭 ‘연병관’ 또는 ‘연무관’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건물 중앙에는 ‘연무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곳에서 무술을 닦다가 출중한 실력을 인정받은
무사들은 한양으로 진출했다.
연무관은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에 기단을 높이 쌓아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육중한 건물이다.
중앙간 대량에는 전, 후문에 용문을 그리고, 측면 쪽 대량의 한쪽 면에도 봉문을 그려 넣은 것이 특이하다.
‘옥과 같이 단단한 진터와 철벽과 같이 견고한 성곽이 높은 산 위에 축조되어 있고, 풍운을 탄 용처가 기이한 힘을 내는도다….’
라는 기둥의 글귀가 이곳에 서린 무장들의 기개를 느끼게 해준다.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하기를 끝까지 반대했던 세 학자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기리기 위해 숙종 때 세운 사당이다. 후에 정온, 김상헌도 모신다.
삼학사란 이름은 송시열이 '삼학사전'을 편찬하면서부터 불리기 시작했다.
조선이 청에 항복하자 삼학사는 청나라로 끌려간다.
청 태종의 온갖 회유에도 불구하고 충신불사이군의 유교정신을 굳게 지키며 결국 참형을 당한다.
삼학사 가운데 가장 연장이었던 홍익한은 당시 52세였고 윤집은 32세, 오달제는 29세였다.
홍익한의 경우 1636년 2월 ‘홍타이지가보낸 사신의 머리를 베어 명나라에 보내든가, 그것이 싫으면 나의 머리를 베라’는
상소를 올렸다. 조선의 골수 척화파까지도 결국 홍타이지의 은덕에 감화됐다면 향후 조선을 제어하는데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한 홍타이지는 처음엔 삼학사를 회유하려 했지만 삼학사는 단호했다.
대명조선국의 신하라고 자신을 표현한 홍익한은 ‘나는 조선의 신하이자 명의 신하이니 그대들 오랑캐와는 타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했고강경한 홍익한의 의지를 확인한 홍타이지는 곧바로 그를 처형했다.
윤집과 오달제에게 마음을 돌리면 처자를 데려와 청에서 살도록 도와주겠다는 홍타이지 회유시도는 실패한다.
노모와 임신한 아내를 두고 끌려온 오달제는 ‘고통을 참고 이곳까지 온 것은 만에 하나라도 살아서 돌아가면
우리 임금과 노모를 보기해서였다.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면 죽는것만 못하다. 속히 죽여 달라’고 응수했다.
윤집의 형 윤계는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는데 청군 앞에서 무릎꿇기를 거부하다 혀가 잘리는
참확한 죽음을 맞은 인물이었다.
그런 윤계의 동생답게 윤집 또한 ‘난리 이후 처자의 생사를 알 수 없다’는 단호함으로 회유를 거절했다.
결국 그들은 심양 서문 밖에서 죽음을 당했고 청인들은 시신을 수습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훗날 뼈들이 쌓여 있는 형장에서 두 사람의 시신을 찾을 길이 없어 집안의 종들을 시켜 초혼해 온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삼학사가 보여준 조선의 충절은 청인들에게도 예사롭지 않았던 까닭에 어쩔 수없이 죽이기는 했지만
청조는 이후 삼학사를 기리는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워주는 모습을 보였다. 청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매년 제사를 지내 주었는데
세계 어느나라 역사를 보아도 승자들이 적을 죽이고 그들을 위해 비를 세운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예였다.
지수당(地水堂)은 현종13년 1672년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이다.
건립 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2개의 연못만이 남아 있다.
중정 남한지에 남학명이 쓴 지수당기에 의하면 대게 지수당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처음 당을 세울 때였으니
대게 주역대전(周易大傳)의 “백성을 포용하고 기른다.” 는 뜻을 딴 것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연못 가운데에는 ‘관어정’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빈터만 남아 있다.
정조는 1779년 8월7일 지수라는 이름은 “땅속의 물은 병중(병사들의 무리)이다. 노성한 사람이라야 길하다. 라는 뜻에서 딴것인가?” 물었는데 서명응이 “예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지수당이라는 명칭은 군자는 백성을 잘 담아서 무리가 잘 살도록 길러 나간다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관어정과 지수당이 있는 연못은 서고동저 형세를 띤 남한산성의 물줄기가 모아져서 동으로 흘러가는 것이며
아무리 가뭄이 와도 물이 마르지 않음은 남한산성이 해발 500미터의 높이에 있어도 물이 풍부한 천혜의 요새지임을 증명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는 병자호란시 47일을 견딜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서흔남(徐欣男)의 묘비 두 기가 나란히 서 있다. 1667년에 세운 서흔남 묘비다.
그 중 하나는 온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파된 상태로 남아 있다.
이 비들은 처음 광주시 중부면 검복리 병풍산에 있던 것을 광주시청과 광주문화원에서 발견하여
1998년에 현재의 위치인 남한산성 역사관 앞 지수당 옆으로 옮겨왔다.
서흔남은 천민 출신으로 남한산성 서문 밖 널무니에서 태어났다.
병자호란 때 인조를 등에 업고 남한산성으로 무사히 대피시킨 인물이다.
그는 청나라의 추격 군에 발각될 것을 우려해서 나막신을 거꾸로 신고 눈 쌓인 길을 달렸다고 한다.
무사히 남한산성에 도착한 인조는 자신의 곤룡포를 입혀 주었다고 한다.
서흔남은 이 곤룡포를 소중히 여기고 평생 간직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에 곤룡포를 함께 묻어주었다고 전한다.
그는 1667년 별세하여 중부면 검복리 병풍산에 묻혔으나 그의 자손들이
후에 화장하여 묘역은 사라지고 묘비만 남았다.
그의 무덤근처에서는 눈이 내릴 때면 바람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마치 “업혀유, 업혀유~”하는 것처럼 들렸다는 소리였다고 전설은 전한다.
대소 관료들이 그의 묘 앞을 지날 때에는 임금의 곤룡포를 존중하는 뜻에서 반드시 말에서 내려
예를 표하고 걸어서 그 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1667년 현종8년 3월13일에 건립 된 것으로 앞면에 '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徐公之墓'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조정에서는 전란 후 그의 공을 기려 천민신분을 면제해 주고, 성과 이름을 하사하였으며 훈련주부(訓鍊主簿)를 제수하였다.
품계로는 통정대부 정3품 당상관에 해당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일개 천민의 신분으로 역사기록에 이름석자를 기록하고
당상관이라는 높은 품계를 받은 인물은 서 흔남이 전무후무하다. 그의 묘표와 공적 비에 의하면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제수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크게 깨진 또다른 묘비이다.
이 비는 손상이 심해 건립연대를 확인 할 수 없다.
'韓氏祔座(한씨를 왼쪽에 묻었다)'는 문구로 보아 부인이 사망한 후에 다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지수당기를 쓴 남학명은 유명한 남구만의 아들이다.
이 지수당에서 남구만과 남학명 부자의 나라사랑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이 마루에 앉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충군우국의 마음이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땅 속에 늘 물이 고여 있는 것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군사는 불길하지만 충분히 키우지 않을 수 없고 움직이면 천하가 위태로워지지만
사용해야만 백성들이 따를 때가 있다. 땅속에 늘 물이 간직되어 있는 것처럼 평화로울 때 충분한 군사를
잘 육성하여 먼 화를 대비해야 한다.”
남학명은 이곳 지수당에 앉아 말했다고 전한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그 유명한 시를 쓴 그의 아버지 약천 남구만이다.
그는 유배와 낙향의 시련을 거치면서 현실정치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던 학자이자 정치인이었다.
특권을 인정하지 말고 공평한 법의 집행과 왕의 측근들을 엄하게 단속할 것을 당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숙종은 어머니 명성왕후 장례식을 치른 후 신하들에게 상전을 내렸는데 애도의 글을 올린 남구만에게 말 한필을 하사한다.
“신이 근신의 지위에 있기에도 너무나 외람됩니다. 현명한 군주는 상은 반드시 먼 자에게 먼저, 벌은 반드시 가까운 자에게
먼저여야 공정한 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직책이 귀하고 가깝다 하여 지나친 은전을 베푸신다면 솔선을 보여야 하는 제가
지나친 상을 태연히 받는다면 앞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조정은 조그만 공로에 은혜가
지나쳐 상을 주고, 일을 그르친 경우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며, 형벌이 너무 가벼워서 다들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공로가 있더라도 상은 신중히 내려야 하며 잘못이 있으면 책임을 묻고 형벌을 내려야 합니다. 안장을 갖춘 말 한필 사급 하라는
명 거두어 주십시오.” 남구만이 숙종에게 상소를 올린다.
산성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동문 좌익문(左翼門)이다.
동문은 남문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했던 성문 중의 하나다.
이 성문의 위치와 형태가 선조 때에 이미 보수하였다고 하는 그 동문인지는 알 수 없다.
인조2년 1624년 산성수축 시 새로 수축된 이후, 정조3년 1779년 성곽 보수 시 성문도 보수하였다.
이때 다른 문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습니다. 동문은 좌익문이라고 하였다.
이 문을 ‘좌익문’이라 한 것은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므로 동쪽이 왼쪽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4대문 중 문루에 현판이 걸려있는 것은 남문 지화문 하나 뿐이다.
천주교수원교구 남한산성 성지개발위원회에서 만든 안내문에 의하면 동문 밖은 신유박해 때 천주교인의 처형장이었다고 한다.
동문 바로 안쪽 망월사진입로 건너쪽 화장실 뒤에는「천주교순교성지」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성문은 무지개형 아치를 가진 홍예식입니다.
폭은 310cm 높이는 400cm 이다. 홍예는 9개의 홍예돌을 쌓아서 구축하였습니다.
'홍예 안쪽에는 두께 12cm의 나무 문을 달고 그 바깥쪽에는 가로 31cm, 세로 16cm 의 철제 비늘(鐵鱗)을 붙여 보강하였습니다.
문 뒷면에는 빗장을 지를 수 있도록 가로 40cm, 세로 22cm, 의 장방형 홈을 파고 장군목을 걸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성문은 일반적으로 크고 정교하게 가공된 돌을 이용해서 쌓는 것이 보통인데,
동문의 경우 일반적인 성돌에 비해 오히려 덜 가공되고 규모도 두 배 정도 되는 크기의 성돌을 사용하여 쌓았습니다.
성문의 여장은 타의 구분이 없이 하나로 연결한 평여장이며 총안도 설치되지 않았습니다.
문루는 단층이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홑처마를 두른 팔작지붕 양식으로 만들었습니다.
기둥양식은 주심포양식의 민흘림 기둥이며 그 위에는 굴도리 가구를 둘렀습니다.
다른 문에 비해 가장 낮은 지대에 축조되어 있기 때문에 성문은 지면에서 높여 계단을 구축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다.
동문 밖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주필암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 주변은 정조 3년(1779) 정조 임금이 여주에 있는 영릉에 행차하던 길에 쉬었던 자리라고 한다.
이렇게 정조 임금이 쉬어갔던 장소라고 해서 당시 광주 유수였던 김종수가 己亥駐蹕(기해주필)이라고
바위에 새긴 글씨가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다.
정조 임금이 이곳에서 쉴 때 소나무에게 벼슬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한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 전해 오는 전설이다.
정조 임금이 행차를 하다가 이 곳 주필암에 앉아 쉬고 있었다.
쉬면서 주변 언덕을 천천히 살펴보던 정조 임금의 눈에 문득 언덕 위에 소나무 하나가 보이는 것이었다.
마치 일산을 편친 것처럼 절묘하게 생긴 소나무였다.
정조 임금은 주변의 신하들에게 너무도 절묘하게 생긴 소나무라고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는 "저 소나무가 하도 절묘하여 과인이 정삼품의 벼슬을 내릴 것이니,
나무 기둥에다가 옥관자를 붙여주도록 하시오." 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 후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벼슬을 받은 소나무라 해서 '대부송'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벼슬을 받아 대부송이라 불리던 소나무는 지금은 고사한 송암정의 소나무였다고 한다.
황진이는 마음이 담담했다. 꼭 삼년 만에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다.
그 옛날 송도삼절이라 하여 뭇 남자들의 애간장을 녹이던 황진이가 아니라
이젠 속세를 달관한 여승이 되어 속세로 하산하는 것이다.
황진이는 장삼에 고깔 쓰고 손에는 염주를 들었다.
비록 머리를 깍고 고깔을 썼을 망정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황진이는 며칠을 걸어 어느 산속에 이르렀다. 그곳은 산세가 수려하고 큰 소나무가 울창했다.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었으며 경치가 이를 데 없이 절묘했다.
황진이는 경치에 취하며 더욱 바삐 걸어서 언덕길에 올라섰다.
언덕에 올라선 황진이는 문득 발길을 멈췄다.
언덕 위 소나무 아래에서 여러 사람이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남자 사오명과 여자 두어명이 장구를 치고 춤을 추며 흥겹게 노는 중이었다.
모두가 이십 고개를 넘어선 사람들로 보이며 의관을 갖춘 풍이 양반집의 한량들로 보였다.
그때 한사나이가 소리쳤다.
" 여보게들! 가만히 좀 있어 보게 !"
" 왜 그러나 ?"
" 아니 중이 아닌가 ?"
" 글쎄 중은 중인데 여승 같구먼 "
그중 한사람이 앞에 있는 술잔을 훌쩍 마시며 상을 찡그렸다
" 에이 ! 재수 없게끔 중년이 앞을 거니다니 "
" 아이 서방님도 스님도 여자 남자 가려서 재수가 있고 없나요 ?"
" 뭐? 술맛 떨어진다 "
" 여보게 ! 좋은 수가 있네 "
" 좋은 수라니 !"
" 글쎄 가만히 보고만 있게"
이러는 동안에 고개를 다올라온 황진이가 그들 앞을 지나려 할 때다.
" 이보시오 스님 잠깐 내말좀 들고 가시오 "
" 나무 관세음 보살 무슨 말씀이시온지요 ?"
" 바쁘지 않으시면 잠깐 쉬었다 가시구려 "
합장을 하고 서 있는 황진이를 바라보는 여러 사람의 눈에는 호기심에 가득 찼다.
" 고마우신 말씀이오나 소승은 사바를 떠난 몸이오라 이대로 물러갈까 하옵니다.
나미아미타불 "라고 하며 황진이는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이때 몸이 건장한 사나이가 황진이에게 다가와서 그녀를 번쩍안아 들고는 일행이 앉아 있는 곳으로 왔다.
이에 좌중 사람들은 " 와 ~ " 하고 큰소리로 웃었다.
"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전생에 인연이니 스님도 우리와 유쾌하게 놀아봅시다.하~하~하~"
" 불가에 몸을 담은 소승을 어찌 이리도 희롱하십니까 ?"
" 화내지 말고 그 백옥 같은 손으로 술 한잔 따라 주시구려. 애들아 무엇을 멍하니 있는 거냐? 어서 장구를 쳐라 !"
땅딸보 같은 사나이가 기생들에게 소리를 치며 갑자기 황진이 고깔을 벗겨서 절벽 아래로 던져 버렸다.
좌중은 또한번 웃음판이 벌어졌다. 그러자 기생들은 장구를 치며 추기 시작했다.
" 저계집들보다 스님 얼굴이 백배 낫소. 머리를 기르고 나와 살면 어떻소 하~ 하~ 하~ "
" 무엄한 말씀이요 관세음보살 "
" 술 맛 떨어지게 놀지 말고 자 한잔 따르시오 "
갖가지 수작들을 부리는 그들의 손에서 빠져 나가기 영 틀렸다고 생각한 황진이는 할 수 없이 술병을 들었다.
잔을 내민 땅딸보 사나이에게 술을 따라주니 그는 한숨에 술을 들이켜서
" 엉 그 술맛좋다. 스님이 따르는 술이 이렇게 맛있는 지는 진즉 몰랐는데..."
하며 능청을 따랐다. 이윽고 황진이가 입을 떼었다.
" 이제 소승은 물러갈까 하옵니다 "
" 그게 무슨 말이요 천하의 절색이 가버리면 흥이 깨어질 터인데 될 말이오 ?"
그러면서 황진이의 손목을 잡아끌어 껴안으려 하자 기생 하나가 두 사람을 떼어 놓으면서 가운데로 파고 앉았다.
" 서방님 그만 하세요 부처님한테 벌 받아요 "
" 네년은 저리 좀 가있어! 난 오늘 이 스님하고 만리장성을 쌓아야 겠다 "
이때 황진이는 물러앉으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 그대들의 우매함을 보니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요"
" 뭐! 이 건방진 중년이!"
" 그대들이 하는 짓은 인간이 오육이 빚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 오육을 채운 다음에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무입니다. "
" 그러나 현세에 맺은 업보라는 것은 내세에 가서는 영원한 것입니다. "
" 그대들이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법을 더럽히려 함은 곧 그대들의 내세를 더럽히는 것이니
자기를 아끼는 마음으로 남을 아낄줄 알아야 합니다."
도도히 흐르는 어조로 황진이는 설법을 계속 하였다.
좌중의 사람들은 말을 잊고서 멍하니 듣고 있었다.
그중에 기생 하나는 두볼에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 소승은 본시 송도에서 살던 황진이라는 기생이옵니다."
" 어느 때에 깨닫음이 있어서 불가에 귀의 하였사온데
소승도 사바에 있을때에 지은 업으로 고행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황진이의 말이 끝나자 모든 사람들은 놀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였다.
눈물을 흘리며 황진이의 말을 듣고 있던 기생이
"소녀가 스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제 이세상을 살기가 부끄러워 졌습니다.
안녕히들 계십시오"라고 하고는 순식간에 절벽아래로 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부터 남한산성 동문 근처에 있는 송암정에서는 달 밝고 고요한 밤에는
어김없이 남녀들의 노랫소리와 여인네의 통곡소리가 들려왔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