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7-39장을 보면, 요셉을 이집트에 판 사람들이 이스마엘 상인들인지 미디안 상인들인지 혼동이 된다.
37장 내용중엔 분명 미디안 사람들이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요셉을 이미 팔았는데,
37장 마지막 절엔 다시 미디안 사람들이 요셉을 이집트에 판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성서가 구전되면서 혼동이 왔을 거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스베덴보리 저서에는 이 외관상의 혼란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다.
속뜻의 상응 때문에 그렇게 기록된 것이라는 것.
우선, 미디안 상인이 이스마엘 상인에게 요셉을 파는 장면에 대한 해설이다:
"이스마엘은 단순무지한 선 위주인 사람들을 의미하고 미디안은 그 단순한 선에 결부된 진리를 위주로 하는 사람들를 의미한다.
요셉은 신적 진리를 상징하는데, 신적 진리는 선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팔릴 수 없고, 오직 그런 선에 결부된 진리를 위주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팔릴 수 있다. 이 문장에서 '판다'는 것은 (한쪽으로부터) 격리(소외)함과, (다른쪽으로부터) 받아들여짐을 상징한다.
여기서 미디안족이 요셉을 요셉의 형제들로부터 분리해 이스마엘족에게 판다는 것은 신적 진리가 인애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여기선 요셉의 형제들로 상징됨)로부터 소외되어 단순한 선을 위주로 사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한다." (천비 4756-4759 요약 )
* 신적 진리는 이웃사랑 없이 믿음만을 지닌 사람들로부터는 소외되고 오히려 단순한 선을 위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원리를 말하고 있다.
** 신적 진리를 '오직 믿음' 교리에서 격리해내고 분간하는 작업은, 단순하고 착한 사람들에 의해서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아직 단순한 차원이나마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인 듯하다. 그러나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선을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크게 보면 누구나 자기 안에 요셉도 미디안도 이스마엘도 있고 이집트도 있다. 동시에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단계적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주님의 진리는 각자 안에 있는 진리 추구심으로 분별하고 선한 바탕으로 받아들인다...라고 결론 지어본다.
*** 이집트 보디발에게 요셉을 판 상인들이 37장엔 미디안이었다가 39장엔 이스마엘로 다르게 기록된 부분도 더 살펴볼 일.
첫댓글 어느 회원님의 질문: "단순무지한 선이 분별력 없이 착하기만 한 것 외에 또 어떤 상태를 말하나요?"
여기서 단순무지하다는 것은 사고가 단순하고 진리를 모르는 상태라고 짐작됩니다.
그런 상태이지만 심성이 착하고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simple good'이라고 일컫는 게 아닐까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저는 불과 몇 세대 전까지만 해도 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여성이라 글을 못 배우셨지만 인자하고 정 많으셨던 우리네 할머님들 이야기도 생각 나구요...
요즘 시대에는 단순한 선이 드물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외관상 혼란이 성서에 나타날 때 이는
a. 성서가 구전되면서 혼동이 와서이다? 아님.
b. 속뜻의 상응 때문이다.
신적 진리는
a. 무엇으로 분별하는가 : 각 사람 안에 있는 진리 추구심으로 분별한다.
b. 무엇으로 받아들이는가 : 선한 바탕으로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