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학제도 개혁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한국의 대학제도를 어느 나라의 것을 모델로 하여 바꿀 것인지가 중요한 관심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워낙 미국의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을 받고 살다 보니 이제는 교육제도까지 미국식으로 해야지만 잘된다는 맹목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한국 대학생들이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고시공부나 다른 것을 하는 풍토를 비판하면서 미국식의 시장주의 교육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경우는 흔히 서울대의 서열이 국제적으로 100위 밖에 든다, 혹은 서울대와 미국의 하버드 대학의 면학풍토와 도덕성을 비교하면서 전자가 훨씬 저급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나라 대학의 저급한 상태가 독일 (대학)문화의 잔재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필자의 경험과 연구에 의하면 교육의 국가주의를- 모든 교육기관이 국립, 모든 교수, 교사는 공무원 - 실시하는 독일이나 북구 제국의 경우 대학생들의 면학풍토가 미국의 일류대학 못지않게 강렬하다는 것이다.
이는 반드시 시장주의적으로 대학을 운영해야지만 학생이나 교수들이 열심히 공부한다는 편견에 대한 반대 사례가 될 것이다.
대학이나 모든 교육기관을 국가에서 관장한다고 해도 거기서 얼마든지 경쟁이 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정말 국제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독일의 교육제도가 한국에서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대학들이 워낙 국제적으로 강력한 이유는 그 나라의 경제력 때문이다. 교육과 경제의 인과관계 혹은 상호관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어렵다. 다시 말해서 교육이 경제를 살리는지 아니면 반대로 경제가 교육을 살리는지 서로 분간할 필요가 있다. 즉 교육이 먼저냐 경제가 먼저냐 하는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국의 명분대나 일류고등학교를 척도로 해서 한국의 학교들의 열악성을 노출한다는 것은 일리가 없다. 학교간의 단순비교보다는 경제-교육 구조의 인식이 선행한다. 그렇다고 필자가 한국 교육의 모순을 은폐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돈으로 대학의 담장이 쌓인 미국 대학의 교육적 우수성을 볼 때 그 금고(金庫)를 같이 보라는 것이다.
‘하버드 대학 하나의 재산은 영국의 전체 대학의 재산과 맞먹는다’ 라는 보도가 있었다. 그 정도의 예산이 있으면 한국의 대학들도 하버드와 같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따라서 현재 세계 각국의 대학이나 교육의 수준 비교는 사실 국가 간의 경제력 비교와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미국의 우수한 학교를 잣대로 한국의 대학을 재단하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필자는 독일의 대학제도가 한국의 실정에 맞다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 대학의 온갖 무능과 비효율, 비도덕성 등은 누군가 말한 것처럼 한국의 교육제도, 대학제도가 형식은 미국식이나 내용은 독일식이기 때문이다. 즉 형식과 내용의 불일치가 현금의 무서운 교육비리와 교육 부실을 초래한 것이다. 따라서 개선의 방향은 그 형식마저 독일식 내지 대륙식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독일 교수들의 학문적, 교육적 성실성
대륙식(독일식) 대학제도가 한국의 현실에 맞기는 하지만 문제는 모든 대학교를 국립으로 할 때 대학사회의 관료화와 경직화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 경제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공기업의 특징은 그 조직 속에 경쟁이 적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발 빠른 대응과 발전이 더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대륙식의 공교육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북미식의 교육정책을 가미하여 교육의 자발적인 질적 향상도 함께 추구해 나가야 하겠다. 예를 들어 학교별로 경쟁우위를 차지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더 많은 교육비 배당정책과 기업의 대학에 대한 투자를 장려하여 학교 간 경쟁을 유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더 인식해야 할 것은 대학 발전을 위해 전체 대학조직을 꼭 가장 중요한 행정단위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대학교육의주체인 교수들의 업적을 잘 관리하면서도 교수 간의, 학과 간의 경쟁이 얼마나 발생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그 직급이 거의 호봉수와 일치하는 한국의 대학과는 달리 독일 대학의 경우 교수 간의 서열은 철저히 실력 위주로 결정된다 : 독일에는 C2, C3, C4 등의 교수 직급이 있는데 C4는 정교수 혹은 영미권의 경우 석좌 교수라고 할 수 있다. C3는 대학교수라고 불리어 지며 C2는 전문대학 교수를 말한다 (그런데 독일의 전문대학은 한국과 달리 석사 학위를 수여한다). ‘오르디나리우스(Ordinarius)’라고 불리는 C4교수와 대학교수 C3교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C4교수들은 보통 연구소의 감독직(Direktor)을 맡으면서 그 밑에 비서 둘과 조교 몇 명을 거느리게 된다. 그리고 봉급의 차이도 많다. 예전에 독일 대학교에는 이런 속담이 있었다 : “도시보다 대학이 강하고 대학보다 (한)교수가 강하다”. 이 말은 대학 교육과 학생지도 문제에 있어서 대학이라는 조직 혹은 교육청이라는 상위 관청 보다 더 영향력이 있는 것은 학생을 직접 지도하는 책임을 맡은 평교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좀 바뀌었지만 학생지도에 있어서 어떤 대학규정보다도 ‘교수아버지’(Doktorvater)라고 불리는 지도 교수 한사람의 결정이 더 우선권을 가진다. 한국에서는 대학 교무과니 교학과니 행정본부니 하는 행정부서가 개별 교수들보다 우위에 있지만 독일에서는 모든 대학 업무의 중심에 교수의 학생지도가 있다.
따라서 독일식으로 대학을 운영할 경우, 대학조직을 하나의 독립적 회사 법인체로 보는 영미식과 달리, 대학은 기본적으로 대학교수들의 모임이라는 다소 느슨한 조직이 된다. 그러므로 대학간의 경쟁 문제에 대한 나의 답변은 우선 대학의 기본 틀을 전체 대학조직보다 개별 교수들의 능력과 업적에 둠으로써 대학간의 경쟁이 아니라 교수들 간의 경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개별 교수의 경쟁력, 그 다음은 그가 속한 학과의 경쟁력, 그리고 연구소의 경쟁력 마지막으로 대학 자체의 경쟁력이 발생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한 문제보다 어느 교수 밑에서 공부했느냐 혹은 어떤 연구소에서 연구했느냐하는 것이 독일에서는 더 중요한 문제이다. 따라서 같은 박사학위를 하더라도 그 전공분야에 따라 논문의 사회적 평가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헤겔 철학 연구로 유명한 교수 밑에서도 칸트철학 연구로 학위를 딸 수 있다. 필자의 쾰른 대학의 지도교수였던 뒤징(K. Duesing) 교수는 독일 철학계에서 헤겔의 초기철학에서 혁혁한 공적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도 원래는 뒤징 밑에서 헤겔 철학 연구를 하려고 했으나 이 분이 워낙 깐깐해서 결국 부퍼탈의 바움(M. Baum) 교수에게로 지도교수를 옮겼다. 그런데 뒤징 교수는 동양인 유학생들이나 독일 학생들에게 헤겔 이외의 분야에 대해서는 박사학위를 비교적 쉽게 주었다. 그러나 헤겔 철학의 경우 아직 아무도 학위를 받지 못했었다. 심지어는 독일인 학생들도 그에게서 박사를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필자는 그에게 머물러 있어봐야 승산이 없겠다는 판단을 했고 그래서 부퍼탈의 바움(M. Baum) 교수에게로 날아 갔다. 거기서 그런 사정을 모르는 많은 동양인 유학생들이 피눈물을 흘렸다 : 예를 들어 일본 동경대 출신 ‘타다’라는 학생은 16년이나 뒤징 밑에서 노력했지만 학위를 하지 못했다. 필자의 쾰른 대학 동기들도 마찬 가지였다.
한국에서는 이런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예를 들어 칸트 전문 교수 밑에서 칸트 연구를 하여 어렵게 학위를 한 사람과 비(非)칸트 전문 철학 교수 밑에서 칸트 연구를 하여 쉽게 학위를 한 박사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후자처럼 학위를 한 사람은 앞으로 대학에서 교수되기가 극히 어렵습니다. 따라서 독일 학생들은 그들이 학계에 진출하여 교수가 되기를 원한다면 사계의 유명한 교수를 찾아가 반드시 그 분야의 학위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계의 대가라고 할지라도 그는 똑 그 분야에서만 학생을 지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칸트 철학은 독일에서 기본적인 학과이므로 거의 모든 철학 교수들이 칸트를 알고 따라서 그 분야에서 학생을 지도할 수 있다.
한 때 하이데거 철학을 전문으로 하는 독일 교수가 칸트철학을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박사학위를 대거 수여한 일이 있었다. 따라서 독일 대학 학위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지도교수의 전문 분야와 일치하는 연구를 하여 거기서 학위를 하는 것다. 자랑 같지만 독일 대학교육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하여 필자의 경우를 잠시 소개하겠다.
필자는 독일 부퍼탈(Wuppertal) 대학교를 졸업했고 지도교수는 바움(M. Baum) 교수입니다. 이 교수는 칸트와 헤겔 두 가지 철학에 모두 능통한 학자이다. 그는 현재 독일 칸트 협회의 제 1회장 직을 맡고 있으며 또한 헤겔 연구에도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런데서 헤겔이나 칸트를 한다는 것은 극히 모험적인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야에 있어서의 그 분의 명성 때문에 그의 제자가 시시한 논문을 내놓았다가는 지도 교수의 명성에 오명을 남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가 헤겔 논문을 교정해 달라고 바움 교수에게 맡겼더니 그는 “안씨, 우리 모험을 감행합시다(Herr Ahn, riskieren wir )” 라고 말 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움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독일 헤겔 철학의 전문가이다. 그런데 그의 박사아들(Doktersohn)이 세상에 내어 놓는 논문에 하자가 있다고 알려지면 바움 교수의 지금까지 쌓은 명성은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모든 제자의 박사학위 논문은 기존의 학설에다 그 사람의 고유한 새로운 이론이 첨가된 것이기 때문에 학계에서 꼭 그대로 인정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지도 교수가 철저히 지도, 감독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이론에는 어떤 허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바움 교수는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받아 주면서 “우리 모험을 하자”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자의 논문에 대한 평가는 그대로 스승의 명예와 직결된다. 따라서 독일에서 지도교수(박사아버지)와 박사과정 학생(박사아들)은 공동의 운명체이다. 즉 아들의 영예는 아버지의 영예이고 아버지의 영예는 아들의 영예이다.
이런 정도로 독일 대학의 교수들은 그들의 논문 한편 그리고 그 제자가 쓴 논문까지 철저한 신경을 쓴다. 논문 한편에 목숨을 건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다.
3. 독일 대학생들의 필사적인 노력
독일 대학에서 교수뿐만 아니라 학생들도 그들의 전공 학업을 위해서 사력을 다한다고 본다. 이는 독일 대학의 학사과정이 우리나라 대학처럼 한번 입학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졸업하는 곳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독일 대학의 학업이 얼마나 엄하고 강한지는 우선 거의 모든 대학마다 심리 상담소가 있고 거기서는 학업과 시험 부담 때문에 각종 질병과 노이로제로 고민하여 방문하는 대학생들이 부지기수라는 사실만 언급하자.
필자가 직접 목격한 경우는 다음과 같다 : 한 여학생이 거의 1년간 독일의 모든 지역의 양로원을 방문하여 양로원 노인들의 음식과 영양 상태를 조사하여 리포트를 작성했다. 그런데 그녀의 지도교수(석사)는 그녀의 리포트를 보더니 칭찬이 아니라 비판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쳤다. 이는 필자가 직접 목격했다. 그 외에도 공부 때문에 정신이상에 걸리는 학생들이 많다.
이는 독일 대학에 입학시험이 없고 대학입학자격시험을- 아비투어- 보고 거의 자유롭게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는- 입시지옥이 없는 대학에서도 어떻게 학사관리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주장하는 교육의 국가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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