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백제의 불교(384~676)
백제(百濟)에 불교가 도입된 시기는 고구려보다 12년 늦은 384년(침류왕枕流王 1년)에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중국 동진(東晋: 317~420)으로부터 서해(西海)를 건너 전남 영광의 법성포(法聖浦)로 들어와 불교를 도입한 공식적인 기록이 있다. 즉위한 원년 9월에 중국 동진에서 백제로 건너온 마라난타는 침류왕의 배려로 궁중에 머물렀다.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궁중에 머물게 하고 예로써 공경을 다 하는가 하면 마라난타가 부처님 진리의 말씀 법문을 전하게 하는 법석(法席)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마라난타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몰려들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는데 이로 유추(類推)해 보건대 백제에도 이미 민중불교가 전파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삼국유산 기록에는 침류왕은 이듬해인 385년 백제의 수도 한산주(한성:서울 송파구 가락동, 방이동, 오륜동)에 있는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에 절을 지어서 승려 10인을 출가시킬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다고 한다. 현재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 등 백제 유적에서 불교 관련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는 등 한성시대에 백제에 불교가 전해 내려왔다는 것 자체는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마라난타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사찰은 호남지방에 많이 산재하고 있는데 불갑사(영광군) 불지사(군산) 불회사(나주)에도 전해오고 있다. 영광군은 불교계의 협조로 1996년 백제불교 최초의 전래지로 법성포를 인정하고 마라난타가 도착한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마라난타사와 간다라 유물관을 조성하여 기념하고 있다. 백제불교의 전성기는 백제의 국력 전성기인 26대 성왕(聖王:523~554)이다. 인도를 유학한 526년 겸익(謙益)이 산스크리트 본의 율장(律藏)을 가지고 귀국하자 당시 백제의 최고 고승들과 함께 겸익을 도와 번역하고 주석서를 마련하고 그 중 율부 72권의 서문은 성왕 자신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겸익의 인도 유학은 계율의 필요성을 인지한 성왕의 지시로 이루어졌다는 기록도 전해온다. 성왕은 일체중생의 해탈을 기원하는 장육불상(丈六佛像)을 545년(성왕 23)에 조성 모든 중생이 다 함께 해탈하기를 서원했다. 성왕의 불교에 대한 공덕은 552년(성왕 30) 일본에 불교를 전파함에 있다. 오늘날 국민의 90%가 불교를 신앙하는 불교국가 일본의 연원지(淵源地)가 성왕이자 백제인 것이다. 일본 불교는 백제불교의 영향 속에서 성장했다. 백제의 승려와 재가불자(예술가, 기능공)들이 일본 불교(아스카)문화에 크게 이바지했기 때문이다. 백제불교는 성왕의 서원대로 계율에 바탕을 둔 민간불교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599년(법왕 1) 살생을 금지하고 방생(放生)을 장려하는 제도를 도입하여 고기 잡고 사냥하는 살생 도구들을 불태우고 모두를 폐기하는 등 불교를 생활화하였다. 무왕(600~641)은 익산 미륵사를 창건하고 현존하는 미륵사지 대탑을 조성하기도 했는데 백제불교는 왕실이 주도하는 왕실에 의한 민중과 함께하는 민중불교로 발전하였으며 백제에는 승려들과 사탑들이 많았다.라는 기록들이 중국 문헌(주서이역서)에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출가 불교 또한 성행했음을 추정할 수가 있다. 그러나 미륵사 같은 대형불사를 위주로한 형식적 사원건립과 엄격한 계율을 강조하는 계율이 부메랑이 되어 오히려 백제불교를 약화(弱化)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백제불교의 약화는 국력 약화로 연결되고 패망으로 연결되었다고 보아야한다.
5 백제불교의 특징
백제불교의 특징은 왕실에 의한 민중불교, 불교문화 도입을 계기로 불교문화를 정착화하고 발전시켜 온 예술 불교, 불교 도입을 국익에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외국과의 교류에 활용함으로 외교 불교라고 칭할 수 있다. 백제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면서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들이 사회 통합을 위한 도구로 불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이를 전법(傳法) 방편으로 내세웠다. 백제는 고대사회의 토속신앙 등 다양한 신앙에 빠진 백성들을 하나의 사상으로 묶어 나라의 힘을 키우고자 했고, 불교 신앙은 이런 목적을 이루는 데 알맞았다. 백제불교는 계율을 우선하는 계율불교로 출발했다. 인도로 유학한 겸익(謙益)이 526년(성왕 4년) 인도 상가나대률사(常伽那大律寺)에서 범어(梵語 산스크리트어)와 율부(律部)를 수학하고 531년(성왕 9년) 아비담장(阿毘曇藏)과 오부율(五部律)을 가져옴으로 백제 계율불교의 시발점이 되었다. 또한 겸익은 흥륜사(興輪寺)에 주석하면서 이름난 고승(高僧) 28명과 함께 율부 72권을 번역하여 명실상부한 계율불교의 토대를 마련했다. 당시 중국에서도 번역되지 못한 오부율 중 음광부(飮光部)를 겸익이 인도에서 직접 가져온 범어 율부로 번역을 했다는 것은 백제불교의 우수성을 증명하고 있다. 겸익에 의해 율종(律宗) 시기는 526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중국보다 1세기 앞선다. 중국 율종의 출발은 도선(道宣 당나라: 596~667)이 법장부(法藏部)의 사분율(四分律)을 저술하고 강설한 624년이다. 백제는 불교를 통하여 외교 역량을 키워나갔다. 불교를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국력 신장에 매진한 군주는 성왕이다. 성왕은 불교를 온 백성들이 믿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했을 뿐 아니라 불교 포교를 이용하여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에 나섰다. 불교를 통한 왕권 강화는 불교문화의 개화(開化)기가 형성되고 백제 국력의 황금기로도 연결되어 국토확장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런 과정에서 성왕은 중국 남조(南朝)와 신라와 고구려와의 외교를 통한 동맹을 맺기도 하고 때론 신라와 고구려와의 전쟁도 불사했다. 그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일본과의 불교를 통한 교류는 일본 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성왕은 발전된 백제의 불교문화를 일본에 전해줌으로써 고대 일본문화에 특별한 발자취를 남겼다. 성왕은 552년(왕 30)에 처음으로 불경(佛經)과 함께 승려들을 일본에 파견했다. 이는 일본에 불교를 전달함으로써 일본에 불교의 종자(種子)를 제공했다. 성왕이 제공한 씨앗이 배양된 것이 일본 불교이다. 백제는 557년(威德王 24) 고승(高僧)들과 불상을 조성하는 불모(佛母)와 사찰건축을 전문으로 하는 불공(佛工)들을 파견하여 불사(佛事)를 지원하고 일본 불교를 양성해 왔다. 위덕왕은 583년(왕 30)에는 일왕(日王)의 요청으로 승려 일라(日羅)를 파견하는 등 일본 불교 정착화를 위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일라는 일본에 관음(觀音)신앙을 크게 진작시켰다. 602년(무왕 3년)에는 삼론에 정통한 관륵(觀勒)이 천문(天文)과 지리(地理)에 관한 서적과 역서(曆書) 등을 가지고 가서 일본 민중들을 교화하기도 했다. 관력은 일본 최초의 승정(僧正)이 되었다. 관력은 일본 의학(醫學)의 시조(始祖)로도 추앙되고 있다. 이때 형성된 문화가 아스카 문화이다. 일본문화의 황금기로 전해오는 아스카 문화(飛鳥 文化 538~710)는 백제에서 건너간 혜지(惠彌) 의각(惠彌) 도장(道藏) 도녕(道寧) 다상(多常) 원각(願覺) 원세(圓勢) 방제(放濟)등 백제 승려들이 고대 일본 사회에 이루어낸 찬란한 문화유산이다. 아스카 문화는 다양한 국제성을 나타내고 있다. 아스카 문화는 불교문화이면서도 그 속을 살펴보면 유교문화와 도교 문화 등 다양한 동양 사상과 문화들이 나타나고 있어 신라 고구려 중국 남북조 등 많은 나라와 다양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백제의 영향으로 이루어낸 최초의 불교문화로 보아야 한다. 백제불교는 왕권이 중심된 민중불교로 발전되고 찬란한 불교문화를 창조하고 이를 외교활동을 통하여 외국에 전수한 것이다. 또한 백제불교는 계율 중심의 계율불교로 계승되었다는 특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