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연약한 사람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만큼 사랑을 강조하면서 교회만큼이나 빈번하게 갈등하고 분열하는 곳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유명한 왕,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고, 심지어는 하나님께 버림받기까지 했던 사울에 대해서도 신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원수지간이었는데도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성경을 읽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기독교 사회는 그런 신의를 보여주지 못합니다. 특히 교리적인 차이점을 발견하면 쉽게 싸우고 분열합니다. 교리적인 차이는 분열의 이유가 됩니까?
교회에는 다양한 수준의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모여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수준의 차이와 다름이 있습니다.(1) 이런 견해의 차이들은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이라고 사도는 교훈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믿음의 약함을 죄가 아니라 연약함(아스떼네오)이라고 표현합니다. 믿음에는 큰 믿음도 있고 겨자씨만한 연약한 믿음도 있습니다. 믿음의 연약함을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다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지식의 양이 다르고 이해의 깊이도 다릅니다. 이해의 차이로 말미암아 서로 자신이 옳고 상대가 오류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로마서를 기록했던 당시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
이렇게 서로 다툴 만큼 다름을 느낄지라도 사도 바울은 그들이 피차 한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한 형제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모두가 생각이 일치하면 좋겠지만 성경은 견해의 차이가 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우리의 현실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는 늘 다름이 있습니다. 견해의 차이로 인해 서로를 비판하게 되지만, 서로 견해가 다르다는 사실보다 더 큰 것은 한 하나님이 이들을 불러 모으셨다는 것입니다.
(3)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살아간다고 해서 모든 사람의 생각이 똑같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생각의 차이 때문에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하나님이 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안식일을 다른 날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구약의 안식일이 토요일이므로 우리도 토요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어느 하루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날이 다 같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생각이 다르고 성경의 해석이 다를지라도 이들은 모두 한분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맡겨야
논리적으로 말해서 어느 한 견해가 옳다면 다른 견해는 틀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런 차이들 때문에 옳고 그름을 따져 상대가 오류이며 이단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을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그 누구도 최후의 판결이라고 할만큼 완전한 지혜를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파나 위대한 학자라도 불완전하고 오류에서 자유롭지 못한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판결은 하나님의 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날까지는 서로 판단하고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한다는 말과 업신여긴다는 말은 한 문맥 안에서 나란히 사용됩니다.(3) 그러므로 비판한다는 말은 상대방에 대해 최종적인 판결을 내리는 것이며 거기에는 상대방의 오류에 대한 멸시 무시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가 믿음이 연약한 이들의 부족한 이해와 오류를 최종적인 판결인 것처럼 정죄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피해야 할 잘못된 태도입니다.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이해가 서로 다르지만 비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서로 생각이 다르고 부족해 보일지라도 부족한 그대로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류가 있을지라도 살든지 죽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것이 존중받아야 할 점입니다. 성경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이유로 그들이 하는 모든 선한 일들을 비난하고 업신여기는 일은 책망 받을 일입니다.
(5)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하나님을 위해서 저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고 이해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것은 믿음의 연약함이지 죄는 아닙니다. 오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판단을 내리고 업신여길 일이 아닙니다.
(10)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하나님은 우리들 사이에 있는 생각의 차이점과 오류들에 대해서 우리가 서로 판단하고 비난하고 업신여기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십니다. 왜냐하면 오류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종이며 오류가 있는 채로 그를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친히 부르신 연약한 종들이 비판받는 것에 대해 불쾌하게 생각하십니다. 비판할 것이 있다면 장차 하나님께서 친히 판단하실 것입니다. 제각각 자신이 이해하고 믿는 만큼 부지런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견해가 다른 사람을 존중하기
우리가 고민해야 할 부분은 각자가 서있는 그 자리에서 깨달은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일입니다.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 수준이라도 비난받을 일은 아닙니다. 아이는 아이의 자리에서 많이 아는 지도자는 그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록 자신과 견해가 다를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다면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자칫 그를 택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대적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의 경험으로, 상대의 견해가 틀렸다고 생각이 되면 우리는 상대를 무시합니다. 그리고 권력이 주어지면 그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과 견해가 다른 무리들에게 불이익을 주려고 합니다.
(13)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안식일을 주일로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생각을 따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도록 가만히 놔두십시오. 만일 성경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가 옳다고 믿는다면 말만 할 것이 아니라 행실을 보이십시오. 누구의 견해가 옳은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믿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류가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도록 미루어 두십시오.
삼위일체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 믿음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 거기에 오류가 있을지라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형제를 비판하거나 넘어지도록 훼방하거나 할 일이 아닙니다. 믿음이 연약한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잘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이해의 폭이 다르고 깊이가 다르고 그래서 오류가 있다는 것은 죄가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근본적으로 우리의 지식을 불완전하게 하셨고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만 알게 하셨고 희미하게만 알도록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견해가 다르다고 서로 비판하지 마십시오. 믿음이 연약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한다면 업신여기지 말고 장애물을 놓지 마십시오.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사탄과 논쟁하면서도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라며 판결을 하나님께 맡긴 것처럼(유다서 1:9) 우리도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이 연약한 이들을 비방하지 맙시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택하여 부르신 이들입니다. 자신의 견해가 옳다면 부지런히 행함으로 믿음을 보입시다. 아멘
첫댓글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