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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사에 길이 빛날
삼산리 전투
양평은 의향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인 의(義)를 매우 중요한 덕목임을 배운 유생(儒生)들이 중심이 되어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일이야 말로 백성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도리라 여겨 양평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을미의병을 일으키고 참여하였고 후일 후기의병 등 항일의병전쟁을 주도하거나 참여했기 때문에 양평을 의향(義鄕)이라 한다.
그러나 의나 의사상(義思想)은 조선건국이후 수 백 년 동안 지속된 숭유(崇儒)사상 아래 삶을 영위해온 백성 모두의 의식속에 녹아든 것이지 결코 양평사람들만의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양평 또는 양평인들이 주축이 된 의병전쟁의 밑바탕에는 잠재해 있는 투철한 의사상을 일깨워 발현하게 한 그 어떤 조건이 있었던 것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정신적인 조건으로써 화서 이항로에 의하여 정립되고 양평인들의 의식속에 뿌리 깊게 박혀있던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들 수 있다.
그 밖의 조건들로는 양평의 지리적 조건을 들 수 있다. 지리적 조건은 두 개로 하나는 교통이며 다른 하나는 지세(地勢)와 지형(地形)이다. 교통은 다시 수로와 육로로 나눌 수 있다. 남한강이 흐르는 양평에는 나루터가 많았고, 서울과 평해를 잇는 평해로(平海路;조선시대에 서울에서 당시 강원도 평해를 잇는 약1000리 길로 ‘관동대로’라고도 한다)가 양평지역을 관통하고 있고, 홍천, 횡성 등으로 갈라지는 분기로(分岐路)가 연결되어 수륙을 합한 교통의 요지였다. 특히 뱃길과 육로가 만나는 갈산근처 양근나루나 두물머리는 시국은 물론 시중의 모든 정보가 교류되는 곳이었다. 일제침탈과 국가의 존망 등 정보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평해로는 후기의병인 정미의병 전쟁 때 강원과 충청, 그리고 여주,양평 등의 의병들이 서울진격을 위한 집결지인 양주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임진왜란 때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충주를 거쳐 단 20여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을 때는 남한강을 통해 서울을 공격하면서 양평을 지나며 분탕질을 해댄 곳이었음으로 민중의 가슴속에 항일의식이 어느 지방보다 잠재해 있었던 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지세와 지형은 의병전쟁에 큰 영향을 끼친다. 양평은 웅반고대(雄盤高大)한 용문산이 있어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하기에 알맞은 지형과 지세를 갖췄다. 실제로 후기 의병인 정미의병전쟁 때 권득수, 조인환 의병대장은 용문산을 근거지로 삼아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쳐 큰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지형과 지세는 물론 서울이 한나절 안으로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조건은 의병을 소모(召募)하고 주둔(駐屯)시키기에도 적합했다.
이러한 조건들로 양평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참여했고, 의병전쟁을 치룰 수밖에 없었는데도 그 횟수와 규모, 전과나 피해상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제대로 된 기록도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다만, 항일독립운동사(抗日獨立運動史)나 항일의병사(抗日義兵史)에서 권득수, 조인환의병부대의 의병전쟁과 삼산리전투 등은 양평지역 의병전쟁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단편적으로 나마 평가받고 있음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그 중에서도 삼산리전투는 의병 5천 여 명을 상대로 한 일본군의 대규모 소탕작전에 따라 일어난 전투였음에도 의병의 피해가 적어 이인영 의병장이 주도한 13도창의군의 서울탈환을 목표로 진공작전을 수행하기위한 준비에 지장을 끼치지 않은 의미 깊은 전투였다. 만일 양동면에 주둔한 의병진이 삼산리전투에서 패하여 주저앉고 말았다면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의병전쟁이나 후일 독립운동의 큰 맥이 끊어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상당한 평가를 받아야 할 양평의병에 대하여 중부지역 또는 경기지역 의병의 일부로 서술되는 등 역사학계의 관심이 소홀했고, 삼산리전투도 마찬가지여서 1996년 양평문화원이 발행한 향맥 제6집 『양평의병운동사(楊平義兵運動史,장삼현(張三鉉)』에 짤막하게나마 언급되기 시작한 이후 양평군이 2000년에 발행한 『양평의향지(楊平義鄕志)』에 조금 더 자세히 수록되긴 했으나 내용이 완전하지 못하며, 2004년 김상기의 논문 「한말 양평에서의 의병항쟁과 의병장」,『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1권 「한말의 후기의병」,홍영기,독립기념관』 등에도 기술되었으나 내용이 단편적이다. 이 밖에 다른 문헌에도 원주의 민긍호의병장이 이 전투에도 참가했다는 정도가 기술되어 있어 대체적으로 내용이 부실한 편이다. 따라서 삼산리전투의 전말과 의미를 재조명해보고 역사학계 등의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며, 정확하고 사실에 부합한 정립과 평가를 통하여 양평사람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후대에 기록으로 전하여야 한다. 이 글은 삼산리전투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진 사실과 위에 열거한 책의 내용에 필자가 조사한 자료를 참고로 하여 기술하였다.
정미의병과 서울진공작전
1907년(丁未)에 봉기한 정미의병〔丁未義兵,‘후기의병’ 또는 ‘제3차(기)의병’이라고도 함〕은 7월19일 고종의 강제퇴위와 7월 24일의 정미7조약의 체결, 그리고 8월 1일의 군대해산으로 국권방위(國權防衛)를 목적으로 일어난 의병전쟁이었다. 그해 8월 해산군(解散軍)인 원주진위대가 특무정교였던 민긍호(閔肯鎬)가 창의함으로써 정미의병의 선도적 역할을 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이강년(李康秊)이 제천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민긍호 의병부대와 함께 강원·충청·경상·경기일원에서 기세를 떨쳤다. 또한 이 무렵 경기도 임진강 유역에서 활동하던 허위(許蔿) 의병부대와 이인영의병부대 등 여러 의진이 연합하는 등 전국 각지의 의병 부대는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이인영(李麟榮,1867~1909)을 총대장으로, 허위를 군사장으로 추대하였다. 전국에서 모인 의병 1만여 명은 교통이 편리한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허위가 이끄는 300명의 선발대가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했으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패배하여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하고 말았다.
영천의 정환직·정용기 부자의 의병부대는 청송에서, 호남의 김동신(金東臣)·고광순은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을 넘나들며, 진안·용담에서는 이석용(李錫庸)부대가 전라도와 충청도 접경지대에서, 을사의병 때 봉기 했다가 실패한 기삼연(奇參衍)이 김태원(金泰元)·김용구(金容球)와 함께 고창·장성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 외에도 호남의병의 지주였던 기삼연이 체포되자 전수용(全垂鏞)이 호남의병을 주도하여 광주·나주에서, 심남일(沈南一)부대가 남평·능주·장흥 지역에서, 안규홍(安圭洪)부대가 보성·순천에서, 황해도에서 박기섭(朴箕燮)이, 함경도 삼수·갑산에서 홍범도(洪範圖)·차도선(車道善)이, 연해주에서 조직된 이범윤(李範允)부대가 국내로 진입하여 항쟁하였다. 일본의 1909년 하반기 전라도지방의병토벌작전인 남한대토벌작전과 1911년의 황해도토벌로 큰 기세는 꺾였으나 전국 각지에서 1914년까지 피의 항쟁을 계속하므로써 정미의병은 전국적이었고 치열했으며 조직화되고 장기적이던 의병전쟁이었다.
의병대장 이인영이 주둔지로 택한 양동면은 13도창의군의 창설지
평해로는 조선시대의 10대로(十大路) 중 서울의 홍인지문에서 강원도 평해(平海,지금은 경상북도)에 이르는 3대로(三大路)로 거리는 1천 여리에 이르는데, 옛 지명으로 보면 ‘흥인문(興仁門)-중량포(中梁浦)-망우리현(忘憂里峴)-왕산탄(王山灘)-평구역(平邱驛)-봉안역(奉安驛)-용진(龍津)-월계(月溪)-덕곡(德谷)-양근(楊根)-백현(柏峴)-흑천점(黑川店)-지평(砥平)-전양현(前楊峴)-송치(松峙)-안창역(安昌驛)’이 서울과 경기도의 구간이다. 즉, 용진에서 송치까지가 양평 땅이고 송치를 넘으면 강원도다. 고개 이름에 ‘치(峙)’가 붙은 곳은 ‘현(峴)’을 붙이는 고개보다 험하다는 뜻인데 위 경로에는 빠져있지만 양평 땅에서 ‘치(峙)’자가 붙은 평해로의 첫 번째 고개는 구둔치(九屯峙)이고, 마지막 고개는 송치이다. 구둔치를 넘어 송치에 이르기까지가 상동면(上東面,지금의 양동면, 앞으로는 ‘양동면’이라 한다)구간이다.
양동면은 평해로상에 위치한 지역으로 높은 산줄기가 에워싼 산악지대가 많은 분지형(盆地形)의 지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서쪽으로 여주와 동쪽으로 횡성과 남쪽으로 원주와 접해있고 양평, 여주, 원주. 횡성. 홍천과의 거리가 비슷한 반면 서울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하루면 이동이 가능한 특징도 가지고 있다. 인근지역으로부터의 의병소모와 주둔이 용이하며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서울이나 양평방면에서 처 들어오는 적은 구둔치에서, 원주방면에서 처 들어 오는 적은 송치에서 막음으로써 시간을 지체할 수 있고, 반격과 대피도 손쉬울 뿐 아니라 서울이 가까우면서도 군사적 요새로써의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다. 더구나 출생지가 여주여서 양동과는 지근거리이며, 자신이 이미 1895년 을미의병에 참여한 바 있는 이인영 의병장으로서는 태어나고 살아온 주변 지리를 잘 알고 있고, 을미의병의 주축을 이룬 호좌의진의 발상지로써 유림을 비롯한 주민들의 항일의식이 남달랐던 점 등도 주둔지로써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1907년 9월 2일 이인영은 원주에서 관동창의대장에 올라 각지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소모하면서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허위·이강년·민긍호 등과 긴밀히 연락을 취하였다. 이인영 의병장이 양동을 주둔지로 결정한 것도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횡성·춘천 등지에서 군세를 확장하며 모집한 2,000여명을 이끌고 10월 20일 경 안학관(安學官)과 함께 양동에 주둔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그로부터 한 달 전인 9월에 결정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10월 20일 이후 주변 각지의 의병장과 의병들이 모여들어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나 나중에는 5천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 주둔하게 되었다(어느 학자는 그 수를 8천이라 한다). 양동면 내의 주둔지는 섬실동(蟾實洞,지금의 석곡리 섬실), 삼산리(三山里), 단석리(‘舟川里’라 기록되었으나 丹石里의 오기로 보임), 산매실동(‘山梅實洞’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雪梅實洞 의 오기로 지금의 매월리 설매실), 석우리(石隅里, 지금의 금왕1리)일대로 양동면의 전역에 의병진별로 다른 마을에 분산하여 주둔하였다. 또한 양동면 계정리와 계정리와 경계를 이룬 횡성군 고모곡면(古毛谷面,지금의 서원면)에 걸쳐서도 의병의 일부가 주둔하고 있었다.
‘지평현 수서기(首書記)를 체포하여 주민에게 명령하여 군용금이라며 돈을 징수하고, 2~3리마다 보초를 배치 경계하면서 진지를 구축하고 전열을 가다듬었다.’라는 일본군의 정보보고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엄격한 군율에 의거 통제되었고, 장기간에 걸쳐 주둔할 계획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양주로 갈 부대 중 경기동부 이남의 이인영 부대, 민긍호 부대, 허위 부대, 심지어 전라도의 문태수(文泰守)의병부대는 물론 서울진공작전에 사용할 탄약을 구입하기위해 서울로 들어갔다가 일군에 잡힌 경상남도의 김훈(金壎,유생으로 의병장이었음)도 합류하여 양동에 주둔해 있었다. 따라서 양동은 사실상의 13도창의대진소 창설지로 보아야 한다. 그 밖에도 방관일(方觀一),정대일(鄭大一)의병장도 양동에서 주둔하였고, 삼산리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삼산리전투의 경과
양동에 주둔한 의병이 5천 여 명에 이르기 까지 일본군이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고 그냥 놔 둘리 없었다. 상부로부터 양동지역의병토벌지시를 받은 일본군 보병 제51연대 제12중대의 사카베(坂部)소좌는 원주에 내려와 원주수비대로부터 양동면의 의병주둔상황 등 정보를 취합하여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경성(京城,지금의 서울, 이하 ‘서울’이라 한다)에서는 보병 제51연대 제12중대와 기병 제17연대 제3중대 1개 소대, 공병 제13대대 1개 소대, 임시산포1소대 등으로 구성된 사카베(坂部)소좌가 이끄는 혼성군(混成軍)인 경성토벌대를 편성하여 공격하기로 하였다.
〔당시 일본은 의병을 ‘폭도(暴徒)’라 하고, 의병을 공격하여 없애는 것을 ‘폭도토벌(暴徒討伐)’또는 ‘토벌(討伐)’이라 하였으므로 이하 의병에 대한 일군의 무력공격을 ‘토벌’이라 한다.〕
또한 원주에서는 원주수비대의 아까쿠라(赤倉)대좌가 1개 중대와 충주수비대병력을 지원받고 경찰병력을 지원받아 토벌대를 편성하여 협공하기로 하였다. 아까쿠라(赤倉)는 한강토벌대소속으로 10월 말 서울로부터 충주로 이동했으나 양동지역의 의병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고 11월 초 충주를 출발하여 주포를 거쳐 원주에 도착, 정보를 종합한 뒤 양동면 삼산리로 출동하였다. 한편, 춘천수비대에서도 보병1개 소대 및 기병6기로 토벌대를 편성하여 작전에 참여하기로 하여, 양동주둔의병토벌대는 이 작전을 ‘대토벌(大討伐)’이라 하고, 서울의 사카베(阪部) 소좌가 지휘하게 하였다. 사카베의 지휘아래 서울방변(구둔치)에서 서울토벌대가, 원주방면(송치)에서는 원주수비대가, 횡성방면(벗고개와 몰운고개)의 춘천 수비대 등 총5~600명의 병력이 3면에서 동시에 협공하기로 한 대규모작전이었다.
작전계획(필자주)에 따라 11월 4일 서울을 출발한 사카베소좌의 서울토벌대는 고안, 양근을 경유 11월 6일 지평의 광탄에 도착하여 대기하다가 11월 7일 새벽을 기하여 기습적으로 구둔치를 넘으려 했으나 그 곳을 지키고 있던 150여 의병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 토벌대는 의병이 교전해 옴으로 일시 퇴각하였다가 오전9시부터 11시까지 2시간에 걸쳐 의병진을 향해 산포공격을 집중했다. 구둔치를 지키던 의병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곳에서 철수하여 흩어지거나 다른 의병진에 합류하였다. 의병의 저지로 토벌대가 구둔치를 넘은 시간은 11월 7일 12시 이후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그날 아침까지 구둔치를 통과하여 설매실과 섬실에 있던 의병부대를 시작으로 삼산리 본진까지 공격하여 궤멸시키려던 작전계획은 어긋나고 말았다.
구둔치에서의 교전으로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설매실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진은 주둔치를 떠나 대피한 후였고, 섬실에 있던 의병진은 원주에서 출동한 토벌대와 공방전을 벌여 흩어진 후였으므로 의병 본진이 있는 삼산리를 공격하여 다음날인 11월 8일까지 전투를 벌인 후 의병들이 모두 잠적해 버리자 다시 구둔치를 통하여 서울로 복귀하였다. 한편 구둔치 아래서 지키면서 의병의 양평방향 도주를 막고 있던 산포대는 삼산리전투 이틀째인 11월 8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2시간에 걸쳐 구둔치를 향하여 산포를 발사했는데 이는 삼산리 등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들이 토벌대의 공격을 받자 그 일부가 구둔치를 넘어 집결지인 양주를 향해 이동함에 따라 이를 저지하려는 포격이었다.
원주에서 출동한 토벌대의 작전은 예상을 뛰어 넘어 철두철미하게 이루어졌다. 원주토벌대는 전투 하루 전인 11월 6일 원주수비대의 우수이(臼井) 중위에게 20명의 병력과 경찰 7명을 주어 안창에서 지평 , 즉 삼산리–원주간의 평해로변 등에 의병부대가 설치하여 운영 중이던 초소를 공격, 퇴치하여 토벌대의 공격을 받고 퇴주할지도 모르는 의병부대의 퇴로를 차단토록 했다. 11월 6일 급습을 받은 강원도 이운리와 판관대동 등지의 요소(要所)에 20~30명씩 보초를 서던 의병들은 토벌대의 공격을 받아 해산하고 말았고 숙소로 쓰던 솔안동(松內洞)의 가옥 9채가 불태워 졌다. 11월 6일 오전 2시 원주를 출발한 아까쿠라토벌대는 1개 중대와 가등(加藤)보조원외 3명 및 순검(巡檢)4명과 함께 횡성군을 경유 11월 7일 양동면에 도착, 삼산리와 섬실에 있던 의병부대를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원주토벌대의 양동작전(兩動作戰)은 먼저 출발시킨 토벌대가 평해로를 확보하여 퇴로를 차단한 다음 횡성을 경유하여 들어온 본대가 서울토벌대와 합세하여 공격을 가함으로써 주둔하고 있던 의병진본진을 꼼짝 못하도록 포위하여 재기할 수 없을 정도의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려는 치밀한 전략이었다.
한편 보병1개 소대, 기병6기로 토벌대를 편성한 춘천수비대는 11월 5일 경찰대와 합동, 춘천을 출발 홍천군에 도착한 후 11월 6일 횡성군으로 이동 중 오전10시 30분경 홍천군 삼마치(三麻峙)고개의 300m고지로부터 1발의 총성과 동시에 의병150명(韓兵도 섞여있었음)의 공격을 받자 교전하여 의병7명을 사살하고 1명에게 부상을 입혀 화승총 2정을 노획한 후 11월 7일 횡성의 상창봉(上倉峰)을 출발 고모곡면(古毛谷面,지금의 서원면)에 도착했으나 단애절벽(斷崖絶壁)의 산곡(山谷)으로 의병의 흔적이 없으므로 청운면 용두리(龍頭里)로 이동 서울의 50연대소속 암좌(岩佐) 중위가 인솔하는 1개 소대를 만나 양동면 금왕리의 석우리(石隅里,지금의 돌모루), 율목곡(栗木谷,지금의 밤나무골), 월대리(月垈里,지금의 워리터)에 조정호(趙正浩)가 모집한 의병 400여명이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 벗고개를 넘어 공격했으나, 의병은 이미 2~3일전 주민과 함께 삼산리로 대피하고 없었다. 헛걸음을 한 토벌대는 이곳을 의병의 소굴로 인정 18호의 가옥을 소각한 후 삼산리의 의병부대를 공격하려했으나 삼산리는 이미 서울에서 출동한 사카베소좌와 원주에서 출동한 사카쿠라의 부대에 의해 격퇴 궤주시켰다는 기병의 전령에 따라 11월 8일 철수하였다.
10월 20일경에 이인영의병장이 그간 모집한 2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양동에 주둔을 시작한 이래 전국 각지에서 합류하는 의병진이 급격히 늘어 삼산리전투가 벌어질 때는 5천여 명에 달하자 일사분란한 통제와 군수품보급, 일본군의 토벌작전 대응 등이 당면문제로 대두되었다. 출신지와 구성 신분 등이 서로 다른 여러 의병진을 효율적으로 통솔하기 위하여 양동면 삼산리에 본대를, 단석리, 석곡리, 매월리, 금왕리 및 인근인 강원도 서원면 석화리(石花里)에는 각기 다른 의병진을 분산시켜 주둔토록 하였다. 또한 의병진간의 비상연락망을 확립하고 주요 거점에는 참호를 파는 등의 방어공사를 하고 보초를 배치하여 경계를 철저히 하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또한 일본군공격에 대비한 의병진, 방어초소간의 긴밀한 연락 및 방어태세를 확립하고 의진별 대피경로 및 집결지도 정해 주었다. 주둔기간에는 양동면 등 인근지역에서 의병진을 유지에 필요한 군자금마련을 위해 금품모금활동도 벌였다.
양동주둔의병진의 본대는 삼산리 도소리와 분터골에 두었다. 삼산리는 양동의 남쪽에 위치한 강원도 원주와 경계를 이룬 마을로 평해로의 경기도 끝인 송치(松峙)가 이 마을에 속하고 마을중심으로 흘러내리는 삼산천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넓은 들이 펼쳐있고 남쪽으로는 험한 산줄기가 감싸는 지형을 이루고 있다. 특히 본대의 대부분이 주둔했던 도소리마을 건너편 분터골은 인가가 없고 평해로와 거리는 가까우나 아늑하고 넓은 골짜기이고 많은 물이 나오는 샘이 있을뿐더러 삼산천을 따라 원주땅 간현의 섬강으로 통하는 계곡이 협소하여 대피이동로로 사용할 수 있는 등 많은 병력이 적의 움지임을 감시, 방어하며 안전하게 주둔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원주경계와 평해로가 가깝고 깊고 험한 산이 가까워 산속으로 흩어져 대피하거나 삼산천 협곡계곡로를 통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할 수 있는 조건까지 갖춘 곳이었다. 반면 구둔치를 넘어 평해로를 따라 이곳을 공격하려면 최소 3~4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이므로 공격해 오는 정보를 받으면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도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구둔치의 역할이 컸으므로 구둔치에는 별도로 150여명의 의병을 배치하여 참호를 파고 경계토록 했던 것이다.
11월 6일 일본군 토벌대가 평해로 송치와 이운리 판관대동 등에 설치한 초소를 급습해 오자 의병진은 강하게 저항하며 교전하였으나 끝내는 평해로를 적에게 내어주고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교전과정에서 주변지리에 밝은 의병들이 산속으로 흩어져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겨우 평해로만 확보하는데 그친 토벌대는 솔안동(松內洞)의 의병거처로 쓰던 가옥9채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다음날인 11월 7일 9시 부터 원주토벌대의 공격을 받은 의병진은 삼산리 일대에서 해가 질 때까지 내내 교전을 벌였다. 토벌대는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기마로 이동이 빨랐고 신식무기로 무장하였다. 개인화기는 미약하지만 수적으로 우세하고 지형지물에 밝은 의병부대는 나름대로 공격과 후퇴를 번복하며 잘 싸웠다. 11월 7일 오후 늦게부터는 서울토벌대가 합세하여 전투를 수행함에 따라 상황이 달라졌다. 서울토벌대가 새벽부터 구둔치를 넘어 공격해 오려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의병에 의해 저지당하자 일단 퇴각하였다가 산포공격과 함께 공격을 해 옴으로 결국 정오경에 구둔치를 내어주고 말았지만 다른 마을에 있던 의병진에게 대비할 시간을 줌으로써 삼산리전투가 의병진의 피해를 줄이는 역할을 하였다.
새벽부터 구둔치를 공격받자 설매실에 있던 의병진은 산길을 택해 대피하여 피해가 없었다. 설매실과 그리 멀지 않은 섬실에 있던 의병진은 서울토벌대와 공방전을 벌였으나 기마병 등 기동력과 신식화기로 무장하고 공격해 오는 적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섬실 주둔 의병도 제2의 집결지를 향해 흩어지고 말았다. 주력부대가 있던 삼산리 일대에서만 다음날까지 밀고 밀리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분터골에 있던 주력부대는 11월 7일부터 8일 사이에 제2의 집결장소로 이동함으로서 11월 8일까지 토벌대와 맞서 싸우던 잔여병력들이 게릴라전을 벌이다 모두 흩어지자 삼산리전투는 종료되었다. 이 전투에서 500~600명으로 편성된 토벌대는 수십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5천여 명에 달했던 의병진도 200~300명 정도의 많은 사상자를 내고 말았다.
일본군은 서울과 원주 그리고 춘천에서 신무기와 산포, 기병 등 총 500~600명의 병력으로 각 토벌대를 편성하여 일시에 3면에서 동시에 공격함으로써 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이인영부대가 주축이 된 양동주둔 의병진을 일망타진하고자 했던 전투였다. 그러나 의병진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의병진간의 불화를 막기 위하여 양동면의 여러 곳에 분산 주둔시키면서 일사분란한 지휘체계와 연락체계를 확립했고, 평해로의 구둔치고개에는 150여명, 송치 등 중요지점에는 20~30명씩 배치하여 대비하였음은 물론 미리 마련한 작전계획에 따라 전투상황에 임하여 오히려 토벌대에 많은 피해를 입혀 의병전쟁사에서 매우 규모가 크고 승리한 것으로 평가하는 의병사에 길이 빛날 전투가 되었다.
삼산리전투과정에서 깊은 산속 등지로 흩어진 의병 중 1,500여명은 원주군 부론면(富論面) 정산동(鼎山洞,지금의 정산리)으로, 300여명은 원주군 호매곡면(好梅谷面,지금의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高山里)로 산길 등을 이용하여 재집결하였으며 흩어졌던 의병 중 1,000여명은 양주로 이동하였다.
〔삼산리전투과정에서 산속 등지로 흩어진 의병들은 서울진공작전을 위한 집결지인 양주로 갔다고 알려져 있으나, 삼산리에서 30~40여㎞ 거리인 원주시 부론면 정산동과 호저면 고산리로 들어가 재집결하였다는 것이 일본군의 보고내용이다.〕
삼산리전투의 역사적 의의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의병을 소모하여 양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총38회에 걸친 전투를 치뤘으며 그 중 삼산리전투가 대규모이고 가장 치열했다. 삼산리전투 이후 양주로 이동한 의병은 그곳의 주둔지에서 머물렀으며, 원주등지로 재집결한 의병들은 주둔지에서 전열을 정비하면서 양주집결을 준비하였다. 이처럼 서울진공작전 수행을 위한 최대의 중간주둔지였던 양동의 여러 의병진은 물론, 강원도 등 다른 곳에서 창의하거나 소모하여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려던 의병들은 자기 지역의 지리적여건 등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본군의 출동이나 공격상황에 따라 수차례에 걸쳐 흩어졌다가 다시모이는 산합(散合)을 거듭하며 일본군의 양민학살, 방화와 회유, 그리고 악랄한 토벌작전에도 굴하지 않고 양주집결에 대비했다. “이번 대토벌로 의병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흩어진 의병들은 다시 어느 지점에 모였다가 토벌대 철수 후 다시 어느 지점에 집결하기를 반복하여 ’반상(飯上)의 청승(靑蠅)‘과 같다”며 밥상에 덤비는 파리 떼에 비유하여 토벌결과를 상부에 보고하면서 의병토벌의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토로하였음을 볼 때 의병이 얼마나 끈질기게 항일의병전쟁을 수행하였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1907년 11월부터 1908년 1월까지 전국 각지의 의병진 48진 1만여 명이 양주에 모여 13도창의대진소를 구성하고, 서울진공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고를 접한 이인영 총대장이 모든 권한을 군사장 허위에게 넘기고 장례를 치루기 위해 급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권을 넘겨받은 허위는 1908년 1월에 통감부를 격파하기 위하여 각 도의 의병들이 동대문 밖 30리 지점인 수택리에 집결하기로 한 약속에 따라 감사병(敢死兵,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병사) 300명을 이끌고 도착하였으나 다른 도의 의병들이 교통 불편으로 도착이 지연되었다. 그 사이에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이 선수를 쳐 l월 25일 공격을 해옴으로 필사의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사상자만 나올 뿐이라 할 수 없이 양주로 후퇴하고 말았고 그 후 허위는 제2차 진공작전을 시도하였으나 계획단계에 머물렀을 뿐 실행하지는 못했다. 13도창의군에 참여했던 이들 의병진들은 자기 지역으로 되돌아가거나 각지로 흩어져 후기의병전쟁을 계속했다.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13도창의대진소라는 최초의 전국연합의병부대를 조직하였고 참여한 의병의 수가 1만 여명에 달했던 점과 당시 전국 각지에서 활약한 독자적 의병항쟁의 한계를 극복하고 대규모연합의병조직을 만들어 국권을 수호하겠다는 의도였다는데 역사적의미가 있다. 양동과 양주에 집결하고 연합의진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의병진간의 연락체제를 구축하고 일본군에 효과적인 대응을 하는 등 단위 의병진 활동의 효율화에 기여했으며 삼산리전투를 비롯한 수십 차례의 전투를 통하여 전투력이 향상되었다. 증강된 전투력은 서울진공작전 실패 후 전개된 후기의병전쟁을 활성화하는데 기여하였고 또한 이들이 시도한 외국영사관을 상대로 통문발송을 통해 일본과 체결된 조약의 불법성을 성토하고 일본의 불법적이고 야만적인 군사적 침략에 대응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의병들의 활약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크다.
13도연합의병의 양동주둔과 삼산리전투 외에도 양평에서는 후기의병전쟁을 수행하였다. 즉 양근과 지평에서는 의병장을 중심으로 여러 의진이 편성되어 용문산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일본군과의 전투를 벌였다. 즉 권득수, 조인환 의병대장 등은 용문산을 근거지로 삼아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쳐 큰 전과를 올렸지만 의병전쟁과정에서 용문사, 사나사, 상원사 등 유서 깊은 고찰과 수백 호에 달하는 민가가 불태워지고, 무고한 양민이 수없이 학살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는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일본군을 상대로 전쟁하면서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한 피해로 양평만의 피해가 아니라 의병전쟁이 발발한 지역전체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함에도 전국적으로 불같이 일어난 후기의병은 끈질기고 조직화된 반침략적 민족운동으로서 후일 민족해방운동의 선구적역할을 다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삼산리전투도 규모와 끼친 영향이나 결과에 대한 합당한 평가를 받아 의병전쟁사는 물론 대한민국역사에 길이 남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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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양동이 역사적으로 자부심을 갖을게 하는 곳이군요~~
선조들의 항일전사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