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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원 주제 | 중단원 주제 | 소단원 주제 |
Ⅰ. 분열 왕국 (왕상12:1-22:53) | 1. 분열되는 이스라엘 (12:1-14:31) | 1)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12:1-24) 2) 여로보암의 반역(북)(12:25-14:20) 3) 르호보암(남)(14:21-31) |
2. 남 북 왕들(15:1-16:28) | 1) 아비얌(남)(15:1-8) 2) 아사 (남)(15:9-24) 3) 나답(북)(15:25-31) 4) 바아사(북)(15:32-16:7) 5) 엘라(북) (16:8-14) 6) 시므리(북)(16:15-20) 7) 오므리(북)(16:21-28) | |
3. 엘리야의 사역(16:29-19:21) | 1) 아합의 죄(16:29-34) 2) 엘리야 가뭄 예언(17:1-24) 3) 엘리야의 갈멜 산 기도(18:1-46) 4) 엘리야의 낙심(19:1-21) | |
4. 아합의 악행(20:1-22:40) | 1) 아람과 이스라엘 전쟁(20:1-43) 2) 아합의 나봇 포도원(21:1-16) 3) 아합의 죽음(21:17-22:40) | |
5. 여호사밧, 아하시야 (22:41-53) | 1) 여호사밧(남)(22:41-50) 2) 아하시야 (북 (22:51-53) | |
Ⅱ. 북 왕국 멸망 (왕하1:1-17:41) | 6. 엘리야(1:1-2:11) | 1) 북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1:1-18) 2) 엘리야의 승천(2:1-11) |
7. 엘리사(2:12-8:15) | 1) 엘리야의 소명을 전수받음(2:12-25) 2) 북 이스라엘 왕 여호람(3:1-27) 3) 엘리사의 사역(4:1-8:15) | |
8. 세 명의 남북 왕들 (8:16-10:36) | 1) 여호람(남)(8:16-24) 2) 아하시야(남)(8:25-9:29) 3) 예후(북)(9:30-10:36) | |
9. 아달랴, 여호아스(요아스) (11:1-12:21) | 1) 여왕 아달랴(남)(11:1-16) 2) 여호아스(요아스)(남)(11:17-12:21) | |
10. 네 명의 남북 왕들 (13:1-14:29) | 1) 여호아하스(북)(13:1-9) 2) 여호아스 (요아스)(북)(13:10-25) 3) 아마샤(남)(14:1-22) 4) 여로보암 2세(북)(14:23-29) | |
11. 여덟 명의 남북 왕들 (15:1-16:20) | 1) 아사랴(웃시야)(남)(15:1-7) 2) 스가랴(북)(15:8-12) 3) 살룸 (북 )(15:13-15) 4) 므나헴(북)(15:16-22) 5) 브가히야 (북)(15:23-26) 6) 베가(북)(15:27-31) 7) 요담(남)(15:32-38) 8) 아하스(남)(16:1-20) | |
12. 북 이스라엘 멸망(17:1-41) | 1) 호세아(북)(17:1-41) |
Ⅲ. 분열 왕국과 북이스라엘 멸망 (왕상12:1- 왕하17:41)
1.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왕상12:1-14:31)
10지파의 북 이스라엘과 2지파의 남 유다로 분열하였다(왕상 12:1-14:31).
솔로몬 사망 직후 전날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대로 남․북 왕국이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각각 분열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 두 왕국은 시대에 따라 동맹을 맺거나 원수가 되기도 하였으나 어쨌든 이후 단 한 번의 통일도 이루지 못한 채 각각 멸망당하게 된다.
1) 왕국의 분열 (왕상12:1-24)
여로보암은 10지파의 왕이 되었고, 르호보암은 2지파의 왕이 되었다(왕상 12:1-24).
12:1-15 이제 솔로몬의 범죄로 인한 왕국 분열의 징조가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본문은 그 분열의 발단 부분으로서 솔로몬의 부역 정치에 진저리난 백성들이 대관을 위해 세겜으로 간 르호보암 앞에 애굽에 피신해 있던 반역자 여로보암을 내세웠다. 강제 노동 폐지(4)를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장로(신 21:6)들은 유화 정책을 진언하였으나 르호보암은 민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무모한 젊은이들의 조언대로 더 무거운 멍에를 지울 것을 표방했다(대하 10:1-15). 이것은 솔로몬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15)라 할 수 있다.
12:16-24 세바의 옛 표어가 되풀이되었다(삼하 20:1).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라는 이 말은 다윗 가문에 대한 나머지 지파들의 반감 속에서 싹터 왔으며,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 각 지파들의 배타적인 지파 의식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한편 이들의 이러한 요구는 다윗과의 관계가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관계와 동일한 것으로 곧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를 요구하는 불신앙적 요청이었다. 북쪽 10지파가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남은 르호보암의 유다(유다와 베냐민 지파), 북은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대하 10:16-11:4).
(1) 르호보암이 과중한 부역과 세금을 줄여달라는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요청을 거부했다(12:1-15)
이제 솔로몬의 범죄로 인한 왕국 분열의 징조가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본문은 그 분열의 발단 부분으로서 솔로몬의 부역 정치에 진저리난 백성들이 대관을 위해 세겜으로 간 르호보암 앞에 애굽에 피신해 있던 반역자 여로보암을 내세웠다. 강제 노동 폐지(4절)를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장로(신 21:6)들은 유화 정책을 진언하였으나 르호보암은 민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무모한 젊은이들의 조언대로 더 무거운 멍에를 지울 것을 표방했다(대하 10:1-15). 이것은 솔로몬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15절)라 할 수 있다.
(2) 북쪽 10지파가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하여,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열되었다(12:16-24)
세바의 옛 표어가 되풀이되었다(삼하 20:1).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다’라는 이 말은 다윗 가문에 대한 나머지 지파들의 반감 속에서 싹터 왔으며,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 각 지파들의 배타적인 지파의식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이들의 이러한 요구는 다윗과의 관계가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관계와 동일한바 곧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를 요구하는 불신앙적 요청이었다.
북쪽 10지파가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남쪽은 르호보암의 유다, 북쪽은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대하 10:16-11:4).
분열왕국의 역사는 여기서 시작해서 열왕기하 끝까지 계속된다. 여로보암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로 알려졌고, 때로 선지자들이 '에브라임'이라고 표현한 북부의 열 지파를 다스렸다. 이 왕국은 9왕조가 이어졌고, 모든 왕이 악했다.
르호보암은 '유다'로 알려진 남부 왕국을 다스렸다. 이 왕국은 한 왕조만 있었다. 모든 왕이 다윗의 후손이었다. 이 왕국을 통해, 다윗의 왕위에 대한 그리스도의 법적인 권리가 그의 육신의 부친인 요셉에게까지 전해졌다.
분열왕국의 역사는 네 국면으로 구분할수 있다. 첫째로, 여로보암에서(왕상 12:1) 오므리(왕상 16:28)에 이르는 공공연한 대결의 시기였다. 둘째로, 오므리에서(왕상 16:29) 예후까지(왕하 8장) 두 왕국은 화해시기를 누렸다. 셋째로, 예후에서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포로로 잡혀갈 때까지는(B.C.722년) 상호간 독립의 시기였다. 그리고 끝으로, B.C. 586년 바벨론에게 포로가 될 때까지는 유다 왕국만 홀로 남은 시기였다(왕하 18~25장).
이스라엘 왕국은 결코 국가적으로 고토에 돌아오지 못했다. 유다는 70년간 포로로 있다가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기록된 대로 의미 있는 수의 무리들이 예루살렘에 귀환했다. 남쪽 지파들은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출생 약500년 전에 이방인의 통치 아래서 고토로 돌아왔다.
구약의 역사가 끝날 무렵 고토에 귀환한 유대인들은 바사(페르시아) 왕의 수하에 있었다. 후에 바사는 헬라(그리스)에게 정복당했고, 유대인들은 그 세계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결국 헬라인은 로마제국에게 굴복하였는데, 주 예수께서 나타나신 때가 바로 그 제국이 세계를 다스리던 때였다.
2) 여로보암 (북) (왕상12:25-14:20)
여르보암이 북 이스라엘을 20년 동안 다스렸고, 악을 행하였다(왕상 12:25-14:20)
12:25-33 여로보암은 왕권 강화를 위하여 세겜과 부느엘을 수축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남 왕국 유다와의 완전한 결별을 위해 북 이스라엘의 종교적 구심점을 벧엘과 단의 우상 제단으로 규합시켰다.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겨 모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출 32:1-6) 이제는 하나님의 선택적 섭리로 세워진 다윗의 집을 배반하였다.
13장 제단 붕괴 : 북 왕국의 왕이 된 여로보암의 일방적인 종교 정책으로 전 장의 사건과 이어지는 내용이 본장에 소개되고 있다. 여로보암이 자신이 정한 절기를 지키고자 벧엘로 올라갔을 때 괴이한 사건이 일어났다. 타락해 가는 신정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자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그들에게 파견하셨으며 이 수행 과정에서 회유와 죽음 등이 발생한다.
14:1-20 선지자 아히야를 통하여 여로보암과 그 집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가 내려졌다. 이 일로 미루어 보건대 여로보암은 전능자 하나님에 대하여 철저히 무지하였고 샤머니즘적인 신앙을 가진 것 같다. 아버지의 죄악으로 인하여 의로운 아비야(13)가 죽은 것을 볼 때 한 사람의 범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출 20:5). 그러나 북 왕국의 이 같은 우상 숭배 정책 하에도 참 예배를 드리려는 신앙의 발길은 유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대하 11:13-16).
(1) 여로보암은 세겜을 수도로 정하고,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웠다(12:25-33)
[북이스라엘 ① 여로보암 : B.C. 931-909(재위 22년) 왕상 11:26-14:20; 대하 9:29-13:22]
여로보암은 왕권 강화를 위하여 세겜을 수도로 정하고 요단 강 건너편에 브누엘을 수축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남 왕국 유다와의 완전한 결별을 위해 북 이스라엘의 종교적 구심점을 벧엘과 단의 우상 제단으로 규합시켰다. 그는 그 두 곳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그 신상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건져낸 신이라고 선포하였다.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겨 모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출 32:1-6) 이제는 하나님의 선택적 섭리로 세워진 다윗의 집을 배반한 것이다.
(2)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에게 나타나 우상의 단에 대한 멸망의 심판을 선포했다(13:1-10)
벧엘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는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 단을 향해 궁극적 멸망(왕하 23:15-20)을 선포한다. 유다에서 보냄을 받은 이 사람은 요시야라는 이름의 왕이 유다에서 일어나 이 우상을 숭배하는 제사장들을 단에서 불사를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2절의 예언의 성취는 열왕기하 23:15,16에서 발견된다. 이 예언과 그 성취 사이는 300년이 넘는 세월이 경과되었다.
단의 갈라짐(5절)과 자신의 편 손이 말라붙는(4절) 경고의 이적을 접한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을 회유(7절)하였으나 하나님의 사람은 함께 식사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되돌아갔다. 이는 우상 숭배자들과는 어떠한 친교도 나누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강렬한 증오가 표출된 행위였다(롬 16:17; 고전 5:11).
(3) 여로보암의 유혹을 물리친 하나님의 사람이 늙은 선지자에게 유혹당하여 징계를 받았다(13:11-32)
본문에는 하나님의 사역을 완수하고 여로보암의 유혹을 거절한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가장하여 유혹하는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에 설복당하여 접대를 받게 되고, 이로 인해 사자에게 물려 죽는 참혹한 징계를 받는 사건이 기록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로 신앙을 고백했던 베드로가 이내 사람의 지혜로 사탄이라 정죄받는 사건을 연상시키며 유혹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을 나타낸다(엡 4:22; 살후 2:11,12).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들과, 그 대변인인 자들과, 큰 특권을 입은 자들을 더욱 엄히 대하시는 것이다.
(4) 여로보암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아히야를 통하여 멸망을 선포하셨다(13:33-14:16)
여로보암의 죄(13:33,34). 아론 자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규례를 무시한 여로보암의 정책은 북왕국 내에 전정한 하나님 신앙이 발 붙일 여유를 없애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신앙의 자유와 참 예배를 드리려는 자들의 발길이 유다로 향하게 되었다. 여로보함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케 하고(12:28,29),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으며(12:31),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정하고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죄악된 길로 행하였던 것이다(33절).
아히야의 예언(14:1-20). 선지자 아히야를 통하여 여로보암과 그 집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가 내려졌다. 이 일로 미루어 보건대 여로보암은 전능자 하나님에 대하여 철저히 무지하였고 샤머니즘적인 신앙을 가진 것 같다.
(5) 선지자의 경고대로 아비야는 죽었고, 여로보암은 22년을 통치하고 죽었다(14:17-20)
아버지의 죄악으로 인하여 의로운 아비야(13절)가 죽은 것을 볼 때 한 사람의 범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출 20:5). 그러나 북왕국의 이 같은 우상 숭배 정책하에도 참예배를 드리려는 발길은 유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대하 11:13-16).
여로보암은 22년간 통치한 후에 죽었고 그의 아들 나답이 그 뒤를 이었다.
3) 르호보암 (남) (왕상14:21-31)
유다 왕 르호보암은 17년을 다스렸고, 애굽시삭 왕의 침공을 받았다(왕상 14:21-31).
14:21-24 십계명 중에 잘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가장 싫어하신다(출 20:3-5). 솔로몬의 우상 숭배로 왕국이 분열되었고 또다시 르호보암의 우상숭배로 유다는 애굽의 침입을 받는다(대하 12:1,2). 본래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버러지 형상의 우상과 바꾸었으므로(롬 1:23-25) 우상 숭배는 하나님과 정면으로 배치하는(고후 6:16) 인간의 죄성의 표출이라 하겠다.
14:25-31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시삭을 통해 이스라엘을 징벌하셨다. 이 애굽의 침략으로 솔로몬이 축적했던 막대한 재물을 탈취당하여 왕국은 빈궁하게 되었으나, 시삭의 유다 침략은 단순히 전리품을 위함이었으며 스마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대하 12:7)대로 유다는 멸망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남북 왕국은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점차 국력이 피폐하여졌다.
(1) 르호보암이 우상숭배의 징벌로 애굽의 침입을 받아 왕궁의 막대한 재물을 빼앗겼다(14:21-28)
[남유다 ① 르호보암 : B.C. 931-914(재위: 14년) 왕상 11:42-14:31; 대하 9:31-12:16]
유다의 우상 숭배(14:21-24). 십계명 중에 잘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가장 싫어하신다(출 20:3-5). 솔로몬의 우상 숭배로 왕국이 분열되었고 또다시 르호보암의 우상 숭배로 유다는 애굽의 침입을 받는다(대하 12:1,2). 본래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버러지 형상의 우상과 바꾸었으므로(롬 1:23-25) 우상 숭배는 하나님과 정면으로 배치하는(고후 6:16) 인간의 죄성의 표출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애굽의 침입(14:25-28).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시삭을 통해 이스라엘을 징벌하셨다. 이 애굽의 침략으로 솔로몬이 축적했던 막대한 재물을 탈취당하여 왕국은 빈궁하게 되었으나, 시삭의 유다 침략은 단순히 전리품을 위함이었으며 스마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대하 12:7)대로 유다는 멸망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남・북 왕국은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점차 국력이 피폐하여졌다.
(2) 남 유다의 르호보암이 14년을 다스리고 죽었으며 아들 아비얌이 왕이 되었다(14:29-31)
이 때는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 간에 전쟁이 지속되는 기간이었다. 유다 왕 아사와 이스라엘 왕 오므리 때까지 57년간 전쟁이 지속되었다. 유다와 이스라엘 간에 전면전은 하나님께서 막으셨으나(12:24), 두 왕국은 끊임없이 서로 소규모 접전을 벌였다.
르호보암은 57세에 죽었고 그의 아들 아비얌이 왕이 되었다.
2. 남.북 왕들 (왕상15:1-왕하16:20)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왕들이 대부분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였다(왕상 15:1-16:28).
전반부는 유다의 2, 3대 왕인 아비얌과 아사, 이스라엘의 2, 3대 왕인 나답과 바아사에 대한 기록이다. 아사는 남북 왕국의 분열 이후 최초로 종교 개혁을 단행한 왕이다. 하지만 그러한 그도 바아사와의 전쟁에서는 하나님 대신 아람을 의지하였으며 이 일로 그를 책망한 선지자 하나니를 감옥에 가두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다. 한편, 아사의 통치기간 중 이스라엘에서는 바아사가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에게 반란을 일으켜 왕권을 탈취하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는 여로보암의 가문이 진멸되리라는 저주(14:10)의 성취였다. 후반부는 이스라엘의 왕조가 또다시 바뀐 것에 대한 기록이다. 하나님은 여로보암 왕가를 징벌하기 위해 바아사를 왕으로 세우셨다. 그러나 그 역시 여로보암의 죄악을 답습하였으며 선지자 예후의 경고를 듣고도 회개치 않았다. 그 결과 엘라, 시므리에 이어 오므리가 권력을 장악함으로 이스라엘의 제3대 왕조인 오므리 왕조가 들어섰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정치적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암흑기를 초래하고 말았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베니게와 결혼 동맹을 맺고 바울 숭배자인 이세벨과 결혼한 것은 북 왕국을 우상 숭배지로 만든 대표적 사례이다.
1) 아비얌(남)(왕상15:1-8)
남 유다 왕 아비얌이 3년간 다스렸고,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였다(왕상 15:1-8).
유다의 둘째 왕인 아비얌은 3년간 왕위에 있었다. 그도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가증한 범죄를 행하였다. 다윗은 유다 왕들의 통치를 평가하는 기준(3:14)일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표준이 된다. 다윗의 유다 왕조는 수많은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그 치세가 지속되었다(삼하 7:7-16).
(1) 남 유다의 아비얌이 3년간 다스렸고 악을 행하였다(15:1-8)
[남유다 ② 아비얌(아비야) : B.C. 914-911(재위: 3년) 왕상 14:31-15:8 대하 13:1-22]
유다의 둘째 왕인 아비얌은 3년간 왕위에 있었다. 그도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가증한 범죄를 행하였다. 다윗은 유다 왕들의 통치를 평가하는 기준(3:14)일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표준이 된다. 다윗의 유다 왕조는 수많은 죄악을 저질렀음에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그 치세가 지속되었다(삼하 7:7-16).
* 악을 행한 아비얌(15:1-5) 여로보암 왕 열여덟째 해에 아비얌이 왕이 되어 3년을 다스리며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기 때문에 다윗의 대를 이어 주신다. * 아비얌의 죽음(6-8) 아비얌과 여로보암의 사이에 전쟁이 있었고 아비얌이 죽은 후 아사가 왕이 되었다.
2) 아사(남)(왕상15:9-24)
남 유다 왕 아사가 41년을 다스렸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였다(왕상 15:9-24).
본문은 유다의 3대 왕 아사의 종교 개혁과(11-15)과 동족상잔(16-22)에 대한 기록이다. 아사의 선정으로 인하여 유다가 평화를 누리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남하하는 무리가 생겼다(대하 15:9). 바아사의 침입도 이것을 저지하기 위함이었지만 이방 군대인 벤하닷 군대를 끌어들인 아사의 방책은 커다란 실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사 치세의 대략이 유다 최초의 적극적 종교 개혁으로 말미암아 신앙적 기준에 합당한 것이었기에 역대 사가는 이를 대하 14-16장에 걸친 사적의 기록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1) 남 유다 왕 아사는 종교개혁을 실시하여 우상을 제거하고, 성전을 부요하게 했다(15:9-15)
[남유다 ③ 아사 : B.C. 911-870(재위: 41년) 왕상 15:8-14; 대하 14:1-16:14]
아사는 유다의 몇 안 되는 선한 왕 중 하나였다. 그는 남색하는 자(우상을 숭배하는 동성애자)를 그 땅에서 제거하고 그의 선조들이 만든 모든 우상을 없애버렸다(12절). 그는 그의 조모 마아가를 폐위시키고 그녀의 가증한 우상을 없애버리되 그 우상과 관련된 산당은 없애지 않았다. 그는 그의 부친과 그 자신을 위해 구별해둔 예물들을 드려 성전을 부요케 했다.
(2) 남 유다 왕 아사는 북 이스라엘 바아사를 막기 위해 아람 왕을 의지하였다(15:16-24)
본문은 동족 상잔에 대한 기록이다. 아사의 선정으로 인하여 유다가 평화를 누리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남하하는 무리가 생겼다(대하 15:9). 바아사의 침입도 이것을 저지하기 위함이었지만 이방 군대인 벤하닷 군대를 끌어들인 아사의 방책은 커다란 실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사 치세의 대략이 유다 최초의 적극적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은 신앙적 기준에 합당한 것이었기에 역대 사가는 이를 대하 14-16장에 걸친 사적의 기록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아사가 발에 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은 아사가 아람 왕의 구원을 의지한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암시로 보인다. 그의 마지막 3,4년 동안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함께 통치했을 것이다.
3) 나답(북)(왕상15:25-31)
(1) 나답 왕은 2년을 통치하며 우상을 숭배했고, 바아사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15:25-31)
[북이스라엘 ② 나답 : B.C. 910-908(재위: 2년) 왕상 15:25-28]
여로보암의 송아지 숭배의 죄를 그대로 물려받은 나답은 그의 신복 중 하나인 잇사갈 족속 바아사로 인하여 깁브돈에서 죽었다. 바아사는 왕권 찬탈에 혈안이 되어 여로보암 가문의 혈족 전체를 몰살시켰으니 이는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14:10)이 성취된 것이었다. 이후 북왕국에는 유혈 쿠데타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됨으로써 하나님을 떠난 절대 군주의 폐단을 지적한 사무엘의 경고가 그대로 적중되었다(삼상 12:13-15).
4) 바아사(북)(왕상15:32-16:7)
(1) 바아사는 이스라엘과 전쟁을 계속했으며, 우상숭배를 하였다(15:32-34)
[북이스라엘 ③ 바아사 : B.C. 909-885(재위: 24년) 왕상 15:27-16:7; 대하 16:1-6]
바아사의 통치는 이스라엘 왕국의 두 번째 왕조의 시작을 알려준다. 바아사의 통치 기간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디르사를 수도로 삼아 그는 여로보암이 세운 우상숭배를 계속했다.
(2) 선지자 예후을 통하여 우상숭배하는 바아사에게 심판이 선포되었다(16:1-7)
본문에서는 바아사와 그의 집을 향한 심판의 말씀이 예후의 입을 통해 선포된다. 바아사가 여로보암의 우상숭배를 좇았으므로 그의 후손이 비슷한 운명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유다의 선지자 예후를 바아사에게 보내신 것은 북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은혜를 나타낸다. 비천한 출신의 바아사를 하나님의 주권으로 왕이 되게 했음에도(14:14) 불구하고 가증한 죄악(12:28-33)을 답습하였으니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였다. 바아사를 이어 엘라가 왕이 되었다.
5) 엘라(북)(왕상16:8-14)
북 이스라엘 왕 엘라가 2년간 악을 행하였고, 시므리에게 죽임을 당했다(왕상 16:8-14).
바아사에 대한 선지자 예후의 심판 예언이 그의 아들 엘라에게 성취된다(16:13). 시므리는 엘라 왕의 군대 장관으로서 왕위 찬탈 야욕을 품고 왕과 그 족속과 친구들까지 몰살시킨다. 이러한 멸망을 목전에 두고도 잔치에 참석하여 만취된 왕의 모습은 도적같이 임하는 심판을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악인들의 방만한 태도를 연상시킨다(눅 17:26-29).
(1) 북 이스라엘 엘라가 2년을 다스렸고, 시므리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16:8-14)
[북이스라엘 ④ 엘라 : B.C. 885-883(재위: 2년) 왕상 16:16-14]
바아사에 대한 선지자 예후의 심판 예언이 그의 아들 엘라에게 성취된다(16ㅣ:13). 시므리는 엘라 왕의 군대 장관으로서 왕위 찬탈 야욕을 품고 왕과 그 족속과 친구들까지 몰살시킨다. 이러한 멸망을 목전에 두고도 잔치에 참석하여 만취된 왕의 모습은 도적같이 임하는 심판을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악인들의 방만한 태도를 연상시킨다(눅 17:26-29).
6) 시므리(북)(왕상16:15-20)
북 이스라엘 왕 시므리가 7일 동안 왕이 되었고, 오므리는 자결하여 죽었다(왕상 16:15-20).
오므리 왕조가 발흥하게 되는 동기적 사건인 시므리의 반란과 그 경과가 묘사된다. 시므리의 쿠데타는 7일 천하로 끝나고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하나님의 공법이 무너진 사회에서는 군부 세력에게 실권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시므리의 무모한 모반 행위에 불복한 군대장관 오므리는 엘라 족속들의 처단에 몰두한 시므리를 죽이고 실권을 장악했다.
(1) 엘라를 죽인 시므리는 7일만에 군대장관 오므리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16:15-20)
[북이스라엘 ⑤ 시므리 : B.C. 885-883(재위: 7일) 왕상 16:9-20]
오므리 왕조가 발흥하게 되는 동기적 사건인 시므리의 반란과 그 경과가 묘사된다. 시므리의 쿠데타는 7일 천하를 끝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하나님의 공법이 무너진 사회에서는 군부 세력에게 실권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시므리의 무모한 모반 행위에 불복한 군대장관 오므리는 엘라 족속들의 처단에 몰두한 시므리를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7) 오므리(북)(왕상16:21-28)
북 이스라엘 왕 오므리가 12년 동안 다스렸고, 하나님 앞에 악하였다(왕상 16:21-28).
시므리의 사후 북 왕국은 둘로 나뉘어 4년 동안 왕권 싸움을 계속했다. 오므리의 군대가 디브니의 군대를 이기고 오므리가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고 왕권의 위엄은 땅에 떨어졌다. 한편 오므리는 세멜에게서 사들인 사마리아 산(24)에 왕궁을 건축하고 이후로 사마리아가 정치종교의 중심이 되게 하였지만 이는 토지를 매매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긴 행위였다(레 25:23-28). 오므리 역시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의 죄악을 지속하였다(12:25-33).
(1) 디브니와의 왕권 싸움에서 승리한 오므리는 12년을 다스렸고, 악을 행하였다(16:21-28)
[북이스라엘 ⑥ 오므리 : B.C. 885-873(재위: 12년) 왕상 16:15-28]
시므리의 사후 북왕국은 둘로 나뉘어 4년 동안 왕권 싸움을 계속했다. 오므리의 군대가 디브니의 군대를 이기고 오므리가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고 왕권의 위엄은 땅에 떨어졌다. 오므리는 세멜에게서 사들인 사마리아 산(24절)에 왕궁을 건축하고 이후로 사마리아가 정치・종교의 중심이 되게 하였지만 이는 토지를 매매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긴 행위였다(레 25:23-28). 오므리 역시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의 죄악을 지속하였다(12:25-33). 오므리를 이어서 아합이 왕이 되었다.
8) 엘리야의 사역(16:29-19:21)
엘리야는 우상 숭배하는 아합 왕 앞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였다(왕상 16:29-19:21).
선민(選民)으로서의 면모를 상실하고 타락한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끝내 한 번 택한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한 위대한 선지자 곧 엘리야를 보내어 위로와 경고의 말씀을 계속 전해 주셨음을 보도한다. 엘리야의 사역은 이처럼 하나님의 변치 않는 신실한 사랑의 증거인 동시에, 이와 같은 선지자의 사랑의 사역조차 무시하고 계속 타락한 이스라엘의 패역을 다시금 강조하는 것이기도 한다.
(1) 오므리를 계승한 아합은 이전의 왕들보다 더욱 우상을 숭배하였다(16:29-34)
아합이 북 이스라엘 왕으로 22년을 다스렸고,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바알을 섬겼다(왕상 16:29-34).
오므리의 계승자 아합은 선왕의 비상한 통치로 경제적 풍요를 누렸으나 바알 종교를 국교로 삼는 등 죄악의 극치를 이루었다. 성경에서 ‘가증한 여인’으로 칭함 받는 이세벨(계 2:20)을 아내로 삼은 것은 외세를 의지하여 정권을 유지하려는 비신앙의 산물로서 아합은 양심이 화인 맞은 자(딤전 4:2)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히엘이 여리고 성을 재건하려다 장자와 막내아들을 잃은 것은 약 오백년 전의 여호수아 예언이 어김없이 성취된 것이다(수 6:26).
[북이스라엘 ⑦ 아합 : B.C. 878-852(재위: 22년) 왕상 16:28-22:40; 대하 18:1-34]
오므리의 계승자 아합은 선왕의 비상한 통치로 경제적 풍요를 누렸으나 바알 종교를 국교로 삼는 등 죄악의 극치를 이루었다. 성경에서 ‘가증한 여인’으로 칭함 받는 이세벨(계 2:20)을 아내로 삼은 것은 외세를 의지하여 정권을 유지하려는 비신앙의 산물로서 아합은 양심이 화인 맞은 자(딤전 4:2)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히엘이 여리고 성을 재건하려다 장자와 막내아들을 잃은 것은 약 500년 전의 여호수아 예언이 어김없이 성취된 것이다(수 6:26).
(2) 엘리야 가뭄 예언(왕상17:1-24)
엘리야가 아합 앞에서 가뭄을 예언하였고, 그릿 시냇가와 사르밧에서 머물렀다(왕상 17:1-24).
본장 이후로부터 왕하 2장까지는 대선지자 엘리야의 사역을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이는 본서가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에 따른 구속 역사를 기록한 책임을 말해준다. 이미 앞 장에서 밝혀진바 있듯이 엘리야의 사역이 시작되었던 때는 우상숭배의 기운이 극도로 창궐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엘리야의 사역 중 대부분은 우상(바알) 세력과의 투쟁으로 일관되었으며, 그는 어떠한 위협 앞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는 강인하고 담대한 신앙의 용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제자 엘리사와 마찬가지로 그가 남긴 행적은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인 여러 이적들로 가득하였다.
17:1-7 엘리야와 가뭄: 엘리야가 아합에게 나타나 바알 숭배에 대한 심판으로 가뭄이 잇을 것을 선포한다. 이는 땅에 내리는 축복이 바알로부터 온 것이라는 가나안 종교의 무력함을 드러내고 자연의 모든 현상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 경고이다.
17:8-16 사르밧 과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땅이 가뭄으로 죽어갈 때에 엘리야는 새로운 공궤지로 시돈 땅을 지시받는다. 본문에는 이방 땅 시돈의 사르밧 과부의 엘리야 공궤 사건과 엘리야의 보응적인 이적 사건이 기록된다. 하나님 신앙이 이스라엘에서 사라져가는 상황에서도 바알 숭배가 만연한 이방의 한 여인이 하나님을 공경한 사실은 이방인도 구원의 은혜에 동참할 수 있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17:17-24 죽은 아들의 소생 기적: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이적을 목격한 엘리야는 과부의 죽은 아들이 소생하는 놀라운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2-1) 선지자 엘리야가 아합의 바알 숭배에 대한 심판으로 가뭄을 선포했다(17:1-7)
본장에서 왕하 2장까지는 선지자 엘리야의 사적을 중심으로 한 기사가 소개된다. 언약 백성의 신앙과 왕국의 운명을 회복시키기 위한 그의 활동은 구약 하나님 나라의 중심을 이룬다. 역대기에 축소된 엘리야의 선지 사역이 중점적으로 거론된 것은 열왕기 사가의 선지자적 관점을 드러내는 것으로, 제사장적 관점의 역대서와 구분짓게 한다.
본문은 엘리야가 아합에게 나타나 바알 숭배에 대한 심판으로 가뭄이 있을 것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이는 땅에 내리는 축복이 바알로부터 온 것이라는 가나안 종교의 무력함을 드러내고 자연의 모든 현상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 경고이다.
(2-2) 엘리야가 하나님의 지시로 시돈 땅으로 갔고, 사르밧의 과부에게 이적을 행하였다(17:8-16)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 모든 땅이 가뭄으로 죽어갈 때에 엘리야는 새로운 공궤지로 시돈 땅 사르밧을 지시받는다. 본문에는 이방 땅 시돈의 사르밧 과부의 엘리야 공궤 사건과 엘리야의 보응적 이적 사건이 기록된다. 하나님 신앙이 이스라엘에서 사라져가는 상황에서도 바알 숭배가 만연한 이방의 한 여인이 하나님을 공경한 사실은 이방인도 구원의 은혜에 동참할 수 있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 사르밧으로 가라 하심(8-9) 사르밧에 머물면 과부가 음식을 줄 것이다. * 과부를 만나는 엘리야(10-14) 엘리야가 사르밧의 한 과부에게 떡 한 조각을 청하지만 과부는 아들과 같이 떡을 먹은 후 죽을 것이라 하여 엘리야는 떡을 만든 후 본인이 먼저 먹으면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한다. *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음(15-16) 엘리야의 말대로 하니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다.
(2-3)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으나 엘리야의 기도로 소생하는 기적이 일어났다(17:17-24)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거처에 머무르는 중에 발생한 사건, 곧 그녀의 죽은 아들을 소생시킨 사건을 기록한 부분이다. 엘리야는 천지만물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이미 체험하였거니와(4,15절), 이제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체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본문의 사건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엘리사의 이적과(왕하 4:33-37) 매우 흡사하다.
(3) 엘리야의 갈멜산 기도(왕상18:1-46)
엘리야는 450명 바알 숭배자들과의 갈멜 산 대결에서 참 하나님의 권능을 보였다(왕상 18:1-46).
엘리야가 아합을 비롯한 우상 숭배자들과 벌인 일전이 본 장에서 펼쳐진다. 3년 반에 걸친 대 가뭄은 이스라엘에 실로 엄청난 곤경을 가져다주었다.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이 같은 국가적 재앙을 맞아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선지자들을 박해하는 이세벨의 무리와 어울려 바알 숭배를 더욱 노골화하였다. 하나님은 이들과 갈멜 산상에서 승부하여 이기도록 하심으로써 당신만이 참 하나님임을 증명하셨다.
(3-1) 가뭄이 시작된지 3년 반이 지나서 엘리야는 아합 앞에 서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18:1-15)
엘리야갸 이스라엘을 떠난지 3년 후에, 그리고 가뭄이 시작된지 3년 반이 지나서, 엘리야는 아합 앞에 서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말해서 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때에 기근이 극심하여 아합과 그의 신복 오바다(오바다서를 기록한 선지자가 아님)는 짐승을 먹일 목초를 찾아 온 땅을 살폈다. (이 오바다는 이세벨이 일부 선지자들을 죽이고 나머지를 멸하려 할때에 1백 명의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구원한 사람이었다.)
오바다가 목초를 찾아다니는 중에 엘리야가 그를 만나 아합에게 자신의 행방을 알리라고 명했다. 오바다는 아합이 엘리야를 영원히 침묵시키려고 맹렬히 찾고 있으므로 그의 행방을 아합에게 알리면 자기가 죽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만일 오바다가 엘리야의 행방을 알려주면 아합은 의심의 여지없이 찾아 나설 것이다. 그러나 그 때쯤이면 이미 여호와의 신이 엘리야를 어디론가 데려가 버릴 것이고 아합은 거짓 보고를 했다는 이유로 오바댜를 죽일 것이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선지자를 보호했던 오바댜에게 그곳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아합과 엘리야의 만남이 준비되었다.
(3-2)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의 대결로 하나님이 참 신임을 증거했다(18:16-40)
아합과의 대면(18:16-19).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을 섬기는 왕 아합은 필연적인 원수로서 만났다. 3년 6개월 동안의 가뭄을 겪었음에도 아합은 깨닫지 못하고 살기 등등하게 그 책임을 엘리야에게 전가시킨다. 만군의 하나님의 대행자 엘리야는 두려워하지 않고 이 가뭄은 아합과 그 가족의 우상 숭배에 대한 재앙이라고 비난하며 갈멜 산에서 누구의 신이 참 신이신가를 증거하기 위한 대결을 요구했다.
여호와와 바알(18:20-40). 결정의 순간은 다가왔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대표했고, 450명의 아합의 선지자들은 바알을 대표했다.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 신으로 인정될 것이었다.
수많은 바알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26-29절) 온갖 광란적인 방법을 동원하였으나 이는 결국 그들 스스로 바알의 허구성을 폭로한 셈이었다. 저녁에 엘리야의 기도에 의해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엘리야의 제물을 불 살랐다.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던(21절)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목도하게 되었고 분노하여 바알 숭배자들을 도륙하였다. 백성들이 하나님이 참 신인 것을 인정하고 바알의 선지자들을 처형한 후에 비로소 비가 올 수 있었다.
(3-3) 엘리야는 약속을 의지해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단비를 내려 주셨다(18:41-46)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 비를 보내겠다는 약속을 이루실 것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갈렘 산의 기적을 목격한 아합이 회개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로 돌이킨 백성들을 보시고 단비를 내려 주셨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을 거역하는 우상 숭배의 길을 고집한 아합은 끝내 참혹한 최후를 맞이한다(22:38). 결국 본문은 죄인을 향해 주어지는 회개의 기회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일반적인 은총을 내리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4) 엘리야의 낙심(왕상19:1-21)
엘리야는 이세벨을 피해 도망했고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위로와 사명을 받았다(왕상 19:1-21).
호렙 산의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의 이야기가 본 장에 소개되고 있다. 갈멜 산에서의 대결은 엘리야의 승리로 끝났으나 이로 인한 이세벨의 복수는 더 극렬하였다. 하나님은 광야로 도망하여 낙심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나타나시어 40주야 후 호렙 산에 도착하도록 하셨다. 호렙 산의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로 엘리야를 위로하시고 차후에 할 일을 이르셨다.
(4-1) 엘리야는 이세벨에게서 도망하여 낙담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새 힘을 주셨다(19:1-8)
아합이 엘리야가 선지자들을 죽인 일을 이세벨에게 말하자 그녀는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광야로 도망하여 로뎀 나무 아래서 낙담과 좌절감에 빠졌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휴식과 먹고 마실 것을 주신 다음, 또 휴식과 먹고 마실 것을 주시는 방법으로 그에게 힘을 주셨다. 엘리야는 다시 힘을 얻어 호렙으로 40주야를 걸어갈 수 있었다.
본문에서 갈멜 대첩에도 불구하고 이세벨의 보복 맹세를 들은 엘리야가 낙담하여 도피하는 모습을 통해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연약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4-2) 엘리야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고, 하사엘, 예후, 엘리사에게 기름 붓는 사명을 받는다(19:9-18)
인간적 공포와 불안으로 좌절에 빠진 엘리야가 호렙 산에서 세미한 소리로 나타난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의 종에게 이런 고통을 경험하게 하시어 교만하지 않고, 자신의 무능을 절감하여 약한 자 중에서 강하게 역사하시는(고후 12:8,9)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도록 하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엘리사에게 북쪽, 다메섹 광야로 돌아가라고 이르셨다. 엘리야는 기름부음을 세 차례 행해야 했다. 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을 삼아야 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그 왕에게 징벌을 받을 것이다. ②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아야 했다. 예후는 아합 집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할 것이다. ③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아야 했다.
이 세 사람이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할 것이나(1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도 맞추지 않은 7,000명을 남겨두실 것이다.
(4-3) 엘리야가 엘리사를 후계자로 불렀고, 엘리사는 가족을 떠나 엘리야를 따랐다(19:19-21)
엘리야는 벧산 근처 요단 계곡에 위치한 아벨므홀라로 가서 농부인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야는 그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졌는데, 이는 엘리사가 그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표시였다. 엘리사는 집에 돌아가 가족에게 작별하게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엘리야는 그 청을 승낙하면서, 방금 그에게 일어난 일, 즉 엘리야가 그를 임명한 일을 잊지 말라고 경계했다. 큰 잔치를 베푼 후에 엘리사는 일어나 엘리야를 좇아 그의 시종이 되었다.
9) 아합의 악행(왕상20:1-22:40)
아합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순종했고 아람 전쟁에서 죽었다(왕상 20:1-22:40).
본문에서는 주로 아합의 대내외적 통치에 있어서 그의 신앙 타락과 불순종으로 인한 실정(失政)과 악정(惡政)에 관련된 사건들을 소개함으로써, 인간이 맺는 근본 관계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자는 결국 일상생활 전체에서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 것인지 또한 그런 자는 비록 왕일지라도 필히 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여러 번의 기회를 주셨음에도 그가 계속 불순종하였음을, 또한 그러한 악한 통치자에 의해 백성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게 되었는가에 대해,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으로 마침내 대(對) 아람 전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 사실들에 대해 집중 보도하고 있다.
(1) 아람과 이스라엘 전쟁(왕상20:1-43)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벤하닷을 살려주어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다(왕상 20:1-43).
본 장에는 17장부터 계속되었던 엘리야의 사역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중단하고 이스라엘 왕 아합과 아람 왕 벤하닷의 싸움에서 아합이 두 번이나 물리치고 완전히 승리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1-1) 아람 왕 벤하닷이 아합에게 항복을 요구하였고, 아합은 거절하였다(20:1-12)
본문은 엘리야 사적 중심의 기사 가운데 연대기 순서로 삽입된 기사로서 다메섹의 벤하닷 왕(15:20)이 아람의 도시 국가 32명의 왕들을 연합하여 사마리아를 1차로 침공한 사건이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도 교만하게 머리를 곧추세우던 아합이 벤하닷의 위세 앞에서는 비굴하게 무릎 꿇는 수치를 보인다.
벤하닷의 첫 번째 요구를 나약하게 수락했던 아합은 두 번째의 더욱 과도한 요구를 듣고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분노와 요구에 힘입어 벤하닷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화가 난 벤하닷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영을 쳤다.
(1-2) 아합이 아람 전투에서 두 차례 승리하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벤하닷을 살려 줌(20:13-34)
이스라엘의 승리(20:13-21). 벤하닷의 침공과 무모한 요구로 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 갈렘 산에서 불로 응답하여 이스라엘과의 언약을 지키신 (창 15:7) 하나님께서 무명 선지자를 아합에게 보내어 그 자비하신 속성을 나타내 보이신다(애 3:22,23). 불과 7천명의 병력으로 아람 대군을 격퇴시킨 하나님은 오직 자신만이 환난 날의 구원자시오(시 9:9),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삼상 17:47)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신다.
두 번째 승리(20:22-30). 첫 번째 전투에서 패한 벤하닷과 그 신복들은 패인이 산신(山神) 여호와의 도움이라는 미신적 판단과 기습 공격의 예방이라는 전략적 측면에서 두 번째 전투지를 평지로 정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구원의 주체가 되신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불신 행위를 처단하여 아벡 평지를 그들의 무덤으로 만드셨다.
아합의 처사(20:31-34). 아벡에서 벤하닷의 2차 침공까지도 격퇴시킨 아합의 교만에 찬 실책이 기술된다. 아합은 벤하닷의 임의적이고도 간교한 악의적 회유책에 말려들어(32-34절) 무모한 동정심을 발휘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되었던(42절) 벤하닷을 풀어주었다. 이 사건은 곧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진정한 구원의 주체를 인지하지 못한 아합의 인본주의적 자고(自高)함에서 기인된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불신앙적 처사였고 결과로 자신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1-3) 선지자들의 상징을 통해 벤하닷을 살려준 아합에게 심판이 선포되었다(20:35-43)
하나님을 모욕했던 벤하닷의 생명을 유지시켜 준 아합의 불신앙적 처사가 수많은 회개의 기회(18,20장)를 무산시켜 버린 패역한 그의 죄 성향과 더불어 하나님의 강력한 심판 의지를 촉발시켰다. 본문은 선지자들의 상징행위를 통해 아합에 대한 심판 예언의 강도를 점증시키는 한편 선포된 예언이 필연적으로 성취되리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드러내 준다.
(2) 아합의 나봇 포도원(왕상21:1-16)
아합은 이세벨의 계략에 의해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강탈하였다(왕상 21:1-16).
본문은 아람의 두 차례에 걸친 침입을 격퇴시킨 후 방만하고 자고한 심성 속에 행해진 아합의 범죄 사건으로서 결국 사치와 쾌락 속에 빠져든 아합은 일국의 왕으로서 무력한 농민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자 하는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혔다. 한편 나봇의 포도원 매매 거부는 그의 신앙적 양심에 근거한 것으로 원래 하나님께서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의 토지 매매를 금지하셨다(레 25:23-28; 민 27:1-11). 그러나 간교한 이세벨은 여호와 신앙을 가장하여 잔혹한 조작극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웠다.
(2-1) 아합은 물질적 욕망으로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였다(21:1-7)
본문은 아람의 두 차례에 걸친 침입을 격퇴시킨 후 방만하고 자고한 심성 속에 행해진 아합의 범죄 사건으로서 결국 사치와 쾌락 속에 빠져든 아합은 일국의 왕으로서 무력한 농임 나봇의 포도원을 갖고자 하는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혔다. 나봇의 포도원 매매 거부는 그의 신앙적 양심에 근거한 것으로 원래 하나님께서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의 토지 매매를 금지하셨다(레 25:23-28; 민 27:1-11). 그러나 간교한 이세벨은 하나님 신앙을 가장하여 잔혹한 조작극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였다.
(2-2) 이세벨은 음모를 꾸며서 나봇과 그의 아들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아합에게 돌렸다(21:8-16)
이세벨은 음모를 꾸몄다. 아합의 이름으로 나봇의 성읍 장로, 귀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불량자 두 사람으로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증거하여 죽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장로와 귀족들은 이세벨의 편지대로 나봇을 백성 가운데 앉히고 돌로 쳐 죽였고 이세벨은 왕에게 포도원을 취하게 했다.
패역한 이세벨은 나봇이 여호와의 율법을 범한 까닭에 처형된 것처럼 일을 꾸미는 간계함을 보였다. 나봇이 죽은 후에 그의 소유가 그 아들들에게 물려질 것이기에 이세벨은 그 아들들도 죽였다(왕상 9:26).
(3) 아합의 죽음(왕상21:17-22:40)
일시 회개했던 아합은 미가야의 예언을 무시하고 아람을 치러가서 죽임을 당했다(왕상 21:17-22:40).
21:17-26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가는 아합에게 엘리야가 등장하여 아합의 죄를 폭로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한다. 이처럼 죽음을 각오한 진리의 외침은 하나님의 공의의 부재가 느껴지는 오늘의 상황 속에 꼭 필요하다. 한편 아합은 음란한 여인 이세벨로 인하여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된다(잠6:26).
21:27-29 엘리야의 엄중한 저주 선포로 그 마음을 돌이킨 아합의 회개 장면(27)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자비(29)가 교차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아합의 회개는 당시에는 진실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추후 이어지는 그의 사악한 행적(22장)은 그 회개가 일시적이며 충동적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해준다. 결국 한번 죄에 붙들린 자는 가의 전인격적인 결단을 수반한 자기 부인 없이는 그 죄의 악순환 속에서 파멸할 수밖에 없다(시 140:11; 잠 11:3).
22:1-4 22장은 남북 이스라엘의 연합군과 아람 간의 제3차 전쟁을 배경으로 아합의 비극적 종말을 다루고 있다. 한편 본문은 그 전쟁의 발단 부분으로서 아람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동맹 체결을 기술한다. 여기서 열왕기 사가와는 달리 역대기 사가는 이 기사를 아합의 원조 요청적 측면에 초점을 둠으로써 두 역사가간의 사적 관점의 차이를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22:5-28 아합과 그의 사위 여호사밧은 출전에 앞서 선지자 미가야에 의해 전쟁에서의 패전과 왕의 사망(17)이라는 경고적 예언을 접하게 된다. 19-23절은 포로 이후의 묵시 문학적 요소를 많이 반영하고 있는데(사 6:1-8) 거짓 선지자들이 악의 세력인 아합을 멸망시킬 예언을 하고 있다.
22:29-40 아합은 미가야의 예언(17)을 무시하고 출전하였으나 내심 불안하여 변장을 하였다. 그러나 인위적인 방어책으로는 저주(21:19)를 피하지 못했다(38). 이로써 가장 극악한 왕 중의 하나였던 아합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앞에 비참한 최후를 맞고야 말았다.
(3-1) 엘리야가 아합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하였다(21:17-26)
엘리야가 재등장하여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하는 장면이다. 나봇의 포도원을 취하러 내려가는 아합 왕의 행렬을 지켜보고 있던 군중들 중 대다수는 아무런 의구심도 갖지 않은 채 구경에만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봇의 평소 행실을 소상히 알았을 친지들로서는 나봇의 죽음에 반드시 사악한 음모가 게재되어 있었으리라고 확신하였을 것이다. 그런 마당에 악인의 소행이 은밀히 감추어지게 되고 무죄한 자의 피가 방치된다고 하면 진상을 짐작하였던 경건한 무리들은 깊은 회의와 좌절에 빠져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욥 21:15; 시 53:1). 하지만 엘리야의 출현과 그의 입을 빌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가증스러운 죄상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에 참된 선지자가 있음과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온 무리들에게 증거되었다. 아합은 음란한 여인 이세벨로 인하여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된다(잠 6:26).
(3-2) 아합이 금식하며 회개하였고, 하나님은 아합의 겸비함을 보셨다(21:27-29)
엘리야의 엄중한 저주 선포로 그 마음을 돌이킨 아합의 회개 장면(27절)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자비(29절)가 교차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아합의 회개는 당시에는 진실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추후 이어지는 그의 사악한 행적(22장)은 그 회개가 일시적이며 충동적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해 준다. 결국 한번 죄에 붙들린 자는 그의 전인격적인 결단을 수반한 자기 부인 없이는 그 죄의 악순환 속에서 파멸할 수밖에 없다(시 140:11; 잠 11:3).
(3-3) 아합이 여호사밧과 연합하여 아람을 치려하였고, 거짓 선지자들은 승리를 예언하였다(22:1-12)
22장은 남북 이스라엘의 연합군과 아람 간의 제3차 전쟁을 배경으로 아합의 비극적 종말을 다루고 있다.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 3년간 평화가 유지된 후에, 아합은 요단 동편의 길르앗 라못을 아람 족속에게서 다시 취해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찍이 벤하닷이 아합에게 사면을 받을 때에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한바 있는데(20:34),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마침 그 때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아합을 방문하던 중에 그 제의를 듣고 기꺼이 그 군사적인 모험에 협력하겠다고 했다. 여호사밧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 물어보자고 제안했다. 아합의 궁에 있던 400명의 선지자들은 그 계획에 찬동하고 승리를 약속했다. 아마 그들은 엘리야와 결투를 벌이기 위해 갈멜 산에 올라가지 않은 그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들이었을 것이다(18:19,22) 여호사밧은 그밖에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는지를 물었다. 그의 요청으로, 타협 없는 메시지 때문에 아합에게 미움을 산 두려움을 모르는 선지자 미가야가 앞에 나왔다. 미가야가 소환될 당시 400명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에게 아람을 공격하자고 일제히 촉구하고 있었다. 그 중 하나인 시드기야는 철로 뿔을 만들어, 아합과 여호사밧이 무쇠같은 힘으로 아람 군대를 무찌를 것이라고 표현했다.
(3-4) 미가야는 아합이 살해될 것을 예언하였다(22:13-28)
미가야는 처음에 왕에게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라고 조롱조로 답했으나 그것을 알아차린 아합의 거듭된 물음에 진실된 예언을 하였다. 아합이 살해되고 그의 군대가 흩어질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미가야는 아합을 꾀어 죽게 하려고 거짓말 하는 영이 모든 선지자에게 들어간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악을 지어내시지는 않지만, 그분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악을 사용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셨다는 것은 다름 아닌 그것을 허락하셨다는 의미이다.
(3-5) 아합은 예언대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22:29-40)
아합은 미가야의 예언(17절)을 무시하고 출전하였으나 내심 불안하여 변장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그의 인위적인 방어책은 저주(21:19)를 피하게 하지 못했다(38절). 이로써 가장 극악한 왕 중의 하나였던 아합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앞에 비참한 최후를 맞고야 말았다. 아합을 이어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다.
10) 여호사밧(남)(왕상22:41-50)
남 유다 왕 여호사밧이 25년 동안 다스렸으며,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다(왕상 22:41-50).
역대하에 언급된 여호사밧의 주요한 치적으로는 거국적인 종교개혁과 합법적인 재판 제도의 시행 등을 들 수 있다. 결과적으로 여호사밧은 아합과의 연혼과 군사동맹(대하 18:1-34)을 비롯하여, 아하시야와의 상업적 동맹(대하 20:36)과 산당을 폐하지 않는(대하 20:33) 등 몇 차례 실책을 범하였으나 대체적으로 여호와를 경외한 자였다.
(1) 여호사밧은 25년을 다스렸고, 대체로 정직히 행하였다(22:41-46)
[남 유다 ④ 여호사밧 : B.C. 873-848(재위: 25년) 왕상 22:41-50; 대하 17:1-20:37]
역대하에 언급된 여호사밧의 주요한 치적으로는 거국적인 종교 개혁과 합법적인 재판 제도의 시행 등을 들 수 있다. 결과적으로 여호사밧은 아합과의 연혼과 군사 동맹(대하 18:1-34)를 비롯하여, 아하시야와의 상업적 동맹(대하 20:36)과 산당을 폐하지 않는(대하 20:33)등 몇 차례 실책을 범하였으나 대체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한 자였다.
(2) 여호사밧은 아하시야와 불경건한 동맹을 맺는 실책을 범하였다(22:47-50)
여호사밧의 왕국은 에돔 땅을 포함했으며(삼하 8:14), 그는 거기에 섭정 왕을 두었다. 후에 그이 아들 여호람이 반역을 당해 에돔을 잃었다(왕하 8:20).
그는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와 손잡고 에시온 게벨에서 조선 공사를 벌였다(대하 20:35,36). 그들의 계획은 오빌에 배를 보내어 금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항구를 떠나기도 전에 배들이 파선했다(48절).
선지자 엘리에셀은 아하시야와의 불경건한 동맹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 까닭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여호사밧에게 일러주었다(대하 20:37). 아하시야가 그 계획을 다시 제안하자 여호사밧은 거절하였다(49절).
여호사밧이 죽은 후에 여호람이 왕이 되었다.
11) 아하시야(북)(왕상22:51-53)
북 이스라엘 아하시야 왕이 2년 동안 다스렸으며,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였다(왕상 22:51-53).
북 이스라엘의 8대 왕 아하시야의 악정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공의를 행할 마땅한 책임을 저버리고 패역한 우상 숭배에 탐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왕하 1:2-4). 이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이스라엘의 비극적 운명이 필연적으로 이어질 것이다.
(1) 아하시야는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 앞에 악하였다(22:51-53)
[북이스라엘 ⑧ 아하시야 : B.C. 853-851(재위: 2년) 왕상 22:40-왕하 1:18; 대하 20:35-37]
본문은 북이스라엘의 8대 왕 아하시야의 악정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공의를 행할 마땅한 책임을 저버리고 패역한 우상 숭배에 탐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왕하 1:2-4). 이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이스라엘의 비극적 운명이 필연적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12) 엘리야(왕하1:1-2:11)
아하시야가 심판을 받았고,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선지자직을 승계하였다(왕하 1:1-2:11).
아합 왕 사후 왕상22:51에서 시작된 북 왕국의 제8대 왕 아하시야의 범죄 사실과 이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들자 바알세붑에게 신탁을 청하는 불신앙을 보이고 자신의 죽음을 선언한 엘리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도 회개는커녕 도리어 엘리야를 체포하기 위해 세 번씩이나 군대를 보낸다. 한편 엘리야는 타락의 역사를 되풀이하던 시대에 나타나 바알 종교를 타파하고 북 왕국 백성들의 여호와 신앙회복을 위해 사역하다 승천한다. 엘리야의 이런 영광스러운 최후는 아하시야왕의 비참한 죽음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1) 북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왕하1:1-18)
아하시야가 바알세붑을 의지하는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왕하 1:1-18).
1:1-8 왕상 12장에서 시작된 남북 분열 왕국의 퇴조와 멸망(17장: 이스라엘, 25장: 유다)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기술된 본서는 여러 선지자들의 활약과 함께 그 논지를 선지자적 관점에 둠으로써 남북조의 멸망 원인을 추적하고 있다. 한편 본문은 아합 왕 사후 왕상 22:51에서 시작된 아하시야 기사의 연속으로서 북 왕국의 창건(왕상 12:25이하)이래 가장 강력하고 번성했던 오므리 왕조(B.884-841)의 쇠약해진 모습(1절)을 그리고 있다. 곧 본문은 병든 아하시야의 우상 숭배적 불신앙(2)과 엘리야의 신탁(3)을 기술하여 당시 이스라엘 왕가의 패역성을 고발하고 있다(왕상 16:26, 31).
1:9-18 악에 대한 파수적 역할을 담당한(계 11:10) 엘리야의 경고(4,6)가 성취된다(17). 아하시야의 엘리야 체포령은 신적 권능에 도전하는 크나큰 범죄 행위였다(출 14:10-12; 17:2,3). 결국 엘리야 저주로 인한 두 오십부장과 그 오십 인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살라진 것, 그리고 아하시야의 죽음(17)은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진리의 당위적 결과였다.
(1-1) 병든 아하시야는 우상을 의지하였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였다(1:1-8)
왕상 12장에서 시작된 남북 분열 왕국의 퇴조와 멸망(17장: 이스라엘, 25장: 유다)의 역사가 지속적으로 기술된 본서는 여러 선지자들의 활약과 함께 그 논지를 선지자적 관점에 둠으로써 남북조의 멸망 원인을 추적하고 있다.
본문에서 모압은 이스라엘을 배반했고, 병든 아하시야는 바알세붑에게 물어 보려하였다. 엘리야는 이런 아히시야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예언을 전하였다.
본문은 아합 왕 사후 왕상 22:51에서 시작된 아하시야 기사의 연속으로서 북 왕국의 창건(왕상 12:25이하)이래 가장 강력하고 번성했던 오므리 왕조(B.C. 884-841)의 쇠약해진 모습(1절)을 그리고 있다. 병든 아하시야의 우상 숭배적 불신앙(2)과 엘리야의 신탁(3)을 기술하여 당시 이스라엘 왕가의 패역성을 고발하고 있다(왕상 16:26, 31).
(1-2) 아하시야가 바알세붑을 의지하려 했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었다(1:9-18)
악에 대한 파수적 역할을 담당한(계 11:10) 엘리야의 경고(4,6)가 성취된다(17). 아하시야의 엘리야 체포령은 신적 권능에 도전하는 크나큰 범죄 행위였다(출 14:10-12; 17:2,3).
결국 엘리야 저주로 인한 두 오십부장과 그 오십 인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살라진 것, 그리고 아하시야의 죽음(17)은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진리의 당위적 결과이다.
아하시야가 죽자 그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그의 동생 여호람(후에 요람으로 언급됨)이 그 위를 이었다.
(2) 엘리야의 승천(왕하2:1-11)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선지자의 지위를 승계하고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왕하 2:1-11).
아합에서 아하시야 재위 때까지 무수한 핍박과 학대를 감내하며 선지자의 소명을 완수한(계 3:5,11,21) 엘리야의 승천이 그의 마지막 사명인 후계자 승계의 여러 정황과 더불어 극적으로 묘사된다. 한편 여기서 언급된 엘리야와 엘리사의 행적과 대화는 겸손과 열정적인 여호와 신앙의 백미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제 엘리야의 시험(2,4,6)을 극복한 엘리사의 선지자 승계가 이루어진다.
(2-1)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을 발휘하여 후계자의 모습을 보였다(2:1-6)
아합에서 아하시야 재위 때까지 무수한 핍박과 학대를 감내하며 선지자의 소명을 완수한(계 3:5,11,21) 엘리야의 사역이 끝나고 엘리사가 그 뒤를 이을 때가 이르렀다. 엘리야의 마지막 사명인 후계자 승계의 여러 정황이 극적으로 묘사된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여러 장소로 옮기면서 연단시키고 있다. 본문의 엘리야와 엘리사의 행적과 대화는 겸손과 열정적인 여호와 신앙의 백미를 보여준다.
(2-2) 엘리사는 성령의 능력을 두 배로 구했고, 엘리야는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다(2:7-11)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 가에 섰고 엘리야가 겉옷으로 물을 치니 요단 강이 갈라졌다. 이 사건은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른 사건과 유사한 점이 있다. 모세의 지팡이가 방랑하던 백성들의 지도자로서의 모세의 권위를 상징해 준다면, 엘리야의 겉옷은 그의 선지자적 직무를 상징해 준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성령의 능력을 두 배로 구했고, 엘리야는 불수레와 불길이 오자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불수레와 불말은 구약성경에서 종종 언급되는데(6:17) 흔히 불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출 3:2;24:17; 신 33:2; 합 3:3-5)이 ‘불수레’와 ‘불말’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와 초자연적인 권능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13) 엘리사(왕하2:12-8:15)
엘리사가 이스라엘 각지에서 선지자 사역을 행하고 이적을 보였다(왕하 2:12-8:15).
엘리야의 뒤를 이은 엘리사의 사역을 중점적으로 기록한 부분이다. 엘리야의 예언(왕상19:15-18, 21:17-21)대로 아합 왕가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까지의 북 왕국의 역사와 그러한 와중에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통해 신실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는 계속되어졌다.
(1) 엘리야의 소명을 전수받음(왕하2:12-25)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사와 함께 하였고, 사랑과 저주라는 상반된 이적을 행하였다(왕하 2:12-25).
2:12-18 엘리야 승천 직후 일어난 상황으로서 엘리사의 선지자 승계가 요단 강 가름(14)과 엘리야 권한 위임(15)으로써 증거된다. 한편 엘리사의 슬픔(12)은 인간적 절망에 기인된 슬픔이 아니라 신실한 영적 지도자의 세상 부재(不在)와 엘리야에 대한 지고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었다.
2:19-25 엘리사가 행한 여리고에서의 사랑(19-22)과 벧엘에서의 저주(23,24)라는 상반된 첫 이적들이 대조되어 나타난다. 이는 택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인 동시에 당신의 권위에 대적하는 악인들에 대한 심판의 역사를 예표하는 것으로서 엘리사의 선지자적 정통성을 확증시켜 준 사건이었다.
(1-1) 엘리사의 선지자 승계가 요단 강 가름과 영적 통찰력으로서 증거되었다(2:12-18)
엘리야 승천 직후 일어난 상황으로서 엘리사의 선지자 승계가 요단 강 가름(14)과 엘리사의 영적 통찰력(18)으로써 증거된다. 엘리사의 슬픔(12)은 인간적 절망에 기인된 슬픔이 아니라 신실한 영적 지도자의 세상 부재(不在)와 엘리야에 대한 지고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었다.
(1-2) 엘리사가 이적들을 행하여 선지자적 정통성을 드러내었다(2:19-25)
엘리사가 여리고에서 물의 근원을 고치는 이적을 행하였다(19-22). 벧엘로 올라가던 중 자신을 조롱하는 청년들을 저주하여 42명이 암곰 둘에게 찢기었다(23-25).
본문은 엘리사가 행한 여리고에서의 사랑(19-22)과 벧엘에서의 저주(23,24)라는 상반된 첫 이적들이 대조되어 나타난다. 이는 택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인 동시에 당신의 권위에 대적하는 악인들에 대한 심판의 역사를 예표하는 것으로서 엘리사의 선지자적 정통성을 확증시켜 준 사건이었다.
(2) 북 이스라엘 왕 여호람(왕하3:1-27)
북 이스라엘의 여호람이 12년간 다스렸고, 악했으며, 엘리사 사역이 시작되었다(왕하 3:1-27).
이스라엘 왕 여호람(B.852-841)이 바알의 주상을 철거하는 기사와 이스라엘과 유다 동맹군이 모압을 토벌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동맹군은 모압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군대를 신뢰하는 과오를 범하여 매우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함으로써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고 아울러 모압을 정벌할 수 있었다.
(2-1) 아하시야의 동생 여호람이 이스라엘을 통치하였고, 모압이 반란하였다(3:1-12)
[북이스라엘 ⓽ 요람(여호람): B.C. 852-840(재위: 12년) 왕하 3:1-9:25, 대하 22:5-7]
여호람의 치세(3:1-3). 아하시야를 승계한 동생 여호람의 이스라엘 통치가 개괄된다. 여호람은 부분적 종교 개혁(2절)을 단행하기는 했지만 그 동기가 진실한 신앙적 의지보다는 우상 숭배로 인해 자기 가계에 닥쳤던 파멸(1:17; 왕상 22:35)에 대한 공포와 정략적(유다와의 제휴; 3:7) 발상에 기인한 것으로서 그 또한 여타의 북이스라엘 왕들과 같은 악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8:27; 10:31).
모압의 반란(3:4-12). 남북 분열 왕국 퇴조의 첫 조짐으로 아합 사후의 이스라엘 쇠퇴기를 틈탄 모압의 배반(5절; 1:1)과 유다 왕 여호사밧과의 동맹 속에 진행되는 모압 원정 과정이 엘리사와의 첫 만남(12절)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되었다.
(2-2) 엘리사는 여호람의 미온적 신앙 자세를 질타하고 이적을 행하였고, 승전을 예언했다(3:13-20)
엘리사의 선지자적 징표를 나타낸 사적 기사(2:14,21,24)에 이어 본격적인 엘리사의 공적 활동이 시작된다. 본문에서 엘리사는 하나님의 대변자라는 투철한 선지자적 사명감을 가지고 견책(13절), 그리고 이적(16,17절)과 승전(18,19절)의 예언을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다. 엘리사의 여호람 견책은 부분적 종교 개혁이라는 그의 미온적 신앙 자세를 질타한 것으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2-3) 모압에 임한 하나님의 이적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모압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3:21-27)
엘리사 예언(16-19절)의 성취로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22절)에 기인한 이스라엘의 완승과 처절한 장면(27절)으로 종식되는 모압의 패배가 기술된다. 이 예언의 성취로 엘리사의 선지자적 위상이 이스라엘 중에 공식적으로 확증되었으며 이제 그의 일생은 이스라엘을 향한 본격적인 선지 사역에 들어서고 있다.
(3) 엘리사의 사역(왕하4:1-8:15)
엘리사가 각지에서 선지자 사역과 이적을 행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냈다(왕하 4:1-8:15).
4장 엘리사의 기적이 돋보이고 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선지자적 권위를 왕 앞에서도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엘리사는 이스라엘 각지에 두루 다니면서 선지자적 사역들을 행하기 시작했다.
5장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 치유가 그 주요 내용이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와서 치유를 받은 본 장의 사건은 특별히 엘리사의 다른 이적들과 구별된다. 치유 대상이 이스라엘인이 아닌 이방인이었다는 것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나 이방을 불문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
6장 쇠도끼를 물에서 떠오르게 한 사건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삶에 세심하고 깊이 있게 간섭하여 돌보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한편 본문에서 보다 중요한 사실은 엘리사가 이스라엘 국가 전체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자 엘리사는 조용하게 백성들을 돌보던 태도에서 돌이켜 나라를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그는 아람 군대의 계획을 드러냄으로써 자기 백성을 위험에서 구출하였다(8:13). 아람 왕은 자신들에게 번번이 실패를 안겨 준 엘리사를 처단하기 위하여 엘리사와 그의 사환이 있던 도단 성읍을 포위해 버렸다. 엘리사의 사환이 아침에 일어나 그러한 위급한 광경을 목격하고 낙망하여 소리치자 엘리사는 그의 눈이 열리기를 기도하였다. 두려워 떠는 그에게 엘리사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군대가 자신들을 둘러 지키고 있는 광경을 보였다.
7장 엘리사의 예언과 그 성취가 본 장의 주요 사건으로 소개되고 있다. 엘리사는 사마리아의 기근이 해결될 것과 경제 사정의 해결을 예언했었다. 당시의 환경을 고려하여 볼 때 이 예언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였으나 하나님은 문둥이 네 명을 통하여 지극히 간단하고도 쉽게 이 예언을 성취시키셨다.
8:1-6 문둥이가 된 게하시(5:27)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연대순으로 4장에 이어지는 기사이며 엘리사의 충고로 기근을 피해 7년간 이방 블레셋에 우거하다 돌아온 수넴 여인(4:8-37)의 소유권 회복을 다룬다. 율법상 토지의 매매는 불가했으며, 영원히 그 후손에게 상속될 수밖에 없었다(레 25:28; 민 36:7,8).
8:7-15 엘리야의 예언(왕상 19:15)이 성취된 사건으로 범죄한 이스라엘의 징계(대하 24:23,24)를 위해 이전부터 하나님의 섭리 속에 준비되어 온 아람 왕 하사엘(10;32-36; 12:2-7)의 즉위가 엘리사의 확인 예언(13)과 함께 서술된다. 본문의 기사는 인간의 역사 속에 세심하게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과 함께 택한 백성들에 대한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기 위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3-1) 엘리사가 어려움에 처한 과부에게 기름 이적으로 도왔다(4:1-7)
죽은 제자의 부인이 엘리사에게 두 아이가 종으로 팔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엘리사는 이웃에게서 그릇을 빌려와서 남아 있는 기름을 부으라고 명하였다. 그릇들은 기름으로 가득했다. 과부는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두 아들을 구했다.
본장에 소개된 선지자로서의 사적, 공적 권위를 인정 받은 엘리사의 네 가지 이적의 기사들이 모두 지고한 사랑에 근거했다는 점에서 엘리사의 선지 사역이 바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사역(행 4:12; 롬 5:8; 고전 1:18; 엡 2:5,8) 성취의 방편임을 암시하고 있다.
본문은 사르밧 과부에게 행한 엘리야의 이적(왕상 17:14)과 유사하며 개인의 고통까지도 긍휼히 여긴 엘리사의 선지자적 신앙 인격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3-2) 엘리사가 자신을 선대한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소생시켰다(4:8-37)
수넴 여인의 믿음과 아들의 죽음(4:8-25). 신앙적 통찰력(9절)과 신앙적 열심(10절)을 소유한 수넴 여인과 엘리사의 만남 속에서 펼쳐지는 선대와 보답(17절)의 아름다운 정경 묘사와 아울러 그 아들의 죽음이 기술된다. 본문의 초점이 아들의 죽임이 아닌 수넴 여인의 믿음(22,23절)과 그 이후에 벌어질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에 맞추어져 있는바, 인간에게 있어서 절망적인 상황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가 역동할 기회로서 다가온다(시 107편).
소생의 이적(4:26-37). 하나님의 예정된 섭리의 절정을 이루는 이 사건은 엘리야의 사르밧 과부 아들의 소생 사건(왕상 17:19,21)과 그 내용 전개상 많은 유사점을 내포하고 있는바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소원(2:9)대로 임재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아들의 소생을 위해 엘리사가 취한 여러 행동(34,35절)들은 엘리사의 자기 희생적 헌신의 모습(출 32:32; 롬 9:1-3)을 보여준다.
(3-3) 엘리사가 독을 해독하고, 적은 보리떡과 채소로 백 명을 먹이는 이적을 행했다(4:38-44)
길갈에서의 이적(4:38-41). 본문은 엘리사가 치명적인 독이 든 국을 해독시킨 이적 사건으로서 이는 필요 때마다 도움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의 역사를 다시 한번 증거하고 있다. 본문은 모세의 마라 사건(출 15:22-25)을 상기시킨다(출 15:22-25).
식물 증식(4:42-44). 본문은 순수한 종교적 동기(42절; 민 18:12,13)에서 바쳐진 식물(食物)의 기적적인 증식을 기술하는바, 이 이적은 그리스도 기적 사건(마 14:13-21; 15:32-39)의 구약적 예시라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3-4) 이방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나병을 고침 받았고, 사환 게하시는 탐욕으로 나병이 (5:1-27)
나아만의 치유(5:1-19). 이 기사는 나아만의 문둥병과 그 치유 과정, 결과의 정황이 민족과 계층을 초월한 전인적 관계 속에 전개됨으로써 겸손과 신앙적 열심으로 순종하는 삶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기묘한 구원의 섭리를 보여준다(잠 3:34; 마 8:5-13). 이스라엘 내부적 상황에만 관여해 온 엘리사의 사역이 이제 그 외부적 상황, 곧 이방인에 대한 사역까지로 확대되면서, 나아만의 치유 기사는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사역을 예시하고 있다(시 22:27; 엡 3:6).
게하시의 범죄(5:20-27). 나아만의 치유가 자기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도움에 기인한 사실을 인지했던 엘리사의 이타적 겸손(16절)과 사환 게하시의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인하여 저질러진 저급한 거짓(수 7:22-26)의 범죄와 그 결과가 기술된다. 결국 본문은 탐욕과 거짓의 결과가 수반하는 필연적인 자기 파괴와 공의로운 심판의 결론을 도출시키고 있다(시 63:11).
(3-5)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했다(6:1-7)
떠오른 도끼(6:1-7). 선지 생도들의 사랑과 겸손의 공동체 속에서 베풀어진 엘리사의 이적 사건이 단편적으로 언급된다. 본문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시 115:3; 롬 4:17)의 현시와 함께 이를 그의 제자들에게 교훈시킨 엘리사의 선지자적 지도 역량을 드러내고 있다.
(3-6) 아람 왕이 엘리사를 체포하려 하나 하나님의 이적으로 패배하여 물러갔다(6:8-33)
아람 왕의 번뇌(6:8-13). 사적 이적 기사에 이어 다시 한번 서술된 엘리사의 공적 이적 기사로서 본문은 아람 왕의 엘리사 체포 전략의 발단 부분이다. 이는 엘리사의 영적 통찰력(9절) 속에서 아람의 이스라엘 기습 전략(8절)이라는 인간적 발상이 그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서(마 16:21-23) 아람 왕의 엘리사 체포령(13절)은 엘리사의 배경이 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지 못한 신앙적 우매함의 소치였다(출 16:8).
아람의 패배(6:14-23). 엘리사의 체포를 위한 아람의 도단 성 포위는 그 전후 상황 전개에서 말과 병거만을 믿은 아람 왕의 인본주의적 소치(시 20:7; 잠 14:18)와 사환의 인간적 공포(15절), 그리고 엘리사의 선지자적 통찰력(16절)의 교차적 진술과 함께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18-20절)가 기술된다. 이스라엘의 무혈 승전은 택한 백성의 안보라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의 결과(롬 8:37-39)로서 엘리사 또한 악을 선으로 갚은 사랑과 자비의 원리(22,23절)를 제시하였다.
포위된 사마리아 성(6:24-33). 비연대적 서술 방식으로 전개된 별개의 아람 침략 사건이 소개된다. 본문은 그 침략으로 포위된 성내의 심각한 기근을 한 여인의 처절한 대사를 통해 묘사하는 한편 왜곡된 시선으로 그 책임을 엘리사에게 전가시키는 왕의 외식적 행위(30절)와 불신앙(33절)을 고발한다. 이 시련은 이스라엘이 범죄(13:1-3)한 결과로서 이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적 심판인 동시에 백성에 대한 회개의 요청이기도 하다.
(3-7) 엘리사의 예언대로 사마리아 성이 회복되었고, 불신한 장관은 죽임을 당했다(7:1-20)
엘리사의 예언(7:1,2). 전 기사의 연속으로 사마리아 성의 원상 회복이라는 소망의 예언과 그 예언을 불신한 한 장관의 죽음에 대한 심판적 예언이 동시에 선포된다. 철저한 체념으로 인간적 의지가 사라질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때이다.
예언의 성취(7:3-20). 당시 사마리아의 형편상 그 성의 회복은 인간적 판단하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적적인 소음(6절)과 네 명의 문둥병자(3-5절)들을 통한 엘리사의 예언(1절) 성취는 사마리아 성읍 거민들의 작은 힘조차 빌리지 않은 온전한 신적 능력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하나의 예언 성취인 장관의 죽음(20절)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한 자들에게 돌아오는 필연적인 심판의 결과였다.
(3-8) 기근으로 블레셋으로 떠났던 수넴 여인이 소유권을 모두 회복하게 되었다(8:1-6)
8:1-6 문둥이가 된 게하시(5:27)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연대순으로 4장에 이어지는 기사이며 엘리사의 충고로 기근을 피해 7년간 이방 블레셋에 우거하다 돌아온 수넴 여인(4:8-37)의 소유권 회복을 다룬다. 율법상 토지의 매매는 불가했으며, 영원히 그 후손에게 상속될 수밖에 없었다(레 25:28; 민 36:7,8).
(3-9) 엘리사가 하사엘에게 왕이 될 것을 예언하였고, 하사엘은 벤하닷을 죽였다(8:7-15)
엘리야의 예언(왕상 19:15)이 성취된 사건으로 범죄한 이스라엘의 징계(대하 24:23,24)를 위해 이전부터 하나님의 섭리 속에 준비되어 온 아람 왕 하사엘(10;32-36; 12:2-7)의 즉위가 엘리사의 확인 예언(13)과 함께 서술된다. 본문의 기사는 인간의 역사 속에 세심하게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과 함께 택한 백성들에 대한 궁극적인 구원을 이루기 위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14) 여호람(남)(왕하8:16-24)
남 유다 여호람이 8년을 다스렸고,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였다(왕하 8:16-24).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치세와 그 생애에 대한 간략한 기록으로서 여호람의 범죄(18)와 그 죄에 대한 심판적 결과인 에돔의 배반(20-22)이 도식적으로 서술된다(대하 21장). 한편 이 범죄와 심판의 기사는 악한 왕들의 치세 때마다 보인 반대 급부적 현상의 전례(18:10-12; 왕상 14:25-28; 15:25-30; 16:1-13)로서 이것은 이미 다윗에게 예고되었던 심판 예언(삼하 7:14)의 계속적 성취로 볼 수 있다.
(1) 여호람이 8년을 통치하였고, 범죄의 심판으로 에돔과 립나가 배반하였다(8:16-24)
[남유다 ⑤ 여호람: B.C. 853-845(재위: 8년) 왕하 8:14-24; 대하 21:1-20]
해석: 유다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의 치세와 그 생애에 대한 간략한 기록으로서 여호람의 범죄(18)와 그 죄에 대한 심판적 결과인 에돔의 배반(20-22)이 도식적으로 서술된다(대하 21장). 한편 이 범죄와 심판의 기사는 악한 왕들의 치세 때마다 보인 반대 급부적 현상의 전례(18:10-12; 왕상 14:25-28; 15:25-30; 16:1-13)로서 이것은 이미 다윗에게 예고되었던 심판 예언(삼하 7:14)의 계속적 성취로 볼 수 있다.
15) 아하시야(남)(왕하8:25-9:29)
아하시야는 악을 행했고, 예후가 요람, 아하시야를 죽였다(왕하 8:25-9:29).
8:25-29 죽음이라는 심판적 보응을 받은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의 악의적인 유다 통치 속에서 전개되는 전후 상황이 기술된다. 한편 아하시야의 이스라엘 방문에서 이루어질 요람과의 만남은 아합에서 시작된 범죄의 악순환적 요소가 두 왕가 사이의 동맹과 정략결혼(24,27)으로 응축된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가시적 섭리 속에 신속히 다가온 이들의 필연적인 종국을 암시하고 있다(대하 22:1-9).
9:1-10 역대기에는 생략되어 있는 부분으로 패역의 도가 극에 달한 아합 가문의 비극적 종말이 엘리사의 예언(7-10)과 엘리사의 명령에 따른 생도의 예후 도유 사건을 전제로 예고된다. 한편 예후 도유 사건은 하사엘의 등극(8:7-15)과 같이 이미 엘리야의 예언(왕상 19:15-17) 속에 언급된 것으로 이 두 사건 모두 아합가의 진멸이라는, 패역한 범죄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의 성취자이신 하나님의 변개치 않는 공의를 드러낸 것이다(삼상 3:13,14; 요 3:18; 요일 5:13).
9:11-20 아합 가에 대한 심판의 신적 도구로 사용될 예후의 반역 과정이 묘사된다. 고대 국가에서 권력과 직결된 군사력을 자신에게로 규합한(13) 후 즉시로 시행한(14-20) 예후의 군사 쿠데타는 이세벨의 섭정 하에 이스라엘 전역에 만연된 우상 숭배를 일소하고 진실한 여호와 중심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인간적인 권력욕이나 명예욕이 배제된 순수한 신앙적 사명감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롬 13:12).
9:21-29 신적 사명감 속에 행한 예후의 요람 살해는 패역한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B.885-841)을 마감시키는 한편 새로운 종교개혁(10:15-29)의 장을 열게 한 행위였다. 또한 이와 동시에 아합 가와 동맹하여 같은 범죄로 하나님을 배역한 유다 왕 아하시야의 죽음도 함께 시행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엄중성을 드러내고 있다(시 37:17). 한편 요람의 죽음이 나봇의 밭에서 일어난 사실은 이 모든 사건의 정황이 하나님의 심판 예언(왕상 21:29)의 확고한 성취로 되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1) 아하시야가 1년을 통치하며 악을 행하였다(8:25-29)
[남유다 ⑥ 아하시야: B.C. 841(재위: 1년) 왕하 8:24-9:29; 대하 22:1-9]
죽음이라는 심판적 보응을 받은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의 악의적인 유다 통치 속에서 전개되는 전후 상황이 기술된다. 아하시야의 이스라엘 방문에서 이루어질 요람과의 만남은 아합에서 시작된 범죄의 악순환적 요소가 두 왕가 사이의 동맹과 정략결혼(24,27)으로 응축된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가시적 섭리 속에 신속히 다가온 이들의 필연적인 종국을 암시하고 있다(대하 22:1-9).
(2) 엘리사의 명에 의하여 예후가 기름부음을 받고 북이스라엘 왕으로 선택되었다(9:1-13)
9:1-10 역대기에는 생략되어 있는 부분으로 패역의 도가 극에 달한 아합 가문의 비극적 종말이 엘리사의 예언(7-10)과 엘리사의 명령에 따른 생도의 예후 기름부음 사건을 전제로 예고된다. 예후 기름부음 사건은 하사엘의 등극(8:7-15)과 같이 이미 엘리야의 예언(왕상 19:15-17) 속에 언급된 것으로 이 두 사건 모두 아합가의 진멸이라는, 패역한 범죄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의 성취자이신 하나님의 변개치 않는 공의를 드러낸 것이다(삼상 3:13,14; 요 3:18; 요일 5:13).
(3) 예후가 요람 왕과 아하시야 왕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 성취되었다(9:14-29)
9:11-20. 아합 가에 대한 심판의 신적 도구로 사용될 예후의 반역 과정이 묘사된다. 고대 국가에서 권력과 직결된 군사력을 자신에게로 규합한(13) 후 즉시로 시행한(14-20) 예후의 군사 쿠데타는 이세벨의 섭정 하에 이스라엘 전역에 만연된 우상 숭배를 일소하고 진실한 여호와 중심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인간적인 권력욕이나 명예욕이 배제된 순수한 신앙적 사명감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롬 13:12).
9:21-29. 신적 사명감 속에 행한 예후의 요람 살해는 패역한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B.C. 885-841)을 마감시키는 한편 새로운 종교개혁(10:15-29)의 장을 열게 한 행위였다. 또한 이와 동시에 아합 가와 동맹하여 같은 범죄로 하나님을 배역한 유다 왕 아하시야의 죽음도 함께 시행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엄중성을 드러내고 있다(시 37:17). 요람의 죽음이 나봇의 밭에서 일어난 사실은 이 모든 사건의 정황이 하나님의 심판 예언(왕상 21:29)의 확고한 성취로 되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16) 예후(북)(왕하9:30-10:36)
예후가 이세벨과 아합에게 속한 자, 바알 섬기는 자를 진멸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왕하 9:30-10:36).
9:30-37 요람의 죽음과 함께 이제 아합가의 파멸이라는 필연적인 심판의 절정을 이루는 악녀 이세벨의 죽음이 그 처참한 정경과 함께 묘사된다. 아합 가 진멸의 원인이 된 그녀의 우상 숭배(왕상 16:31)와 사악함(왕상 21:7-10)의 범죄는 일찍이 엘리야의 심판 예고(왕상 21:23)에서 그 비극적 종말(36,37)이 선고되었으니 그녀가 받은 저주는 자신으로 인해 타락한 이스라엘의 핏 값까지 포함된 것이다.
10장 쿠데타에 성공한 예후의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본당에서 전개된다. 요람과 이세벨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본거지로 삼은 예후는 바알 숭배를 근절시키기까지 하였으나 자신은 금송아지를 섬기는 여로보암의 죄를 답습하였다. 하나님은 예후를 들어 쓰시고 결국 그의 죄에 대한 심판은 하사엘을 통하여 내리셨다.
(1) 이세벨은 그 범죄로 인하여 엘리야가 예고한 대로 죽음의 심판을 받았다(9:30-37)
요람의 죽음과 함께 이제 아합 가의 파멸이라는 필연적인 심판의 절정을 이루는 악녀 이세벨의 죽음이 그 처참한 정경과 함께 묘사된다. 아합 가 진멸의 원인이 된 그녀의 우상 숭배(왕상 16:31)와 사악함(왕상 21:7-10)의 범죄는 일찍이 엘리야의 심판 예고(왕상 21:23)에서 그 비극적 종말(36,37)이 선고되었으니 그녀가 받은 저주는 자신으로 인해 타락한 이스라엘의 핏 값까지 포함된 것이다.
(2) 예후가 아합 후손을 진멸하여 아합 집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었다(10:1-17)
아합가의 진멸(1-14절). 아합가에 대한 예후의 계속적인 정치적 숙청 작업으로서 아합의 70왕자와 아하시야의 형제들에 대한 살육이 묘사된다. 이는 외견상 예후의 경쟁적 도전자가 될 아합 가의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는 행위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는(롬 14:6-8) 그의 신적 사명의 완수 행위이기도 하다.
예후와 여호나답(15-17절). 예후의 왕권 확립에 조력할 레갑 족속 여호나답의 등용을 기술한다. 예후는 여호와 신앙이 견실한 실천적 집단인 레갑 족속(렘 35:6-10)과의 교류를 통해 그의 종교 개혁의 성공적 성취를 도모하고 있다.
(3) 예후는 바알 숭배자들을 죽이고 목상과 신당을 제거하는 종교개혁을 실시하였다(10:18-27)
바알 숭배자의 진멸(10:18-29). 정치적 숙청에 이은 예후의 종교적 숙청 작업으로서 이는 북이스라엘 역사상 여호람의 개혁(3:2)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시행된 종교 개혁이었다. 그러나 그의 종교 개혁은 바알 하나에만 국한된 부분적 개혁(27-29절)으로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던 개혁의 심층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로써 예후 또한 우상 숭배로 인한 심판적 예언(왕상 11:1-13)을 선고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개혁은 완전해야 하며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야만 한다.
(4) 예후가 4대 동안의 융성을 약속받았으나,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를 범하였다(10:28-36)
[북이스라엘 ⓾ 예후: B.C. 841-813(재위: 28년) 왕하 9:1-10:36; 대하 22:7-12]
예후의 이스라엘 등극 이후 28년간의 치적에 대한 총괄적 평가이다. 본문은 그의 선정에 대한 예후가의 융성 예고(30절)과 함께 악적으로 인한 예후가의 분열과 아람 왕 하사엘의 침략(8:12; 암 1:3-5)을 기술한다. 예후의 점진적 타락은 종교개혁의 실패와 함께 그의 정략적인 금송아지 숭배(이스라엘의 규합; 왕상 12:28)에 근거된 것이며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영웅이란 역사적 평가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7) 여왕 아달랴(남)(왕하11:1-16)
아달랴가 6년을 다스렸고, 제사장 여호야다가 요아스를 즉위시키고 아달랴를 죽였다(왕하 11:1-16).
11:1-3 아합의 딸 아달랴의 왕위 찬탈과 그 와중에서 구출된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행적이 기술되고 있다. 본문은 하나님의 다윗 언약(삼하 7:11-16)에 예언된 메시야 도래의 구속사적 섭리를 거스른 아달랴의 반역과 악인의 손에서 그 약속한 씨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전적 은총의 역사를 대조시킨다. 이로써 적그리스도의 전형(마 2:13-23)을 제시하는 한편 택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성취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11:4-16 북 이스라엘은 불완전하나마 예후의 개혁 정책을 통해 점차 안정되어 갔으나, 남 유다는 왕의 죽음을 빌미로 삼은 아합의 딸 아달랴의 왕위 찬탈로 죄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었다. 본문은 이러한 때에 발생한 제사장 여호야다의 의로운 비난과 그로 인한 요아스의 즉위(12절), 그리고 아달랴의 죽음(16)을 기술한다. 여호야다의 반란은 악의 파괴와 더불어 하나님 뜻의 보존(출 19:4; 신 1:21)이라는 이중적 사명 속에 행하여진바, 그 이면에는 그를 신적 도구로 사용하신 하나님의 역동적 섭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1) 아하시야의 어미 아달랴가 왕위를 찬탈하여 6년을 통치하고, 요아스가 숨어 지냈다(11:1-3)
[남유다 ⑦ 아달랴: B.C. 841-835(재위: 6년) 왕하 11:1-20; 대하 22:1-23:21]
해석: 11:1-3 아합의 딸 아달랴의 왕위 찬탈과 그 와중에서 구출된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행적이 기술되고 있다. 본문은 하나님의 다윗 언약(삼하 7:11-16)에 예언된 메시야 도래의 구속사적 섭리를 거스른 아달랴의 반역과 악인의 손에서 그 약속한 씨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전적 은총의 역사를 대조시킨다. 이로써 적그리스도의 전형(마 2:13-23)을 제시하는 한편 택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성취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2)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요아스가 왕이 되었고, 아달랴가 죽임을 당했다(11:4-16)
북 이스라엘은 불완전하나마 예후의 개혁 정책을 통해 점차 안정되어 갔으나, 남 유다는 왕의 죽음을 빌미로 삼은 아합의 딸 아달랴의 왕위 찬탈로 죄의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었다.
본문은 이러한 때에 발생한 제사장 여호야다의 의로운 비난과 그로 인한 요아스의 즉위(12절), 그리고 아달랴의 죽음(16)을 기술한다. 여호야다의 반란은 악의 파괴와 더불어 하나님 뜻의 보존(출 19:4; 신 1:21)이라는 이중적 사명 속에 행하여진바, 그 이면에는 그를 신적 도구로 사용하신 하나님의 역동적 섭리가 작용하고 있었다.
18) 여호아스(요아스)(남)(왕하11:17-12:21)
여호야다가 신앙개혁을 단행했고, 요아스는 40년을 다스렸고 성전을 수리했다(왕하 11:17-12:21).
11:17-21 아달랴 축출 후 행해진 제사장 여호야다의 활약상이 전개된다. 그는 곧 선민 이스라엘이 대신적 언약 관계의 갱신(17)과 대인적 질서 회복의 실천적 개혁에 나서게 하는 한편 요아스의 공식적인 유다 왕 등극을 이룩했다. 이로써 다윗 가문은 예수 그리스도까지 그 연속성의 맥을 잇게 되었다(대하 23:16-21).
12장 유다 8대 왕 요아스의 통치 역사이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전장(前章)에서 보았던 영광스러운 출발에 부응하지 못했다. 즉 요아스는 초기에는 성전을 수리하는 등 선한 사업을 하였으나 그의 통치 후기에는 아람 왕 하사엘의 침입을 받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자기가 보수하던 성전의 보물들을 거두어 조공을 바치는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불신앙적인 요아스 왕은 신하들의 칼에 맞아 죽는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었다.
(1) 아달랴를 축출한 제사장 여호야다는 우상을 제거하고 종교개혁을 실시했다(11:17-21)
[남유다 ⑧ 요아스(여호아스): B.C. 835-495(재위: 40년) 왕하 11:1-12:21; 대하 22:10-24:27]
아달랴 축출 후 행해진 제사장 여호야다의 활약상이 전개된다. 그는 곧 선민 이스라엘이 대신적 언약 관계의 갱신(17)과 대인적 질서 회복의 실천적 개혁에 나서게 하는 한편 요아스의 공식적인 유다 왕 등극을 이룩했다. 이로써 다윗 가문은 예수 그리스도까지 그 연속성의 맥을 잇게 되었다(대하 23:16-21).
(2) 요아스는 예루살렘 성전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성전을 수리하였다(12:1-16)
여호사브앗의 극적인 구출과 제사장 여호야다의 의로운 반란에 의해 다윗 왕가의 정통을 잇게 된 요아스의 초기 통치 상황이 기술된다. 요아스 통치는 특징적으로 여호야다 생전의 선정과 그의 사후의 악정으로 대별될 수 있다.
본문은 여호야다 생전에 그의 섭정으로 이루어진 요아스의 의로운 통치 기사이다. 즉위 후에 시행된 첫 종교적 사역으로 요아스는 아달랴의 통치로 훼손된 예루살렘 성전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 성전 수축을 명한다. 1차 수축의 실패와 원인, 그리고 백성들의 자발적 헌신으로 완결되는 2차 수축의 전모를 기록함으로써 점진적인 성전 수축의 성취라는 신정 이스라엘의 근간이 되는 종교적 개혁에 초점을 두어 요아스의 선정을 기술하고 있다.
(3) 요아스가 여호야다의 사후에 정직한 길에서 떠났고 아람 왕 하사엘의 침략을 받았다(12:17-21)
본문은 10:32,33의 역사와 연결된다. 아람 왕 하사엘은 이스라엘로부터 요단 동편 땅을 빼앗은 후, 이번에는 지중해 연변의 통상로를 장악하기 위해 서남쪽으로 진출했다. 그리고는 블레셋 지역의 성읍 ‘가드’를 점령하였던 것이다. 그후 하사엘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요아스로부터 조공을 받아 떠났다. 그런데 역대하 24장과 본문의 내용은 기록상의 차이가 있다. 역대기에서는 하사엘의 침략을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사후에 바알을 숭배하고 심지어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죽인 데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했다(대하 24:23,34). 그러나 본문은 여호야다가 죽은 후 요아스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돈으로 어려움을 해결했던 잘못을 지적하는 차원에서 기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요아스의 사역을 설명하기 앞서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을 동안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는 단서를 붙였다(2절). 요아스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왕실과 성전의 재정이 거의 바닥날 지경에까지 처했던 것이다.
19) 여호아하스(북)(왕하13:1-9)
북 이스라엘 여호아하스가 17년을 다스렸고,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였다(왕하 13:1-9).
기사의 배경이 유다에서 다시금 이스라엘 예후가의 역사로 전환되면서 예후가의 2대 왕 여호아하스의 17년간에 걸친 행적이 개괄된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 전개의 전형적 모습인 범죄(2)와 징벌(3), 부르짖음(4)과 회복(5)의 반복적 경과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행사가 전적으로 여호와의 손에 이끌리고 있음을 명백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출 9:4).
(1) 여호아하스가 17년을 통치하며 악을 행하였고, 아람 왕 하사엘의 학대를 받았다(13:1-9)
[북이스라엘 ⑪ 여호아하스: B.C. 814-797(재위: 17년) 왕하 13:1-9]
기사의 배경이 유다에서 다시금 이스라엘 예후가의 역사로 전환되면서 예후가의 2대 왕 여호아하스의 17년간에 걸친 행적이 개괄된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 전개의 전형적 모습인 범죄(2)와 징벌(3), 부르짖음(4)과 회복(5)의 반복적 경과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행사가 전적으로 여호와의 손에 이끌리고 있음을 명백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출 9:4).
20) 여호아스(요아스) (북)(왕하13:10-25)
북 이스라엘 요아스가 16년을 다스리며 악을 행하였고, 엘리사가 죽었다(왕하 13:10-25).
13:10-21 엘리사의 죽음 :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의 기사를 엘리사와의 관계에 초점을 두어 기술한다. 즉 요아스의 행적(10-13) 소개에 이은 엘리사와의 짧은 회견 기사는 엘리사의 마지막 사역(요아스의 아람 침공 예언; 17-19)과 그의 죽음(20)을 전제한 부가적 상황일 뿐이었다. 한편 엘리사의 죽음까지의 정황은 그 최후까지 자신의 맡은 바 선지자적 사명을 완수하는 그의 신앙적 열심과 이스라엘에서의 지도자적인 영적 위상(14)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13:22-25 엘리사의 마지막 예언(17-19)이 성취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곧 요아스에 대한 엘리사의 아람 침공 예언은 추악한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 맺으신 언약(23절; 창 17:4-8; 26:3,4; 28:15)을 변개치 않고 이행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와 긍휼에 기인한 것으로 그 성취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고후 4:9).
(1) 북 이스라엘 요아스가 16년을 통치하며 악을 행하였다(13:10-13)
[북이스라엘 ⑫ 요아스: B.C. 798-782(재위: 16년) 왕상 13:10-14:16; 대하 25:17-24]
이 요아스 왕은 같은 시기에 다스리던 같은 이름을 가진 유다 왕과 구분되어야 한다. 이 요아스의 통치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통치를 좇아 악했다. 본문은 그의 통치를 간략하게 요약해준다. 그는 왕이 되었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그가 유다 왕 아마샤와 더불어 싸운일이 14:8-16에 기록되어 있다.
본서 저자가 요아스의 사적을 모두 설명하기도 전에 그의 아들 여로보암 2세를 언급한 것은(13절) 쓰러져가던 예후 왕가를 다시 일으킨 구원자 여로보암 2세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14:27).
(2) 엘리사는 요아스에게 아람을 세 번만 물리칠 것이라 예언하였다(13:14-21)
요아스의 통치 기간에 일어난 엘리사의 예언과 죽음을 말해준다. 병상에서 엘리사는 요아스에게 활과 화살을 취하여 하나는 동편으로 쏜 다음 화살로 땅을 치라고 지시했다. 동편으로 쏜 화살은 요단 동편의 이스라엘 땅을 차지하던 아람 군에 대한 승리를 가리켰다. 요아스는 땅을 세 번만 쳤기 때문에 아람을 세 번만 물리칠 것이다. 만일 그가 대여섯 번을 쳤다면 아람의 위협이 완전히 제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내와 끈기가 부족했다. 요아스는 자신이 한 행동의 의미를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엘리사 묘실의 기적(20-21절). 엘리사의 죽음은 북왕국으로서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모압의 약탈자 무리가 그 땅을 침략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 몇이 시체를 장사하려 치우다가 약탈자 무리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서둘러 엘리사의 무덤을 열고 시체를 던져버렸다. 그런데 그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소생하고 일어섰다.
(3) 엘리사의 예언 대로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무찌르고 성읍을 회복했다(13:22-25)
엘리사의 마지막 예언(17-19)이 성취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곧 요아스에 대한 엘리사의 아람 침공 예언은 추악한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 맺으신 언약(23절; 창 17:4-8; 26:3,4; 28:15)을 변개치 않고 이행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전적 은혜와 긍휼에 기인한 것으로 그 성취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고후 4:9).
21) 아마샤(남)(왕하14:1-22)
남 유다 아마샤가 29년을 다스렸고, 에돔을 쳤으며,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대패했다(왕하 14:1-22).
14:1-7 아마샤 12장에 연결된 유다의 역사 기록으로 본문은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의 선정과 에돔에 대한 승전 사실을 소개한다(대하 25:1-13). 아마샤는 즉위 시부터 하나님의 공의(5)와 율법(6절; 신 24:16)에 준거한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자신의 통치권 확립(5)과 더불어 아하시야(8:25-29; 9:27,28; 10:12-14), 아달랴(11:1-3)에 걸쳐 쇠퇴한 유다의 국력을 회복시켰다(7).
14:8-14 에돔에 대한 승리로 교만해진 아마샤의 우상숭배와 이스라엘에 대한 선전 포고의 경위, 그리고 그 결과 참패당한 기록이다. 한편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가시나무는 유다를, 백향목은 이스라엘을, 또한 레바논의 짐승은 요아스의 군대를 각각 상징하며 가시나무와 같이 자연의 순리(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고 교만히 행하는 자의 당위적 파멸을 시사해주고 있다. 결국 자고(自高)한 자에게 이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필연적인 것이다(사 2:12; 눅 1:51).
14:15-22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대패한 유다는 당시 종교, 정치, 경제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으며 여기서 파생된 불만의 누적은 결국 불특정 다수(무리, 19절)로 하여금 반역의 음모를 잉태시켰다.
(1) 아마샤가 정직히 행하였으나, 에돔에 대한 승리 후 교만해졌고, 요아스에게 참패하였다(14:1-14)
[남유다 ⑨ 아마샤: B.C. 796-767(재위: 29년) 왕하 14:1-20; 대하 25:1-28]
14:1-7. 아마샤 12장에 연결된 유다의 역사 기록으로 본문은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의 선정과 에돔에 대한 승전 사실을 소개한다(대하 25:1-13). 아마샤는 즉위 시부터 하나님의 공의(5)와 율법(6절; 신 24:16)에 준거한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자신의 통치권 확립(5)과 더불어 아하시야(8:25-29; 9:27,28; 10:12-14), 아달랴(11:1-3)에 걸쳐 쇠퇴한 유다의 국력을 회복시켰다(7).
14:8-14. 에돔에 대한 승리로 교만해진 아마샤의 우상숭배와 이스라엘에 대한 선전 포고의 경위, 그리고 그 결과 참패당한 기록이다. 한편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가시나무는 유다를, 백향목은 이스라엘을, 또한 레바논의 짐승은 요아스의 군대를 각각 상징하며 가시나무와 같이 자연의 순리(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고 교만히 행하는 자의 당위적 파멸을 시사해주고 있다. 결국 자고(自高)한 자에게 이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필연적인 것이다(사 2:12; 눅 1:51).
(2) 남 유다 아마샤가 무리의 반역으로 도망하였으나 죽임을 당하였다(14:15-22)
북 이스라엘 요아스가 죽고 여로보암이 왕이 되었다. 남 유다 아마샤가 반역을 당해 도망간 라기스에서 죽임을 당하였고 아사랴가 왕이 되었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대패한 유다는 당시 종교, 정치, 경제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으며 여기서 파생된 불만의 누적은 결국 불특정 다수(무리, 19절)로 하여금 반역의 음모를 잉태시켰던 것이다.
22) 여로보암 2세(북)(왕하14:23-29)
여로보암이 41년을 다스리며 악을 행하였으며, 북 이스라엘이 번성한 시기였다(왕하 14:23-29).
북 이스라엘 왕국 역사에서 가장 길고도 번성한 기간(B.793-753)을 치리한 여로보암 2세의 치세가 소개된다. 그러나 여로보암이 그 조상의 범죄를 계속 견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24) 그의 선왕 요아스를 계승하여 계속적인 실지 회복사업에 나섬으로써 그 국력 회복이 절정에 달해 있는 것은 곧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과 긍휼의 역사(13:23)가 지속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증거한다. 한편 당시의 종교, 도덕적 형태는 당시에 활동한 아모스, 호세아 선지자의 입을 통해 잘 표출된다.
(1)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이 41년을 통치하며 악을 행하였고,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였다(14:23-29)
[북이스라엘 ⑬ 여로보암2세: B.C. 793-753(재위: 41년) 왕하 14:23-29]
해석: 북 이스라엘 왕국 역사에서 가장 길고도 번성한 기간(B.C. 793-753)을 치리한 여로보암 2세의 치세가 소개된다. 그러나 여로보암이 그 조상의 범죄를 계속 견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24) 그의 선왕 요아스를 계승하여 계속적인 실지 회복사업에 나섬으로써 그 국력 회복이 절정에 달해 있는 것은 곧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과 긍휼의 역사(13:23)가 지속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증거한다. 한편 당시의 종교, 도덕적 형태는 당시에 활동한 아모스, 호세아 선지자의 입을 통해 잘 표출된다.
23) 아사랴(웃시야)(남)(왕하15:1-7)
아사랴(웃시야)가 52년간 다스리며 정직히 행하였고, 나병환자가 되었다(왕하 15:1-7).
1-4절은 열왕기적 형식에 따른 새 왕의 즉위기이고, 5-7절은 아사랴의 문둥병 발병에 관한 기록과 그의 사후기(死後記)로 되어 있다. 아사랴의 통치 기간인 52년(2)에 비하면 이 기록은 너무나 짧고 간단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부분과 병행 기사인 대하 26장에서는 아사랴의 선정(1-8), 건축 사업(9,10), 문둥병 발병의 원인(16-21) 등에 관해 보충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한편 열왕기서와 역대서에서의 아사랴(웃시야)에 대한 명칭의 차이는 전례적인 고대 왕들의 왕호 사용으로 미루어 보아 본명과 왕명의 차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삼하 12:24,25).
(1) 아사랴가 52년을 통치하며 정직히 행하였고, 교만함으로 악을 행하여 나병으로 죽었다(15:1-7)
[남유다 ⑩ 웃시야(아사랴): B.C. 792-740(재위: 52년) 왕하 15:1-7; 대하 26:1-23]
1-4절은 열왕기적 형식에 따른 새 왕의 즉위기이고, 5-7절은 아사랴의 나병 발병에 관한 기록과 그의 사후기(死後記)로 되어 있다. 아사랴의 통치 기간인 52년(2)에 비하면 이 기록은 너무나 짧고 간단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부분과 병행 기사인 대하 26장에서는 아사랴의 선정(1-8), 건축 사업(9,10), 나병 발병의 원인(16-21) 등에 관해 보충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한편 열왕기서와 역대서에서의 아사랴(웃시야)에 대한 명칭의 차이는 전례적인 고대 왕들의 왕호 사용으로 미루어 보아 본명과 왕명의 차이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삼하 12:24,25).
24) 스가랴(북)(왕하15:8-12)
스가랴가 6개월을 다스렸고, 하나님 앞에 악하였다(왕하 15:8-12).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의 치세와 살룸과 므나헴의 반역과 등극이 교차 진술되면서 5대 80년간에 걸친 예후가의 이스라엘 통치가 막을 내린다. 이는 곧 이스라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확고한 예언(12절; 10:30) 성취로서 이제 북 이스라엘 왕국은 반역과 암살이라는 무정부적 상태의 반복 속에서 회복 없는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된다.
(1) 스가랴가 반역으로 죽임을 당하여, 예언대로 예후 왕조의 통치가 막을 내렸다(15:8-12)
[북이스라엘 ⑭ 스가랴: B.C. 753(재위: 6개월) 왕하 14:29-15:12]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의 치세와 살룸과 므나헴의 반역과 등극이 교차 진술되면서 5대 80년간에 걸친 예후가의 이스라엘 통치가 막을 내린다. 이는 곧 이스라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확고한 예언(12절; 10:30) 성취로서 이제 북 이스라엘 왕국은 반역과 암살이라는 무정부적 상태의 반복 속에서 회복 없는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된다.
25) 살룸(북)(왕하15:13-15)
북 이스라엘 살룸이 1개월간 다스렸고, 므나헴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왕하 15:13-15).
살룸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한 달 동안 다스렸다. 선임자 ‘스가랴’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역시 후계자 므나헴에게 살해되었다(왕하 15:13-15).
(1) 스가랴를 죽였던 살룸이 1개월을 다스리고 므나헴에 의해 암살당했다(15:13-15)
[북이스라엘 ⑮ 살룸: B.C. 752(재위: 1개월) 왕하 15:10-15]
살룸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한 달 동안 다스렸다. 선임자 ‘스가랴’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역시 후계자 므나헴에게 살해되었다(왕하 15:13-15).
26) 므나헴(북)(왕하15:16-22)
므나헴이 10년간 다스렸고,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였다(왕하 15:16-22).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살룸을 죽이고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디르사를 칠 때에는 자기를 반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의 거민 중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가르는 잔혹한 짓을 하였다(16). 앗수르 왕인 불이 침입하자 므나헴은 이스라엘의 부자들에게서 은 5세겔씩을 토색해서 만든 돈, 은 1,000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자신을 돕게 했다(19).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며, 1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죽었다.
(1) 므나헴이 10년간 악을 행하였고, 왕권 강화를 위해 앗수르에 은 천 달란트를 바쳤다(15:16-22)
[북이스라엘 ⑯ 므나헴: B.C. 752-742(재위: 10년) 왕하 15:14-22]
해석: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살룸을 죽이고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디르사를 칠 때에는 자기를 반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의 거민 중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가르는 잔혹한 짓을 하였다(16). 앗수르 왕인 불이 침입하자 므나헴은 이스라엘의 부자들에게서 은 5세겔씩을 토색해서 만든 돈, 은 1,000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자신을 돕게 했다(19).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며, 1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죽었다.
27) 브가히야(북)(왕하15:23-26)
브가히야가 2년간 다스렸고,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였다(왕하 15:23-26).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북 이스라엘의 17대 왕이 되었다(23). 여로보암 왕처럼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며, 2 년간 다스렸으나 르말랴의 아들 베가에 의해 암살당했다(24, 25). 당시 친 앗수르 파와 반 앗수르 파가 대결하는 상황에서 선왕에 이어 친 앗수르 정책을 펼쳤다.
(1) 브기히야가 2년을 통치하며 악하였고, 베가의 반역으로 죽임을 당했다(15:23-26)
[북이스라엘 ⑰ 브가히야: B.C. 742-740(재위: 2년) 왕하 15:22-26]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북 이스라엘의 17대 왕이 되었다(23). 여로보암 왕처럼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며, 2 년간 다스렸으나 르말랴의 아들 베가에 의해 암살당했다(24, 25). 당시 친 앗수르 파와 반 앗수르 파가 대결하는 상황에서 선왕에 이어 친 앗수르 정책을 펼쳤다.
28) 베가(북)(왕하15:27-31)
북 이스라엘 베가 왕이 20년간 다스렸고,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였다(왕하 15:27-31).
르말랴의 아들로 브가히야왕의 장관인 베가가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이고 북 이스라엘의 18대 왕이 되었다(25). 길르앗 통치 기간 11년을 합하여 2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27). 친앗수르 정책을 펼친 므나헴과 달리 아람 왕 르신과 동맹을 맺고 반 앗수르 정책을 펼치며 유다를 공격하였다(16:5; 사7:1-9). 이 때문에 디글랏 빌레셀의 공격을 받아 이스라엘의 주요 도시들을 앗수르에게 빼앗기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고, 반란을 일으킨 엘라의 아들 호세아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은 악한 왕이었다(28).
(1) 베가가 악을 행했고, 앗수르에 길르앗 갈릴리를 빼앗겼으며, 호세아의 반역으로 죽었다(15:27-31)
[북이스라엘 ⑱ 베가: B.C. 740-732(재위: 20년) 왕하 15:27-31; 대하 28:5-8]
르말랴의 아들로 브가히야 왕의 장관인 베가가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이고 북 이스라엘의 18대 왕이 되었다(25). 길르앗 통치 기간 11년을 합하여 2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27). 친앗수르 정책을 펼친 므나헴과 달리 아람 왕 르신과 동맹을 맺고 반 앗수르 정책을 펼치며 유다를 공격하였다(16:5; 사7:1-9). 이 때문에 디글랏 빌레셀의 공격을 받아 이스라엘의 주요 도시들을 앗수르에게 빼앗기고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고, 반란을 일으킨 엘라의 아들 호세아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은 악한 왕이었다(28).
29) 요담(남)(왕하15:32-38)
남 유다 요담이 16년간 다스렸고,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였다(왕하 15:32-38).
북 왕국 이스라엘이 최고의 혼란에 빠져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남 왕국 유다에서는 요담이 섭정을 마치고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16년간 다스렸다. 요담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표로 성전 윗문을 건축했을 뿐 아니라 몇몇 성읍을 증축하거나 신축하고 망대를 세워 외세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것은 내적으로 종교적 진흥책을 의미하며 외적으로는 강병책을 의미한다. 그의 이러한 사업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근거했으므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1) 남 유다 요담이 16년을 다스리며 정직히 행하였고, 성전 윗문을 건축하였다(15:32-38)
[남유다 ⑪ 요담: B.C. 750-732(재위: 18년) 왕하 15:32-38; 대하 27:1-9]
북 왕국 이스라엘이 최고의 혼란에 빠져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남 왕국 유다에서는 요담이 섭정을 마치고 정식으로 왕위에 올라 16년간 다스렸다. 요담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표로 성전 윗문을 건축했을 뿐 아니라 몇몇 성읍을 증축하거나 신축하고 망대를 세워 외세의 침입에 대비했다. 이것은 내적으로 종교적 진흥책을 의미하며 외적으로는 강병책을 의미한다. 그의 이러한 사업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근거했으므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30) 아하스(남)(왕하16:1-20)
남 유다 아하스가 16년간 다스리며 가증한 일을 행하였고, 앗수르를 의지했다(왕하 16:1-20).
16:1-4 유다 왕국 역사에서 가장 사악한 왕으로 기록된 요담의 아들 아하스의 통치 성격이 규정된다(대하 28:1-4). 아하스의 악정은 신전 의식의 결여(2)와 우상 숭배(3,4)로 점철된 바, 이는 하나님의 법(출 20:4; 레 26:1)을 무시한 자기 파괴적 행위였다(대하 28:19,25).
16:5-9 아하스는 강력한 반앗수르 동맹 체제를 구축하려는 이스라엘-아람의 저지선을 훼파하고자 자신의 동반자로 앗수르를 선택하였다. 이는 오직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라’(사 7:3-9,11; 8:5-8)는 이사야의 충고를 무시한 처사로 아하스의 인간적인 생각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가 자국의 생존을 위해 더 강한 외세에 의존하는 정책이 결코 이득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주듯, 아하스의 잔꾀 역시 약육강식의 국제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었다.
16:10-20 아람,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공으로 궁지에 몰린 아하스의 앗수르 원조 요청 과정에서 발생한 악의적인 종교적 변형이 구체적으로 기술된다. 아하스는 성전의 모형과 제사 의식을 이방 앗수르의 종교 형식에 맞춰 자신의 임의대로 변조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출 25:40; 26:30; 레 1-7장; 대상 28:19)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패역한 죄악의 장본인이 되었다.
(30-1) 아하스가 우상을 숭배하였고, 아람-이스라엘에 대항하고자 앗수르를 의지하였다(16:1-9)
[남유다 ⑫ 아하스: B.C. 732-716(재위: 16년) 왕하 16:1-20; 대하 28:1-27]
유다 왕국 역사에서 가장 사악한 왕으로 기록된 요담의 아들 아하스의 통치 성격이 규정된다(대하 28:1-4). 아하스의 악정은 신전 의식의 결여(2)와 우상 숭배(3,4)로 점철된 바, 이는 하나님의 법(출 20:4; 레 26:1)을 무시한 자기 파괴적 행위였다(대하 28:19,25).
아하스는 강력한 반앗수르 동맹 체제를 구축하려는 이스라엘-아람의 저지선을 훼파하고자 자신의 동반자로 앗수르를 선택하였다. 이는 오직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라’(사 7:3-9,11; 8:5-8)는 이사야의 충고를 무시한 처사로 아하스의 인간적인 생각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가 자국의 생존을 위해 더 강한 외세에 의존하는 정책이 결코 이득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주듯, 아하스의 잔꾀 역시 약육강식의 국제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었다.
(30-2) 아하스는 이방 앗수르의 우상 제단을 만들어 섬김으로 패역한 죄악을 저질렀다(16:10-20)
아람,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공으로 궁지에 몰린 아하스의 앗수르 원조 요청 과정에서 발생한 악의적인 종교적 변형이 구체적으로 기술된다. 아하스는 성전의 모형과 제사 의식을 이방 앗수르의 종교 형식에 맞춰 자신의 임의대로 변조시킴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출 25:40; 26:30; 레 1-7장; 대상 28:19)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패역한 죄악의 장본인이 되었다.
3. 북 이스라엘 멸망 (왕하17:1-41)
하나님의 심판으로 북 이스라엘이 호세아 때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였다(왕하 17:1-41).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는데 그 원인은 우상숭배 때문이었다. 한편, 북 왕국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사마리아에 이민족을 강제 이주시켜 혼혈족을 형성, 앗수르에 대항하는 세력의 근절을 꾀하였다. 이로 인해 생긴 족속이 곧 ‘사마리아인’으로서 유대인들은 이들 혼혈족을 멸시하였다.
1) 포로가 된 호세아 (왕하17:1-6)
(1) 호세아 왕 때에 앗수르가 사마리아성을 함락하였고,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였다(17:1-6)
[북이스라엘 ⑲ 호세아: B.C. 732-723(재위: 9년) 왕하 15:30-17:6
해석: 17:1-6 이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서 시작된 북 이스라엘의 통치가, 반복되는 죄의 악순환적 결과로 210년간의 역사(B.C. 931-722)를 뒤로한 채 파멸되는 과정이 기술된다.
본문은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의 통치와 앗수르에 의한 사마리아성의 함락(B.C. 722)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다.
2) 멸망한 원인 (왕하17:7-23)
(1) 북 이스라엘의 멸망은 우상을 섬기고 언약을 저버린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17:7-23)
17:7-23 본문에서 저자는 이미 멸망한 북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상하며 그 속에 깃든 역사적 교훈을 도출시킨다. 이스라엘 멸망의 근본 원인이 된 우상 숭배 범죄의 일반적 서술(7-12,16,17)과 함께 선지자의 경고를 배척한 죄(13-15), 그리고 끝으로 유다에 대한 경고와 이스라엘 멸망의 전반적 경과를 요약(18-23)함으로써 이 모든 정황을 신명기적 역사관에 근거한 하나님의 교훈이란 측면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3)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 (왕하17:24-41)
(1) 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수르의 식민 정책의 결과 사마리아는 종교적 혼합이 일어났다(17:24-41)
17:24-33. 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수르의 식민 정책의 결과로 인하여 사마리아에 이주하게 된 이방인들로 인해 혈통과 신앙의 순수성이 상실되고 말았다. 결국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 범죄는 그 멸망과 함께 여호와 신앙을 몰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간의 반목과 대립이 1세기 초인 예수님 당시까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17:34-41. 본문은 열왕기서를 쓰고 있는 저자의 현재적 관점(B.C. 562-536경)에서 사마리아 혼합 종교의 계속적인 존립을 질책하고 있다. 신정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과 우상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이 혼합 종교는 단지 형식상의 결합일 뿐 그 실질적인 차원의 결합까지는 불가능한 것이었다(롬 1:23; 갈 1:6-9). 결국 사마리아의 혼합 종교는 절대적으로 무가치한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뜻과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