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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따르는 성도에게 주시는 축복
요한복음 1:35-42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요1:38)
합 2:4절에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대로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그 생명으로 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실제 현장이 되는 교회 안 신자들의 믿음을 보면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도 있고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교인의 믿음이 있고 신자의 믿음이 있으며, 또한 성도의 믿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제목처럼 주님을 따르는 성도는 어떤 믿음을 소유한 자들입니까? 그들은 교인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신자의 믿음에 머무는 정도도 아닙니다. 그들은 거룩한 성도의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성도의 믿음을 가진 자들은 반드시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사는 자들 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믿음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교회만 왔다갔다하는 교인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그래도 거듭난 체험을 한 신자의 믿음입니까? 거듭나지 못한 교인은 절대 주님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거듭난 신자들은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려고 애는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는 쓰지만 자신의 자아를 이기지 못하고 생활환경에 눌려살며, 걱정 근심의 가시에 스스로 찔리는 육신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신자의 믿음은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이기고 성도의 믿음생활에 들어가야 합니다. 성도의 믿음생활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주님의 신부가 되는 믿음생활입니다.
이시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은 은혜림 교회 신자들은 성도의 믿음생활로 들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것은 나를 부인하고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삶입니다.(마16:24)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을 모두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을 거쳐 갈보리 산상까지 주님을 따라 가시고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와 무덤 속 장례의 자리까지 따라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여러분들은 저절로 부활승천(들림)의 자리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는 주님의 질문이 축복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요 1:38)
오늘 본문에 주님을 따르는 두 제자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 이라는 세례요한의 증거를 듣고 그들은 주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를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질문 하시기를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는 “무엇을 바라느냐” 혹은 “무엇을 찾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이 질문이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에게 주시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주님의 질문이 축복인줄 확실히 깨닫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은 오늘 이시간도 똑같습니다. 여러분들도 목사의 말씀증거를 듣고 주님만 따라가신다면 주님께서 동일하게 여러분들의 심령속에 질문하십니다. 그 주님의 질문을 오늘 말씀 속에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하신 그 질문이 나에게 하신 것으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주님께서 “무엇을 구하느냐, 무엇을 찾느냐, 무엇을 바라며 소원하느냐?” 하는 주님의 이 질문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의 말씀입니다. 왜 축복입니까?
1) 전능하신 주님께서 나에게 관심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관심을 가져 주신 것은 그 자체가 큰 축복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어떤 사람이 내 마음의 깊숙한 곳에 있는 소원을 알고 “무엇을 찾고 구하느냐” 라고 질문하십니까? 참으로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 희소합니다.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질문은 주님의 깊은 관심으로 그것은 주님의 깊은 사랑입니다. 질문 자체가 사랑이요 관심을 가져주는 자체가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의 복을 받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래도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가 받는 복입니다. 주님을 등지고 주님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더라도 주님을 멀찍이나마 따라가면 주님을 만나고 회개하는 복을 받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성도로서 주님의 관심을 받는 복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2) 응답을 전제로한 질문이기 때문에 축복입니다. 주님의 질문은 지나가는 말도 아니고 인사성의 말도 아니며 그리고 동정하는 말 정도가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응답을 해주시겠다는 전제의 질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이 질문을 받는 것이야말로 축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막10:50절을 보면 주님께서 소경 바디매오를 만나서 질문하신 말씀을 보게 됩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라고 질문하십니다. 바디메오에게 주님의 이 질문은 너무나 놀라운 축복의 질문입니다. 주님께서 소경 바디매오의 소원을 모르시겠습니까?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이시지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의 축복을 받게된 이유는 바디매오는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부르며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고 주위에서 꾸짓는 소리를 듣고도 포기하지 않고 외치며 주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위 사람들의 꾸짓음을 듣고 포기하고 말았다면 결코 주님의 관심도 받지 못했을 것이고 축복의 질문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위 환경에 억눌림 받지 말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응답이 더딜지라도 끝까지 인내하고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만을 따라가는 성도에게 응답을 전제로 한 질문의 축복을 반드시 받게 될 것입니다. 사30:1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무릇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라가는 성도들입니다. 이들을 또한 하나님은 기다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며 주님만을 기다리는 성도들과 주님과 만날 때가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두 제자가 그러합니다. 그 만남 속에서 주님과의 깊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에 대한 말씀의 증거를 듣고도 예수를 좇아가지도 않고 멀찍히 서서 구경만 하거나 기회를 보면서 따를만하며 따라가고, 여차하면 도망갈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주님께서 어떻게 나를 만나주며 또 축복의 질문을 하시겠습니까? 주님과 거리를 멀리하지 말고, 교회와 거리를 멀리 두지말고, 목사와 거리를 두지말고 가깝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올바른 동기부여를 주시는 질문이기 때문에 축복입니다. 세 번째 무엇을 구하느냐 라고 질문하신 이 주님의 이 질문이 왜 복이 되느냐 하면, 주님의 이 질문은 잘못된 동기로 구하지 말고 올바른 동기로 구하라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에 질문자체가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따르는데 잘못된 동기 속에서 주님께 구하면 되겠습니까? 지금 내 눈앞에 주님이 서 계시는데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주님의 마음과는 상관없는 것을 구하거나 소원하면 되겠습니까?
우리의 전부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온전히 모시고 그 분과 함께 살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늘 헐떡거리고 걸떡거리며 사는 우리의 모습은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살면서도 이런 모습으로 많이 살았습니다. 주님 자신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주님 손에 있는 능력과 권세 그리고 부요함과 풍성함을 사모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 응답주시면 “땡큐”하고 돌아서서는 그 즐거움에 빠져 금방 주님을 잊어버리고 삽니다. 오늘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의 부끄러운 한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무엇을 구하느냐”고 질문 하십니다. 이 시간의 말씀자체가 나에게 주는 질문입니다. 자신의 실상(잘못된 동기)을 있는 그대로 보시고 회개하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주님을 먼저 찾고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를 먼저 찾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2.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묻는 질문이 축복받을 질문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요 1:38)
“무엇을 구하느냐”라고 질문하는 주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랍비여(선생님이여)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그들은 응답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어디에서 묵고 계십니까? 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의 이 질문은 예수가 계신데 가서 함께 있고 싶어하는 질문입니다. 질문이지만 이것은 “무엇을 구하느냐” 라고 질문하신 주님의 질문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이 응답이 주님의 마음에 너무나 맞는 대답이었습니다. 다시말해 이들 두 제자는 아직까지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지는 않고 비록 선생으로 불렀지만 주님과 함께 있고 싶어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함께 있고 싶어하는 이 마음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이것이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따르는 성도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은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십시오.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내가 주님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 주님 오늘밤도 어느 동산에서 거니십니까? 내가 이 밤도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라고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사는 이것은 최고의 축복이며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리고 내 영혼에 깊은 영적 감동을 주는 목사님이나 지도자들과 혹은 성도들과 함께 시간을 많이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육신의 것에 목말라하는 신자들은 육신의 소욕을 채워주는 사람만 찾을 것입니다. 내 영혼의 갈망하는 바가 강한 성도는 주님을 찾고 구합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주님은 영적 지도자들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두 제자들도 본래는 세례요한의 제자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가 된 자체가 그들은 그 시대의 깨어있는 성도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갈망하면서 기다렸기 때문에 세례요한을 만났고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도 재림의 주님을 갈망하며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영적 스승을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이며(사30:20), 종국에는 재림 주님을 영접하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복잡하고 혼란한 세상 속에서도 주님을 더욱 갈망하고 구하고 찾는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
3. “와 보라”는 주님의 음성이 축복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 시쯤 되었더라 (요 1:39)
세번째 주님을 따르는 성도가 받는 축복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는 순수한 동기를 가진 제자들에게 주님은 “그래 오늘밤 나와 함께 지내자” 하시며 그 응답으로 “와 보라” 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주님의 한 말씀 자체가 나에게는 엄청난 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허락이 아니면 그 누가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겠으며, 신령한 교제를 주님과 함께 나누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도 주님의 응답이 “오너라 오늘밤 너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자” 하는 응답의 큰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안방에 누워만 있으면 결코 듣지 못합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결코 듣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허락속에 주님과 함게 그 밤을 온전히 주님과 교제하며 지냈습니다. 그 밤에 얼마나 많은 말이 오갔습니까? 얼마나 가슴이 설레는 밤을 보냈을 것이며, 얼마나 많은 기쁨과 감격과 환희가 넘쳤겠습니까?
상상을 한번 해보십시오. 그렇게도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났으니 그 감격이 오죽 하겠습니까? 그들은 주님과 함께 밤을 보내면서 이슬에 옷이 젖듯이 그들의 영혼이 주님의 사랑과 말씀에 완전히 젖어들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의 하룻 밤을 보내면서 완전히 그 일생의 전환점이 되어 버립니다. 두 제자가 주님과 하룻밤을 지내면서 완전히 변화 받은 모습이 성경에 나타납니다. 처음에 두 제자는 예수님을 랍비로 불렀지만 41절을 보면 메시아로 고백하고 전하는 것을 보게됩니다.(요1:41)
오늘 여러분들도 “와 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싶지 않으십니까?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세상 일 때문에 빼앗기고, 무관심과 게으름과 무지 때문에 뺏기면 되겠습니까? 무엇과 비교할 수없는 영광을 놓치면 되겠습니까? 무언가 아쉽다 하는 것이 없습니까?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는 것 없습니까? 겸손한 자리에 내려가서 순종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이 모든 것이 해소됩니다. 강력히 요청합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믿음의 삶을 더욱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축복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을 따라 가십시오. 그리고 주님과 교제하는 깊은 기도의 동산으로 들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변화 받은 새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사랑과 진리를 담대히 선포하고 증거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제목
1. 주님! 나를 만나 주시고 나를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부르신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도록 더욱 주님을 깊이 체험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2. 주님! 이 밤도 내 영혼이 주님과 깊은 영적교제 하기를 소원합니다. 내 영혼을 붙잡으시고 성령으로 주님의 깊은 밀실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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