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서 있었던 일이기도 하고 일상에 겪는 경험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는 매우 호의적이지만 말씀에 의해 서로 간격이 생기고 마는 경우입니다.
서로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알뜰하지만 말씀에 대해서는 언제나 건너편에 섭니다.
바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엄연한 경계선입니다(요3:6)
한 성령의 세례의 목적은 한 몸이 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한 몸이 안 되었으면 성령 세례에 대한 말씀을 듣고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에 대해서는 로마서 6장 이상 상세하게 설명한 곳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를 주로 영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어디서 어디로 옮겨져서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고
있는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확실하게 파악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으면
이제 진리의 지식을 따라 지속적으로 유지 보존해 나가야 합니다(keeping)
그리스도 안에서 한 성령을 마셔야죠. 나무의 모든 줄기와 가지와 잎은
한 뿌리로부터 공급되는 진액을 마시기 때문에 모든 가지가 일체가 됩니다.
그래서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고전12:14)
한 몸과 여러 지체는 원형의 교회와 모형의 교회의 모임이나 공통체입니다.
곧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세운 교회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하십니다(고전12:27))
계시록의 2, 3장은 원형교회의 표본과 유형들입니다.
계시록 4장 이후는 천상의 원형교회를 보이십니다.
특히 5장에서는 책이 열리고 계시록 7장에서는 보좌, 네 영물, 24장로가 등장합니다.
인 맞은 144,000과 흰 옷 입은 큰 무리가 천상의 원형교회의 구성도입니다.
만약 여기에 참예하지 않으면 모형교회 안에 있다 할지라도 심판의 대상입니다.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의인중의 악인이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모형인 지역교회에
집착하지 말고 이 원형교회의 성도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특히 고린도후서는 원형교회의 모습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의 사명을 받아 추수하는 일꾼의 사명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일입니다.
저도 사람을 보는 기준이 매섭고 냉정하고 호불호가 분명합니다.
그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지체의식을 갖고 있느냐가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과 발이 서로 자기를 주장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묻습니다(고전12:15)
손과 발이 머리의 지배를 받지 않고 각각 놀면 중풍병자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성령세례를 받아서 거듭난 사람의 증거는 지체의식을 갖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귀와 눈이 서로 주장하면 참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고전12:16)
있을 수 없는 일임에도 인간이 모이는 불완전한 모형교회에서는 일어나는 일입니다.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너와 내가 없고 존귀와 비천이 따로 없습니다.
이를 서로 의식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가 성숙할 때 까지 참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전체 속에 하나의 개체로 보십니다.
하늘 교회에 속한 땅의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단은 이를 무시하고 자기들 것만 주장합니다.
성막은 하늘의 참 성전의 그림자이며 모형입니다. 원형이 아닙니다.
만일 지체들 중에 분쟁이 있으면 그건 서로 지체가 아니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자신이 지체로서 확인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공동체에 기생하고 있는가?
지체 중에는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그리고 귀한 것과 약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 하나님의 가치성이 있습니다. 흡사 오케스트라의 악기와 같습니다.
발가락의 발톱은 발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합니다.
발가락 없는 발은 균형도 안 잡히고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몸의 각 지체는 창조주의 입장에서는 다 하나 같이 귀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한 지체는 동고동락이며 일심동체입니다.
그 관계성과 상태의 표현이 바로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아보게 하셨으니”입니다(고전12:25)
서로 하나가 되어 분쟁이 없고 서로 돌아보고 염려를 합니다.
표현하지 않아도 다른 지체의 고통이 같이 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얼마가지 않아서 해결이 됩니다.
서로 중보의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영이며 한 신경조직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친숙한 관계라 할지라도 이렇게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은 영이고 육은 육이라는 삼팔선이 분명하게 그어지고 맙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이 되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세례(롬6:3-4)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는 공동운명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생명과 부활의 능력의 효력은 영원합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사건은 단회이지만 그 의미와 능력은 영원합니다.
한 몸으로서 분쟁이 없고, 같이 염려하며 지체의 고통과 영광을 같이 받는
‘너희는 이런 존재 곧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의 각 부분이라’하십니다(고전12:27)
성경이 1,600년 동안 40여명에 의해 기록이 되었으나
한 권이 된 것은 바로 천상에 있는 원형교회의 소속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신앙만이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는 오직 성경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딤후3:15)
천사는 하나님께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구원을 선포하고
이를 위해 한 몸을 이루는 일을 돕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갈라놓습니다.
욥1장처럼 마귀는 이를 위해 두루 돌아다닙니다.
마귀가 가는 곳은 어디나 참소와 심판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고전12:28)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 병 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들... 이런 것들이 교회 중에 전체사람이냐 아니면 일부냐?
다 그런 직분이나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입니다(고전12:29)
국가에도 관원이 있고 백성이 있듯이 한정적인 다수입니다(고전12:30)
특별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보편적인 은사는 바로 고전13장의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더욱 큰 은사는 복수입니다.
그리고 고전14:1절 ‘사랑을 구하라’ 곧 사랑을 추구하라고 말씀합니다.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보편적인 말씀이나 사랑을 구하라는 말씀은 의무적입니다..
은사를 사모하되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ex: 사도 선지자 교사 등등)
다시 말하면 능력적인 것 보다는 말씀의 사역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말씀은 사람들의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롬10:8-10)
그 반면에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 증거되는 유익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길’은 질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을 초월해서 온전함에 나가는 길입니다.
가장이라는 말은 넘쳐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사실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며 그렇게 하지 않을 능력입니다. 전도나 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중에 능력이 되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 31)을 보면 개인의 신앙의 여정에 은사의 때가 있고
사랑을 이룰 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점진으로 발전을 해야 합니다.
대부분 신앙의 진보를 보면 처음에는 표적신앙으로 시작해서 은혜를 받고 사모하는
단계 그 다음에는 진리 안에서 영생을 누리고 하나님과 교제는 신앙으로 발전을 합니다.
그 중간에 율법주의 도덕관의 신앙으로 빠질 우려가 있지만
항상 다음 단계로 진보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그렇게 되어 갑니다.
은사는 사랑으로 가는 길에 보조적으로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에 머물러 있을까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은사가 필요하나 거기에 잡히는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사 자체는 구원이 아닙니다. 온전한 사랑이 바로 구원을 보증합니다.
진리는 그 사랑을 얻는 방법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셔야만 주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거하므로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요15:10)
진리는 성령의 깨달음으로 오고 반복적인 적용을 통해 그렇게 살아지게 됩니다.
인간은 무엇에 푹 빠지는 기질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좁은 길에 빠지는가 아니면 넓은 길에 빠질 것인가가 각자의 선택입니다.
우리는 지금 오늘의 나의 말세를 생각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하는 말세 곧 별세입니다.
나를 버리고, 세상을 버리고, 날마다 자아와 욕심을 버리는 말세적인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스러운 복을 얻고 맛보고 있는가?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모든 구원과 그 복을 죽은 다음으로 미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좋은 신앙 글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