內舅 明湖 李言直 別業
淸風堂 全克初
蒼松翠竹擁仙區
望裏雲山摠畫圖
窻月玲瓏樽酒盡
新詩一首不宜無
외삼촌 명호 이언직 별장에서
청풍당 전극초
푸른 솔과 푸른 대가 신선의 구역을 에워싸고
구름 덮인 산을 바라보니 모두 한 폭의 그림 같구나
창가에 달빛이 영롱하고 한 동이 술이 다하여도
새로운 시 한 수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국역] 전과웅
[출처]청풍당유고
● 전극초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출신의 학자.
[가계]
전극초(全克初)[1643~1695]의 본관은 옥천(沃川)이며, 자는 신숙(愼叔), 호는 청풍당(淸風堂) 또는 명천어자(明川漁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전해(全海)이고, 할아버지는 전시헌(全時憲)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 전유장(全有章)이고, 어머니는 이휴운(李休運)의 딸 영양이씨(永陽李氏)이다. 부인은 우여율(禹汝律)의 딸 단양우씨(丹陽禹氏)이다. 형은 전극태(全克泰)이고, 동생은 전극념(全克念)·전극화(全克和)·전극민(全克敏)이다. 다섯 형제가 모두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다.
[활동 사항]
전극초는 1643년(인조 21) 달성(達城) 수성리(壽城里)[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가학(家學)을 익히다가 성장하여서는 형제들과 함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남간정사(南澗精舍)에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송시열이 “뜻을 고상하게 하고, 참된 마음을 기르고, 가난을 편안히 여기며 진리를 즐거워하라[尙志養眞安貧樂道]”라는 글을 주며 격려하였다고 한다.
전극초는 명(明)나라가 망하자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수계(修禊)하고 한 마을에 모여 살았는데, 마을 이름을 명나라를 존중한다는 의미로 대명동(大明洞)이라 하였다. 그때 함께 숭명(崇明)의 의리를 주장하던 선비들은 모두 ‘명(明)’ 자를 넣어 호를 지었는데, 전극초는 명천어자라는 호를 지었다. 1695년(숙종 21)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전극초의 문집인 『청풍당유고(淸風堂遺稿)』가 다섯 형제의 문집을 모아서 엮은 책 『연방집(聯芳集)』 속에 들어 있다.
[상훈과 추모]
훗날 전극초를 포함한 선비들을 ‘대명동 14현(大明洞十四賢)’이라 칭하였는데, 1882년(고종 19) 대명동 14현을 추모하는 경현당(景賢堂)이 현 대구광역시 동구 효동로2길 50[효목동 1108]에 건립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이언직 [ 李言直 ]
정의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 출신 문인 학자.
가계
이언직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자신(子愼), 호는 명호산인(明湖散人), 석후(石后)이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의 6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사경(李士慶), 아버지는 이휴운(李休運),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남우(南宇)의 딸이다. 부인은 인천채씨(仁川蔡氏)로, 채지해(蔡之海)의 딸이다.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형천(李亨天)이고, 딸들은 각각 김서(金瑞), 정조령(鄭兆齡), 백용성(白龍成)에게 시집갔다.
활동 사항
이언직은 1631년(인조 9) 10월 13일에 태어났다. 선대는 대대로 대구부 해안현(解顔縣)[현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에서 살았다. 8세 때 칠곡[현 경상북도 칠곡군] 사양(泗陽)에 있는 낙촌(洛村) 이도장(李道長)에게 『효경』을 배웠다. 14세 때 명나라 숭정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애통해하며 「만시」를 짓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였다. 특히, 『병자일기(丙子日記)』를 읽다가 대신들이 청나라와 화친을 맺자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책을 덮고 크게 탄식하였고, 또 송나라의 애국 시인 육유(陸游)의 “온갖 어둠 사라지고 태양이 떠오를지니, 오랑캐는 인재가 없고 송나라는 중흥하리라”라는 시구를 외울 때면 비분한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언직은 사람들이 과거를 권할 때면 완곡히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649년(인조 27)에 채지해(蔡之海)에게 『심경』을 배웠는데, 채지해가 이언직을 기특하여 여겨 사위로 삼았다.
1660년(현종 1) 연경서원(硏經書院)의 사액을 청하는 소를 지어 올렸다. 만년에 석후정(石后亭)을 지어서 동지들과 함께 독서하였다. 그리고 대명동(大明洞)[현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남녕사(南寧社)를 짓고 존주(尊周) 의식을 드러낸 뒤에 자신의 호를 ‘명호산인(明湖散人)’이라 지었다. 또 작은 서재를 짓고 ‘수명(守明)’, 작은 연못을 판 뒤에 ‘영명(映明)’, 단에 꽃을 심은 뒤에 ‘보명(保明)’이라 이름을 지었다. 모두 ‘명(明)’자로 명명하여 존명(尊明) 의식을 드러내는 등 존명배청(尊明排淸) 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낸 채 산수 사이를 유유자적하며 생활하였다. 1696년(숙종 22) 서문중(徐文重)의 천거로 침랑(寢郞)에 올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언직은 평소 일상생활에서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실천했으며, 비록 하찮은 물건일지라도 예가 아니면 취하지 않았고, 잠깐이라도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았다. 날씨가 좋으면 지팡이를 짚고 술을 휴대한 채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산수 사이를 유람하였다. 1698년(숙종 24) 10월 5일에 수명재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68세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언직 [李言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내구內舅
외숙(外叔)의 별칭. 편지 등에서 주로 쓰임.
● 別業 별업
1. 살림집 밖에 경치(景致) 좋은 곳에 따로 지어 놓고 때때로 묵으면서 쉬는 집.
2. 사람은 다 같으나 제각기 마음이 다른 일.
3. 세계(世界)는 하나인데, 극락(極樂), 천국(天國), 사바(娑婆)가 다른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