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五則 크디큰 우주도 겨우
쌀알만 하구나(盡大地如粟米粒)
垂示
大凡扶竪宗敎 須是英靈底漢
有殺人不眨眼底手脚 方可立地成佛 所以 照用同時 卷舒齊唱 理事不二
權實竝行 放
대범부수종교 수시영령저한
유살인부잡안저수각 방가립지성불 소이 조용동시 권서제창 리사부이
권실병행 방
過一著 建立第二義門 直下截斷葛藤 後學初機 難爲湊泊 昨日恁麽 事不獲已 今日又恁麽 罪過彌天 若是明眼漢
과일저 건립제이의문 직하절단갈등 후학초기 난위주박 작일임마 사부획이 금일우임마 죄과미천 약시명안한
一點謾他不得 其或未然 虎口裏橫身
不免喪身失命 試擧看
일점만타부득 기혹미연 호구리횡신
부면상신실명 시거간
서문
지극한 도를 깨달아 자기의 주장을 세워 세상사람들을 지도해 나가면 그는 영특한
사람이다. 사람을 죽일 때도 눈을 깜박이며 주저하는 비겁한 짓을 하지 않고, 사람을 깨닫게 할 때도 바로 그 자리에서 성불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영특한 사람은 사람의 능력을 알아내는 것과 거기에 알맞은 대응수단을 쓰는 것을 동시에 하며, 펴고 말고
죽이고 살리고 주고 빼앗는 것을 마음대로 한다. 有에 구애되지 않고 空에도 치우치지 않아 이론과 실제를
잘 조화시켜 나간다. 가령 한걸음 양보하여 제이의적인 입장에 서서 바로 문자어구의 갈등을 제거하면 후배인
초심자는 전혀 머무를 데가 없어지고 만다. 어제 그런 말을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오늘도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나의 죄가 하늘을 닿을 만하다. 그러나
만약 총명한 자가 있으면, 이 원오와 설봉을 조금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 만약 총명한 자가 없을 때에는 호랑이 아가리에 몸을 눕힌 것과도 같이 몸을 망치고 목숨 잃기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 여기 좋은 본보기가 있으니 살펴보자.
本則
擧 雪峰示衆云 盡大地撮來
如粟米粒大 抛向面前 漆桶不會 打鼓普請看
거 설봉시중운 진대지촬래
여속미립대 포향면전 칠통부회 타고보청간
본문
설봉스님이 대중에게 말했다.
“이 크나큰 우주를 손끝으로 집어보니 쌀알 크기밖에는 안 되는 구나. 그리고 그것이 우리 눈앞에 던져 졌는데도 새까만 칠통 같이 전혀 깨닫지를 못하는구나. 이제 보청고를 치고 나서 모두 찾아 보도록 하자.”
頌
牛頭沒馬頭回 曹溪鏡裏絶塵埃 打鼓看來君不見 百花春至爲誰開
우두몰마두회 조계경리절진애 타고간래군부견 백화춘지위수개
송
우두도 마두도 모습을 감추고
조계의 거울에는 티끌 하나 없네
북을 치며 찾으라 한들 보이겠는가?
만발한 봄 꽃들은 누굴 위해 피었는가?
[解釋]
스스로 지극한 道를 깨달은 사람이 중생구제를 위하여 그 방법과 사상을 확립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교화시켜 나간다면 이
얼마나 신령스러운 사람이겠는가? 그런 사람은 옳고 그름의 판단이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정확하여 사람을
죽일 때도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실행할 것이며, 사람을 살려 크게 깨닫게 하는
것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당장 깨닫게 만들 것이다. 그런 사람은 상대방의 능력을 알아내는 것도 귀신과
같고, 또한 그 능력에 맞게 적당한 대책을 찾아 인도하는 것도 귀신과 같이 한치의 오차도 없고, 펴고 말고 주고 빼앗으며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일을 마음대로 할만한 능력이 있다. 그는 또한 뚜렷한 법계관(法界觀)이
있어 有에 구애되지도 않고, 空에 치우치지도 않으니, 이론과
실체를 잘 융화시켜 나간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이 세상 사람 모두가 다 道를 깨달아 아무 문제없이 세상을 살지 않겠는가?
위와 같은 사람을 제일의적(第一義的) 입장에
선 사람이고 치면, 나(원오스님)와 설봉스님은 그렇지를 못하니 한걸음 양보하여 제이의적(第二義的)인 입장에 서서 중생구제를 할 때 문자어구의 갈등을 제거하면 후배인 초심자들은 오히려 혼란이 더해 통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게 된다. 어제도 그런 짓을 하고, 또 오늘도 그런 짓을
하고 있으니 그 죄가 어찌 하늘에 미치지 않겠는가? 만약 청중 가운데 총명한 이가 있으면 나를 깔보지
않고 나의 하찮은 수다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청중 가운데 총명한 이가 없으면 내가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깨달음은커녕 혼란과 어지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깨달음이란 전할 수도 없고, 그것이 무엇이라고도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타인의 문제가 아니고 오로지 나의 문제이기 때문에 비록 하나님이 내 앞에 있다 하여도 나에게 깨달음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길바닥에 싸질러놓은 개똥을 보고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본질을 설봉스님이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한없이 커다란 우주의
모습과 운행이 내 몸 안의 모습과 운행에 닮아있다. 한없이 커다란 우주의 모습과 운행이 한없이 작은
원자나 분자의 모습과 운행에 닮아있다. 그러한 진리가 쌀알에는 왜 없을 것이며, 자그마한 돌멩이에는 왜 없을 것인가? 그러한즉 한없이 커다란 우주와
쌀알이 어찌 다르겠는가? 그런 쌀알이 우리 발 앞에 떨어졌는데도 우리는 새카만 옻칠 통같이 그것을 알지도
모르고, 찾지도 못하고 헤매고 있다. 그러한 진리를 알고
싶으면 보청고를 치고 경내를 청소하면서 우리 다 함께 찾아나서 보자. 아마 설봉스님은 깨달음이 무엇이라고
말하던 또는 말하지 않던 깨달을 놈은 깨달을 것이고, 깨닫지 못할 놈은 못 깨달을 것이니 이 참에 절
청소나 하자고 하는 속내가 담겨있는 것 같다. 보청(普請)이란 선사에서 모든 승려와 보살들이 다 함께 일하는 것이라 하고, 보청고
두드려 그 시작으로 삼는다고 한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삶의 본질을 아는 것이다. 삶의 본질을 알고 삶을 살면 삶이 누워서 떡 먹기 같이 쉬어진다. 삶의
운행이 모두 이해가 되는데 거기에 무슨 고민이 있겠고,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그러나 삶의 본질을 모르고 삶을 살면 눈먼 자가 세상을 헤매듯 우리는 세상을 온통 헤매면서 살게 된다. 그러한 깨달음은 세상 온 천지에 널려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찾지도
못하고 헤매고 있다.
첫댓글 감사!!!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