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탐구를 바탕에 둔 창작집 "언어는 지칭 대상과 겉돌기 마련, 작가란 말하기를 망설이는 존재… 기존 소설의 형식을 실험할 것"
2014년 동인문학상 수상 작가 구효서는 "매일 아침 9시에 집필실로 출근해서 저녁 6시에 퇴근한다"며 창작에 몰두해온 전업 작가다. 서울 중계동 집에서 공릉동 집필실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가며 주말에는 "직장인들처럼 쉬면서 TV로 야구를 보거나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구효서는 1987년 등단 이후 오로지 창작으로만 생활을 유지해온 작가다. 그는 "그동안 내가 낸 책이 아마 30권이 조금 넘을 듯하다"며 어림잡더니 이마를 찌푸렸다. 몇 권인지 헷갈렸나 보다. "그래도 소설집이 '별명의 달인'까지 8권인 것은 맞다"고 자신 있게 말하며 얼굴이 펴졌다.
수상작 '별명의 달인'은 친구들의 별명을 잘 짓던 인물의 삶을 다룬 표제작을 비롯해 8편의 다양한 단편을 한자리에 모은 소설집이다. 구효서의 학생 때 별명은 '구절판'이었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별명의 개념을 풀이하기도 했다. '별명은 억압된 (타인을 향한) 음해 욕구를 일깨우고 자극하는 면이 있다.'
“소설은 언어 자체로부터 벗어날 순 없지만 기존 언어 체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고 한다”고 밝힌 2014년 동인문학상 수상작가 구효서. /이명원 기자
―단편 '별명의 달인'을 쓴 작가의 입장에서 별명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원래는 '별명의 달인'이 아니라 '명명(命名)의 달인'이라고 제목을 붙이려고 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사람과 사물에 이름을 짓고서 세계를 규정하려고 한다. 신념과 이념이란 것도 이름 짓기와 다를 바가 없다. '왜 우리는 이름 짓기를 하는가'라는 생각이 떠올라 소설 '별명의 달인'을 썼다. 별명은 누군가를 더 잘 기억하기 위해 짓거나 그를 놀리기 위해 짓는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별명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나이를 먹어서 새 별명을 얻을 수도 있고, 지방에서 살던 학생이 서울로 전학 와서 새 별명을 얻기도 한다. 인간의 언어가 엄밀하게 말해서 대상과 괴리가 있듯이, 별명도 그 사람의 진정한 초상이 아니라 언어를 통한 타인의 해석이 담긴 것이다."
―이번 소설집 주제가 '언어 탐구'라고 했는데, 작가의 언어 철학은 무엇인가.
"뭐 거창하게 언어 철학이라고 할 건 없다. 우리는 흔히 언어로 세상을 다 표현하고 명명할 수 있다고 오해한다. 하지만 말로 세상을 다 그려낼 수는 없다. 그런데 사람은 언어 체계를 통해 세상을 나름대로 정리해야 할 절박함을 지니고 있다. 나의 지식 체계로 세상을 해석하지 않으면 두렵고 혼란스러워진다. 우리는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언어를 구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를 통해 늘 실패할 수밖에 없다."
―'별명 짓기'도 언어를 통한 해석 행위라고 하겠다. '절대적 진리는 없고 오로지 해석뿐이다'는 입장인가.
"절대적 객관이란 없지 않은가. 내 소설에서 아이들은 기존에 별명이 있었다. 그런데 '별명의 달인'으로 꼽힌 아이가 새로 지으면 그 별명이 기존의 별명을 밀어낸다. 그래서 그 아이를 '별명의 달인'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자신의 해석을 대상에 투사하기 마련이다. 내가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할 뿐이다."
―사람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별명을 얻기도 한다.
"내 소설에서 달인의 아내는 '베아트리체'라는 별명을 처음엔 받아들였지만 이혼할 때는 그 별명을 거부한다. '나에 대한 너의 해석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별명을 짓는 쪽에서 누군가를 미화하기 위해 만든 별명이라도 그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심사위원회는 선정이유서에서 이번 소설집이 '군중 속의 외톨이'를 독창적으로 다뤘다고 평했다.
"나는 소설에서 '단독자'를 그리려고 했다. 사람은 개인이자 군중이기도 하다. 때로는 그 둘이 대립하기도 한다. 개인은 분명히 군중의 일원이다. 개인의 삶에는 군중 속에서의 경험이 들어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경험마저 지워진 순수한 기호로서의 '단독자'를 그리고 싶었다. 군중의 제도와 풍속을 따르지 않고 그것들과 단독적으로 대립하는 인물을 형상화하려고 했다."
―이번 소설집의 수록작 중에서 기억의 의미를 다룬 단편 '모란꽃'이라든지, 애틋한 사랑을 다룬 '화양연화'가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한 가족이 똑같은 과거를 기억하더라도 각자 언어로 기억하기 때문에 나중에 맞춰보면 저마다 다른 개인의 기억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기억 중에서 '다름'과 '같음' 어느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 헷갈리게 된다. 내 소설은 그 틈새를 탐구한다. '화양연화'는 왕가위 영화에서 제목을 따왔다. 그 영화에서 남녀는 충분히 사랑을 이룰 수도 있었지만 결국 헤어져서 서로를 그리워한다. 내 소설의 남자는 20대에 사랑했던 여자 후배가 결혼한 뒤에도 그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서, 끝내 고백을 하지 않은 채 사랑을 유예함으로써 사랑을 유지한다. 언어란 것도 그런 것 같다. 언어는 늘 사랑하는 대상을 가리키더라도 미끄러지면서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한다."
―이번 소설집에선 별명 짓기도 창작과 같다. 이 책은 '문학의 은유'라고도 하겠다. 작가란 어떤 존재인가.
"작가는 세련되고 능숙한 말솜씨에 회의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특히 정치인들은 확신에 차서 유창하게 말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번지르르한 말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작가는 말을 망설이지 않는 것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나에 대해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본능적으로 혐오하지 않을 수 없다."
[등단 27년… 책 30여권 낸 多作 전업작가]
☞구효서
강화도에서 태어난 구효서는 목원대 국어교육학과를 나왔다. 구효서는 국어 교사를 포기하고 책 30여권을 내며 창작에 전념했다. 그 공로로 문학상을 여럿 수상했다. 한국일보 문학상·이효석 문학상·한무숙 문학상·허균문학 작가상·황순원 문학상·대산문학상을 받았다.
구효서는 최근 새 장편 소설 '타락'(현대문학)을 내면서 소설의 형식 실험을 시도했다.
그는 "나 혼자서 이문파문(以文破文)이란 말을 지었다"고 밝혔다. "글로써 글을 깨면서 기존 소설의 서사성이라든지 인물의 정보 제공을 거부하는 소설을 시도했다. 언어가 내 소설에서 객체였지만, 이젠 주체의 지위에 올라 나를 괴롭히고 간섭한다."
[선정과정] 경북 청송 '객주문학관'서 최종심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김주영 김화영 오정희 이문열 정과리 신경숙 김미현 강동호)는 10일 경북 청송군 객주문학관에서 최종심을 열었다. 청송군은 대하소설 '객주'를 쓴 청송 출신 작가 김주영의 문학을 기리면서, 지역 주민 문화센터로 활용하기 위해 객주문학관을 지었다. 청송군은 이번 최종심 장소를 제공하면서 진행도 후원했다.
최종심 후보작은 작가 이름 가나다순으로 '별명의 달인'(구효서), '국수'(김숨), '빨간 염소들의 거리'(엄창석), '황천기담'(임철우)이었다. 지난 1년 동안 예심을 거쳐 오른 19편 중에서 다시 4편을 추린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한 작가의 이름만을 써내는 무기명 투표로 수상작을 가리기로 했다. 개표 끝에 4표를 얻은 '별명의 달인'이 선정됐다.
[선정 이유] 군중 속 '외톨이'에게 귀를 기울이다
사람은 사람들로서 산다. 다시 말해 끊임없이 무리를 이뤄, 떠들고 웃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도와주고 싸우고 화해하고 협상하며 산다. 그러나 이 사회적 동물 가운데에는 겉도는 한두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람은 엉뚱하고 모자라 보인다. 우리는 쑤군대며 그를 흉보고 따돌리지만 동시에 이 별난 사람의 천재성을 의심하고 두려워한다. 그뿐이랴. 이이의 외로운 모습은 우리들 인간 공동체의 화려한 외관이 부질없고 허망해 모두가 심각한 '군중 속의 고독'을 앓는다는 걸 폭로하는 듯하다. 구효서씨의 '별명의 달인'은 그런 베도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놓고 있다. 그 사람들의 외진 행동 뒤에 숨어 있는 깊은 고뇌를 표백하고 그들이 이웃과 진정 어울리기 위해 벌이는 사투를 재현한다. 그리하여 상대방을 할퀴지 않으면서도 늠름히 자신을 지켜 내려다가 이렇게 께끄름한 상태에 내몰리게 된 사연을 되짚는다. 그 사연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문득 깨닫는다. 이 혼자 노는 사람은 제가 깔본 뱅충이, 고개 돌린 용천뱅이가 아니다. 그는 저 자신이다. 우리 각자가 마음 한구석에 꼭꼭 숨겨 둔 자신의 부끄러움이고, 자존심이며 그리움이다. '별명의 달인'의 독창성은 군중 속의 외톨이를 내 마음속의 타인으로 옮겨 놓은 데 있다. 군중 속의 외톨이는 소외를 표상하지만 내 마음속의 타인은 유대를 향한 강렬한 그리움을 누수(漏水)한다. 못 이룬 꿈과 비통한 심정을 담은 오페라가 소리 없이 흐른다. 독자여! 이 고막 뒤편의 아리아를 들으시라. 당신의 몸이 공명통인 그 울음을.
첫댓글 '별명은 억압된 (타인을 향한) 음해 욕구를 일깨우고 자극하는 면이 있다.'
그렇지요..........
축하드립니다!
해외에 살다보니 소식이 쫌 늦었습니다.
'타락'의 출간과 동인문학상, 정말 좋은 해이네요.
그 운을 몰고 미국도 한 번 오셨으면...., 저의 희망사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