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경술국치 95주년이 된다. ‘을사늑약(1905)’을 기점으로 하면 100년이 된다. 이 기점은 일제가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고 능멸한 시점을 말한다. 을사늑약은 일제가 고종황제와 대신들에게 강압적인 무력시위를 한 가운데 일부 친일파 대신을 앞세워 강제적으로 체결됐다는 점에서 무효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며칠 전 공개한 한일협정 문서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 병합되기 이전에 일본과 맺은 조약의 무효를 두고 한일간 수교협상과정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을사조약」등 구 조약, 명백히 무효”
이 같은 줄다리기는 일제의 식민지배 불법성 인정여부 때문이다. 곧 이들 조약의 무효 명시는 일본이 종군위안부․강제징용자 등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책임을 안게 되고, 일제가 일방적으로 체결했던 1909년 청․일간 간도협약도 무효가 되어 반환문제로 비화되기 때문이다.
결국 한․일양국은 절묘한 이해관계에 따라 고심 끝에 만들어 낸 용어가 ‘이미 무효’라는 표현이다.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 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한 규정이 그것이다.
문제는 이 ‘이미무효’라는 시점의 해석이다. 우리 정부는 한일병합의 체결 자체가 애초부터 ‘이미’ 무효였다고 해석해 왔다. 반면 일본 정부는 병합조약이 일본제국과 대한제국 간 정당한 절차를 밟아 체결된 것으로 해방 전까지는 유효였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이 조약이 효력을 잃었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일제하 한국인의 피해에 대한 법적인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다. 결과적으로 「한일협정 기본조약」에 명시된 모호한 표현으로 인해 친일청산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은 명백하게 무효다. 우선 을사조약 체결 직전인 1905년 10월 27일 일본 정부의 「조선보호권 확립실행에 관한 각의결정」을 봐도 그렇다. 일본은 각의에서 “도저히 조선정부의 동의를 얻을 희망이 없을 때에는 최후의 수단을 써서 조선에게 일방적으로 보호권이 확립되었음을 통고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로 수만의 일본 군대와 헌병을 동원, 궁을 포위하고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강제로 을사조약을 조인했다. 물론 을사조약은 원본에 사용된 고종황제의 서명·날인이 위조된 점이나 외무대신이 고종의 위임장 없이 조약체결에 참여하고 고종의 비준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국제법상 무효다. 실제 고종황제는 을사조약 체결 2개월 뒤인 1906년 1월 29일에 을사조약 무효를 천명한 국서(國書)를 발표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을사조약이 무효인 이상 이 조약을 근거로 설치된 통감부는 법적 효력이 없다. 따라서 통감부의 농간으로 친일파를 앞세워 합방조약을 체결한 행위도 당연히 무효다. 이와 함께 식민기간 중 일본이 외국과 체결한 조약은 물론 국내 식민지법도 모두 무효다. 당연히 간도협약도 대상이다. 다행인 것은 1951년 중․일간에 체결한 「중일평화조약」 제4조에, “중일 양국은 전쟁의 결과로서 1941년 12월 9일 이전에 체결한 모든 조약․협약 및 협정을 무효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이 기간 중 체결된 「간도협약」도 무효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협정문서 공개, 일제청산작업의 시발점”
따라서 일제에 의한 식민지배는 단연코 불법이다. 그럼에도 모호한 표현으로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없었다고 강변하는 일본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 협상은 분명히 잘못됐다. 지금이라도 한일협정조약을 재개정하거나 별도의 조약을 체결해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이는 당장 맞닥뜨릴 배상문제와 간도반환문제를 대비해서도 그렇다. 물론 일본이 추가협상에 쉽사리 응할 리가 없지만 장차 국제사법재판소 등 국제기구에 제소하는 것도 대비해야 한다. 특히 간도반환문제는 「중일평화조약」을 근거해서도 당장 제기할 수 있는 사안이다. 「한일협정」문서공개는 이러한 작업을 위한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