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질서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시고, 공의로우신 분이기도 하시다.
성경에는 한 사람의 영혼,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한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신다고도 한다.
육신이 아닌 영혼이다.
또 눈을 빼고, 팔을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지옥에 들지 말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한다.
내가 살아보니, 혈기가 왕성하고 목이 곧은 나이가 있어, 남의 말을 듣지 않기가 요나처럼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듣지 않는다.
그런 나잇대에는 누구의 말을 듣겠는가.
사람이란 다 그런 것이다.
눈이 빠지고 손이 날아가도 이를 갈며 덤벼들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죄과이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었다.
더하고 덜하고의 차이일뿐 인생, 누군들 않그렇겠는가.
그런 세월을 지나 지금에 오니, 떠나간 자를 매로 다스리실 때도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것을 무엇이라 설명할까.
방황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돌아오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허나 다치지 않고는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것이 사람이다.
그에 비하면 예수님을 세번 저주하고 욕하고 부인하고 뒤돌아 오열한 베드로는 양반인 것이지.
느브갓네살왕도 아닌 것이, 자신의 힘과 돈과 권력이 떠나가야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추하고 비겁하며 힘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삶의 자세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물질풍요와 장수를 누리는 지금의 시대에 과연 믿음이 있겠는가 물어보신다.
어쩌면 미련한 나는, 죽지 않을 정도로 맞고 하나님께 가는 길을 택한 것일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그것이 내가 원한 것이었겠는가.
인간 누군들 그것을, 자신의 미래를 알겠는가.
인간이란 지옥가길 원하는 존재이다.
사람들은 택하심과 부르심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불려진 것인가 택해진 것인가.
아니면 내가 믿는 것인가.
지금도 나는 내 선택에 의해 믿고 있다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강권하심으로 믿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성경의 모든 일이 사실이고, 나의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고 있을 뿐이다.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을 함께 하셨기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것에 일말의 의심도 후회도 없을 뿐이다.
누군들 내 상황을 겪어보게 된다면 그렇지 않겠는가?
본 대로, 겪은 대로, 느낀 대로, 깨달은 대로 믿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보는 이들은 과연 어떠한가.
만일 그 길이 닥친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범하기를 선택했듯이, 우리는 지금도 천국과 지옥사이에서 선택의 기로를 인생의 매순간 요구받는다.
나와 우리는 어떤 길을 가는가.
나는 가끔 맞지도 않고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볼 때에 부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인생사 모르는 것이라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더라.
열심히 믿던 사람들도 늙그막에 가서 뭔가 자신의 손에 잡히면 힘을 얻어 배반하더라.
내 생각에,
구원에서 멀어질 죄를 범하느니 차라리 눈을 빼고 손을 자르는 것이 낫다.
하나님이 자녀를 대하실 때는. 잘못할 때 타이르기도 하시고, 꾸짖기도 하시며, 매로 다스리시기도 하신다.
반면 사생자들은 그대로 버려두신다.
오히려 세상적 복을 더 얹어주어 하나님께 돌아올 시야를 어지럽게 만드신다.
(그렇다고 모든 물질이 다 저주이고, 모든 가난이 다 복이라는 말이 아니다.)
지상에서 몸편하고, 천국가서 영편한 사람은 없다.
그걸 바라고 믿었다면 "차라리 연자멧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 낫고, 태어나지 않는 것이 저에게 더 나았으리라"는 말씀이 왜 그런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런 믿음은 다른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파선하게 만들기 때문이고, 가룟유다와 같은 자를 만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