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교회080928b갈1장4-10복음이무엇인가b
등대교회080928b 갈1장4-10 [복음이 무엇인가b]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강의를 하게 되면 ‘첫 번째 시간했습니다’ 하면 다 잊어버리고, 두 번째 같으면 다 잊어버리거든요.
첫 번째 뭘 했느냐 하면, 악한 세대, 악한 세상은 특징이 뭐냐 하면, 이 바깥에 못 벗어난다는 것. 더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고. 다 못 났죠. 하여튼 같이 뭉개고 살아도 같이 살고, 백 살 넘고 해도 결국은 도토리 키 재기에요. 별난 사람 없어요. 다같이 돈 없이 못 사는 이 세상에 같이 뭉쳐있습니다. 진흙 땅 속에 나는 깨끗하다고 할 사람은 없다는 것, 악한 세대에.
이 악한 세대에 그러니까 판때기, 전라도 말에 판때기란 말 있습니까? 있지요. 이 판때기에 두 번째, 위에서 뭡니까? 위에서 모세처럼 깨끗하신 분, 거룩하신 분, 예수님이 오신 것. 그러니까 이 죄와 예수의 몸이 만나서 여기서 뭐냐? 우리 죄가 해결돼요. 우리 죄가 해결되면서 천국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죠.
4절에 보면,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은 무엇을 위함입니까? 무슨 정보가 안에 담겨있어요? 예수님 죄를 분해해 보면 뭐가 들어있어요? 우리 죄가 들어있지요. 예수님이 당했던 고난과 십자가의 버림받으심 이 모든 것이 예수님 본인의 죄가 아니고 누구 죄? 우리 죄 때문에 예수님이 그런 고생을 했다 이 말이죠.
십자가 바라 볼 때 십자가 사건이 아니냐? 이래 보지 마시고, 들여다보세요. 보면 그 안에 뚜껑 열면 뭐가 들어있어요? 우리 죄가 들어있어요. 그 죄가 뭡니까? 뭘 사랑한다? 돈밖에 모르는. 돈이 있어야 내가 살고, 돈 없으면 죽는다는. 이 세상에서 내가 사람답게 살려면 돈이 있어야 되죠. 돈 없으면 인간취급 못 받는다. 이런 자존심, 내 사랑 이것이 뚜껑 열고 보면 그 안에 들어있다 이 말이죠.
나밖에 모르는 인간은 천국에 못 갑니다. 안 받아줍니다. 이런 몸 가지고 천국에 못 가요. 우리는 많은 사람이 가는 길로 갑니다. 넓은 길 되게 좋아해요. 좁은 길로 가더라도 빠꾸합니다. 안 갑니다. 외롭다고. 그 정도로 나는 나밖에 모르는 인간인데 그게 십자가를 통해서 이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나의 타고난 모든 견물생심, 욕심, 돈,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 남한테 과시욕 이런 게 전부다 이 안에 들어있어서 이 십자가를 부활로 잡아당기면 여기에 누가 다시 딸려 올라갑니까? 이 죄에 해당되는 사람도 주께서 잡아당기면 어떻게 돼요? 잡아당기면 같이 딸려 올라가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두 자로 ‘구원’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기에 목숨 거는 겁니다. 이것 먹고 떨어져라. 이거 먹고 천당 가자. 이런 식으로 다른 복음 없다. 이거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 해결했다. 이거다. 하고 자기 목숨 평생을 바쳐도 이걸 증거한 겁니다. 당신들은 의인은 없다.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 필요 없지만 병든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듯이 당신네들이 예수님을 의사처럼 그렇게 간절히 원하고 있는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볼 때 ‘환자입니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고쳐주세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느냐? 흥정하는 사람이 아니고, 얼마 먹으면 되겠어?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고, 얼마 바치면 복 주겠어? 이래 하지 말고, 그건 돈 놓고 돈 먹기고. 그건 야바위꾼들이 하는 거고. ‘이런 돈밖에 모르는 죄도 용서 받을 수 있습니까?’ ‘된다.’ 그런 이야기가 오고가야 예수님을 복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뭐냐 하면, 방금 이러한 세 번째가 약간 어려운데 잘 들어보세요. 일번, 이번 합쳐서 복음 되지요. 이 복음이 덩어리째 하나의 현실이 되어서 이 세상에 이 원칙과 공식이 그대로 우리 앞에 눌러앉아버렸다는 게 세 번째입니다.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쳐다봅니다. 위를 쳐다보면서 ‘하늘에서 뭐가 내려오지?’ 십자가가 내려온다면, ‘어, 하늘에서 뭐가 내려오지?’ 이럴 때는 내가 지금 살았죠. 이게 일번이에요. 이러다가 두 번째 복음 이야기는 뭐냐? 이게 눌러져버리면 뭐냐 하면, 끽, 끽. 여기에 이 덩어리가 바위덩어리가 ‘끽’하고 눌러버리면 첫 번째는 아직도 살았어. ‘하늘에서 뭐가 오지? 내가 예수를 믿으면 되지? 나는 기도 어떻게 할까? 교회 몇 시까지 나가면 되지?’ 이러다가 갑자기 여기 뭔가 눌러버리면 이 자체가 뭡니까? 따라하세요. ‘끽’
이걸 가지고 뭐냐? ‘예수님의 영광’이라 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뭐냐 하면, 지금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구원이라든지, 모든 복은 바로 예수님께서 나에게 일방적으로 주신 것이다 이 말이죠. 주여, 영광 돌리려면 뭐하면 됩니까? 이럴 때는 어떤 경우에요? 일번이에요. 진짜 영광은 일번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고, 어떤 때 이뤄집니까? 이번에서 이뤄져요. 영광이 한 52톤, 트럭으로 15톤. 요새 골리앗크레인 많대요. 크레인이 그냥 눌러앉으면 이거는 ‘끽’하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영광 돌릴까요, 말 것도 없어. 그냥 하나님이 날 사용해버려. 그게 주님의 영광입니다.
제가 이게 약간 어렵다 한 이유가 왜냐하면, 사람들은 주님의 영광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주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지가 계획을 잡아요. 일번 경우에. ‘주님의 복음을 알았으면 양심이 있지. 그렇게 십자가의 용서를 받았으면 지도 양심이 있으면 뭔가 내놔야 되고, 해야 되고, 열심히 설쳐야지. 인간 같으면 염치가 있어야지. 주님 앞에 평생을 드리겠습니다. 이래 나와야지.’ 할 때는 아직도 일번 경우에요. 아직도 영광 맛을 못 봤어. 여기는 뭐냐? 예수님이 하나의 대상이 돼요. ‘예수님 거기 계셔요. 제가 열심히 해서 예수님 기쁘게 해드리겠습니다.’ 이런 게 일번이라고.
그런데 이번은 뭐냐? 그냥 눌러앉아버려요. 눌러앉아버리면 뭘 해드리겠습니다 말할 것도 영광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착한 일하고, 예배, 영광이 아니고, 먹든지, 마시든지 포함시키면 싸든지. 나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것이 내 일이 아니고, 다 누구 일이다? 나에게 덮쳐버린 덤프트럭, 주님의 자신의 복음을 위해서 나를 원 없이 사용하는 주님의 자기 소유권이 나의 소유권에서 누구한테 넘어갔어요? 이건 내 것인데 주님 지 마음대로 사용하는 거예요. 주님보고 지 마음대로라 하면 안 되지만 주님 지 마음대로 사용하는 권한이 넘어가 버렸어요.
일번 경우에는 ‘주님이여, 이거 영광입니까? 영광 아니지요.’ 이러다가 촐싹대다가 촐싹댈 수가 없어. ‘마음대로 하이소. 하나님 마음대로 하이소.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애를 어떻게 다루든 나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다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입니다.’ 이걸 한 자 이야기하면, 이게 ‘끽’.
일번 경우에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아주 찬란하게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아주 예쁘게 보입니다. 일번에 의하면. ‘아이고, 나는 언제 저렇게 살꼬? 나는 바보다. 돈만 알고. 교회 십 년 다녔는데 이 집사보다 못하고. 주님은 좋겠다. 너무 착해서.’ 이런 상입니다. 나는 못났는데 멋있어 보이고, 훌륭해 보이고 이래 보입니다.
이번은 주님이 와버리면 여기는 뭐가 나오느냐? 분노와 탄식과 원망과 적개심이 나와요. 마치 올챙이 안에 숨어있던 내장이 튀어나오잖아요. 나의 더러운 내장들이 주님의 영광에 비해버리면 그게 다 튀어나와서 자기가 수습하기도 버거워요. 이거 하면 이것 튀어나오고, 이거 하면 이것 나오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루 생활하면서 뭐가 후회되던가요? ‘아이고, 그런 말은 안 해야 되는데. 아이고, 그 사람한테 그래 이야기하면 안 되지. 내가 생각해도 바보다, 바보. 다신 안 해야지.’ 다신 안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소고기 불고기를 그리 많이 먹는 게 아닌데. 난 더 있는 줄 알았지. 남들이 얼마나 씹겠노?’ ‘저거는 어디 고기 기걸 들었나?’ ‘아이고, 그때 행동, 나 자존심 완전히 다 뭉개졌다.’ 돌아보면 실수 아닌 게 없고, 실패 아닌 게 없습니다. 전부다.
그런데 그렇게 실수, 버벅거림이 그런 게 퍽퍽 터져 나오도록 이미 작용하시는 주체자가 여러분들을 덮쳤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들이에요. 거기서 나오는 영광은 이런 영광이에요. ‘주님이여, 살살 다뤄주세요, 살살. 내가 주님과 함께 가려니 힘들어 못하겠습니다. 좀 내 뜻도 들어주시고 내 소망도 들어주셔서 뭔가 예수 믿는 보람을 가져야지 이거 뭐 기도 백날 해도 안 들어주시고, 일은 더 꼬이고 무슨 낙으로 교회 오겠습니까? 간증도 잘도 하더라. 뭐 해서 바쳐서 복 받고, 병 낫고, 사업 잘 되고, 일 년 만에 교회 짓고 잘도 되더라. 이게 뭡니까?’
바로 그러한 탄식과 적개심과 분노가 이게 나오게 되면 주의 영광과 함께 한 연고입니다. 함께 한 결과입니다. 그 근거는 성경에서 무척 많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에서, 제가 처음에 했잖아요.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은 무슨 복음? 다른 복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무슨 복음? 참된 복음.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기쁘게 하는 그런 구절들만 찾게 돼요.
찾게 되니까 무엇을 자꾸 그냥 넘어가버리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실컷 남한테 좋은 일 다 하고 돌아오는 것은, 남들로부터 얻어먹고, 이단소리 듣고, 배척 받고, 매 맞고, 배 곪고, 굶기도 하고, 주리기도 하고. 이런 대목은 그냥 다 넘어가버려요. 나한테 해당사항 없음. 이건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음. 혼자 괄호 쳐서 전부다 그냥 넘어가요. 스데반 집사님 돌 맞아 순교한 것, 그냥 못 본척하고 다 넘어가요.
어떤 걸 찾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모이는 숫자를 더하게 하시더라. 이런 것 있잖아요. 사도행전에. 누가복음에 나오죠.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리가 없다. 이런 것.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한다. 빌립보서에 뭡니까?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주님 능력 안에서 못할 게 없다. 이런 것.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면 된다. 이런 것. 그런 구절 보여줘야 돼요.
그런데 그런 구절이 앞뒤 문맥만 보면 그 구절이 내가 원하는 구절이 아니고 사도 바울이 자기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봐라. 내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만 전했잖아. 예수님은 가감 없이 다 전했잖아.
찾아볼까요? 고린도전서 7장 봅시다. 29절, 30절,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자나감이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눌려서 안에 있고 하는 것이 팍팍 올챙이의 내장 터지듯이 개구리 내장 터지듯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좋다는 것, 세상에 귀하다는 것, 이 악한 세대에서 이거는 뭔가 소중하다는 그게 하나님 영광 앞에서는 그게 다 쓸데없는 아무것도 시시하기 짝이 없는 문제 거리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아내가 가출했어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문제 거리가 안 돼요. ‘갈 때 차비나 보태주지 그냥 보냈어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라. 전혀 문제 거리가 안 돼요. ‘이번에 부도 세 번째입니다.’ ‘원래 다 없어질 건대. 잘 됐네. 미리 없애고.’ 문제 거리가 안 돼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일번 경우에 내가 여기 있고, 내가 펄펄 살았고, 하나님 영광이라는 것은 찬란하고, 아름답고, 보기 좋고, 유토피아고, 나도 죽어서 어서 그 나라에 합류해야지. 라고 했는데 막상 하나님의 영광이 복음과 더불어서 우리한테 끽하고 눌러버릴 때는 이거는 우리가 상상도 못한, ‘내가 이 정도까지는 참겠습니다. 내가 참겠습니다’ 하는 것보다 더 눌러버려요. ‘진짜 이거는 못 참겠습니다.’ ‘못 참으면 어쩔래? 어차피 네 것 아니잖아.’ ‘왜 아들 가출하게 합니까?’ ‘내가 했잖아.’ 아들 없는 자처럼 하라고.
그것보다 더 힘든 게 있어요.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는 자같이 하라. 이게 인간입니까? 이게 사람 사는 거예요? 어떤 지경에 놓였을 때에 웃는 게 웃는 게 아니고, 우는 게 우는 게 아니고. 어떤 경우에 그렇겠어요? 뭔가 자기를 박살났을 때, 도대체 나라는 것을 끄집어낼 어떤 틈새하나 빈틈하나 없을 때 뭔가 눌러버렸어. 뭔가 꽉 눌려버렸어, 완전히. 눌려서 거기서 새삼스럽게 추슬러서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것이야. 이건 내 것이고, 이건 내 거야.’ 내 것이라고 건질 게 없을 때 완전히 박살나서 산산조각 나서 가루가 돼버렸을 때는 이런 고백이 나오죠. 내가 지금 웃는 게 웃는 게 아닙니다.
첫째 시간부터 지금까지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첫째 시간은 뭐냐? 연속극 시간입니다. 뿔났다 시간입니다. 아침드라마 시간입니다. 고민, 온갖 고민 다 나옵니다. 다 나와요. 토요일 날 하는 것 있잖아요. 뭡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나오지요. 그 드라마 보며 사람들이 얼마나 고민을 합니까? 세상에 저런 인간이 다 있구나. 저건 때려죽여야 된다.
그러니까 제가 첫째 시간에 안 했습니까? 판때기를 이렇게 보면 때려죽일 놈, 약간만 죽일 놈, 상 줄 놈 구분이 되지요. 위에서 보면. 자기는 여기에 속한다? 때려죽일 놈이 아니고 때려죽일 놈을 때릴 놈에 속하지요. 이걸 옆에서 보세요. 옆에서 보면, 지나 개나 돈푼이 있으면 죄 짓겠습니까? 그렇잖아요?
이혼, 이혼, 성격 차, 성격 차 하지만 사실 따져보면 성격 차 아닙니다. 돈 차이입니다. 한 달 수입 오백만 원 보고 결혼했는데 이백만 원밖에 안 갖다 줘. 이혼 가능성 있습니다. 나는 이백만 원짜리 여자 아니라는 거예요. 오백만 원짜리 여자로 왔지 이백 만원으로 온 게 아니다. 너하고 못 살겠다. 지금이라도 오백만 원짜리 남자 있으면 가는 거예요. 이 세상 자체가 돈에 죽고, 돈에 울고, 돈에 사는 겁니다. 그게 한 마디로 돈의 영광이에요. 돈이 영광된 세상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주여, 영광 돌리겠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주께 영광 돌리면 돈 줄랍니까?’ 이런 뜻이에요. 왜? 아직도 자아는 챙길 자아가 있기 때문에. 아직도 나는 이 정도 예뻐야 아내답고, 이 정도 수입 돼야 나답고, 이 정도 학력 따야 생색께나 하고, 이 정도 교회 돼야 목사 소리 하고. 아직도 자기가 살아있으니까 그러면서도 하나님, 영광 돌리면 이 정도 줄랍니까? 계약 또는 흥정하고 있는 거예요. 시장바닥 흥정하고 있어요. ‘얼마면 되겠습니까?’ 이러는 거예요. 그러나 이런 식으로 단 한 명도 구원 못 받습니다.
왜 구원 못 받는가? 덜 착해서 구원 못 받는 게 아니고, 아직도 악한 세대에서 우리 죄를 위해서는 우리 죄라는 개념 있잖아요. 매를 덜 맞았어. 자기 죄라는 개념이 어느 정도라야 죄인 줄 몰라요. 자기가 살아있는 이상은 이 죄는 항상 감추어져 있어요.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그것 지금 잘난 척하고 있는 거예요. 진짜 자기가 죄를 아는 순간은 뭐냐 하면, 나한테 이런 게 있었는가가 튀어나올 때입니다. 그게 뭐냐?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 ‘다시는 교회 안 나온다.’
진작 그러지, 진작. 그동안 숨긴다고 애 좀 썼다. 위선적으로 산다고 애 많이 썼다. 진작 그러지, 진작. 이젠 십자가 네 눈에 보일 거야. 나는 주님마저 배반하고 가버린 가룟 유다 같은 놈인데 베드로처럼 세 번씩이나 당신 말 저주한다고 외치면서 간 인간인데, 그 간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이 뒤에 진드기처럼 따라와서 ‘가기는 어디 가. 너는 내 거야. 임마’ 하고 완전히 나를 강간하듯이 날 덮쳐서 ‘너는 내 포로에서 못 벗어나.’
그걸 시편에서 고상하게 이야기했어요. “주는 나의 방패요, 산성이시오.” 그 말 뭔 뜻이냐? 넌 빼도 박도 못한다. “주는 나의 구원의 주시오.” 도마가 뭐라 했습니까? 못 자국 보고 뭐라 했습니까?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오.” 빼도 박도 못합니다.
아까 제가 했잖아요. 십자가 전체가 뭐가 나온다고? 우리 죄 나오잖아요. 우린 이리 안 봅니다. 멋지게 봅니다. 십자가 믿습니다. 이러고 있어요. 그러면 주님께서 ‘알았다 이런 줄 압니까? 주님 속으로 ’알았어. 기다려.’ ‘왜요?’ ‘다가갈게.’ ‘다가오지 마세요, 다가오지 마세요. 믿습니다. 다가오지 마세요.’ ‘그래서 구원 안 되거든.’ 다가와서 십자가 덮쳐버리면 이 십자가 안에서 우리 죄가 발각되고 주님의 아픔에 동참되는 ‘주님이 이 정도로 고생이 심했겠구나’ 알게 합니다. 그런 일들이 팔자가 돼버려요. 그것을 주님께서는 십자가 그 다음에 뭐라 했어요? 십자가 죽고 난 뒤에 두 자로? ‘부활’
세 번째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성령이 와요. 성령은 진드기입니다. 별명이 진드기에요. 다른 말로 하면 ‘보혜사’라 하는데 이거는 절대로 안 떠나요. 중환자실에 간호사가 떠납니까? 안 떠나죠. 항상 그 사무실에 있지요. 급하면 오잖아요. 성령이 그래요. 한번 내주한 성령은 우릴 떠나지 않습니다. 왜? 지켜야 되니까. 아주 심하게 계속 목조르기 있잖아요. 한 판. 목조르기 30초가 아닙니다. 목조르기 95년입니다. 계속 목조르기.
그럼 우리는 뭐라 합니까? ‘주님, 이거 안 놓습니까? 내가 교회 와서 어떤 짓했다고 이렇게 심하게 고생합니까? 좀 나주소.’ ‘못 놓는다.’ 왜? ‘나는 자비롭거든. 나는 사랑이거든.’ 에이 졸라버려요. 그것이 지나가 보면 그게 바로 내가 나를 뭉개버리는 나를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제부터 영광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래서 하기 전에 대목 읽어봅시다. 갈라디아서 1장 5절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세상에 복음에서 이걸 빼는 사람이 있어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음에 급할 때 또 오겠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그렇지요.
그러니까 1장 5절을 빼버린다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있을지어다. 이거는 내 영광 아니니까 우리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예수 믿고 내 영광만 챙기면 되니까. 죽고 난 뒤에 천당 가면 그만이니까. 주님의 영광은 볼 일 없어. 타인이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호락호락하지 않지요. ‘아이고, 도망가려고? 아이고, 도망가시려고? 아이고, 안 됐네.’ 진드기처럼 따라붙어서 기어이 세세토록 영광이 나에게는 없고 누구한테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가도록 덤프트럭으로 우리에게 쳐들어옵니다.
다시는 우리 입에서 내 자랑, 내 영광 이런 것들이 노골적으로 나오지 않도록. 물론 늘 나오죠. 늘 나오면, ‘나왔다. 에라이’. ‘주여 잘못 됐습니다.’ 돌아서서 또 하면, 또 나왔다. 평생 갑니다. 이 짓을. 말씀대로. 그러니까 말씀을 떠난 생활은 없어요. 성도는. 항상 말씀이 우리에게 보고 있다가 보혜사니까 보고 있다가 우리에게 와서 들어가죠. 왜 네 영광이냐? 모든 것은 네가 먹고 마시는 것까지 산 것까지 다 주님의 영광인데 왜 네 영광이냐? 그렇게 따지고 들어가죠.
영광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영광이 뭐냐?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게 뭐냐 하면, 갈라디아서 아닙니까? 갈라디아서가 뭐냐 하면, 사도 바울 이야기거든요. 조금 어려운 이야기 하겠습니다. 주님은 사울을 선택했습니까, 바울을 선택했습니까? 사실은 사울 그 인간이나 바울 그분이나 여기서 사울에서 바울 된 사람이잖아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자식이 있었어요. 누구냐 하면, 이스마엘이란 자식을 낳았습니다. 누가 낳았습니까? 아브라함과 종 하갈에서 낳았잖아요.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마엘 생기고 난 뒤에 얘 아니라는 거예요. 누굽니까? 이삭인데 이삭은 어디서 나온 출생이냐 하면, 죽은 태에서 나와요. 자궁이 죽은 데서 나온 자식이죠.
이것이 여러분 생각에는 옛날 한 때 이야기인 줄 알지요. 이게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오늘날 2008년도 성도한테 그대로 옵니다. 그대로 한번 해봅시다. 우리 부부한테 물어보면 몸 있잖아요. 이름을 이근호라 하면 이근호 있습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나, 이근호가 구원받았다 했잖아요. 이거 이스마엘적 사고방식이에요. 나 구원 못 받아요. 구원해주지도 않습니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요. 이런 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뭐냐? 나는 죽음의 대상이지 구원의 대상이 아니에요. 이스마엘은 저주 받아야 됩니다. 할 수 없어. 미안합니다만 이스마엘은 저주 받아야 되는데 누굴 위해서? 태가 죽어 있지도 않은 누굴 위해서? 이삭을 위해서 이스마엘은 저주 받아줘야 됩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나쁜 역할, 좋은 역할 나눠져 있어요. 진노의 그릇과 사랑의 그릇이 나눠져 있기 때문에 토기장기가 만들 때 그렇게 만들었어요. 저보고 멱살 쥐고 따지지 마세요. 인간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제 삼이 없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저것 아니며 이것인데 진노의 그릇 아니면 사랑의 그릇, 하여튼 그릇이라는 것은 동일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그릇에다가 누굴 담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담아버리거든. 하나님이고 뭐고 현재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의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자기가 들어있어요. 일단 자기가 들어있고, 그 사람이 교회 가도 자기를 비울 생각을 안 합니다. 내가 잘 되는 것이 복 받는 것이다. 나를 팽창시키고 늘어나고. 이걸 가지고 그들은 뭐라 하느냐? 그걸 복이라고 잘못 알고 있어요.
복이라 하는 것은 내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고 뭐냐 하면, ‘교체’에요. 나는 죽고 그 안에 그리스도의 몸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신체 일부가 들어오는 겁니다. 시체가 들어오는 거예요. 나는 빠지고.
집에 문어를 하나 키워보세요. 문어방 따로 만들어놨는데 안방에 자고 있는데 슬슬 문어발이 들어오면 기겁할 것 아닙니까? 그 기겁하는 짓을 하나님이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이란 명분을 가지고.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도 구원받을 사람도 없어요. 어떤 사람이 구원받느냐 하면, 구원받을 사람을 따로 생각해놨다가 현재 있는 우리에다가 덮쳐서(교체) 우리는 눌려서 우리는 끽하고 죽고, 죽은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몸만이 구원받아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몸이 두 개입니까, 세 개입니까? 구원받은 사람의 총집합이 몇 명입니까? 하나에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사람이 지 잘난 척하면 믿음도 가지각색 아닙니까? 에베소서 보면, 몸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하나요. 여덟 가지 하나가 나와요. 교회도 하나요. 이게 뭐냐 하면, 교체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뭐냐 하면, 이미 죽은 나를 내세우면 안 된다. 내세우지 안 된다고 했지만 해봐야 내세우지만. 죽은 자를 내세우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김 집사, 와 자꾸 기도 짧게 한다고 욕하는데. 니는 길게 해도 좋겠다.’ ‘내가 길게 하란 건 그게 아니고 너무 짧아서 예배시간 빨리 끝나서 좀 길게 해주면 안 되나?’ ‘니가 뭔데 왜 날 무시하노?’ 교회 장로, 목사, 집사 백날 해도 이 안에 이런 괴물이 들어있습니다.
좋게 지낸 시간이 20년 동안 좋게 지내다가 20년 되던 그 다음 두 번째 시간에 ‘니가 왜 무시하노’ 교회 안 나온다. 이게 인간입니다. 20년 동안 좋게 지내고, 형제 아닙니까? 기도 해줄게요. 어떻고 좋다고 놀러가서 김밥 나누고, 내 김밥, 네 김밥 먹고 돌아오는 길에 ‘니 나 무시하노’ 그 다음부터 교회 안 나옵니다. 인간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건너 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자기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걱정하지 마세요. 문어발 들어옵니다. 문어발 들어와서 휙 감아서 우리를 한 판 조르기에 들어갑니다. 말씀 봐라. 형제를 사랑하라. 니, 그게 형제 사랑이가? 그거는 니 영광의 사랑이고. 조르기 들어옵니다. 그때 우리는 ‘고맙습니다’ 해야 됩니다. 왜? 불신자 같으면 조르기 안 들어옵니다. 불신자 같으면 점점 말씀과 멀어집니다. 성경 다 아는데 뭐. 말씀 멀어집니다.
그런데 성령이 함께 있으면 전에 알았던 성경이지만 새삼스럽게 새롭게 깨달아야 돼요. ‘세상에 십자가 뒤에 이 안에 이런 죄가 있을 줄 몰랐다. 나는 어지간한 죄는 다 처리했다고 보는데 간음도 안 하고, 바람도 안 피고, 술 끊고, 담배 끊었으니까 죄는 없을 걸’라고 했는데 세상에 어떤 교인이 와서 확 쑤시니까 ‘에라이’ 튀어나오더라. 세상에 온유와 화평과 자비가 어디로 날아가 버리고 그 다음부터는 시기와 질투가 이런 게 들어있구나. 들어있어야 돼요. 그래야 뚫고 들어가지.
사울은 죽고 바울로 태어났습니다. 요 방정식이 같은 성령이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 그걸 가지고 너희는 새로운 피조물이니 옛 것은 지나갔다. 옛 것은 지나갔다 하니까 사람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내 것이 세탁소에서 새 옷 입어서 내가 괜찮은 ‘나’ 된 줄 알고 있어요. 옛날에는 부족하고 모자란 나지요. 그냥 부족하세요. 끝까지. 그리고 새로운 것은 내 것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거예요.
그래서 사람은 이쪽에 서면 희망사항이 뭐냐? 지금은 못난 내가 이쪽에서 봐버리면 못난 내가 주님 덕분에 이리로 갈 때는 뭐가 되느냐 하면, 예쁘장한 나, 훌륭한 나 그래 되기 원하잖아요. 그거는 첫 번 시절의 희망이고, 일단 주님 경계선 넘어버리면 내가 잘 났니, 못 났니 선악을 논하지 않습니다. 못난 대로 조르기에 들어가면 잘난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뭐냐?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증거한다? 예수님을 증거하게 돼있어요.
사도행전에 1장 8절에 보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증인되리라” 세상에 이 말씀을 해석을 못해서 ‘증인 되라’고 닦달 대는데 세상에 증인되라고 닦달 내봤자 자기만 더욱더 집착을 하게 돼요. 그냥 놔두세요. 기어이 증인되게 합니다. 주님 욕하고, 주님께 대들면서 만날 대들어. ‘주여, 정말 그만 놔두소. 안 되는 걸 왜 자꾸. 이러면 또 교회 안 나옵니데이. 인간 안 되는 거 주께서 아시잖아요.’ 이럴 경우에 성령이 함께 계십니다. 아직까지 여러분 그런 경험, 그런 복을 못 받아서 그래요.
그럼 그런 복 받을 때 그게 영광이 되는지 그거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이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의 책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에 있던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을 오늘날 이방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를 예수님의 일을 가지고 설명하거든요. 누가복음 1장을 봅시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뭐냐? 어떤 사람도 구원받지 못한다 했어요. 구원받는 사람은 구원받는 씨를 심어줘서 그 씨가 커져야 그게 구원받는 거예요. 자기 구원은 없습니다. 주님의 자기 구원이라는 거예요. 주님의 몸이 들어와서 몸으로 바꿔지는 거예요.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지요. 2장 9절에 보면,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그 뭐라 돼있지요? “영광”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당시의 그 영광이, 제가 지금 설명하려고 하는 게 뭐냐 하면, 영광이 사도 바울 책에서, 사도 바울 편지 속에서, 갈라디아서 속에서 십자가 통해서 영광을 들어왔을 때 우리 몸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지금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서는 난리 나죠. 요란하고 번쩍번쩍 빛이 나죠.
실제로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 통해서 알아버리면 여기는 뭐가 되느냐 하면, 세상에 고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영광, 이게 어려워요. 이쪽에서는 진짜 번쩍번쩍인데 이쪽에서는 번쩍번쩍 안 거려도 씩씩거리면서도 그게 영광이에요. 십자가의 영광이 들어온 겁니다. 그래도 구원받기는 마찬가지니까. 그때 목자의 특징이 뭡니까? 그 다음에 뭡니까? 그걸 제가 강조하려고. “무서워하는지라” 사람은 습관적으로 살기 때문에 자기가 예상 못한 습관 나오면 일단 무서워합니다.
어떤 자기 할머니가 치매 걸릴 때 치매 걸린 자기가 늘 봉양할 때 자기 치매 걸린 할머니 모습 보면 안 무서워요. 그런데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가 모르고 화장실인 줄 알고 문 열고 보니까 치매 걸린 할머니 볼 때 어떻게 합니까? 무서워하지요. 두루 두른 영광 때문에? 아닙니다. 예상치 못한 괴물이 있거든요. ‘저분 누고?’ ‘이야기 안 한 모양인데 치매 걸린 내 할머니다.’ ‘아, 무서워라.’ ‘무서워하지 마. 미안하지 마.’ 안 무서워하지만 무서운 걸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이 무섭다는 말이 무서워서 무서운 데 아니고 자기 가는 평소의 노선이 있어요. 노선에 있다가 갑자가 뭔가 다른 사건이 유발돼버리면 그게 좋던 나쁘던 관계없이 무조건 일단 뭐 합니까? 무서운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이걸 이렇게 합니다. ‘낯선 사건’ 지금 제가 설명하는 게 이거에요. 좀 어려운데. 참아야 돼요.
내가 설명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오게 되면 내가 예상한 영광은 온다, 안 온다? 안 와요. 뭐가 오느냐? 무서움을 유발할 경우로. 이 십자가 이후에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영광이 올 때는 ‘아마 이 정도 했으면 하나님이 도와줄 거야’라고 예상했는데 예상 밖의 낯선 사건이 터지면서 내가 어떻게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빠져요. 그거 주의 영광 두루 비추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손 쓸 수 있는 것 같으면 그것은 주의 일이 아니고 나의 일입니다. 나의 종교적인 버릇에 불과합니다. ‘아, 이럴 경우에는 헌금 좀 더 하면 되고, 예배 참석하면 되고, 이럴 경우에 성경 두 장 더 읽고, 기도 30분 시간 늘이면 돼. 이건 안다고.’ 이러면 그거는 하나님 영광이 아니에요. 진짜 하나님 영광이 임하면, ‘어쩌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쩌라고.’ 그게 바로 낯선 사건이 밀어닥쳐서 끽하고 덤프트럭 와서 영광이 밀어붙여서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나온 게 뭐냐 하면, 14절에 보세요. 여러분 아는 겁니다. 천군천사가 뭐라고 그럽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게 망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고백입니다. 이 가사 외우라면 저도 외웁니다. 이거는 남이 망하는 것 보고 겁내도 안 나와요. 자기가 망해야 돼요.
여러분 손톱에 가시 끼면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아프겠다.’ 만날 해도 그 아픔이, 아픔이 아니에요. 왜? 자기 손엔 가시 없거든요. 흔히 목사님 사모들이 애쓰잖아요. 사모라는 이유 때문에 찾아가서 ‘집사님, 기도 해줄게요’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사모 지는 안 아프거든. 아무리 이해하고 생각을 같이 하려고 용을 써도 변죽만 될 뿐이지 별 도움 안 됩니다. ‘네가 내 사정을 알아.’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냥 사모라고 기능적인 행사를 할 뿐이지. 그래서 우리 사모는 아예 돌아다니질 않아요.
오히려 인간의 본성은 반대입니다. 그걸 자꾸 우린 십자가 안에 숨기는데, 남이 못 돼 보세요. 혼자 ‘음메’ 기분 좋아서 난리입니다. 연예인들 누구 이혼해 보세요. 기분 대길이에요. 누구 이혼했다. 난리입니다, 난리. 동네방네. 누구 죽었다 하면 더 좋아합니다. 꼴좋다. 돈으로 결혼하니 되나. 왜? 나는 안 죽었거든. 인간은 자기 안 아프고 자기한테 해 없으면 ‘이해합니다’ 하는 것은 하나의 예의 차원의 하나의 멘트 차원이지 절대로 인간은 자기를 타넘을 수 없는 존재에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구원 못 받습니다. 구원 안 됩니다. 주님을 알아? 주님은 타인인데 나는 내 안에 갇혀 있는데 뭘 알아요.
그런데 뭐가 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오게 되면, 목자가 기도했습니까? ‘주여, 천사 나타나게 하옵소서.’ 아니에요. 기도하면 안 놀라지. 제가 하는 말이 그 말 아닙니까? 이 목자가 놀랬다는 말은, ‘지금쯤 올 때 됐는데 와 이리 안 오노?’ 어디 택배회사입니까? 천사가. 기도 좀 했으면 올 때 됐는데? 이게 아닙니다. 자기 의견도 묻지 않고 갑자기 끽하고 들이닥칠 때 무서워 벌벌 떠는 거예요.
그 다음에 모든 소유권과 모든 주도권은 누구한테 빼앗깁니까? 천사한테 빼앗기지요. 뺏길 때 천사는 좋아 난리라.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 기뻐하심이라” 인간은 밑에선 벌벌 떨고 있는데. 지시만 합니다. ‘어이.’ ‘예. 알겠습니다.’ ‘빨리 가라.’ ‘어디 있어요?’ ‘베들레헴에서 아이 태어났나 봐라.’ 아이 태어난 것 보고 갔어요. 지시를 안 따라 해요. 왜 안 따라 해요? 영광이 왔는데 왜 안 따라 해요.
그래서 평소에 교회에서 봉사 안 하고, 설거지도 안 하고, 예배시간엔 설교하기 전에 중간쯤에 와서 일찍 가버리고 하는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데 예배 10분 전에 오게 되면 그건 주님께서 밀어붙인 겁니다. 시계 잘못 봤던지. 시간이 늦게 가든지. 이거는 예상도 못한 영광이 임한 거예요.
그걸 보고 ‘아이고, 이제 성도님. 인간 됐군요.’ 그러면 안 돼요. 화냅니다. 불따구나면 30분 더 늦게 옵니다. 인간은 고집이 있기 때문에. 가만 놔두세요. 얘들 교회 안 나오면 가만 놔두세요. 가만 놔두되 기도만 하세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니까 기도만 하세요. ‘주여, 난데없는 몽둥이 터지게 하옵소서. 그래서 십자가 안에 있는 죄를 알게 해서 십자가 잡아당기면 그 죄를 안 채 하늘로 올라가게 하옵소서. 이게 복음인 줄 알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를 할 수밖에 없어요.
사람이 누구한테 간섭을 하게 되면 내 교인이기 때문에 간섭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인 간섭하는 게 가만 보면 나를 떨쳐버리는 게 아니고, 나는 이미 죽었는데 사실은 원래 정답은 뭐냐 하면, 니가 집사건 누구한테 권면할 때 성경에 나온 정답이 뭐냐? ‘주님의 같은 지체기 때문에 기도하라’ 이래 되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실제는 그래 안 되고, 우리 교인이기 때문에 한번도 안 빠지고 헌금 꼬박꼬박 내기 때문에 기도가 더 잘 돼요. 참 이런 말 솔직하게 해놓고 부끄럽다.
헌금 안 해보세요. 기도 되는가. 여러분 목사가 되서 자기 교인 위해서 기도 안 하는 목사가 어디 있어요. 다 기도해요. 하지만 중점, 직접적으로 밑줄 깔아서 기도하는 것은 주로 돈 많다든지 헌금한다든지 참석 안 할 때 밑줄 쳐놓고 합니다. ‘주여, 신경 좀 더 썼습니다.’ 그런데 주일날 오전도 아니고 오후에 가는 사람들 이름만 부르고 끝납니다. 언제 봤다고.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어요. 왜? 인간은 자기 범위를 못 벗어나니까.
그러나 너무나 감사하게도 주님께서는 창세전부터 다 알고 있거든요. 창세전부터 다 아시기 때문에 목사한테 영광을 줘요. 뭐냐 하면, 만날 주일날 안 오고, 와도 일 년에 두 번씩 오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몫 돈 헌금 해버리면 목사라도 무섭습니다. ‘이게 우짤라고? 이래서 교회 등기 지 앞으로 하려고? 갑자기 안 하던 짓을 왜 하지?’ 놀랍니다. 그게 목사 교회가 아니고 누구 교회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교회기 때문에 주님이 알아서 했기 때문에 목사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고, 목사로 하여금 그 교회 지 자랑 못하게 지 소유로 못하게 하죠. 하나님께서. ‘이것 내 거다’ 못하게 하잖아요.
얼른 듣기에는 전도사님이 이 교회 지을 때 애를 많이 썼던 모양이죠. 안 썼어요? 교인들이 이래요. 교인들이 목사님이 애를 쓰게 되면, 끝으로 합니다. ‘목사님, 우리가 교인들이 해야 될 걸 목사님이 설교만 하지 우에다 하십니까?’ 하면서도 뭘 느끼느냐 하면, 그 교회 목사 교회야. 목사가 다 했으니까. 그 정도로 된다 하니까. 교회 있어 하는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너무 애쓰지 마세요. 교인들 보고 하라 하세요. 말아먹든지 나오든 해야 돼요. 자칫하면 하게 되면, 으레 ‘목사님이니까 지 교회니까 한다’ 이래 된다고.
교회는 주님의 소유에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어떤 활동을 할 때 주의 영광이 임해서 할 때 ‘내가 간다. 좀 봐라’ 이런 식의 주의 일은 항상 영광이 끽하고 오게 되면 ‘내 부득불 하는 거거든. 이거 안 하면 얻어맞을 싶어서.’ 이런 식으로 주님께 무슨 영광이 옵니까? ‘하늘에서 영광이요 땅에서 기뻐하라’ 모든 영광을 누구한테 돌립니까? 그때는 누구한테 돌립니까? 몇 초 안 가지만 주님께 바로 돌리는 거예요.
이게 몇 분 안 가요. 몇 분 가던, 안 가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한 순간이라도 자기를 부인하고 ‘이거 헌금 제가 한 것 아니고 미치겠다. 주님께서 하라 해서 한 겁니다’라는 심정으로 하게 할 때 그 교회 몇 푼 나오던 주님의 교회입니다. 그 성도 주님의 지체 맞습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볼 때 니, 나하고 우열, 누가 잘났느냐 보지 마시고 귀하게 보는 거예요. ‘아이고, 저런 인간이 다 구원받노? 저런 인간이 다 하나님의 백성이고, 행동 개차반인데 우에 구원받노?’ 이렇게 주님 입장으로 귀하게 보는 것 이럴 때 영광이 뭐다? 주님께 영광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우리 용서 받은 데다 더해야 돼요. 만날 ‘십자가 감사합니다. 이제 구원받았으니까 나중에 봅시다’ 이러지 말고, 주님의 영광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나를 덮쳐서 기어이 주님은 모든 게 주께서 와서 주께로 돌아가고, 너는 한 게 없다는 것을 주님께만 공로가 낚아채 가져가는 그런 일이 벌어질 때 그것이 새로운 하나의 교회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입장에서 남을 경멸하고 비웃고 무시하고 했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본성이 그러합니다. 그리 해야 될 죄인인데 난데없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우리를 낯 뜨겁게 만들고, 주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시는 그런 일들이 터지니 그 또한 너무나 감격스럽고 고맙습니다. 항상 주님께서 살아계셔서 일하는 교회 되게 하시고 사람의 교회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08-10-02 18:22:37 녹취 : 한윤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