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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눈물을 닦아주는 평화의 어머니
2장 나는 독생녀로서 이 땅에 왔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눈을 살포시 감으면 옥수수밭을 휘감아 나가는 거친 바람소리가 들립니다. 광야를 달리는 수천 마리의 말발굽 소리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 소리는 대륙을 힘차게 달렸던 고구려 무사들의 웅혼한 기백과도 같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또 다른 정겨운 소리도 들려옵니다
“소쩍, 소쩍 ······.”
깊은 산중턱의 높은 나뭇가지에 둥지를 튼 소쩍새 울음소리가 아련히 들립니다. 여름밤, 어머니 손을 잡고 잠을 청할 때 들려오던 소쩍새 울음은 지금도 내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나의 고향은 평안남도 안주의 아름다운 풍광과 정겨운 소리들은 벌써 70여 년이 흘렀음에도 내 마음속에 오롯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꼭 가고 싶은 정든 고향입니다. 언젠가는 내가 돌아가야 할 본향 땅입니다.
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 한승운(韓承運) 선생께서는 태몽이라기보다는 몽시를 받으셨습니다. 푸른 소나무숲이 아주 울창한 가운데 맑고 아름다운 햇살이 비치면서 두 마리 학이 정답게 어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이름을 ‘학자(鶴子)’라고 지었습니다.
나는 청주 한씨이고, 본관은 충청북도 청주입니다. 충청은 ‘마음의 중심이 맑다’라는 뜻이며, 청주는 ‘맑은 고을’이라는 의미입니다. 강이나 바다의 물이 맑으면 물고기뿐만 아니라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처럼, 그 고을에 살던 나의 선조들은 마음이 맑고 겸손했습니다. 청주 한씨의 한(韓)은 여러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一)’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크다(大)’는 우주만물을 안으며, ‘가득하다(滿)’는 충만함을 뜻합니다.
청주 한씨의 시조는 고려 개국정신의 한 사람인 한란(韓蘭)입니다. 청주 방서동 마을에 무농정을 짓고 넓은 땅을 개척해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했습니다. 후삼국이 쟁란을 벌일 때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쟁벌하기 위해 청주를 지나갔습니다. 한란은 왕건을 맞아 10만 병졸을 배불리 먹이고 함께 전쟁터로 나가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 공으로 고려의 개국벽상공신에 올라 그 이름을 길이 떨쳤습니다. 그로부터 33대가 지나 내가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33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33년 생애 동안 인류를 구원하려 하셨으나.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무지한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시 오마’ 재림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날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은 세 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른편, 왼편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오른편 강도에게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언약하고 승천하셨습니다. 3 이라는 숫자는 하늘과 땅 그리고 우리 사람을 의미하는 천리 법도의 완성이자 완결을 뜻합니다.
우리 민족은 별자리를 연구해서 하늘의 운세를 풀던 슬기로운 동이(東夷) 민족이었습니다. 기원전부터 찬란한 농경문화를 일군 민족으로, 하늘을 숭상하며 평화응 사랑하는 선민이었습니다. 한민족인 동이족이 한씨 왕국을 세웠습니다. 역사적으로 고조선 이전에 한씨가 살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를 신화로 폄하하는 의견이 없지는 않으나 단군신화에는 한민족을 천손 민족으로 택한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은 배달 민족이기도 합니다. 배달은 밝은 나라, 환한 나라, 하늘을 숭상하는 우리 민족을 말합니다.
그런데 한민족이 걸어온 5천 년 역사를 헤아려 보면 누군들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천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착한 민족임에도 끊임없이 외민족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한민족은 들풀처럼 짓밟히고, 매서운 추위에 나목처럼 헐벗기도 했지만, 그 뿌리는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슬기와 끈기로 외세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나라를 굳건히 지켜 왔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 선한 민족을 그토록 큰 시련과 아픔을 통해 연단 하셨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한민족에게 커다란 사명을 맡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에도 그런 역사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노아, 아브라함 등 중심인물을 세워 섭리를 이끌어 오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택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2천 년이 흐른 후 하늘은 한민족을 택해 독생자와 독생녀를 보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먼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남성과 유일한 여성을 말합니다. 한반도에서 독생자와 독생녀를 탄생시켜 세계를 구원하고 인류를 사랑으로 이끌어 나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한민족이 길고 처절한 고난과 고통으로 벌거벗은 나목이 되었을지언정 죽은 고목이 되지 않았던 까닭은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숭고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민족은 하늘이 선택한 참다운 선민입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품은 듯 정겨운 동네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부터 지구는 아름다운 별이 아니라 신음하는 별이었습니다. 세계는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터였고,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불평등의 시대였습니다. 어느 곳이든 지극한 혼란과 어두움으로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한반도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40년 가까이 암울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참혹한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 처절한 억압의 시기인 1943년 2월 10일, 음력으로는 1월 6일 새벽, 나는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안주시 칠성동으로 이름이 바뀐 ‘안주읍 신의리 26번지’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 고향 마을은 그렇게 깊은 시골은 아니었습니다. 마치 암탉이 날개 아래 병아리를 품은 듯 따뜻하고 정겨운 동네였습니다. 초가집이 대부분이었는데 내가 태어난 집은 마루가 넓은 기와집이었습니다.
집 뒤로는 밤나무와 소나무가 우거진 아늑한 야산이 있었습니다. 철마다 예쁜 꽃들이 때마쳐 피어나고 갖가지 새소리가 합창처럼 들렸왔습니다. 봄기운이 따사로울 때 집집마다 울타리 사이로 노란 개나리가 환하게 미소 짓고, 뒷산에는 진달래가 무리를 이루어 붉게 피어났습니다. 마을 앞으로 작은 개울이 흘렀는데 물이 꽁꽁 어는 한겨울을 빼고는 언제나 졸졸졸 정겨운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그 물소리를 새소리와 함께 자연의 합창으로 여기며 자랐습니다. 지금도 아득히 떠올리면, 눈시울이 촉촉해질 만큼 포근한 정감을 안
겨주는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고향입니다.
뒤뜰에는 옥수수를 촘촘히 심은 작은 밭이 있었습니다. 늦여름이면 옥수수가 잘익어서 껍질이 터지고 길고 가느다란 수염들 사이로 반들반들하고 노란 이들을 드러냈습니다.
햇살 따사로운 오후에 어머니는 알차게 영근 옥수수를 삶아서 대나무 바구니에 담아 마루에 내놓고 이웃들을 불렀습니다. 그러면 이웃집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사립문 안으로 들어와 마루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옥수수를 나눠 먹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고마운 마음으로 오후의 허기를 달랬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들 살림살이가 넉넉치 못했고, 일제의 착취가 너무 심해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그 틈에 끼어 자그마한 옥수수 하나를 애써 뜯어 먹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될 리 없었습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살며시 웃으며 노란 알맹이들을 손수 뜯어 내 입안에 넣어 주셨습니다. 그 달콤한 옥수수 알맹이가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기억이 마치 어제 일 같습니다.
달래강 전설, 하늘의 섭리 잉태하고
“엄마, 평안도가 무슨 뜻이에요?”
호기심이 가득했던 나는 궁금증이 일면 어머니에게 쪼르르 달려가 무엇이든 물었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친절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평안도는 평양과 안주에서 한 자씩 따 지은 이름이란다.”
“왜 한 자씩 땄어요?”
“두 곳 모두 큰 고을이기 때문이지.”
내 고향 안주는 예로부터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또 너른 평야에서 농사가 잘되었고 먹을 것도 풍족해 고조선 때부터 큰 고을을 이루었습니다. 어머니가 태어난 정주는 나의 남편 문선명 총재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청천강을 건너면 바로 안주입니다. 옛날에 살수라 불렸던 청천강은 고구려 때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대군을 격파한 살수대첩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강을 경계로 평북과 평남으로 나뉩니다. 안주에서 남편의 고향 정주까지는 불과 60여 킬로미터이며, 평양까지는 75킬로미터를 더 가야 합니다.
아버지는 그곳 안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청주 한씨 승운 선생은 1909년 1월 20일, 평안남도 안주군 대니면 용흥리 99번지에서 부친 한병건 선생과 모친 최기병 여사 사이에서 5형제 중 맏아들로 출생했습니다. 11세 때인 1919년에 만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4학년까지만 다니다 중퇴했습니다. 그러나 배움의 열망이 너무 커서 1923년 사립 육영학교에 다시 입학해 1925년 졸업했습니다. 그때가 17세였습니다. 졸업 후 선생님이 되어 10년 동안 모교인 육영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광복 직후 혼란기인 1946년까지는 만성공립보통학교의 교두(교감)로 일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산 기간이 무척 짧았습니다. 그러나 그 온후한 성품과 모습은 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성품은 치밀하고 알뜰하셨으며, 체격이 건강하고 체력도 뛰어났습니다. 어느 날엔 길을 걷다가 사람들이 논 가운데 있는 큰 바위를 치우는 데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번쩍 들어내셨을 만큼 힘이 장사였습니다. 공부도 잘했으며 기독교 신앙이 득실하셨는데, 충직한 교편생활과 신앙생활로 인해 중견 간부로 바쁘게 생활하셨습니다. 악랄한 일본 경찰의 온갖 핍박과 감시를 받으면서도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과 심정으로 삶을 이어가셨습니다.
어머니 홍순애 여사는 1914년 음력 2월 22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지닌 아버지 남양 홍씨 유일 선생과 어머니 영변 조씨 원모 여사 슬하에서 탄생한 1남 1녀 중 맏딸이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조선시대에 부유한 선비였던 조한준의 직계 후손으로, 그 동네는 벼슬을 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기와집 촌이었습니다.
그곳 정주에 달래강 다리가 있었습니다. 커다란 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튼튼한 다리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낡고 허물어져 건너다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먹고사는 일에 바빠 그냥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러자 홍수에 휩쓸리고 모래더미가 밀려와 강바닥에 묻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달래강 다리에 바위를 깍아서 세워 놓은 장승 표석이 묻히는 날에는 나라가
없어지고, 드러나는 날에는 조선 땅에 신천지를 펼쳐지리라.
중국 사신이 두만강을 건너와 한양으로 가려면 달래강을 건너야 하는데 다리가 망가져 건널 방도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나라에 돈이 없어 다리 놓아 줄 사람을 찾기 위해 방을 붙였습니다. 그때 조한준 할아버지가 가진 재산을 전부 털어 돌다리를 새로 놓았습니다. 네모난 돌을 빈틈없이 쌓아 튼튼하게 올리고 그 밑으로는 배가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만들었습니다.
조한준 할아버지는 다리를 새로 만드는 데 전 재산을 다 쓰고 엽전 세 푼을 남겨 놓았습니다. 다음 날 다리 준공식에 신고 갈 짚신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날 밤, 꿈에 하얀 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나 말했습니다.
“한준아, 네 공이 크구나. 그래서 너희 가문에 천자를 보내려 했는데 남겨 놓은 엽전 세 푼이 하늘에 걸려 공주를 보내겠노라.”
꿈에서 깨어나 의아한 생각이 들어 달래강에 가 보니, 언덕 위에 이제까지 없던 돌미륵불이 생겨나 있었습니다, 그 미륵이 얼마나 영험했으면, 누구든지 말을 타고 그 앞을 그냥 지나가지 못했습니다.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나서야 갈 수 있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별 신기한 일이 있다며, 경건한 마음으로 그 위에 집을 지어 돌미륵이 비바람을 맞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렇듯 충정 어린 조한준 가문을 통해 하늘은 신앙심 깊은 조원모 외할머니를 보내셨고, 그리고 그분에게서 신앙심이 더욱 깊은 홍순애 어머니가 탄생했습니다. 한반도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독생녀를 탄생시키기 위한 하늘의 섭리와 정성이 그 옛날 조한준 선조로부터 시작되어 나에게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시다
“우리 귀여운 아기, 교회에 갈까?”
그러면 나는 쪼르르 달려가 어머니 손을 잡았습니다. 교회에 가는 일이 너무 좋았습니다. 나는 네 살 무렵부터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어느 일요일, 예배를 마치고 마을 어귀로 들어오다가 어머니가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길가에 소담하게 핀 들꽃 한 송이를 따서 내 귀밑머리에 꽂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정답게 속삭였습니다.
“곱기도 해라, 우리 주님의 귀한 따님!”
어머니의 눈망울은 언제든 한결같았습니다. 애틋하기 그지없는 눈길은 마치 푸른 하늘을 딱 한 뼘 옮겨 담은 듯 맑고 깊었습니다. 그러나 영롱한 눈물 자국이 아롱져 있어 때로는 처연한 슬픔에 잠기게 했습니다. 어머니의 그 깊은 심정을 알 리 없는 나는 ‘주님의 귀한 따님’이라는 한마디에 설레고 기쁘기만 했습니다. 그 무엇에도 비할 바 없이 소중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뿌듯함과 행복감이 밀려왔습니다.
아직은 몹시도 어린 때였건만 어머니는 기도하듯 힘을 실어 ‘주님의 귀한 따님’이라고 나에게 말씀해 주시곤 했습니다. 이는 외동딸인 나를 향한 평생의 기도 제목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하나님의 딸, 주님의 딸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외할머니 역시 내 눈을 들여다보며 또박또박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아버지’라 하면 육친의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고 항상 하늘 아버지를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이란 단어만 떠올려도 마음이 푸근하고 정겨웠습니다. 사춘기를 보내면서도 인생을 놓고 고민한다거나. 아버지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는다거나, 가난을 탓한다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나의 근본 된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늘 내 곁에 함께 계시고 항상 돌봐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인 부모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는 남달리 예민한 영적 직관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선명 총재도 나를 두고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나고 명석하다 칭찬하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핏줄이나 인정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천정의 도리를 나에게 이어 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하셨습니다. 뼛골이 녹는 듯한 고단한 수고를 개의치 않고 하나님 앞에 일편단심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삶 자체로 보여 주셨습니다. 단지 기도의 정성으로 높다란 돌탑을 쌓아 가듯 지극히 세심하면서도 간절했습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루 끝에 서서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고운 학 서너 마리가 푸른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런 날에는 맑은 하늘을 한참이나 바라다보며 한껏 부푼 가슴을 쓸어안곤 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네가 태어났을 때 어떻게 울었는지 아나?”
“아기니까 ‘응아’ 하고 울었겠지요.”
“아니다, 너는 ‘랄라랄라’ 노래를 했단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이 아이는 커서 음악가가 되려나 보다’ 하고 말씀하셨지.”
나는 그것이 나의 앞날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마음속 깊이 새겨 두었습니다.
그러나 내 어린 시절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출산 후 첫 미역국을 먹고, 나를 안고 잠들었을 때 시커먼 뿔이 달린 사탄이 다가와 산천이 떠나갈 듯 호통을 쳤습니다.
“이 아기를 그대로 두면 장차 세상이 위험해진다. 지금 이 아기를 없애야 한다.”
그러면서 나를 해치려 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꼭 껴안고 항거했습니다.
“사탄아, 썩 물러가라! 이 딸이 하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아이인데, 네가 감히 해하려 하느냐!”
꿈속 싸움은 격렬했습니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던지 외할머니가 깜짝 놀라 어머니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얘야, 네가 아기를 낳고 속이 많이 허한가 보구나.”
어머니는 일어나 앉아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사탄이 해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분명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굳게 결심했습니다.
‘이 아이는 정성을 다해서 키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 앞으로 세속에 물들지 않게, 주님을 위해 깨끗하고 아름답게 길러야겠다.’
어머니는 한 달쯤 후에 또 꿈을 꾸었습니다. 이번에는 흰옷을 입은 천사가 하얀 구름을 타고 나타났습니다.
“순애야, 그 아기 때문에 걱정했을 것이니라, 그러나 결코 걱정하지 마라, 아기는 주님의 딸이고 너는 유모와 같다. 성심을 다해서 양육하거라.”
하지만 사탄은 쉽게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섯 살이 되어 북한을 떠날 때까지 어머니의 꿈에 흉측한 몰골로 불쑥불쑥 나타나 나를 해치겠다고 온갖 위협을 다 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지키기 위해 꼬박 6년이나 싸웠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들려준 꿈 이야기를 듣고 몹시 궁금했습니다.
‘왜 사탄은 나를 해치려 그리 애쓰는 것일까? 또 왜그리 오래 따라 다닐까?’
어둠의 시대, 주님을 맞기 위한 선택
“자, 이제부터는 외출할 때는 이 신발을 신도록 해요.”
“이게 무슨 신발이예요?”
“하이힐이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시골에서 하이힐은 좀처럼 보기 어려운 신식 물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홍유일 외할아버지는 몸소 시장에서 하이힐을 사다가 집안 여자들에게 나눠 줄 만큼 근대 문물을 자유롭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정도로 의식이 깨어있었습니다. 키가 크고 친근감이 넘치는 호남형인 데다 생각 역시 진취적이어서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유교 전통이 엄격한 집안에서 자라났음에도 시대를 앞어가는 분이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처음 문선명 총재를 보고는 마음속으로 외할아버지와 꼭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문 총재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조원모 외할머니는 작고 예쁜 용모에 부지런하고 활동적인 신여성이었습니다. 읍내에 ‘평안 상회’라는 가게를 열고 재봉틀을 팔아 살림을 꾸려 나갔습니다. 때로는 고장 난 재봉틀을 수리하는 일도 했습니다. 그 시절 재봉틀은 혼수품의 첫 번째로 꼽힐 만큼 귀하고 비싼 기계였습니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시집가는 새색시들에게 싼값으로 팔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재봉틀을 한목에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1년 할부로 팔기도 했습니다. 나를 업고 할부금을 받으러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닌 덕분에 어린 나는 외할머니 등에서 세상을 차츰 배워 나갔습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열성적인 신앙을 이어받아 19세까지 장로교회를 다녔습니다. 홍순애라는 이름도 교회 목사님이 지어 주었습니다. 외할아버지 가족은 정주를 떠나 청천강을 건너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신의리로 이사했습니다. 어머니는 안주보통학교를 거쳐 1936년 평양성도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934년 3월 5일 혼례를 올려 부부가 되었습니다. 내가 출생한 해가 1943년이니 결혼 후 9년 만에야 나를 보았습니다. 두 분 다 신앙생활과 교회활동에 몰두하다 보니 뒤늦게야 내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한승운 선생을 데릴사위로 삼으려 했으나 아버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한씨 집안의 맏아들이었고, 멀리 황해도 연백에서 교사로 일하고 계셨기에 처가에 터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어 교회 일에 전념하느라 집에 머무는 시간이 드물어 서로 함께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연유로 나는 신의리 외가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자랐으며 자연스레 하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버지는 광복을 맞은 해인 1945년부터 만성공립보통학교에 재직했습니다 내 나라를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뿐 공산당의 만행과 위협이 갈수록 심해져 남한으로 내려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내가 네 살 무렵 아버지가 갑자기 집에 오셨습니다.
“북한에서 더 이상 살기 어려우니 남한으로 내려갑시다.”
공산당의 잔악함과 탄압이 이루 말할 수 없었기에 아버지는 남한으로 내려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자고 간청했습니다. 어머니는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재림주님을 만나겠다는 이념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주님을 만나면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만나야 한다는 간절함이 가득했기에, 아버지의 간청에 골똘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뜻길을 가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평범한 가정주부의 삶을 사는 것이 옳을까?’
그 갈림길에서 인간적인 고민을 했지만, 드디어 마음속에 결심이 서자 남편에게 단호히 말했습니다.
“핍박에 굴하지 않고 이 땅에서 주님을 맞이할 신앙길을 지켜 가겠어요.”
어머니의 거절은, 아버지에게는 참으로 뜻밖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기독교가 부흥하던 곳이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재림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는 성스러운 곳이었습니다. 재림 주님은 ‘구름을 타고 온다’고 쓰여 있었으나, 평양의 신령집단은 ‘육신을 쓰고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어머니 역시 재림주님은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동안 외할머니를 통해 믿음을 신실히 했고 새예수교에 다니며 헌신한 어머니는 충실한 메시아 집안으로서 사명을 다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버지는 남편이자 아비로서 인류의 도리를 다하고자 했으나 하늘의 섭리는 끝내 가족을 헤어지게 했습니다. 대문을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어린 나는 ‘마지막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건만,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홀로 남한으로 내려온 아버지는 40여 년 동안 열대여섯 곳의 학교를 거치면서 온전히 교육에 헌신하셨고, 교장선생님을 마지막으로 교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1978년 봄, 평화스럽게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아주 훗날 통일교 세계본부를 경기도 청평에 건설할 때, 그곳에 있는 미원초등학교에 아버지가 한때 봉직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하늘이 인도하신 역사라 생각했습니다.
나는 북한에서 살던 어린 시절 외에는 평생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간혹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궁금하기는 했어도 찾아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두서너 살 때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서 들었던 말을 내 가슴과 머릿속에 깊이 새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그 말을 절대 흔들리지 않는 진리로 알고 자랐습니다. 하나님의 딸로서 내가 태어났으니 나의 진정한 아버지는 하나님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육친의 아버지에 대해 사사로운 감정을 갖지 않았습니다.
내가 일제 치하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홀외할머니와 홀어머니 가정에서 온갖 역경을 이겨 내며 외롭게 자란 것은 하늘이 예비하신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그 준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할 참어머니가 되는데 아버지는 결과적으로 보이지 않는 일조를 하셨던 것이다.
선민의 나라, 독생녀를 보내실 민족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 역사가 지속되는 가운데 나는 6천년 만에 이 땅에 왔습니다. 그 노정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길고 파란만장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우주의 어머니이자 독생녀의 현현을 간절히 고대해 왔습니다. 누구나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평화란 누구나 간구하면서도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버금가는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녀인 하늘의 신부를 지상에 보내기까지는 가장 먼저 한민족의 5천 년에 걸친 희생과 탕감의 민족적 준비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나아가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신앙과 3대의 심정적 계대를 잇는 고난의 가정적 기반도 뒷받침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야 평화로운 세상을 이룩할 평화의 어머니를 이 땅에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자신의 탄생에 대해 깊이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 가운데 무의미하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한 사람의 삶은 그 한 사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하늘과 땅, 모든 우주만상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야 합니다. 온세계의, 나아가 온 우주의 기운이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자신을 하찮게 여기서는 안되며, 우주의 성스러운 작용으로 태어난 귀한 존재임을 마음속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 세계는 지극한 혼란과 어두움으로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1939년 가을에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격화되어 유럽은 피로 얼룩졌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신음하던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고통이 더욱 심했습니다. 1940년 들어 유럽 대부분의 나라는 히틀러에게 짓밟히고 남은 국가는 오직 영국뿐이었습니다. 그 영국마저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식민지 한국은 더욱 처참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극도의 고난이었습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살생 무기를 만들기 위해 조선의 집안을 샅샅이 뒤져 쇳덩이란 쇳덩이는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 심지어 제사 지낼때 사용하던 놋그릇까지 공출해야 했습니다. 쌀은 전부 징발해 군량으로 실어가서 사람들은 굶주림에 허덕였습니다. 농민들은 자신의 땅에서 자신의 손으로 쌀을 수확하면서도 그 쌀을 먹지 못하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민족의 얼이 담긴 한글을 잃어버린 지는 오래고 창씨개명으로 성씨까지 일본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젊은 남자들은 모두 징집되어 머나먼 전쟁터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탄광이나 무기공장에서 하루 종일 노역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 속에서도 나라를 되찾겠다는 결의와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으로 청사를 옮기면서 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고난일 뿐 곧 조국을 광복하겠다는 굳은 결의에 차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세계전쟁은 극으로 치달았습니다. 독일이 소련 영토로 쳐들어가 천만 명이 죽은 비극의 독소전쟁이 시작되었고,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습니다.미국이 합세하면서 전쟁은 지구 전체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듯 종전을 위한 희망의 불빛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은 예로부터 하늘을 공경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었습니다. 한국의 역사 가운데는 인간 삶의 근본 덕목이 되는 효(孝)와 충(忠) 그리고 열(烈)의 혼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은 역사적으로 세계의 모든 종교가 들어와 열매를 맺은 곳이었습니다. 짧은 기독교 역사를 지녔음에도 하늘은 한국을 선민의 나라로 택하시고, 하늘의 섭리를 운행할 독생녀를 보내실 민족으로 찾아 세우셨습니다.
그런 하늘의 뜻에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이 1941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 갈리히 기독학원에 모여 한족대회를 열었습니다. 이 대회에서는 북미국민회, 하와이국민회, 대조선독립단 등 9개 단체대표들이 한마음으로 조국 광복을 위해 일본군과 싸울 것을 천명했습니다. 그것은 식민 조국의 광복을 향한 필연적 열망이었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권을 가진 국가에서 독생녀가 섭리를 펼칠 수 있도록 하는 준비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942년 1월 1일에 연합국 26개 나라가 미국 워싱턴에 모여 공동선언을 조인했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첫째 전쟁을 끝내는 것이고, 둘째 평화 세계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식민지 국가로 전락한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조원모 외할머니가 23년 전 여섯 살의 홍순애 어머니를 등에 업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것도, 독실한 신앙을 중심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기반 가운데 하나님의 첫 번째 사랑을 받을 독생녀의 탄생을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1942년 그 고난의 여정 가운데 세계는 1년 후에 현현하실 독생녀를 맞기 위해 그토록 힘든 역사를 거쳐 나왔습니다.
독생녀를 맞기 위한 기독교인들의 정성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사랑할 독생녀를 한국 땅에 보내기 위한 섭리를 이어 가실 때, 시민 조선에 이미 그 싹이 트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많은 신령교단에서는 재림 메시아가 평양을 통해서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1900년대 초부터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있었던 신실한 기독교인들 사이에 신령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그 신령운동은 이용도 목사를 중심으로 한 새예수교, 김성도의 성주교, 허호빈의 복중교로 맥이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일제의 온갖 탄압을 이겨 내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어 갈 독생자와 독생녀를 맞이하기 위한 터를 닦았습니다.
한반도의 동쪽은 산이 많고 해가 뜨는 곳이며, 서쪽은 평야가 많고 해가 지는 곳입니다. 그런 만큼 동쪽의 함경도 원산에서는 남성들의 신령 역사가, 서쪽의 평안도 철산에서는 여성들의 신령 역사가 펼쳐졌습니다. 여성 대표로는 성주교의 김성도와 복중교의 허호빈이 활동했으며, 남성 대표로는 황국주 전도사와 새예수교의 백남주 목사, 이용도 목사 등이 신령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어머니는 장로교회를 다니던 중 외할머니를 통해 여러 신령교단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광복이 되기 전부터 온갖 정성을 기울이고 희생 봉사를 감내하면서 재림주를 맞기 위해 몰두했습니다. 그때 황국주 전도사와 신도 50여 명은 간도에서 출발해 한반도를 순회하며 많은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밀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며 전도를 다녔고, 부흥 집회 때는 영적 역사를 보여 주었습니다. 누이동생 황은자도 성령을 많이 받았는데, 어머니는 이용도 목사와 황은자에게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전도대원들과 함께 전도여행을 떠나 신의주까지 걸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민족사상을 입에 올렸다가는 당장 붙잡혀 가는 무서운 시대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감시하러 온 일본 형사들 마저 설교를 듣고 크게 감복했습니다.
전도여행은 말이 여행일 뿐 고난의 노정이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잠자는 것 모두 변변찮은 데다가 시골 사람들의 하루하루 생활도 어렵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신도들은 밤낮 100리씩 걸으면서 마을마다 성령의 불길을 일으켰습니다. 어머니도 그 대열에 동참해 힘겹게 신의주를 거쳐 강계에 도착하니 어느덧 100일이 되었습니다. 전도단은 국경을 넘어 만주로 가려 했지만 여의치 않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안주에 돌아와 보니 이용도 목사의 새예수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새로이 신앙생활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감리교 이용도 목사는 부흥회 중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지만 평양에서 새예수교 창립공의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뜻을 펴지 못하고 33세의 젊은 나이로 원산에서 운명했습니다. 장례를 치른 후 새예수교는 이호빈 목사를 중심으로 새 출발을 했습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1933년부터 3년 동안 안주 새예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어머니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기 위해서는 더욱 정결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매일 통곡하며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늘의 계시가 내렸습니다.
“기뻐하라! 그대의 아기가 아들이거든 우주의 왕이 될 것이요, 딸이거든 우주의 여왕이 되리라.”
어머니가 21세 되던 1934년 이른 봄, 달빛이 밤하늘에 가득하던 시각이었습니다. 비록 하늘의 계시라지만 그 말씀을 그대로 받들만한 아무런 현실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저에게 아들을 주시든 딸을 주시든, 우주만큼 크게 여기며 하늘의 왕자와 공주처럼 소중히 키우겠습니다. 뜻을 위해 기꺼이 저의 한 목숨 바치겠나이다.”
며칠 후인 3월 5일 어머니는 이호빈 목사의 주례로 26세의 청년 한승운과 혼례를 올렸습니다. 혼인 후에 아버지는 계속 교사를 하셨고, 어머니는 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교회 일도 열심히 하셨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마리아의 해산처럼 어머니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올 것이지만 하나님의 첫아들 독생자 또는 첫딸 독생녀로서 우주를 다스리는 사람이 된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절대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마리아가 실패한 것에 반해 어머니는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불원간 기성 교회에 큰 이변이 일어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무렵 외할머니와 교회 신도들이 평북 철산에 가서 은혜를 받고 왔습니다. 철산에는 여성 신령 교단의 김성도 부인이 이끄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성도 부인은 시댁과 남편이 교회라면 진저리를 쳐서 교회에 나가면 매를 맞았습니다. 김성도의 신앙에 감복한 신도들이 하나둘 모여 가정집회를 가졌는데, 그 교회가 성주교가 되었습니다. 1936년 즈음에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따라 처음 철산에 가서 김성도를 만나 새로운 신앙을 시작했습니다. 나의 외삼춘인 홍순정 선생은 공부를 아주 잘해서 평양사법학교를 다녔습니다. 방학 때 고향에 잠시 들르면 누나를 만나기 위해 또 먼길을 가야 했습니다. 경의선 기차를 타고 차련관역에 내려서 반나절을 걸어갔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힘들게 찾아온 남동생을 몹시 반가워하셨습니다. 그러나 전도에 열심이어서 오붓한 이야기도 오래 나누지 못했습니다.
성주교는 신도들의 전도에 힘입어 철산, 정주, 평양, 해주, 원산, 서울까지 뻗어 나가 20여 곳에 예배당을 차렸습니다.그러나 1943년 김성도와 신도 10여 명이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석달 후에 출옥했으나 김성도는 1944년 61세를 일기로 타계하고 말았습니다. 8년 동안 철산에 다니면서 에덴동산으로 복귀할 줄 알았던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갑자기 막막해졌습니다.
“이제 누구를 믿고 나아가야 하나?”
그 생각만 해도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다행히도 성주교에서 김성도를 지성껏 모시던 허호빈 부인에게 성령이 전해졌습니다. 그녀는 복중교를 일으켜 신도를 모았습니다. 하늘은 그녀에게 죄를 벗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주님이 오신 뒤에 자녀를 기르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에 태어나기까지 하늘이 많은 준비를 했던 것처럼 허호빈도 한국 땅에서 태어날 재림주님을 위해 철저히 준비를 했습니다.
이듬해 어느날 허호빈이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재림주님이 우리 앞에 오실 때 부끄럽지 않도록 옷 한벌을 해놓아야 해요. 오늘 밤이 가기 전에 옷을 한 벌 만들어 놓으세요.”
어머니는 주님의 옷을 짓는 일이었기에 아주 열심히 바느질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몽시에라도 좋으니 재림주님을 한번 뵈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바느질을 하다가 잠깐 풋잠이 들었습니다. 방 안에 건장한 남자가 동쪽에 상을 놓고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채 앉아서 공부하다가 척 돌아앉았습니다.
“내가 너 하나 찾으려고 이처럼 공부를 한다.”
그 말씀이 얼마나 감사하고 황공한지 눈물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러다가 번쩍, 꿈에서 깼습니다. 깨어나서야 그분이 재림주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그 몽시를 통해 문선명 총재를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기까지는 오랜 기간 가시밭길의 노정이 수없이 놓여 있었습니다. 신앙의 길은 그만큼 멀고도 험했습니다.
이처럼 재림주님으로 오신 문 총재와 어머니는 영적으로 깊은 교감을 나눈 터였습니다. 그럼에도 당시 외할머니나 어머니조차 오로지 다시 오시는 독생자 주님만을 오매불망 학수고대했지, 정작 우주의 어머니 독생녀의 현현에 관해서는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하늘은 이렇게 복귀 섭리의 역사적 비밀을 그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고 오직 홀로 간직하신 채 섭리 역사를 전개해 나왔습니다.
사필귀정으로 일제가 참패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온 민족이 그토록 원하던 광복이 되었건만 북한은 곧바로 공산 치하가 되었고 종교 탄압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배신자는 늘 있게 마련이어서 복중교 신도 한사람이 공산당국에 밀고하여 허호빈과 신도들이 평양 대동보안서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내무서원들은 허호빈을 잡아먹을 듯 다그쳤습니다.
“네 배 속에 있는 예수는 대체 언제 나오느냐?”
허호빈은 당당하게 대답했습니다.
“며칠 후에 나오실 것이다.”
교인들은 흰옷을 입고 매일 문밖에서 기도를 올렸으니 1년이 지날 때까지 출옥하지 못했습니다. 그때가 1946년 8월 즈음인데, 서울에 있던 문 총재가 평양으로 가서 경창리에 집회소를 열고 전도를 하던 무렵이었습니다. 공산당의 발악이 극에 달했을 때였습니다. 허호빈이 감옥에서 고초를 겪을 때 문 총재도 이승만의 첩자라는 터무니없는 혐의로 대동보안서에 갇혔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옥에 있던 복중교 신도들이 문 총재가 자신들과 함께 갇혀 있음에도 재림주님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문 총재는 100일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 간수들 몰래 허호빈에게 여러 차례 연락했지만, 허호빈은 끝내 ‘문선명’이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문 총재는 가혹한 고문으로 반사지경이 되어 풀려났습니다.한편 복중교 신도들은 고문으로 죽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늘의 계시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결말이 얼마나 가혹하고 냉엄한가를 보여주는 산 역사였습니다. 그 교단들은 재림주님을 마중하는 길을 준비하고 신부를 찾아내기 위해 하나님으로 부터 계시받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나의 어머니가 속해 있던 교단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런 고난의 파도를 견뎌 내면서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재림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신앙심으로 평생을 보냈습니다. 그 긴 세월 오로지 한 뜻, ‘한국 강산에 세상을 구할 독생자와 독생녀가 오신다’는 예언의 말씀을 받들었습니다. 온 정성을 다하면서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열심히 신앙을 지켜 나갔습니다. 세상과 타협하거나 편안한 집 안에 안주하지 않고 하는 앞에 봉사하며 지성을 다했습니다.
나는 주님을 맞기 위한 수난길을 걸어온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따라 신앙의 정수를 이어받았습니다. 뜻을 위해 가는 길이라면 무엇이든 희생했기에 3대에 이르러 그토록 고대하던 독생녀가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나는 특출하게 영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하나님과 늘 교감하면서 자랐습니다. 장차 우주의 어머니로서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계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삼팔선, 이승과 저승의 고빗길을 넘나들며
“엄마 만나러 왔니?”
“네.”
“잠깐만 기다려라, 엄마를 불러 주마. 여기 사탕있는데 하나 먹으련?”
1948년 북한 공산당의 종교 탄압이 극에 달했을 때 어머니와 외할머니도 북중교 신도라는 이유로 열흘 넘게 옥에 갇혔습니다. 여섯 살이었던 나는 어머니를 만나러 유치장에 가곤 했는데, 예의 바르고 조신스러워 누구나 나를 좋아했습니다. 그 포악한 공산당원들조차 나를 보면 과일이나 사탕을 주었습니다.
다행히 두 분은 옥에서 풀려났지만 공산당은 점점 더 기승을 부렸습니다. 외할머니는 더 이상 이곳에서는 신앙 생활은 물론 평범한 삶조차 이어 가기 어렵다고 판단해 남한으로 내려가는 것이 어떨까, 많은 고심을 했습니다. 그떄만 해도 허호빈이 아직 옥중에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였습니다. 외할머니는 그런 딸을 설득했습니다.
“여기 있다가는 재림주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죽는다. 우선 남한으로 내려가서 순정이를 만나면 좋은 길이 나타날 것이다.”
“기거할 집도 없는데 무작정 가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가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실 테니까.”
외할아버지는 평양이 ‘에덴궁’이라는 계시를 받고 이를 지키기 위해 남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아내와 딸에게는 남한으로 떠나라고 권했습니다.어떻게 해서든 재림주님을 만나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기에 어머니는 몇 날 며칠 기도를 한 끝에 남한으로 잠시나마 내려가 있기로 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홍순정 외삼촌이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와 군에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외삼촌은 지식인이면서 멋쟁이였습니다. 또한 심지가 매우 굳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외아들인 외삼촌을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또 하나, 어떻게 해서든 외손녀인 나를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외손녀가 잔악한 공산당의 손에 해를 당하거나 혹여 일어날지 모르는 불상사를 미리 막고자 했습니다. 항상 나에게 “너는 하나님의 참된 딸”이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세상의 불행한 일로부터 나를 지켜 주고자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북한 땅의 공산당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잠깐 남한에 내려가 있다가 공산당이 망하면 고향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잠깐 만나러 가겠다고 삼팔선을 넘었던 외할머니를 비롯해 우리 세 사람은 계속 남한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하늘은 외삼촌을 향한 외할머니의 간곡한 마음을 통해 우리가 떠날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애절한 마음은 결국 우리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심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어두워졌으니 이제 길을 나서자!”
1948년 가을 어느날, 한밤중에 어머니는 나를 업고 외할머니는 보따리 두어 개를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안주에서 삼팔선까지 직선거리로 200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이었습니다. 몇 날 며칠을 걸어서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그 첫걸음부터가 조마조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길을 나선 지 대여섯 시간이 지나자 동쪽하늘이 희미하게 밝아 왔습니다. 해가 하늘에 떠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가기 위해 쉬지 않고 걸었습니다. 밤에는 빈집에서 잠을 자고 새벽이슬을 맞으며 또 길을 나섰습니다. 신발은 하잘것없고 길은 울퉁불퉁해서 조금만 걸어도 발이 아팠습니다. 참기 어려운 것은 배고픔이었습니다. 촌집에 들어가 보따리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주고는 보리밥이나 겨우 얻어먹었습니다.그렇게 온갖 고초를 겪으며 하염없이 걷고 또 걸어 남으로 향했습니다.
북한 공산당은 주민들이 쉽게 남하하지 못하도록 논밭을 갈아엎고 길을 울퉁불퉁하게 만들었습니다. 갈아엎은 논밭을 지나느라 발이 푹푹 빠지고,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오직 별빛을 바라보며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가까스로 삼팔선 인근에 다다랐지만 나와 어머니, 외할머니는 삼업하게 경비를 서고 있던 북한 인민군에게 덜컥 붙잡혔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빈집 헛간에 가뒀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잡혀 온 여러 사람이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인민군은 남자들을 험하게 대했지만 여자와 어린아이에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한 어른이 보초를 서던 인민군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라고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미소를 지으며 먹을거리를 인민군에게 건넸습니다. 그렇게 몇차례 하니 저들의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어느날 밤 인민군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라면서 우리 세모녀를 풀어 주었습니다. 하늘의 보살핌이 생사의 기로에서 삶의 길로 인도한 것입니다. 그날 야밤을 틈타 안내자를 앞세워 삼팔선을 막 넘어섰습니다.
나는 너무 기뻐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이젠 김일성 찬양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되지요? 남한 노래를 부를거예요.”
그런데 남한에도 경비가 삼엄했습니다. 그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나는 즐거운 마음에 몇 소절 불렀습니다. 그때 우리 앞에 나무덤불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습니다. 우리는 깜짝 놀라 그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인민군에게 또 붙잡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덤불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남한 군인이었습니다. 그를 보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총을 든 군인들은 인기척을 느끼고 방아쇠를 당겨 총을 쏘려다가 어린아이의 맑은 노랫소리를 듣고 총부리를 거뒀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따뜻하게 맞으며 오히려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예쁜 따님을 데리고 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이거 얼마 안되지만 보태 쓰십시오.”
뜻밖에 서울행 여비까지 주는 고마운 군인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만약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면 북한 인민군으로 오해받아 그 자리에서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하늘은 이렇듯 애틋하게 우리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남한 땅을 밟았지만 결국 외할아버지와는 재회할 수 없는 결별의 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한은 우리 모두에게 무척 생소한 곳이었습니다.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서울인 데다 가는 곳마다 혼란스러워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했습니다. 신앙은 어떻게 지켜 나갈 것인지, 재림주님은 어디에 가야 만날 수 있는지, 참으로 캄캄했습니다. 의지할 곳은 한 군데도 없었고, 지닌 돈도 없었으며, 특별한 기술도 없어 돈벌이 하기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허름한 빈집에 머물며 아슬아슬하게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성주교의 장남 정석천이 남한에 정착했다는 이야기를 건너건너 전해 듣고 외할머니는 차후에 그를 찾아 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먼저 서울에서 외삼촌을 찾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때 뜻밖에 하늘의 가호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남한의 내려와 의지할 사람은 단지 외삼촌뿐이었습니다. 외삼촌은 서울 약학전문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육군사관학교 약재관 교육을 받은 후 중위로 복무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외삼촌을 만나기 전에는 그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어머니는 혈육을 찾아 의탁할 곳을 마련하려고 매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남동생 홍순정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기도 덕분에 우연히 길에서 외삼촌의 친구를 만나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천우신조, 하늘이 도왔습니다. 용산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던 외삼촌은 고향에서 어머니와 누나, 조카가 기별도 없이 내려온 모습을 보고 기쁘면서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부랴부랴 효창동에 작은 방 하나를 얻어 기거하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후에 설립된 청파동 통일교회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마주 볼 정도로 지척이었습니다.
나는 곧 효창초등학교에 입학해 자유 대한 땅에서 처음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책보따리를 들고 학교에 가는 나날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동네 어른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으며, 아이들도 나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남한에서의 삶은 차츰 안정되어 갔습니다. 외삼촌이 장교로 군복무를 하고 있었던 사실이나, 아직 만나지는 못했지만 성주교 정석천 가족이 먼저 남하해 있었던 것은 하늘이 섭리를 맡길 독생녀를 보호하기 위해 준비한 노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 간 푸른 섬광
“전쟁이 터졌대요!”
글쎄 북한군이 삼팔선을 밀고 내려왔답니다.”
내가 여덟 살 때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마당 한 켠에 봉숭아꽃이 빨갛게 피어오르고 길목의 버드나무와 플라타너스가 한컷 우거진 초여름 아침이었습니다. 그 초록빛 여름날이 무색하게 아침부터 삼삼오오 모여 걱정하는 주민들로 골목이 가득했습니다. 남한으로 내려와 그나마 생활이 조금 안정되나 싶었는데 북한 인민군의 기습 남침으로 결국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겁에 질려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허둥지둥 대전으로 후퇴하고 북한군을 막기 위해 한강 다리를 폭파하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서울 사수를 부르짖었습니다.
이틀 후 새벽녘에 문득 어머니가 잠에서 깨어나 피란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습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나는 눈을 감고 두분의 대화를 가만히 들었습니다.
“우리도 피란을 가야 해요. 공산당이 여기까지 내려오면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렇긴 해도 여자들을 험하게 다루기야 하겠니?”
“우리가 북에서 내려 온 것을 알면 그 자리에서 해칠지도 몰라요.”
외할머니는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숙여 잠시 나를 바라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집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순정이가 올지도 모르겠구나. 혹시 연락이 올 수도 있으니 다시 돌아가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리 셋은 터벅터벅 걸어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불을 대충 펴고 쪽잠을 자다가 요란한 스리쿼터 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창호지 문으로 새벽빛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문이 급하게 열리고 군복을 입은 외삼촌이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왔습니다.두 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제는 떠나도 되겠구나’ 안심이 되었습니다.
“서둘러야 해요. 빨리 떠나야 합니다.”
육군본부에 근무하던 외삼촌은 전시 상황을 면밀히 지켜보다가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다는 정보를 접하자 가족들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차를 몰고 집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싸놓은 보따리를 들고 부랴부랴 밖으로 나왔습니다. 희부연 골목에 스리쿼터 한 대가 시동이 걸린 채 세워져 있었습니다. 외삼촌은 우리를 태우고 급히 한강 쪽으로 내달렸습니다. 한강 일대는 새벽인대도 이미 많은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한강 인도교로 향했으나 길목이 인파로 꽉 막혀 좀처럼 앞으로 나아 갈 수 없었습니다. 외삼촌은 육군 장교였고 다리 통행증을 지니고 있었기에 스리쿼터의 경적을 울리며 피란민 사이를 헤치고 겨우겨우 한강 다리를 건넜습니다. 처절한 공포와 혼란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습니다.
한강을 건너자마자 외삼촌이 소리쳤습니다.
“엎드려요!”
“꽝!”
한강 인도교를 빠져나와 얼마 못 가 갑자기 뒤에서 ‘꽝’ 소리가 났습니다. 그 순간 푸른 섬광과 함께 굉음이 터졌습니다. 차를 급히 세우고 우리는 허겁지겁 내려서 길가 낮은 곳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얼른 보니 한강 다리가 폭파된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 불빛을 역력히 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악마의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빛과 같았습니다. 한강 다리를 건너오던 수많은 사람과 군인, 경찰들이 강물에 빠져 숨졌지만 우리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불과 몇 미터 차이로 생과 사가 갈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감았습니다. 사람들은 왜 전쟁을 일으키는지, 죄없는 사람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하늘은 왜 우리에게 이토록 큰 아픔과 시련을 주시는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정확한 답을 떠올리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눈을 뜨자 두 동강으로 파괴된 다리가 어둠 속에 흉한 몰골로 남아 있었습니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3시였습니다.
정부는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호언장담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인민군이 내려오기도 전에 유일한 한강 다리를 미리 폭파했습니다. 자유를 찾아 피란길에 올랐던 무고한 사람이 무수히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 절체절명의 우기에서 우리는 외삼촌의 도움으로 생명을 무사히 지켰습니다. 목숨이 촌각에 달린 순간 하늘이 보호하사 위험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지금도 한강 다리를 건널 때면 그때의 푸른 섬광과 피란민들의 아비규환과 같았던 비명이 떠올라 가슴이 아파 옵니다.
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목격했으며, 난민생활을 처절하게 겪었습니다. 순박한 사람들이 파리 목숨처럼 죽어 나갔고, 부모 잃은 아이들이 울부짖으며 거리 이곳저곳을 헤맸습니다. 여덟 살의 어린 소녀였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강 다리가 맥없이 무너지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벌써 7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목울대가 먹먹해집니다.
몸을 겨우 추스른 우리는 낯선 길을 걷고 또 걸어 남으로 향했습니다. 때로는 차를 얻어 타기도 하면서 전라도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군인 가족 피란민 수용소에 머물다가 9.28수복 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빈적산가옥에서 지냈습니다. 그것도 잠시, 50만의 중공군이 두만강을 건너 침공하면서 1951년1.4후퇴 때 또다시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군인 가족은 특별열차를 탈 수 있어 무사히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그 고행의 노정은 필설로 다 할 수 없겠지만, 굶어 죽고 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나는 삶과 죽음을 넘나들던 피란 노정에서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실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족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올 때도, 남한에서의 피란 와중에도 늘 함께하며 우리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오랜 고행 끝에 찾은 뜻길
대구로 내려온 우리는 성주교의 정석천과 그의 가족을 만났습니다. 반가움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헤어졌던 형제라도 만난 것처럼 무척 기뻐했습니다. 천산의 성주교는 일제의 탄압과 공산당의 극악스러운 핍박으로 거의 사라졌음에도 정석천은 뜻을 기필코 이루기 위해 계속 예배를 드리며 재림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부지런히 광산사업도 하고 쌀과 석유 장사도 해서 살림이 궁색하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그에게 당부를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북한에 있을 때 허호빈 부인을 통해 은혜를 많이 받았고 큰 역사가 있었어요. 재림주님은 곧 한국에 오실 것이니 그를 맞이하기 위해 힘써 기도해야 해요.”
흩어졌던 신도들이 모여 열심히 기도하던 어느 날, 어머니는 재림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더 정성스러운 생활을 해야 한다는 하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기도만 해서는 안 되고 생식을 해야 한다.”
어머니는 생솔잎을 먹었는데, 그나마 쪄서 먹으면 괜찮았으련만 솔잎을 그냥 생으로 먹다 보니 이가 몹시 상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밖에 없는 딸을 공부 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북한에서 결혼 전에는 비교적 유복하게 생활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농사를 크게 지었고, 외할머니가 재봉틀 상회를 운영한 덕분에 시골에서는 드물게 남매 모두 상급학교를 다녔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늘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남에게 신세를 지면 안 된다.”
그 말을 지키기 위해 어머니는 조그만 구멍가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김칫국과 솔잎, 땅콩을 하루에 두 번만 먹고 장사를 하려니 몸이 늘 피곤하고 허약했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해 기운은 없었으나 오히려 정신은 더 맑았습니다. 외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놀라면서도 측은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먹고 어떻게 장사를 하느냐. 정말 기적 같은 일이구나.”
어머니는 굶주린 채 돈도 많이 벌지 못하면서 석 달 가량 장사를 했습니다. 신앙심이 워낙 깊어 ‘무조건 믿어야 한다’ 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현실과의 타협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면서도 딸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자랄 수 있도록 늘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나는 봉산동에 있는 대구초등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했습니다. 얼굴뿐만 아니라 자태가 점점 더 예뻐지고 공부를 잘해서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어른들에게도 귀여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느 날 오후, 어머니가 가게를 지키고 있을 때 나는 가게 앞 골목에 나와 혼자 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 우뚝 멈추어 섰습니다. 눈빛이 형형한 도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가게에서 나와 도인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습니다. 도인은 나를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아주머니 딸입니까?”
그러더니 따스하고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어머니에게 눈길을 돌리자 도인을 말문을 열었습니다.
“어머니는 따님 하나 바라보고 사시는데,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니 훌륭하게 기르세요. 그런데 이 딸은 머지않아 시집을 가게 됩니다. 남편 될 사람은 나이가 많은데, 훗날 바다와 육지와 하늘을 넘나드는 출중한 능력을 가진 큰 인물일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도인이 무척 진지해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더 정결하게 키워야겠다는 마음으로 1954년 제주도 서귀포로 건너갔습니다. 번잡한 대도시를 떠나 깨끗한 자연 속에서 나를 키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정석천의 아우 정석진 일가와 함께 9개월을 보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다음에 세상과는 무관한 가운데 주님을 위한 성녀의 길을 걷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딸로서 소명을 받기까지는 단지 순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성을 쏟았습니다. 나는 신효초등학교 5학년으로 전학했는데, 한창 뛰어놀 나이에 가혹하리만큼 혹독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도, 경배, 정성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머니는 납작보리를 불려서 무김치 하나를 곁들여 생식을 했고 나는 그나마 좁쌀로 지은 밥을 먹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고생스러운 생각을 하면서도 농민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밭으로 들어가 보리갈이를 도와 주었습니다. 길을 걷다가 짐을 지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집까지 져다 주었습니다.그런 어머니를 보고 사람들은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자상한 사람이 다 있네.”
“그러게나 말이예요.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고 하던데, 역시 다르긴 다르네요.”
어머니는 그렇게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을 생활 가운데 늘 실천함으로써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외삼촌은 전쟁이 끝날 무렵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렸습니다. 외할머니는 아들 내외와 함께 서울에서 지내다가 딸과 외손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제주도로 내려왔습니다. 외삼촌은 강원도 춘천으로 발령이 나자 곧 우리에게 기별을 했습니다.
“제주도 생활을 정리하고 춘천으로 오세요.”
외할머니도 “학자를 가까이에 두고 보는 것이 내 삶의 유일한 낙이다”라며 함께 육지로 나가자고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제주도를 떠나 외할머니가 사는 약사동 근처에 조그만 방을 얻어 춘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1955년 2월 봉의 초등학교로 전학하고 곧 6학년이 되었습니다.
학교에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큰 그늘을 드리웠는데, 그 아래에서 책을 읽던 기억이 납니다. 또 학교 옆에 연탄공장이 있어서 오갈 때마다 운동화에 연탄가루가 묻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듬해인 1956년 봉의초등학교를 제 11회로 졸업했는데, 전쟁통에 학교 네 곳을 거친 끝에야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졸업식 때 우등상도 받았습니다.
주님을 만나려는 어머니의 간절함에 하늘이 드디어 응답했습니다. 우리 모녀를 보살피는 하나님은 손길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남한으로 내려와 대구에서 살던 정석천은 항상 모친 김성도의 유언을 기억하며 실천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뜻을 내가 성사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이룰 것이다. 주님이 오시는 단체는 음란집단으로 오해보다 핍박을 당하고 옥고를 치를 것이다. 그런 교회가 나타나면 참된 교회인 줄 알고 찾아가거라.”
그래서 그는 집에서 열심히 예배드리면서 이곳저곳의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리면 부지런히 찾아 다녔습니다. 그러던 1955년 5월, 그는 <동아일보>에 실린 이화여대 퇴학 사건 관련 기사 한 토막을 읽었습니다. 통일교회에 나간다는 이유로 이화여대 교수 5명이 해직되고, 학생 14명이 강제 퇴학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모친의 예언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직감한 정석천은 부산에 사는 누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누나는 딸과 함께 신문 조각을 들고 무작정 서울 청파동으로 올라왔으나 문 총재는 만나지 못하고 부산 통일교회를 소개받아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대구에 있는 정석천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정석천은 대구 통일교회를 찾아가 원리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통일교 신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입교한 지 열흘 만인 7월 4일에 문 총재가 투옥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정석천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문 총재를 면회하고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문 총재가 10월 4일 무죄로 석방되자 정석천은 대구 살림을 모두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뜻길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문 총재는 출소 후에 대구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춘천으로 이사한 어머니는 하얀 용이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얀 용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품에 안기는 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조만간 큰일이 닥치리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마침 정석천이 보낸 편지를 읽고 곧장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문 총재는 이미 서울로 올라간 후여서 만나지 못했습니다.
아쉬운 마음으로 대구를 떠나려 할 때 또 꿈을 꾸었었습니다. 황금용 한 쌍이 서울을 향해 엎드려 있는 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꿈을 가슴 깊이 새기고 서울로 올라와 한달음에 청파동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문 총재를 뵙고 인사를 올렸습니다. 꿈에 나타난 하얀 용이 누구인지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그때가 1955년 겨울 초입이었습니다. 30년 넘게 온갖 고행을 하며 꿈에 그리던 재림주님을 만나 더할 수 없이 감복했습니다. 그러나 황금용 한 쌍은 누구인지, 그 수수께끼는 풀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감복과 달리 문 총재는 다른 식구들에게는 다정하게 대화하면서도 유독 어머니만은 냉대했습니다. 어머니는 서러운 마음이 들고 한편으로는 앞이 캄캄했으나 묵묵히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하루는 문 총재가 예수님의 심정에 대해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민족은 참아버지로 오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했어요. 그 죄가 얼마나 큰지 알아요!”
그 말씀을 들으며 어머니는 성전 한구석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마냥 울기만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문 총재는 어머니를 불러 하늘의 소명을 받은 사람은 하늘은 물론 사탄의 시험까지 통과해야 한다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냉대받은 서러움이 어머니 마음속에서 봄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된 어머니는 곧 춘천으로 내려가 개척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