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문충이요 완월당이라 호 한다 명종 2년(1548)용안에서 태어나 자라매 의표가 비범하고 기우가 활달하여 큰 그릇이 될것으로 촉망되었다 낮에는 무예를 연마하고 밤에는 경서를 독구하여 26세에 무과 에 등제하여 비변랑으로 선발되었다 사헌부감찰 .형조정랑.군기첨정을 지낸 후 흥덕 현감에 죄수되었으나 출사 하지 아니하고 의영 고주부. 도로부도사. 경력도체찰종사관.해남군수.벽단첨사.강화부사. 만포첨사.경기방어사.등을 역임하였다 고향에 돌아와서 완월당이란 편액을 걸고 유유자적한 나날을 보내던중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순국을 결심 하고 훈련 중군 으로서 의주에 왕을 호종하여 수탄장으로 평양 탈환작전에서 공을세웠다 정유재란에는 순천부사로 남원에 출전하여 명나라 장수 양원의 실행을 질책하고 진두에 서서 독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세가 위급하게되자 장자 욱과 동량 2 아들과 더불어 화약고를 터뜨리고 무인다운 최후를 마치었으니 때는 선조20년 (1597)년 8월16일로 향년 50세였다. 초혼으로 용안에 귀장하니 조정에서는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고 병조판서로 증직하였으며 복절장의영국공신으로 포충되었다. 또한 부조의 은전을 내리고 해마다 춘추에 제수를 하사하고 향리에 전포하였다 우암 송시열은 전기를 짓고 현석 박세채는 신도 비문을 엮었다 용안을 위시하여 남원.금산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뜰에 활짝 핀 설매 한 가지를 꺽어 품에 안은 모친의 태몽에 연유 하여 자를 사형 이라 하고 편모에게 극진한 효도를 하였다 응정의 아들로 선조 7년(1874) 용안에서 출생하여 자라나 매 기상이 특출하고 동정이 비범하여 고을 원이 지나다가 말을 멈추고 감탄 하였다 8세때 이미 학업에 숙성하여 사기를 읽다가 백이숙제의 노래를 읊고 감탄하여 마지 아니하였다 문장이 뛰어나서 15세때 성균진사가 되었으나 남아의 소임이 아니라 여기어 병법을 연구하여 20세때 무과에 등제한 후 중부인 북도병마절도사 응태를따라 군막에 참획한 바 군략에서 이름을 얻었다.22세때 내선겸변비량에 승진되었다.군기주부로 재임 하였을 때 남북 어적책을 조정에 올렸고 44세 때 도로부도사가 되어 명성이 조정에알려지게되었다.45세 되는 해 호적이 발호 하므로 원수 강홍립의 막하에서 유연천총 으로 요동의 심하역에 출전 하였으나 홍립이 호적에게 항복하자 이에 격분하여 좌영장 김응하와 더불어 부거에서 적을 무찌른 후 집중하는 화살을 맞고 전사 하였다. 때는 선조11년 (1619)3월4일로 향년46세였다. 초혼으로 용안에 귀장하니 조정에서는 선무원종일등공신 으로 포충하고 병조판서를 중직하였다 어시를 하사하고 사만으로 치제되었으며 부조의 은전을 입었다. 현석 박새채는 묘지를 짓고 용안과 금산의 충열사에 배향되었다.
4) 오동량
응정의 아들로 용안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사훈이요 윤탄이라고 호 하였다. 무과에 등제하여 비변랑겸선전관.상의원주부를 지냈다.평소에 손무의 병서를 탐독하고 무예를 연마하였는데 모친의 격려로 장성 창의에 가담하여 기효중과 더불어 병량을 모아 운반하다가 적과 마주지자 이를 무찌르는 데에 공을 세웠다 다시 창의하여 공주로 가는 도중 우연히 순천부사로 부임 하는 부친과 형님 욱을 만나서 임소에 따르게되었다. 정유재란(1597)에는 부형과 더부러 남원에 출전하여 적 수십급을목베고 중과부적으로 전세가 위급하게되자 화약고에 뛰어들어 삼 부자가 동시에 순절하니 선조 30년(1597)8월16일 이였다.
초혼으로 귀장 하였다 조정에서는 선무원종일등공신으로 포충 하였다.사만으로 치제되고 현석 박세채 는 묘지를 지었다.
5) 오방언
자는 길보요순풍정이라 호 하였다 직의 장남으로 선조 27년(1594)용안에서 출생하여 25세에 무과에 등제하여 나라에 헌충하고 .인조때에병자호란이 발효하자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선전관으로 자원 참전하여 남한산성 에서 척화의 선봉에 나섰다 마침내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 되자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부친의 원수를 갚지도 못했으니 어찌 같은 하늘 아래 살겠느냐 하고 비동한 끝에 인조 15년 (1637)샛강에서 투신하여 절사 하니 2월1일로 향년44세였다. 조정에서는 도총 부도사에서 다시 좌승지로 증직하고 영국원종일등공신 으로 포록하였다. 인조께서는 가상히 여기시어 유해를 거두어 용안에 귀장케하니 부인 진주 정씨 또한 비통한 끝에 관을 껴안고 절사하였다. 부조의 은전을 입어 향리에 정포 되었으며 용안과 금산의 충렬사어 배향되었다.또한 부인 정씨는 열부로 정포 되었다.
1982년 11월 삼세오충렬사복원사업회 현창 위원 조병희 서 문 삼세오충열사복원사업회 명예회장 이선근 간행사 삼세오충렬사복원사업회 회장 이춘기 추 편 사 (推篇辭)성균관장 이재서 추 편 사 전종친회자.전법무장관 오탁근 추 편 사 삼세오충열복원사업회 집행위원장 국회의원 황인성 자 서 최광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