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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께서 이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밖에는, 아무도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39.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뒤에, 아이의 부모와 일행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하고 말씀하셨다.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하는 말이다.)
42.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엄하게 명하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마가복음5:35-43)
35 While Jesus was saying this, some messengers came from Jairus' house and told him, “Your daughter has died. Why bother the Teacher any longer?”
36 Jesus paid no attention to[a] what they said, but told him, “Don't be afraid, only believe.” 37 Then he did not let anyone else go on with him except Peter and James and his brother John. 38 They arrived at Jairus' house, where Jesus saw the confusion and heard all the loud crying and wailing. 39 He went in and said to them, “Why all this confusion? Why are you crying? The child is not dead—she is only sleeping!”
40 They started making fun of him, so he put them all out, took the child's father and mother and his three disciples, and went into the room where the child was lying. 41 He took her by the hand and said to her, “Talitha, koum,” which means, “Little girl, I tell you to get up!”
42 She got up at once and started walking around. (She was twelve years old.) When this happened, they were completely amazed. 43 But Jesus gave them strict orders not to tell anyone, and he said, “Give her something to eat.”
35.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5 While Jesus was saying this, some messengers came from Jairus' house and told him, “Your daughter has died. Why bother the Teacher any longer?”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야이로가 사람들을 밀치면서 주님 앞에 오더니 무릎을 꿇었습니다.
간청했습니다.
죽어가는 딸을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급히 야이로의 집을 향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12년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만난 것입니다.
급한 길인데 주님과 이 여인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을 자꾸 감추려 한 것입니다.
주님은 네가 누구인지 네 입으로 밝히라는 것입니다.
거기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많은 사람 틈에서 예수님 옷을 스친 사람이 한 둘이었겠습니까?
그 뿐 아니라 그것을 밝히는 일이 무슨 중요한 일이라고.......
얼른 가셔서 죽어가는 야이로 딸을 살려주시지........
그런데 구원의 길에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또 그 녀는 예수님의 옷자락의 신통한 능력으로 그 녀의 병이 나은 줄 알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옷의 신비한 능력으로 그 미신으로 병 나으면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 교정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이런 실랑이로 급한 길을 지체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35.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35 While Jesus was saying this,
올 것이 온 것입니다.
집에서 전갈이 왔는데 그의 딸이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딸이 죽었다는 소식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35.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35 “Your daughter has died. Why bother the Teacher any longer?”
이제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시간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도 별수 없는 시간이 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딸은 이미 죽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숨을 더 이상 쉬지 않으면 죽은 것입니다.
맥박이 뛰지 않으면 죽은 것입니다.
이 사람이 보나 저 사람이 보나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은 죄인들의 죽음에 따른 주관적인 해석이었고 주장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딸의 죽음에 대해 전혀 다른 주장을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으로 여기는 죽음에 대한 입장과 전혀 다르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것을 교정하십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딸이 죽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직 그것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그것을 교정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어디 틀린 구석이 없어 보였지만 그것은 죄인들의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이들의 표현 방식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대단히 배려하는 듯 표현했습니다.
특별히 아주 예의를 갖춘 표현을 한 것입니다.
주님을 더 괴롭게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려는 예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불신의 내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탄은 특별히 예수님을 부인하는 표현을 아주 겸손하게 교양있게 하는 법입니다.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의 나라는 지구의 반대 방향으로 자전을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주님과 완벽하게 다른 생각을 합니다.
형무소를 보면 죄수가 넘지 못할 높은 담장이 있습니다.
인간 사고의 담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절대 경계선은 죽음입니다.
사람들은 그 죽음 이전의 모든 사건에는 아는 척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는 아닙니다.
그 곳의 일들은 어떤 사람도 경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난 사람들이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서도 잘난 척하는 것입니다.
즉 죽음 이전의 논리를 죽음 후의 세상에 적용해대는 것입니다.
거기는 우리 죄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전능자를 믿어야 하는 공간입니다.
언제인가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의 관 속에 돈을 집어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돈으로 죽은 후에 여비를 하라는 뜻에서였습니다.
조금만 생각을 해 봅시다.
한국에서 미국만 가도 한국화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도 일호선 전철이 달리는 것으로 착각하는 모양입니다.
그 나라에서도 일호선 전철을 탈 때 한국 화폐가 통하는 줄로 안 것입니다.
좌우간에 사람이 알 수 있고 또한 대안을 낼 수 있는 명확한 경계선이 있습니다.
죽음 전까지입니다.
사람들은 딸이 죽기 전에까지 자신들이 간섭할 수 있는 장소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딸은 이미 생명을 잃었습니다.
즉 딸은 그 경계를 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예수님께도 적용하려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주님도 이제는 딸의 일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경계선 너머 하나님의 나라에서 오신 분이시며 우리 죄인으로 하여금 그 경계를 넘어 그 나라로 이끄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동생 나사로를 잃은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32.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요11:32)
미묘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녀의 언니 마르다도 비슷한 생각을 말했습니다.
23.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 오라버니가 살아날 것이다."
24. 마르다가 말하였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요11:23,24)
그들의 태도는 죽음 이전이라면 예수님의 능력이 통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 다음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14. 이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밝히 말씀하셨다. "나사로는 죽었다.
15.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은 너희에게 도리어 잘된 일이므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 그에게로 가자."(요11:14,15)
주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 앞에 죽음이란 무슨 뜻인지 보이실 기회를 가지신 것입니다.
또 주님께는 그 죽음의 경계선이 문제가 되지 않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죽음이란 극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세력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직 주님만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보이실 것입니다.
쇠사슬로 쇠고랑으로도 통제가 되지 않던 귀신이었습니다.
미친 파도를 누가 통제한다는 말입니까!
세상 속에서도 사람의 한계는 분명했습니다.
주님은 이제 죽임이라는 인간의 절대 우상을 타파하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조차 어쩔 수 없은 시간이 왔다고 말했지만 실은 그 장소가 주님이 필요한 장소입니다.
분명히 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무슨 희망도 기대할 수 없다고 여기는 그 장소에 희망을 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36. 예수께서 이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36 Jesus paid no attention to[a] what they said, but told him, “Don't be afraid, only believe.”
예수님께서는 이 불신하는 인간들이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아주 예의 바르게 무신론을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연장선상에서 한 인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불신은 아주 교묘하게 표현 되어지고 야이로에게 강요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이로는 지금 한 가지 현상 즉 딸의 죽음을 두고 집에서 보낸 전령에 의해 세상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그 죽음의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야이로를 결정적으로 교정하셨던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36.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6 “Don't be afraid, only believe.”
야이로는 이 두 말 중에 하나만 택해야 합니다.
둘을 동시에 택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는 다른 것을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불신이며 다른 것은 신앙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것은 사람들의 말로 표현되어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많은 말을 들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아주 배려하는 듯한 겸손한 말들입니다.
그 예수님을 배척하는 말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교회에서 세상과는 다른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하나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말에 계속 주입당하셨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외워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예배 공간에 앉혀 두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야이로의 집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두고 대립 되는 두 말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을 택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이제 딸이 죽었으니 주께 도움 구하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합니다.
확신을 가지고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딸이 이제는 손을 쓸 수 없는 경계선을 넘고 말았으니 주님께서 “참 안 됐구나. 삼가 조의를 표한다.” 그 말씀을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더 들을 게 없다고 다그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36.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6 “Don't be afraid, only believe.”
여기에서 두려워 말라는 것은 단순히 심리적인 상황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실은 두려움이라는 그 심리 현상은 절대자에 대한 신뢰의 결여에서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사건입니다.
여러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딸이 죽은 상황에서 현실은 어쩔 도리가 없지만 안 됐다는 값싼 위로의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당장 네 발 딛고 서 있는 차원에서 발을 빼라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새 차원의 삶의 방식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즉 이제는 인간의 어떤 행위도 의미가 없으니 타자인 하나님의 행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제 발로 신발 신고 걸어서 미국에 갈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졸든지 자든지 믿고만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행기가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데려다 줄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을 믿고 안전 벨트를 매고 앉아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비행기 안에서 미국 쪽을 향해 걸어가겠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행위에서 믿음으로의 전환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인들은 여태껏 믿음의 방식으로 살아 본 적이 없습니다.
깡패 같은 죄인들은 믿음으로 살라는 권유를 받으면 주먹을 내미는 것입니다.
“차라리 내 주먹을 믿고 살겠다.”
죽음의 이전의 세상에서는 이것이 통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것이 절대적으로 통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죄인들은 미심쩍어합니다.
전적 믿음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 이런 문제들이 생겼던 것입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을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선교 여행을 떠나 안디옥 교회를 잠시 비웠다가 교회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 새에 교회에는 심각한 문제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1. 몇몇 사람이 유대에서 내려와서, 신도들을 가르치기를 "여러분은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2.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다. 드디어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와 신도들 가운데 몇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해서, 사도들과 장로들을 찾아보게 하였다.(행15:1,2)
예루살렘에서 온 몇 사람이 안디옥 교회를 혼란에 빠뜨렸던 것입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바울의 교리에 할례 만큼은 더 더해야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구약의 율법 말씀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디옥의 교인들에게 더 호소력 있게 들렸던 모양입니다.
교인들이 그 가르침에 혹하여 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데에다가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을 더하고
예수님을 믿는 데다가 레위기의 말씀처럼 돼지 고기 안 먹어야 하고.......
바울은 이 신학적인 문제로 그들과 치열하게 대립한 것입니다.
치열하게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돼지고기가 혹은 안식일 준수가 구원을 보장하나?
아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음을 못 박은 계기가 된 것입니다.
주님은 야이로에게 믿음에 서기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끝장이 났다고 여기는 때에 전혀 다른 나라가 믿음을 통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대한 소망이 다 끊어진 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말 사이에 놓인 것입니다.
더 이상 주님을 괴롭게 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믿기만 하라
이 두 말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죽음도 극복하는 희망의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밖에는, 아무도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37 Then he did not let anyone else go on with him except Peter and James and his brother John.
*구원
세상 목표는 열심히 노력하면 대부분 이룰 수 있는 것들입니다.
사장이 되는 것도
교수가 되는 것도
부자가 되는 것도
물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도 보통을 넘지만 말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고 모든 인류에게 빠짐없이 가장 간절한 바람이 하나 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인류의 역사 이래로 단 한 사람도 그 희망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아실 것입니다.
그 거대한 구조물은 세상 절대왕의 간절한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생을 바라는 뜻에서 왕을 미라로 만들어 거기에 보관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절대적인 죽음을 상징하게 된 것입니다.
그 거대한 규모로.......
진시황은 불노초를 구하기 위해 우리나라에도 사람을 보냈습니다.
우리나라 왕들의 거대한 묘지를 보십시오.
어떤 권력가는 살아있는 노비들을 자신의 시체와 함께 순장하기도 했습니다.
처참하고 잔인한 짓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부인하고 생명을 구하는 간절한 바람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하지만 100% 그 노력이 헛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실은 신앙이 다루는 부분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루시는 목표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이 일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설교와 간증들이 저를 오히려 혼란하게 한 것입니다.
병 나았다는 간증
좋은 대학 갔다는 설교
사업 성공했다는 설교
구원이란 무엇을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교회의 설교와 간증들이 저를 혼란하게 만든 것입니다.
구원이란 그 나라의 영생입니다.
일류 대학이 아닙니다.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
25.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은 살 것이다.(요5:24,25)
그 구원의 방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 말씀이 보장하시는 영생입니다.
*숫자의 제한
그런데 주님께도 일종의 딜레마가 있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죽음 이전의 언어를 사용해서 죽음 이후의 나라를 표현하셔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혹은 그 초역사적 기적을 통해서 그 나라를 전하실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사람들은 왜곡된 세상 죄인들의 눈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의 나라를 읽어내야 합니다.
제멋대로 곡해하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읽어내는 일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딸이 숨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끝장났다고 여긴 것입니다.
어쩌면 본격적인 주님의 사역의 장이 열리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계시하심에 있어서 초역사적인 기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즉 죽었던 딸이 예수님을 통해 살아날 것입니다.
이런 초역사적인 현실 앞에서 인간은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그 하나님 나라를 썩고 말 이 땅에 적용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세상 갑부를 보장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 말세의 징조들!
5. 그리고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
6.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이 큰 이득을 줍니다.
7.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8.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9. 그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유혹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도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합니다.(딤전6:5-9)
그들은 이 땅의 소욕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끌어들이려 할 것입니다.
그 번영 신학입니다.
둘째로 그들의 역사적인 실천의 회피하며 그 천상적인 것에 안주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 명의 선발된 제자들조차 환상적인 변화산에서 제정신을 잃었습니다.
그 기적의 장소에 제집을 짓고 안주하려는 순간 하나님의 진노의 경고가 들렸습니다.
5.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채 끝내지 않았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6.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몹시 두려워하였다.(마17:5,6)
그 휘황한 자리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역사적인 책임을 망각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관성을 가지고 이런 인간들을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43. 예수께서 단단히 이르시고, 곧 그를 보내셨다.
44.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된 것에 대하여 모세가 명령한 것을 바쳐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도록 하여라."(막1:43,44)
예수께서 오직 그가 그리스도 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소수의 목격자를 그 기적의 자리로 택하신 것입니다.
요한이 옥에 갇혀 그리스도를 의심했을 때 주님이 요한에게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5. 눈먼 사람이 보고,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마11:4,5)
기적들이란 예수께서 그리스도 되심을 입증할 뿐입니다.
*무제한의 초청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기적은 이생의 대안이 아닙니다.
그 녀는 병에서 나았을 뿐입니다.
그 녀도 얼마 살다가 할머니가 되어서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메시야이심을 입증하셨는데 그 사건을 통해서 영생을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 현장은 3 제자들과 부모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자리의 목격자로 삼을 것입니다.
그 일을 목격하는 일에 특별한 대상을 정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또 주님의 죽으심을 통해 이제 야이로의 딸만이 아닙니다.
나사로만이 아닙니다.
수를 한정하지 않고 모든 믿는 사람들로 영생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38 They arrived at Jairus' house, where Jesus saw the confusion and heard all the loud crying and wailing.
야이로는 예수님께 가기 전에 먼저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전문 통곡꾼을 집으로 불러 왔습니다.
딸이 죽거든 통곡해 달라고 부탁한 후에 예수님께 달려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딸을 살려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이 야이로의 딸이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야이로의 집에 오니 큰 곡소리가 났습니다.
오직 희망을 잃지 말라는 주님의 권유와 그 통곡 소리가 뒤섞여서 나게 된 것입니다.
본인 자신이 혼란스러운 상황이고 자신이 상황을 더 혼란스럽게 만든 것입니다.
물론 이 두무리의 차이는 죽음에 대한 문제에서 그렇습니다.
그들이 죽음에 대해 예수님과 얼마나 다른 생각을 가졌는지 그렇게 그 신념을 실천하고 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의 나라에 전혀 다른 나라를 전해야 합니다.
세상이 비웃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선교입니다.
가장 극명한 차이는 죽음에 대한 입장입니다.
그는 두 가지의 요구를 듣고 있었습니다.
35.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35 “Your daughter has died. Why bother the Teacher any longer?”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36.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36 “Don't be afraid, only believe.”
39.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셨다.
39 He went in and said to them, “Why all this confusion? Why are you crying? The child is not dead—she is only sleeping!”
이 말씀은 딸이 죽은 장소에서 주님이 공개적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누구나 먼저 느끼는 것은 주님의 말씀은 죄인들의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사람의 방식으로 입증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언어입니다.
지금 차원 이야기를 하는데 주님의 말씀은 인간과 다른 차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이가 죽어서 우는 장소에서 왜 우느냐고 따지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놀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비교하자면 우리 한국말을 미국에서 아무리 유창하게 해도 통할 리 없다는 것입니다.
밤을 지새우며 한국말을 해도.......
그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야이로의 집에 오셨을 때 알아먹지도 못할 그 사람들에게 알아먹지도 못할 그 말씀부터 하신 후에 비웃음을 당하신 것은 주님의 전하실 메시지를 확실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죽음은 잠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는 잠을 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나라를 증거 하실 것입니다.
결국 주님은 십자가에서 그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를 초청하실 것입니다.
그 십자가와 그 부활로 인해서 죽음의 모든 독소가 제거되고 만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의 형체는 있지만 죽음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것입니다.
즉 죽음이 잠이 되고 만 것입니다.
55.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56.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57.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고전15:55-57)
39.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39 “Why all this confusion? Why are you crying? The child is not dead—she is only sleeping!”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은 복음을 위해 순교를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40.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뒤에, 아이의 부모와 일행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0 They started making fun of him, so he put them all out, took the child's father and mother and his three disciples, and went into the room where the child was lying.
*비웃음
주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비웃음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비웃었던 것은 첫째 자신들의 생각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누구보다 더 지혜롭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지식에 대해 자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자신이 없는 사람은 남을 비웃을 수 없습니다.
22.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어서,
23.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이나 새나 네 발 달린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롬1:22,23)
하지만 그들이 자랑하는 지혜로 썩지 않을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그려놓은 그들의 그림들은 모조리 눈에 보이는 썩어지고 말 형상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도 세상 나라의 법칙을 가지고 평가하며 설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예수께서 진리를 말해도 비웃음으로 답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세상 지식으로 하늘에 닿을 탑을 쌓은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창11:7)
그 잘난 행동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 언어를 알아먹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진리의 말씀이 그들에게 통할 리 없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을 비웃은 것은 그들이 비윤리적이고 비인격적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세상의 지식을 절대시하며 하나님의 지식을 몰아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죽음에 대한 입장입니다.
그들은 말했습니다.
죽은 것은 죽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것은 자는 것이다.
이런 인간들의 언어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알아 보지 못 한 것입니다.
이런 언어로 하나님의 나라가 정의 될 수 없습니다.
그 말의 뜻은 그들에게 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못 알아보는 것은 그 껍데기에 가치를 두기 때문입니다.
2.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사53:2)
세상은 화장하고 성형한 얼굴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는 그리스도를 못 알아볼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4.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사53:3-5)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제 것을 제대로 챙기겠다고 거대한 창고를 지어대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아보겠습니까?
*다 내보내심
12 명의 제자 중에 3명을 골라서 데려가신 주님은 강압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내보내신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이 선택하신 사람만 주님과 동행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은 주님이 택하지 않은 사람들을 다 내보내셨습니다.
즉 성경은 주님께서 그들을 거부하셨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 곳은 금지된 장소였습니다.
12명의 제자들조차 선별하신 것입니다.
그 자리에 함께 가기를 희망해도 주님은 최소한의 목격자만 남기신 것입니다.
선택된 사람만이 주님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죄인들의 필요에 의해 오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15.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6:15)
주님은 왕이신데 그 왕의 권능을 목격한 세상은 그를 세상의 왕으로 만들려 할 것입니다.
그들을 경계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에서 사람을 살려내실 징표를 보이실 뿐입니다.
후일 십자가에서 부활로써 그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아이가 있는 곳에
기독교 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
주님은 딸의 죽음의 현장에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기독교는 역사를 이르는 것입니다.
그 백성들은 애급의 나라에서 출애급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발을 디딘 것을 이릅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것은 설명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야이로의 딸은 죽었다가 다시 살았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건은 역사의 현실입니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하고 말씀하셨다.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하는 말이다.)
41 He took her by the hand and said to her, “Talitha, koum,” which means, “Little girl, I tell you to get up!”
*아람의 통용어
예수께서 죽어있는 소녀에게 가시더니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아람어로 말씀하셨습니다.
“탈리다”(소녀야란 뜻)와 “쿰”(일어나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달리다굼”은 가버나움에서 엄마들이 아이들 깨울 때 쓰던 말이었습니다.
만약에 예수께서 전라도 광주에 계셨더라면 “아무개야, 얼릉 일어나랑께” 하셨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 말씀이 주님만이 해석이 가능한 하나님의 나라의 방언이라든지 특별한 주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랑바리 나빠롱....... 손오공이 구름타기 전에 외우던 그런 특별한 주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훈련받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평상시에 쓰던 말입니다.
그런데도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은 그 말씀을 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죽은 사람이 벌떡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일상 언어가 죽은 자에게도 소통이 되었던 것은 그 말이 특수한 종교적인 언어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하신 사람이 특수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미 죽은 딸에게 주님처럼 달리다굼을 수없이 외워도 그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것입니다.
광주에서는 주님께서 “얼릉, 일어나랑께” 하셨더니 죽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즉 제가 충만히 성령을 받는다면 상황이 달라질 것입니다.
내 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누가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차이입니다.
그에 의해 결과는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
42.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42 She got up at once and started walking around. (She was twelve years old.) When this happened, they were completely amazed.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이라고 여깁니다.
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시119:105)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당장에 우리 갈 길을 알려주는 네비게이션 이상이시라는 것입니다.
25.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은 살 것이다.(요5:25)
그 말씀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말씀입니다.
창조의 능력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죽었던 자가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나게 하시는 능력이십니다.
주님은 바로 그 능력을 이 야이로의 딸을 통해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생명으로 일으키시는 주님의 능력은 실은 엄청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것이 일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죽은 것이 잠자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개야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어라. 학교 갈 시간이다.”
야이로의 딸에게 하셨던 그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엄마들이 아침마다 자식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자 식었던 아이의 몸에 온기가 돌아오고 일어나더니 세수하고 밥 먹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크게 놀랐는데 그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습니다.
달리다굼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엄마들이 늦잠 자는 아이들을 보고 아침마다 하는 말입니다.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엄하게 명하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43 But Jesus gave them strict orders not to tell anyone, and he said, “Give her something to eat.”
*중요한 주제
2023년 한국 땅에서 그 일이 일어났다면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전봇대마다 무슨 부흥사가 죽은 사람 다시 살렸다고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었을 것입니다.
가로수마다 무슨 기도원 원장 사람 살렸다고 플랭카드가 날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두고 주님은 입 다물고 있으라고 엄히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네댓 곱절로 부흥했을 텐데.......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소리입니다.
자기희생의 십자가를 모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우며 세상을 휘어잡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핏대를 세우며 예수님을 내세우지만 아주 비기독교적인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있어서 12 명 중에 3 명만 택하시더니 철저히 다른 사람들은 내보내시더니 죽은 사람을 살리신 후에 그 말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신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낸 기적을 두고 이렇게 다른 것은 그 때 2023년 전의 그 예수님이 진짜 그리스도시고 지금은 가짜들이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을 주라
주님도 이 소녀와 같이 부활의 사실을 잡수시는 것을 통해 입증하신 것입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뻐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42. 그래서 그들이 그에게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니
43. 예수께서 받아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눅24:40-43)
이 일을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난 야이로의 딸의 일이 역사적인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또 우리가 가볍게 생각하는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감격적인지 보여 주신 것입니다.
딸이 밥을 먹을 때 야이로가 눈물을 흘리며 소리 질렀습니다.
야, 우리 딸이 밥 먹는다.!
우리 딸이 밥을 먹을 후에 숭늉도 마셨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셨습니다.
그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셨습니다.
7.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2:7)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이 감격스러운 말씀의 기적입니다.
야, 지금 내 귀에 설교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