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해발(老子解跋). 소자유(蘇子由)가 제(題)하다.
내 나이 40하고 두 살에 균주(筠州)에 적거(謫居)하였다. 균주는 비록 작은 고을이나 그러나 옛적 선찰(禪刹, 절)이 많아서 사방에 유람하는 중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도(道)가 있는 전(全)이란 자가 있어서 황벽산 남쪽에 살았다.
공의 자손 중에 행위가 높고 마음이 통한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나를 따라 놀았다. 일찍이 나와 같이 도(道)를 이야기하였으니, 나는 그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그대가 이야기하는 말은, 나는 유서(儒書)에서 이미 얻었다.”
고하니, 전(全)이 말하기를,
“이는 불법(佛法)인데, 유자(儒者)가 어떻게 스스로 얻었는가!”
고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내가 외람되게 유자(儒者)가 없는 곳에서 도를 들었겠는가! 어찌 고생하여 얻은 것을 억지를 써서 속이겠는가! 돌아보면 진실한 것이 있는데, 그러나 세상에서는 알지 못할 뿐이다.”
고하니, 전(全)이 말하기를,
“유가(儒家)와 묵가(墨家)는 서로 통하지 않으니, 호인(胡人, 호로(胡虜))과 한인(漢人)이 서로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그대들 또한 어찌 알겠는가!”
고하니, 전(全)이 말하기를,
“시험적으로 나를 위하여 그 대략을 말하라.”
고하니, 내가 말하기를,
“공자의 손자에 자사(子思)가 있으니, 자사(子思)의 책에 중용(中庸)이 있는데, 중용의 책에서 말하기를,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발(發)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말하고, 발(發)해서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중(中, 딱 들어맞는 것을 이름)이라는 것은 천하의 커다란 근본이고 화(和)라고 하는 것은 천하에 두루 통하는 도이니, 중화(中和)에 이르면 천지는 자리를 잡고 만물은 자란다.”
고하였으니, 이는 불법이 아니니, 어찌 말한 바가 다름을 돌아볼 뿐이겠는가!“
고하니, 전(全)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하는가!”
고하니, 내가 말하기를,
“육조(六祖, 혜능(慧能)을 말함)의 말씀에 ‘착함도 생각하지 말고 악함도 생각하지 말라’”
적거(謫居): 귀양살이를 하고 있음.
유가(儒家): 공자의 학설과 학풍 따위를 신봉하고 연구하는 학자나 학파.
묵가(墨家): 중국 춘추 전국 시대 때 노나라의 묵자(墨子)의 사상을 받들고 실천하던 제자백가의 한 파. 절대적인 천명에 따라 겸애(兼愛)와 흥리(興利)에 노력하여 근검할 것을 주장하고, 음악ㆍ전쟁에 반대하였으며 영혼과 귀신의 실재를 역설하여 종교적인 색채를 띠기도 하였다.
자사(子思): 중국 전국 시대 노나라의 유학자(B.C.483?~B.C.402?). 공자의 손자로, 이름은 급(伋). 증자의 제자이다. 성(誠)을 천지와 자연의 법칙으로 삼고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철학을 제창하였다. 저서에 ≪중용≫이 있다.
고하였으니, 바야흐로 이런 때를 이른 것이니, 누가 이를 그대에게 본래의 면목이라고 하였는가! 육조(六祖) 이래로 이 말을 가지고 깨달음에 들어간 자가 태반이니, 말한 바
“착함도 생각하지 말고 악함도 생각하지 말라”
고한 것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발하지 않은 상태이니, 대체로 말해서 중(中)이라고 하는 것은 불성(佛性)의 다른 이름이고, 그리고 화(和)라고 하는 것은 육도만행(六度萬行)의 모든 과목이며, 치중(致中)은 지극한 화(和)이니, 천지의 만물이 그 사이에서 생(生)한다. 이것이 불법이 아니면 어디에 해당하겠는가!
전(全)이 놀라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나는 처음에는 알지 못하였다. 오늘 이후에 처음으로 아니, 유불(儒彿)이 하나의 법이다.”
고하니,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천하에는 진실로 두 개의 도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다르니,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사이에는 예법이 아니면 어지러워지고, 예법을 알되 도를 알지 못하면 세상의 속유(俗儒)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산림에 살면서 그 사이에 흐르는 시냇물을 마시면서 지극한 도(道)에 마음을 두는 것이니, 비록 사람이 천사(天師)가 되었다 해도 옳다 하겠는가! 그러므로 이것으로 세상을 다스리면 어지러워지는 것이니, 옛적 성인(聖人)께서 마음을 도(道) 행함에 두고 법을 훼손하지 않은 뒤에야 옳은 것이다.”
고하니, 전(全)이 예의를 갖추고 말하기를,
“이것은 지극한 논리이다.”
고하였으니, 이 때에 나는 바야흐로 《노자(老子)》를 해석하였으니, 매양 1장이 나오면 문득 전(全)에게 보였으니, 전(全)이 문득 감탄하여 말하기를,
“모두 불설(佛說)이다.”
고하였다. 나는 균주에 산 지 5년에 북쪽으로 돌아갔고, 전(全)은 오래지 않아서 서거하였고, 그 뒤로 20여 년이 되었다.
대체로 말해서 노자해(老子解) 또한 당시에 간정(刊定)한 바 있는데, 불법(佛法)으로 더불어 합치하지 않음이 있지 않되, 사람들과는 더불어 말할 수가 없으니, 다시 전(全)을 보면 보일 것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노자(老子)》의 말미에 썼다.
대관(大觀, 1108) 2년 12월 10일 자유(子由)는 제(題)하였다.
내가 옛적에 남쪽 해강(海康)으로 이사하고 자첨(子瞻, 소동파) 형님과 같이 등주(藤州)에서 해후(邂逅)하였고, 서로 이야기한지 10여일에 말이 평생 동안 옛적에 학문을 공부한 것에 미치니,
육도만행(六度萬行): 이는 보살이 열반에 이르기 위해 실천해야 할 여섯 가지 덕목인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정려(靜慮), 지혜(智慧)와 일체의 행법(行法)을 이른다.
천사(天師): 천사는 옛날 도술이 있는 사람에 대한 존칭이다.
간정(刊定): 쓸데없는 글자를 깎아내고 잘못을 바로 고침.
자첨(子瞻)이 나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지은 《시전(詩傳)》⸳《춘추전(春秋傳)》⸳《고사(古史)》 등 세 책은 모두 고인(古人)을 다룸이 지극하지 않고, 오직 《노자(老子)》를 해석한 것은 차이가 나서 전편이 지극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해강(海康)에 이르러서 한가히 살면서 할 일이 없어서 대체로 쓴 책은 개정(改定)한 것이 많다.”
고하였다. 이에 다시 《노자(老子)》의 책을 수록하여 자첨(子瞻)에게 부쳤다. 이후에 나는 천자의 은혜를 입고 북쪽으로 돌아갔고, 자첨(子瞻)은 비릉(毗陵)에 이르러서 병에 들어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오늘 10여년에 미쳐서 마침 이 책이 자첨(子瞻)에게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화(政和) 원년(1111) 겨울에 조카 매(邁) 등이 엮은 책을 얻었으니, 선공(先公, 동파)이 직접 쓴 그 첫 번에,
“어제 자유(子由)가 《노자신서(老子新解)를 보내서 읽기를 다하지 않았는데, 책이 떨어져서 탄식하였고, 만약 전국시대에 이 책이 있었다면 상앙(商鞅)과 한비(韓非)가 없었을 것이고, 한(漢)나라 초에 이 책이 있었다면 공자와 노자가 하나가 되었을 것이며, 진(晉)과 송(宋)나라 사이에 이 책이 있었다면 부처와 노자가 둘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하였는데, 뜻 아니게 노년에 이렇게 기특한 책을 보았고, 그런 뒤에 이렇게 쓴 글을 보았으니, 응당 자첨(子瞻)의 뜻이리라. 그러나 나는 영천(潁川)에 산지 10년 사이에 이 네 책을 다시 산개(刪改)한 곳이 많다.
생각건대 성인(聖人)의 말씀은 한 번 읽는 것으로 능히 마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매양 얻은 것이 있으면 감히 전의 설(說)을 가지고 확정하지를 않는데, 오늘 더욱 늙은 사람으로서 스스로 이것으로 만족함을 삼는다. 다시 자첨(子瞻)에게 질의하려하지만, 그러나 그의 말씀을 얻을 수가 없으니, 이에 미쳐서 눈물이 흐를 뿐이다.
12월 11일 자유(子由)가 다시 썼다.
개정(改定): 이미 정하였던 것을 고쳐 다시 정함.
상앙(商鞅): 중국 진(秦)나라의 정치가(B.C.?~B.C.338). 효공(孝公) 밑에서 법제, 전제(田制), 세제 따위를 크게 개혁하여 진 제국 성립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효공 22년(B.C.340) 상(商)에 봉함을 받았다.
한비(韓非): 전국 시대 말기의 법가(法家)(B.C.280?~B.C.233). 순자의 성악설과 노장의 무위자연설을 받아들여 법가(法家)의 학설을 대성하였다. 뒤에 진(秦)나라의 시황제에게 주목되어 독살당하였다. 저서에 ≪한비자≫ 20권이 있다.
산개(刪改): 잘못된 글귀를 지우고 고쳐서 바로잡음.
〇予年四十有二 謫居筠州 筠雖小州而多古禪刹 四方遊僧聚焉 有道全者 住黄蘖山南 公之孫也 行髙而心通 喜從予遊 甞與予譚道 予告之曰 子所譚者 予於儒書 已得之矣 全曰 此佛法也 儒者 何自得之 予曰 不然 予忝聞道儒者之所無 何苦强以誣之 顧誠有之 而世莫知耳 全曰 儒墨之不相通 如胡漢之不相諳也 子亦何由而知之 全曰 試為我言其略 予曰 孔子之孫子思 子思之書曰 中庸 中庸之言曰 喜怒哀樂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此非佛法 而何顧所從言之異耳 全曰 何以言之 予曰 六祖有言 不思善不思惡 方云是時也 孰是汝本來面目 自六祖以來人 以此言 悟入者 大半矣 所謂不思善不思惡 則喜怒哀樂之未發也 蓋中者 佛性之異名 而和者 六度萬行之總目也 致中 極和而天地萬物生于其間 此非佛法 何以當之 全驚喜曰 吾初不知也 今而後始知 儒佛一法也 予笑曰 不然 天下固無二道 而所以治人 則異 君臣父子之間 非禮法則亂 知禮法而不知道 則世之俗儒不足貴也 居山林木食澗飲 而心存至道 雖為人天師 可也 而以之治世 則亂 古之聖人 中心行道 而不毁法而後 可耳 全作禮曰 此至論也 是時 予方解老子 每出一章 輙以示全 全輒歎曰 皆佛説也 予居筠五年 而北歸 全不久 亦化去 逮今二十餘年也 凡老子解 亦時有所刋定 未有不與佛法合者 時人無可與語 思復見全而示之 故書之老子之末 大觀二年十二月十日 子由題
予昔南遷海康 與子瞻兄 邂逅于藤州 相從十餘日 語及平生舊學 子瞻謂予 子所作詩傳春秋傳古史三書 皆古人所未至 惟解老子 差若不及 予至海康 閑居無事 凡所謂書 多所更定 乃再録老子書 以寄子瞻 自是蒙恩歸北 子瞻至毗陵 得疾不起 逮今十餘年 竟不知此書于子瞻為可否也 政和元年 冬 得姪邁等所編 先公手澤 其一曰 昨日子由 寄老子新解 讀之不盡卷 廢卷而歎 使戰國有此書 則無商鞅韓非 使漢初有此書 則孔老為一 使晉宋間 有此書 則佛老不為二 不意老年 見此奇特 然後知此書 當子瞻意 然予自居潁川十年之間 于此四書 復多所刪改 以為聖人之言 非一讀所能了 故毎有所得 不敢以前説為定 今日以益老 自以是為足矣 欲復質之子瞻 而不可得言 及於此涕泗而已 十二月十一日 子由再題
● 소철[ 蘇轍 ]
요약
당송팔대가인 중국 북송 때의 문학자. 철종 때 우사간(右司諫), 상서우승(尙書右丞)을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시문 외에도 많은 고전의 주석서(注釋書)와《난성집(欒城集)》,《난성응소집(欒城應詔集)》,《시전(詩傳)》 등의 저서가 있다.
출생-사망자호국적활동분야출생지주요저서
자 자유(子由). 호 난성(欒城). 메이산현[眉山縣:四川省 남쪽에 있던 현] 출생. 소순(蘇洵)의 아들로 19세 때 형 소식(蘇軾:東坡)과 함께 진사시험에 급제, 정계로 들어갔으나,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하여 지방관리로 좌천되었다.
철종(哲宗) 때 구법당(舊法黨)이 정권을 잡자 우사간(右司諫)·상서우승(尙書右丞)을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이 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신법당에 의하여 광둥성[廣東省] 레이저우[雷州]로 귀양갔고, 사면된 후에는 허난성[河南省]의 예창(穎昌)으로 은퇴하였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며, 시문 외에도 많은 고전의 주석서(注釋書)와 《난성집(欒城集)》(84권) 《난성응소집(欒城應詔集)》 《시전(詩傳)》 《춘추집전(春秋集傳)》 《고사(古史)》 등의 저서가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소철 [蘇轍]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