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가르침이 살아 있는 곳
취푸의 공묘, 공림, 공부
고대의 외벽 위에서 휴대용 라디오가 고성을 울리고, 낡을 대로 낡은 이륜 인력거 옆에서는 한 떼의 오토바이들이 부르릉거리고, 역사적인 성채 뒤로는 텔레비전 안테나가 바다를 이루고 있으니... 오, 이 사실을 공자가 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세상 사람들이 공자라고 알고 있는 현인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사회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질서와 균형이다. 그리고 그가 만일 지금 문묘에서 살아 나온다면 자기 고향땅에서 벌어지는 청각적 시각적 분열을 결코 참지 못하리라.
중화인민공화국이 혁명가 마오쩌둥의 교조적인 공산주의에서 등을 돌리고 조심스럽게 자유화를 시도하면서, 중국의 이 위대한 정치 교사이자 도덕 교사는 르네상스를 치르고 있으며, 이 현인의 고향은 순례지로 부상했다. 수십 명의 행상들과 좌판의 음식점들이 보태는 소음은 이러한 발전의 논리적인 귀결이니, 이 경우에는 균형을 논하는 공자의 교리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모든 모순과 단절을 극복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늘 아름다움을 보여줌으로써 이것들을 서로 이어줄 수 있는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공묘를 그 현란한 주변 환경과 혼돌의 역사와 화해시켜 주는 억세면서도 부드러운 침엽수인 소나무이다.
대성문, 홍도문, 태화원기문, 이런 찬가풍의 이름들은 공자가 황제와 같은 지위를 누렸던 시절을 대변해준다. 그러나 광기에 찬 마오쩌둥의 홍위병들이 문화혁명 기간에 이 걸작 건축물들에 가한 상처들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피해를 가장 많이 당한 자는 이 건축물로 숭상하고자 했던 공자이다. 위계와 조화라는 그의 가르침이 영원한 계급혁명이라는 자신들의 교조와 맞지 않는다는 이우로 성난 젊은이들은 대부분 16~18세기에 지어진 이 사당 건물을, 심지어는 그들이 증오하는 이 학자의 유골을 찾아 곳곳을 파헤쳤다. 그러나 유골을 발견하지 못한 그들은 중국의 사상가 가운데 가장 위대하다는 공자를 기리기 위한 상(像)에 대신 화풀이를 했다.
이전에도 시기심에 찬 황제나 전위적인 공화주의자들이 그의 사상체계를 전복하려 한 적이 있긴 했지만, 공자에 대한 가장 과격한 공격은 홍위병들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기원전6세기에 탄생한 인륜의 스승의 이념은 살아남았다. 그래서 모든 이는 사회에서 정해진 자리가 있고, 가정의 화목이 나라의 조화를 의미하며, 모든 다스림은 모범을 보여야 합리화될 수 있다는 자신의 핵심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제자들을 살구나무 아래로 불러 모으는 장면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유교의 전성기였던 16세기에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난 이 대가의 후손들에게도 황제의 명에 따라 대저택이자 관청인 공부가 하사되었다. 수백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진 이 저택은 지금도 인구의 반이 공씨 성을 가진 작은 도시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취푸 시의 두 배가 넘으며, 세상에서 가장 위엄 있게 지어진 안식처인 공림에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의 76대가 안장되어 있다. 높이가 5m나 되는 선조의 무덤 주위로는 관리와 동물들의 돌 입상이 이승을 넘어서까지 공자를 보위하고 있다. 시간이 멈춰 서기라도 한 듯이 입상들 사이로는 풀이 사람 키만큼이나 무성하게 자라고, 소나무와 자작나무숲 사이로 간간이 햇살이 비치고 귀뚜라미의 합창이 사이렌 소리처럼 울려퍼진다. 공자의 가르침처럼 지금 중국에서는 귀뚜라미 전쟁이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위르겐 베트람
출처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타이핑 : 이은상
첫댓글 역시 공자묘를 지키는 이는 '하늬솔 (소나무)' 입니다. 홍위병의 광기는 정말 극에 달했지요. 목에 팻말을 걸고 거리돌림을 당하는 참상이 생각납니다. 수고햇어요. 카페지기이은상님. 참고로 밑에다 자기생각을 써놓으면 더욱 멋진 글이 될 것 같습니다.
네. 시험끝나고 세계문화유산에 대해 많이 올릴 생각인데. 그때마다 제 생각을 올리겠습니다.
기대할게요.